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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일진회 조직.
1907년 농상공부 대신
1910년 자작.
1920년 백작
배신과 사기의 배후
친일매국노로서 이완용*과 쌍벽을 이루는 송병준은 탁월한 처세술과 풍채로 미천한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부귀영화를 누린 입지전적 인물이다. 그는 스스로 의리의 협객인 양 자부하였으나, 출세나 이익을 위해서라면 은혜까지 저버리는 배신과 사기의 명수로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는 기회주의자였다. 이러한 그의 성격은 출신과 성장 배경 등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하겠다.
송병준은 한말에 현감, 군수 등을 역임하였고, 통감부가 설치된 후에는 통감부 권력을 등에 업고 농상공부대신, 내무대신 자리에 올랐다. 또한 합병 후에는 일본의 백작까지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출생과 성장 배경 등은 베일에 가려져 있어 전모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사전류에는 그의 행각과는 걸맞지 않게 단편적이고 소략하게 기술되어 있다.
그는 1857년(1858년이라고도 하나 실제는 1857년이다) 8월 20일 함경남도 장진에서 태어났다(태어난 곳도 장진이 아니라 서울의 기생 집에서 태어난 뒤 아버지가 장진으로 데려갔다 한다). 아버지는 장진군의 속사(屬吏:律學訓導)인 송문수(宋文洙)이고, 생모는 기생으로 덕산 홍씨라고 한다. 부친 송문수와 본처(제주 고씨)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으나, 너댓 명의 첩을 두었기 때문에 송병준에게는 배다른 동생이 셋이나 있었다. 송병준이 어렸을 때, 아버지 송문수는 일가를 이끌고 경상도 추풍령 부근에 내려와 정착했다. 서자로 태어난 송병준은 적모 밑에서 심하게 구박을 받으면서 자랐는데, 여덟 살 때 어머니로부터 도둑질 혐의를 받고 쫓겨나게 되었다.
이 때부터 그에게는 새로운 삶이 펼쳐진다. 집에서 쫓겨난 송병준은 동학교도(송병준은 동학 2대 교주인 최시형을 만났다고 술회하고 있으나 믿어지지 않는다)라 칭하는 일단의 도적떼에게 구출되어 3개월 가량 쫓아다니다 헤어진 후, 도둑질과 문전걸식으로 연명하였다. 하루는 참외를 훔치러 갔다가 참외밭 주인에게 들키게 되었는데, 도리어 주인이 불쌍하게 여겨 함께 살게 되었다. 얼마 후 주인이 참외를 팔러 서울로 올라갈 때 함께 가게 된 송병준은 우연히 민씨 세도가인 민태호(閔泰鎬:고종의 외숙, 민영환의 양부)의 눈에 띄어, 그의 애첩 홍씨 집에서 일하게 되었다. 후일 송병준은 이 홍씨를 자기의 생모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는 그가 자기 출신을 미화하기 위해 꾸며 낸 거짓말이었다.
타고난 처세술
태어나면서부터 남의 눈치를 보고 처신하던 송병준의 탁월한 처세술은, 그가 관계(무관직)에 발을 들여 놓을 때 민태호가 뒤를 봐주고 있었음에서도 알 수 있다. 1871년 무과에 합격하여 수문장청에 배속되었고, 1873년에는 도총문 도사, 이듬해에는 훈련원 판관 등을 역임하였다. 1876년 강화도 조약 때, 송병준은 수행원(접대요원)으로 쫓아가게 되었는데, 이 때 그 곳에서 일본측 수행원인 오쿠라 기하치로(大倉喜八郞)를 만나게 되었다.
메이지 유신 무렵에 총을 팔아서 떼돈을 번 오쿠라는 조선에 경제적 침략의 발판을 만들기 위해 분주했던 정상배로 '죽음의 상인'으로 불려진 군납업자였다. 이듬해인 1877년에 그는 송병준을 앞세워 부산에서 고리대금업과 무역업을 겸하는 부산상관을 설립하여 경영을 하였다. 송병준의 친일매국행각은 이미 이 때부터 시작되었고, 친일매국노 제1호라고 하여도 결코 지나치지 않을 행동을 서슴없이 자행했다.
1882년 임오군란 당시 성난 반일 군중에 의하여 부산의 상관이 소실될 때까지의 몇 년 동안 송병준은 상당한 축재를 하였다. 임오군란으로 친일배 송병준은 지레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일본으로 도망쳤다. 이것이 그의 첫번째 도일 매국행각이다. 임오군란 후 박영효*를 정사(正使)로 하는 대일 수신사가 일본에 파견되었는데, 이 때 송병준은 박영효의 부름을 받아 그의 수행원으로 동행·귀국하게 된다. 송병준은 이미 일본인과의 장사 경험 및 일본 체류 등으로 해서 일본 전문가가 되어 있었고, 이를 밑천으로 박영효 등의 일본 방문에 자문역을 맡아 연줄을 대고 있었던 것이다.
송병준은 귀국 후 다시 민씨세력에 줄을 대어 중추원 도사, 사헌부 감찰, 양지현감 등의 관직에 오르게 된다. 1884년 12월, 갑신정변이 3일천하로 끝나고 박영효, 김옥균 등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이 정변 때 주역들은 송병준을 민씨일파라고 지목하여 참가시키지 않았다. 정변의 주역들이 망명한 후, 민비는 송병준에게 이들을 암살하도록 밀명을 내려 일본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송병준은 민비의 밀명은 아랑곳하지 않고 주색에 빠져 있다가 그냥 북경을 거쳐 귀국하였다. 그의 이런 대담한 행동은 외세의 뒷힘을 배경으로 나온 것으로, 귀국 후 명령 불복종죄로 투옥되지만 오래지 않아 석방되었다. 그는 민씨세력의 비호 아래 다시 영월군수, 흥해군수, 은진군수 등을 역임하게 되었다. 은진군수로 재임하고 있던 1888년에 동학에 입교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를 확인할 길은 없다. 다만 은진에 동학이 번창한 점을 참작할 때 동학교도들과 깊은 교류를 맺고 있었음은 사실이다.
송병준은 그의 상전이자 후견인이었던 민태호의 사망(1891)을 전후하여 몇 년 동안 관을 떠나 한량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돌연 1893년 동학의 교조신원을 위한 복합상소(2월 12일) 한 달 후에 장어영진관 직에 오르게 되는데, 이는 동학과 연줄을 갖고 있던 그를 민씨파에서 첩자로 이용하기 위한 책략이었고, 실제로 보은집회를 해산시키도록 하는 편지를 최시형에게 보내는 등, 그러한 흔적을 찾아볼 수가 있다.
일본군에 의해 동학농민군이 섬멸당하고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게 되자 정부에서는 의화군(義和君)을 일본에 특파대사로 파견하게 되었는데, 일본통으로 자타가 공인하던 송병준이 그 수행원으로서 도일(1895년 5월)하게 된다. 그가 도일한 후 오래지 않아 일본에 의해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자행되자 귀국을 포기하고 러일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일본에 눌러 앉게 된다. 이것은 조선내의 반일 분위기에 위기감을 느꼈고 명성황후라는 권력 배경이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이 때부터 그는 야마구치현(山口縣) 하기시(萩市)에서 노다 헤이지로(野田平次郞)라는 일본 이름으로 전경가원양잠전습소(田井稼園養蠶傳習所)라는 것을 차려 생계를 꾸려나가며 정치지망가들을 비롯하여 손병희, 오세창, 이용구* 등의 동학교도 및 재일 유학생과의 교류를 빈번히 가졌다.
이완용과 병합 경쟁
러일전쟁은 일본에서 낭인생활을 하던 송병준에게 본국에서 새로운 정치 활동을 전개하는 새로운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송병준은 일본으로부터 막대한 공작자금을 받고 오타니 기쿠조(大谷喜久藏) 병참감(육군소장)의 통역인 신분으로 귀국하였다. 그에게 부여된 임무는 친일단체를 만들고 유력인사를 친일화하는 공작, 러일전쟁에서 동학을 일본에 협력시키는 작업 등등이었다. 그는 풍부한 공작자금으로 첩에게 파성관이라는 일본 요정을 차려 주고 정계 및 종교계 요인들을 친일화시켜 나가는가 하면, 국내 정세, 요인들의 동향을 일본 당국에 비밀리에 보고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일본당을 만들기 위해 이용구에게 시천교도를 규합하여 진보회를, 윤시병*에게는 유신회를 만들도록 획책하였고, 이를 다시 일진회라는 친일매국단체로 통합시켰다.
'을사조약'으로 통감부가 설치되면서 송병준의 위세는 더욱 높아져 그야말로 안하무인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송병준이 통감부 당국에 의해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것은 이일식(李逸植)의 고종황제 옥새 위조사건 때문이었다. 자객 출신이며 정상배인 이일식이 고종황제의 옥새를 위조하여 일본인에게 각종 이권을 팔아먹은 사기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송병준이 그를 숨겨 주었기 때문이었다. 이 때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막료로 있던, 일본 우익의 거두이며 흑룡회(黑龍會) 회장인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에게 도움을 청하여 석방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하여 송병준과 일진회는 일본 우익의 사주를 받는 매국단체가 되었다.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강점·매국의 과정을 역학적으로 살펴보자. 통감 이토는 이완용 괴뢰 매국내각을 상대로 병합공작을 공개적으로 전개시켰다. 반면 일본 우익의 하수인이 된 송병준과 일진회는 주차군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를 통해 일본 육군군벌의 지원과 지시를 받음과 동시에, 우치다를 통해 우익이자 일본 정계의 흑막인 스기야마 시게마루(杉山茂丸)의 지휘를 받았고, 다시 스기야마는 죠슈(長州)군벌로서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가쓰라 타로(桂太郞),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 등의 사주를 받아 이면에서 병합공작을 추진하여 갔다.
곧 일본당국은 이토--이완용 내각과 흑룡회--일진회라는 두 세력을 적절히 활용하면서 병합공작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송병준과 이완용은 각각 다른 연줄을 가지고 견제·대립 혹은 협조하면서 나라를 팔아먹게 된다. 일진회와 흑룡회의 내부에서도 회장인 이용구는 이론가연하여 우익 이론가인 다케다 한시(武田範之)라는 중과 접촉하면서 일본 우익의 대외사상인 아시아주의(몽고족과 통합하여 대아시아 제국을 건설하자는 것)를 모방하여 한일합방론(한일양국이 대등한 입장에서 나라를 합침)이라는 기묘한 매국이론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송병준은 정치 깡패와 같은 우치다와 함께 즉각 병합을 주창하면서 이면공작을 전개해 나갔다. 1907년 박제순* 내각을 대신하여 이완용 내각이 들어서자 송병준은 농상공부대신이 되었는데, 그가 이 자리에 있을 때 이준 열사의 헤이그밀사 사건이 터졌다. 이 때 송병준은 칼을 차고 어전회의에 들어가 고종에게 "일본에 건너가 메이지 천황에게 사죄하든가, 통감 이토에게 무릎을 꿇어 사죄해야 하는데, 이토에게 사죄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로 만일 그럴 경우에는 폐하를 죽이고 자살하겠다"고 엄포를 놓은 뒤, 둘 다 불가할 경우는 순종에게 자리를 양위하도록 협박하였다.
이 일이 있은 후 고종은 왕위를 순종에게 양위하고 영친왕을 일본에 인질로 보냈다. 송병준의 이와 같은 무례함은 역사상 일찍이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 후 내무대신이 되고 나서 순종의 순행 문제로 순종에게 질책을 받자, 순종의 왕위를 영친왕에게 넘기려는 공작을 획책하다가 저지당하기도 하였다. 1907년 이후 일본 내부에서는 조선병합 문제로 약간의 의견 차이가 나타났다. 노회한 이토는 국제 정세와 조선인들의 저항을 우려하여 점진적인 방책을 취하려고 하였다. 이에 반해 당시 수상인 가스라, 육군대신 데라우치 등 죠슈 군벌 계통은 '즉각 병합론'을 제기하였다. 이 무단적인 육군 군벌 세력들은 송병준을 이용하여 병합을 추진해 가면서 이토를 통감에서 물러나도록 하였다.
송병준은 이 일과 관련, 가스라로부터 밀명을 받기 위해 빈번히 일본을 드나들었다. 또한 송병준은 소네 아라스케(曾彌荒助)가 이토를 대신해 통감이 되었을 때도, 그가 이완용과 너무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이유로 통감교체 운동을 전개하여, 그 후임으로 데라우치를 불러들이기도 하였다.
한편, 일본 당국은 송병준에게 일진회 명의로 '합방청원서'(일진회가 제출한 합방청원서는 이용구가 작성한 것이 아니라 일본에서 다케다가 스기야마의 지시로 작성한 것이다)를 제출하도록 지령을 내려 병합의 분위기를 조장하여 가다가, 결국 1910년 8월 29일 강점해 버렸다.
송병준은 매국의 공로로 자작과 은사금 10만원(요즘돈으로치면 약10억원 정도된다)을 받았고, 일본 국왕으로부터 금시계를 받는 영광도 누렸다. 메이지 일본 국왕을 만났을 때 일왕을 '살아 있는 신'이라 칭송하면서 감읍하였다 한다. 뿐만 아니라 북해도에 광대한 목장을 하사받았으며, 1920년에는 백작으로 승급하였다. 중추원 고문과 경성상업회의소 특별평의원, 경기도 참사 등을 지낸 그는 3.1 운동이 일어나자 재빨리 도쿄로 달아나서 일본 정계 요인들과 함께 만세 수습책을 의논하는 기민함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 뇌일혈로 사망하였는데(1925), 매판자본가의 전형인 한상룡(韓相龍)*이 주최한 연회에서 누군가에게 독살되었다는 일설도 있다.
사기와 협잡, 그리고 주색잡기로 점철된 인생
일본이 조선을 강점한 후, 송병준은 일본과 한국을 드나들면서 수많은 이권에 개입하는가 하면, 남의 재산을 횡령하여 축재하고, 그것으로 주색잡기에 여념이 없었다고 한다. 다음의 기사는 어렴풋하게나마 당시 그의 행각을 살피는 데 참고가 될 것이다.
일진회를 거느리고 한일합방을 주장하여 그 공로로 귀족의 칭호를 가지고 그 덕택으로 수많은 재산을 가지게 된 송병준은 그간 별일이 없음인지 대정권번이라는 기생조합의 뒷배나 보아 주면서 대성사라는 간판으로 취리(取利)나 하더니, 재작년에 조선독립운동이 폭발하니까 동경에 건너가 여러 달을 머무르는 동안에 정무총감이 되기 위한 운동을 한다는 말이 각 신문에 전하였으나, 그대로 귀국 후 유민회(維民會)를 후원하고 소작인상조회를 조직하고 조중응 일파의 대정친목회기관으로 발행하뎐 조선일보를 맡아다가 경영……"({동아일보}, 1922. 7. 31) 그의 생애를 살펴보면, 자기의 출세와 영달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철저한 기회주의자임을 알 수 있다.
사상이나 신념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의리나 지조가 있었던 것은 더더구나 아니었다. 임기응변에 능하고 상황에 맞추어 처신하는 처세술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다. 그렇기에 신분사회에서 기생의 몸에서 태어나 고아처럼 자란 그가 관직에 오르고 백작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는 말처럼 충정공 민영환이 순절한 직후 그의 재산을 횡탈하려다가 물의를 일으켰다. 이에 대해 그는 민태호의 애첩 홍씨가 자기의 생모이기 때문에 그 재산을 찾으려 하였다고 변명하였다.
또한 친구 김시현(金時鉉)이 죽은 후 그의 재산 관리를 맡고서는 친구의 부인까지 농락하고 재산을 가로챘다가 소송을 당하기도 하였다. 더욱이 송병준은 이 일을 낭설이라 보도하면 사례하겠다고 {국민신보}에 제의했다가, 이마저 배신하는 바람에 {국민신보}의 이강호(李康鎬)에 의해 진상이 폭로되었다고 한다. 가히 파렴치범이라고 할 만하다.
이처럼 돈과 권력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거리낌없이 해치우던 그는 결국에는 1억 엔에 나라를 흥정하는 짓거리까지 하게 된다. 그가 1904년께 일본에서 빈둥빈둥 놀고 있을 때, 죠슈군벌을 대표하던 수상 가스라와 말을 주고 받던 중 가스라가 "가령 한국을 병합한다고 하면 웬만큼 돈이 필요할 터인데 얼마쯤 있으면 되겠느냐"고 물었더니, 송병준은 당장 되받아 "1억엔 내야 한다. 그러면 내가 책임지고 병합을 무난히 실행시켜 보이겠다" 고 기염을 토했다 한다.(釋尾東邦, {朝鮮倂合史}, 661면) 이런 그에게 개인적 양심은 물론이고 민족적 양심을 찾는다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일 것이다.
"송은 일본을 흠모하여 신변의 의식주는 물론, 노복에 이르기까지 모두 일본풍을 모방, 추호도 일본인과 다를 바가 없다"({조선귀족열전})라는 평가도 있듯이 파렴치범으로서뿐만 아니라 반민족 범죄자로서도 그는 제1의 서열에 오르는 데 조금도 손색이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를 친일매국노 제1호라고 하여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1945년 2차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하기 직전, 추원리(秋湲里)에 있던 송병준의 집 마당의 벚꽃 나무와 그의 묘역에 있던 일본송(日本松)이 전부 말라 죽어 있었다고 한다. 죽고 나서도 일본과의 인연을 끊지 못한 기묘한 일이라 하겠다.
'해방'이 도리어 '행운'을 가져다 준 친일 가문
송병준의 백작 작위는 아들 송종헌(宋種憲)이 물려받았다. 그는 '병합' 후에 경기도 양지군 참사(1910∼1913), 중추원 참의(1921∼1933) 등을 지냈다.
송병준의 사위는 구연수(具然壽)로, 그는 을미사변 당시 민비의 시체에 석유를 뿌려 소각하는 일을 감독하는 역할을 맡았던 인물이다. 통감부가 개설되면서 일제의 권력을 등에 업고 귀국한 그는 송병준의 천거로 통감부 경시(警視:총경)를 거쳐, 총독부 경무관으로 경무총감부에서 근무했다. 이것은 경시보다 한 급 위인 경찰 최고의 직급인데, 조선인으로 경무관을 지낸 사람은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구연수 한 명뿐이다. 그는 3.1 운동이 나던 1919년부터 1923년까지 경무국장과 거의 맞먹는 경무국 칙임(勅任)사무관을 지냈으며, 1925년 5월 6일에 사망했다. 사망 당시 그의 직위는 중추원 참의였다.
구연수의 아들, 그러니까 송병준에게는 손자가 되는 구용서(具鎔書)는 1918년 졸업생 105명 중 조선인이 단 2명뿐인 경성중학교를 졸업한 뒤, 도쿄상대에 입학하였다. 그리고 졸업하던 해인 1925년에 조선은행 도쿄지점에 들어간다. 식민지 중앙은행인 조선은행은 조선총독부와 동양척식주식회사 그리고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과 더불어 침략기관의 중추부를 이루고 있었다. 해방 직전에 조선은행 오사카(大板) 지점 서구출장소 지배인을 맡고 있던 그에게 해방은 '고통'이나 '비난'이 아닌 '행운'을 가져다 주었다. 1945년 11월 10일 조선은행 부총재 호시노(星野喜代治)가 면직되면서, 일개 지점장도 못되던 구용서는 하루아침에 부총재로 임명되었던 것이다. 1950년 총재로 승진한 그는 조선은행이 한국은행으로 개편되면서 대한민국 중앙은행의 초대 총재가 되었다. 이처럼 대한민국 은행.금융계의 최고 지위에서 '해방'의 빛을 마음껏 누리던 그는 이승만 정권하에서 상공부장관까지 지내기도 하였다.
■ 강창일(배재대 교수·한국사)
■ 참고문헌
內田良平 編, {日韓倂合始末}, 1944.
野田眞弘, {賣國奴}, 講談社, サ-ビスセオンタ-, 1977.
川上善兵衛, {武田範之傳}, 日本經濟評論社, 19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