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속삭임(A comme amour〉
어제 올린 <아들리느를 위한 발라드>가 사랑의 시작을 들려주는 곡이라면, <가을의 속삭임>은 사랑이 추억으로 깊어지는 순간을 들려주는 곡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사랑했던 시절이 낙엽처럼 돌아오는 음악
우리에게 <가을의 속삭임>으로 널리 알려진 이 곡의 원제는 프랑스어로 〈A comme amour〉입니다.
직역하면 대략
“A는 Amour의 A”
또는
“A, 사랑이라는 말처럼”
이라는 뜻입니다.
프랑스어 amour는 ‘사랑’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원제에는 사실 ‘가을’이라는 말이 들어 있지 않습니다. 한국에서 음반이 소개될 때 곡의 쓸쓸하고 서정적인 분위기에 맞추어 <가을의 속삭임>이라는 아름다운 제목이 붙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 번역 제목이 워낙 곡의 정서와 잘 어울려서, 우리에게는 원제보다 더 친숙한 이름이 되었습니다.
1, 누가 작곡했을까요
이 곡 역시 리처드 클레이더먼이 직접 작곡한 곡이라기보다, 그가 연주하여 세계적으로 알려진 작품입니다.
일반적으로 프랑스의 작곡가이자 음반 제작자인 폴 드 세느빌과 올리비에 투생의 작품으로 소개됩니다. 음원 판본에 따라 편곡가 에르베 루아까지 작곡 크레디트에 함께 표시되기도 합니다. 이 곡은 1978년 리처드 클레이더먼의 동명 음반 《A comme amour》에 수록되었습니다.
폴 드 세느빌과 올리비에 투생은 클래식 음악의 우아함과 대중음악의 친근함을 결합하는 데 탁월했던 음악가들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리처드 클레이더먼을 발굴해 피아노가 어렵거나 무거운 음악이 아니라, 누구나 추억과 사랑을 떠올리며 들을 수 있는 음악이 되도록 만들었습니다.
2. <가을의 속삭임>은<아들리느를 위한 발라드>와 무엇이 다를까요?
두 곡은 비슷하게 아름답지만 정서는 조금 다릅니다. <아들리느를 위한 발라드>에는 맑고 순수한 기쁨이 있습니다. 갓 피어난 사랑, 아직 상처받지 않은 마음, 서로의 눈을 바라보는 젊은 연인의 설렘과 닮았습니다.
그에 비해 <가을의 속삭임>에는 조금 더 깊은 그리움이 들어 있습니다.
사랑은 여전히 아름답지만, 그 아름다움 속에 이미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는 느낌이 숨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곡을 들으면 행복했던 장면을 떠올리면서도 마음 한편이 살짝 저려옵니다.
봄날의 사랑이라기보다는, 함께 걸었던 길에 낙엽이 쌓이고, 문득 옆 사람의 손을 조금 더 꼭 잡게 되는
늦가을의 사랑에 가깝습니다.
3. 리처드 클레이더먼의 연주가 특별한 이유
리처드 클레이더먼은 감정을 격렬하게 폭발시키는 연주자라기보다, 듣는 사람의 기억을 조용히 깨우는 피아니스트입니다.
그의 연주는 음을 지나치게 무겁게 누르지 않습니다. 오른손의 선율은 맑고 또렷하며, 왼손의 반주는 잔잔하게 흐릅니다. 그래서 피아노가 우리에게 무엇을 강요하지 않고, 각자가 자기만의 사랑과 추억을 떠올리게 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첫사랑이 떠오르고, 어떤 사람에게는 돌아가신 부모님이 떠오르며, 또 어떤 사람에게는 젊은 날 함께했던 여인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그의 음악은 전문적인 클래식 애호가뿐 아니라 전 세계 수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두 개의 이어폰 잭>
80년대 초, 소니의 워크맨에는 이어폰을 꽂는 구멍이 두 개 있었습니다. 하나는 나를 위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각자의 이어폰을 귀에 꽂고 같은 음악을 들었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좋았습니다. 같은 선율을 듣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은 충분히 가까웠습니다.
카세트테이프가 천천히 돌아가면 리처드 클레이더먼의 피아노가 흘러나왔습니다. 맑은 음표들은 젊은 연인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고, 우리는 그 음악 속에서 미래를 꿈꾸었습니다.
그때는 시간이 이렇게 빨리 흐를 줄 몰랐습니다. 어느새 검던 머리에 흰빛이 섞이고, 젊은 날 함께 걷던 길도 많이 달라졌습니다. 그러나 <가을의 속삭임> 의 첫 음이 들려오면 시간은 잠시 걸음을 멈춥니다.
아내는 다시 젊은 시절의 연인이 되고, 나는 워크맨을 손에 든 청년으로 돌아갑니다.
음악은 지나간 계절을 되돌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 계절 속에서 사랑했던 마음은 다시 데려올 수 있습니다.
어쩌면 두 개의 이어폰 잭은 단순한 기계장치가 아니었는지도 모릅니다.
한 사람의 음악을 두 사람이 함께 듣게 하고, 두 사람의 추억을 한 곡 안에 오래도록 간직하게 해준 작은 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른 지금도 그 문을 열면, 그곳에는 여전히 젊은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