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욥기 26장 1~14절
[서론] 거대한 거장의 붓이 멈춘날
사랑하는 여러분, 13세기 중세 교회에서 최고의 신학자이자 철학자로 불린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를 잘 아실 것입니다. 그는 평생 철저한 논리와 인간 이성을 총동원하여 하나님과 우주의 원리를 정교하게 집대성한 기독교 신학의 거작, 『신학대전(Summa Theologiae)』을 집필했습니다. 그 책은 당대 교회가 하나님을 이해하는 가장 완벽한 틀이었습니다. 그러나 1273년 12월 6일, 성니콜라오 축일 미사를 드리던 중 아퀴나스는 환상 가운데 어떤 신비로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잡고 있던 붓을 조용히 내려놓았습니다. 그의 비서인 레지날드가 "선생님, 왜 그 위대한 작업의 완성을 멈추십니까?"라고 물었을 때, 아퀴나스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레지날드, 내가 본 것에 비하면, 내가 지금까지 쓴 모든 글은 한낱 '짚더미(Straw)'에 불과하다네." 평생 쌓아 올린 인간 지식의 정점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실재 앞에서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짚더미’로 느껴졌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 토마스 아퀴나스의 고백과 정확히 닮아 있습니다. 욥의 친구 빌닷은 자신이 아는 좁은 교리적 틀로 하나님을 다 안다며 고통받는 욥을 판단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욥은 본문 14절에서 단호히 선포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아는 모든 것은 그분의 '속삭임'에 불과하다."
오늘 본문을 통해 신약의 구속사적 의미, 그리고 철학적 통찰을 통해, 오늘날 교회와 성도인 우리가 붙들어야 할 삶의 지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인간의 논리를 내려놓고 '인식적 겸손'을 갖추어라
본문 7절에서 욥은 우주와 땅의 창조에 대해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그는 북쪽을 허공에 펴시며 땅을 아무것도 없는 곳(밸리마)에 매다시며" 여기서 '밸리마(בְּלִי־מָה)'는 '~이 없는'이라는 뜻의 '벨리'와 '무엇'이라는 뜻의 '마'가 합성된 단어로, "무(無, Nothingness)"를 의미합니다. 고대 근동 세계관에서는 지구가 거대한 기둥이나 실체적 받침대 위에 올려져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지구가 아무런 받침대 없는 '무(無)' 위에 오직 하나님의 신비로운 권능으로 붙들어져 있다고 선포합니다.
철학적으로 이것은 ‘존재의 우연성(Contingency of Being)’을 뜻합니다. 우리 인간이 세운 안전지대, 우리가 자랑하는 지식의 받침대는 본래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지탱하심 덕분에 오늘을 유지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빌닷과 친구들은 자신들의 작은 머리로 이해한 '인과응보(죄가 있으니 벌을 받는다)'라는 틀에 하나님을 가두고 욥의 삶을 마구 재단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13장 12절에서 이를 이렇게 받아냅니다."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나의 지식, 내 삶의 경험으로 하나님을 다 안다고 착각하는 '신앙적 오만'을 버려야 합니다. 내 삶에 이해할 수 없는 환난과 고난이 찾아올 때, 내 작은 이성으로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판단하려 하지 마십시오. 내 이성의 받침대가 무너질 때, 오직 만물을 '밸리마(무)'위에 매달고 계신 창조주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리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십자가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우렛소리'를 바라보라
본문 14절은 가장 신학적인 하이라이트입니다."보라 이런 것들은 그의 행사의 단편일 뿐이요 우리가 그에게서 들은 것도 속삭이는 소리(셰메츠)일 뿐이니 그의 큰 능력의 우렛소리(레암)를 누가 능히 헤아리랴" 욥은 고대 시문학에서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웅장한 언어로 우주의 권능을 노래한 후, 이 모든 것조차 하나님의 극히 작은 '셰메츠(שֵׁמֶץ, 미세한 속삭임)'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물리량의 크기를 살펴보겠습니다. 속삭임은 약 30 dB, 우레는 약 120 dB로서 90 dB의 차이가 납니다. 그런데. 데시벨이 로그 스케(Logarithmic Scale)이라는 점을 적용하면 그 차이는 압도적입니다. 음압(소리 에너지)의 차이를 나타내는 데시빌은 10 db 증가할 때 마다 소리의 물리적 에너지가 10배씩 증가합니다. 따라서 90 db 차이의 에너지는 10^9배, 즉 10억 배의 물리적 에너지 차이가 납니다. 사람이 체감하는 크기 차이는 사람의 귀는 약 10 dB 증가할 때마다 소리가 2배 정도 크게 들립니다.그러므로 90 dB 차이면 체감상 약 500배 이상 더 크게 울리는 소리입니다. 욥은 자연세계에서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거대하고 두려운 소리인 '우레(레마, 雷聲)'조차도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비하면 한낱 '속삭임(세메츠)'에 불과하다고 고백합니다. 물리적으로 10억 배의 에너지 차이가 나는 것처럼, 인간이 인식하는 하나님의 손길과 그분의 실제 전능하심 사이에는 감히 측량할 수 없는 격차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감히 다 측정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진짜 전능함인 '레암(רַעַם, 천둥/우렛소리)'은 어디에서 나타납니까?
구약의 욥은 그 '우렛소리'의 실체를 다 보지 못하고 아득히 바라보았지만, 신약의 성도인 우리는 그것이 어디서 터져 나왔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18절에서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선포합니다. 세상의 지혜자들은 십자가를 무기력함으로 보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이 생각지도 못한 '십자가의 수치와 죽음'이라는 역설을 통해 사망과 죄의 권세를 깨부수는 영원한 '우렛소리(레암)'를 발하셨습니다.
세상의 화려함이나 눈에 보이는 외형(수치적 성과), 권력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찾지 마십시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인간의 지혜를 부끄럽게 하시는 십자가의 신비 속에 당신의 권능을 드러내셨습니다. 내 삶이 '속삭임'처럼 희미하고 낙심될 때, 2천 년 전 골고다 언덕에서 내 죄를 사하시고 우주적 승리를 선포하신 십자가의 우렛소리를 신뢰하시길 바랍니다.
셋째, 차가운 관념을 넘어 타자의 고통을 '실제로 건져내는' 교회가 되라
본문 2절에서 욥은 자신을 가르치려 드는 친구 빌닷을 향해 탄식하듯 외칩니다."네가 힘없는 자를 참 잘도도와주는구나(아자르) 기력 없는 팔을 참 잘도 구원하여(호샤타) 주는구나"(욥 26:2) 여기서 욥이 사용한 '아자르(עָזַר)'는 단순한 말장난이 아니라, 벼랑 끝에 선 이웃을 실제로 끌어올려 주는 '실존적 도움'을 뜻합니다. 또한 '구원하다'라는 단어의 원어 기본형은 ‘야샤(יָשַׁע)’이며, 본문에서는‘호샤타(הוֹשַׁעְתָּ - 네가 구원하였구나)’라는 형태로 쓰였습니다. 이 단어는 곤경에 빠진 형제를 실제로 건져내는 실존적 구원을 뜻합니다." 그러나 친구 빌닷의 신학에는 정작 고통받는 욥을 살려내는'아자르'와 '야샤'의 공감과 사랑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정통 신학은 오직 자신들의 논리를 증명하기 위한 '차가운 관념의 폭력'에 불과했습니다.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E. Levinas)의 말처럼, 그들은 고통받는 '타자의 얼굴'을 바라보지 않고, 자신들의 '교리적 시스템'으로 형제를 가두고 정죄했습니다.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의 이름(예슈아)이 바로 '야샤(구원하다)'에서 왔습니다. 예수님은 하늘 보좌에서 인간의 고통을 이론으로 분석하지 않으셨습니다. 직접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셔서 병든 자를 만지시고, 슬퍼하는 자와 함께 울어주시는'아자르(참된 도움)'의 삶을 통해 십자가에서 우리를 '야샤(구원)'하셨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외면받는 이유는 교리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고통받는 이웃을 향한 '아자르(실질적 도움)'와 '야샤(사랑의 구원)'가 빠진 차가운 말잔치만 늘어놓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기도가 부족해서 고난을 받는다", "죄 때문에 벌을 받는다"며 이웃의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빌닷의 오류'를 범하지 마십시오. 참된 성도는 차가운 관념을 내려놓고, 고통받는 형제의 손을 실제로 잡아주며(아자르), 그들을 주님의 사랑으로 건져내는(야샤) 실존적 사랑과 연대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결론] 짚더미를 넘어 십자가의 신비로
평생 수십 권의 정교한 신학 서적을 썼던 토마스 아퀴나스가 결국 자신의 모든 글이 '한낱 짚더미'에 불과함을 인정하고 붓을 놓았을 때, 그의 시선은 교리적 책상이 아니라 교회 제단 위에 걸린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욥기 본문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ㆍ당신은 당신의 작은 지식으로 하나님을 다 안다고 착각하는 오만에 빠져 있지는 않습니까? 내 지식의 받침대를 '내려놓는(밸리마, בְּלִי־מָה)', '인식적 겸손'의 성도가 되십시오.
ㆍ당신은 내 삶의 한계와 고난 속에서도 십자가에서 발해진 하나님의 영원한 능력을 바라보고 있습니까?희미한 '속삭임(셰메츠, שֵׁמֶץ)'을 넘어 십자가의 '우렛소리(레암, רַעַם)'를 신뢰하는 성도가 되십시오.
ㆍ당신은 차가운 교리의 잣대로 이웃을 정죄하기보다, 고통받는 이웃의 손을 실제로 잡아주고 계십니까? 관념적 평가를 넘어 이웃을 '실제로 돕고(아자르,עָזַר), 건져내는(야샤, יָשַׁע)' 사랑과 연대의 성도가 되십시오.
우리가 아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비록 ‘속삭임(셰메츠)’에 불과할지라도, 그 속삭임 속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은 태산보다 크고 무한합니다. 내 지식의 붓을 내려놓고, 십자가의 거대한 신비 앞에 겸손히 경외함으로 서며, 아파하는 이웃을 가슴으로 품어내는 참된 은혜의 성도와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