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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중략)... (사도행전 20:26-35) | 찬송가: 267장, 288장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는 올해 종교개혁(교회개혁, Reformation) 500주년(1517-2017)의 뜻깊은 해를 맞았습니다. 개혁 자 마틴 루터(1483-1546)가 독일 비텐베르크성(城) 교회 문에 면죄부를 파는 교황청에 대항하여 95개조의 논제(M. Luther’s 95 Theses)를 게시한 사건으로 종교개혁은 점화되었습니다. 다섯 가지의 솔라 (Five Solas)는 종교개혁의 핵심가치와 그 정신을 담고 있습니다.
뿌리 없는 나무가 존재할 수 없듯이 신앙의 뿌리가 없는 성 도 역시 존재가 불가능합니다. 종교개혁 전에는 안개 속을 거니 는 것처럼 진리가 희미하고 왜곡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비로 소 종교개혁을 통해 신실한 성도들이 다음의 세 가지 질문에 대 한 확실한 해답을 얻게 되었습니다. 무엇이 죄인을 영원한 심판과 지옥의 형벌로부터 구원합니까? 과연 누가 우리를 영원한 심판과 지옥의 형벌로부터 구원합니까? 이 문제에 관한 유효하고 확실한 답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종교개혁은 구원론에 대한 변혁을 일으켰습니다. 그 사상은 ‘오직 믿음으로’(Sola Fide/ Faith Alone)에 압축되어 있습니다. 로마가톨릭교회는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에 더하여 선행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은 성경의 원리에 따라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라는 이신칭의(以信稱義) 혹은 이신득의(以信得義) 구원교리를 재발견하고 정립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분명히 선언하였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사람이 선행이나 율법을 지킴으로써 의를 얻는다는 인간 중심, 공덕 중심의 잘못된 사상을 격파하고 바울 사도는 “오직 의(義)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을 통하여 획득됨”을 확신 있게 전파하였습니다. 로마서도 동일하게 이신칭의 진리를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8). 사도는 자신이 땀 흘려 생명의 복음을 전함으로 유럽에 세워진 첫 교회였던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자서전적 고백을 하였습니다.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9).
개혁자 루터의 신학을 ‘칭의’ 신학이라고 일컫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존 칼빈의 평생 신학의 주제였던 ‘오직 하나님께 영광’ 신학을 계승해야 하겠습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 11:36).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
본문의 배경을 보면 이제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계획을 가졌던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의 핵심 멤버였던 장로들을 초청하였습니다.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17절). 장로들은 감독자로 불리기도 합니다(28절). 에베소 교회와 사도 바울은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현재 터키 서해안에 위치한 에베소는 그 당시 아시아에 있는 로마제국의 대표적인 항구도시이자 아시아의 수도였습니다. 그리고 그 위상에 걸맞게 상업의 중심지였습니다.
바울은 제2차 전도여행 때 에베소를 방문하였습니다(행 18:18-21). 연이어 제3차 전도여행 때 에베소에서 2년간 머물며 회당과 두란노서원에서 복음을 외쳤습니다(행 19:8-6). 바울이 전한 메시지 때문에 아데미 여신 숭배자들이 폭동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행 19장). 바울은 에베소를 떠날 때 믿음의 아들이며 사역자인 디모데를 남겨두어 목회를 계승하도록 배려했습니다.
이렇듯 에베소 교회는 이방 선교의 거점교회였으며 우상과의 진리 싸움의 전쟁터였습니다. 에베소 교회가 처한 현실은 녹록하지 않았습니다. 에베소 사람들이 숭배한 아데미 여신의 전각 은 그 크기부터 사람들의 마음을 압도하였습니다. 아데미 우상전각은 가로가 무려 120m, 세로가 65m, 높이가 18m나 되는 127개의 대리석으로 건축되었습니다. 건축 기간만 220년으로 추정됩니다. 아데미 신전은 그 당시 세계의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거대한 신전을 찾아오는 순례자들과 방문객들이 얼마나 성황을 이루었는지 데메드리오와 그의 동업자들이 만든 아데미 신전 기념상품이 날개 돋친 듯이 팔려나갔습니다(행 19장). 이러한 치열한 영적 전투의 현장에 에베소 교회가 놓여 있었으니 그 성도들에 대한 바울의 마음이 각별하지 않았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외친 메시지
바울은 에베소에서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하였습니다(21절). 또한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였습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죄인들에게 은혜를 베푸시기로 작정하신 내용을 거리낌 없이 담대하게 전하였습니다. 헬라어로 표현되는 ‘카리스’는 우리말로 ‘은혜’로 번역된 단어입니다. 그 뜻은 ‘전혀 받거나 누릴 수 없는 자격 없는 자가 받고 누리게 된 하나님의 호의’를 의미합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으도 살 수도 없고 누릴 수도 없는 죄 사함의 복과 영생의 선물을 하나님은 우리에게 완전하게 허락해 주셨습니다. 이러한 놀라운 은혜가 죄인들에게 임하였다는 소식이야말로 복음입니다. 영원히 멸망 받을 처지에서 영원히 하나님의 은총의 수혜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 소식을 ‘은혜의 복음’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심지어 그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귀한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그 자신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단언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자신의 견해나 가치를 전파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였다고 거듭 증거하였습니다.
바울의 생각에 에베소 교회가 교회다운 교회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그 전제조건이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복음의 전사로 세워지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영적 배경 가운데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미래를 열어갈 핵심 멤버인 장로들을 초청하여 다시 한 번 은혜의 복음에 대한 각성과 사명에 대한 재발견을 강력하게 깨우쳐 주었습니다.
영적 지도자의 책무
장로의 임무는 삼가는 것과 경계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교회의 영적 생명을 보존하고 이어갈 장로들에게 부탁합니다. “삼가시오.” 그리고 “경계하시오.” 사도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고 권면합니다. 강력한 명령으로 삼갈 이유는 하나님의 뜻을 이미 그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릇 영적 직분자는 스스로 자신을 다스림으로 교회에 유익을 끼치고 성도들의 믿음을 진작시켜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이미 그들에게 주어진 복음의 영광을 훼손하지 않도록 삼가야 합니다.
현하 한국교회에 발생하는 많은 어려움은 교회의 중직자들이 직분의 엄중함을 깨닫지 못하고 삼가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또한 ‘주의하다, 경계하다’는 뜻을 지닌 이 단어는 현재 명령형으로 쓰였습니다. 곧 지속적으로 주의를 기울이고 깨어 있어 경계하라는 의미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우상과 거짓된 가르침이 난무하는 현장에 있었기에 진리에 대해 도전하는 무리와 호시탐탐 노리는 이단들에 대한 경계를 결코 늦추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영적 지도자는 그가 속한 지역교회의 믿음의 파수꾼입니다. 복음의 불침번입니다. 십자가의 전사입니다. 영적 지도자들이 무너지면 교회가 무너집니다.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은 누구로부터 직분을 부여받았는지, 어떤 가치를 지닌 공동체에서 책무를 감당해야 할지 다시 한 번 확정해야 했습니다. 본문은 분명히 알려줍니다.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28절). 성령께서 그 장로들을 감독자로 세운 뜻은 본문이 보여주듯이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기 위함이었습니다. ‘보살피다’라는 단어는 이전에 ‘치게 하셨느니라’로 번역되었습니다. 이 단어는 목자가 양을 칠 때 사용하는 단어로서 ‘양육시키다’는 의미입니다. 시편 23편과 요한복음 10장이 보여주는 선한 목자의 모습입니다. 우리 구주 예수님은 영혼의 목자이시며 감독이십니다(벧전 2:25). 주님의 심정으로 지상에서 가장 존귀하고 가치 있는 믿음과 사랑의 공동체인 교회를 돌아보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피로 사신 교회를 의미합니다. 얼마나 영광스럽고 놀라운 직분인지요. 장로나 감독자를 위하여 교회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우신 주님께서 보혈로 값 주고 사신 교회를 위하여, 교회의 교회 됨을 위하여, 교회의 건강함을 위하여 사역자가 존재한다는 진리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 에베소에서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였습니다(31절).
눈물의 목자가 부재한 양 떼는 그대로 위험에 노출됩니다. 사나운 이리에 의하여 지리멸렬합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일이 얼마나 많이 벌어집니까? 지난 1992년 10월 28일 한국의 이단 다미선교회에서 휴거론을 들고 나올 때 수많은 목회자와 교회 중직자들이 미혹을 당하여 교회를 소란스럽게 하였습니다. 그때뿐입니까? 지금도 사나운 이리처럼 달려드는 교묘하고 악랄한 이단들이 지역교회를 노립니다. 대표적으로 신천지(교주 이만희), 구원파(교주 박옥수), 하나님의 교회 일명 안상홍증인회(교주 장길자), 젊은이 그룹을 유혹하고 교주가 성 추문을 일으켜서 감옥에 가 있는 JMS(교주 정명석) 등이 순전한 성도를 위협하고 있는 사나운 이리 떼입니다. 또한 교회 내에서 발호하는 거짓 사상과 이단들도 있습니다. 그들에게 미혹되면 주 예수님의 구주 되심과 유일성을 부인하고 그들 자신을 따르게 합니다.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30절).
이 얼마나 치열한 영적 전쟁의 현장입니까? ‘사나운 이리’라는 말은 ‘잔인한, 흉포한’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거짓 선지자들을 이리로 비유하셨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마 7:15). 교회를 세우는 선한 목자가 있는 것처럼, 교회를 허무는 잔악한 이리 같은 거짓 교사들도 있습니다. 사도의 가르침대로 후에 에베소교회는 악한 자들과 자칭 사도라는 자들을 가려내어 그들의 악한 정체를 드러내는 일이 있었습니다(계 2:2).
사역자의 능력의 원천
바울은 눈물의 훈계를 마치면서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진리를 선포합니다. 그것은 육체로는 떠나가지만, 그들에게 간절한 마음을 담아 사역자의 능력의 원천이 무엇인가를 각인시킵니다.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32절).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 장면을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바울은 교회 직분자들인 대표 성도들을 주님과 은혜의 말씀에 부탁한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에베소 교회를 장로들에게 맡기면서 또한 그 장로들을 주님께 맡겼습니다. 동시에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였습니다. 여기 언급되는 ‘은혜의 말씀’은 24절의 ‘은혜의 복음’을 의미합니다.
특이한 것은 사도는 은혜의 말씀에 인격성을 부여하여 말씀, 즉 복음에 대한 존중함과 친밀함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주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주님께서 허락하신 은혜의 복음을 신뢰하며, 은혜의 말씀을 신뢰하는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오직 주님과 은혜의 말씀만이 사역자들을 능히 든든히 세웁니다. 든든히 ‘세운다’는 말은 건축에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마치 견고하게 집이 세워지듯, 사역자의 삶을 힘 있게 세워나가는 원리는 주님과 주님의 말씀에 놓여 있습니다.
이것은 구원받는 믿음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믿음의 소유자가 될 것을 주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구원받은 사람에게 주시는 단순한 은혜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미래에 확실한 소망의 기업을 허락하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역자들의 급선무는 주님과의 친밀함을 회복하고 자신을 말씀으로 견고하게 세우는 것입니다. 걸어 다니는 성전인 성도는 자신의 정체성을 말씀에서 찾습니다.
우리 개혁교회(Reformed Church)의 중요한 명제 중 하나는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 est!)”입니다. 1521년 보름스 제국회의(The Diet of Worms)에서 카를 5세(Karl V) 황제의 위협에 직면한 개혁자 루터는 이렇게 당당하게 외쳤습니다. “제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매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아무것도 취소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양심을 거역하는 것은 안전하지도 의롭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처럼, 루터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굳게 매여 있는 성도만이 자신을 개혁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의 마음을 묶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입니까? 진정 우리는 무엇에 매여 살기를 원합니까? 성경은 증거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우리의 믿음의 출발은 성경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보증도 말씀으로 말미암습니다. 말씀과 더불어 일하시는 성령님의 역동적인 사역이 우리의 정체성을 보증해 줍니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 치심을 받았으니”(엡 1:13).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등지면 거룩한 정체감을 상실합니다. 영력을 잃어버립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하면 영적 암흑기(Spiritual Dark Age)를 맞습니다. 얼마전 우리나라 복음주의 역사신학회, 한국장로교 신학회, 한국교회사학회 공동 주최로 ‘종교개혁 500주년기념 공동학술대회’에 초청되어 주제 강연을 한 기독교 사상가이자 교회사의 권위자로 인정받는 우드브리지(John D. Woodbridge) 교수는 성도와 교회의 신앙의 유일한 기초가 오직 하나님의 말씀임을 설득력 있게 선포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성경의 진실성, 무오성, 충분성, 신뢰성, 명료성을 주목하였습니다.
첫째, 성경은 완전히 믿을 수 있으며 그 무오성은 그 사상뿐만 아니라 그 단어들에까지 미친다.
둘째, 성경은 신앙과 실천을 위한 완전히 충분한 규범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삼위 하나님과 우리의 구원과 우리의 바른 삶에 관해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을 공급한다.
셋째, 성경은 성령 하나님에 의해 영감되었다. 성경은 그 권위를 위해 그리스도 중심의 증거를 가지고 있고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그 중심 초점으로 가지고 있다.
넷째, 성경은 신앙과 실천에 관한 가르침이 분명하여 평범한 사람이 이해할 수 있다.
결국 성경은 영적으로 생명을 주는 책이다. 성경은 우리를 교훈하기에 실용적이고 유익하다.
처음의 세 가지 질문을 기억하십니까? 무엇이 죄인을 영원한 심판과 지옥의 형벌로부터 구원합니까? 모든 죄인은 예외 없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과연 누가 우리를 영원한 심판과 지옥의 형벌로부터 구원합니까? 오직 예 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이 문제에 관한 유효하고 확실한 답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오직 성경을 통하 여서만 우리는 확신을 가집니다(Michael. A. G. Haykin 교수 글 참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의 개혁자로 쓰임받기를 원하십니까? 우리가 진정 믿음의 사람이라면 우리가 섬기는 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교회로 우뚝 서도록 일꾼답게 쓰임 받읍시다. 우리의 가정에서 믿음이 실천될 수 있도록 결단합시다. 우리의 일 터가 예배 생활의 연장이 되어 일상의 예배자로 드려지도록 믿음 의 건축자가 됩시다. 진정한 믿음은 반드시 삶으로 열매를 맺습니다. 믿음의 승리자는 삶의 승리자입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한 우리 모두 초보적인 믿음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드리는 성숙한 믿음의 사람으로 쓰임 받기를 축원합니다.
오정호 목사(새로남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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