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은 파평윤씨와 청송심씨 가문의 분쟁이야기를 소개 드립니다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 산 4-1에는 고려의 명장 윤관장군의 묘가 있다.
윤관장군은 본관은 파평이요,시호는 문숙공이시며 파평윤씨 시조되는 윤신달의 5세손이다.
장군은 고려 문종때 문과급제하였으며 예종때 별무반을 창설하여 17만 대군을 이끌고 여진을 정벌하여
동북9성을 개척한 고려 명장 이시다.
윤관장군의 묘역은 홍살문,영정을 모신 여충사,묘비,상석,문인석,무인석,석마,석호,곡장(曲墻)으로 꾸며져 있어
왕릉만큼이나 규모가 크고 웅장하게 조성되어 있다.
특이하게 묘역에는 전마총과 교자총이 있는데 전마총은 윤관장군이 전장터에 타고다니던 말의 무덤이고,
교자총은 임금으로부터 하사받은 교자(가마)를 사후에부장한 것이라 한다.
묘터는 조선8대 명당 이라고 하니 풍수에 대해 문외한 일지라도 명당임을 느낀다.
그래서 일까 윤관장군의 묘역은 산송(묘지에 관한 송사)으로 더욱 유명 하다고 하니
파평윤씨 청송심씨 화해기념비가 그것을 말해준다.
윤관장군의 무덤은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봉분이 유실되고 소재가 확인되지 않으면서 실전을 하게된다.
이런 까닭으로 조선 인조때에 영의정을 지낸 청송심씨 심지원 가문의 묘소가 이곳에 만들어 지고
특히나 심지원의 묘는 윤관장군의 묘 바로 뒤에 자리잡게 되면서 파평윤씨와 청송심씨 가문의
400년간 이나 계속 되는 산송의 씨앗이 된다.
조선 영조 임금의 중재에도 해결되지 않았던 윤.심 문중의 분쟁은 2005년 전경찰청장 강민창의 중재로
윤씨문중에서 2500평의 땅을 제공하고 심씨문중은 윤씨 문중산에 있는 묘지 19기를 이장하기로 합의,
2007년 김문수 경기도지사의 이장허가를 얻음으로써 긴 세월의 반목과 갈등에 종지부를 찍고 화해하게 된다.
조상의 음덕으로 발복하고자 하는 뿌리깊은 유교사상의 한 단면이라고나 할까... 씁쓸함을 느낀다.
파주에는 그외에도 율곡이이와 그 가족묘(아버지 이원수,신사임당,정비,계비,누나등)로 이루어진 자운서원,
그리고 조선초기의 명재상이며 청백리인 방촌 황희 정승묘등 역사를 배우는데 도움되는 곳이 많다
수도권에 살고 계시는 분들은 휴일 나들이겸 파주를 한번 둘러 보는것도 좋지않을까 생각하면서
디카라는 기계를 가지고 있지않아 아쉽게도 자료를 올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파주에서 癡叔堂 拜書
< 분수리 여충사 내에 설치되어 있는 화해기념비 전면>
< 분수리 여충사 내에 설치되어 있는 화해기념비 측면>
400년간 윤.심 갈등의 해소를 하기 위하여 파평윤씨 대종회장 윤정원과 청송심씨 대종회장 심명구는 전 경찰청장 강민창의 중재로 국민화합 차원에서 그간의 갈등을 해소 하기로 하고 윤문에서 2500평 묘지 땅을 증여하고 심문에서는 윤문산에 있는 19기의 묘를 이장하기로 2005년 8월5일 합의하여 130만 양 문중에 공포하였다 2006년4월11일경 KBS TV 일간신문에 “왕도 해결 못한 400년 윤.심 갈등해소”라는 제목으로 크게 보도 되어 전 국민의 칭송이 잦았고 윤.심문중에서는 매우 기쁜 마음에 여충사 주변 정화 문제를 검토 하고 있던중 청송심씨 측에서 이장 허가 신청을 경기도에 냈는데 2006년4월21일 경기도 손지사로부터 불허 처분 통지를 받고 2006년6월경 김문수지사의 도움을 받아 이장 재 신청중 2007년2월20일 윤정원회장 임기로 파평윤씨 대종회장 윤철병이 취임하여 재심 신청 진행에 양 대종회장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2007년11월2일 김문수 경기지사는 재심 신청 결재와 이장 허가를 하였다 이에 전 국민은 환영의 박수를 보내고 있다 윤정원 심명구 윤철병의 그간의 업적은 역사에 기리 남을 것이며 130만 양 문중은 서로 존경하고 화합하여 이 영광을 기리 기리 후손들에게 남기게 되었다
2008년 10월 20일 파평윤씨 대종회
회장 윤철병 |
파평윤씨 |
화 해 기 념 비 에 즘 해 |
청송심씨 |
문숙공께서 예종6년(서기1111) 서거하시니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 바로 현 위치에 禮葬(예장)되신 것이다. 藏風得水(장풍득수)의 형국으로 주산(主山), 안산(案山), 청룡(靑龍), 백호(白虎) 형상이 고루 갖추어진 명당인지라 예장되시기에 매우 적절한 곳이었다. 그런데 문숙공(文肅公)산소를 실전하게 된 까닭은 무엇인가. 까닭의 시초는 조선왕조 10대 연산군(1494~1506)때부터 양주, 고양 파주목 일대가 국왕의 전용 유흥소나 사냥터로 지정되어 백성들은 다 구역 밖으로 쫒겨나고 또 그 안으로 들어갈 수 가 없게 된 것이다. 이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의 전란으로 인해 종가(宗家) 후손(後孫)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문숙공산소를 실전하게 되었다. 그 상이에 晩沙公 沈之源은 광해군(光海君) 6년(1614) 조부인 沈宗沈의 묘소를 조묘하고 인조(仁祖) 8년(1630) 아버지인 沈偰묘를 조성한 것이다. 이어 현종 3년(1672) 晩沙公이 현 위치에 이장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1614년을 기점으로 하여 윤.심문간 묘지 다툼은 400여년이나 계속 된 것이다. 그런데 윤문의 자손들은 실전된 문숙공묘소 찾기 열기가 고조되어 영조 23년(1747) 윤동규公이 단서를 잡으니 문숙공묘를 되찾기 비롯하였다.
영조 39년(1763) 누군가에 의해 훼손되고 묻혀진 문숙공 관련 빗돌 조각을 윤문측이 찾아내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영조는 同山所하되 宗山은 윤문측 소유로 명하며 문숙공산소에 致祭한 것이다. 그러나 불복의 역사는 지속되어 윤희복 僉知公은 同山所를 끝내 반대 극간하다가 왕에 대한 불경죄로 곤장을 맞고 장독으로 죽기에 이르렀다. 이 후 온갖 분쟁과 갈등은 거듭되었으나 해결의 실마리는 잡히지 않다가 2005년 8월 4일 양 문중은 갈등을 해소키로 합의하고 문숙공 묘역내 심문측의 묘 19기를 심문측 산쪽에 이장하기로 파평윤씨대종회장 윤정원과 청송심씨대종회장 심명구의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양 문중간의 합의는 이루어졌으나 두 문중은 문화재로 등록되어 있어 문화재위원회의 승인이 필요한바 경기도 문화재위원회는 이장을 거부한 상태로 3년 가까이 세월이 지났다. 그 이유는 문화재보호법에 매장된 문화재는 원칙적으로 발굴이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전임 회장으로부터 이 사건을 인수받은 윤철병 신임 대종회장은 운영위원 등 임원들을 개별 접촉하며 이장의 당위성을 설득하는 등 각고의 노력 끝에 2007. 11. 2 이장하도록 최종 승인되어 후속 절차를 거쳐 2008. 4. 20부터 이장을 시작하며 2008. 6. 15 완료되었다. 이로써 지난날의 불편했던 모든 감정과 갈등은 모두 씻어 버리고 양 문중은 손잡고 화해되었음을 만 천하에 알린다.
2008년 10월 20일 파평윤씨 대종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