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시대, 슬픈 운명의 어린 임금이 심고 가꾼 ‘왕의 나무’
세월 흐르면 생로병사를 겪어내며 제 몸 안에 나이듦의 자취를 쌓아가는 건 사람이나 짐승이나 마찬가지다. 바위처럼 말 없이 살아가며 나이테를 덧씌워가는 나무는 더 그렇다.
줄기 껍질에 세월의 풍진을 쌓아가는 느티나무. 충북 괴산 오가리.
● 제 몸 안에 사람의 향기를 새겨넣는 나무
나무의 몸 안에 새겨진 나이테를 면밀히 분석하면, 기록이 흔치 않은 오래 전의 기후 변화 상황은 물론이고, 이에 따른 인류의 흥망성쇠까지 짚어볼 수 있다. 그런 까닭에 나이테를 연구하는 고유 학문에 대한 관심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우리 말로 연륜연대학(年輪年代學, dendrochronology, 혹은 Tree ring dating)이라고도 부르는 이 분야의 연구 성과는 기록이 많이 남지 않은 오래 전의 과거 역사를 연구하는 데에 결정적인 실마리를 제공하기도 한다.
나이테만 그런 건 아니다. 특히 자연과 더불어 살아온 농경문화권 민족들의 살림살이를 짚어보는 데에 나무는 매우 요긴한 매개물이 된다. 자연의 힘에 기대어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마을 중심이나 어귀의 큰 나무를 중심으로 문화를 형성하게 마련이다. 따라서, 나무를 둘러싸고 이어지는 이야기들에는 사람살이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는다.
결국 오래 된 나무를 바라보는 건, 나무가 제 몸 속 깊은 곳에 감추어둔 사람살이의 흔적을 들춰내는 일과 다름 없는 일이다. 나무가 일일이 옛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건 아니다. 그 이야기를 끄집어 내고 그 의미를 짚어내야 하는 건 여전히 나무 곁에서 살아가는 지금 사람들의 몫이다.
기록 문헌이 그리 넉넉지 않은 우리나라의 역사를 돌아볼 때에는 뜻밖에도 나무를 통해 전해오는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역사의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는 경우가 있다. 나무를 심은 사람을 정확히 전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해인사 일주문 오르는 길 한켠에서 만나게 되는 ‘왕의 나무’ 고사목.
● 열세 살에 왕위에 오른 어린 임금의 슬픈 운명
경남 합천 가야산의 대표적인 산사, 해인사에도 1천2백 년 전에 나무를 심은 사람이 기억되는 나무가 있다. 지금은 생명을 잃은 고사목이라는 게 아쉽기는 하지만, 그 안에 새겨진 사람살이의 흔적 만큼은 여전히 살아 남았다.
나무가 이 자리에 심어진 것은 신라 애장왕(哀莊王) 때다. 애장왕은 서기 788년에 태어나 800년에 13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라, 10년 간 신라의 조정을 다스렸던 제40대 임금이다. 재위 기간에 일본과의 우호를 증진한 공로가 높았다고 평가되는 애장왕은 태종 무열왕과 문무왕의 묘당(廟堂)을 세우고, 신라를 지켜낸 선왕의 뜻을 이어받으려 애썼다. 어린 나이에 즉위한 그는 숙부 김언승(金彦昇)의 섭정으로 어렵사리 왕위를 유지했는데, 나중에는 그를 돌봐주었던 숙부의 반란으로 시해되는 얄궂은 운명을 맞게 됐다.
왕위에 오른 어린 임금은 관례에 따라 혼례를 치렀는데, 그가 맞이한 왕후는 얼마 가지 않아 알 수 없는 병에 걸렸다. 임금은 좋은 약을 구해서 왕후를 치료하려 했지만, 차도를 보이지 않았다. 마침내 어린 애장왕은 불가의 힘을 기대려 했다.
당시 합천 지역에는 법력이 높기로 유명했던 순응(順應)과 이정(利貞)이라는 두 스님이 있었다. 임금은 가야산에서 용맹정진 중이던 두 스님을 몸소 찾아가 왕후의 병을 낫게 해 달라고 간청했고, 두 스님은 임금의 청을 받아들여 왕후의 병을 낫게 할 기도에 전념했다.
1천2백 년 전 신라 애장왕이 해인사를 지은 뒤, 손수 심은 해인사 느티나무 고사목.
● 왕후의 병을 낫게한 보답으로 왕이 손수 심어
얼마 뒤, 두 스님이 올린 간절한 기도의 힘으로 왕후의 병은 씻은 듯이 나았다. 이를 몹시 기뻐한 어린 임금은 순응과 이정 스님에게 보은의 사례로, 가야산 자락에 큰 절을 지으라고 했다.
절이 다 지어지자 임금은 절의 이름을 ‘해인사’라 지었다. 왕후의 안위를 지켜준 절이라는 점에서 해인사는 애장왕의 각별한 애정이 담길 수밖에 없었다. 해인사를 여느 절에 앞서는 귀한 절로 키우고 싶었던 애장왕은 손수 좋은 나무를 골라 절집 주위에 심었다. 절집의 풍경을 더 풍성하게 하는 나무로 그는 느티나무를 골랐고, 절집에 드는 첫 대문인 일주문 주변에서부터 여러 그루를 심었다고 한다.
의미 있는 일을 마무리한 기념으로 왕이 나무를 심는 일이 당시로서 매우 희귀한 일은 아니었을 게다. 그러나 왕후의 병을 낫게 해 준 스님에 대한 보답으로 절을 짓고, 그 주위에 왕이 손수 심은 ‘왕의 나무’라는 점에서 해인사의 느티나무들은 각별한 의미를 가진다.
무려 1천2백 년 전의 일이다. 그때 임금이 심었던 느티나무 가운데 아직까지 살아있는 나무는 한 그루도 없다. 그만큼 세월의 풍진이 모질고 사나웠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다행히 임금의 이야기를 또렷이 담고 있는 흔적은 남았다. 일주문에서 천왕문으로 오르다 보면 오른 쪽에 서있는 우람한 둥치의 고사목이 그것이다. 바로 임금이 손수 심고 애지중지했던 느티나무다. 생명을 잃고 부러진 줄기만 남았지만, 그 품 안에는 임금의 손길과 세월의 흐름을 그대로 담겼다.
사람이 떠나도 나무는 그 자리에 웅크리고 앉아 오랫동안 사람의 향기를 전해준다.
● 사람보다 오래 사람의 향기를 전해 줘
오래 전에 죽은 나무여서 줄기는 말랐지만, 크기는 주변의 살아있는 여느 나무도 따를 수 없을 만큼 융융하다. 가히 ‘왕의 나무’라 할 만한 멋을 갖춘 나무다. 부러지고 남은 둥치의 줄기 둘레는 5미터를 훨씬 넘고, 높이도 7미터 가까이 되는 엄청난 크기다. 지금처럼 죽기 전에 수백 만 장의 잎사귀를 달고 무성했을 때의 아름다움은 능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임금이 몸소 심은 나무라는 사연 탓인지, 나무는 죽어서도 임금의 기품을 갖추고 의젓하게 오가는 나그네들을 맞이한다.
절집 사람들은 나무 앞에 나무의 유래를 알리는 안내판을 세웠다. 고사목이 된 ‘왕의 나무’의 위용은 지나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저절로 멈추게 할 정도로 도드라진다. 사람들은 나무 앞의 안내판에 새겨놓은 나무의 유래를 살펴보고, 죽어서도 위엄을 잃지 않는 ‘왕의 나무’에 감탄사를 내놓곤 한다.
해인사 일주문 앞 고사목은 죽었지만, 엄연히 임금의 흔적과 기품을 잃지 않은 명실상부한 ‘왕의 나무’다. 나무 앞에 서서 가만가만 나무 줄기 안에 들어있을 세월의 흐름을 마주하면 그 안에 깃든 1천2백 년 전 어린 임금과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향기가 서서히 살아나올 듯하다.
사람이 마을을 이루기 전에 나무는 언제나 그 자리에 먼저 있었다. 그리고 나무와 더불어 살던 사람들이 속절없이 사람의 마을을 떠나도 나무는 남아 사람의 향기를 전한다. 한 그루의 고사목에 뚜렷이 남아있는 어린 임금의 슬픈 운명은 그렇게 앞으로도 오랫동안 나무를 바라보는 많은 사람들에게 절절이 풀어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