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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강 - 고대 병법의 발원과 손자병법
중국은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나라이다. 그렇듯 전쟁 또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중국은 역사 가운데 기록으로 남아 있는 전쟁의 시초는 중국 대륙의 주인인 한족(漢族)에게 변방이나 오지의 이민족의 기습으로부터 발단되었다.
광대한 중국 대륙은 북쪽은 광활한 사막이며 서쪽은 험준하기 이를데 없는 산악지대로서 이민족들은 그들 특유의 저항력으로 온갖 지세의 악조건을 극복하면서 한족을 괴롭혀 왔다.
한족은 스스로의 생존을 위하여 이들과 대응하는 과정에서 여러가지 방편이 생겨났다. 지리적 악조건을 극복하기 위한 지세의 이용과 기후의 적절한 배려로부터 시작하여 지휘자의 통솔 요령까지 깨닫기 시작하기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곧 한족 병법의 효시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한족은 마침내 초기 병법인 꾀로서 이민족에 대응하니 이민족은 견뎌내지 못하고 세력이 점차 감퇴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무력 사용의 방향이 한족 내부의 권력투쟁으로 전환되면서 이른바 춘추시대로 들어가게 된다.
춘추시대는 즉 군웅이 할거하는 시대라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세력의 판도가 형성되는 시기였다. 약자와 강자가 명확히 구분되면서 지배자가 두각을 나타나게 되니 마침내 중국은 다수 국가의 형태로 발전하게 되었다.
전국시대라면 그 앞의 춘추시대 300년을 이어 중국 역사나 세계사를 통하여 볼 때 일찍이 그 유래를 찾지 못할 만큼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모략과 음모가 활개를 치던 시기이다. 이러한 춘추전국시대에 한족은 자각하기에 이르면서 공자의 유교가 발생되는 반면에 권력투쟁이 그칠 사이 없게 되니 마침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병법가가 나타나면서 저마다 경륜을 자랑하기에 이르렀다. 이들 많은 병법가들은 인류 최초로 체계있는 군사학문을 제시했다는 면에서 병학의 원조로 불리워 질 만하다. 이와 같이 해서 군사학의 근저인 병법은 춘추,전 국시대에 다져졌다. 따라서 이들 많은 병법 가운데 대표작은 역시 손자병법이며 그 다음이 오자병법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이 두 병법은 가장 학문적 체계가 서 있기 때문이다.
물론 손자 이전에도 병법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학문으로서는 부족한 것이었다.
손자병법은 일본군의 군사사상의 기초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세게 많은 나라에서 군사학 고전으로서 상당히 많이 연구에 이용되고 있다. 특히 현대전에 있어서 게릴라전의 전술 교리는 손자병법이 원전처럼 취급되기도 한다.
더구나 중국과는 직접 전쟁 당사자가 되어 왔던 우리로서는 중국인의 병학을 과소 평가해서도 안되며 과대 평가해서도 안될 것이다.
중국 역사학의 아버지라고 일컫는 사마천의 '사기(史記)' 에 의하면 손자는 기원전 500여 년전 사람으로 이름은 '무(武)' 이며, 지금의 산동성에서 출생하였다 한다. 그러나 손무가 반드시 손자병법의 단독 저작자라고 단정지을 수 없다. 왜냐하면 손무가 생존했던 시절인 춘추시대의 여러가지 기록에는 손무에 대한 언급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병법의 내용을 검토해 보면 춘추시대 보다는 그 후인 전국시대가 아니면 논의될 수 없는 문장이 많은 점으로 보아 손자병법이 손무만의 단독 작품이라는 견해를 부정하는 일설이 성립될 수 있다.
전국시대에도 손자라고 불리우는 인물이 있었으니 그는 곧 손빈(孫殯)이다. 손빈은 또 다른 기록에도 유명한 군사전략가로서 등장하고 있다. 따라서 중국 기록물에는 손빈병법이 따로 나오기도 한다.
손빈은 전국시대의 강대국인 '제' 의 땅에서 출생했다고 하는데 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손빈은 손무의 후예로 되어 있다.
손빈은 젊었을 때 그 뛰어난 재주를 질투하는 동료의 엉뚱한 모략으로 '위' 에서 형을 받고 두 다리가 모두 잘린 불구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좌절하지 않고 그의 군사사상을 발전시키는데 전념하여 마침내 전국시대 군사전략가로 이름을 떨치게 된다. 이때의 손빈의 전략이 손자병법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 그가 손자병법을 저술했거나 가필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손빈의 단독 저작을 주장하는 학자도 있으나 일반적인 학설로는 원형은 손무가 저술했고 그것을 기간으로 하여 후예인 손빈이 자신의 병법을 보강하여 체계있는 병학서로 완성했다는 학설이 가장 유력하다. 또한 손빈 이후에 병학가들이 손자병법과 손빈병법을 묶어 오늘까지 내려온 손자병법으로 탄생 시켰다는 설도 있다.
따라서 여기에서 기술하는 손자병법은 손무와 손빈의 공저한 것으로 전제한다.
물론 두 사람의 시대적 차이는 뚜렷하게 나타나 있으나 손무의 사상에다 손빈이 내용을 보강하여 완전한 병학 체계를 형성했다고 보는 견해가 타당할 것 같다.
나는 모든 것을 종합하여 판단한 결과 손자병법은 주로 손무의 원형에 더 중점을 두겠다.
손자의 사상을 논 할 때 여러가지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먼저 손자병법이 성립한 그 시대적 배경을 간단히 요약해 둘 필요가 있다. 그 시대의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는가를 알지 못하고 손자사상을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시대에도 현대와 같이 경제적인 문제가 상당히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고 있었다. 생존을 위한 방법에 있어서 일반 대중은 지배계급의 수탈행위하에서 비참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먹고 살기 위해서 농토를 버리고 장사를 하기 위하여 도시로 나오는 경향이 많았다. 우리가 알고 흔히 사용하는 비유 가운데 '모순(矛盾-창과 방패)'이 라는 고사가 이 당시 있었을 정도로 먹고 살기가 힘들었다. 먹고 살기 위해 무엇이던 해야 되겠기에 방패나 창을 만들어 내다 팔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뚫리지 않는 방패와 무엇이든 둟을 수 있는 창을 같은 사람이 팔게 되었으니 그 방패와 그 창의 관계는 '모순'이라는 고사를 만들어 내었던 것이다.
중국인은 일본인과 비교 할 때 전혀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보는 관점에서 손자의 다섯가지 위기에서 보듯, 필사적으로 싸우는 것도 나쁜 것이요, 기어코 살겠다고 싸우는 것도 나쁜 것이니 싸움에서 승리하라는 것인지 패해도 좋다는 것인지 알 수 없는 것처럼 보여지지만 중국인의 처지에서는 좀 다른 해석을 한다.
중국의 유교사상 가운데 대표적인 행동 지침으로서 중용지도 (中庸之道) 라는 것이 있다. 즉 어느쪽이나 치우침이 없이 무난하게 변함없이 사는 길을 말한다.
원래 중용( 中庸)은 중국의 사서( 四書)의 하나이며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 )가 지은 책이다.
중용에는 불편부당한 도를 강조하고 있으며 중국인의 사상을 형성하는데 근저가 되어 왔다. 중국인 처지에서 볼 때는 악착같은 행동을 중용에서 벗어난 행동으로 보기 때문에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일본인과 정반대되는 특성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 장수에게 고작 지적한다는 것이 필사적으로 싸우지도 말고 기어코 살겠다고 싸우지도 말며 민첩하지도 말며 천천히 싸우고 청렴할 필요도 없으며 사람을 너무 사랑하지도 말라고 하였으니, 알다가도 모를 소리를 나열한 것 같으나 역시 중국인의 성품을 잘 나타낸 내용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고구려와 싸운 수나라나, 당나라도 고구려의 악착 같은 반격에 죽을 힘을 다해 싸운 흔적이 없었으며, 결국 병력의 절대 우세에도 불구하고 패배했다.
또한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반도의 삼국을 통일하였다고는 하나 당나라의 도움을 인정하면서도 소극적으로 작전상황에 대처한 기록으로 보아 신라의 악착같은 역할이 통일의 원동력이었음을 알게 한다.
임진왜란 7년을 통해서 명나라 지원군의 통쾌한 승전 기록을 볼 수 없는 이유도 그들 특유의 소극성이 감지된다.
더구나 6.25한국전쟁시 중공군의 전투 상황을 우리 세대가 직접 경험한 바로도 상술한 역사에서의 전황과 별로 다름이 없음을 확인하게 된다.
6.25한국전쟁에서 중공군이 승리했다고 자랑하는 전투 가운데 가장 큰 전공을 내세우는 전투는 강원도 현리 전투라고 한다. 그 전투에서 중공군은 가장 적은 병력으로 가장 큰 한국군 부대를 섬멸했다고 자랑한다. 놀랍게도 그들의 주장은 틀리지 않는다.
불과 연대병력의 중공군이 1951년 5월 16일. 한국군 3군단의 방어선 중심부를 뚫고 깊숙히 침투하여 북과 징을 치고 나팔과 피리를 불면서 소란을 피우기 시작했다. 제3군단 병력은 제3사단과 제9사단이었다. 이들 병력은 그 소리에 놀라 중공군 대병력이 포위한 것으로 오판하고 동요되기 시작하였다. 한쪽이 무너지니 우수수 덩달아 무너지면서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이 보고에 놀란 제3군단장 유재흥 소장은 후퇴간 지휘를 제3사단장에게 위임하고 전선을 빠져나갔다. 스스로 지휘권을 포기하고 예하 사단장에게 지휘권을 넘긴 경우는 6.25전쟁 가운데 최초의 일이다. 그러나 훗날 유재흥은 훗날 국방장관까지 올랐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일본에서 자란 탓으로 우리나라 발음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여기서 중공군이 사용한 전술은 바로 손자와 오자의 낡고 낡은 옛병법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되새겨야 한다. 이와같이 중국의 옛 전법은 지금 잣대로 보면 매우 유치하게 평가될 수도 있다. 그러나 때로는 그 전법으로 대승을 거둘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지금까지 설명한 것처럼 우리의 처지와 견해로서는 옛전법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렇다면 손자가 제시한 그와같은 방편이 전쟁에 승리 할 수 없는 계략이었을까. 중국인은 승리할 수 없는 방편을 받아들이며 자기들의 전법으로 사용하는 것일까.
손자는 바보도 아니었으며 중국인은 멍청하지도 않았다. 그 현대적 해석은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서구 열강을 제치고 미국과 함께 이른바 G2국가라는 지구상의 양대 국가로 위상을 떨치게 된데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아편전쟁을 통하여 영국이 한때 승리했다고 위세를 떨치고 홍콩을 차지했으며, 일본군이 중국 대륙을 석권하면서 중국을 손아귀에 넣었다고 승리에 도취했지만 지금의 판도는 여전히 중국은 중국인의 손에 있다.
넓고 넓은 대륙과 풍부한 지하자원 그리고 비옥한 농토는 그들에게 태평스러운 기질을 갖게 하는 한편, 서두르지 않으며 장래를 내다볼줄 아는 통찰력과 뿌리 깊은 전통사상을 갖게 한 것이다.
첫댓글 자고로 전쟁은 있기마년, 또한 이기위해 병법은 나오기 마련인데 그중에 손자 병법이 가장 널리 알려진것으로 전쟁에 무뢰한인 저로서는 딱 하나는 알고 있습니다. 상대를 알면 배전 백승한다는 손자병법에 있다고? 또한가지가 생각 납니다 . 싸우지 않고 이기는 병법이 제일이라고? 또 하나 있습니다 . 도망가는 36계 도 병법 중에 하나 인지요?ㅎㅎㅎㅎ 공자 앞에 문자썼습니다. 어떻튼 좋은 글 읽었습니다 . 고맙습니다.
모두 맞습니다.
손자병법은 군대 뿐만 아니라 민간 CEO에게도 경영지침서로 활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