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신문을 보면 현기증이 난다. 깜짝깜짝 놀랄 일이 잇따라 터진다. 어제는 전 세계 신문들이 애플 컴퓨터의 창업주요 전 CEO였던 스티브 잡스의 사망기사로 도배질 했다. “가장 위대한 혁신가를 잃었다”(오바마 대통령)거나, “에디슨, 아인슈타인 같은 거인으로 기억될 것”(마이클 블룸버그 뉴욕시장)이라는 등 정치인들이 특히 호들갑이었다. 췌장암 말기였던 잡스가 조만간 세상을 뜰 거라는 건 벌써부터 예견됐었다. ‘오비추어리’(obituary, 부음기사)로 생전보다 크게 각광받은 잡스도 머지않아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진다.
하루 전 신문에는 이탈리아 교도소에서 풀려나 시애틀에 돌아온 워싱턴대학(UW) 여학생 아만다 녹스(24)가 개선장군처럼 대서특필됐다. 유학 도중 룸메이트 여학생을 남자친구와 함께 살해한 혐의로 1심에서 징역 26년을 선고받고 4년간 복역해온 녹스는 항소법원에서 뜻밖에 증거불충분으로 무죄판결을 받고 즉각 석방돼 다음날 귀국 비행기를 탔다. 거의 50세까지 콩밥을 먹을 신세였던 녹스는 일순에 운명이 바뀌어 언론 인터뷰, 자서전 출간계약 등으로 돈방석에 앉게 됐다. 그러나 ‘신데렐라’ 아만다 역시 머지않아 잊혀진다.
어지럽기는 본국신문들도 마찬가지다. 오는 26일로 예정된 서울시장 보궐선거로 후끈 달아 있다. 한나라당은 여류판사 출신인 나경원 의원을 후보로 내세웠지만 야권은 민주당 후보 아닌 ‘시민대표’ 박원순 변호사를 내세우는 이변을 연출했다. 무소속인 박변호사는 좌파진영의 대부로 불린다. 이번 보선은 군소후보가 없는, 보수와 진보의 첫 맞장 대결이자 내년 대선의 향방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 뻔하기 때문에 보수-진보 양 진영 간에 신물 나는 비방전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혼란상도 선거 후에는 자연히 잊혀진다.
잡스의 사망, 녹스의 귀환, 서울시장 보궐선거보다도 훨씬 중요하지만 신문에 무시당하고, 따라서 한인들이 오래 전에 잊어버린 게 있다. 한글날이다. 내일이 훈민정음 반포 565돌이다. 국경일이지만 공휴일이 아니어서 달력에 빨간 글씨로 표시돼 있지 않다. 자음 14자, 모음 10자 등 24자로 모든 소리를 적을 수 있다.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이며 독창적인 글로 유네스코의 세계 기록유산에도 등재돼 있다. 세계 12위 경제부국의 위상보다도, 아니 반만년 역사 자체보다도 더 큰 자랑거리일 수 있는 한글의 생일이 잊혀져 가고 있다.
세종대왕은 글을 모르는 백성들을 불쌍히 여긴 박애정신, 한자보다 우수한 우리글을 만들겠다는 주체의식과 함께 500여년 후 도래할 컴퓨터시대를 예견한 선경지명까지 있었을까? 한글의 컴퓨터 입력은 한자나 일본글자와는 비교가 안 되게 쉽고 빠르다. 한국이 오늘날 세계적 IT강국으로 부상한 것도 한글에 크게 힘입었다. 한국은 요즘 자동차와 TV만 수출하지 않고 한글도 수출한다. 인도네시아의 찌아찌아 원주민 부족은 한글을 수입해 자기네 문자로 사용하고 있다. 세계의 많은 대학들이 한글(한국어)을 수강과목으로 채택하고 있다.
그러나 그 훌륭한 한글로 표기할 한글어휘가 부족한 것은 아이러니(이것도 남의 말이다)가 아닐 수 없다. 한글문화연대가 발굴한 ‘흥사위’(경기승리 셀리브리티), ‘오르내리미’(엘리베이터), ‘그린네’(연인) 같은 순수 우리말을 더 만들어야 한다. 한글 괄시풍조도 없어져야 한다. 대통령 이름이 이명박 아닌 MB요, 김대중 아닌 DJ이다. 방송국 공식명칭도 KBS, MBC, SBS이다. ‘00동 사무소’가 아니라 ‘00동 주민센터’이다. 체계적, 과학적 글자인 한글의 덕을 톡톡히 본 컴퓨터가 오히려 한글 죽이기에 앞장선다. 인터넷 채팅방에 들어가 보면 ‘뭥미' '오나전’ 등 보지도, 듣지도 못한 말들이 판친다. 이러다가 한글은 노벨 문학상 작품을 쓰는 고급문자가 아니라 인터넷에 악성 댓글이나 쓰는 상말글자로 전락할까봐 걱정이다.
글자는 민족의 얼을 담고 있고, 고유언어를 보존, 발전시키는 기능을 담당한다. 후세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건 그 때문이다. 한글날이 공휴일이 아니어서 잊어버린다는 건 말도 안 된다. 우리에게 애플 컴퓨터보다 훨씬 귀중한 한글을 만들어준 세종대왕의 위업을 기리기 위해서라도 한글날을 길이길이 기억할 필요가 있다. 10-08-11
첫댓글 눈산님, 글을 읽고 위대하신 세종대왕을 더욱 존경하고 사랑하는 마음과 글 쓰는 이들의 책임이 막중함을 느낌니다.
봉춘님, 고맙습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부족한 글이지만 쓰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세계 각처에 한글 수출의 역군들, 이 씨애틀만해도 미국인들(한국계) ㅎㅎㅎ.
맞습니다. 한국학교에 가보면 노랑머리, 파란 눈 아이들도 있더라구요. 랑랑님, 감사합니다.
눈산님, 말씀에 절대적으로 동의합니다. 한국가서 느낀 것인데 영어로 된 간판들 영어가 판치는 언어들, 그런 점은 이북이 남한 보다 한글 쓰기는 철저하지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아잘리아님, LA 한인타운에 가보시면 서울과 반대로 간판들이 모두 한글로 돼 있지요. 한글을 사랑해서가 아니랍니다. 별로 좋은 현상은 아니지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한국의 위상이 높아지는 이유? 한글의 업적이 지구 땅끝까지 영구적이죠. 한국사람 두뇌의 우월성은 바로 한 글입니다. 만국어가 될 날도 머지 않겠지요!
'어머니를 부탁해요'도 한글로 쓴 작품이지만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됐지요. 앞으로 그런 책들이 계속 나올 거라고 믿습니다. 순영님, 감사합니다.
세종대왕께서 한글을 만들어 주셨기에 저희가 이렇게 글도 쓸 수 있는데
그 고마움을 생각하는 날보다 잊고 사는 날이 더 많습니다.
눈산님 말씀처럼 요즘 사람들이 훌륭한 우리 한글을 이상하게 쓰고 있어서 속상합니다.
후세들에게 우리 한글을 바르게 쓸 수 있도록 잘 가르쳐야 하는데요.
한글은 보면 볼수록 참 잘 만든 글자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글 자체가 노벨상을 받을만 하지요. 미숙님, 좋은 댓글 감사합니다.
깨우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 협회가 더욱 긍지와 책임감을 느낍니다.
김회장님, 칼럼 아이디어가 없어서 쩔쩔매다가 달력을 보니까 다음 날이 한글날이었어요. 그래서 어거지로 엮었지요. 한글을 더 갈고 닦을 책임은 분명히 우리들에게 있지요. 감사합니다.
한글의 정화와 발전을 위해 문인들의 노력이 절실할 때 입니다. 좋은 글 많은 독자들이 동감하리라 믿습니다.
김교수님, 졸작을 칭찬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더 열심히 쓰도록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