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시미의 반성
글. 한창기
사람이 산 것의 목숨을 죽이고 그 몸을 먹어야 하는 것은 하늘이 내린 '억울한 모순이다. 아이들이 바퀴벌레조차 죽이기를 싫어하는 것은 그것이 꼭 무서워서가 아니라 그 죽이는 행위가 잔인해서다. 무엇을 죽이는 일이 이성이 있는 사람에게 즐거울 덕이 없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선 같은 것을 어차피 먹어야 산다면, 그 죽은 꼴과 죽이는 꼴을 보지 않고도 그걸 먹을 수 있는 것만큼은 다행한 일이다.
부산에 간다고 하면 다들 사시미'를 많이 먹고 오란다. 그만큼 이 도시는 사시미의 대명사가 됐다. 태종대나 해운대 밥집에서 으레 나오는 것이 그것이요, 시내의 고급 음식점에서는 물론이려니와 대중 음식점에서도 이를 테면 한식을 판다는 ‘구포집’ 같은 데서도 한상 차려 나왔다 하면 그것이 올라 있다.
두루 아시다시피 ‘사시미’는 생선회의 일본말이다. 생선을 잘게 썰어서 초고추장에 버무려서 내오는 것이 한국식 생선회라면, 이 일본식 생선회는 주로 생선을 얄팍하고 넓적하게 썰어서 채소나 무채 위에 분량이 부풀려 보이도록 얹어 내와서 왜간장에 찍어 먹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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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시미’를 시키고도 왜간장에 찍어 먹지 않고 초고추장에 찍어 먹는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 나라 생선에 우리 나라 초고추장을 찍어 먹었으니 한식을 먹었다고 우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꿈틀거리는 장어가 산 채로 칼로 난자되는 것, 접시에서 낙지 발이 움직이고 새우가 팔딱거리는 것을 보고 침을 흘리며 날름 집어 먹는 그 잔인한 기호는 확실히 일본 사람들이 퍼뜨리고 간 버릇일 것이다. 게다가 사시미를 찾는 사람은 심리적으로 일본 음식을 찾는다. 그에게는 회가 이미 잊힌 이름이 되었다. 음식은 맛있게 먹으면 되지, 그 국적이 상관되지 않 는다는 말은 때때로 옳다. 그러나 ‘사시미’가 ‘회’를 몰아내는 현상이, 어느 민족이 오랜 세월에 걸쳐서 즐긴 음식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별로 더 좋지도 않은 게다가 잔인하기까지 한 것에 넋을 파는 것을 뜻한다면, 거기에는 좀 반성이 있음 직하다.(200-201쪽)
출처
샘이깊은물의 생각
지은이 한창기
엮은이 | 윤구병 김형윤 설호정, (주)휴머니스트 출판그룹,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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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기라는 사람,
울며 떼 쓰기를 잘 해서 별명이 앵보였던 아이,
논두렁 위에서도 학교에서 배운 좌측 통행을 고집하던 아이,
청소년기의 그이는 라디오의 단파 방송을 들으며 혼자 영어를 터득했다.
대학에서 법대를 다녔지만 고시 공부 같은 데엔 관심이 없었다.
젊은 시절의 그이는 미군을 상대로 영어 성경책을 팔고 비행기표를 팔다가
브리태니커 백과 사전을 파는 회사를 만들었다.
이윽고 뿌리깊은나무라는 잡지를 만들었다.
판소리와 민화와 한국 민속에 깊이 빠져서
판소리 전집도 만들고 민요 음반도 만들고
찻그릇도 만들고 차도 만들고 반상기도 만들고 옹기도 만들었다.
군사 정부의 손에서 뿌리깊은나무가 폐간된 뒤로 한국의 발견을 만들었고
뒤이어 샘이깊은물을 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이를 멋쟁이로 기억하고 한국어와 한국의 문화 예술을
남달리 깊이 알고 사랑한 사람으로 기억한다.
천구백삼십육년에 태어난 그이는 천구백구십칠년에 예순한 살로 세상을 떠났다.
좀 일찍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