생각해보면 기고 걷고 뛰고 넘어지고 헤엄치고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오면서 한 평생 가장 많이 한 일은 아무래도 걷는 일이었다.
그렇게 오래 걸으면서도 우린 늘 넘어지고 결국 걸음을 제대로 할 수 없으면서 서서히 죽어간다.
어찌보면 살아간다는 것은 걸어간다는 말의 동의어쯤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걷는 것은 같지만 어디를 어떻게 무엇을 향해 걷느냐에 따라 의미는 확연히 달라진다.
영화 「하늘은 걷는 남자」는 높은 건물을 보면 줄을 매고 줄타기를 하고 싶은 한 프랑스 남자(조셉 고든 레빗이 실존 인물인 ‘펠리페 페팃’ 역을)의 실화를 포레스트 검프를 만든 감독 저메키스가 그리고 있다.
‘펠리페 페팃’은 1974년 미국 쌍둥이 빌딩이 완공되기 바로 전, 두 건물 사이에 줄을 매고 412m 높이에서 8회를 왕복하는 기록을 세운다.
소재가 소재니만큼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당연한 긴장감을 떠나 영화가 잘 되었는지를 따져본다. 갈등구조는 약하지만 의미요소는 다양하다.
나라면 끝내 걸을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든다.
드라마 「도깨비」에서 보면 운명이 신이 인간에게 준 질문이고 삶은 우리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면, 이 영화에서는 내가 어느 길을 가느냐 하는 것이 그 대답의 비유적 형상화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일단 주인공은 남들이 안 가는 길을 간다. 그리고 그 의미를 쿠테타라 하기도 하고, 예술이라 칭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왕이면, 자신을 설레게 하는 그 높은 것, 자신으로서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도전해 보는 것에 열정을 건다.
그리고 안전장치도 없이 허공에 발을 딛는다. 안전장치가 없어야 그게 진짜라고 생각해서.
삶도 마찬가지다. 어떤 삶이든 다 삶이지만, 어떤 길을 가느냐가 자기 운명에 대한 대답이라면, 설레는 길을 가는 사람은 그런 삶을 사는 것이고, 안정된 길을 가는 사람은 안정된 삶을 살고 끝내는 것이다.
설레는 것을 좋아하면서도 끝내 그렇게 살지 못하고 쓸쓸히 죽어간 사람을 우리는 「오페라의 유령」에서 ‘크리스찬 다예’가 에릭을 버리고 라울을 따라 가는 것에서 볼 수 있다.
어떤 사람을 처음 만나서 생기는 설레임은 누구나 가질 수 있지만 자기 삶을 설레게 지속적으로 채울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타인의 설레는 삶을 보고서 영감을 얻는다.
그러나 타인으로부터 자극을 받아도 자기가 공유할 수 없다면 그림의 떡이다.
만약 내게 이런 길이 주어지면 발을 내딛고 계속 걸을 수 있을까? 우린 대답을 해야 한다
그리고 1회적인 특별한 경험도 좋지만 이런 경험 이후에 내 삶이 그 이전과 확실히 달라진 삶을 사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영화에서는 이런 점을 자세히 확인할 수 없어서 유감이었다.
이 줄타기는 뉴욕이라는 도시의 커다란 건물에 의미를 부여한다.
일반적으로 도시는 건물과 도로 등이 주다. 그런데 그런 것만으로 그 도시를 사는 사람이 행복하거나 좋은 느낌을 갖지는 못한다. 그리고 좋은 느낌의 도시는 무언가가 다르다. 그리고 이런 도시는 아름다운 자연이나 아름다운 예술이 반드시 있다.
그러나 자연은 인간이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 타고나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이 할 일은 예술과 문화로 도시에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 도시에는 이런 부분이 많이 가난하다. 그냥 아파트만 들어서면 좋은 도시인 줄 아는데, 그런 곳에서 살아가는 가슴 폭폭함을 그리고 집값으로 도시의 가치를 평가하는 천박함을 부끄러운지도 모르고 떠드는 사람들을 만나고 돌아온 날은 욕이 나올려고 한다.
조그만 골목길에서부터 의미있는 박물관을 지나 의미있는 건물들이 있다면 그 도시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행복하고 풍요로울까
물론 이 영화는 2015년에 폐허로 남은 쌍둥이 빌딩에 잊혀진 의미를 되새겨 뉴욕시민에게 위로를 주고자 영화를 만든 것으로 아는데, 막상 흥행에 실패한 것은 그 이유가 프랑스인 주인공이어서 그런지, 아니면 이런 영화가 미국인들에게 덜 감동적이어서 그런지, 아니면 원 주인공, 배역, 감독, 미국식 영화의 목소리 등 4~5개의 가면과 목소리가 겹쳐 보이면서 일치하지 않아서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이 영화는 모두가 걷지 못한 하늘을 걸은 한 사람의 특별한 한 가지 이야기를 그리고 있지만, 어찌보면 이 영화를 보는 사람들도 늘 삶에서 이와 비슷한 길 아니면 이보다 더 힘든 길을 수시로 걷곤한다. 아무런 관객도 없이, 아무런 광기도 없이...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가슴 뛰는 그 광경은 너무 좋지만, 그냥 1회적인 이벤트가 사람들에게 지속적인 감동으로 다가오지 않았는지 모른다. 특히 나이가 들수록...
어쩌면 우리는 늘 이런 위태한 길을 설렘도 없이 어쩌면 오해와 비난 속에서 가는 지도 모른다.
그래도 진실은 알겠지
그리고 어떤 길을 어떻게 걸었는지 가끔 돌이켜 생각해 본다.
쓴 술 한잔을 앞에 놓고서...
처음 발을 디딜 때 이미 마지막 도달할 곳을 아는 것이 믿음이라는 “함께하는 교회” ‘김요한’ 목사님의 말씀도 생각난다.
우리는 어떤 일을 시작할 때 얼마나 믿음을 가지고 시작할까. 사업이든 연애든 공부든... 아니 애초에 그런 믿음 없이 공부든 연애든 시작하고선 원래 영원히 가는 것은 없다고 그렇게들 당연히 말을 하는 것은 아닐까. 과연 어떨까. 본인이 이미 스스로 버린 것은 아닐까
줄에 처음 발을 디딜 때 그 마지막을 믿는 믿음. 거기에는 온갖 도와준 사람들에 대한 감사와 줄(와이어)와, 도시(환경), 관객,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감사까지도 다 들어있는 것이라고 본다.
412m 상공이든 맨 땅이든 균형이 없으면 모두 넘어지고, 한번 넘어지면 두려움은 더욱 커진다. 그런데 알까, 균형은 좌우의 균형만이 아니라 늘 두 가지 세계의 균형이라는 것을. 그것은 현실과 꿈(혹은 예술, 종교, 사랑...)의 경계를 가는 사람들만이 느끼는 우월하고 가치있는 태도라는 것을...
어느 하나를 치우고 시작하는 걸음은 이미 설레임도 의미도 사라진 걸음 아닌 걸음, 이미 죽어버린 걸음이라는 것을...
걷는다는 것은 결국 누구에게로 혹은 어디로 가느냐를 생각하게 한다. 그런데 누구를 향해 걷는 것, 바로 그 걸음이 그 사람이 되거나, 그 예술이 되거나, 그 가치가 된다.
즉 너에게로 가는 길이 너이고, 나에게로 가는 길이 나이다.
우리는 공부하는 길을 걸어왔지만 그 길이 공부였고, 행복을 향한 길을 걸어왔지만 그 길이 행복이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향햔 그 길에 그 사람이 있다. 그래서 그 사람이 그 길이다.
나는 지금 걷고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