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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꿈을 많이 꾼다. 거의 꿈을 꾸지 않고 잘 때가 없다. 꿈의 내용은 늘 쫓기고 시달리고 애를 태우는 것들이다. 그래서 자다가 욕을 할 때도 있고 심지어는 꿈에서 싸움을 하다가 옆에서 자고 있는 아내를 때리기도 한다. 깨고 나면 어떤 때는 죽음만이 영원한 안식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왜 그럴까?
아마도 살아온 삶이 힘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평생을 싸우면서 살아왔다.
어려서는 늘 가정 싸움에 시달렸고 성인이 되어서는 교권과 정권과 금권과의 싸움을 해야 했다. 때때로 작은 승리를 거두기도 했으나 대개의 경우는 항상 깨지는 것이다. 싸움을 잘 하기 위해서는 공격만이 능사가 아니다. 방어도 할 줄 알아야 하고 때로는 타협과 설득도 할 수 있어야 한다.
지역에서 일어나는 모든 집단적인 민원에서 항상 약자의 편에 서야 하는 내 입장은 어디를 가나 항상 경찰들과 상대해야 했다. 비록 입장은 다르지만 자주 대하는 사람들끼리 만날 때 마다 사사건건 감정을 가지고 불편하게 지낼 수만도 없는 일이어서 피차간에 협력할 것은 협력을 해서 불필요한 오해가 없도록 노력을 하는 편이었다.
한 번은 경찰에서 집회를 원천봉쇄 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꼭 그래야겠느냐고 하니까 위법사례가 발생하지 않도록 보장하는 각서를 써주면 원천봉쇄를 하지 않겠다고 해서 각서를 써주고 집회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집회를 마치는 순간에 사회자가 제 풀에 흥분해서 갑자기 행사 후에 계획에 없던 가두행진을 한다고 발표를 해버렸다.
급히 사회자를 불러서 중지를 시켰지만 이미 백여 명이 집회장 밖으로 나간 뒤라서 그대로 행진이 되고 말았다. 이튿날 아침 어김없이 일찍 경찰서로 오라는 전화가 왔다. 경찰서로 가서 어제의 약속 위반에 대해서 책임을 추궁하는 과장에게
“과장님! 이렇게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어제 행사를 경찰로서는 시위로 보겠지만 노동자들이 자기들 정서에 맞는 노래를 부르고 구호를 외치고 행진을 하는 것은 그들의 문화가 아닙니까? 노동자들의 문화행사로 보아 줄 수는 없습니까?”라고 설득을 했다. 결국 전 날 있었던 사건은 우발적인 것으로 간주하기로 해서 더 이상 거론을 하지 않기로 했다.
싸움은 강자와만 하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약자와 싸워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그러나 실상은 편견과 무지, 불신, 고집 등과 싸우는 일이다.
부천의 중동 뚝방에서 있었던 일이다. 이미 보상이 끝나고 아직 철거가 되기 전의 가옥주와 세입자의 사이에서 집세를 놓고 싸움이 벌어져 세입자 대표 두 명이 구속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세입자들은 이미 보상이 끝났고 집의 소유권이 주공으로 넘어갔으니 더 이상 세를 낼 수 없다고 주장하고 가옥주는 철거되는 날까지 집세를 받으려고 했다. 그런 상황에서 주민들에게 노래를 가르치기 위해서 생활교회 식구들을 데리고 갔다.
그 자리에서 30 살도 안된 젊은 여자가 “그렇게 똑똑한 지 목사가 사람이 구속되도록 놓아두고 이제 와서 뭐 하는 거냐?” 고 악을 쓰고 나오는 막무가내인 사태가 벌어졌다. 물론 뜯어말리는 사람도 있고. 순간 긴장감이 돌았지만 진정을 시키고 문제를 차근차근 설명을 해 주었다. 어떤 사건으로 한 사람이 경찰에 불려가서 조사를 받고 검찰로 넘어 가서 구속이 되고 재판을 받기까지에는 수많은 변수가 작용한다. 그 변수라는 것이 주로 돈과 힘의 작용이다. 복잡한 법 절차와 그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수많은 변수들을 알 턱이 없는 사람들이 어디서 한 마디씩 주워들은 짤막한 지식으로 무엇이 잘못됐네 어쩌네 하고 자중지란을 일으켜 불신의 늪에 빠져버린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서 생활교회 식구들 중에 혀를 차면서 “설령 목사님이 일을 잘못 처리했다고 하더라도 자기들에게 동전 한 푼 받지 않고 고생하는 목사님에게 고래고래 악을 쓰며 덤벼드는 저런 사람들을 위해서 무엇 때문에 고생을 하느냐?”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불신과 무지의 악순환에서 벌어지는 일일 뿐이다. 몇 날 몇 일을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자면서 경찰서에 가서 사정을 하고, 유치장으로 면회를 가고, 검찰청으로, 법원으로 뛰어 다녀도 밑도 끝도 없는 불신에는 아무 소용이 없다. 이런 일을 당할 때마다 예수가 자기를 못 밖은 자들을 향해서 “저들이 하는 짓을 알지 못하고 있나이다.” 라고 기도한 것을 조금은 이해할 것 같았다.
우리가 싸우는 싸움 중에서 가장 힘든 싸움은 자신과의 싸움이다. 그러나 그 싸움은 항상 지는 싸움이다. 싸움 중에 가장 가치 있는 것은 바로 가치와의 싸움이다. 보다 높은 가치를 위해서 투쟁, 헌신, 몰입 하는 것이 가장 가치 있는 싸움이다.
1992년도 여름에 역곡 주민 상담실로 장애인 부모들이 찾아왔다. 역곡 전철역에서 십분 밖에 안 떨어진 거리에 있는 산 밑에 이런 동네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생각되는 안골이라는 전원마을이 있었다. 안골은 전부가 그린벨트에 묶여 있는 곳으로 민정당 국회의원을 지낸 토호세력인 박규식의 집안 땅이었다. 집을 지을 수 없기 때문에 주민들은 토지와는 관계가 없는 ‘지상권’만 가지고 지주에게 ‘도지세’를 내고 사는 것이었다.. 그린벨트지역이라도 장애자들을 위한 시설은 할 수 있기 때문에 장애인 자녀를 둔 부모 열 사람들이 500 만 원씩 모아서 5,000 만원을 주고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 한 채를 샀다. 부모들은 자기들이 가정에서 돌 볼 수 없는 자녀들이 공동생활을 할 수 있는 시설을 만들기 위하여 이 집을 박성구 신부가 운영하는 작은 예수회라는 천주교 사회복지재단에 기증을 했다. 박성구 신부는 교황이 와서 음성에 있는 오웅진 신부의 꽃동네를 방문하려고 했을 때 "쟤 나쁜 애예요. 쟤네 집에 가면 안 돼요."라고 꼬장을 부려서 문제를 일으킬 정도로 근성이 있는 고문관(?) 신부였다. 물론 나는 박 신부가 그런 근성이 있기 때문에 오웅진 신부처럼 정권에 빌붙어 아부하지 않고서도 남들이 못하는 어려운 일을 하고 있다고 믿는다.
작은 예수회에서는 초가집은 헐고 장애자들이 편안하게 생활할 수 있는 초현대식의 건물을 신축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장애자를 위한 시설이 들어선다는 것을 알고 땅 주인이 변덕을 부려서 애초에 약속한 '토지 사용허가서'를 해주지 않아서 건축허가를 받을 수가 없게 되어 어렵게 돈을 마련한 부모들의 아름다운 계획이 그만 벽에 부딪치게 되었다. 하는 수가 없어서 초가지붕을 뜯어내고 기와를 올리고 내부를 대강 수리해서 사용하기로 계획을 수정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땅 주인이 땅을 사서 공사를 하라며 개축하는 것조차도 막았다.
작은 예수회 측은 더 이상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어 결국 5,000 만원을 주고 산 집이 아무짝에도 쓸모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부모들의 절실한 기도가 장애물에 가로 막힌 것이다.
나는 장애자 부모들로부터 딱한 사정을 듣고 땅 주인을 찾아가서 간곡하게 호소를 했다. 새로 짓는 건물의 명의를 땅 주인의 이름으로 할 터이니 건물을 사용 할 수 있도록만 해달라고 했다. 그러나 땅 주인인 박 의원의 형수는 "내가 중풍 걸린 시아버지를 10년 동안 모시는데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는데 왜 내가 장애인들이 불쌍하다고 도와주어야 하느냐?"고 나름 이유 있는(?) 항변을 하면서 거절을 했다.
그렇다고 약자들의 힘을 모아 강자에 대항하는 일이 전공인 프로 선수가 물러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에게는 그런 인간들을 다루는 방법이 있었다.
나는 산업장애자협회 부천지부에 협조를 부탁해서 회원들과 봉고차를 타고 땅 주인 집으로 출동을 했다. 실제로 불편한 사람들을 보면 땅 주인의 태도가 좀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다.
그러나 역시 말이 통하지 않자 하반신을 못 쓰는 회장이 침착하게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병신인 내가 보아도 너 같은 인간은 살 필요가 없겠다. 나 먼저 죽을 테니까 나를 따라 죽어라”고 말씀하시고는 의족을 풀어 버리고 피가 흐르는 다리를 드러내놓고 휠체어에서 내려와 땅 바닥에 주저 앉았다. 그리고는"목사님! 나 여기서 죽을 테니 돌아갔다가 나중에 와서 장사나 잘 치뤄주시오!"라고 결연한 의지를 밝혔다. 나도 예상치 못한 광경에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우물쭈물하고 있는데 상습범(?)인 회원들은 분위기를 눈치채고 같이 "목사님! 회장님의 뜻이 저렇게 강경하니 우리는 이만 돌아갑시다."하고 돌아가려는 시늉을 했다. 그제서야 얼굴이 새파래진 땅 주인 여자가 "여보세요! 목사 양반! 그냥 가면 어떻게 해요? 도장 찍어줄게 동의서 가져와요."라고 했다.
그런 일이 있은 다음에 일사천리로 공사가 진행되어 드디어 상량식을 하는 날이었다. 그날 상량식의 주관자는 물론 앞으로 이 집을 운영할 작은 예수회의 회장인 박성구 신부였다. 서까래만 올린 공사장에서 미사를 드리는데 미사는 형식에 따라 하는 것이니만큼 특별히 문제될 것이 없는데 기도가 문제였다. 미사 중에 박 신부가 기도하고 싶은 사람들은 기도를 하라고 했더니 닳고 달은 개신교신자들 빰치는 기도가 연이어 이어졌다. 나중에 안 일이었지만 그날 동원된 신자들은 대부분이 성령세미나회원이라고 하는, 개신교로 말하면 순복음교회신자 같은 사람들이었다. 하나님은 그런 기도 소리가 마음에 드셨을지 모르지만 결과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땡볕 아래서 오래 동안 서 있어야 하는 고행을 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 날 무사히 상량식을 할 수 있기까지 진짜 공을 세운 산재장애자협회 사람들은 밖에서 휠체어에 앉아 미사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도 하나님은 아셨을 것이다. 집이 세워지기까지는 신자들의 기도 보다는 장애자협회 회장의 깡다구가 더 효과가 있었다라는 것을.
모든 나의 공개적인 활동에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함께하는 부천경찰서 정보과의 박 형사라는 이가 있었다. 그는 굳이 연락을 해주지 않아도 내가 가는 곳에는 언제나 나타나서 한 번도 나에게 보여준 적은 없지만 기록과 촬영을 담당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몸집도 푸짐하고 꼭 목사같이 생겼고 나는 바싹 마른데다 날카롭게 생겨서 같은 장소에 나타나면 그가 목사이고 내가 형사 같아 보였다. 더욱이 그는 항상 점잖게 양복을 입고 다녔고 나는 일년 내내 똑 같은 잠바 하나만 입고 다녔기 때문에 영락 없었다.
한 번은 철거민 촌에서 행사를 마치고 버스를 타기 위해서 진흙탕 길을 걸어 나오는데 박 형사가 차를 세우더니 “큰 길까지 모셔다 드릴 테니 타시죠.” 라고 했다.
차 안에서 박 형사가 인사말로 “지 목사님, 정말 여러 가지로 어려운 일 많이 하십니다.”하기에 능청스럽게 “사실 나 같은 사람 훈장을 줘야 하는 것 아닙니까?”하니까 넉살 좋게 “세상이 좋아지면 그렇게 되겠지요.” 했다.
조금 가다가 박 형사가 조심스럽게 “지 목사님! 뭐 하나 물어 보아도 되나요?” 했다.
물어 보는 게 그 사람의 직업이니 당연한 일인데 태도가 너무 은근해서 오히려 내가 수상쩍게 생각 되어서 신경을 바짝 세우고 “그러세요.” 했더니
“목사님은 도대체 생활은 어떻게 하십니까?” 전혀 의외의 질문이었다.
“그런 것도 보고해야 하나요?”
“아니 그게 아니고 개인적으로 정말 궁금해서 그러는 겁니다.”
이런 저런 일로 늘 만나는 처지라서 나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의 입장으로 이렇다 할만한 교회도 직업도 없이 하는 일 마다 돈 안 되는 일만 하는 내 생활이 도저히 이해가 안가는 모양이었다.
“저도 뜯어 막고 삽니다.”
“에이, 그럴 리가?”
“물론 경찰처럼 강제로 뜯는 것은 아니지만 남들이 후원하는 헌금으로 사니까 마찬가지 아닌가요?”
박 형사가 껄껄 웃더니 “그거 말 되네요.”라고 했다.
사실 전적으로 후원에 의지해서 사는 나는 항상 후원에 목이 말랐었다. 광명시에서 일 할 때 누군가의 소개로 구로공단 앞에서 산부인과를 하는 여의사를 만났다. 근처에서 빈민운동을 하는 나에게 그녀가 후원자가 되어주기를 바라는 고마운 마음으로 만들어준 자리였다.
여 의사는 당시 여성 노동자들이 임신을 하면 소파수술을 해주는 일로 돈을 잘 벌고 있는 중이었다. 처음 만난 자리에서 여 의사는 두 시간 동안 자기가 얼마나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지를 강조하면서 하나님의 자기에게 왜 이런 시련을 주는지 모르겠다면 가정 문제를 털어 놓았다. 그의 고민의 핵심은 남편이 무능력해서 이혼을 하려고 하는데 막상 이혼소송을 하려고 했더니 남편에게 위자료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보통은 남편이 아내에게 위자료를 주는 법이지만 여 의사의 경우에는 반대로 아내가 능력 없는 남편에게 위자료를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남편이 돈을 못 벌어서 이혼을 하려고 하는데 오히려 돈을 주어야 한다니 억울해서 이혼도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남편에게 용돈까지 주면서 살 수는 없지 않느냐는 정말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사연이었다.
그녀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나는 그만 가겠다고 일어섰다. 그녀는 남의 이야기를 들었으면 무슨 답이 있어야지 그냥 가면 어떻게 하느냐며 어이가 없어 했다.
나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당신은 기독교인이 아닌데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느냐?”고 했다. 신앙을 내세우면서 희생할 줄도 모르는 여의사의 이기적인 모습에 대하여 파격적인 행동으로 충격을 주고 싶었다. 우리는 유쾌하지 못하게 헤어졌다. 후에 들으니 "무슨 그 따위 목사가 다 있느냐?"고 욕을 했다는 것으로 보아서 교육의 효과는 없었던 것 같다.
86년도에 미국으로 생활 망명을 가서 매제의 소개로 몬트 리라는 돈이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매제가 후원을 받을 길을 터주기 위해서 어렵게 마련한 자리였다. 당시 몬트 리 씨는 700 명을 고용하는 청소 회사 회사의 사장으로 디즈니랜드 영화에 나오는 골동품 오픈 롤즈로이즈를 타고 다니는 LA의 유명 인사였다. 그가 식당에 가면 앞에 주차장 있는 차에 누가 손을 댈까 보아서 종업원 한 명이 나가서 차를 지켜줄 정도의 대우를 받는 손님이었다.
그 역시 한 시간이 넘게 자기 신앙 간증을 했다. 평소에 심장에 문제가 있었는데 어느 날 TV를 보다가 갑자기 호흡이 곤란해서 앞으로 넘어지면서 손가락이 탁자에 있는 TV 리모컨을 누른 순간 채널이 바뀌면서 유명한 치유전문 부흥사인 오랄 로버츠 목사 방송이 나오더란다. 당시 그는 자체 방송국과 대학까지 가지고 있는 미국의 대표적 부흥사였다. 방송에서 오랄 로버츠가 아픈 사람은 아픈 부위에 손을 놓고 기도를 하라고 해서 심장에 손을 놓고 기도를 했듯이 통증이 그 순간 사라졌다는 것이다. 거기까지는 그런 대로 좋았는데 그 다음부터가 문제였다. 그 이후 자기의 체질이 바뀌어서 자기가 조금만 나쁜 생각을 하거나 저속한 것을 보던지 하면 즉각적으로 영혼이 더러워져서 몸이 아파지기 때문에 될 수 있는대로 그런 환경을 피하기 위해서 까다로운 은둔생활을 한다는 것이다.
참을성을 발휘해서 그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다음에 나는 ”지금 당신이 믿고 있는 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라고 이야기를 했다. 리 사장은 안색이 굳어지더니 "지 목사! 큰 마귀가 들렸소."라고 했다. 물론 우리의 인연은 그날 식사 한 끼로 끝이 났다. 지금 같으면 포용할 수 있겠지만 그 때는 비위가 약했을 때였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나에게 헌금을 보내준 분들 가운데는 자신들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과 인척관계가 전혀 없는 이들도 많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 때문에 헌금을 한 것이 아니고 전두환과 노태우 때문에 헌금을 한 것이었다. 역설적이지만 전두환과 노태우 때문에 먹고 살았다고 해도 될 것 같다. 왜냐하면 실제로 김영삼 시대에 들어와서 헌금이 많이 줄어서 생존이 어려워 호주로 올 수밖에 없었다. 군사독재 시기에 나에게 후원을 해오던 이들이 “군사정권이 물러나고 문민정부가 되었는데 아직도 투쟁을 하고 있느냐?”고 묻는 질문에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어떤 조직적 배경도 없는 전적으로 개인들의 후원에 의해서 유지되었던 내 생활에서 김영삼 씨 덕분에 싸워야 할 적이 없어져버린 것 같은 애매모호한 현실은 매우 난처한 것이었다. 이런저런 사연들로 아직도 현장에서 고생하는 사람들을 뒤로 하고 한국을 떠나게 되었다.
세상은 흑백이 아니라 칼러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흑백으로 나누는 것은 위험한 것이다. 그래서 ‘순진이 사람 잡는다.’는 말이 있는 것이다.
어느 추석에 삼성반도체 부천 공장 인사팀장 명함이 붙어 있는 갈비세트가 집으로 배달 되었다. '다른 집으로 갈 것이 잘못 왔는가 보다. 곧 찾으러 오겠지'라고 생각하고 몇 일간 그냥 내버려 두었었다. 몇 일이 지나도 찾으러 오는 사람이 없고 더 이상 두면 고기가 부패할 것 같아, '일단 먹고서 내가 부패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하고는 맛있게 먹어 버렸다. 궁금해서 어떤 경로를 통해서 그 선물이 정말 나에게 온 것인지를 확인을 해보았더니 제대로 보낸 것이었다. 결론은 나 같은 사람에게도 관리차원으로 갈비 세트를 보내는 것이었다. 그 후 집사람은 명절 때마다 십여 년을 꾸준히 (세상에 어느 효자가 그렇게 정성이 지극할까 싶을 정도로) 보내오는 갈비 세트로 식탁을 꾸려왔다. 나중에는 명절이 되면 은근히 기다려지기도 했다. 그 후 삼성이 어느 정도 관심이 있나 실험을 해보기 위해서
법인으로 등록된 환경운동 단체에서 행사를 하 데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기에 삼성 반도체에 지원을 부탁했더니 1,500만 원을 지원해 주었다. 말 한 마디에 우리 집 전세값인 1,500만 원이 생기는 '참 좋은 세상도 있다'는 것을 그때서야 알았다.
선물을 주고받는 관계는 이렇게 좋은 것이었다. 오고 가는 선물 속에 이런 훈훈한 관계(?)가 맺어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회가 이런 훈훈한 관계 속에 부드럽게 돌아갈 때 그 관계 속에 끼어들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썰렁한 찬바람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IMF 사태 후 부천의 삼성반도체 공장이 외국 회사에 넘어가고 인사팀장은 그대로 있었으나 같은 단체에서 다시 후원을 부탁했으나 거절 당했다. 회사가 외국 인에게 넘어갔기 때문에 지역 사회를 위해서 쓸 예산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래도 외국 회사 보다는 우리나라 재벌이 나은 셈이다.
어느 날 전혀 목사 같이 생기지 않은 사람이 소문을 들고 찾아왔다며. 출소해서 갈 곳 없는 전과자들 데리고 살고 있는데 지금 숙소로 짓고 있는 집이 철거가 되게 생겼으니 도와 달라고 했다. 매우 수상했지만 현장에 가보니 공유지가 아닌 개인 땅에 집을 짓고 있었다. “선수끼리 솔직히 이야기 합시다. 빈민운동이란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지 떼거지 쓰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이 아닙니다.” 라고 했더니 역시 선수답게 “‘당신은 힘 없는 자들 편에 서서 살지만 나는 힘 있는 자들을 뜯어 먹고 산다"고 솔직하게 이야기를 했다. 비록 그 일에 도움을 줄 수는 없었지만 그 이후 그와는 형님, 동생 하면서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그는 인천에서 큰 교회 목사들의 각종 문제에 끼어들어 해결사 노릇을 하고 관변 행사를 하면 인천에서 여성 목사들만 300명을 동원할 수 있을 정도로 실력이 있었다.
건달 목사가 어느 날 한 여집사를 데리고 찾아와서 동생이 말썽을 많이 부려서 신학대학을 들여보내려고 하는데 실력이 안될 것 같으니 합격을 시켜 달라는 황당무계한 부탁을 했다. 여집사의 아버지가 백령도에서 어업을 크게 하고 있는데 합격 시켜 주면 학교에 건물을 하나 지어주겠다는 것이다. 나는 기가 막혀서 “형님! 무슨 쌍팔년도 .이야기를 합니까?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라고 하니까 “이야기를 들으니까 신학대 학장이 지 목사를 무서워한다던데 한 번 해봐!”라고 했다. 말도 안되는 이야기이지만 워낙 고집을 세워서 “알았어요. 일단 전달은 해볼게요.”라고 했다. 여 집사가 신문지 뭉치를 주고 가길레 김인줄 알고 받았는데 가고 난 후에 풀어보니 100만원이 들어 있었다.
난감한 부탁을 받고 어떻게 할까 고심하다가 일단 은사이기도 한 신학대 학장에서 뵙고 싶다고 전화를 했다. 학장은 지금 공항에서 미국에 가는 길이라면서 전화로 이야기를 하라고 했다. 나는 차마 입이 안 떨어졌지만 어렵게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했다. 학장은 “지 목사! 내가 바로 그런 문제 때문에 입학 시험 때는 미국에 가는 거야. 요즘은 엄격하게 입학 시험관리가 되어 있기 때문에 불가능한 일이야, 그러나 합격 불합격을 미리 알려는 주겠다.”고 했다. 정말로 합격자 발표 하루 전날 미국에서 학장으로부터 학생이 불합격이라고 알려왔다. 건달 목사에게 전달을 했더니 “그러면 등록금을 못 내는 학생이 있으면 붙여 달라."고 했다. 다시 학장에게 전했더니 등록금 미납자가 있어도 차점자에게, 차점자가 복수이면 생년월일 순으로 합격 시키게 되어 있다고 상세히 설명을 해주었다. 등록금 마감이 된 날 학장은 다시 전화를 해서 “등록금 미납자가 없다.”고 알려주었다. 나는 학장의 말을 그대로 건달 목사에게 전달을 해주는 것으로 내 역할은 끝이 났지만 받은 돈을 돌려 주어야 하니 여 집사를 보내 달라고 했다. 다시 집으로 찾아온 여 집사는 “이제까지 많은 목사님들을 상대해 보았지만 목사님처럼 정직하고 정확하게 게 일을 하시는 분은 처음 보았습니다. 오히려 제가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라면서 돌려 받지 않겠다고 했다. 결론적으로 나는 전화 몇 번에 100만원을 벌었으니 내 생에 가장 고소득 작업을 한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