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년 첫 파병 때 ‘자유의 십자군’ 이라고 선전을 했지만 교대 병력이 들어가는 1966년부터는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파월을 독려하기 위해 돈 이야기가 강조되었다. 부대 내에는 “월남에 가면 월급 얼마 준다.”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돌았고, 가지 않으려는 병사들에게는 “막걸리를 사 먹이면서 ‘월남에 가면 돈 번다.’라면서 독려를 하기도 했다. 실제로 위로부터 조장된 파월 유인책이 효과를 발휘하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베트남에서 무사히 귀환한 파월 군인과 그들이 들려주던 이국의 풍경, 병사 개인의 경제적 필요와 당시 사회적으로 조성되었던 ‘월남 붐’은 전장에 대한 인식을 바꿔놓고 있었다.
1967년을 넘어서 1968년경이 되면, 군에서도 오히려 지원병이 늘어 “대한민국에 공짜가 어디 있어, 월남 가려면 공짜로 못 가”라는 말이 나올 정도가 되었고, 베트남에 가기 위해 상납이 이루어졌을 정도로 ‘군내의 월남 붐’이 일었다. 전장은 이미 더 이상 사지가 아닌 아직 해외라는 개념이 없었던 때에 기회의 땅이기도 했다. 당시에는 파월장병이 인기이어서 전국에서 위문품이 쇄도하고, 쏟아지는 위문편지, 펜팔이 장병들을 신나게 했다. ≪대한뉴스≫의 앞머리는 거의 파월장병의 활동에 관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사실은 병사들은 월남에 대하여 아무 것도 모르고 갔다. 전쟁의 성격에 대해서도 전혀 모르고 월남의 공산화를 저지하고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서 싸운다고만 생각했다. 월남의 민족해방전쟁이고 통일전쟁인 베트남전쟁의 성격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1971년 이후 월남에 한국군이 미군보다 더 많이 주둔하고 있었다. 한국군이 미군보다 철수가 늦었던 것은 돈 때문이었다. 당시 어려운 국가의 처지에서는 어차피 먹여살려야하는 병력을 월남에 하루라도 더 있는 것이 돈을 버는 셈인 것이었다. 실제로 73년 3월에 철수하는데 72년 9월까지 새로운 병력이 충원되었다.
월남전은 군대뿐만 아니라 파월 기술자라는 또 하나의 바퀴가 같이 굴러가는 수레와 같은 것이었다. 현지 제대를 해서 현지 회사에 취직을 해서 눌러앉은 사병들도 있었다. 물론 기술자들이나 현지 취업을 한 사병들이나 돈을 버는 것이 목적이지만 보직에 따라서는 단순히 월급만 받는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대부분 미군과 관련된 일을 하기 때문에 융통성이 많았다.
군수물자를 빼돌려서 재미를 보던 사람이 처음에는 현지 실정을 잘 몰라서 엉뚱한 물건을 잔뜩 빼돌렸다가 낭패를 본 적도 있었다. 즉 전쟁통이기 때문에 생활용품이 필요한 것인데 당장 필요가 없는 고가품을 빼돌렸다가 처분을 못해서 낭패를 보는 것이다. 보급품에는 책걸상을 비롯 침대, 이불, 담요, 식기 등 식품과 소모품들을 제외한 온갖 잡다한 것들이 다 포함되어 있었다. 전쟁 중이었기에 언제 어디로 피난을 떠나야 할지 알 수 없는 월남인들에게 주로 필요로 하는 품목은 1인용 모기장, 모기약, 홑이불로 쓸 수 있는 침대 시트 등 어떻게 보면 시시한 것들이었다.
다음은 한 파월기술자의 경험이다.
보급창에서 짐을 싣는 동안 기다리는데 옆에 쌓여 있는 것이 눈에 띄어서 관리하는 미군에게 뭐냐고 물었더니 농담으로 "왜 좀 실어 줄까? 미싱인데."라고 했다. 박스 하나를 뜯어보았더니 '싱거'표 미싱을 여러 대씩 들어있었지만 월남에서는 인기가 없으리란 걸 짐작했다. 왜냐하면 피난 다닐 때 그 무거운 재봉기를 들고 다닐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국에 가져가면 돈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개만 실어 줄래?" 내가 부탁하자마자 미군은 그걸 처분하지 못해 안달이라도 났었던 사람처럼 여러 상자를 차에다 올려 주었다. 보급창을 빠져나온 나는 곧바로 부두로 향했다. 부두에 한국 LST가 정박해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걸 실어드릴 테니까 가져가서 알아서 처분하시고 돈이 되면 얼마를 나눠주쇼."
나는 함장을 만나 단도직입적으로 찔러 보았다. 처음에는 딴 사람한테 부탁하라고 고개를 가로젓다가 한 번만 해 보라고 강권하자 마지못해 응낙을 했다. 나는 트럭에 실려 있는 박스를 배에다 부려 놓았다.
석 달 정도 지나자 그 함정이 다시 돌아왔다. 한국까지 다녀오려면 그 정도 걸린다는 얘기를 들은 바 있어 나는 그 때를 기다렸다가 부두로 찾아갔다. 배에 오르자 상자들이 눈에 띄었다. 석 달 전에 실었던 미싱이 틀림없었다.
"아니, 왜 도로 가져왔습니까?"
"부산에 가보니까 상륙할 방법이 있어야지요. 아무 서류가 없으니까 세관원도 어쩔 수 없더라구요. 돈도 돈이지만 미싱 한 대가 아쉬운 게 우리 나라 실정 아닙니까? 공업용이니까 마산 공단에 갖다 주면 그걸로 엄청난 외화를 벌 수도 있어서 사정을 해 보았는데 끝까지 안 된다는 거예요."
선장은 돈벌이보다는 애국심 때문에 미싱이 더 아까운 모양이었다.
"그냥 버리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당신이 날 의심할 테니 할 수 없이 다시 싣고 왔지요. 그런데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다시 싣고 갈 수도 없고."
매우 양심적인 사람이었다. 나는 선장을 괜히 부대 물건 도둑질에 끌어들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장에게 미안했다. 미싱을 한국에서 못 내린 것이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선장과 나는 머리를 맞대고 미싱 처리 방법을 찾았다. 보급창으로 되돌려 줄 수도 없었다. 우리는 궁리 끝에 바다 속에 처넣기로 했다. 그 날 저녁 선장과 나는 땀을 흘려가며 미싱 수십 대를 캄란만 바닷물 속에다 밀어 넣었다.
한 번은 자동차 타이어가 많이 쌓여 있어서 싣고 나온 적이 있었는데 월남에서는 '천하에 쓸모 없는 물건‘이어서 남몰래 숲 속에 버리느라고 애만 먹기도 했다. 그리고 나서 언젠가 인근 지역을 지나다 보니 돼지우리 앞에 타이어를 서로 묶어서 담을 쌓아 놓고 그 속에 돼지를 기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