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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성한교회/낮-201220
메시아이신 예수님
미5:1-9
몇 년 전에 일본에서 창간한 잡지 가운데 사람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잡지가 있습니다. 잡지 겉 표지에 회색 나비가 한 마리가 그려져 있었습니다. 회색 나비가. 평범한 회색 나비가 한 마리 있었는데.
누구나 이 잡지를 사서 회색 나비를 건드리면 그 나비가 총천연색 나비로 변하는 것이었습니다. 화려한 나비로 변화되어서 많은 사람들이 그 잡지를 구입했다고 하는 기사가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은 쟂빛과 같고, 회색과 같아요. 코로나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 하고, 아파하고, 상처받고, 희망을 잃어버리고, 그냥 마지못해서, 죽지 못해서 살아가는. 그런 분들이 많이 계신데.
회색 나비지만 손이 닿았을 때 휘황찬란한 나비로 변화되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손길이 여러분 마음과 몸과 여러분의 삶을 어루만지시고 터치하실 때 아주 행복한, 향기로운 인생으로 변화되기를 축원합니다.
구약은 신약의 예고편입니다. 구약은 신약의 설계도이고, 그림자이고, 모델하우스이고, 모형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모든 예언은 신약의 성취로, 말씀의 성취로 종결이 됩니다.
그래서 창세기3장15절에 보게 되면 죄를 범한 아담과 하와를 뱀이 발꿈치를 물어요. 여자의 후손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합니다.
발꿈치보다는 머리가 중요합니다. 발꿈치는 치료를 잘 하면 낫고 걸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머리는 한 번 상하게 되면 죽는 것처럼 메시아. 메시아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한다. 박살이 나게 한다. 그런 얘깁니다.
사탄되는 뱀이 사람의 뒷 발꿈치를 문다할지라도 하나님이 보내신, 여자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가 사탄의 머리를 밟아버린다. 상하게 한다. 그래서 창세기3장15절 말씀은 최초의 메시아를 약속한 말씀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부터 메시아를 약속했어요. 그래서 창세기3장15절을 원시복음. 최초의 복음. 최초로 메시아를 약속한. 그러한 복음인데. 창세기3장15절에서 시작한 메시아에 대한 말씀이 구약 전체에 나타나 있고, 그리고 성탄절에 와서 그 약속이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구약성경 여기저기에 메시아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 많이 있어요. 특별히 이사야에 보면 메시아에 대한 말씀이 있는데. 대부분은 부분적입니다.
부분적인 말씀인데. 오늘 우리가 읽은 미가서 5장1절에서 9절까지 읽었습니다. 미가서 5장1절에서 9절의 말씀은 메시아 탄생의 종합적인 말씀. 메시아 탄생이 종합적으로 들어 있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탄주일을 맞이해서. 또 성탄절을 기다리면서 우리의 메시아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다 만나는. 체험하는. 이러한 은혜가 사랑하는 모든 성도들에게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메시아이신 예수님. 첫 번째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십니다
본문 2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베들레헴만 해도 됩니다. 베들레헴만 해도 다 알아듣습니다. 마태복음2장6절에 보면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그랬습니다.
또 누가복음2장에도 보면 예수님 탄생하신 곳이 다윗의 동네 베들레헴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른 곳에는 메시아 탄생하시는 곳이 그냥 베들레헴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오늘 본문에 보면 ‘베들레헴 에브라다’ 에브라다야. 그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에브라다’ 이 말은 베들레헴의 옛 이름입니다. 그러니까 원래 동네의 이름이 ‘에브라다’인데. 어느날 이 동네의 이름이 ‘베들레헴’으로 바뀌었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이 동네의 이름을 부를 때 ‘에브라다’라고 부르기도 하고, 또 ‘베들레헴’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택시를 타고 ‘세종마트로 갑시다.’ 그러면, 택시기사가 ‘세종마트요?’ 잘 모르는 듯이 묻습니다. 그러면 구 대영학원이었던 곳으로 갑시다. 그러면 아 거기요. 그러면서 알았다는 듯이 그곳까지 태워다 줍니다.
세종마트 그러면 사람들이 잘 몰라요. 근데 구 대영학원 그러면 대구에 오래 살았던 사람들은 잘 알아 들어요. 그래서 에브라다. 베들레헴만 얘기하면 잘 모르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베들레헴 에브라다.’ 그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장차 메시아가 태어날 것은데. 미가 선지자는 메시아가 베들레헴 에브라다에서 태어날 것이다. 그렇게 예언을 했는데. 예수님 태어나기 700년 전에 예언을 했습니다.
700년 전에 예언 했는데. 700년 후에 베들레헴 에브라다에 예수님께서 메시아로 정확하게 예언한 대로 태어나셨습니다.
베들레헴이라는 말은 떡집을 의미합니다. 떡집. 에브라다라는 말은 풍성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두 개를 합하면 ‘떡이 풍성하다.’ 생명의 떡. 생명의 떡. 모든 인류. 모든 사람들이 먹고도 남는. 생명의 떡이 풍성한 곳이다.
먹다가 모자라는 것이 아니고, 먹다가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생명의 떡이 풍성한, 말씀이 풍성한, 구원이 풍성한. 이것이 바로 베들레헴 에브라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근데 지금 읽은 말씀에 보면 ‘그의 근본은’ 메시아의 근본은 ‘상고에’ 그리고 ‘영원에 있느니라’ 그랬습니다. ‘상고’ 옛날. 아주 옛날. 멀고 먼 옛날. 맨 처음 옛날. 태초. 그런 얘깁니다.
그러니까 메시아는 맨 처음부터 있었어요.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 맨 처음부터 있었고. 그 다음에는 ‘영원에’ 마지막 순간까지. 영원부터 영원까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요한계시록1장8절에 보게 되면 ‘예수그리스도는 알파와 오메가요.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전능자다’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메시아는 과거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고, 장차 오실. 전 세대를 책임지시는 그러한 분. 옛날을 모르시거나. 옛날에 없으셨던. 그러한 분이 아니고,
또 어느 때까지는 계시고, 그 다음에는 없으시는 분이 아니라. 맨처음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상고부터 영원까지 계시는. 그러한 메시아. 그분은 역사적인 분이다. 그런 얘깁니다.
메시아는 미가 선지자가 700년 전에 예언하고, 베들레헴에 직접적으로 태어난 역사적인 분. 신화적인 분이 아니고, 소설적인 분이 아니고, 동화적인 분이 아니고, 설화적인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베들레헴에 역사적으로 직접 오셨던 그러한 분이다. 그런 말씀입니다.
실비오 피에르산티가 쓴 「국민 모두가 사장인 나라」그런 책이 있습니다. 이탈리아에 대한 책인데. 이 책에 보면 다국적 기업 CEO(최고 경영자)도 있고, 엔지니어도 있고, 구두 수선공도 있고, 또 운전기사. 그리고 평생 무보수로 봉사활동을 한 사람도 있는데.
이들 모두는 자기 분야에서 사장이다. 자기 분야에서 최고다. 1인자이다. 모두가 다 자기 분야에서 행복한 사람이다. 대통령이나 수상만 행복한 것이 아니고, 자기 분야.
축구선수는 축구선수대로 행복하고. 예술하는 사람은 예술하는 대로 행복하고. 봉사활동하는 사람은 봉사활동하는 대로 아주 행복한. 만족을 누리는. 그러한 나라가 이탈리아다. 그러한 것을 자랑하고 있는 책입니다.
우리 나라에도 공부 열심히 하는 사람. 안정된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 또 전문직을 가지고 있는 사람. 이런 저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또 모두가 다 각자의 자리가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어느 자리에 있다할지라도 그 자리가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사람들을 돕는.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는 자리가 된다면 그 자리는 최고의 자리다. 그런 얘깁니다.
최고의 자리는. 어떤 자리. 높은 자리. 그런 게 아니고. 어떤 상황에 있던지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위로하고 격려하게 되면 그 자리는 최고의 자리다. 그러한 얘깁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베들레헴에 오셨습니다. 베들레헴 자체가 거룩한 곳이 아닙니다. 유명한 고이 아닙니다. 아주 시골이고,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그러한 곳인데.
메시아가 베들레헴에 오심으로 그 땅의 가치가 높아지고, 그 이름이 높아지는 겁니다. 예수님이 그곳에 오심으로 베들레헴이 베들레헴이 된 것입니다.
오시기 전까지는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는 곳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베들레헴과 같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유명한 사람도 아니고, 엄청난. 그러한 사람도 아닙니다.
몇 십년 살다가 이 세상을 떠날 수밖에 없는 유한한, 작은 존재인데. 우리 자신이 베들레헴이 되어서 예수님이 우리 마음에 태어나고. 예수님을 우리 마음에 모시고 산다면 우리는 가장 행복하고, 높은, 고귀한 사람이 되는 줄 믿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들이 잘 되는 사람도 교만하지 말고, 마음 문을 활짝 열고 겸손하게 예수님을 모셔야 되고, 또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다할지라도. ‘아 힘들고 어려운데 무슨 교회야. 무슨 예배야. 무슨 메시아야. 나는 상관 없어. 나는 너무 힘들어.’
힘들다고 마음 문을 닫아놓고,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그런 삶이 아니라 힘들면 힘들수록 마음 문을 활짝 열어놓고, ‘주님 도움이 필요합니다. 내 가운데 오셔서 나를 치료하여 주시기 원합니다. 나를 도우시기를 원합니다. 주님이 나를 일으켜 주시기 원합니다. 사람은 할 수 없어도 주님은 할 수 있는 줄 믿습니다.’
우리 상황이 어떠하든지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놓고, 예수님을 모시는. 이 세상의 베들레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예수님이 탄생하시는 영적인 베들레헴 같은 우리 모든 성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 고난을 받으십니다
본문 3절 “그러므로 여인이 해산하기까지 그들을 붙여 두시겠고 그 후에는 그의 형제 가운데에 남은 자가 이스라엘 자손에게로 돌아오리니”
지금 읽은 말씀 가운데 ‘여인이 해산하기까지’. ‘해산하기까지’ 그랬습니다. 이 단어는 복합성과 이중성이 들어가 있는 단어입니다. ‘해산하기까지’에는 복합성과 이중성이 들어가 있다는 얘깁니다.
‘여인이 해산한다’ 하는 얘기는 ‘가장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럽다’ 하는 얘깁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표현할 때 너무 어려워. 힘들어. 그것을 해산의 고통. ‘해산의 고통을 치룬 거 같아. 너무 힘들고 어려웠어.’ 그렇게 표현을 합니다.
그러나 해산의 고통이 있은 후에 새로운 생명이 태어났을 때. 새 생명이 너무 기뻐 가지고 해산의 고통을 잊어버리는. 새 생명을 보았을 때 그 고생한 것을 다 잊어버리고 새 생명을 보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거.
이것이 바로 해산의 고통이다. 그래서 해산의 고통은 가장 어렵다는 동시에 그 고통을 잊어버릴 정도로 기쁘고 즐겁다는 것입니다.
해산의 고통이 있은 후에 새생명이 태어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기에 복합성과 이중성이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게 고통스러운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완전하신 분이시면서도 죄인으로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어요.
인간이 되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해산의 고통을 겪으셨지만.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심으로 인해서 인간의 모든 죄의 문제가 해결 되었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은 천국 백성이 되는. 그 은혜를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해산의 고통 이후에 더 놀라운 기쁨.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기쁨이고, 십자가의 영광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예수님께서 해산의 고통. 그 값을 치루셨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다 그저 구원받았어요. 그저.
너무 값이 없어 가지고 그저 주시는 것이 아니라 너무 비싸기 때문에. 값을 주고 살 수 없을 정도로 비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저 주시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해산의 고통을 치룰 수 있는. 값을 지불할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에게 그저. 그것을 우리는 에배소서2장8절에 ‘은혜로’ 그래요. 은혜로. 우리가 은혜로 구원을 받았어요. 그래서 구원은 선물입니다.
구원받은 사실에 대해서 우리의 공로를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내가 이렇게 이렇게 고생을 해서 구원을 받았다. 그럴 사람이 한 사람도 없고, 하나님의 은혜로, 선물로 내가 구원을 받았다. 그런 고백을 우리는 해야 합니다.
독수리 한 마리가 날개에 많은 상처를 입고 자살을 하려고 합니다. 자살을 하려고 해요. 날지 못하는 독수리는 살 가치가 없다. 독수리는 높이 날아야 되는데 나는 이 상처로 인해서 날 수가 없다. 날지 못하는 독수리는 살 가치가 없고, 차라리 죽는 것이 독수리의 명예를 위한 것이다. 그래서 낭떠러지에 서서 죽으려고 하는데.
자살하려고 하는 그 순간에 대장 재빠르게 날아와서 잡아서 물었습니다. ‘너 왜 그러느냐’고. ‘왜 그런 어리석은 행동을 하려고 그러느냐?’ 그랬더니.
자살하려고 했던 독수리가 자기 상처를 보여 주면서 ‘나는 이 상처 때문에 날 수가 없습니다. 높이 날지 못하는 독수리는 차라리 독수리의 명예를 위해서 죽는 것이 낫습니다. 그래서 떨어져서 죽으려고 합니다.’
그때 대장 독수리가 자기 날개를 펼쳤어요. 날개를 활짝 펼치고 ‘내 날개를 봐라. 내 날개 밑을 봐라. 내 몸을 봐라. 네 상처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상처들이 있다.’
‘네 상처도 크지만 네 상처와 비교할 수 없는 더 많은. 무수한 이 상처를 봐라. 그리고 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내 마음에 받은 상처. 이 눈에 보이는 상처보다 열배 백배 더 많은 상처가 있다.’
‘이 세상에 상처 없는 독수리는 없다. 상처 없는 독수리가 있다면 태어나자 마자 죽은 독수리. 그 독수리는 상처가 없지만 태어나서 날 수 있는 모든 독수리는 상처가 다 있다. 내 상처를 봐라.’
그래서 자살하려고 했던 독수리가 대장 독수리의 상처를 보면서 위로를 받고, 힘을 얻어서 열심히 상처를 치료하고 날기 시작해서 훌륭한 독수리가 되었다 하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상처가 있습니다. 상처 없는 독수리가 없듯이 이 험한 세상, 힘든 세상. 경쟁과 전쟁을 방불하게 하는 이 험한 세상을 살아나가면서 몸의 상처, 마음의 상처가 하나도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가 다 상처가 있습니다.
나만 상처가 있는 게 아니라 모두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보면 ‘다른 사람들은 모두가 다 행복한 것 같아. 웃으면서 살아. 건강한 거 같아. 문제가 없는 것 같아.’ 그렇게 생각이 되지만,
막상 얘기해 보면 거기에도 어려움이 있고, 막상 들여다 보면 모든 가정가정마다. 사람들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아픔과 상처와 눈물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보면 모두가 다 상처가 있습니다. 저에게도 많은 상처가 있습니다. 근데 놀라운 것은 주위에 많은 분들이 저를 위로해 줍니다. 위로해 주니까 제가 또 힘이 납니다. 위로가 우리의 상처를 치료합니다.
위로가 필요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위로가 위로가 됩니다. 그래서 헨리 나우웬이라고 하는 사람은 ‘상처받은 위로자’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상처를 받은 사람이 상처 받은 사람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상처가 없는 사람은 잘 몰라요. 그러나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 상처받은 또 다른 사람을 위로해 주는 겁니다. ‘나도 너무 힘들었어. 나도 상처 받았어. 나도 눈물이 많았어.’ 그게 위로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다른 사람들의 상처를 잘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받아들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들을 위로해 주는 거예요. 위로하면 위로가 됩니다.
위로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놀랍게 위로해 주십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위로했는데 내가 힘이 생기는 겁니다. 내가 위로가 되는 겁니다. 내가 위로가 되고, 내가 치료를 받고 힘을 얻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성령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상처 받은 사람은 위로를 받고, 위로 받은 사람들은 또 다른 사람을 위로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히브리서10장24절 25절에 보게 되면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말세에 모이기를 힘쓰라’ 그랬습니다. 이 말세가 되면 사람들이 안 모입니다. 그러나 모이기를 힘쓰고, 사랑과 선행을 겪려하며. 격려해 줘야 합니다. 사랑하고 선을 행하면 격려해 주고, 너무 잘한다고 격려해 주라 그랬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사람들을 격려해 주는 이런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저런 고난과 고통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비교한다면 우리가 겪는 고난은 고난도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오해를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해 받은 것에 비하면 오해도 아닙니다. 대부분 우리의 상처와 오해는 우리가 잘못했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나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고, 실수가 없으신 분인데도 많은 오해를 받고, 십자가에 죄인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 나를 구원하기 위해 지신 그 십자가를 바라볼 때 오해도 풀리게 되고, 상처도 다 치유되는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봄으로 여러분의 모든 상처가 치유되는 풍성한 은혜가 넘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 번째 승리하십니다
본문 4~5절 “그가 여호와의 능력과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목축하니 그들이 거주할 것이라 이제 그가 창대하여 땅끝까지 미치리라 이 사람은 평강이 될 것이라 앗수르 사람이 우리 땅에 들어와서 우리 궁들을 밟을 때에는 우리가 일곱 목자와 여덟 군왕을 일으켜 그를 치리니”
9절 “네 손이 네 대적들 위에 들려서 네 모든 원수를 진멸하기를 바라노라”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나가 엄청 많아요. 엄청 많아요. 그러나 이스라엘을 가장 어렵게 힘들게 악날하게 처절하게 괴롭혔던 앗수르라고 하는 나라. 앗수르. 아시리아.
북이스라엘을 점령하고 식민지를 만들고. 이스라엘 사람들을 강제로 끌어가고. 그리고 앗수르 사람들이 강제로 이스라엘에 와서 살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원치도 않는 결혼을 강제로 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원하지 않는. 오랑케와 같은 앗수르 사람들과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강제로 결혼을 시켰습니다. 그래서 그들 속에서 태어난 사람들. 앗수르 사람과 이스라엘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2세, 3세들. 혼혈인. 그들이 사마리아 사람. 그들이 사는 땅을 사마리아 땅 그랬습니다.
그래서 순수한 혈통을 가지고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마리아 땅을 밟지도 않고, 지나가지도 않고, 사마리아 사람들을 사람 취급하지도 않았던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앗수르에게 큰 상처를 받았어요. 너무 너무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근데 5절 말씀에 보게 되면 ‘우리가 일곱 목자와 여덟 군왕을 일으켜’ 그랬습니다.
‘일곱 목자와 여덟 군왕.’ 일곱이라는 숫자는 완전 숫자입니다. 일곱 교회. 7이라는 숫자는 완전 수입니다. 여덟은 완전숫자보다 더 한 숫자. 완전 수 보다 더 큰 숫자.
그래서 일곱 목자. 일곱 목자만 해도 되는데. 여덟 군왕. 메시아가 우리 가운데 오셔서 일곱 목자가 되시고, 여덟 군왕이 되셔서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앗수르를 물리치겠다는 그런 말씀입니다.
앗수르 앞에 이스라엘은 너무 작고 연약합니다. 그러나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는 날에는 메시아 스스로 일곱 목자와 여덟 군왕이 되어서 앗수르를 물리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평강과 승리를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나 우리는 연약하지만. 우리 앞에는 앗수르와 같은. 인생의 앗수르. 여러분의 인생을 힘들게 하고 어렵게 하는. 여러분에게 두려움을 주는 앗수르가 있지만 메시아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곱 목자와 여덟 군왕이 되어서 인생 앗수르로부터 우리를 건져 주시고 평강을 주시고 승리하게 해 주시는 줄 믿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높은 산에 올라가는 것을 좋아합니다. 산 정상에 올라가는 것을 좋아합니다. 사람들이 얘기합니다. ‘올라갔다 내려올 걸 뭐하러 올라가. 저 사람들은 똑똑하지 못해서 그래. 나는 똑똑해서 안 올라가. 힘들게 힘들게 올라가서 내려올 걸 뭐하러 올라가.’
그러나 높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많은 것을 보게 됩니다. 높은 곳에 올라갈수록 놀라운 광경. 멋있는 화려한 광경을 보게 됩니다. 땅바닥에만 있는 사람은 볼 것이 없습니다. 힘은 안 들지만 볼 것이 없어요.
그러나 높은 산. 높이 높이. 힘들고 어렵지만, 올라가는 것에 비례해서 많은 세상을 보게 되고, 그리고 놀라운 광경. ‘야 이런 세상도 있네. 이런 아름다운 경치도 볼 수 있네. 야 이런 꽃도 있네.’ 올라갈수록 더 놀라운 광경을 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힘들고 어려워도 위험해도 높은 산에 오르는 것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집니다. 앗수르보다 더 높이 올라가야 됩니다. 여러분을 힘들게 하고 어렵게 하는 인생 앗수르가 있다할지라도 우리는 그 고난보다 더 높이 올라가야 합니다.
말씀도 더 높이 올라가고, 기도생활도 더 높이 올라가고, 봉사하는 것도 더 높이 올라가고, 충성하는 것도 더 높이 올라가고, 더 높이 높이 올라가서 놀라운 광경.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놀라운 신비를 여러분들이 다 체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메시아이십니다. 우리의 건강도, 우리의 직장도, 우리의 물질도 메시아가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그냥 다 지나가는 것입니다.
끝까지 건강한 사람 없습니다. 끝까지 부자도 없습니다. 끝까지 아름다운 사람도 없습니다. 연세 많이 드신 분도 옛날에는 다 아름다웠어요. 아프신 분도 옛날에는 다 건강했어요. 지금 가난한 분도 옛날에는 부자였어요.
세상의 그 무엇도 우리의 메시아가 될 수 없습니다. 다 지나가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많은 종교가 있지만 예수님만이 우리의 메시아이십니다. 다른 이로서는 우리를 구원할 메시아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메시아이신 줄 믿습니다.
이 메시아 예수님을 우리는 섬기고 찬양하고. 그분만이 우리의 메시아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께 찬양하고 경배하는 것입니다. 메시아 되시는 예수님. 그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역사성을 가지고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분은 아무런 죄가 없으신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값을 치루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앗수르와 같은 세상 속에서. 성도들이 살기 힘들어 하는 어려운 세상 속에서 일곱 목자와 여덟 군왕이 되셔서 우리에게 평강을 주시고 우리를 영원히 구원해 주시는 줄 믿습니다.
오늘 성탄 주일과 또 금요일 성탄절에 메시아 되시는 예수님. 그분께 예배하고, 그분께 찬양하고, 그분께만 경배하는 우리 교회와 사랑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죄악의 어두운 흑암에서 참 빛으로 인도하여 주시고, 변함없는 사랑으로 세상에서 사랑받을 자가 저희들 뿐인 것처럼 저희를 사랑하여 주심에 감사합니다.
태초에 말씀으로 계셨고,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던 분이 육신이 되어 이 땅 베들레헴에 오셨고,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시고, 승리하셨음에 찬양과 영광을 올려 드립니다.
우리도 이 험한 세상을 주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세상을 이기며, 승리하게 하여 주옵소서.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오직 주님만을 붙들고 살아가는 귀한 인생 되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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