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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시대, 초대교회에서 배우자!
사도행전 2:40-47
40. 베드로는 이 밖에도 여러 가지 증거를 들어 그들을 설득시키고 이 사악한 세대가 받을 벌을 면하도록 하라고 권하였다.
41. 그들은 베드로의 말을 믿고 세례를 받았다. 그날에 새로 신도가 된 사람은 삼천 명이나 되었다.
42.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듣고 서로 도와주며 빵을 나누어 먹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43. 사도들이 계속해서 놀라운 일과 기적을 많이 나타내 보이자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44.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그들의 모든 것을 공동 소유로 내어놓고
45. 재산과 물건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 나누어주었다.
46. 그리고 한마음이 되어 날마다 열심히 성전에 모였으며 집집마다 돌아가며 같이 빵을 나누고 순수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함께 먹으며
47.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이것을 보고 모든 사람이 그들을 우러러보게 되었다. 주께서는 구원받을 사람을 날마다 늘려주셔서 신도의 모임이 커갔다.
지난해 12월 31일 중국 우한(武漢)에서 폐렴 환자 27명이 발생했다고 보고된 지 9개월이 지났습니다. 이 폐렴은 신종바이러스인 코로나19로 명명되었는데 현재 전 세계의 코로나 확진자는 3천 5백만 명을 넘어섰고 사망자도 105만 명에 육박하고 있습니다.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우리는 일상생활의 제약을 넘어 삶의 방식마저 바꾸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까지 밀려왔습니다. 방역의 문제와 더불어 소비 급감, 경기침체, 일자리 위기 등 사회·경제 전반으로 확대되고 있는 겁니다.
그간 우리가 겪었던 사회·경제적 쇼크와 다르게 코로나19는 단시간에 우리의 모든 것을 뒤죽박죽 만들어 놓고 있습니다. 이번 사태로 인류가 직면한 모든 형태의 위기와 불평등은 더욱 심각해질 것입니다. 이런 변화는 취약계층을 집중적으로 공격할 것이고 우리 사회는 또 다른 갈등에 직면할 수밖에 없습니다.
코로나 사태의 진정이 가늠되지 않는 지금 우리 교회와 신앙인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물음에 저는 오늘 초대교회의 모습을 통해 그 해답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후 40일을 이 세상에 머물면서 제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주님은 승천하시면서 보혜사 성령을 너희에게 보내줄테니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약속을 기다리라고 명하십니다. 승천 후 10일째 되는 날, 주님의 말씀을 따라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120명의 신도들에게 보혜사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이른바 오순절 성령 사건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오순절 성령 사건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갑자기 하늘에서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혀 같은 것들이 나타나 불길처럼 갈라지며 각 사람 위에 내렸다 ▲신도들의 마음이 성령으로 가득 차서 성령이 시키시는 대로 여러 가지 외국어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세계 각국에서 온 경건한 유대인들이 자기네 지방 말로 들리므로 모두 어리둥절하였다 ▲성령 충만한 베드로가 설교할 때 그날 3천 명이 회개하고 신도가 되었다
그날 이후 성령 충만함을 입은 신도들의 삶이 오늘 본문과 사도행전 4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도들의 공동생활이라고 알려진 삶의 행태입니다.
회개의 세례를 받고 성령 충만해진 신도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듣고 서로 도와주며 빵을 나누어 먹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습니다. 신도들은 그들의 모든 것을 공동 소유로 내어놓고 함께 지내며, 재산과 물건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 나누어주었습니다. 신도들의 공동생활에 감명을 받은 이들이 많아지며 신도들의 모임은 나날이 커져만 갔습니다.
이 신도들의 공동생활이 교회의 원형입니다. 학자들은 오순절 성령 사건으로 교회가 시작되었고, 세상 끝까지 복음이 전파되리라는 약속이 이루어졌다고 말합니다.
신도들의 공동생활로 출발한 초대교회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열악한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예수를 믿고 신도가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자칫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앗아갈 수 있는 위험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목숨을 빼앗기기도 했습니다.
로마로부터 엄청난 박해를 받고있는 상황이기에 사도행전에 기록된 초대교회의 모습은 정말 놀라운 기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정말 신도 각자가 성령 충만하지 않으면 유지 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제가 오늘 설교 제목을 ‘코로나19 시대, 초대교회에서 배우자’이라고 정한 이유는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초대교회의 모습에는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이 혼재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초대교회가 세상에 충격을 주고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에 사람들이 감복하고 참여하게 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 승천과 성령강림 사건은 각지에서 모인 유대인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습니다. 더군다나 성령강림 후 언어의 소통을 경험한 뒤에는 더욱 그러했습니다.
사도들은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겠다는 약속(요 14:1-28)과 그 약속이 그들이 죽기 전에 이루어질 것이라는 구체적인 시한(눅 9:27)까지 증거 하였습니다.
종말의 징조에 대한 메시지는 사람들에게 더욱 충격을 주었습니다. 처처에 기근과 재난이 있고 전쟁이 일어날 것(막 13:8)을 예언했는데 그 시대는 정말로 그런 일들이 계속되고 있었던 거죠. 예루살렘의 기근과 로마의 침공, 신도들에 대한 박해는 주님의 약속에 더욱 매달리게 하였습니다.
로마에 대한 이스라엘의 항전은 마사다 전투로 막을 내리고 성전은 힘없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예수님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을 목격한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은 종말에 대한 확신이 굳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종말론적 분위기에서 신도들은 나날이 늘어났던 것입니다.
313년 기독교가 로마 국교로 공인되기까지 초대교회의 혼란은 거듭되었습니다. 그중 가장 크게 문제 되었던 것은 영지주의와 열광주의였습니다.
영지주의는 2세기에 발생한 이원론적 종교체계를 신봉합니다. 물질은 악하고 영은 선하며, 구원은 비밀에 쌓인 지식, 즉 영지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교파입니다. 영지주의는 물질은 불완전하고 본질적으로 불순하다는 사상에서 출발합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도 가현설을 주장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육체 없이 태어났으며, 생전에 그가 겪은 고통, 십자가 수난도 모두 환상이라는 것이죠. 이들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도 부정했습니다.
이들은 또 육체와 영의 세계를 확고히 나누어 놓고 영지만 획득하면 육체는 뭘 해도 상관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추종자들이 세상의 향락과 방탕에 빠지기 일쑤였습니다.
열광주의는 2세기 말 소아시아를 거점으로 아프리카의 카르타고까지 번져간 과격한 성령운동 및 예언운동입니다. 흔히 몬타누스주의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몬타누스(Montanus, 135-177 AD)는 소아시아 프리지아 출신으로 어느 날 갑자기 성령이 자기를 통해 직접 말씀하신다고 하면서 이제부터 성령의 시대가 열렸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몬타누스는 예수님이 재림할 시간이 가까이 왔고, 새 예루살렘이 프리지아의 페푸자라는 동네로 내려올 것을 예언합니다. 그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철저히 금욕하며 재림을 기다렸으나 재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몬타누스의 열광적인 성령운동은 사라지지 않고 더 크게 번져나갔고 세상을 멀리하는 폐단을 낳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초대교회에서 배워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먼저 성령이 충만한 교회는 세상과 소통하며 생명을 나누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120명의 신도에게 성령이 내립니다. 사도행전 2장 2절에 ‘갑자기 하늘에서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그들이 앉아 있던 온 집안을 가득 채웠고
혀 같은 것들이 나타나 불길처럼 갈라지며 각 사람 위에 내렸다’고 했습니다.
성령이 각 사람에게 내렸지만 이 성령의 임재는 개인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공동의 체험이었던 거죠. 하나님의 숨결이 함께 모여 주님의 약속을 기다리는 신도들에게 바람처럼 불처럼 임한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자 곧 바로 기이한 일이 벌어집니다. 신도들은 성령이 시키는 대로 여러 가지 언어로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이들의 언어는 요즘 교회에서 말하는 방언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즉 방언은 주위 사람들이 그 뜻을 알기 힘든 이상한 언어로 기도하는 것을 말하지만, 이들의 방언은 외국어였습니다. 각국에서 모인 순례자들의 언어로 말을 한 것입니다. 순례자들은 저마다 자신들의 언어로 하나님께서 행하신 큰일들에 관해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부활과 승천, 그리고 그가 약속한 성령강림에 대해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감동을 받아 세례를 받고 신도가 되었습니다.
성령 강림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은 세상과 원활한 소통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분열과 반목이 아닌 소통을 통한 생명 나눔이 시작된 것입니다. 바벨탑 사건 이후 인류는 언어가 서로 달라져 소통이 끊어졌습니다. 소통의 단절은 반목과 다툼으로, 착취와 전쟁으로 번져갑니다. 그런데 성령의 임재로 서로에게 고통을 주는 시대가 끝나고 일치와 화해의 새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성령은 세상 속에서 소통과 평화를 주는 힘임을 오순절 성령강일 사건을 통해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니 성령이 충만한 교회는 세상과 소통하며 생명을 나누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둘째로 초대교회는 이 세상의 방식과 는 다른 가치의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신도들은 이 세상을 살고 있지만,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동시대 사람들과 같은 옷, 같은 음식을 먹었지만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초대교회 교인들은 엄청난 핍박 속에 살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당하고, 때로는 거리에 매달려 불태워지거나 경기장에서 사자 밥이 되어야 했습니다. 순교는 일상이 되었지만 굴하지 않고 세상과는 다른 방식으로 나눔과 섬김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은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을 팔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눠주었습니다. 날마다 모여 생명의 말씀을 공부하고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생명을 바쳐 나눔과 섬김의 생활을 하는 초대교회 공동체는 나날이 켜져 갔고 결국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우리 교회도 초대교회를 본받아 이 세상의 방식과 는 다른 가치의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나눔과 섬김, 생명을 나누는 삶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켜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악을 선으로 갚으므로 악한 세력을 굴복시켰습니다.
초대교회가 로마로부터 갖은 박해를 받았다는 것은 너무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심지어 유대인들로부터도 탄압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악을 악으로 갚지 않았습니다. 온갖 차별과 박해 가운데서도 신앙의 힘으로 신도들의 공동생활을 이어갔습니다. 세상의 방식과는 다른 그들의 삶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기독교가 313년 로마제국의 국교로 선포되기까지는 그리스도인들의 희생과 헌신이 크게 작용했습니다. 이 희생과 헌신은 로마제국에 큰 전염병이 돌았을 때 더욱 빛이 났습니다. 국교 가 되기 전까지 로마에는 큰 역병이 두 번 돌았습니다. 안토니우스 역병(165-180)과 키프리아누스 역병(249-262)이었습니다.
안토니우스 역병(Antonine Plague)은 파르티아 원정에서 돌아온 군대에 의해서 전파되었습니다. 천연두 또는 홍역으로 의심되는 이 역병의 창궐로 169년에 로마 황제 베루스(Lucius Verus)와 180년 안토니누스(Marcus Aurelius Antoninus)가 죽었다고 하니 정말 끔찍한 사태라 하겠습니다.
키프리아누스 역병(Kyprianus Plague)은 말라리아로 의심되는 전염병이었는데 엄청난 희생을 초래하였습니다. 이 전염병이 극에 달했을 때는 로마시에서만 하루 5천 명씩 죽어 나갔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코로나19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극심한 공포가 로마제국을 지배하였습니다.
이 전염병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과 일반인들의 삶은 확연히 구분되었다고 합니다. 알렉산드리아의 교부 디오니시우스(Dionysius of Alexandria)는 일반들에 대해 이런 기록을 남겼습니다. “전염병이 발발했을 때, 그들은 병에 걸린 사람들을 쫓아냈고,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을 버리고 떠나거나 아직 죽지 않은 사람까지도 도로에 던져버렸다. 또 매장되지 않은 시신을 먼지처럼 취급했다. 그렇게 함으로 치명적인 전염병의 확산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그들은 결코 전염병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스도교의 급속한 부흥에 두려움을 느끼던 율리아누스(Julian) 황제는 전염병 이후 시작된 기독교의 급속한 부흥을 막고자 이교도 자선 단체를 만들어 기독교인이 보여준 선행을 모방하려고까지 했습니다. 율리아누스는 362년에 쓴 서신에서 100여 년 전의 키프리아누스 역병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보여준 선행에 대해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건 정말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 악한 갈릴리인(그리스도인)은 자기네 가난한 자들뿐 아니라 우리 로마의 가난한 사람들까지 돌보았습니다.”
전염병이 창궐하는 상황에서 당시 대다수의 사람들이 오직 자신만을 보호하려고 했을 때 초대교회는 희생적인 봉사 활동을 합니다. 사람들이 전염병을 피해 도망가고 병에 걸렸다는 이유로 가족마저 외면할 때 기독교인은 그 전염병 한 가운데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인과 일반인을 구분하지 않고 돌보았습니다. 그들은 십자가의 희생을 감내하신 예수님을 본받아 스스로의 목숨조차 바치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였습니다
가장 세속화된 현장 속에서 이 세상을 넘어선 가치와 이상이 존재함을 온몸으로 보여 준 것이 바로 초대교회였습니다. 이를 위해 교회는 많은 피를 흘렸고, 오해를 받고, 변방으로 내몰리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초대교회에서 배울 것은 비록 세상의 변방에 내몰려 핍박받더라도 이 세상 방식과는 다른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이 세상 속에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기 위해서 희생과 봉사를 아끼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코로나19 대유행의 위기 상황에서 우리 또한 초대교회의 헌신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이 땅에는 아직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악을 행하는 많은 무리들이 있습니다. 그 악행에도 불구하고 우리 교회는 나눔과 섬김으로 하느님의 정의와 평화를 일구어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이 행할 사명인 것입니다.
위기의 시대 악을 선으로 갚는 자리에 계신 모든 이들에게 하느님의 크신 은총이 함께 하시길 축원합니다.
<2020. 10.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