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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문복희 초우문학 원문보기 글쓴이: 맞춤법
시(詩)에서의 이미지
1. 시는 이미지가 말을 한다
* 이미지란 무엇인가
우리의 마음속엔 갖가지 인상들이 쌓여 있다.
그 동안 살아오면서 만난 많은 사람들의 모습, 그들의 음성, 기타 보고 듣고 냄새맡고 감동한 것들의 필름이 보관되어 있는 곳이 우리의 마음이다.
우리의 마음속에 새겨진 감각적인 인상들을 이미지라고 한다.
그러니까 이미지는 실제로 체험한 것들의 영상이지만, 실제 그 자체는 아니고 복사본과 같은 것이다. 이미지란 어원적으로 모방한다. 복사한다, 재현한다 등의 뜻을 지닌 말이다. 쉽게 말하면 마음속의 그림이다.
인간의 마음은 이미지의 창고여서 우리의 감각적인 체험이 이미지로 바뀌어 그 속에 쌓인다. 이때 거기에 쌓인 수많은 이미지들이 선명하고 선명하지 않고의 차이는 있어도, 때에 따라서 기회만 있으면, 심지어는 꿈속에서도 감각에 재현되어 눈앞에 보이거나 음성으로 들리거나 한다.
이제 우리말이 되다시피 한 이미지(image)란 말을 굳이 우리말로 바꾸어 말할 때 상(象), 혹은 심상(心象)이라고 쓴다. 더 적절한 용어가 없는 것이 유감이다.
이미지는 대부분 우리의 생활 경험에서 얻어진 것이지만, 때로는 글이나 말에서 얻어진 것, 심지어는 허구적인 것도 있다.
우리 마음속에 새겨진 가족과 친구들의 모습, 고향 산천의 이미지는 실제 체험에서 만들어진 것이지만, 이순신 장군 상(象)이나 춘향의 아리따운 한국 여성상 같은 것은 책에서 읽었거나 초상화를 보아서 얻어진 것이다.
우리의 마음에 그려지는 지옥이나 천국의 그림은 순전히 허구의 심상이다.
이미지를 가리켜 마음속에 그려진 그림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주로 시각적(視覺的) 이미지만을 말하는 것이고, 기타 청각적(聽覺) 이미지도 있고, 촉각(觸覺), 취각(臭覺), 미각(味覺)의 이미지도 있다.
마음속에 새겨진 솜털이나 눈(雪)의 보드라운 감촉은 촉각 이미지이고, 시냇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는 청각 이미지, 음식에서 얻어진 것은 미각 이미지이고, 냄새(코)로 얻어지는 것은 후각 이미지이다. 우리가 다섯 감각으로 체험한 것들은 결국 이미지로 바뀌어 우리의 마음속에 잡다하게 쌓인다. 그러니까 경험이 풍부한 사람,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은 이미지가 많이 쌓여진 마음의 부자인 셈이다.
* 시의 이미지
시는 추상적이고 막연한 언어를 쓰지 않는다. 정확하고 구체적인 언어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시가 좋은 시이다.
"기분이 상쾌하다"는 말보다 "날아갈 것 같다"는 말이 더 구체적인 표현이고, "조용하다"라는 말보다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는 말이 구체적인 표현이다.
이것은 모두 비유에 관계되는 것이다.
시인은 이론이나 설명으로써 생각을 전하고자 하지 않고, 이미지로써 정서를 표현하고자 하며, 독자 역시 시에서 추상적인 이론을 얻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를 통하여 정서를 체험한다. 다음 시는 주요한의 [빗소리]라는 시의 전문이다.
이 시에서 이미지가 어떻게 쓰였고, 어떤 기능을 갖는가를 살펴보자.
비가 옵니다.
밤은 고요히 깃을 벌리고
비는 뜰 위에 속삭입니다.
몰래 지껄이는 병아리같이.
이지러진 달이 실낱같고
별에서도 봄이 흐를 듯이
따뜻한 바람이 불더니,
오늘은 이 어둔 밤을 비가 옵니다.
비가 옵니다.
다정한 손님같이 비가 옵니다.
창을 열고 맞으려 하여도
보이지 않게 속삭이며 비가 옵니다.
비가 옵니다.
뜰 위에, 창 밖에, 지붕에
남모를 기쁜 소식을
나의 가슴에 전하는 비가 옵니다.
이 시는 봄밤에 고요히 내리는 빗소리, 뜰 위에 속삭이는 병아리 소리, 이지러진 달과 별, 다정한 손님 등 몇 개의 이미지가 제시되어 있다.
이 이미지들은 각기 별개의 기능을 갖는 것이 아니다.
봄밤에 고요히 내리는 빗소리가 중심 이미지이고, 기타의 이미지들은 중심 이미지의 여러 측면을 부연하고 보충하는 비유적 기능을 갖는다.
아파트 생활이 늘어난 현대에 와선 창 밖에 내리는 소리의 정취를 느끼기 어렵겠지만, 시골집 같은 데서 앞마당에 조록조록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밤잠을 설치는 경험은 각별한 것이다. 봄비는 장마비와는 달리 가볍게 속삭이듯이 내리고, 천지가 고요한 밤에 그 소리를 들으면 아무리 감성이 무딘 사람이라도 잠을 설치게 마련이다.
이런 정황에서 시인은 봄비 내리는 소리를 들으며, 밤의 정적감, 따스한 봄기운과 평화로움, 가슴 속 깊이 미쳐오는 반가움 등의 감정을 느낀다.
이런 기본적 정서를 바탕으로 시가 출발하여, 그것이 하나하나 별개의 이미지로 전개되어 중심적 정서가 더욱 선명하고 정확히 표현되어 있다.
봄날 농가 뜰 위에 햇볕을 받으며 재재거리는 병아리 소리는 활짝 봄기운이 펼쳐지는 듯하여 반갑고 평화로움을 느끼게 한다. 시인은 비 내리는 소리를 들으며 이런 이미지를 상상에 떠올린다. 간밤엔 하늘에 실낱같은 반달이 걸려 있고 별에서도 따스한 바람이 불어오는 느낌이더니, 오늘은 비가 내린다. 이 봄비 내리는 소리는 마치 다정한 손님이 창밖에 와 있는 듯하고, 무슨 남모를 기쁜 소식이라도 가져온 듯이 반갑기만 하다.
* 시는 이미지가 말을 한다
이 시에서 본 바와 같이 무릇 모든 시에는 중심 이미지가 있게 마련이고 대개의 경우 그것이 제목에 나타난다.
이 중심적 이미지는 시가 잉태하고 거기에서 성장하는 무형의 싹 같은 것이어서, 그 핵심적인 이미지를 모태로 하여 시는 출발한다.
시인은 그 핵을 중심으로 그것을 발전․전개시키면서, 본래 불분명했던 이미지를 더욱 선명하고 정확한 모양으로 만들어 나간다. 이때 시인을 이리 끌고 저리 끌어가며 시의 모양을 갖추어 나가게 하는 힘은 시인의 중심적 정서이다. 그러니까 지엽적인 수많은 이미지들은 중심 정서의 통솔 하에 조직되고 기능을 갖는다.
주요한의 [빗소리]에서 우리는 단순 이미지를 바탕으로 한 단순 정서를 체험할 수 있어서 이해가 용이했다. 그러나 좋은 시일수록 이미지도 복합적이고 정서도 복합적이어서 얼른 이해가 가지 않는다.
다음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의 [눈오는 날 숲가에 서서]경우는 일상 용어로 아주 쉽게 쓰여 있으면서도 이해가 결코 쉽지 않다.
그것이 복합적인 정서 때문인 것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이것이 누구네 숲인지 알 것 같다.
그의 집이 마을에 있긴 하지만
그는 내가 여기 서서 자기네 숲이
눈으로 쌓이는 것을 바라보는 줄 모르리라.
나의 작은 말은 이상하게 생각하리라.
근처에 농가도 없는데 여기 세우는 것을
숲과 언 호수 사이
일 년 중 제일 어두운 이 밤.
말은 묻기라도 하듯이 방울을 흔든다,
무슨 착오라도 있느냐고.
달리 들리는 소리는 오직
가벼운 바람에 눈발 휩쓸리는 소리뿐.
숲은 아름답고, 어둡고 깊다,
그러나 나는 지켜야 할 약속이 있다.
자기 전에 갈 길이 있다,
자기 전에 갈 길이 있다.
이 시는 눈오는 날 밤 숲가에 서서 숲을 바라보는 시의 주인공과 숲과 눈, 그리고 주인공이 끌고 가는 작은 말과 말방울 소리, 언 호수, 눈발을 날리는 바람 소리 등이 확연히 드러난 이미지들이다. 물론 중심 이미지는 숲가에 서서 숲에 눈이 쌓이는 것을 바라보는 시의 주인공이다.
그는 저녁 늦게 말을 끌고 가는 농부이다.
프로스트가 살았던 미국의 뉴잉글랜드 지방 농촌에는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린다.
이런 눈 속을 한 농부가 캄캄한 밤에 말을 끌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장면을 이미지로 그려보면 시의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시가 시인의 직접 체험을 말한 것인지 아닌지 그것은 상관없다. 시인이 이 시를 쓴 순간 그는 머리 속에 들어 있던 어느 눈오는 날 밤의 인상을 형상화하여 시의 장면으로 구상한 것이다.
이 시에서 주목할 것은 시의 이미지가 주요한의 [빗소리]에서와 같이 평면적이고 단순한 전개가 아니라 극적인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는 점이다.
즉 눈이 쌓이는 숲과 언 호수와 어두운 밤과 눈발을 휩쓰는 바람 소리는 같은 차원이고, 그 장면을 바라보며 서 있는 농부와 그가 끌고 가는 말은 또 한 차원을 이루어 장면이 복합적인 구성을 갖는다.
전자를 자연적인 차원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인간적인 차원이다.
인간적인 차원에 서 있는 시인은 이렇게 아름다운 장면을 바라보기 위하여 끌고 가던 말을 세울 정도로 빠져들면서, 한편으로 집에 가서 할 일과 갈 길을 생각하는 상반되는 두 차원의 갈등상을 드러내 보이는 극적 장치이다. 아름다운 자연이 우리 주변에 있어 때로 우리를 매혹시키지만, 우리 인간은 자연의 차원과는 달리 인간의 삶을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그 두 차원은 성질상 같을 수 없고 대립된 갈등 관계에 놓여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그러니까 이 시는 [빗소리]에서와 같이 자연에서 느끼는 아름다운 감정을 비유적 이미지들로 드러낸 것이 아니라, 자연에 매혹되는 감정과 함께 거기에 대치되는 감정이 동시에 작용하는 복합 감정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다같이 하나의 중심 이미지를 바탕으로 시가 잉태하여 생각의 가닥이 잡혀가지만 그 펼쳐지는 양상은 시인마다 다르다.
* 마음 속의 이미지와 시의 이미지
우리의 마음 속의 이미지는 우리의 체험에서 얻어지는 사사로운 것이다.
그 사사로운 이미지가 시에선 어떻게 나타나고 그것을 읽는 독자는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흔히 열정적인 연애시를 읽으면 그 시인은 실제로 시에 나타난 것과 같이 열정적인 사랑을 했을 것으로 짐작하여 흠모하기까지 한다.
시인 서정주는 그의 [자화상]에서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라고 써놓았기 때문에 그가 종의 자식인 것으로 오해를 받기도 했다.
미국의 여류 청교도 시인 에밀리 디킨슨(Emily Dickinson)은 평생 별로 문 밖 출입도 없이 칩거하면서도 "황야를 본 일도 없고 바다를 본 일도 없지만 그것들을 안다"고 하면서 여행에 관한 것, 사랑에 관한 것 등 다양한 이미지를 시에 담았다.
시인의 마음은 광대무변(廣大無邊)한 바다와 같아서 그 안에는 수많은 인상과 경험과 생각들이 축적되지만, 그것은 실제로 체험한 것도 있고, 아주 환상적인 것도 있다.
마음속에서 움트는 시의 싹은 일부분 그의 실제 체험에서 생겨나는 것도 있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고, 막연한 정서가 이미지로 모양을 갖추어 나가는 동안에 많은 변형을 가져오고 때로는 엉뚱한 모양이나 장면으로 바뀌기도 한다.
그러니까 시를 읽으면서 그것을 시인의 실제 생활과 동일시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런데 독자는 어떠한가. 독자는 자기 마음속의 이미지를 바탕으로 시를 읽고자 하는 버릇에서 벗어나기가 어렵다. 독자가 시에서 바다의 이미지를 접하면, 어떤 이는 해일과 난파를 가져오는 성난 바다의 이미지를 바탕으로 시를 이해하려고 하고, 어떤 이는 아침 햇살을 받으며 고기잡이 돛단배가 둥실 떠 있는 그림 같은 바다를 연상하기도 한다.
유치환의 시 [깃발]에서,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이란 시구를 읽으면 어떤 독자는 그것을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외쳐대던 3.1운동 때의 이미지로 받아들일 것이고, 어떤 독자는 월드컵 경기장에서의 응원의 함성 소리와 그들이 흔들어대는 깃발의 이미지를 떠올릴 것이고, 또 어떤 독자는 국기 게양대에 나부끼는 깃발을 연상하며 "아우성"이란 이미지에 고개를 갸우뚱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니까 시를 받아들이는 태도는 매우 주관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각자 기억 속에 저장된 이미지는 자기만의 특유한 경험에서 이루어진 것이고, 그것을 바탕으로 시를 읽을 때에 그것은 결코 객관적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꽃의 이미지도 그렇다. 영시의 주요한 소재 중의 하나인 장미꽃은 한국에서도 이제 널리 보급된 꽃이지만, 아직 한국의 독자들에겐 난초나 국화, 진달래, 모란 같은 우리 고유의 꽃들 만큼 그 이미지가 절실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인물의 이미지도 그렇다.
헬렌(Hellen)은 서구의 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요 인물이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으로 알려진 이 신화상의 미인의 이미지가 우리에게 선뜻 와 닿지 않는 까닭은 우리에게 희랍신화의 전통이 낯설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고작 그 고전적인 자태를 중국의 양귀비나, 황진이 정도의 이미지로 파악한다. 거꾸로 우리 한국시의 이미지도 서구의 독자들에게 잘못 비칠 것은 당연하다. 김소월의 [진달래꽃]은 한국인의 민족정서를 잘 나타낸 대표적인 서정시이다.
봄철 야산에 흐드러지게 피어 우리에게 익숙한 진달래꽃과 서구인들이 공원이나 식물원의 화분에서 본 진달래와의 이미지가 결코 같지 않으리라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읽어도 읽어도 정이 가는 이 시를 직접 인용하여 이미지 문제를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자.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寧邊에 藥山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이 시의 주요 이미지는 영변 약산에 핀 진달래꽃과 자기를 버리고 가는 애인을 떠나 보내는 여인의 모습이다. 이 시에 제시된 진달래꽃은 영변 약산을 가보지 않았어도 한국인이면 누구나 잘 알고 있는 봄 한철 삼천리 강산을 뒤덮는 야산의 꽃이다.
우리들은 어려서 이래 특히 궁핍한 시절을 그 정경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식물원 한 구석이나 화분에 심긴 진달래꽃을 보면 오히려 낯설게 느껴질 정도로 우리에게 친숙한 이 꽃은 恨이 서린 민족의 '원형적' 이미지이다.
김소월의 [진달래꽃]은 그 이미지를 배경으로 우리들에게만 낯익은 한국의 여인상을 제시하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끼리의 이별의 장면이 암시적으로 제시된 이 시에서, 여인 측으로 짐작이 가는 주인공은 떠나가는 애인에게 진달래꽃을 한 아름 뿔려 가는 길을 오히려 축복하겠다고 말한다. 이별의 감정이 간절하면서도 눈물을 억제하며, 떠나는 이를 축복하는 마음으로 보내는 애처로운 여인상은 진달래꽃이나 다름없이 우리에게 친숙한 한의 이미지이다.
전통적인 한국의 여인은 감정의 내색을 자제하며 슬픔과 기쁨을 속으로 삭힌다.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옷고름을 매만지며 님을 떠나 보내는 이별의 장면이 이제는 보기 어려운 '옛날 이야기'이지만 우리들 정서의 밑바탕에 박혀있는 '원형적'인 이미지이다. 인고와 순종과 자기 억제의 감정에 길들여진 한의 여인상과 진달래꽃의 이미지가 연결됨으로써 이 시는 우리들의 근원적인 민족 정서를 대변한다.
이 시가 우리 한국인들에게 큰 호소력을 갖는 까닭은 우리 민족의 '원형적' 이미지들이 역시 우리의 호흡에 와 닿는 민요조의 리듬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민족 고유의 정서가 담겨 있는 시를 문화 풍토가 다른 서구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없으리라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 정서적 이미지
우리가 쓰는 말에는 설명어 혹은 개념어가 있고,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구상어가 있는데, 개념어는 사물을 설명하고 우리의 인식을 도울 뿐이다.
시에선 추상적인 관념어보다는 감각에 와 닿는 구상어를 주로 쓴다.
우리가 시를 읽고서 감동하는 까닭은 시에 제시된 이미지들이 우리의 감각에 작용하여 정서적 반응을 일으키기 때문이지만 때로는 거기에 미치지 못하고 감각의 반응에 머무르는 수도 있고, 더 나아가 이미지가 차원 높은 의미를 상징하는 일도 있다. 이렇게 이미지의 기능을 구분하는 것은 곧 시의 종류를 구분하는 일이 될 것이다.
우리의 감정(정서)을 개념적으로 설명하는 말에는 기쁨, 그리움, 미움, 원한, 동경, 감탄, 고독, 희망, 혐오, 열정, 공포 등 많이 있다. 시의 이미지가 주로 어떤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데 쓰이는 경우를 굳이 정서적 이미지라고 이름을 붙여 본다.
다음 시에서 거기에 나타난 이미지들이 모여서 어떤 정서(情緖)를 불러일으키는가를 살펴보자.
톱밥 밟힌 거리에서의
김빠진 맥주의 희미한 냄새의
의식에 아침은 오고
진흙 묻은 발들은 모두
이른 아침의 커피 스탠드로 달린다.
시간이 오면 다시
다른 가면극이 연출되고
우리는 가구 붙은 수많은 방에서
거무스름한 덧문을 밀어올리는
온갖 손들을 생각한다
이 시는 T S 엘리엇의 초기 시(詩) [서시]의 전문이다.
우리가 도시의 뒷골목을 생각하면 으레 거기에 커피 집과 맥주 집이 있고 길가엔 아파트가 늘어서 있어, 아침이 오면 간밤에 과음한 술꾼들이 커피 집(우리나라 같으면 해장국집)으로 달려가는 풍경을 연상할 수 있다.
집집마다에서 덧문을 밀어 올리거나 커튼을 걷어올리면서 이제 하루해가 시작된다.
이 시는 그런 이미지들을 나열하듯이 제시하여 도시의 아침 풍경을 스케치한 시이다.
그러나 이 시에서 우리는 건강하고 상쾌한 아침의 감정과는 거리가 먼 병들고 더럽고 혐오스런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시인이 도시의 풍경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도 이미지를 부정적인 면으로 집중시켜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리엔 톱밥이 깔려 있고, 커피 집으로 달려가는 사람들의 발은 진흙 발이고, 맥주에선 썩은 냄새가 풍기고, '더러운 덧문'이라고 함으로써 그것을 걷어올리는 손들 또한 더러운 손임을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 다시 시작되는 하루해의 생활은 참된 생활이 못 되고 가면극의 연출이라고 하였다. 이런 혐오스럽고 부정적인 이미지들은 시인이 그런 자세로 현대 문명의 한 단면을 보고 있음을 말한다.
엘리엇은 일찍이 현대문명이 병들고 죽은 상태라고 생각한 아주 선각자적인 시인이다. 그 마음의 상태가 시의 이미지에 반영되어 있는 것인 바, 이미지는 시인의 마음의 거울이고 대변자이기도 하다.
시에선 결국 이미지가 말을 한다는 뜻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다.
잘 쓰여진 시는 시인의 감정 상태가 어떠한가를 보여주면서, 한편 독자에게 똑같은 정서적 체험을 하게 한다.
2. 시와 심상
심상, 즉 이미지라는 것을 한마디로 설명한다면, 어떤 말을 듣거나 읽고 마음속에 떠오르고 떠올리는 사물의 모습을 일컫는 것이다. 가령 봉선화라는 낱말을 듣는다든가 읽었을 때 우리 감각이나 기억에 되살아나는 꽃의 모습이나 빛깔 등 바로 그것이 이미지인 것이다.
그리고 가령 사막처럼 실제 그 풍경을 어떤 사람이 보지 못했다 해도 그 사람이 어느 영화나 사전에서 보았거나 글로서 읽은 기억을 되살린다든가, 또는 실제 이 세상에서는 접할 수도 없고 존재하지 않는 사물, 즉 천사나 악마같이 어떤 사람이 상상으로 떠올린 상징적 모습도 이 이미지에 속한다.
실상 따지고 보면 저 봉선화나 사막처럼 우리 낱말 하나하나에 뜻이나 울림(음향)과 더불어 제 각기의 이미지가 부여되어 있어, 시란 저러한 이미지를 가장 아름답게 합목적적으로 구성한 것이라고 하겠다.
그래서 지난번 〈비유〉에서는 시에 있어 이미지도 비유적 표현의 하나라고 말했지만, 이와 반대로 이미지의 수사법의 하나가 비유라고 말해도 무방하다.
이렇듯 시는 이미지와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기 때문에 저 옛날 희랍의 시인 시모니데스(Simonides, B.C.556~468년경)도 벌써 〈시는 말하는 그림〉이라고 갈파하고 있다. 그런데도 시와 이미지라면 현대시의 한 특성으로 간주되는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지금으로부터 약80년 전(1908)영국의 철학가요 평론가였던 시인 T.E.흄이 런던에서 한 시인 클럽을 만들고 매 수요일마다 모여서 시낭독 등을 했는데, 이들이 영국시의 전통인 소위 로맨티시즘에 반기를 들고 이미지즘이라는 새로운 수법의 시작과 이론을 전개했던 것이다. 여기에 미국의 시인 에즈라 파운드가 가세를 하고 리더격이 됨으로써 이미지스트[心象派]라고 자칭까지 하게 된다.
이제 그들 유파의 최초의 작품으로 일컬어지는 바로 흄의 「가을」을 음미 해보자.
가을밤의 소슬한 감촉
나는 밖을 거닐다가
붉은 얼굴의 농부같이
붉으레한 달이 울타리 너머에
기대어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말은 걸지 않고 목례만 하였다.
달 둘레에는 생각에 잠긴 듯한 별들이
도시의 아이들처럼 흰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오늘에서 보면 울타리에 걸린 달을 농부의 얼굴로, 또 그 달을 에워싼 별들을 도시의 아이들 얼굴로 표상한 소박하고 단순한 이미지라 유치하게 까지 여겨지지만, 여기서 한 가지 뚜렷한 것은 시의 제재를 〈사물의 모습을 그리듯〉나타냈다는 점이다. 이제 저러한 이미지의 시를 더욱 명백히 이해하기 위하여 영국의 소위 낭만주의의 대표적 시인인 월리엄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 1770~1850)의「루시」를 소개하면,
인적 멀리 떨어진 더브 강 샘가에
그녀는 살고 있었다.
칭찬해주는 사람도 없고
사랑해주는 사람도 없는 아가씨였다.
이끼 낀 바위 틈에 보일락말락 핀
한 떨기 오랑캐꽃이랄까!
아니면 어두운 밤하늘에
다만 홀로 반짝이는 별이랄까
아무도 모르게 살다가
아무도 모르게 줄어간
이제는 무덤 속에 누워 있는 그녀!
오오 나만은 그것을 알고 있다.
물론 이 시에도 〈바위틈에 보일락말락 핀 한 떨기 오랑캐꽃〉이라든가〈어두운 밤하늘에 다만 홀로 반짝이는 별〉이라는 심상적(心象的)비유 표현이 없지 않다.
하지만 이 시에서 보다시피 낭만주의의 특성이라고 할 것은, 첫째 그 시의 제재에 대한 시적 감동이 객관적이기보다 주관적이어서 그 감정이 분방하게 노출되며, 묘사적이기보다는 음률적(번역으로는 잘 파악하지 못함)이고, 또한 공상과 이상의 세계를 동경한다고나 하겠다. 이와는 반대로 이미지즘의 시인들은 마치 작자가 독자의 마음의 캔버스에다 말로써 그림을 그리듯, 또는 마음의 스크린에다 슬라이드를 비춰주듯 사물을 모습으로 그려서 보여주려고 하기 때문에 음악적이기보다 회화적이요, 감정적이기보다 객관적이고, 애매모호 하기 보다 구체적이고 명확한 것을 요구하며, 고전어나 아어(雅語 - 품위가 있고 세련된 말)을 배격하고 일상어를 사용한다는 것이, 그들의 1915년에 나온 『이미지스트 시집』의 선언문의 요지다.
가령 저 흄의 「가을」이란 작품의 제재가 된 가을밤의 달이나 별을 바라볼 때, 낭만주의 시대의 시인들 같으면 침이 마르도록 정겨운 감탄이나 찬미, 또는 한숨짓는 시름과 영탄을 늘어놓겠지만, 이미지의 시를 표방한 흄은 붉은 얼굴의 농부와 도시의 아이들의 해맑은 얼굴만을 떠올리고 아무런 감탄이나 찬미도 발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덧붙여두는 얘기지만 저 이미지즘 운동은 그리 오래가지는 않고 1917년 제1차 세계대전 중에 끝나고 말지만, 전후 20년대 유럽에서 일어나 여러 가지 전위적 시 운동, 즉 다다이즘(dadaism - 스위스에서 일어난 전통적형식의 파괴와 부정을 표방한 예술운동)이나 쉬르레알리슴(surrealisme - 초현실주의)에 큰 영향을 주었고, 우리 한국의 30년대 소위 모더니즘 운동도 바로 저러한 이미지즘의 시들인 것이다. 그러면 이렇듯 시의 내부 구조의 새로운 요소가 된 이미지를 시인들은 실제 어떻게 그들의 시적인 상념(생각)이나 감동(느낌)의 표현양식으로서 한 편의 시를 만들어 내고 있는가? 이제 우리는 이미지의 일반적 생태와 그 조형의 실제를 살펴보기로 하자. 앞에서도 말했듯 말은 그 뜻(의미)과 울림(음향)으로써 그 낱말 하나 하나의 이미지를 만들고 있다. 그래서 그러한 낱말들의 집합인 시의 한 줄(1행)에는 그 줄마다의 이미지가 만들어지고 또 이미지를 다음 줄이 받고 넘기면서도 서로가 작용을 해서 결국은 그것이 집합된 것이 작품 전체의 이미지를 낳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연와공(煉瓦工)이 한 장 한 장의 벽돌을 차곡차곡 쌓아서 하나의 구조물을 만드는 것과 같다 하겠다.
그러므로 시의 한 낱말에 의한 이미지는 시의 각행의 이미지의 합리적인 한 단위요, 또한 시의 각행의 이미지는 작품 전
체의 합리적인 한 단위가 되지 않으면 그 시는 안정성을 지니지 못한다. 이러한 개개의 이미지와 그것을 집성하는 이미지의 관계란 의미면에서 보면 일관된 논리성이지만, 형태면에서 보면 그 낱말이나 각행이 지니는 말이 상징하는바 사물의 모습과 빛깔 ․소리․냄새․맛․촉감 등 오관(五官)전체라 하겠다.
그래서 흔히 시의 이미지라면 단순히 회화적이고 시각적인 것만으로 여기기 쉽지만 실은 저렇듯 청각적이요, 후각적이요, 미각적이요, 촉각적인 감각기관의 모든 요소를 매체로 사용하고 있다. 이미 흄의 「가을」로 사물의 모습이나 빛깔로 된 시각적인 이미지는 음미했으니 이번엔 청각적인 것을 하나 소개하면, 내가 일찍 청소년 때 애송하던 일본의 요절한 서정시긴 나카하라 나카나리[中原中也, 1907~37)의
「겨울밤」
여러분, 오늘밤은 고요합니다.
주전자소리만이 납니다.
나는 여인을 생각합니다.
나에겐 여인이 없습니다.
그래서 고생도 없습니다.
형언할 바 없는 탄력의
공기와 같은 공상 속에서
여인을 그려보고 있습니다.
형언할 바 없는 탄력의
맑디맑은 밤의 침묵 속에서
주전자소리를 들으며
여인을 꿈꾸고 있습니다.
이렇게 밤은 이슥히 깊어져서
개만이 끼어 있는 겨울밤은
그림자와 담배와 나와 개
형언할 바 없는 칵테일입니다.
이 시에는 주전자의 불 끓는 소리와 비록 짖는다는 말은 없지만 깨어 있다는 표현으로 개 짖는 소리가 겨울반의 이미지를 돋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이 시에 쓰이지는 않았지만 가령 주전자 물 끊는 소리 〈절절〉이라든가 개의 짖는 소리〈멍멍〉〈컹컹〉같은 의음(擬音)․의성(擬聲)․사성이미지다.
다음 후각을 매체로 한 시의 이미지로는 앞장에서도 한 번 소개한 바 있는 레미 드 구르몽의 전원시「시몬느」의 첫머리「머리칼」,
시몬느, 너의 머리칼 숲 속에는
커다란 신비가 있다.
너는
마른 풀 냄새가 난다.
너는 짐승이 자고난 돌의 냄새가 난다.
너는 무두질한 가죽 냄새가 난다.
너는 타작한 밀 냄새가 난다.
너는 장작 냄새가 난다.
너는 아침마다 가져오는 빵 냄새가 난다.
너는 무너진 흙담에 나란히 핀 꽃 냄새가 난다.
너는 나무딸기 냄새가 난다.
너는 비에 씻긴 등나무 냄새가 난다.
너는 비에 씻긴 등나무 냄새가 난다.
너는 저녁때 베어들이는 등심초와 양치풀 냄새가 난다.
너는 호랑가시나무 냄새가 난다. 너는 이끼 냄새가 난다.
너는 생나무울타리 그늘에 자라서 여물고 말라버린 노랑 풀 냄새가 난다.
너는 꿀풀과 나비꽃 냄새가 난다.
너는 마소거름 냄개사 난다. 너는 우유 냄새가 난다.
너는 회향풀 냄새가 난다.
너는 호두 냄새가 난다.
너는 잘 익어서 따온 실과 냄새가 난다.
너는 꽃이 만발한 버들과 보리수 냄새가 난다.
너는 벌꿀 냄새가 난다.
너는 목장을 헤지를 때 갖는 삶의 냄새가 난다.
너는 흙과 시냇물 냄새가 난다.
너는 정사(情事)냄새가 난다.
너는 불 냄새가 난다.
시몬느, 너의 머리칼 숲 속에는
커다란 신비가 있다.
시몬느라는 여인의 머리채의 아름다움을 일일이 되쳐들 것도 없이 여러 가지 사물의 냄새를 떠올려서 노래하고 있는데, 이 냄새의 이미지만으로도 그녀가 야생녀이고 싱싱한 모습의 아가씨임을 우리는 넉넉히 짐작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 시에서 주목할 것은 여러 가지 냄새, 즉 우리의 후각에다 시적 감동을 호소하면서도 한 편 마른풀이라든가 돌이라든가 가죽이라든가 밀이라든가, 그 하나 하나의 사물을 이미지가 시각적이기도 하다는 점으로, 이렇듯 시의 이미지는 여러 가지 감각기관이 혼합되어 하나의 표상을 이루는 것이다.
다음은 미각인데, 맛의 고유한 표현은 나라마다 서로 다르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여류시인 김양식(金良植)의 시「조국아」를 쳐들면
조국아, 너는 내게 한 쪽 아린 마늘이다.
너는 쑥이다.
또 조국아, 너는 멍석 위의 활짝 널린 고추다.
그리고 너는 질항아리 속의 소금이 다 된
대물려 내려온 장이다.
조국아, 아아
내 뼈가 묻힐 조국아,
조국에 대한 사랑을 미각, 그것도 아리고 쓰고 맵고 짠 사물들의 맛에다 비유하고 떠올려서 자기가, 아니 우리가 당하고 겪는 현실적 또는 정신적 괴로움․쓰라림․아픔 등을 여실하게 그려놓고 있다. 그래서 오히려 필연적이요, 생래적이요, 사무치는 조국애를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도 미각이 미각만으로 독립해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각적인 사물의 구체적 이미지와 화합되어 있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다음 촉각은, 폴 발레리의「꿀벌」로서, 이 시에는 그의 친우이며 소설가인〈프랑시스 드 미오망드르(Francis de Miomandre, 1880~1959)에게〉라는 부재가 붙어 있다.
아무리, 너의 예리한 침이
죽음을 불러오더라도, 금빛 꿀벌이여,
나의 부드러운 꽃바구니는
꿈처럼 엷은 레이스를 입었을 뿐이니
쏘아라, 아름다운 표주박 젖가슴을
거기엔 사랑이 없거나 졸고 있다.
나의 진홍빛 한 방울의 피가
둥글고 질긴 살결에서 스며 나오도록!
나는 신속한 고통을 원한다.
침체의 형벌보다는
삽시간의 아픔이 훨씬 낫다!
나의 감각은 깨어나 있으라
이 가는 침의 황금빛 경고에.
이것이 없으면 사랑은 죽거나 잠들고 말 거다.
아주 촉각 중에서도 강렬한 벌의 침을 꽃이 갈망하는 이미지로 그려놓고 있다.
어찌 보면 이 시는 에로티시즘[性愛]까지 느끼게 하고 한편 친구의 비판이나 충고를 상징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물론 사물의 호혜적 생태에 대한 심미적 통찰은 말할 것도 없다.
이상으로 우리는 이미지 조형에 있어 시각․청각․후각․미각․촉각 등 모든 감각기관을 매개로 한 표상들을 살펴보았는데, 그것들은 거의가 시각적인 것과 연결․배합되어 있다는 점과 각 감관이 혼합․혼성될 수 있다는 사실을 머리에 넣어두기 바란다.
현대시의 80%가 이미지로 되어 있다고 발레리가 말할 만큼 오늘날 시에 있어 이미지가 강조되고 있다. 이미지는 신체적 지각에 일어난 감각이 마음속에 재생된 것이다. 한 때 지각되었으나 현재는 지각되지 않는 어떤 것을 기억하려고 하는 경우나 체험 상 마음의 무 방향적 표류의 경우나 상상력에 의해서 지각 내용을 결합하는 경우나 꿈과 열병에서 나타나는 환각 등의 경우처럼 직접적인 신체적 지각이 아니라도 마음은 이미지를 역시 생산할 수 있다.
한층 특수한 문학적 용법으로서의 이미저리는 언어에 의하여 마음속에 생산된 이미지군(群)들을 가리킨다. 이미지와 이미저리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이미지는 신체적 지각, 기억, 상상, 환상에 의하여 마음속에 생산되는 것이고, 이미저리는 언어에 의하여 마음속에 생산된 이미지군(群)들임을 알 수 있다.
흰 달빛/紫霞門
달안개/물소리
大雄殿/큰 보살(菩薩) -朴木月 '佛國寺'에서
이 시에서 '흰달빛' '紫霞門' '달안개' '물소리' 등은 전부가 이미지이다.
이런 이미지들이 모여 이미저리를 이루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시의 제목이 암시하는 '불국사'라는 핵심 이미지를 떠올리게 된다.
'불국사'를 통해 시인의 기억과 상상을 볼 수 있다. 기억이나 상상이란 것은 이미지를 만드는 가장 주요한 요소의 하나다.
이 작품에서도 시인이 직접 본 '자하문' '대웅전' '큰 보살'이 '흰달빛' '달안개' '물소리' 등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상상력에서 나온 이미지들과 합하여 불국사라는 핵심 이미지를 낳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무심히 보아온 일상적인 사물에 새로운 신선(新鮮)감을 준다. 이런 것이 시에서 이미지가 갖는 힘이라고 하겠다.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어/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내리면/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은 소리 -金光均 '雪夜'에서
'마음 허공(虛空)에 등불을 켜고'라든지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등의 구절은 하나의 상상력으로 된 이미지이다. 상상력은 이와 같이 이미지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존 러스킨은 상상력을 직관적 상상력 연합적 상상력, 정관적(靜觀的) 상상력으로 나누고 있다. 직관적 상상력은 사물의 외면적 형상이 아니고 정신적이고 내면적인 것을 결합시키는 것을 말한다.
연합적 상상력은 심상을 결합하여 새로운 형체를 창조하는 것을 말한다.
정관(靜觀)적 상상력은 대상을 정관(靜觀)하는 가운데 사상과 정서가 나타나 체험 전체를 통일시키는 것을 말한다.
'상상력은 일반적으로 이미지를 낳는 정신의 능력'임에 틀림없지만 이 상상력 또한 공상과 구별되어야 함을 유의해야 한다.
공상과 상상력은 이미지 결합의 기능에서 구분된다. '구름은 보랏빛 색지(色紙) 위에 마구 칠한 한 다 발 장미(薔薇)'(김광균 '뎃상'의 일부)처럼 구름과 장미의 결합이 우연한 일치에 의존할 뿐 이 결합이 아무런 새로운 변화도 가져오지 못하고 정신적 가치도 지니지 못하는 기계적이요 유물론적인 경우가 공상이다.
또한 그것은 대상에 구속을 받는 일정한 크기를 나타낸다. 반면에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처럼 누님과 국화의 결합은 인격 완성의 희열이라는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며 단순한 물질적 유사성이 아니라 정신적 정서 적 가치를 띠고 있으므로 이것은 상상력의 소산이다.
그러나 상상력은 어디까지나 상상력일 뿐이다. 이미지 그 자체는 아니다. 이미지는 어디까지나 언어로써 나타남을 잊지 말아야 한다.
상상의 결과가 언어로써 나타나는 것이 이미지이다. 이미지에 대한 복수의 개념으로서 이미저리를 다음과 같이 나눈다.
감각적인 면에서 시각적, 미각적, 청각적, 후각적, 촉각적, 근육운동지각으로,
내용면에서 정신적 이미저리, 비유적 이미저리, 상징적 이미저리가 그것이다.
정신적 이미저리 안에 시각적, 청각적, 미각적 등의 것이 다 포함되며, 비유적 이미저리 안에 제유, 환유, 직유, 은유 등을 들 수 있다.
상징적 이미저리란 '자기 마음의 감각적 영상을 문자화하는 능력만이 아니라 시인의 관심사, 취향, 기질, 여러 가지의 기준, 환상 등을 이미저리로 나타나게 하며 이미저리들이 자꾸 시(詩) 속에서 반복되게 해서 이미지의 패턴들이 시의 어조를 만들기 위해서도 발생되고 그 문맥의 구조나 상징의 방법을 나타내기 위해서도 발생되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지를 시각적 이미지, 청각적 이미지, 심리적 이미지로 나누는 게 보통이다.
내 하나 農夫의 資格으로 이제 말하노니/저 깊은 하늘,/누워 있는 바람,
생것대로 있는 사랑스런 똥거름 냄새를.
그 곁엔/개울의 빛나는 흐름,
작은 새들의 울음은 水晶처럼 굴러가고,
노을 속에 스며드는 저녁연기는/먼 슬픔처럼 오히려 맵지 않다.
都會의 더러움/現代的인 것의 간지러움
플라스틱과 같은 것으로 만드는 現代的인 간지러움. -許洧 '歸鄕'에서
하늘, 바람, 똥거름, 개울, 새, 노을, 저녁연기 등의 이미지가 모여서 하나의 시각적인 이미지로 고향을 떠올려 주고 있다. 그곳에 도회, 더러움, 플라스틱, 간지러움 같은 고향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시어들이 투입됨으로써 더욱 시각화시켜 준다.
그러나 이 시는 엄밀히 보면 한 시어가 이미지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깊은 하늘, 누워 있는 바람, 생것대로 있는 사랑스런 똥거름, 수정처럼 굴러가는 작은 새의 울음, 슬픔처럼 오히려 맵지 않은 저녁연기 같은 하나의 시구(詩句)들이 모여서 시각적인 이미지를 이루고 있다.
이런 고향에 대한 이미저리들은 도시 문명 속에 살면서 가슴이 메말라가고 고향을 상실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고향의 안온함을 그림처럼 재생시켜 준다. 이 같은 것을 보드킨은 재생의 원형이라고 했다. 시에 있어서 재생의 수법은 자주 쓰이는 것이기도 하다.
가장 깊은 뿌리에서/아슴히 높은 정수리까지의/내 외로움을
사람아/너에게 드릴밖에 없다.
東쪽 비롯함에서/西녁끝 너메까지
한 솔기에 둘러 낀/하늘 가락지.
돌고 돌아서/다시 오는/이 마음을 -김남조 '雅歌'에서
심리적 이미지로 되어 있다. 외로움이나 마음의 한 상태를 이미지하고 있다.
이런 심리적 이미지는 상상(想像)의 세계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시의 존재 이유의 하나는 이런 심리적인 이미지들을 시의 그릇 속에 담을 수 있다는 데 있을 것이다.
시에 있어서의 '이미지[心象]'란 언어를 통해 표현된 구체적 형상이나 그와 관련되는 추상적인 관념들을 말한다.
즉 시적 언어를 통해 어떤 형상이 우리의 머리 속에 그려질 수 있으며, 나아가 그 형상과 관련된 여러 가지 관념이 함께 연상될 수도 있다. 이러한 구체적 형상 또는 그와 관련된 추상적 관념들이 바로 시에서 '이미지'라고 불리는 것이다.
연상되는 감각적 인상 → 감각적 이미지
연상되는 추상적 관념 → 상징적 이미지
감각적․직관적으로 주어지는 구체적인 상(象), 반드시 오관(五官)에 의하여 직접적으로 지각되지 않더라도 뇌리에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는 것이면 된다.
개념적 사고에 의하여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감각적․직관적인 존재이어야 한다.
예컨대 삼각형의 형상은 그려져 있는 삼각형의 그림 그 자체이어야 하며, ‘평행하지 않는 세 개의 직선에 의하여 둘러싸인 도형’ 등의 개념적 설명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형상은 예술을 성립시키는 데 기초가 되는 것이며, 의도적으로 미적 형상을 만들어내는 것이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형상이라는 말은 특히 수사학적 용어로서 좁은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내용이 표현에 의하여 생생하게 감각화 된 것을 가리킨다.
상징(象徵)은 단순한 수사보다 더 깊은 의의를 가지고 있는 예술적 표현방식이며, 어떤 감각적 대상으로 그 본래의 의미 뒤에 암시되어 있는 더 깊고 큰 내용을 구상화하는 점에서는 역시 일종의 형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 예문 통해 알아보기
그리고 나의 작은 명상의 새 새끼들이 지금도 저 푸른 하늘에서 날고 있지 않습니까?'
⇒ '새 새끼'들이 날아다니는 모습을 통해, 관념적 존재인 '명상'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말하자면 눈에 보이지 않는 관념인 '명상'을 '새 새끼' 라는 구체적 형상으로 비유한 것이다. 이런 구체적 형상이 바로 이미지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관념'을 '시각적(視覺的)으로' 이미지화 하였다.
3. 이미지의 기능
이미지는 독자에게 감각적 인상을 불러일으켜 추상적인 관념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함으로써 사물을 보다 생생하게 전달하며, 사물의 인상과 영상을 더욱 뚜렷이 하는 기능을 한다.
N. Frye는 심상이 제재를 명확하게 드러내고, 독자의 내면 세계를 자극하며, 독자의 반응을 유도하여 시를 정서와 연결시켜 주는 구실을 한다고 보았다.
또 C. Day Lewis는 심상이 일상적인 언어를 통해서는 맛볼 수 없는 신선미를 빚어내게 하고, 시어에 탄력감과 긴축 미를 부여하여 강렬성을 가져오며, 정서를 환기시키는 구실을 한다고 설명했다.
① 표현의 구체성을 높인다.
② 표현의 독창성을 살린다.
③ 정서 환기의 장치가 된다.
④ 주제를 추적하는 지표가 된다.
⑤ 경험을 구체적으로 재생한다.
⑥ 감각적 인상을 재현한다.
⑦ 추상적 관념을 구체화한다.
* 지배적 심상과 주제의 암시 기능
이미지의 기본적인 기능은 감각적 체험을 되살리는 데 있다.
이런 기본적 기능 이외에 이미지는 보이지 않는 관념들을 구체적 형상을 통해 암시하는 기능을 하게 된다. 이러한 이미지를 지배적 심상(이미지)이라고 한다. 지배적 심상이란 작품과 직결되는 구체적 형상 또는 그 형상에 내포된 관념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지배적 이미지는 작품 전체를 통하여 반복 등장하여 시상의 흐름을 지배하며, 독자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 준다. 그리고 시의 주제를 암시적으로 드러내는 역할을 하게 된다.
* 의미를 전달하는 기능을 갖는다.
김수영의 '풀'이란 시에서 '풀'은 단순한 식물로서의 '풀'이 아닌 저항적인 인간, 민중의 상징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이미지는 의미를 함축적으로 표현해 준다.
* 대상을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표현한다.
"그 꽃 참 곱군."과 같은 개념적 서술보다는 "그 녀석 눈이 샛별 같아."와 같이 구체적으로 비유함으로써 눈의 빛남을 생생하게 느끼게 한다.
* 보통의 언어로써 풀이하기 어려운 마음의 상태를 효과적으로 나타낸다.
김동명의 '내 마음은' 이란 시에서는 '나'의 마음을 '호수'라는 비유적 이미지를 통해 나타내고 있다. '그대'가 노를 저어 올 수 있고, '나'는 '그대'의 뱃전에 부서질 수 있는 '나'의 내면 상태가 효과적으로 드러난다.
4. 이미지에 의한 구성
이미지란 심상(心象)으로 번역되며, 흔히 기억이나 상상 혹은 외적 자극에 의하여 우리의 의식에 나타난 직관적 표상을 뜻한다. 직관적 표상이라는 말이 어렵다면 구체적 감각적 실체라고 해도 된다. 한마디로 풀어 말하면 우리의 의식 속에 나타나는 감각적 모습을 뜻한다. 그러나 이렇게 우리의 정신 혹은 의식 속에 찍히는 감각적 실체들은 육체적 지각을 수반하는 유형과, 그러한 지각을 수반치 않는 유형으로
나뉘어진다. 육체적 지작을 수반한다는 말은 우리가 어떤 대상을 직접 지각하고, 그러한 지각이 논리의 중개 없이 그대로 우리의 정신 속에 찍히는 것을 뜻한다. 이를테면 '푸른 하늘'을 보거나 '바람소리'를 들을 때 우리의 정신 속에는 푸른 하늘의 시각적 특성과 바람소리의 청각적 특성이 그대로 재생된다. 이대의 시각적 특성과 청각적 특성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외부에 '푸른 하늘'과 '바람소리'라는 대상이 존재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앞에서 이미지를 정의하면서 그것을 외적 자극에 의하여 우리의 의식에 나타난 직관적 표상이라고 한 말은 결국 외부의 대상을 전제로 이미지가 생산되는 경유를 뜻한다. 그러나 외부에 어떤 대상이 존재하지 않을 때에도 우리의 의식 속에는 감각적 실체가 나타난다. 그러니까 외부의 대상에 대한 육체적지각 없이도 이미지는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기억 속에 떠오르는 '푸른 하늘'의 이미지나 '바람소리'의 이미지 혹은 상상 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들이 그렇다. 이때에는 우리의 외부에 어떤 대상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의 의식 속에는 이미지, 곧 감각적 실체들이 나타난다. 앞에서 이미지를 정의하면서 그것을 기억이나 상사에 의해 우리의 의식에 나타나는 직관적 표상이라고 한 말이 여기에 해당된다.
결국 이미지가 산출되는 방법으로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는 육체적 지각을 통하여 사출 되는 경우, 다른 하나는 육체적 지각없이 산출되는 경우이다. 전자는 지각, 후자는 기억․상상력․환상과 관계된다.1) 시의 경우 지각과 관계되는 전자의 보기로는
오후
아이얀 들가의 외줄기 좁은 길을 찾아나간다.
들길엔 낡은 電信柱가
儀杖兵같이 나를 둘러싸고
논둑을 헤매는 한떼의 바람이
어두운 갈대밭을 흔들고 사라져간다.
같은 시행들을 들 수 있다. 김광균 「蒼白한 散步」앞 부분이다. 여기서 시인이 노래하는 것은 기억이나 상상의 세계라기보다는 대상에 대한 감각적 인상이다.
시인이 노래하는 것은 1연에서는 '아이얀 들가의 외줄기 좁은 길', 2연에서는 '낡은 전신주', '논둑을 헤매는 한때의 바람'이다. 우리는 이 시에서 어느 날 오후 시인이 산보하고 있는 시골 풍경을 보거나, 그 풍경에 대한 느낌을 소유할 뿐이다.
시인의 의식 속에 나타나는 이미지들인 '외줄기 좁은 길''낡은 전신주''한 떼의 바람'은 모두가 시인이 현실적으로 산보 길에서 지각한 대상들이 직접 이미지로 나타난 것들이다. 그러나 이렇게 대상에 대한 지각을 통해 산출되는 이미지가 아니라 기억 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도 있다. 이를테면
저녁 바람이 고요한 방울을 흔들며 지나간 뒤
돌담 위의 박꽃 속엔
죽은 누나의 하ㅡ얀 얼굴이 피어 있고
저녁마다 어두운 램프를 처마 끝에 내어 걸고
나는 굵은 삼베옷을 입고 누워 있었다.
같은 시를 보기로 들 수 있다. 같은 시인이 쓴「南村」이라는 시의 전문이다. 여기서 노래되는 것은 시인이 현재 '남촌'이라는 마음을 대상으로 그 마을의 이미지를 노래한다기보다는 시인의 기억 속에 떠오르는 '남촌'이라는 마을에 대한 이미지들이다. 그러니까 시인의 눈앞에는 '남촌'이라는 마을은 존재하지 않는다. 기억 속에 떠오르는 그 마을의 이미지들은 '저녁 바람소리', '돌담 위의 박꽃' '처마 끝에 매어 걸던 램프' '굵은 삼베옷을 입고 누워 있던 나' 등이다. 「창백한 산보」의 경우 시인이 직접 하나의 풍경을 지각한다면, 「남촌」의 경우에는 그러한 직접적인 지각이 없이 하나의 풍경이 기억 속에 떠오른다. 그런가 하면
해바라기의 하ㅡ얀 꽃잎 속엔
퇴색된 작은 마을이 있고
마을 길가의 낡은 집에서 늙은 어머니는 물레를 돌리고
같은 시행들은 또 다른 특성을 보여준다. 김광균의 「해바라기의 感像」1연이다. 또 다른 특성이라는 것은, 이 시행에서는 기억이라기보다는 연상에 의해 어미지가 산출되기 때문이다. 시인은 '해바라기의 하ㅡ얀 꽃잎'을 보고, 거기서 '퇴색한 작은 마을' '마을 길가의 낡은 집' '물레를 돌리는 어머니'를 연상한다. 엄격하게 말하면 연상이란 상상력과는 구별되는 정신능력이다. 2) 그렇지만 상상력은 앞장에서도 말했듯이 재생적 상상력과 창조적 상상력으로 나뉘고, 전자가 연상의 법칙을 어느 정도 내포한다는 점에서 연상에 의해 나타나는 이미지들도 상상력에 의해 나타나는 이미지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3) 창조적 상상력에 의해 태어나는 이미지의 보기로는 앞 장(章)에 인용했던
내가
돌이 되면
돌은
연꽃이 되고
연꽃은
호수가 되고
같은 시행들을 들 수 있다. 서정주의 「내가 돌이 되면」의 전반부이다.
관점에 따라서는 이 시행들은 환상적인 특성을 보여준다. 상상력이 의식을 강조한다면, 환상은 무의식을 강조한다.
이상의 보기에서 알 수 있듯이 이미지는 상상력의 산물이긴 하지만, 좀더 세분하면 지각․기억․연상․상상․환상 같은 우리들의 정신능력을 통해 나타난다. 또한 문학론에서는 이미지라는 용어와 이미져리라는 용어가 다르게 사용된다. 이미지가 시(詩) 속의 요소를 뜻하는 미시적 개념이라면, 이미져리 imagery는 그런 요소들의 집합을 뜻한다. 이미져리의 유형으로는 첫째 오직 독자의 정신에 나타나는 감각적 경험만을 강조하는 정신적 이미져리, 둘째 이미지들이 다른 관념이나 사물을 비유하는 비유적 이미져리, 셋째 이미져리가 복잡한 관념을 암시하는 상징적 이미져리가 있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이미지라는 말로 통일하기로 한다. 비유적 이미지에 의해 시를 구성하는 방법은 비유, 곧 직유와 은유에 의해 시를 구성하는 방법을 논하면서, 상징적 이미지에 의해 시를 구성하는 방법은 상징에 의해 시를 구성하는 방법을 논하면서 다루기로 한다. 따라서 이미지에 의해 시를 구성하는 방법이라고
할 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신적 이미지만을 중심으로 한다.
* 이미지의 종류
심상은 묘사적 심상과 비유적 심상으로 나뉘기도 하고, 감각적 심상, 상징적 심상으로 나뉘기도 한다. 이미지는 마음속에 재생, 제시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감각에 따라 구분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따라서 우리에게 친근한 것은 감각적 심상이다.
감각적 심상에는 시각적, 청각적, 미각적, 후각적, 근육 감각적, 역동적, 색채적 심상과 이들 심상들이 섞여서 시적 효과를 보여 주는 공감각적 심상이 있다.
* 감각적 이미지
이미지의 기본적 기능은 감각적 체험을 되살리는 것이다.
이미지란 말이 던져 주는 세속적인 의미 때문에 우리는 흔히 시각과 관련된 표현 또는 인상만을 이미지로 받아들이기 쉽다. 그러나 이미지는 모든 종류의 감각과 관련된다. 주로 시각, 청각이 중심이 되지만 후각, 미각, 촉각 등이 있고, 심지어는 무게 감각, 운동 감각(대상의 움직임의 지각), 기관 감각(고동, 맥박, 호흡, 소화 따위의 지각), 근육 감각(근육의 긴장의 자각) 등도 이미지로 제시될 수 있다. 이런 것들을 통틀어 감각적 이미지라고 부른다.
예문 통해 알아보기
① 시각적 심상 : 시각적인 감각 형상을 바탕으로 형성되는 심상으로 독자들의 심리적 체험 속에 회화적 인상을 부각시키고 시 전체의 특징을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 모양, 색채, 명암, 움직임
* 지나가던 구름이 하나 새빨간 노을에 젖어 있었다.- 김광균, <외인촌>에서
* 비는 하이얀 진주 목걸이를 사랑한다. ― 장만영, <비>에서
* 좁은 들길에 들장미 열매 붉어 ― 신석정, <그 먼 나라를~>
② 청각적 심상 : 청각적인 감각 현상을 바탕으로 형성되는 심상으로 때로는 음성 상징어를 활용해서 효과를 거두기도 한다.
⇒ 소리, 음성, 음향
* 접동/ 접동/ 아우래비 접동 ― 김소월, <접동새>에서
* 둥기둥 줄이 울면 초가 삼간 달이 뜨고 ― 이완영, <조국>에서
* 머리맡에 찬물을 솨아 퍼붓고는 ― 김동환, <북청 물장수>에서
③ 후각적․미각적 심상 : 이 두 심상은 함께 나타나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맛과 냄 새가 대체로 혼합되어 감지되기 때문이다.
⇒ 냄새, 향기
* 강한 향기로 흐르는 코피―서정주, <대낮>에서
* 물새알은 간간하고 짭조름한 미역 냄새―김소월, <물새알 산새알>에서
* 어마씨 그리운 솜씨에 향그러운 꽃지짐 ― 김상옥, <사향>에서
④ 촉각적 심상 : 피부 감각적 심상과 전신 감각적 심상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촉각적 심상은 신체의 부분들과 결합되어 근육 감각적 심상을 형성하기도 한다.
* 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 것은―김종길, <성탄제>에서
⑤ 역동적 심상 : 역동적 심상은 격렬한 시어와 동작적인 용언을 활용함으로써 제시된다.
* 푸름 속에 펄럭이는 피 깃발의 외침 ―박두진, <3월 1일의 하늘>에서
⑥ 공감각적 심상 : 감각적 이미지를 가장 이상적으로 창조하는 것으로 공감각적 미지가 있다.
이것은 한 종류의 감각을 다른 종류의 감각으로 전이시켜 표현하는 것이다.
공감각적 이미지는 감각적 인상을 개성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방법이다.
⇒ 감각의 전이
*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 ― 김광균, <외인촌>
*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 ― 서정주, <문둥이>
(1). 시각적 이미지
정신적 이미지란 사물에 대한 감각적 인상만이 언어에 의해 창조되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그 이미지는 어떤 관념을 비유하거나, 여러가지 관념들을 내포하지 않는다. 김춘수 교수는 이미지를 묘사적 이미지와 비유적 이미지로 나눈 바 있다.4) 우리가 말하는 정신적 이미지란 김춘수 교수가 말하는 묘사적 이미지에 해당된다. 이러한 이미지의 유형으로는 시각적 visual 이미지, 청각적 auditory 이미지, 후각적 olfactory 이미지, 촉각적 tactile 이미지, 기관적 organic 이미지, 근육감각적 kines-
thehic 이미지 등이 있다.
시각적 이미지는 사물의 색․명암․형태․운동 등을 언어로 보여주며, 청각적 이미지는 사물의 소리를 언어로 들게 하며, 후각적 이미지는 사물의 냄새를 그대로 느끼게 하며, 촉각적 이미지는 사물이 우리의 몸에 닿을 때의 감각, 이를테면 압각(壓覺), 통각(通覺) 등을 언어로 형상화하며, 기관적 이미지는 우리의 인체를 구성하고, 일정한 모양과 특정한 생리기능을 소유하는 것들, 이를테면 운동기관․영양기관․생식기관․호흡기관․소화기관 등에 나타나는 고동․맥박․호흡․소화 등의 감각을 언어로 나타내는 것, 근육 감각적 이미지란 근육의 수축, 긴장의 변화 등 내적 자극에 의하여 생기는 감각을 언어로 나타내는 것으로, 위치 ․중량․운동 등의 감각으로 나타난다.
이상 여러 가지 이미지 가운데 한 편의 시를 구성하는 데에 기여하는 것으로는 무엇보다 먼저 시각적 이미지를 생각할 수 있다.
시각적 이미지가 시의 구성에 기여한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한 편의 시가 시각적 이미지에 의해서만 구성될 수 있다는 뜻이다.
한편의 시가 어떤 풍경을 보여주는 경우, 대체로 그것은 시각적 이미지 의해서만 구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시각적 이미지에 의해 한 편의 시를 구성하는 방법으로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가 있다.
첫째로는 기억 속에 떠오르거나, 아니면 자신이 바라보는 하나의 풍경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방법이 있다. 보기로는 다음과 같은 시를 들 수 있다.
공장 앞에서
노동자는 문득 발을 멈춘다
화창한 날씨가 옷깃을, 당긴다
그는 고개를 돌리고
빨갛고 동그란 태양을
하늘에서 미소짓는 태양을
친근하게 바라본다
이봐 태양 동지
이거 바보짓 아닐까
이런 날 하루를 몽땅
사장한테 준다는 건?
프레베르의 「잃어버린 시간」(김화영 역) 전문이다. 이 시는 화창한 날 공장으로 들어가며 독배하는 노동자가 있는 풍경을 보여준다. 박목월의 「윤 4월」「3월」등은 모두 이러한 방법으로 되고 있다. 시 전체가 하나의 거시적 공간을 묘사하고 있다. 둘째로 시각적 이미지에 의해 한 편의 시를 구성하는 방법으로는, 이렇게 거시적 공간을 묘사하기보다는, 풍경의 일부 혹은 사물의 미세한 구석을 묘사하는 방법이 있다. 보기로는
땅에 끌리는 긴 깃을 지닌
이 새는 꼬리깃을 둥글게 폈을 때에
가장 아름답게 보인다.
그러나 엉덩이는 온통 보이고.
같은 시를 들 수 있다. 아뽈리네르의 「孔雀」(남평우 역)전문이다. 앞의 「잃어버린 시간」에서는 노동자와 공장과 해가 묘사됨에 비해 이 시에서는 공작새, 그것도 꼬리 깃을 펴는 순간의 공작새를 묘사하고 있을 뿐이다. 전자를 거시공간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미시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꽃잎'을 묘사하거나 '책상'을 묘사하거나 '손바닥'을 묘사하는 시는 모두 이러한 범주에 든다. 셋째로 시각적 이미지에 의해 한 편의 시를 구성하는 방법으로는 몇 개의 풍경을 계기적으로 연결하여 하나의 삽화 episode를 구성하는 방법이 있다. 영화용어로는 쇼트 shot의 이동과 같은 방법이다. 쇼트란 영화를 촬영할 때 카메라의 위치를 움직이지 않고 찍는 하나의 단위를 뜻하며 흔히 커트 cut라고도 한다. 따라서 이러한 방법에 있어서는 시간이나 화자의 위치는 고정된 채, 몇 개의 쇼트가 빠른 속도로 이동된다. 보기로는 다음과 같은 시를 들 수 있다.
그이는 잔에
커피를 담았지
그이는 커피 잔에
우유를 넣었지
그이는 유탄 커피에
설탕을 넣었지
그이는 작은 숟가락으로
커피를 저었지
그이는 커피를 마셨지
그리고 그이는 잔을 내놓았지
내겐 아무 말 없이
그이는 담배에
불을 붙였지
그이는 연기로
동그라미를 만들었지
그이는 재떨이에
재를 털었지
내겐 아무말없이
나는 보지도 않고
그이는 일어났지
그이는 머리에
모자를 썼지
그이는 비옷을 입었지
비가 오고 있었기에
그리고 그이는
빗속으로 가버렸지
말 한마디 없이
나는 보지도 않고
그래 나는 두 손에
얼둘을 묻고
울어버렸지.
프레베르의 「아침 식사」(김화영 역)전문이다. 시의 화자는 실내에서 '그이'의 행동을 보고 있다. '그이'의 행동은 몇 개의 쇼트로 연결되지만, 화자의 위치는 고정되어 있다. 이 시에서는 쇼트의 이동이 계기적 질서에 따르고, 또한 다분히 느린 속도로 쇼트가 연결된다면, 다음과 같은 시에서는 빠른 속도로 쇼트가 이동됨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쇼트의 연결이 다분히 논리성을 벗어나고도 있다.
시의 전문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누군가 연 문
누군가 닫은 문
누군가 앉은 의자
누군가 쓰다듬은 고양이
누군가 깨문 과일
누군가 읽은 편지
누군가 넘어뜨린 의자
누군가 연 문
누군가 아직 달리고 있는 길
누군가 건너지르는 숲
누군가 몸을 던지는 강물
누군가 죽은 병원.
프레베르의「메세지」(김화영 역)전문이다. 일련의 쇼트가 연결되고 있지만, 그 연결방식이 앞의 시와는 다르다. 쇼트가 매우 빠른 속도로 이동되며, 시의 후반에서는 호자의 위치 역시 변화된다.
시각적 이미지에 의해 한 편의 시를 구성하는 넷째 방법으로는 시각적 이미지들을 병치하는 것이 있다. 셋째 방법을 쇼트의 이동법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넷째 방법은 시각적 이미지들의 병치법이라고 할 수 있다.
병치란 병행과 유사한 기법으로 서로 상관없는 사물을 나란히 놓는 것, 그러니까 시각적 병치란 서로 무관한 시각적 이미지들을 나란히 놓아 독특한 하나의 풍경을 빚는 것을 뜻한다. 크게 보면 일종의 몽따쥬로 다음과 같은 시를 보기로 들 수 있다.
오늘도 나를 삼키는
비쩍 마른 사상
칼날같은 추억
20년이 넘게
절뚝 거리는 도시
텅빈 광장
애인이 씹다 버린
빠알간 사과
똑딱거리는 시계
오늘도 나를 삼키는
벽을 향해
질주하는 학생들
곤두선 학문
이름이 없는
고통의 폭약
허허벌판의 술
나는 벌떡
일어난다
이제 나는 땅바닥에
침을 뱉진 않겠다
입술이 없는 삶도
코가 없는 삶도
어쩌면 가을해가
흘리던 비린내도
너도 나도 박쥐도
병든 길을 확인하고
도대체 이런 식으로
살아야만 하는 걸까
필자가 쓴「그림자가 나를 삼킨다」라는 시의 일부이다. 완벽한 보기일 수는 없겠으나, 이 시의 구성은 대체로 시각적 이미지들의 단편을 병치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병치의 기법이 좀더 심화되면 몽타즈의 기법이 된다. 몽따쥬란 따로따로 촬영된 화면을 효과적으로 떼어 붙여서 화면 전체의 유기적인 구성을 이룩하는, 영화나 사진을 편집하고 구성하는 한 가지 기법을 뜻한다.
(2). 청각적 이미지
청각적 이미지에 의해서만 한 편의 시를 구성하는 것은, 몇몇 정위적인 시들, 이를테면 미래파의 시나 구체시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렇게 많지 않다. 따라서 청각적 이미지에 의해 한 편의 시를 구성한다는 말은, 시각적 이미지에 의해 구성하는 것과는 다른 뜻을 지닌다. 대체로 청각적 이미지에 의한 시의 구성방법으로는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하나는 의성어의 반복에 으해 한 편의 시가 통일성을 유지하는 방법, 다른 하나는 사물의 소리르 묘사함으로써 한 편의 시가 구성되는 방법이다. 첫째로 전자의 보기로는
처ㅡㄹ썩, 처ㅡ ㄹ썩, 척,쏴ㅡ아,
따린다 부순다 문허바린다.
태산같은 높은 뫼 집채같은 바위돌 ……
요것이 무어야, 요게 무어야.
나의 큰 힘 아나냐 모르나냐 호통까지 하면서
따린다 부순다 문허바린다.
처ㅡㄹ썩, 처ㅡㄹ썩, 척, 튜르릉, 콱.
처ㅡㄹ썩, 처ㅡㄹ썩, 척, 쏴아,
내게는 아모 것 두려움 업서
육상에서 아모런 힘과 권을 부리던 자라도
내 앞에 와서는 꼼짝 못하고
아모리 큰 물건도 내게는 행세하지 못하네
내게는 내게는 나의 앞에는
처ㅡㄹ썩, 처ㅡㄹ썩, 튜르릉, 콱
같은 시행들을 들 수 있다. 최남선의「해에게서 소년에게」1․2연이다. 1연과 2연은 모두 각 연의 1행과 7행을 의성어 '처ㅡㄹ썩, 처ㅡㄹ썩, 척, 쏴ㅡ아'와 '처ㅡㄹ썩, 처ㅡㄹ썩, 척, 튜르릉 콱'으로 표현함으로써 통일성을 띠고 있다. 의성어란 사물의 소리를 흉내낸 말로, 여기서는 바다의 소리, 곧 파도치는 소리를 흉내내고 있다.
「해에게서 소년에게」는 모두 6연으로 되어 있으며, 각 연의 행수는 모두 7행으로 되어 있고, 또한 각 연의 1행과 7행은 모두 같은 의성어로 반복된다. 이 시는 물론 정형시와 자유시의 과도기적 형식, 혹은 준 정형성이라는 형식상의 특성7) 때문에 시의 구성 역시 그러한 정형성을 따르고있다. 이 시를 보기로 든 것은 다만 의성어, 곧 청각적 이미지가 구성의 원리가 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자유시의 경우 청각적 이미지, 특히 의성어의 반복에 의해 한편의 시가 구성되는 보기로는 다음과 같은 시를 들 수 있다.
장독 위 울밑에
牧丹꽃 오무는 저녁 답
木果木 새 순 밭에
산그늘이 내려왔다
워어어엄아 워어어엄
길 잃은 송아지
구름만 보며
초저녁 별만 보며
밟고 갔나베
무찔레밭 藥草길
워어어엄아 워어어엄
휘휘휘 비탈길에
저녁놀 곱게 탄다
黃土 먼 산ㅅ길이나
퍼먹은 허리띠
워어어엄아 워어어엄
젊음도 안타까움도
흐르는 꿈일다
애달픔처럼 애달픔처럼 아득히
상기 산그늘은 내려간다
워어어엄아 워어어엄
박목월의 「산그늘」전문이다. 이 시는, 찬찬히 읽어보면, 청각적 이미지보다는 시각적 이미지에 의해 구성되고 있다. 이 시의 구성방법은 앞에서 말한, 시각적 이미지에 의해 한 편의 시가 구성되는 방법 가운데 거시적 공간묘사라는 방법을 따르고 있다. 그렇기는 해도, 이 시의 통일성은 각 연의 마지막 행에 나타나는 의성어 워어어엄아 워어어엄의 반복에 의해서 획득된다.
'워어어엄아 워어어엄'은 경상도 지방에서 멀리 송아지를 부르는 소리이다.
각 연의 마지막 행에서 동일한 낱말․어구․어절․문장 등이 반복과는 다르며, 노래 곡조 끝에 붙여 되풀이하여 부르는 짧은 몇 마디의 가사를 뜻한다. 이런 가사를 반복하는 것은 거의 무의미한 것 같지만, 매우 깊은 암시성을 띠고 있다. 그것은 모든 노래의 최초형식 가운데 하나인 의식 儀式의 기능, 곧 순수한 마술적 효과를 환기한다.8) 결국 위의 시는 엄격하게 말하면 시각적 이미지가 중심이 되고, 청각적 이미지가 그것을 돕는 형식으로 구성되었다. 아니면 시각적 이미지와 청각적 이미지가 조화된 상태에서 구성된 시의 보기로 들 수 있다.
둘째로 청각적 이미지에 의해 한 편의 시가 구성되는 방법으로는 사물의 청각적 특성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방법이 있다. 사물의 청각적 특성은 물론 의성어의 방법으로도 드러난다. 그렇지만 한 편의 시는 그러한 의성어, 곧 사물의 소리를 흉내내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묘사함으로써 구성되기도 한다. 이러한 묘사법이 시로서는 한결 현대적인 특성을 보여준다. 보기로는 다음과 같은 시를 들 수 있다.
비가 옵니다.
밤은 고요히 깃을 벌리고
비는 뜰 우에 속삭입니다
몰래 지껄이는 병아리같이.
이즈러진 달이 실낱같고
별에서도 봄이 흐를 듯이
따뜻한 바람이 불더니
오늘은 이 어둔 밤을 비가 옵니다.
비가 옵니다.
다정한 손님같이 비가 옵니다.
창을 열고 맞으려 하여도
보이지 않게 속삭이며, 비가 옵니다.
비가 옵니다.
뜰 우에 창 밖에 지붕에
남모를 기쁜 소식은
나의 가슴에 전하는 비가 옵니다.
변영로의「빗소리」전문이다. 이 시는 표제가 암시하듯이 '빗소리'를 묘사하고 있다.
1연에서는 '몰래 지껄이는 병아리 같이'비가 뜰 위에 속삭이며 내리고, 2연에서 비가 내리기 전의 밤하늘이 묘사되고, 3연에서는 '다정한 손님같이' '보이지 않게 속삭이며'비가 내리고, 4연에서는 '남모를 기쁜 속식'을 화자의 가슴에 전하며 비가 내린다. 물론 이 시의 통일성은 각 연의 첫 행에 '비가 옵니다'라는 진술이 반복됨으로 성취된다. 그렇지만 이 시는 봄밤에 내리는 빗소리를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방식으로 구성되고 있다.
이 상에서 이미지에 의해 한 편의 시가 구성되는 보기로 크게 두가지 유형, 곧 시각적 이미지에 의한 구성과 청각적 이미지에 의한 구성을 살펴보았다.
이미지에는 이밖에도 후각적 이미지, 미각적 이미지, 촉각적 이미지, 기관적 이미지, 근육감각적 이미지가 있다 이러한 이미지에 의해 한 편의 시가 구성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시각적 이미지와 청각적 이미지에 의한 구성이 지배적이다.
(3) 미각과 후각 촉각
상상의 공간에 떠오른 소리
시인이 표현해야 할 대상엔 <소리>도 포함되어 있다.
어떤 소리든 소리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그 소리가 자기에게 어떻게 들리고 있는가를 먼저 확실히 자각해야 한다. 시인은 소리를 찾아내어 언어로 표현을 해야하는데 그것을 청각적 이미지라고 한다. 이미지인 만큼 그것은 실제하는 소리가 아니라 시인의 상상의 공간에 떠오른 소리요 따라서 개성적인 창작된 소리인 것이다.
좋은 시를 쓰기 위해서는 소리의 영역에 있어서도 이처럼 개성적인 상상의 소리, 즉 뛰어난 청각적 이미지를 만드는 능력이 요구된다.
시의 표현에 기여하는 청각적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서는 소리만을 잘 듣는 귀가 아니라 소리의 내밀한 의미까지 새겨들을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후각, 촉각, 미각으로 표현될 수 있는 대상은 무수히 많다. 시인은 그러한 대상도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이 3가지 감각기관이 대상을 지각한 결과는 단순한 감각적 자극으로만 그치지 않는다.
감각적 자극은 정신에 전달되고 정신적 반응이 필연적으로 수반되기 때문이다.
붉은 색깔이 그냥 붉은 색깔 그 자체로만 수용되지 않고 <정열>이나 <투쟁>을 연상케 하는 것은 그러한 정신적 반응의 예가 된다.
후각, 촉각, 미각의 경우도 예외일수 없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가 표현하는 것은 단순한 냄새와 감촉과 맛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의 정신이 그것을 그렇게 받아들인 냄새와 감촉과 맛인 것이다.
(4) 상징적 이미지
이미지의 기본적인 기능은 감각적 인상을 생생하게 재현해 내는 데 있다. 그러나 이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이미지는 어떤 대상의 감각적 인상을 전해 줄뿐만 아니라, 독자에게 그 대상과 관련된 여러 가지 관념들을 연상시킨다.
이와 같이 '관념을 연상시키는 기능을 가지는 이미지'를 상징적 이미지라 한다.
① [공무도하가]에서의 '물'의 이미지
⇒ 물에 휩쓸려 남편이 죽었으니, 물이란 곧 남편과의 사별을 가져온 사물이다.
이 때 물의 이미지는 당연히 <이별, 죽음>, 좀더 일반화하면 <삶의 부정적 이미지>이다.
② 다음 시조에서의 '못'의 이미지
압못세 든 고기들아 뉘라셔 너를 모라다가 넉커늘 든다.
북해 청소(北海淸沼)를 어듸 두고 이 못세 와 든다.
들고도 못나는 정(情)은 네오 경오 다르랴. ― 작자 미상
⇒ 이 시조는 어느 궁녀가 대궐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한 내용 이다. 그런데 누가 잡아다 놓았는지는 모르지만 북해의 맑은 물에서 놀아야 할 물고기들이 앞뜰의 못에 가두어져 있다.
그러므로 이 때의 '못'은 자유로운 세계와 단절된 공간으로서 화자의 생활 공간과 동질적 관계에 있는 부정적 이미지임을 알 수 있다.
5. 시어의 심상 파악을 통한 시 이해하기
한 편의 시를 읽고 그 분위기가 어떠한지, 그 주제가 무엇인지, 왜 그렇게 이해할 수 있는지 말할 수 있도록 할 필요가 있다. 독자 스스로 시를 읽고, 이해하고, 분석하고, 비판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쉽고 재미있게 시에 다가갈 수 있으면서, 시에 대한 감상력을 키우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많은 시를 효과적으로 감상하고 정리할 수 있는가에 대한 한 방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 동안 많은 사람들의 논의 속에서 다양한 방법들이 제시되어 왔는데, 여기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시어의 심상 파악을 통한 시 이해하기’이다.
이 방법은 시란 ‘인간의 사상과 감정을 함축적이고 운율적인 언어로 형상화한 운문 문학’이므로 시에 사용되는 언어, 즉 시어에 인간의 감정이 드러난다는 단순한 발상에서부터 출발한다. 또한 인간의 감정은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으로 이원화할 수 있으므로, 시어도 인간의 긍정적 감정과 부정적 감정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원화할 수 있을 것이다. 시어의 심상을 대립적으로 이원화하면 다음과 같다.
긍정적 심상
밝음(낮), 삶, 기쁨, 웃음, 희망, 만남, 자유, 따뜻함(봄)……
부정적 심상
어둠(밤), 죽음, 슬픔, 울음, 절망, 이별, 억압,차가움(겨울)……
아울러 시 전체의 심상을 파악하려면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치는 것이 좋겠다.
⑴ 시 전체를 여러 번 읽는다.
⑵ 읽으면서 각 행의 중심 시어에 줄을 긋는다.
⑶ 줄을 그은 중심 시어의 심상을 파악한다.(긍정 또는 부정)
⑷ 시어의 심상을 파악한 후, 각 행의 주된 심상을 파악한다.
⑸ 각 행의 심상을 파악한 후, 각 연의 주된 심상을 파악한다.
⑹ 시 전체의 심상을 파악한 후, 서정적 자아가 최종적으로 지향하고자 하는
바를 파악한다.
이제 몇 편의 시를 예로 들어 이 접근 방법을 적용해 보자.
* 일제 식민지 상황을 반영한 시의 경우
절정(絶頂)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 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 이육사 -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
‘계절’의 심상은 어떤가? ‘매운 계절’은 ‘겨울’이다. 겨울의 심상은 ‘차가움, 혹독함’이므로 부정적이다. ‘채찍’은 ‘매운 계절의 채찍(겨울의 추위)’이므로 부정적 심상이다. 휩쓸려 오게 된 ‘북방’은 쫓겨간 북방(북만주)이므로 또한 부정적 심상이다. 그러므로 제1연의 지배적 심상은 부정적이다. 이 단계에서 우리는 육사가 살다간 시대적 상황을 결부시키면 이 시의 내용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남을 알 수 있다. ‘매운 계절(겨울)’은 ‘매운 일본 식민지 시대’, ‘매운 계절의 채찍(추위)’은 ‘일제의 학정과 압박’임을 알 수 있다.
결국 제1연은 맵고 사나운 식민지 시대의 학정과 압박에 못 이겨 마침내 고국을 떠나 북만주로 쫓겨간 우리 민족 전체의 ‘비극적 유랑의 상황’을 노래한 것이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고원은 ‘하늘조차도 그만 지쳐 끝나 있는’ 장소이므로 부정적 심상이다. ‘그(고원의) 위’는 칼날 같은 추위, 서릿발 같은 삼엄한 겨울의 극점(올데갈데없는 곳)이므로 부정적 심상이다. 북만주의 고원은 서릿발 같은 칼날처럼 매섭고 준열한 생존의 극한 상황이다. 서정적 자아가 서 있는 칼날 같은 현실은 벼랑에 선 민족 전체의 현실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제2연은 민족 전체가 일제의 학정과 압박에 쫓기고 쫓기어, 민족이 극한적 수난의 현실에 처해 있다는 ‘극한적 상황’을 노래한 것이다.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무릎을 꿇음’은 어떤 의미일까? 기구(祈求)일까? 아니면 굴복(屈伏)일까?
어느 쪽으로 짚는다 해도 절망의 도수(度數)는 이제 극에 달한다. 기구의 몸짓이 용납되지 못하고, 굴종의 시늉마저 불가능한 그 아슬아슬한 진공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고로 어디다 꿇어야 하는 ‘무릎’은 부정적 심상이다. ‘한 발조차 재겨 디딜 수 없는’ 장소인 그 ‘곳’도 부정적 심상이다. 쫓기고 쫓기어 서 있는 곳은 누구에게 기구할 곳도, 굴복하기 위해 발 한 발자욱 재겨 디딜 곳조차도 없는 삶의 극한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제3연은 ‘극한적 상황의 절정’을 노래하고 있다. 그러면 서정적 자아는 이러한 상황에서 완전 절망하여 끝없이 추락만 하고 있는가? 아니다. 기구와 굴복마저 할 수 없는 극한의 절정에서 스스로 그러한 현실에 대결하기 위해 온몸으로 참여하려는 결단을 내릴 것임을 제4연을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알 수 있다.
즉 민족적 현실이 요구하는 역사적인 사명에 온몸으로 참여하려는 의지를 다질 것임은 분명하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 밖에 /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극한적 상황에 대한 내면적 인식으로의 전이가 이루어지는 ‘생각’의 심상은 긍정적이다. 긍정적 생각(‘이 쓰라린 현실을 어떻게 극복할까’)은 지금까지의 상황에서 새로운 것을 깨달을 것이다. 겨울의 부정적 심상(일본 식민지 시대)은 강철의 부정적 심상(비정)과 더불어 무지개(?)의 심상을 지닌다. 겨울의 혹독한 추위 속에서 서정적 자아는 그것을 초극하려는 의지를 다지는 방향으로 내면적 인식을 전환하게 되므로 ‘무지개’는 ‘희망’이라는 긍정적 심상을 지닌다.
제4연은 제1연의 ‘부정적 심상’과 제2연의 ‘부정적 심상의 극한’ 그리고 제3연의 ‘부정적 상황의 절정’이라는 과정을 거쳐 이루어진 긍정적 심상의 표출, 즉 ‘부정적 심상의 초극’인 것이다.
일제 치하라는 절박한 현실을 초극하려는 서정적 자아의 의지를 노래하고 있는 ‘절망 속의 역설적 초극’이다.
* 광복 이후의 혼란을 반영한 시의 경우
전아사(餞迓詞)
포옹할 꽃 한 송이 없는 세월을
얼룩진 역사의 찢긴 자락에 매달려
그대로 소스라쳐 통곡하기에는 머언 먼 가슴 아래 깊은 계단에
도사린 나의 젊음이 스스러워 멈춰 선다.
좌표 없는 대낮이 밤보다 어둔 속을 어디서 음악 같은 가녀린 소리
철 그른 가을비가 스쳐 가며 흐느끼는 소리
조국의 아득한 햇무리를 타고 오는 소리
또는 목마르게 그리운 너의 목소리
그런 메아리 속에 나를 묻어도 보지만,
연이어 달려오는 인자한 얼굴들이 있어
너그럽고 부드러운 웃음을 머금고
두 손 벌려 차가운 가슴을 어루만지다간
핏발 선 눈망울로 하여
다시 나를 질책함은
아아, 어인 지혜의 빛나심이뇨!
당신의 거룩한 목소리가
내 귓전에 있는 限,
귓전에서 파도처럼 멀리 부서지는 限,
이웃할 별도 가고, 소리 없이 가고,
어둠이 황하처럼 범람할지라도 좋다.
얼룩진 역사에 만가(輓歌)를 보내고 참한 노래와 새벽을 잉태한
함성으로
다시 억만 별을 불러 사탄의 가슴에 창을 겨누리라.
새벽종이 울 때까지 창을 겨누리라. - 신석정 -
먼저 제목의 뜻부터 알아보자. ‘전(餞)’은 ‘전송하다, 보내다’는 뜻이고, ‘아(迓)’는 ‘마중하다, 맞이하다’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보내고 싶은 것은 부정적인 것(또는 옛 것)이요, 맞이하려는 것은 긍정적인 것(또는 새 것)이다. 우리는 이 시에서 ①서정적 자아는 어떠한 현실(상황)에 처해 있으며, ②무엇이 계기가 되어, ③구체적으로 무엇을 보내고 무엇을 맞이하려는가를 파악하면 시 전체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서정적 자아에게 있어 세월은, 왜 포옹할 ‘꽃’(긍정적 심상) 한 송이 없는 ‘세월’(부정적 심상)일까? 그것은 얼룩진 역사(부정적 심상)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얼룩진 역사는 과거의 역사일까? 아니면 현재에도 이어지고 있는 역사일까? ‘나의 젊음이 스스러워 멈춰 선다’이기에 현재이다. 결국 제1연은, 서정적 자아는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얼룩진 역사 속에서 살아온 사람이며, 통곡하기에는 자신의 젊음이 부끄러워 어느 지점에 멈춰 서 있다는 내용으로, 시인의 역사 의식이 짙게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그가 멈춰 서 있는 지점은 어디인가? ‘밤’(부정적 심상)보다 어둔 ‘좌표 없는 대낮’(부정적 심상)에 서 있다. 그런데 이 시에는 두 종류의 ‘어둠’(부정적 심상)이 있다. 하나는 ‘밤’의 어둠이요, 다른 하나는 ‘대낮’의 어둠이다. 전자는 ‘일제 시대’를 비유하고, 후자는 ‘광복 후의 우리 시대’ 즉, 식민 잔재가 청산되지 않은 채, 좌․우익의 이념적 갈등으로 시련을 겪는 해방 직후의 상황을 비유함을 알 수 있다.
자신이 서 있는 자리는 좌표를 알 수 없어 대낮인데도 밤보다 어둡게 느껴지는 곳이다.
그런 속에서 서정적 자아는 음악과도 같고, 가을비가 스쳐 가는 것과도 같고, 아득한 ‘햇무리’(긍정적 심상-‘새벽’)를 타고 오는 것과도 같은, 목마르게 기다리던 그리운 ‘목소리’(긍정적 심상)를 듣는다. 제2연은 ‘밤보다 어두운(부정적인)’ 현실 속에서 ‘그리운’ 너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내용이다.
서정적 자아는 연이어 달려오는 ‘당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당신은 인자한 모습으로 나를 어루만져 주며, 그의 목소리와 모습이 마치 ‘지혜’처럼 빛난다. 하지만 핏발 선 노한 눈망울로 다시 나를 꾸짖는다. 서정적 자아를 어루만지고 꾸짖는 당신은 어떤 존재일까? 조국의 밝은 미래를 가져다 줄 순수하고 정의로운 존재로 볼 수 있다.
시인은 바로 그러한 존재를 고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3연은 당신의 거룩한 목소리가 포옹할 꽃 한 송이 없는 세월, 좌표 없는 대낮이 밤보다 어둔 세월을 살면서, (사탄의 가슴에 창을 겨누지도 못하고) 나의 젊음이 부끄러워 멈춰 서 있기에, 지혜의 빛나심으로 젊은 나를 꾸짖어 각성케 한다는 내용으로 과거의 어두운 삶에 대한 자책감을 노래하고 있다.
조국의 부름 같은 그 ‘거룩한 목소리’가 있는 한 나는 ‘별’(긍정적 심상-믿고 의지할 희망)이 가고(사라지고), ‘어둠’(부정적 심상-절망)이 범람해도 좋다. 당신의 큰 질책으로 나는 이미 각성했으므로, 만가(輓歌 : 상여 소리, 죽은 이를 애도하는 노래)를 불러 얼룩진 역사를 이젠 끝내고, 참한 노래와 새벽을 잉태한 ‘함성’(긍정적 심상)으로 다시 억만(수많은) ‘별’(긍정적 심상-희망)을 불러모아 ‘사탄’(부정적 심상-악과 어둠을 가져다 준 존재)의 가슴에 ‘새벽 종’(긍정적 심상-어둠에서 벗어나 모든 생명이 살아남을 알리는 존재)이 울 때까지 ‘창’(긍정적 심상-악과 어둠을 무찌를 힘, 정의)을 겨누겠다고 다짐한다.
그러므로 제4연은 세상을 어둡게 하는 사탄의 가슴에 창을 겨누고 싸울 준비가 되어 있기에, 얼룩진 역사에 종언을 고하고 ‘새벽’(긍정적 심상-새 역사)을 맞이하겠다는 의지(각오)를 노래하고 있다.
결국 신석정의 ‘전아사’는 퇴영과 무사 안일, 순응과 타협으로 얼룩진 역사를 하루 빨리 보내고, 순수하고 정의롭고 밝은 새벽을 기다리는 함성으로 과거 역사에 창을 겨누는 의지의 자세를 가질 때 진정한 삶이 건설될 것이라는 확신을 표출한 시이다.
* 삶에 대한 의지를 노래한 시의 경우
해바라기의 비명(碑銘) - 청년 화가 L을 위하여
나의 무덤 앞에는 그 차가운 빗돌을 세우지 말라.
나의 무덤 주위에는 그 노오란 해바라기를 심어 달라.
그리고 해바라기의 긴 줄거리 사이로 끝없는 보리밭을 보여 달라.
노오란 해바라기는 늘 태양 같이 태양 같이 화려하던 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라.
푸른 보리밭 사이로 하늘을 쏘는 노고지리가 있거든 아직도 날아오르는
나의 꿈이라고 생각하라. - 함형수 -
나의 무덤 앞에는 그 차가운 빗돌을 세우지 말라.
1행에서 ‘차가운 빗돌’은 거부의 대상이다. ‘세우지 말라’는 서술어와 결합했기 때문에 부정적 심상으로 파악되는 것이다. 이 ‘차가운 빗돌’의 좀더 구체적인 함축적 의미를 알려면 이 시어와 대립적 위치에 있는 ‘해바라기’의 함축적 의미를 찾아내어 그것을 바탕으로 ‘차가운 빗돌’의 의미를 대조적으로 추리하면 된다.
먼저 ‘해바라기’의 함축적 의미를 찾아보자. 제4행에 언급되어 있듯이 ‘해바라기’는 ‘태양 같이 태양 같이 하던 화려한 나의 사랑’이라는 함축적 의미를 가진다.
이를 좀더 일반화하면 ‘정열적인 사랑’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태양’의 뜨거움이 주는 느낌을 바탕으로 추리해 보는 것이다. 이렇게 ‘해바라기’의 함축적 의미를 밝히고 나면 ‘차가운 빗돌’의 함축적 의미는 좀더 분명해진다. ‘차가운’이라는 시어는 ‘태양’의 뜨거움에 대립되니 ‘식어 버린 정열’과 상관이 있을 것이다. ‘차가운 빗돌’이란 결국 ‘정열이 식어 버린 사랑’(부정적 심상)이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1행의 함축적 의미는 다음과 같이 추리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내가 죽을지라도 내가 생전에 가지고 있었던 정열적인 사랑마저 끝장났다고 생각하지 말라.” 이 말을 구절화 하면 ‘비정열적 사랑에 대한 거부’가 될 것이다.
따라서 제1행의 함축적 의미는 ‘죽음 앞에서 거부하는 비정열적인 삶’이 된다.
나의 무덤 앞에는 그 노오란 해바라기를 심어 달라.
여기서 ‘해바라기’는 소망의 대상으로 긍정적 심상을 가진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해바라기’의 함축적 의미는 ‘정열적인 사랑’이다. 따라서 이 행의 함축적 의미는 ‘정열적인 사랑에 대한 소망’이 될 것이다. 결국 1행을 통해 ‘비정열적인 사랑’을 거부하고 2행을 통해 ‘정열적인 사랑에 대한 소망’을 강조한 것이다. 2행에서는 소망이 좀더 구체적이고 강조된 형태로 드러나는데 1행에서 ‘말라’를 통해 거부의 심상을 분명히 함으로써 2행의 ‘달라’를 더욱 강열한 의미를 가지도록 한 것이다.
1행, 2행의 함축적 의미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정열적인 사랑에 대한 강열한 소망’이 된다.
그리고 해바라기의 긴 줄거리 사이로 끝없는 보리밭을 보여 달라.
‘보리밭’ 역시 긍정적 심상을 지닌다. ‘달라’라는 소망의 대상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보리밭’은 문맥적으로 보아 죽은 이가 무덤에 누워 바라볼 수 있는 대상으로 상정되어 있다. 보리밭은 무덤의 맞은편에 있는 것으로 ‘무덤’과는 대조적 위치에 있다. ‘무덤’이 ‘죽음’ 혹은 ‘저승’의 상징 의미를 가진다면 ‘보리밭’은 ‘생명’이나 ‘이승’의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 무덤과 대립적 위치에 있는 ‘보리밭’의 상징 의미를 이렇게 해석한다면 3행의 함축적 의미는 ‘죽어서도 생명, 혹은 이승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것이므로 ‘죽음을 넘어서 생명, 혹은 이승에 대한 강렬한 소망’이 될 것이다.
노오란 해바라기는 늘 태양같이 태양같이 하던 화려한 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라.
이 행은 이 시의 중심 심상을 이루고 있는 ‘해바라기’의 함축적 의미를 설명한 부분이다. 여기서 ‘태양같이’라는 함축적 의미가 ‘뜨거운 정열’ 정도로 해석되는 것은 ‘차가운 빗돌’의 ‘차가운’이라는 시어와 대립을 이루기 때문이다. ‘태양 같이’라는 시어의 함축적 의미를 해석하고 나면 이 시행에서 특별히 어렵게 감지되는 것은 없다. 형상화가 아닌 일종의 설명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해를 따라가는 해바라기의 속성과 해를 동일시하여 그 정열적인 속성을 뽑아낸다는 점에 있다.
해바라기는 해와 모양의 유사성이 있으면서 ‘뜨겁다. 정열적이다’라는 속성상의 유사성도 가진다. 함축적 의미는 주로 후자와 관련된 것이므로 ‘해바라기’를 ‘정열적인 사랑’으로 해석하는 데 무리가 없도록 하는 핵심적 시행이 된다.
그러나 이 행이 없어도 ‘해바라기’의 상징 의미는 비교적 분명하게 파악된다는 점에서 이 행은 시행으로서는 사족이다.
푸르른 보리밭 사이로 하늘을 쏘는 노고지리가 있거든 아직도 날아오르는 나의 꿈이라고 생각하라.
여기서 주의를 요하는 시어는 ‘아직도’이다. ‘아직도’란 ‘죽어서까지도’로 해석하는 데 무리가 없다. 이 ‘아직도’라는 시어의 문맥적 의미를 분명히 하고 나면 이 행은, 죽어서도 생명에의 꿈을 버리지 않는 시적 자아의 태도를 드러내는 것이다.
결국 이 시는 거부(말라)와 소망(달라)의 대립 구조를 통하여 정열적인 사랑과 생명에 대한 강렬한 소망을 강조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무덤에 들어가서조차도 생명과 정열적인 사랑을 추구하는 것이 시적 자아의 소망이므로 죽음을 넘어선 생명, 죽음을 넘어선 사랑에 대한 소망이 이 시의 주제가 되는 것이다. 영원한 생명, 영원한 사랑에 대한 강렬한 소망이 이 시의 주제이다.
* 사물의 본질을 탐구하는 시의 경우
꽃을 위한 서시(序詩)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未知)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존재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너는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진다.
눈시울에 젖어드는 이 무명(無名)의 어둠에
추억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나는 한밤내 운다.
나의 울음은 차츰 아닌밤 돌개바람이 되어
탑(塔)을 흔들다가
돌에까지 스미면 금(金)이 될 것이다.
……얼굴을 가리운 나의 신부(新婦)여. - 김춘수 -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긍정적임)이므로 ‘위험한 짐승(동물)’은 부정적 심상을 지니며, 위험한 짐승인 서정적 자아는 현재(‘시방’) 부정적인 상태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서정적 자아는 왜 자신을 ‘위험한 짐승’이라고 했을까? 그것은 서정적 자아의 생각하는 능력이 위태로운(부정적인) 상황에 이르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의 까마득한 어둠이 되’기 때문이다. 서정적 자아가 ‘너’에게 손을 대는 행위는 대상을 좀더 자세히 알고 싶다는 의지가 숨어 있다. 결국 ‘나의 손이 닿으면’이라는 시행은 ‘너의 본질을 좀더 구체적으로 알려고 하면’이라는 의미를 함축한다.
‘미지의 까마득한 어둠’은 알 수 없는 어둠이라는 뜻보다는 ‘까마득한 어둠과도 같은 미지’(부정적 심상)라는 뜻으로 ‘미지’와 ‘어둠’을 동일시한다.
그러므로 제1연은, 내가 생각하는 능력이 위태로운 상태(사물의 본질을 아직 깨닫지 못한 상태)에 있으므로 너의 의미를 알려고 하면 너는 알 수 없는 상태, 말하자면 미지의 상태가 된다. 다시 말하면 서정적 자아가 존재가 지닌 참다운 의미를 판별할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너(꽃)는 어둠으로 변하고 아무런 존재의 의미성도 얻지 못한다는 내용이다.
서정적 자아가 좀더 자세히 알고 싶어하는 ‘너’의 실체는 무엇일까? 2연을 살펴보자. 너는 ‘피었다 지는’ 존재이므로 ‘꽃’이다. 그럼 시인은 꽃을 노래하고 있는가? 아니다. 꽃은 단지 사물에 내재해 있는 본질 혹은 본질적 의미를 나타낸다. 서정적 자아는 꽃의 본질, 말하자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물의 본질을 알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것은 ‘흔들리는 가지 끝과 같은 존재’(부정적 심상)이므로 고정되지 못하고 유동하는, 따라서 불안정한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진다’. 어떤 사물에 이름이 없다는 것은 그 사물의 의미가 분명치 않아 한낱 무의미한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2연은, 너는 불안정한 존재이기 때문에 피었다 지는 의미를 서정적 자아가 인식하지 못한다는 내용이다.
‘눈시울에 젖어드는 이 무명의 어둠’은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지는 현상을 암시하므로 부정적 심상을 지닌다. 서정적 자아는 어둠 속에 있기 때문에 추억이라는 불을 밝히고(‘추억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운다. 다시말하면 ‘무명의 어둠’을 몰아내려고(존재의 본질을 탐구하려고) ‘추억의 불’을 밝히는 셈이다. 여기서의 추억이란 서정적 자아가 지닌 경험의 전부이며 과거부터 이제까지의 삶의 과정에서 얻은 모든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므로 서정적 자아는 무명의 어둠을 깨쳐 꽃의 의미를 알기 위해, 살아온 과거의 추억에다 불을 밝힌다는 것이다. ‘운다’는 것(울음)은 일반적으로 ‘슬픔’을 상징하므로 부정적 심상을 지니지만, 여기서는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한 혼신의 ‘노력’을 암시하므로 긍정적 심상을 지닌다. 따라서 제3연은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지는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서 서정적 자아는 한밤 내(평생 동안) 사물의 본질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서정적 자아의 울음(긍정적 심상-노력)은 깊은 밤 뜻밖에도 돌개바람(회오리바람)이 된다. 노력이 회오리바람이 된다는 것은 사물을 뒤흔드는 능동적 힘을 얻는다는 의미이므로 돌개바람은 긍정적 심상으로 파악할 수 있다. ‘탑’(긍정적 심상)은 ‘쌓는다’라는 행위에 내포되어 있듯이 소망과 기원의 완성을 뜻하는 상징물이다. 그런 점에서 회오리바람이 탑을 흔든다는 것은 물질적 돌을 절실한 소망의 정신적 표상물로 의미화하는 ‘탑 쌓기’의 행위와 동일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돌’(긍정적 심상)은 ‘응집, 혹은 견고함’을 상징하므로 ‘돌에까지 스미면’은 ‘응집되어 견고해진다면’이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금’(긍정적 심상)은 빛의 세계, 고귀함을 상징한다. 금이 된다는 것은 고귀한 빛 즉, 사물의 진정한 모습이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제4연은 노력만 한다면 사물의 본질을 충분히 인식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5연에서 서정적 자아는 ‘너’(꽃)를 마침내 ‘얼굴을 가리운 나의 신부여’라고 부른다. 그런 점에서 신부의 이미지는 신비하다. 또한 ‘얼굴을 가리운 신부’는 우리 눈에 분명히 드러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드러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런 신부는 드러나면서 숨어 있는 존재를 표상한다. 이미 4연에서 노력을 하면 사물의 의미를 인식할 수 있다고 한 상태인데, 다시 5연에서 꽃을 ‘얼굴을 가리운 신부’로 표현한 것은 모든 사물의 의미는 얼굴을 가리운 신부처럼 면사포를 쓴 상태이므로 면사포를 거두어 존재의 본질을 인식하기 위하여 노력하면서 살자는 뜻일 것이다.
이상의 분석을 통해 이 시의 의미를 재구하면 다음과 같다.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의 까마득한 어둠이 되기에 나의 능력으로서는 꽃의 내면적 의미의 실상을 이해할 수는 없어도, 꽃은 본질과는 관계없이 존재하며 끝없이 꽃망울을 피우거나 지곤한다. 그러므로 나는 모든 지적 능력과 체험을 다하여 그 본질을 파악하려 하지만, 얼굴을 가리운 신부처럼 꽃의 정체는 끝내 밝혀지지 않는다. 그러나 존재 파악을 위한 끊임없는 노력인 나의 울음은 금처럼 소중한 것이다. 따라서 꽃으로 대유된 모든 사물 속에 내재하는 본질적 가치를 추구하지만, 비록 그 결과에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노력 그 자체에 대해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자.
지금까지 작품 ‘절정’, ‘전아사’, ‘해바라기의 비명’, ‘꽃을 위한 서시’를 대상으로 시 이해를 위한 한 접근 방안을 살펴보았다. ‘시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하는 문제를 이처럼 시어의 심상 파악을 통한 방법으로는 많은 한계가 있다. 인간의 감정은 복잡 미묘하기 때문에 이것을 대립적으로 이원화한다는 것 자체가 위험한 발상임에 틀림없다. 이 방법이 모든 시에 적용될 수는 없고 이것으로 한 편의 시를 제대로 이해하기도 어렵다. 그리하여 본문의 분석에서는 시어의 심상 파악을 골간으로 삼고 문맥을 통한 의미 파악, 역사주의적 접근법 등을 적용해 보았다.
이러한 방안이 학생들이 낯선 작품을 만났을 때 겪게 되는 난처함을 조금은 해소시켜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교과서 밖의 시’라는 것에 대한 공포감을 어느 정도는 극복할 수 있으며,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를 모르는 학생들에게 조금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시의 부분 부분에만 매혹되어 시 전체의 규모를 파악하지 못한 채 헤매는 학생들이 세세한 부분들에 사로잡힘이 없이 시를 뚫고나가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는, 시의 전체적인 짜임새와 그것을 분석하고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안목이 길러지기를 기대한다.
6. 이미지즘의 논란
시의 본질이 새로운 리듬보다 이미지의 창조에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미지에 무엇보다 많은 관심을 나타내기 시작한 거슨, 서양의 경우, 몇몇 시인들이 모여 운동을 전개하면서부터이다. ㅅ위 심상주의 imagism란 용어가 사용되면서부터다.
심상주의란 1912년부터 1917년까지 영국과 미국에서 전개된 하나의 시운동을 말한다.
그것은 당시의 젊은 철학자 흄의 시론에 부분적인 영향을 받으면서 런던에 있던 몇몇 영․미 시인들에 의해 조직되었다. 그들은 세기 전환기를 맞으면서 그때까지의 시적 유산, 소위 파운드가 감상적 시라고 부른 유산에 저항하면서 새로운 시의 창조를 모색했다. 이들이 전개한 운동의 구체적인 모습과 시적 특성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이미지즘 운동의 집합체로서 이들은 다섯 차례에 걸쳐 종합시집을 펴낸다. 1914년의 「이미지스트 시집」에는 올딩턴, H.D. 플린트, 로웰, 월리엄즈, 조이스, 파운드 등의 시가 발표된다. 1915년에는 「이미지스트 시인들의 시집」라는 표제로 시집을 내고, 여기에는 그들이 지향하는 시의 강령이 여섯 항목으로 요약되었으며, 올딩턴, H.D, 플레처, 플린트, 로렌스, 로웰의 시가 실려 있다. 1916년에는 「이미지스트 시인들의 연간 시집」라는 표제로 시집을 내고, 이 책에는 올딩턴, H.D. 플레쳐, 플린트, 로렌스, 로웰 등의 시가 실려 있다. 1917년에는 1916년과 같이 「이미지스트 시인들의 연간 시집」이라는 표제로 시집을 내고, 이 책에는 올딩턴, H.D, 플레처, 플린트, 로렌스, 로웰의 시가 실려 있다. 이미지스트들의 집단적 운동은 1917년의 시집으로써 일단 끝난 것으로 평가된다.
1917년 로웰은 '이미지스트 시인 선집은 더 이상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 시집은 맡은 바 임무를 다하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1930년에 이들은 다시 「이미지스트 시집」 이라는 표제로 시집을 출판했다. 이 책에는 포오드와뉴우르의 서문이 실려 있고, 올딩턴, 코울너스, H.D, 풀리처, 플린트, 포오드, 조이스, 로오렌스, 윌리엄즈의 시가 실려 있다.
이 시집은 그 노트에서 말하고 있듯이 이미지즘의 집단적 운동의 계속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미지스트 시인들은 이제 각자의 방향에 따라 발전 향상하여왔기 때문에, 그들이 책을 내는 것은 전위운동으로서 이미지즘을 다시 일으키려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우정 때문이라고 적혀 있다.
이미지스트 시인들이 시에 대한 새로운 견해를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시카고에서 발행된 「시와 시론」poetry이라는 잡지 1913년 3월호에서 파운드와 플린트가 그드르이 생각을 개진하면서 부터였다. 파운드는 '이미지스트 시인들이 하여서는 안될 몇가지 금제 조항', 플린트는 '심상주의'라는 제목으로 그들의 시의 원칙을 밝혔다. 플린트가 제시한 시의 원칙은 첫째로 주관적인 것이거나 객관적인 것이거나 대상을 직접 표현할 것, 둘째로 효녀에 기여하지 않는 말은 절대로 사용치 말것, 세째로 리듬의 경우에는 박자 metronome의 연속이 아니라 음악적 어구 phrase의 연속으로 쓸 것 등이다. 그런가 하면 파운드는 이미지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이미지는 한 순간에 지知와 정情의 복합물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미지는 갑자기 일어난 자유의 의식-시간의 한계에서 벗어나는 의식-으로, 우리들이 가장 위대한 예술작품에 직면하여 경험하는, 갑자기 생기게 되는 성장발전의 의식을 즉각적으로 일으키게 하는 복합물의 표현이다. 수많은 작품을 쓰는 것보다 일생동안에 단 하나의 심상을 표현하는 것이 더 좋다.
또한 시어에 대해서 파운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불필요한 말과 형용사를 쓰지 말 것. 그것은 아무 것도 제시하는 것이 없다. '먼 평화의 나라'같은 표현을 사용하지 말 것. 이러한 표현은 이미지를 흐리게 한다. 그것은 추상적인 것과 구체적인 것을 혼돈케 한다. 그것은 자연스런 대상이 항상 적당한 표상 symbol이라는 사실을 작가가 이해 못하는 데에서 온다.
추상적인 말을 두려워하고 사용하지 말 것. 이미 훌륭한 산문에서 표현된 것을 서투른 운문으로 다시 쓰지 말 것. 길게 씀으로써 훌륭한 산문이 보여주는 기교의 어려움을 피하려고 하여도 현명한 독자는 속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할 것. 오늘 전문가들이 싫증을 느끼는 것은 내일이면 일반인도 싫증을 느끼게 된다.
시의 기교가 음악의 기교보다 더 단순하다고 생각하지 말 것. 또는 적어도 보통 수준의 피아노 교사가 피아노 기교에 소비하는 것과 같은 노력을 시의 기교에 소비하기 전에는 전문가를 만족시킬 수 없다고 생각할 것.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훌륭한 예술가의 영향을 받을 것. 그 영향을 솔직히 인정할 것인지 아니면 그것을 감추려고 하는 품위를 가질 것. 이와 관련하여 이들은 1915년의 시집에서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그들이 시적 강령을 여러 항목으로 발표했다.
1. 일상어를 사용하지 말 것. 그러나 항상 정확한 말을 사용할 것. 정확에 가깝거나 단순히 수식적인 말은 사용하지 말 것.
2. 새로운 정조mood의 표현으로서 새로운 리듬을 창조할 것. 낡은 정조를 반영하는 데 지나지 않는 낡은 리듬을 흉내내지 말 것. 우리들은 시를 쓰는 유일한 방법으로서 자유시, free verse를 주장하지는 않는다. 우리들은 시인의 개성은 인습적인 형식 볻는 자유시로 더 잘 표현되리라고 믿는다. 시에 있어서 새로운 운율 cadence은 새로운 사상 idea을 뜻한다.
3. 주제의 선택을 절대로 자유롭게 할 것. 비행기와 자동차에 대하여 서투르게 쓰는 것보다 과거의 것에 대하여 솜씨 있게 쓰는 것이 좋다. 우리들은 현대생활의 예술적 가치를 진심으로 믿는다. 그러나 우리들은 1911년의 비행기처럼 고무적이 못되고, 또 새로운 분위기를 못 가지는 것은 없다고 지적하고 싶다.
4. 이미지를 제시할 것. 이 이미지라는 말에서 이미지스트라는 말이 왔다. 우리들은 화가의 일파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시가 특수한 것을 정확하게 표현해야 하며, 아무리 찬란하고 당당한 것이라 하여도 막연하고 보편적인 것을 취급해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5. 조각같이 확연하고 눈에 명백히 보이는 시를 지을 것. 멍하고 흐릿하고 막연한 시를 쓰지 말 것.
6. 마지막으로 우리들의 대부분은 집중이야말로 시의 참된 본질이라고 믿는다.
이상의 강령을 좀더 요약하면, 이미지스트들이 내세운 것은 정확한 말의 사용, 새로운 리듬의 창조, 주제의 자유,, 이미지의 제시, 조각성, 집중 등이다.
7. 감각적 심상과 논리적 심상
좀 이야기가 이론적이 되지만 앞서 소개한 이미지스트의 선봉인 미국시인 에즈라 파운드는, 그의 『어떻게 읽을 것인가』라는 저서에서 시를 형성하는 언어에는 세 가지 기능이 포함되어 있는데 즉,
1. 멜로포에이아(Melopeia - 운율적 요소)
2. 패노포에이아(Phanopoeia - 영상적 요소)
3. 로고포에이아(Logopoeia - 논리적 요소)
라고 하다. 그래서 현대시는 저 언어의 세 기능 중 근대 이전의 고전시가들이 매력의 중심으로 삼았던 음악성에서 탈피하여 생각의 모습을 짓는, 즉 이미지의 미학을 불러들인 것이다. 실제 시에 있어서 음악성이 가장 중요한 요소라면 시는 예술에 있어서 음악 그 자체에 비할 바가 못 된다 하겠고, 가령 우리가 음악적 도취만을 위해서라면 바로 음악을 감상하는 편이 나을 것이요 또 시보다는 가요가 더욱 음악적이라 하겠다.
그래서 현대시는 과거의 노래하는 시에서 생각하고 그려내는 시로 성격의 변모를 가져온다. 즉, 에즈라 파운드의 말을 빌리면 멜로포에이아에서 패노포에이아로 바뀌게 되었다. 그런데 현대시는 차츰 패노포에이아의 영상성(映像性), 즉 단순하고 평판적인 시각성(視覺性)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로고 포에이아, 즉 논리적이고 기하학적인 조형으로 발전해간다. 그래서 이러한 이미지의 두 가지 성격을 감각적 심상과 논리적 심상으로 구별짓게 되는데 그 조형의 실제를 이제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그러면 먼저 감각적 미상인데 이것은 지난번 T.E. 흄의 「가을」을 비롯하여 각 감각기관을 매개로 한 여러 가지 시를 예로 들었지만, 좀더 명료한 감득을 위해 우리 시에서 하나 찾아내 보면 조지훈(趙芝薰, 1920~68)의 「여운(餘韻)」,
물에서 갓나온 여인이
옷 입기 전 한때를 잠깐
돌아선 모습
달빛에 젖은 탑이여
온몸에 흐르는 윤기는
상긋한 풀내음새라
검푸른 숲 그림자가 흔들릴 때마다
머리채는 부드러운 어깨 위에 출렁인다.
희디흰 얼굴이 그리워서
조용히 옆으로 다가서면
수줍음에 놀란 그는
흠칫 돌아서서 먼뎃산을 본다
한마디로 말해 이 시는 어느 절간의 밤 풍경으로서 달빛을 받은 석탑을 마치 옷 벗는 여인의 모습, 즉 나부상(裸婦像)처럼 그려놓고 있다. 이렇듯 감각적 심상은 그 어떤 사물을 눈앞에 보듯 그리고 그 이미지가 모습이나 빛깔이나 냄새 등을 로 정경적(情景的)조화를 이루면 그것의 미적인 우열은 둘째로 하고 시가 된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논리적 심상은 그렇듯 간단치가 않아서 논리나 사상과 같은 추상적인 것을 어떻게 정서적인 것으로 공간에서 펼쳐 보이느냐 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더구나 단순한 서정성에서 탈피하여 사회의식에서 오는 비평이나 풍자, 해학 등과 존재인식이나 형이상학적 인식에서 오는 지적(知的) 제재를 시에 불러들이려는 현대시의 이 방법은 결코 용이치가 않다.
솔직히 말하면 오늘의 한국시의 이미지란 거의가 시각적(감각적) 심상에 머물러 있다 하겠고, 이지적 정신의 소산인 논리적 심상에 자각적으로 나아가는 시인이 드물다 하겠으며, 그래서 아마 논리적 심상이란 용어부터 낯설게 들릴 것이다.
이제 논리적 이미지의 시를 감상하겠는데 우리 시단의 통념이 그런 시를 보면 소위 서구적 시로 오해하는 폐단이 있어 시인 박남수(朴南秀,)의「호루라기」를 예로 들면,
1
호루라기는, 가끔
나의 걸음을 정지시킨다.
호루라기는, 가끔
권력이 되어
나의 걸음을 정지시키는
어쩔 수 없는 폭군이 된다.
2
호루라기가 들린다.
찔끔 발걸음이 굳어져, 나는
되돌아보았지만
이번에는 그 권력이 없었다.
다만 예닐곱 살의 동심이
뛰놀고 있을 뿐이었다.
속는 일이 이렇게 통쾌하기는
처음 되는 일이다.
이 시는 우리의 일상경험과 밀착되어 있을 뿐더러 상황의 제시가 명확하여 난해한 대목이 하나도 없고 이미지의 논리도 간결하므로 누구나 쉽게 이해할 것이다. 즉, 우리는 이 시를 읽음으로써 똑같은 호루라기라도 그 부는 사람에 따라 엄한 지시도 되고 귀여운 장난감이 된다는 사실을 새삼 분명히 깨닫는다. 그리고 이 시에 엄한 지시의 권력이 된 폭군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지는 않았지만, 이 정도의 암시만으로도 판권만능시대의 그 권력의 횡포에 대한 외적 경험을 내적인 경험으로까지 심화 확대시켜주고 있다. 그러나 이렇듯 노이로제가 되다시피 한 권력의 상징이 된 호루라기에 대한 고정관념이 순진무구한 동심의 호루라기로 인해 일시에 붕괴됨으로써 그 착각, 즉 속는 일이 오히려 쾌감(즉 시적 감동)으로 바뀌지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이 시는 오늘날 우리 사회현실에 대한 풍자로서 작자는 자기의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 어떤 체험현상에다 유사성을 찾아서 그 것을 발판으로 사고의 형태인 논리를 이미지화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시속의 사상은 논리만이 아니리 때문에 그 어떤 느낄 수 있는 것으로 변질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 대하여 T.S 엘리어트는 <시는 사상을 장미의 향기처럼 느끼게 하는 것이다>라는 명담을 했는데, 시는 정서가 없이 순수한 사고와 논리만으로는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이렇듯 한 사상이 물상(物象)의 비유, 특히는 은유로서 이미지로 환원되는 상태를 일본의 탁월한 현대시인이며 시론가였던 무라노시로[村野四郞]는<마치 털벌레가 나비로 변신하는 상태와 같다>로 말한다. 이번에는 앞서의 현실비평적인 것이 아니라 좀더 존재론적이요 인식론적인 시를 나의 시편에서 하나 골라내 보면 그 제목부터가 「나」라는 시인데,
내 안에 사지(四肢)를 버둥거리는
어린애들처럼
크고 작은 희로애락의 뿌리
그보다도
미닫이에 밤 그림자같이
꼬리를 휘젓는 육근(六根)이나 칠죄(七罪)의
심해어(深海魚)보다도
옹기굴 속 무명(無明)을 지나
원죄(原罪)와 업보(業報)의 마당에
널려 있는 우주진(宇宙塵)보다도
또다시 거품으로 녹아 흐르고
마른 풀같이 바삭거리는
원초(原初)와 시간의 지층(地層)을 빠져나가서
사막에 치솟는 샘물과
빙하(氷河)의 균열, 오오 입자(粒子)의 파열,
그보다도
광막한 우주 안에
좁쌀알보다 작게 떠 있는
지구보다도
억조광년(億兆光年)의 별빛을 넘은
허막(虛漠)의 바다에
충만해 있는 에테르보다도
그 충만이 주는
구유(具有)보다도
그 반대의 허뭅다도
미지(未知)의 죽음보다도
보다 더 큰
우주 안의 소리 없는 절규!
영원을 안으로 품은 방대(尨大)!
나.
나 자신이 이렇게 말하기는 면구스러우나 나는 한국시인 중에서 유달리 저런 논리적 심상을 많이 구사하는 사람으로서, 그것은 내가 시의 주제를 사회현실의 비평되는 존재론이나 형이상학적 인식의 세계에 두고 있기 때문이요, 한편 시에 한자숙어가 많이 나오는 것도 그런 관념세계가 지니는 추상용어가 우리말에는 아직 발달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야 어떻든 이 시도 역시 <나>라는 한 인간존재에 대한 인식의 불상적物象的 비유로 이뤄진 이미지로서, 특히 보다라는 조사助詞로써<나>라는 존재와 전혀 엉뚱한 사물의 유사성을 <오묘하다>는 한 점에다 근거를 두고 심화하고 확대하여 유일唯一적인 존재로서의 지존至尊가 지대至大함을 나타내고 있다. 이렇듯 신선한 이미지의 조형이란 자기의 생각을 통념적이 아닌 뜻밖의 사물에다 연결시켜서 표상화하는 것으로, 이것은 넓고 깊은 인식력과 상상력으로 획득된다 하겠다. 그래서 빈약한 상상력이나 천박한 인식력으론 일상적이고 고식적인 이미지밖에 조형을 해내지 못하기 때문에 시의 매력을 주지 못한다. 흔히 초현실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연상聯想의 단절>이라는 것도 실은 저렇듯 사물의 통속적 ․습관적 연상을 단절하고 사물의 전혀 새로운 유사성을 구하여 그 이미지의 더욱 효과적인 사용을 노리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니까 그들도 두 가지 사물의 유사성을 구하는 것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사람들의 의식 속에 매몰된 지가知覺들의 유사성으로 새로운 이미지를 끄집어내려는 의도적 방법을 뜻한다. 그래서 초현실주의의 시조라고 불리는 앙드레 브르통도 그의 「초현실주의 선언」에서<이미지는 정신의 순수한 창조다. 그것은 외면적 비교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관련이 먼 두 개의 실재의 접근에서 생겨난다.
그 접근된 두 가지 실재의 관계가 멀고 또한 정확할수록 그 이미지는 강한 것이 될 것이요, 그것은 그만큼 정서의 힘과 시적인 실재성을 갖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만 보아도 그들의 방법이 시의 이미지의 참신성 또는 심층화 작업임을 짐작할 수가 있다.
저렇게 볼 때 이미지란 지적 작업이요 또 그 산물임을 알 수가 있다. 흔히 이미지를 어떤 이들은 환상이나 공상으로 오해하거나 혼동을 하는데, 영국의 문예비평가가 존 러스킨(John Ruskin, 1819~1900)의 말대로<이미지를 사고를 형성한다든가 창조의 힘을 갖고 있지 않다>고 하겠다. 즉 환상이나 공상은 어떤 사람의 의지와 관계없이 무책임하게 확대되어 가는, 마치 대낮의 꿈처럼 비현실적인 수동적 현상이지만, 이미지는 일정한 방향에다 의식을 집중시켜 만드는 능동적 창조행위인 것이다. 이 점을 또렷이 인식시키기 위하여, 이왕 이번에는 우리 시를 인용하였으니 여기서도 서정주 (徐庭柱)의 「동천冬天」을 쳐들면,
내 마음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 섣달 날으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라고 되어 있는데, 외국시인들 여럿이 그 번역만을 읽고도 감탄을 금치 못해하더라는 이 시를 쉽게 풀이하면 겨울밤의 하늘 풍경, 즉 초승달(그믐달)이 걸린 하늘에 새가 날으는 모습인데, 이 절묘한 시각적 이미지를 어느 누가 무의식적으로 떠올려서 써놓은 환상이나 공상의 허튼 소리라고 하겠는가?
또는 동서고금의 연시 중에서도 가장 뛰어났다고 할 황진이의「동짓날 기나긴 밤을」은,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 둘헤 내어
춘풍니불 아래
서리 서리 너헛다가
어른님
오시는 밤이어드란
그뷔 구뷔 펴리라
한국의 음력 11월은 밤이 가장 길다. 이런 밤에 젊은 여인, 특히 남녀의 정사를 샅샅이 아는 기생의 독수공방은 그야말로 지루하고 정한이 사무쳐올 것이다. 이런 지겹고 긴 밤을 보관해두었다가 애인이 와서 함께 지내면 언제나 미진해서 짧게 여겨지는 그런 밤에다 연장하고 싶다는 논리적 이미지인 것이다. 그 테마 자체도 당시 여성으로선 대담하려니와 밤이란 시간을 의인화하여<여성(자신)의 육체>로 공간화한 그 절묘하고 고도한 수법은 얼마나 지적이며 기술적인가? 그래서 프랑스의 다재다능한 현대시인 장 콕토(Jean Codteau, 1889~1963)는 「직업의 비밀」이라는 글에서 <시인은 꿈꾸지 않는다. 그는 계산한다>고 말한다. 흔히들 시를 부정확하고 자연발생적이고 몽상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것은 큰 오해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시를 감상할 때도 시 속에서 보다 감각적인 요소를 즐기려는 이가 있는가 하면 보다 논리적 (스테이트먼트 또는 메시지)인 요소를 음미하려는 독자가 있듯이, 시인에게 있어서도 감각적인 요소를 주제로 삼으려는 이와 사색적인 요소를 주제로 삼으려는 두 가지 경향이 있다
8. 이미지의 형성 방법
이미지를 형성하는 방법에는 묘사에 의한 방법, 비유적 표현에 의한 방법, 상징에 의한 방법이 있다. 이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이미지 형성 방법은 비유적 표현에 의한 것이다.
* 예문 통해 알아보기
① 묘사에 의한 이미지 형성
묘사(描寫) 또는 감각적인 수식어의 구사를 통하여 사물의 영상을 직접 드러나게 하는 심상을 말한다.
어두운 방안엔
바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로이 잦아드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 김종길,<성탄제>
⇒ 이 시에서는 대상을 서술하거나 묘사하는 것만으로도 심상이 훌륭하게 제시되었다.
② 비유에 의한 이미지 형성
직유, 은유, 대유, 의인 등의 수사적 표현 방법에 의해 형성되는 심상을 말한다.
* 낙엽은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폐
* 포화에 이지러진
* 도룬 시의 가을 하늘을 생각하게 한다.
* 길은 한 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 일광(日光)의 폭포 속으로 사라지고
* 조그만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 새로 두 시의 급행 열차가 들을 달린다. ― 김광균, <추일서정>
⇒ 이 시에서는 '비유'에 의한 심상의 제시 방법을 사용하였다.
원관념 보조 관념
낙엽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폐
길 한 줄기 구겨진 넥타이
日光 폭포
담배연기 기차의 증기
③ 묘사에 의한 이미지 형성
대상을 묘사로 통해 제시되는 심상
예) 송홧가루 날리는/외딴 봉우리.
윤사월 해 길다/꾀꼬리 울면
산지기 외딴 집/눈먼 처녀가
문설주에 귀 대이고/엿듣고 있다. <박목월, 윤사월>
→한 폭의 그림을 떠올릴 수 있도록 외딴 봉우리의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9. 이미지의 의미와 속성
이미지는 순수 한국어로 모습에 해당하는 말로서, 영상(映像)이라든가 심상(心像)이라고도 한다. 리듬과 함께 시의 2대 구성원리인 이미지는 언제나 우리의 감각에 호소하며, 구체적인 것을 통해 추상적인 의미를 전달한다.
이미지가 집합되어 있는 형태 즉 이미지군(群)을 이미저리라고 하는데, 이 두 용어는 혼동되어 사용되기도 한다. 문학적 용법으로서의 이미지의 정의는 일반적으로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이미지는 축자적 묘사에 의하건, 은유에 의하건, 또는 비유에 사용된 유추에 의하건 간에 한편의 시나 기타 문학작품 속에서 언급되는 감각․지각의 모든 대상과 특질을 가리킨다.
가령 "달은 나의 뜰에 고요히 앉았다/달은 과일보다 향그럽다"(장만영, 「달․포도․잎사귀」의 일부)에서 감각적 대상인 '달'과 감각적 특질인 '향그럽다'는 모두 이미지가 된다.
둘째는 더욱 좁은 의미로 이미지란 시각적 대상과 장면의 요소만을 가리킨다.
셋째로 가장 일반적으로 비유적 언어, 특히 은유와 직유의 보조관념을 가리킨다. 신비평을 비롯한 최근의 비평은 이런 의미에서 시의 본질적 구성요소로서, 그리고 시의 의미와 구조와 효과를 분석하는 중요한 단서로서 이미지를 더욱 강조하고 있다.
시론(詩論)에서 이미지의 개념은 다시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그 하나는 작품 자체에 제시된 이미지다.
가령 조지훈(趙芝薰)의 「승무(僧舞)」를 보면 거기에는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고이 접어서 나빌레라」하는 구절이 있다.
이때 이미지로 제시되어 있는 것은 얇은 사(紗)로 된 흰 고깔이다.
그리고 이것은 작품에 제시된 이미지다.
다음으로, 또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이미지는 시를 읽는 독자나 청중의 문제일 수도 있다. 시의 이미지가 지닌 이와 같은 속성은 그것이 성립되는 조건으로 한 가지 사실이 선행되어야 할 것을 요구한다.
먼저, 작품에서 이미지가 제시된다는 것은 그렇지 않은 상태의 것을 감각화 시킨다는 것을 뜻하는데, 그럴 수 있기 위해서는 그 토대를 닦아내는 기법이 문제된다. 이것은 이미지가 상상력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음을 뜻한다.
다음, 독자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이미지는 언어의 장치를 최대한 이용해야 한다. 이것은 이미지가 언어에 대한 배려를 극대화시켜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미지는 일단 이들 두 각도에서 정의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