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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미국의 동부 전선 인식
동부 전선에 대한 미국인들의 인상이 모호하고 비정확했더라도, 전후 10년간 동부 전선에 대한 밑그림을 향상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 동부 전선에 대한 미래의 저작들이 따라가는 경향이 생겨났다. 이 경향은 동부 전선의 작전들을 독일의 눈으로 보게 했고 오직 독일의 관점밖에 없게 만드는 것이었다. 1945년에서 1958년 사이 동부 전선에 대한 영역 저작들은 죄다 독일 저자들의 책이었고 주장하는 것들의 출처는 순전 독일 자료 뿐이었다.
전쟁기를 다룬 독일의 역사 기록들은 2개의 주제로 나뉜다. 첫째 주제는 스스로를 히틀러와 나치와 무관했다고 주장해야 한다는 필요성에 의해 쓰여진 회고록들을 포함한다. 그 내용이 맞건 틀리건, 회고록의 저자들은 히틀러의 전략적, 작전술적, 전술적 실책을 비난했다. 그리하여 이런 저작들에는 변명조가 스며들어 있다. 히틀러의 국방군에서 성공을 나눈 장군들은 국방군의 실패에 대해 책임을 공유하길 거부했다. 오직 더 깊은 연구만이 이 관점의 정확함을 판단할 수 있다.
독일 입장의 최초의 영문 기록은 지금은 고전이 된 하인츠 구데리안의 <기계화부대장>이다.1 구데리안의 저서는 구데리안이 1941년에 기갑 집단 사령관이었고 1944년에 육군 참모 총장이었을 때의 전략적, 작전술적 결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독일 장군들에 대한 히틀러의 지도력에 대해 미래의 평가를 담고 있다. 구데리안은 독일군의 패배와 참모본부의 붕괴의 책임을 원칙적으로 히틀러에게 돌리고 있다.2 구데리안에 따르면 육군 참모본부는 히틀러에게 이용당했고 악용당했다는 것이다. 구데리안의 메시지는 폴란드 침공을 다룬 장의 제목인 "재앙의 시작" 에서 나타난다. 가장 중요한 저작임에도, 구데리안의 저작에는 소련군의 작전술적 자료를 담고 있지 않다.
전후 가장 영향을 끼친 독일의 전쟁 비평은 프리드리히 폰 멜렌틴의 <기갑 전투>로 1956년에 영문판이 발간되었다.3 멜렌틴의 저작은 작전술적/전술적 자료로서 큰 장점을 가졌고 구데리안의 목소리를 통해 히틀러를 비판하며 히틀러의 잘못된 영향이 전술적 작전에 악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 너머로는 멜렌틴의 저작이 교훈적으로 작전을 분석하는 것임을 엿볼 수 있다. 책 전체에 걸쳐 멜렌틴은 소련 장교들과 병사들을 독일의 군사 원칙에 따라 평가하고 있는데 대부분 현대 소련군에 대한 "진실된" 평가에 부합하고 있다. 지금까지 멜렌틴은 이러한 평가를 만들어 왔다. 러시아 군인들은 완고한 방어전을 치르며 공세에서 유연성이 없고 예측하지 못한 상황에 부딫치면 쉽게 무너지지만 야간전과 침투에 뛰어나며 한번 교두보를 만들면 그 교두보를 무너트리기 어렵고 인명을 경시하는 전술을 사용한다는 것이다.4 구데리안의 저작이 그랬듯이, 멜렌틴의 붉은 군대와의 전투 경험은 1944년 봄으로 끝났으며 소련군에 대한 인상은 원칙적으로 독일이 승리하던 시기에 맞춰져 있다.
멜렌틴의 책은 기록 자료로 교차검증을 거치지 않았고 전술 사례를 작전술적 문맥 하에서 기술하지 않았다. 구데리안의 저작과 마찬가지로 상대한 소련군이 어떤 부대였는지에 대한 기술은 없다. <기갑 전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대목인 제6군이 스탈린그라드에서 포위당한 직후 제48 기갑 군단의 치르 강 작전은 이 책의 단점을 보여주는 한 예가 된다.5 이 대목에서 멜렌틴은 제1 전차 군단을 첫째로, 제5 기계화 군단을 둘째로 투입한 소련 제5 전차군을 상대로 한 독일 제48 기갑 군단의 훌륭한 작전을 기술했다. 1942년 12월 7~8일에 헤르만 발크의 제11 기갑 사단은 제79호 집단 농장에서 제1 전차 군단의 돌파를 막고 19일에 제1 전차 군단을 격퇴하고는 후속한 제5 기계화 군단을 상대했다. 제11 기갑 사단의 전술적 상황에 대한 멜렌틴의 생생한 기록에도 불구하고, 멜렌틴은 전술적 성공 뒤에 벌어지고 있던 작전술적 재앙에 대해 기술하는 걸 회피했다. 사실 소련군 제5 전차군의 목적은 제48 기갑 군단의 신경을 끄는 것이었고 그 동안 북서쪽에서는 소련군이 이탈리아 제8군을 무너트리고 홀리트 분견군에 대타격을 입히고 있었다. 게다가 멜렌틴은 소련 제1 전차 군단이 11월 19일부터 지속적으로 작전을 계속해 왔고 치르 강으로의 진격이 시작됐을 때는 그 전력이 많이 소진된 상태였다는 것을 언급하지 않았다. (이는 몰랐을 가능성이 크다.) 6
비슷한 오류들이 멜렌틴의 저작 곳곳에 나타나는데 대부분 소련군에 대한 지식과 전력에 대한 고찰의 부족 때문이었다.7
멜렌틴의 저작만큼 중요하고 더 고차원의 수준의 관점으로 다룬 책으로는 에리히 폰 만슈타인의 <잃어버린 승리>가 있다.8 작전술의 대가가 쓴 이 중요한 책은 1941년에서 1944년 초까지의 전략적, 작전술적 상황을 조망한다. 만슈타인은 끝내 그의 남부 집단군 사령관직 해임으로 끝난 히틀러의 적극적인 전쟁 간섭을 비판했다. 만슈타인의 작전 자료는 상대했던 소련군에 대한 자료가 거의 없더라도 정확했으며 대적하는 소련군과 독일군의 전력 비율은 라인하르트 겔렌의 독일 동방군 정보부 자료들과 교차검증하며 보여줬다.9
이 3개의 회고록은 제2차 세계대전사를 1950년대 내내 지배했고 지금도 미공개 사료들이 공개되어 회고록들에 대한 교차검증과 사료비판을 가하는 가운데에도 여전히 권위를 가지고 있다. 이 시기 다른 영어 저작들은 개인적인 전투나 작전 경험만을 다룬 것이었다.10 그 목적에 부합하건 아니건, 이러한 자료들은 냉전기 미국인들에게 소련군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심어 주었다. 주목할 만하게도 소수나마 몇몇 독일 지휘관들은 독일군의 행운이 사라져가고 잇던 회고록을 써냈다. (예를 들어 고르하르트 하인리치 상급대장의 회고록) 이 저작들은 아직 영역되지 못했다.
전후 저작의 두 번째 종류는 동부 전선 작전에 참여한 독일 장교들의 기록과 기억을 동원해 연구한 책자들이다. 전후에 탄생한 미 국방부 역사국은 몇년간 전쟁 경험, 전훈을 종합하고 참전자들을 모아 전쟁사 서술을 하는 걸 감독했다. 모든 종류의 작전에 대한 수백개의 필사본이 이 작업에 동원되었다. 대부분 기억에 의존하고 교차검증을 거치지 않은 것이었다. 미 국방성은 이 종합으로 탄생한 소책자들을 40년대 말과 50년대 초에 발행에 군에 배포했다. 11
이 팜플렛들은 권마다 질 격차가 심했다. 전후 독일 관점에서 나온 것이고 작전에 참여한 소련군에 대한 정보도 없었다. 몇 개는 무척 뛰어난 자료지만 몇 개는 부정확한 자료였다. 전부 교차검증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이 자료들은 군에서 아직도 소련군의 작전술 경향 분석에 좋은 자료로 쓰이고 있다. 오직 소수의 사례만이 사료로 인용할 수준인데도 말이다.
1950년에 국방성 팜플렛은 연합군의 공수 작전을 평가한 자료를 발행했다. 팜플렛은 헬무트 라인하르트 소장의 총감독 하에 탄생해 독일과 연합군의 공수 작전 경험을 비평했다. 이 책자의 한 장은 2차 세계대전의 연합군 공수 작전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소련군 공수 작전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부족했다. 12라인하르트는 이렇게 적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소련군이 대규모 공수 작전을 실시하지 않은 것은 놀라운 일이다. (중략) 소련군의 전쟁기 공수 작전은 소규모 수준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중략) 파르티잔 활동을 돕기 위한 공수 지원은 전략, 전술적으로 어떠한 영향도 주지 못했다."13
얼마 되지 않아 라인하르트는 자신의 오류를 발견했고 다시 연구진을 모아 모스크바 반격전에서의 소련군 공수 작전과 1943년 드네프르 강 공수 작전을 자세히 기술은 개정판을 만들었다. 최근 역사국은 소련군 공수 작전에 대한 오류가 많은 팜플렛을 재발행했고 라인하르트의 개정판은 여전히 미출간 상태다.
국방성 팜플렛 중 <독일군의 소련군 돌파 시도에 대한 방어전술>도 비슷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14 이 장에서는 1943년 8월 5~24일 동안 제4차 하리코프 공방전에서 독일군의 지연 작전을 다루고 있는데 독일군이 하리코프에서 8월 18일에 철수했다고 쓰여 있다. 사실 독일군의 철수 날짜는 8월 23일이었다.15이런 오류들이 정확한 사실인 양 섞여있으면 자연스럽게 팜플렛 전체의 정확성을 의심할 수 밖에 없다.
이런 오류들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팜플렛이 재판되었으며 붉은 군대에 대한 1차 사료로 남아 있다. 게다가, 팜플렛은 현대 미국인이 소련군에 대해 가진 편견을 심화시키는데 일조했다.
1950년대 독일군에 의해 만들어진 저작들은 소련군의 작전 자료 부재라는 결점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다. 돌일 잡단군, 야전군, 군단, 사단 소속의 독일군들은 수요를 짐작할 수 없을 정도의 숫적 우위와 끝없는 포격 하에 행해지는 인해전술, 그리고 전쟁 말기에는 무수한 소련군 기갑 부대와 대적했다고 주장했다. 소련군 규모에 대한 부정확한 서술에는 적 부대 각각의 작전술적 역할에 대한 고려가 전무하여 독일 저작들이 소련군에 대해 공통적으로 말하는, 상상력 없이 단순한 정면공격밖에 모르지만 막대한 물량을 가진 소련군이 뛰어난 능력과 기교 넘치는 기동을 구사하는 독일군을 이겼다는 주장을 깔아 놓았다. 소련군의 '스팀롤러'는 동유럽에 그들의 시체와 부상자를 끝없이 쌓았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독일 자료들이 전해 준 소련군에 대한 심리적 인상은 지금까지 남아 있다. 더 나아가 작전들에 대한 이러한 개관은 소련군의 규모를 제대로 알지 못하게 해 독자들에게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독일군이 항상 압도적인 수의 소련군과 대치했다고 믿게 했다. 이런 회고록들과 팜플렛들은 독일의 원사료들이 세상에 나오기 전에도 그랬고 지금까지 소련군에 대한 작전 자료의 부재를 보여준다.
1960년대, 숙련된 역사학자들은 동부 전선에 대한 저작을 쓰기 시작했다. 이 작품들은 이전의 저작들보다 나았지만 여전히 균형이 부족했다. 대부분 독일 사료를 인용하고 있지만 소련 사료를 인용하는 모습도 보였다. 몇몇 저작은 전쟁기 소련에서 직접 겪은 일을 다루고 있었다.
알겐산더 워스는 저작 <러시아에 전쟁 Russia at War>과 기타 저작들로 그의 소련 경험을 풀어냈다. 이 저작들은 적은 작전술적 자료를 담고 있지만 워스는 소련의 관점으로 러시아 사람들의 고난과 인내를 보여주며 그들이 용감하게 전쟁을 극복해 냈다고 설명했다.
앨런 클락의 동부 전선에 대한 자료인 <바르바로사 Barbarossa>는 작전술적으로 더 많은 자료를 가졌다. 그러나 이것도 소련 자료를 부족하게 담고 있다. 게다가 클락은 다른 학자들이 쉽게 받아들인 수법인 전쟁 첫 2년을 자세히 쓰고 마지막 2년은 간단히 쓰는 서술 방법을 사용했다. 사실 총 506쪽의 책 중 400쪽 이상이 전쟁 초기에 할애되어 있다. 이러한 서술은 독일 저작들에도 잘 나타나는데 그들의 패배를 히틀러의 오판으로만 몰아세움으로서 그 때의 작전들에 대해 자세히 쓸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미 육군 군사사 연구소는 이 불균형을 어느 정도 해결할 얼 짐케의 두 저작인 <모스크바에서 스탈린그라드까지 Moscow to Stalingrad>와 <스탈린그라드에서 베를린까지 Stalingrad to Berlin>을 내놓았다.17 이 저작은 유효한 자료로 학술적인 것이다.16 짐케는 1942년 11월 부터의 전쟁을 조명하고 전략과 고차원적인 작전적 관점에서 분석했다. 독일 사료에 많이 의존하고 있지만 짐케는 독일 기록 자료를 연구했고 그곳에서 소련군의 작전 자료들을 찾아냈다. 그리하여 짐케는 동부 전선에 대한 미국인들의 시각을 넓혀 주었으며 기존 자료들의 문제점들을 교정했다.
짐케와 그를 따르는 저자들은 동부 전선을 서술하며 1950년대 말부터 시작되어 1960년대에 가속화된 소련 역사학자들의 대전사 연구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 이 새로운 소련의 연구들은 나중에 더 말하겠지만 질이 천차만별이었음에도 전쟁사 연구에 새롭고 핵심적인 차원을 열었다. 대부분의 뛰어난 학자들은 소련군 연구를 흡수했다. 1970년대까지 소련측 저작들은 동부전선사를 보는 시각에 균형을 제공했다.
1970년대 초, 독일 저자인 폴 카렐17은 동부전선에 대한 2개의 책인 <히틀러, 동쪽으로 움직이다. Hitler Moves to East>와 <조각난 대지 Scored Earth>를 썼다.18 이 책들은 기사 형식의 매력으로 독일군의 작전술적 작전을 자세히 조명했고 참전 장교들에 대한 막대한 인터뷰를 실었다. 카렐의 저작은 독일 관점에 무게를 두고 있지만 소련군 사료에 대한 참고 비중은 짐케의 저작보다 많다. 카렐의 책은 그 생생함으로 독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18
카렐 식의 서술에서 더 학문적인 저작으로는 알버트 시튼의 2권의 책인 <러시아-독일 전쟁 Russo-German Conflict>와 <모스크바 전투 Battle of Moscow>로 짐케의 연구를 전술적 수준으로 분석한 것이다.20 독일 사단들의 공식 기록을 통해 시튼은 전술적 수준에서의 전쟁사 서술이라는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카렐처럼 시튼은 소련 자료의 부족 때문에 독일측 관점에서 전쟁을 보는 경향을 보였다.
존 에릭슨의 저작은 1960년대 이후 연구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에릭슨의 책들은 기존의 독일 관점 동부 전선 서술을 극복하고 소련측 관점을 대거 차용해 동부전선사를 서술했다. 그의 첫 번째 책인 <소련군 최고 사령부 Soviet High Command>는 1941년 여름의 상황을 최초로 조명했다.21 그의 뒤따른 두 책인 <스탈린그라드로 가는 길 The Road to Stalingrad>와 <베를린으로 가는 길 The Road to Berlin>은 전쟁 전체를 자세하게 기술했다. 이 책들의 원칙적인 가치는 수백개의 소련 자료에서 가치 있는 자료를 뽑아 동부 전선에 대한 상세한 기술을 했다는 것이다. 독자들은 이 책을 읽으며 동부 전선의 엄청난 크기와 범위에 압도당했다.
에릭슨의 저작은 소련 자료를 비판적으로 분석했고 독일 자료와 상충되는 자료라면 정확성을 따랐다. 에릭슨이 벌인 거대한 연구 성과는 소련 자료에서 찾은 전술적 정확성을 배제시켰다. 그리하여, 많은 경우 에릭슨의 연구 자세는 독일 측의 권위 있는 자료와 충돌을 일으켰다. 게다가 에릭슨은 독일군의 전력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을 보엿다. 이런 약간의 결점에도 불구하고 에릭슨의 성과는 독자들에게 균형잡힌 연구를 전달해 줌으로서 독자들이 동부 전선을 보는 관점을 균형 잡히게 해 줬다는 것이다. 하지만 에릭슨의 책은 너무 길고 복잡해 가독성을 심각하게 떨어트렸다. 미래의 학자들은 에릭슨의 관점과 독일 회고록, 독일 관점 저자들의 관점을 통합시켜야 할 것이다.
에릭슨을 비롯한 다른 소수의 연구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동부 전선에 대해서는 여전히 독일 관점이 지배적이다. 결국, 독일 관점이 빛어낸 결과로 미국인들은 전쟁 전체의 국면에서 동부 전선의 중요성을 무시하고 평가절하하는 선입견을 만들었다. 전후 초기에 나온 독일 관점의 자료들은 부정확함으로 덮혀 있다. 막대한 독일 자료들이 나타났지만 그 자료들을 교차검증할 소련 자료들은 나오지 않았다. 1960년대, 소련 자됴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자 독일 관점의 서술은 굳건히 자리를 지키려 했다. 독일 관점의 자료는 가끔 정확하지만 자주 변명으로 가득 차거나 히틀러에 대한 일방적인 비난으로 가득 차 있고 거의 반소 감정이 깔려 있다. 결과적으로 이런 관점은 고등학교와 대학교 교재에 들어갔고 미국의 군사 교육 기관들도 마찬가지로 받아들였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자료들이 현대 소련군을 평가하는 기본 자료가 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 대한 도전은 현대에 이르러 늘어나고 있다. 이 도전은 소련의 자료 출판 가능성에 달려 있고 베일에 가린 소련군의 작전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제공할 것이다. 그러나 소련의 자료 수용 효과가 독일 자료들을 보충하고 동부 전선 연구에 더 균형잡힌 시각을 주기 위해서는 극복해야 할 장벽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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