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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북한산 둘레길 17구간 다락원길 1971년 학교법인 신흥학원이 신흥보건전문학교로 설립한 종합대학이다. 1979년 신흥보건전문대학으로 개편되었고 1980년 신흥실업전문대학으로, 1988년 신흥전문대학으로, 1998년 신흥대학으로, 2011년 신흥대학교로 교명이 변경되었다. 2013년 동두천에 위치한 한북대학교와 통폐합이 승인되어 2014년부터 신한대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대원사 망월사는 자운봉, 만장봉, 선인봉, 주봉 등의 암봉이 수려하고 빼어난 도봉산에 위치하고 있다. 망월사로 오르는 길은 매표소에서 대원사, 원효사, 광법사를 차례로 돌아서 가는 코스가 있고 원도봉계곡을 따라가는 코스가 있는데 망월사에서는 두 갈래 등산로 중 어느 쪽으로 오르든 포대능선에 이르게 된다. 망월사는 신라 제27대 선덕여왕 8년(639년)에 해호스님이 여왕의 명에 의해 왕실의 융성을 기리고자 창건하였다. 당시 서라벌 월성(月城)을 향해 기원하는 뜻에서 망월사라 이름하였다. 이곳에는 예로부터 운수 납자의 대선사들이 많이 거쳐갔는데 고려시대의 혜거, 영소대사와 조선시대의 천봉, 영월, 도암 등 많은 명승들이 지냈고 근대의 도인이라 불리우는 만공, 한암, 성월 등 선지식들이 지내던 곳이다. 지금도 많은 수도승들이 참선하고 있다. 망월사 큰 법당에서 남서쪽으로 언덕을 넘어가면 혜거국사 부도가 있다. 부도란 이름난 스님의 사리나 유골을 안치해 두는 돌탑을 말하는데, 대개 절 근처에 세운다. 혜거국사의 사리를 봉안한 이 부도는 팔각원당형이다. 전체의 높이는 3.4m이고 탑의 몸통 둘레는 3.1m이다. 탑모양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기단 부위에 구형 탑신을 안치하고 옥개석과 상륜부로 구성돼 있다. 기단부는 지대석과 대석으로 구성돼 있는데 지대석은 팔각형 삼단의 일석으로 조성되고 높이가 80㎝이다. 그리고 그 위에 괴임대를 놓았다. 옥개석은 복발과 보주까지 한 개의 돌로 만들었는데, 낙수면은 목조건물의 지붕모양을 나타내고 있으며, 귀꽃은 모두 8개이다. 상륜부는 옥개석과 일석이며 복발면에 연꽃무늬를 새긴 것이 특징이다. 부도의 주인공인 혜거국사는 속성이 노씨이며, 자가 홍소로서 고려시대 국사를 지냈다. 그러나 행장은 세상에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호원高:경기도 의정부시 호원동에 있는 공립고등학교이다. 2000년 1월 8일 보통과 36학급, 특수학급 3학급 설립인가를 받아 2000년 3월 1일 개교하였다. 2003년 2월 14일 제1회 졸업생 497명을 배출하였다. 교훈은 '성실'이며 교목은 소나무, 교화는 철쭉이다.
도봉(道峰)
- 박 두 진
산새도 날아와 우짖지 않고,
구름도 떠가곤 오지 않는다
인적 끊인 곳 홀로 앉은 가을 산의 어스름
호오이 호오이 소리 높여 나는 누구도 없이 불러 보나,
울림은 헛되이 빈 골 골을 되돌아올 뿐
산 그늘 길게 늘이며 붉게 해는 넘어가고
황혼과 함께 이어 별과 밤은 오리니,
삶은 오직 갈수록 쓸쓸하고, 사랑은 한갖 괴로울 뿐
그대 위하여 나는 이제도, 이 긴 밤과 슬픔을 갖거니와,
이 밤을 그대는, 나도 모르는 어느 마을에서 쉬느뇨?
※<도봉>은 저녁 무렵의 가을산을 배경으로 하여 삶의 고독을 노래한 작품입니다. 이 시의 '도봉산'은 외롭고 쓸쓸한 시적 화자의 내면적 상황을 투영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시적화자의 외롭고 쓸쓸한 심경을 그대로 드러내지 않고 도봉산에 투영한 것입니다.
YMCA:세계적인 기독교 평신도 운동단체로서 1844년 6월 영국 런던의 히치콕로저스 상점의 점원이던 조지 윌리엄스(George Williams)가 12명의 청년들과 함께 산업혁명 직후의 혼란한 사회 속에서 젊은이들의 정신적·영적 상태의 개선을 도모하고자 설립하였다. 세계 YMCA 연맹(The World Alliance of YMCAs)을 결성하였다. 제1·2차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전쟁포로를 위한 사업과 난민구호 사업을 펼쳤다. 1955년 YMCA 창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주체성 재확립을 위한 노력을 다짐하였고, 1973년 우간다 캄팔라 세계대회에서 캄팔라 원칙을 채택하여 YMCA의 새로운 시대적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사회적 관심과 책임을 강조하였다. 선교에 대한 정열과 기독교 정신으로의 일치를 기본 원칙으로 하여 봉사정신을 발휘하고 있다. 제3세계 나라들로도 확장되어 2001년 현재 세계 120여 개국에 1만여 조직과 회원 3,000만 명, 지도자 70여만 명이 있다. 일제강점기 때는 2·8독립선언의 산실로써 독립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1980년대부터 고교 Y, 중학Y, 대학Y, 청년Y, 와이즈멘 클럽 등 양적 성장을 이루었다. 그동안 물산장려운동, 계몽운동, 농촌운동, 전쟁구호운동, 청소년운동, 부정부패추방시민운동, 한강물되살리기시민운동 등을 전개해 왔다. 다락원:도봉구 도봉동과 의정부시 경계에 있던 마을로서, 조선시대 공용으로 여행하는 관원을 위한 원이 있었는데 원집이 다락으로 되어 있던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누원이라고도 하였다. 다락원 원(院)은 조선 시대 수령, 공용 여행 중인 관원, 기타 일반민의 여행 등에 편의를 제공하기 위한 목적으로 주요 도로상에 설치된 일종의 숙박 시설이다. 현재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경내에는 다락원[樓院]이 설치되어 있었고 그 터가 남아 있다.
또한 각 도로는 대·중·소의 등급을 정하였고, 주요 거점에는 역(驛)을 두었다. 원은 주로 역과 역 사이에 배치되는 경우가 많았으며 공용 여행에 숙박 시설로 이용하기 위해 설치하였다. 조선 개창 후 태조 즉위년 개국공신 조준(趙浚)과 배극렴(裵克廉)의 상소를 통해 원을 설치하기 시작하였다. 공무 출장과 수령에게는 숙식이 무상으로 제공되었으나 연회 등은 금지되었다. 기본적으로는 공용 목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시설이었으나, 상인이나 민간 여행자들도 숙박 시설로 이용할 수 있었다. 다락원은 서울에서 함경도와 경기 북부 지역으로 이어지는 주요 도로의 분기점에 위치하고 있어 이 지역을 왕래하는 관원 및 상인 등에게 편의를 제공하려는 목적으로 설치되었다.
“광주는 광진(廣津)으로 옮기고 양주는 누원으로 옮겨 경성(京城)을 호위하는 것이 매우 편리하며 유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종조가 기전(畿甸)에 큰 읍을 포치한 것이 역시 이러한 연유에서입니다”라는 비변사의 건의가 기록되어 있다. 이는 누원이 서울 인근 지역에서 매우 중요한 곳에 입지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또 『선조실록』 권145 선조 35년 1월 신축조에는 “양주 누원 도로가에 거주하는 호인(胡人)들은 자기네들끼리 한 마을을 이루어 살고 있고”라 하여 누원 인근에 모여 사는 향화인(向化人)[야인(野人)·왜인(倭人)으로서 투화(投化)해 온 사람]에 대한 기사가 나타난다. 『영조실록(英祖實錄)』 권16, 영조 4년[1728] 3월 경오조에는 “양주 목사 유척기(兪拓基)에게 진어사(鎭禦使)를 겸하게 해 본 주의 군사를 거느리고 누원에 진을 치게 하였다”라는 기록이 보여 누원의 입지가 서울 방어의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곳이었음을 드러낸다. 『영조실록』 권17 영조 4년 4월 임오조에는 “서로(西路)의 검암점(黔巖店)과 동로(東路)의 누원점(樓院店)은 모두 별장(別將)이 있으니, 이제 마땅히 기포(譏捕)가 보통이 아닐 것이오며”라 하여 누원점에 별장이 배치되어 있으므로 형찰(詗察)이 매우 엄격할 것임을 말한 기사가 있다. 당시 누원점이 상업적으로 번성하고 있었고 그에 따라 별장이 배치될 정도로 중요한 곳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정조실록(正祖實錄)』 권35 16년[1792] 9월과 이후 일련의 기사에서는 광릉(光陵)을 참배하러 가는 정조가 누원을 경유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이 지역의 교통로가 규모가 크고 중요한 곳이었음을 나타낸다. 그뿐만 아니라 『1872년 지방 지도』「양주 지도」에는 서울에서 이어지는 도로가 붉은색 선으로 그려져 있고,해등촌면과 함께 누원점을 표시하고 있다.
다락[樓]으로 된 원집[院宇]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누원의 설치 시기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 『선조실록』에 정유재란(丁酉再亂) 이후 많은 향화인들이 누원에 모여 살았음은 전술하였다. 또한 누원은 서울 동북부의 교통 요지로서 상업이 번성한 곳이었다. 조선 후기에는 특히 함경도와 경기도 북부로 이어지는 도로의 분기점에 위치하고 있어 서울로 유입되는 어물(魚物)을 이 지역의 상인들이 독점하였고 큰 규모의 장시(場市)가 형성되어 있었다. 현재 도봉산역 환승 주차장 인근에 다락원 터가 남아 있다.
교통상의 요지에 힘입어 인근에는 큰 장시가 형성되었음을 통해 당시 도봉 지역의 상업적 번성을 짐작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