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민가의 원형과 간잡이 변천의 계통
김 홍 식*
목 차 Ⅰ.부리 2) 고대의 간잡이 원형 Ⅱ. 몸새 3) 간잡이의 발전 계통 1. 원시시대 가옥 구조의 원형 (1) 안동형 여간집 1) 엮집 (2) 영동형 양통 여간집 2 뼈대집 (3) 여간집의 축소와 확대 3) 틀집 (4) 삼남지방의 4간 겹집 4) 담집 또는 둑집 (5) 입구 ㅁ자집 2. 가옥 간잡이의 원형과 발전 계통 Ⅲ. 감새
1) 고대의 구조 원형 Ⅰ. 부리 문화란 옥파같은 것이라는 학설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가식 없는 문화의 원형질을 찾 기 위해 현재의 껍질을 벗기고 또 벗긴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기대했던 노른자위가 나오질 않 고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곡된 것처럼 보이는 현재의 문화도 필경 다양한 문
* 명지대학교 교수 62 민속학 연구 3호
화의 켜일 뿐 순수한 원형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민가의 원 형을 찾아보겠다는 제목을 비록 가설이나마 내 걸었다. 무엇인가 기존의 학설에 대해서 다른 시각의 민가 계통도를 그려보는 것이 기존 학설에 대한 최선의 부정일 수 있기 때문이다. 따 라서 이 논문 역시 선배들이 걸었던 또 다른 오류를 범하고 있을런지 모른다. 그러나 민가 연 구의 원래 목적이 민가의 발전 계통도를 그려봄으로써 현재의 민가 유형이 가지고 있는 문제 점을 파악하고 이를 개선(사회적 문화 가치 혼돈의 현상인 사회적 정신장애를 카타르시스)하 는 미래의 민가 형태를 가상해 보고자 함이라고 생각할 때, 이는 어쩌면 필요악일지도 모른다. 또한 많은 민가 자료가 수집․정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기존의 학설에 의존하는 현 학풍의 오류를 거부하면서, 새로운 역사관에 입각한 가정을 제안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서 누구 누구의 학설이 어떻다고 구체적으로 적시하고 싶지 않다. 이미 이런 내용은 70년대 나의 여러 글에서 지적했으므로 여기서 중언부언한다는 것이 적절치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체로 민가의 원형 및 발전 계통도에 대한 기존의 학설은 작은 것으로부터 큰 것으로 발전해 갈 것이라는 가정이다. 2간 집에서 3간 집으로, 그리고 4간 집, 곱은자집, 입 구 ㅁ자집으로 확대된다는 것인데, 다만 학자에 따라 여러 가지 변형들이 존재한다는 내용이 다. 자료가 추가되면 몇 가지의 평면 형식을 첨가하는 정도인데 여기에는 커다란 맹점이 존재 하고 있다. 단순한 진화론에 입각하여 작은집에서부터 큰집으로 진화한다는 논리를 깔고 있는 데, 이것은 현존하고 있는 민가 가운데서도 역사적 관점에서 관찰하지 못하고 통시적으로 보 고 있으며 민가 구조에 대한 연구를 전혀 도외시하는데서 빚어지는 결과이다. 또한 학자마다 전국적 민가 조사 자료에 의하지 않고 자신이 조사한 소수의 자료에만 의존하기 때문에 인근 지방 혹은 타 지방과의 연관 관계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기도 하다. 민가의 발전 계통도를 현존하는 건물만으로도 나열해 볼 수 있으며, 이것은 미래의 민가 상을 밝히는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거꾸로 민가의 원형까지를 추론해 보는데도 도움이 되 리라 믿는다. 여기에 고고학적 민가 발굴 결과를 첨가하고 역사적 혹은 경제사적․미학적 관 점에서 관찰해 본다면 민가의 발전 계통도를 그려보는데 보다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여 기 민가의 발전 계통도는 어쩌면 나의 역사관을 반영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마땅하리라. 이 글은 필자가 쓴 <선사시대 살림집의 구조에 대한 연구> (문화재관리국, 1977,《문화재》)를 수 정 반영하면서 그 다음에 이어지는 고대 사회에서의 민가 원형과 발전 계통도를 제시하고자 하는 것인데, 이는《한국의 민가》에서 정리했던 <민가의 간잡이 방식>(<민가 발전 계통도>, 《한국의 민가》1권. 들어가는 말 39쪽.)에 대해 전면적으로 다시 정리해 본다는 의미를 지니 게 될 것이다. 전자는 선사시대 움집의 구조 변천을 변증법적 방법으로 풀어 본 것이고 후자 는 그 이후의 발전 계통도를 개략 정리해 본 것이지만 너무 소략해서 필자의 글을 전혀 이해 고대 민가의 원형과 간잡이 변천의 계통 63 하지 못하는 듯, 이후 후배들의 논문에 논란이 되는 것을 본적이 없다. 따라서 독자들은 기존 학자들의 학설과(그 내용은 대동소이함) 필자의 위 두 논문을 읽어보시고 이 글을 탐독해 보 실 것을 권한다. 다만 가설일 뿐이므로 앞으로의 자료 보완과 발굴 결과에 따른 진위와 수정 을 후학 제현들에게 기대한다.
Ⅱ. 몸새 1. 원시시대 가옥 구조의 원형 인간의 교육은 3살 이전에 다 끝난다는 말이 있듯이, 오늘날의 구조 원형은 이미 원시시대 에 모두 학습되었는지 모른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구조를 중심으로 우리나라 민가 구조의 원 형을 분류해 보면 크게 4가지로 나누어진다. 엮집, 뼈대집, 틀집, 담집이 그것인데 엮집은 고고 학에서(나의 글에서도) 몽고포형이라고 부르는 것이고, 뼈대집이란 우리가 통상 보는 목골조집 을 의미하며, 틀집이란 통나무집으로서 귀틀집 혹은 방틀집이라고도 부른다. 마지막으로 담집 은 둑집이라고 부르는 것으로서 토담이나 흙담을 쌓고 지붕을 해 얹은 집을 말한다. 1) 엮집 엮집이란 몽고포식의 구조 방식을 갖는 것으로서 잔 나무 가지를 광주리 짜듯 엮어 그 위 에 지붕을 이은 집을 말하는 것으로서 그 엮는 방식에 따라 여러 가지 형식의 집이 있을 법하 다. 잔 나무를 여러 개 묶어서 격자로 얽어매는 것이 가장 일반적일 것 같으며 적절히 세로 힘살을 넣으면서 가로로 가는 살을 배게 엮는 방식도 있고, 아예 성긴 광주리를 짜듯 외줄로 엮되 가로 살은 내외를 들랑날랑하면서 만드는 방식 등이 있을 것이다. 지금도 처음의 격자 엮은 오래된 민가 -과천지방- 들에서 볼 수 있으며, 두번째 힘살 엮은 우리나라 거의 전역에 서 볼 수 있는데 특히 대나무가 생산되는 남도지방에서 먼저 생겼던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본다. 마지막으로 광주리 엮집은 소백산맥 줄기의 경상도 함안․의령지방에서 뒤지로 쓰이는 마치 첨성대 같이 생긴 둥우리를 볼 수 있다. 이런 유형의 집들은 고고학에서 몽고포형 움집이라고 추정하는 것으로서(궁산리 2․3호 집 자리, 지탑리 3호 집자리.《한국의 민가》2권. 659쪽. 참조) 기둥 구멍이 없거나 혹은 수직 구 멍이 있으며 대체로 평면 형태는 불규칙적이지만 원형에 가깝다. 기둥 구멍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기둥이 작아서라기 보다는, 우선 움집의 틀을 지상에서 만든 다음 움을 파면서 벽체 주 64 민속학 연구 3호 변을 돋아 빗물이 들어오지 않게 만들었기 때문에 움집이 파괴되면서 함께 무너졌거나 혹은 오랜 세월 동안 손상 당할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어쨌든 엮집은 자연적 구조물을 이용하는 차원이 아닌, 인간이 만든 인공 구조물로는 가장 먼저 탄생한 구조체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엮집이 생기기 이전에 엮으로 수많은 연모들을 만들어 이용했을 법도하며 제주도 무속 신화인 세경본풀이에서 볼 수 있는, 자연 생목으로 엮어 만드는 움집도 여기 움집에 앞서서 탄생했을 듯도 싶다. 필경 이 엮집은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 구조체이면서 오늘날까지도 전해 져서 모든 뼈대집의 벽체로 이용됨을 볼 수 있는바, 뼈대집이라고 한다면 어쩌면 엮집과의 결 합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엮집에 있어서 지붕은 어떤 재료로 만들었을까? 대체로 중국의 고고학자들은 서 북쪽의 건조한 기후를 생각해서 지붕에는 진흙을 덧발랐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에서 도 그럴 가능성이 있고 이북의 학자들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 듯하다. 그러나 남쪽의 학자들은 벽체나 지붕에 진흙을 덧발랐던 것은 보다 시대가 떨어지는 시기라고 생각하는 듯하 다. 말하자면 신석기시대에는 건새집(진흙을 쓰지 않은 집)만 주류를 이루었고 청동기시대가 되어야 진새집(진흙을 새에 섞어 덧덮은 집. 흙덩이인 알매를 올렸다는 알매집과는 약간 다르 다)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또한 여기 진새집이라고 하는 것이 중국의 진새집과는 전혀 다르다. 이쪽에서의 진새는 단열과 습기를 막아 주는 것이고 근본적으로 빗물은 그 위의 이엉 재료가 차단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의 서북쪽에서는 비가 별로 내리지 않기 때문인지 여기에 서는 이엉 재료가 생략된 채 쓰이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는 건새집이 진새집보다 우선해서 나타날 수 있다고 생각되며 이때의 새는 어떤 종류였을까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지금 현재 남아 있는 재료로 생각할 수 있는 것 은 억새를 손쉽게 꼽을 수 있을 것이며, 띠풀 종류로서 제주도나 경상도 소백․태백산맥 줄기 의 새풀과 자리의 재료로 쓰이는 세골이나 왕골 종류도 연상할 수도 있다. 식물이란 5천년이 면 엄청나게 진화할 수 있으므로 지금의 식생만으로 당시의 식물 상황을 판단한다는 것은 오 류를 범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암사동 주거지의 모의 움집에서 하나의 귀 중한 교훈을 발견한다. 억새 이엉은 상당히 두껍게 지붕을 해 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장마철에 는 비가 샌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더욱 두껍게 해 덮던가 아니면 다른 방법으로 이엉을 이어 보던가, 그것도 아니라면 다른 지붕 재료를 상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제주도 무속 신화의 "외기둥에 청기와집"(《한국의 민가》2권. 641쪽.)이 시사하는 점을 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 청기와라고 하는 것이 푸른색 나는 기와가 아니고 푸른색이 사 라지기 전의 풀잎을 상징하고 있다는 사실은 어떤 풀잎이건 푸른색이 바래서 누렇게 되면 풀 이 지니고 있는 발수력(빗물을 흡수하지 않는 힘)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당시의 아열대 고대 민가의 원형과 간잡이 변천의 계통 65 성 후피식물(예를 들면 파초의 잎사귀, 큰 감나무 잎사귀 등)을 이용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 이다. 이것은 아프리카 피그미족들의 가옥 구조에서도 볼 수 있는 방식으로서 우리나라의 원 시 가옥에서도 있을 수 있다고 본다. 또한 우리가 (억)새를 채취할 때 가을의 마른 다음에 베는데 이것은 시기를 잘못 선택했다 는 것이다. 아직 푸른 기가 남아 있을 시기인 9월 초순에 베어야만 한다고 믿는다. 이것은 공 예품을 만드는 짚을 채취할 때도 추석 전 이슬이 맺힐 때 베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2~3일 이슬을 맞힌 다음 그늘에 말렸다가 쓴다는 것이다. 또한 새는 지금과 같이 거 꾸로 잇는 것이 아니고 똑바로 놓는 것이 옳을 것 같게 느껴진다. 새는 사슬 이엉으로 묶을 수 없기 때문에 비늘 이엉으로 얹어야 하는데 이때는 이엉을 턱지면서 밑동이 아래로 오도록 똑바로 얹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위에 후피식물의 잎사귀를 덧붙여 올려서 장마철에는 대비 했을는지도 모른다. 필경 지금과 같은 방식이 아닌 기법을 동원해야만 비가 새지 않는다는 사 실을 알 수 있다. 2) 뼈대집 뼈대집은 우리가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집이다. 긴 나무를 세우고 걸쳐서 집의 뼈대를 만 든 위에 지붕 재료를 이을 수 있도록 적절히 엮어서 만든 집으로서 어쩌면 엮집의 힘살 엮집 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겠으나 엮집의 구조체는 휘어질 수 있는 나무 가지를 쓴다면 여기서는 비교적 휘지 않는 튼튼한 긴 나무를 구조체로 쓴다는 점이 다르다. 엮집은 그 구조의 한계상 집의 규모가 어느 정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지만, 뼈대집은 집의 무게를 구조체인 나무가 담당하기 때문에 규모도 커질 수가 있고 또한 규모를 크게 하기 위한 다양한 형태의 구조체가 고안되기도 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구조 방식은 이미 앞서의 논문에서 그리고 암사동의 보고서(문화재관 리국, 1984. 12. <암사동 선사 주거지 복원고>,《문화재》)에서도 상론한 바 있기 때문에 여기 서 중언부언은 피하겠다. 다만 둥근 뿔형 움집은 그런 대로 발굴이 되고 있지만 외기둥 움집 은 거의 보고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둥근 뿔형 구조도 중부 내륙지방의 김치각, 뒷간, 통 방아간과 아주 드물게는 살림집으로도 쓰이고 있었고, 외기둥 구조는 제주도에 말코지집이라 는(임시 거처라는 뜻) 이름으로 널리 이용되고 있었던 구조체였는데도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발굴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 의외이다. 중국의 앙소 유적에서도 보고된 바 있고 마선구 1호 무 덤에서도 같은 구조 방식이 쓰이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별로 나타나고 않고 있는 것이다. 또한 암사동 주거지에서 널리 쓰여진 것으로 여겨지는 쌍다리(4개의 기둥을 세움) 구조 방 식은 신석기 주거지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청동기시대라고 추정되는 송국리 유적이나 66 민속학 연구 3호 늦게는 아주 발달한 시대인 부여 부소산성에서도 발굴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우리 민족이 상당히 선호하는 구조 방식이었다는 의미인데 이는 아마도 이것이 거의 완성형의 결구 로 구성되기 때문인 것으로 사료된다. 다만 암사동 움집은 그것의 기둥이 꼭 네모꼴의 4개라 고 단정하기에는 기둥 구멍이 더 많이 발견되고 집의 평면 형태도 귀접은 네모꼴에 가까운데 비해서, 몽촌토성의 움집은 기둥 자리가 보다 기하학적으로 되고 배부른 네모꼴 모습인데, 마 치 4개의 힘살을 귀에 박고 엮집 방식으로 엮어가는 듯 한데(발굴자는 배부른 쪽의 귀도 인정 하여 6각형으로 보는듯 하다) 엮집 보다는 굵은 기둥을 쓰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기둥과 벽체 가 일치하고 있을 뿐, 뼈대+엮집이라고 보고 싶다.(서울대박물관, 1988,《몽촌토성》) 반면에 부여의 움집은 거의 완벽하게 기하학을 이해하고 있는듯, 네모꼴을 도형적으로 만 들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말하자면 신석기시대에는 거의 자연스럽게 만들지만 철기시대에는 계획적으로 기하학에 맞춰 규칙적으로 제작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쌍다리 구조 방식은 내 글에서도 소개하고 있는 바와 같이(《한국의 민가》2권. 644쪽) 우리나라에서 뿐 아니고 멀게는 중앙아시아에서부터 하이츠 인디언까지도 유사한 구조를 가지 고 있고, 가까운 일본에서는 이것이 기본 구조체가 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다만 일본에서는 지붕 구조를 삼발이 각형을 2개 놓고 여기 꼭지점에 말대를 걸치는 것인데, 일본의 경우 민가 에서 말대(상량대 : 종도리) 끝머리에 네 귀로 추녀를 걸치지 않고 모서리 도리로 빗말대를 충 량(소꼬리보)처럼 걸치고 있기 때문에 위의 논리가 설득력을 가질 수 있지만, 우리의 경우는 이런 기법이 남아 있지 않고 반드시 추녀를 쓰기 때문에 결국은 추론 정도로 그칠 수밖에 없 게 된다. 이런 구조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는 까치구멍집에서도 반드시 추녀를 써서 삼발이가 아니고 네발이 구조가 되는 것이다. 필경 일본의 경우는 건새집이므로 지붕이 무겁지 않아서 이렇게 만들어도 측면 서까래(혹은 힘살)를 적당히 엮을 수 있지만 우리의 경우는 진새집으로 만들므로 당머리낭(또는 지르메걸이)을 확실히 걸쳐서 측면 서까래를 걸치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우리는 아마도 일본과 같은 고식의 구조 기법인 삼발이+말대 구조체가 사라졌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암사동 움집을 복원할 때도 느낀 것이지만 여기서는 추녀가 없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추녀를 걸쳤을 때 평면 형태가 네모꼴로 확실해져야 하며 추녀가 걸쳐지는 기둥머리 가 너무 튀어나와서 지붕을 잇기가 어렵게 되기 때문이다. 필경, 쌍다리 형식의 구조는 그 완벽성 때문에 세계적으로 또한 우리나라에서도 널리 쓰여 졌던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사모 고상집이라고 할 수 있는 원두막도 같은 구조체이고, 공 주 송산리 고분 가운데 3호분을 볼 때도 평면은 약간 배가 부른 네모꼴이면서 단면은 뾰쪽 무 지개처럼 활처럼 휘어지는 네모뿔형인데, 이것도 아마 석축을 쌓기 위한 거푸집(동바리)을 몽 촌토성 움집처럼(쌍다리형 기둥을 힘살로 쓰고 거기에 엮구조 벽체를 엮은 집) 만들었음에 틀 고대 민가의 원형과 간잡이 변천의 계통 67 림없다. 이런 무덤 구조는 백제 고분 가운데 여러 개의 예가 있으므로 이런 유형의 집이 자주 쓰였음을 암시하고 있다고 하겠다. 말하자면 이런 구조는 다른 복잡한 구조체가 탄생한 이후 에도 모두 이 방식을 기본으로 확대되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몽촌토성 움집 복원도 68 민속학 연구 3호 최근 신상효씨가 발표한 내용에 따르면(신상효, 1996. 8. 1, <청동기시대 송국리형 주거지의 복원연구>,《박물관신문》. 동원학술강연회 요지) 뼈대집은 쌍다리 형식의 집과(C형) 여기 중앙 에 외다리형 구조체가 결합되어 있는 형식의 2가지로 나누어지는데, 후자는 다시 작업공(?) 안 에 기둥이 서는 형식과 좀 멀찍이 떨어져서 배치되는 형식으로 나눈다고 주장하고 이의 복원 모습까지를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 구조체의 뼈대 모습은 다분히 일본식을 본뜬 것으로 우 리의 민가 구조체의 방식과는 거리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특히 합각의 처리 기법이 전혀 일본식의 것으로 우리의 까치구멍집의 구조방식과는 거리가 멀다. 특히 말대구조가 없이 적심목 방식으로 거는 것도 어쩐지 어색하다. 이 경우는 양쪽에 삼발이 방식으로 서까래를 걸 고 그 위에 말대를 걸친 다음 말대 위에 서까래를 거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사료된다. 특히 쌍다리 방식에 외다리 형식이 첨가될 때에는 필자가 앞서의 논문에서 주장했던 바와같이 현재 의 민가 구조와 대단히 비슷한 구조체인 내민보 방식으로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 나 주암댐의 주거지에서 나타나는 방식은 느낌으로 봐서 신상효씨의 논문처럼 상부 단연(짧은 서까래)의 물매가 대단히 쌀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상기 그림에서 서까래가 긴 장연의 하나로만 그려져 있는데, 이는 하부 움집 어깨선이 곡선을 그릴 수 없음을 관찰할 필요가 있 다. 어쨌든 청동기시대의 이곳 남도지방의 중앙에 작업공(?)이 있는 움집은 중부지방 암사동 주거지와는 어쩐지 맥을 달리하는 주거지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3) 틀집 청동기시대의 움집은 송국리의 경우를 보더라도 오히려 신석기시대의 암사동 움집보다 작 아진다. 아마도 계급 분화가 있어서 지배층의 집들은 커지지만 하층민의 집들은 작아진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아직 고고학적 성과가 축적되지 않아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청동기시대의 지배층 집들은 보고된 바가 적다. 어쩌면 이 시대 지배층의 집들은 지상 주거였던 까닭에, 또 한 지금의 집자리들과 위치가 일치하고 있어서 여러 가지 원인으로 인해 이미 파괴되었기 때 문이지도 모르겠다. 이런 이유로 해서 나는 청동기시대가 되면 지배층의 집들은 지상으로 올 라왔고 그것의 구조는 틀집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했었다. 청동기라는 금속 도구는 나무의 채취를 손쉽게 만들기도 했을 것이고 세밀한 가공까지도 가능하게 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중국의 경우 청동기시대 지배층의 집에서 세밀한 맞춤 방식 이 발굴된 적이 있고 우리의 유물 가운데도 끌이나 자귀 등이 나타나는 것으로 미루어 나무의 가공 방식이 어쨌든 석기시대보다는 비약적으로 발전했을 것이다. 이런 맞춤 기법 가운데 가 장 간단하면서도 튼튼한 구조물이 바로 틀이라는 방식이다.(통상 귀틀집 혹은 방틀집이라고 부 르는데 틀집의 구조 특징상 귀가 네모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도끼만으로 간단 고대 민가의 원형과 간잡이 변천의 계통 69 하게 엎을장․받을장 맞춤을 만들어서 쌓으므로 원시림이 우거졌던 당시에는 경작지도 넓히고 집 재료도 장만하는 일석이조의 일이 되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런 틀집은 구조물로서도 횡력에 잘 견딜 수 있는 구조체이므로 움집을 벗어버리고 지상으로 올라올 수 있었다. 그러나 통나무집은 나무와 나무의 틈새가 벌어지기가 쉽고 이것을 쪽매로 맞춘다는 것은 가공의 노동이 너무 많았다. 이를 메우는 것은 진흙이었는데 이것은 아마도 움집에서부터 그 기법을 배워 왔을 것이다. 어쨌든 틀집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것은 벽체만 통나무로 쌓아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반자도 수평으로 보내서 진흙을 올려 틈새를 메우는 것이다. 이것 이 고미반자의 기본인데 지금도 귀틀집은 물론이고 일반적인 뼈대집에서도 고미반자를 올린다 던가 제주도에서처럼 완벽하게 발달된 뼈대집에서도 구들만은 고미를 올리는 것을 보면 이것 이 오랜 구조 기법임을 알 수 있다. 중부 내륙지방에서는 지금도 오래된 집에서 서까래를 수 평으로 걸치고 지붕은 별도의 덧서까래를 올려서 처리하는 경우를 가끔 보는데 이것이 바로 틀집에서 유래하는 구조법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지붕은 중앙아시아나 만주에서처럼 평지붕 으로 마감하는 경우도 있고 소나무 묶음을 올려서 물매를 잡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중부 내륙의 아주 오래된 초가집에서 가끔 볼 수 있는 기법이기도 하다. 이 틀집은 구조의 성격상 나무의 길이 이상으로 간잡이 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또한 나무의 양이 너무 많이 소요됨으로 틀집과 뼈대집이 결합하는 구조체가 발생하게 된다. 집에 가해지 는 횡력은 틀이 담당하고 공간은 뼈대 기법으로 간단히 확대해 갈 수 있게 된다. 간단히 고미 반자에 걸쳐지는 보나 지네발(서까래)을 내밀어서 이어가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아마도 역사시대 이래의 기본적인 구조 방식이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4) 담집 또는 둑집 우리나라 민가의 구조 가운데는 특이하게 조적식으로 담이나 둑을 쌓아 여기에 구조체를 의지해서 지붕을 얹는 방식이 있다. 둑이라고 하면 거푸집을 양쪽으로 대고 안에 진흙을 다져 넣으면서 미끄럼 공법으로 올려가기 때문에 거푸집의 성격상 반드시 틀집처럼 직선으로 만드 는 집으로 밖에 만들 수가 없고, 담집은 진흙과 호박돌을 한 켜씩 일일이 쌓아 올라가기 때문 에 성격상 평면의 형태가 둥글거나 혹은 모를 굴리는 집을 지을 수밖에 없게 된다. 따라서 둑 집은 살림집에 많이 이용되었지만 작은 집인 경우에는 어김없이 담집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런 둑집이나 담집은 흙을 쓰기 때문에 물에 약하다. 반드시 지붕을 잘해 덮어야 하고 지면 으로부터 올라오는 습기도 막아야 한다. 지붕은 작은 집인 경우 가지가 한 곳에서 많이 돋아 나는 소나무를 잘라서 거꾸로 올려놓고 나무 가지를 적절히 얽은 다음 그 위에 지붕 이엉을 올리는 방식이다. 그러나 큰 규모의 집은 어쩔 수 없이 뼈대집과 결합하는 수밖에 없게 된다. 70 민속학 연구 3호 그렇다면 담집이라는 구조 기법은 틀집 다음으로 발생했는지도 모른다. 앞서 말했던 제주 도의 세경본풀이 자청비 이야기에서 보면, "이 담고망을 잘 막으라 --- 정수남인 엄막 바껏으 로 부지런히 고망을 막아간다. 자청빈 엄막 안에 앉아 누워 한 고망 막으면 두 고망씩 빠멍 ---" 이라고 해서 움막집의 뼈대를 간단히 결구하고 그 위에 돌을 쌓아올려 구조를 튼튼하게 하는 기법이 생긴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더욱 발전한 형태가 고대 고분에서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구조물들이 아닌가 싶다. 앞서 설명한 공주의 송산리 3호분에서도 같은 예를 볼 수 있다. 처음에는 주변 냇가에 돌이 많았으므로 주로 돌을 이용해서 담을 쌓았겠지만 차츰 돌이 사라 지게 되자 진흙을 많이 이용하게 되었고, 특히 평야 지대에서는 돌을 구하기가 그리 쉽지 않 았으므로 흙만을 써서 만드는 둑집의 발명을 낳았을 것으로 추측해 본다. 이 둑이나 담은 단열에 필수적인 것이었으므로 뼈대집이나 엮집에 의지해서 불을 막거나 기온의 변화를 차단해야 하는 창고 등의 외벽으로 많이 이용되었으며 역사시대 이후 서민들의 집으로는 아무나 쌓을 수 있다는 이점 때문에 자주 쓰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런 집 역시 아직 발굴되었다는 보고가 드문 것은 이것이 현재의 집터와 겹쳐지는데 이유가 있다고 본다. 2. 가옥 간잡이의 원형과 발전 계통 1) 고대의 구조 원형 고대사회가 되면 다양한 가치관과 풍속, 이와 더불어 발생한 구조 기법과 평면 형식이 함 께 섞여져서 커다란 하나로 통합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대의 지배층들은 다양한 가치관을 뛰어넘는 완벽한 원칙이 있다고 생각했고, 또한 이것을 추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모든 것을 통일적으로 시행하려고 했으며 이것이 율령 반포로 나타난다. 마찬가지로 살림집에 있어 서도 다양한 형태가 존재하면서도 이들 중 완벽한 하나는 있다고 믿고 이것을 추구하지 않았 나 생각한다. 이들은 기하학이란 완벽하다고 믿었고 완성적인 기하학적 구조를 만들려고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가정 아래 현존하는 민가 구조를 일별해 보면 가장 완벽한 구조체는 까치구멍집이 아 닌가 싶다. 복판에 2개의 고주로 받쳐지는 말대형 상량대를 내민보식으로 걸치고 주변에 쌍다 리 형식의 도리를 돌린 다음 상량대와 도리 사이에 소위 빗보(ㅅ자보)를 걸쳐서 결구하는 방 식이다. 귀퉁이에는 팔자목 혹은 산방낭을 걸쳐서 여기에 추녀를 끼우는 방식인데 이것이 구 조적으로는 절묘하게 완벽한 형식으로서 이를 고대 사회에서는 선호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이 든다. 그리고 다른 구조인 엮집이라던가 혹은 담집은 이것의 보조 형태로 더해지고 귀틀집 고대 민가의 원형과 간잡이 변천의 계통 71 은 집안의 중요한 공간으로 만들어 뼈대집의 내부 공간에 끼워 넣는 방식으로 모든 다양한 구 조체가 한꺼번에 합쳐져서 창조된다는 것이다. 마치 풍수지리사상이 천문을 살피는 풍수사상 과 땅을 연구하는 지리사상을 합하고 여기에 음양설과 오행설까지를 결합해 내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우리가 이 시기의 집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는 주로 가야지방에서 제작되었던 집모 양토기[家形土器]와 최근에 발굴된 몇몇의 집자리가 있을 뿐이다. 가야의 집모양토기는 대체로 긴 네모꼴의 한쪽은 모임지붕으로 하고 다른 쪽은 박공지붕으로 만들어서 박공쪽으로 출입하 는 것으로 보인다. 지붕이나 벽체는 초집일 가능성이 많은데 이를 덮개판으로 눌러 두고 있는 것이 종종 눈에 띈다. 공간의 내부는 다락집으로 되었고 아래층은 헛간으로 이용되는 듯 하는 데 다락에는 가끔 사람이 걸터앉아 있기도 한다. 김정기박사는 이를 아마도 살림집의 몸채가 아닌 헛간 등의 곁채가 아닐까 하는 추정도 해본 적이 있지만 어쨌든 이것은 단칸의 맞배집이 고 긴 네모꼴이며, 짧은 변으로 출입한다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것으로는 조금 더 시대가 내려와서 신라의 집모양토기를 들 수 있다. 합각의 기와 지붕인데 합각쪽으로 대문이 시설되어 있다. 이것 역시 단칸 맞배집인듯 대문이 크다. 대 신 대문의 시설물들은 대단히 발달되어 있어서 대문 문짝에 숫지도리를 만들고, 아래 지방이 나 위의 중방에 암지도리를 만든 모습이 요즘도 볼 수 있는 똑같은 돌쩌귀를 이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정면을 긴 네모꼴의 긴 변으로 삼는 것도 있다. 오히려 시대는 앞의 것보 다 올라 갈듯 싶은데도 골기와 지붕에 박공지붕으로 되어 있고 정면에는 선각이 되어 있는데, 중앙에는 대문이 그려져 있고 양쪽에는 살창이 모사 되었는데 한쪽은 상하로 다른 한쪽은 하 나만 표시했다. 대문의 한쪽에도 조그맣게 살창을 그려 두어서 대문이 판자로 만들어졌으며 여기에 살창을 오려 두었음을 암시하고 한쪽은 공간이 상하로 나누어지는 곧 다락이 있는 집 이고 다른 쪽은 하나의 공간으로 이루어짐을 암시한다. 이것은 지금도 안동지방에서 볼 수 있 는 여간집의 모습과 너무나 유사하다. 복판에는 대문이 있는 봉당이고 한쪽은 부엌이며 다른 쪽은 위에 다락을, 아래에는 마구간을 간잡이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때는 긴 네모꼴의 짧은 변이나 혹은 긴 변으로 출입하는 관습이 함께 존재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근자와 같은 마당이 라는 공간 개념이 완성되기 전에는 두 가지의 중심 개념이 공존했다고 믿어진다. 궁궐과 사찰을 지을 때도 회랑을 둘러서 공간을 형성하면서도 이것은 어디까지나 방어를 위한 경계 표시이지 공간이라는 개념이 발생하지 못했기 때문에 공간의 중심에 탑을 짓거나 금당을 세워서 우주의 중심에 축을 세우겠다는 의지를 갖는다. 즉 살림집을 지을 때도 비어 있는 마당이 집의 중심이라는 현재와 같은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고 집의 중심은 건물의 중심 에 있다고 사고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것은 집의 간잡이 방식을 설명하고 있는 양택론에서 72 민속학 연구 3호 극명하게 나타난다. 남송 이후에 완성된 양택론에서는 집의 중심이 마당에 있다고 설명하지만 일본에서처럼 마당이 발달하지 않은 곳에서는 집의 중심이 집안에 있다고 믿는다. 우리나라의 양택서인《택보요전》에서 집의 중심이 몸채와 안마당의 경계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이 집 의 중심이 변화해 가는 것을 극명히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2) 고대의 간잡이 원형 고대사회란 앞에서도 설명한 바와 같이 완벽성을 추구했던 사회다. 따라서 구조 방식에서 도 완전함을 표방했다고 한다면 간잡이 방식에 있어서도 기하학적 완성을 기도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민가 간잡이 가운데 가장 완전한 것은 어떤 것일 까가 이 논문의 주제가 된다고 하겠다. 우선 결론부터 내려보자면 사방집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삼국사기》옥사조에 나오는 숫자들이 모두 장광(長廣) 몇 자라고 말하면서 3의 배수로 되어 있다. 이것은 여러 가지 의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우선은 가로․세로의 길이가 같은 집 이라는 의미를 내포할 수도 있고 고대사회의 기본 철학인 완전함의 추구에 있어서도 맞아 떨 어진다. 신라시대의 주거지로 아직 사방집의 주거지가 발굴된 적은 없는 것으로 알지만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사방집의 단초가 될 수 있는 4개 기둥의 쌍다리 집은 아주 후기 삼국시기까 지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그 구조 방식이 사방집과는 전혀 다르지만 간잡이 형식 만큼은 대단히 유사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복판에 집의 중심이 되는 공청이 마련되는데 여기에는 마루를 시설하는 것이 보통이다. 마루가 시설되지 않은 흙바닥을 함경도에서는 바당 이라고 부르는데, 공청과 바당은 같은 의미를 지녔다고 할 수 있다. 공청의 양쪽 좌우로는 살 림방을 두고 뒤(안)쪽으로는 물건을 저장하는 고방 혹은 도장 등이 배치되면 앞쪽으로는 작업 공간으로서 봉당․정지․마구간 등이 설정된다. 이것의 구조체는 대체로 까치구멍집으로 만들어지므로 까치구멍을 대문이 있는 앞쪽으로 두고 뒤쪽은 그냥 모임 지붕으로 처리하는데 요즘 남아 있는 사방집의 구조를 살펴보면 대단 히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곧 뼈대의 결구가 가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세로 로 꾸며진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데, 양쪽 갓간의 구조체를 우선 만들고 대문이 있는 중앙 간은 양쪽의 구조체를 연결하는 방식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강원도의 너와지붕 사방집에서는 집의 일부를 귀틀집으로 만들어 횡력에 견디면서 외부로부터 침입을 방지할 수 있도록 하고 반자 상부는 집안에서 다락으로 쓸 수 있게 꾸미기도 한다. 이와 같이 세로 방향의 구조 결구 방식은 대단히 당연한 것 같으면서도 뒷줄의 한 간이 없어지는 안동지방 등의 여칸집에서조차 도 어떤 곳에서는 가로로 결구하지 않고 세로로 실겅하고 있다는 사실은 재미있는 의미를 지 니고 있다. (화성지방의 민가 조사에서) 어쨌든 사방집의 경우 간살이가 증축될 경우 세로로 고대 민가의 원형과 간잡이 변천의 계통 73 확장되는데 주로 전면 쪽으로 마구간 등이 덧달아진다. 보통 가축은 사는 공간의 높이가 낮으므로 서까래를 덧이어서 마구간만 앞으로 내미는 간 잡이를 하는데 어떤 경우에는 아예 한간을 앞으로 확장하여 살림 공간으로 이용하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그 간잡이 형태가 일본의 서해안 간살이와 아주 유사하여 이것이 일본과 우리가 같은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을 때 형성된 것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이것은 외부에 대해 대단히 폐쇄적으로 만들어져서 앞의 대문을 제외하고는 외벽에 면한 문들은 자제되는데 태백산맥 서 쪽으로 넘어오면(영서지방 내지는 중부 내륙) 훨씬 개방적인 공간으로 바뀌게 된다. 아마도 영 동지역이 눈이 많다는 기후적인 요소도 있어서 외부에 대해 폐쇄적일는지는 모르겠으나 그것 보다는 사회적인 치안 조건이 외부 폐쇄적일 수밖에 없고 이보다는 동해안의 사방집이 훨씬 보다 개방적으로 정지 쪽에서 대문과 다른 뒷문을 개설하고 있으며 영서지방에서는 더욱 적극 적으로 양쪽 구들 앞(측면)쪽으로 퇴 공간을 마련하기도 한다. 일본 서해안 민가 역시 16세기 이후에는 사방집 주위로 퇴구조를 덧붙이는데 이는 주로 내 부공간을 이용하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구조적인 이유가 우선인 듯하다. 우리의 경우 퇴 공간 은 외부공간인 마당과의 과정 공간으로 마련되는데 비해서 일본의 경우는 여전히 외부에 대해 폐쇄적이면서 이 공간을 창고나 뒷간 등을 배치하는 허드레 공간처럼 활용하고 있음을 본다. 일본 민가의 한 특징인 소위 도꼬노마(집안의 장식 공간) 역시 여기서부터 발전한 것이 아닌 가 추측한다.(나는 일본 민가의 전공자가 아니므로 자세한 논의는 피한다) 필경 사방집이나 일 본의 고대 민가 간살이는 공통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서 새로운 공간 개념이 탄생하 기 이전까지는 양국 모두 원형적 간잡이 방식이었는데, 우리는 마당이라는 공간이 발달한 반 면 일본은 고대의 간잡이 방식이 그대로 확대․증축되어 현재에 이르렀지 않았나 생각한다. 말하자면 4개의 기둥을 지닌 쌍다리 형식의 간잡이 방식, 곧 사방집이 고대사회 살림집의 원형이라고 가정할 때 이 시기에 이것만이 존재했다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완성된 형식으로 서 지배계급의 귀족 가옥이었을 것이며, 여전히 서민들은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은 움집이나 혹 은 좀 잘 사는 사람까지도 앞서 구조의 원형에서 말했던 2개의 고주에 의해 떠받쳐지는 말대 집에서 세로적 축 개념을 지닌 공간이 아닌 가로적 개념을 지닌 공간에서 기거했을 것이다. 다만 고대인들은 사방집을 12진법처럼 완성된 공간 개념으로 생각했고 실용적인 10진법은 현 실의 세상에서 통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결국 앞으로 설명할 새로운 간잡이의 발전 계통 은 기하학적 완전성을 지닌 사방집과 서민의 실용적 일자집과의 변증법적 통일에 의해 서로의 장점을 취하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가 한다. 물론 이것은 그 시대가 당면한 경제․사회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탄생되는 것일 것이다. 74 민속학 연구 3호 3) 간잡이의 발전 계통 (1) 안동형 여간집 민가 계통도라고 하는 그림을 보자. 사방집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4기둥 둥근뿔집(쌍다 리 구조)은 간살이의 내용상 사방집으로 연결되며 사방집의 간잡이는 복판에 공청을 두고 양 쪽으로 살림방과 뒤로 고방, 앞으로는 작업 공간으로서 봉당과 정지간 그리고 마구간과 상부 의 다락으로 구성된다. 그러나 이것은 이것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고 확대되는데 대개는 전면 쪽으로 확대된다는 주장이다. 이 간살이들은 대체로 작업 공간이 확대되며 기거 공간인 구들이 증대되는 경우는 드물다. 그렇지만 살림살이라는 것이 늘어나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줄어들기도 하는데 집을 장차 증축하기로 하고 최소한의 집으로 짓는다면 사방집에서 어느 쪽 을 생략해야만 할까? 마땅히 수장 공간이 배열되는 뒷열을 없애지 않으면 안된다. 다만 도장 이 없을 수는 없으므로 마루의 한쪽이나 혹은 뒤쪽을 다시 반 간쯤 막아서 고방을 시설하기도 한다. 대신 내부의 좁은 공간을 대신하기 위해 뒷담을 한 간 거리로 막아서 뒤안 공간을 설정 하고 집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기능을 여기서 해결한다. 이것은 여간집이라고 불리는 안동 형 여간집의 대표적인 공간구성인데, 이것은 원래 사방집이 축소되는 형태로 탄생하는 것인데 도 이것 나름으로 다른 경로로 발전하게 된다. 이들 여간집들은 나름대로 완결형으로 믿었기 때문에 가로로 증축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마당이 집안의 중심이라는 개념도 없었으므로 마당을 중심으로 곁채(부속사)를 짓지도 않았다. 여기 여간집의 공간 개념은 전후라는 생각이었으므로 전면은 외부로 개방하고 새로운 곁채들 은 몸채와 나란히 가로로 짓거나 혹은 뒤안의 공간 한쪽에 지어서 딴채로 활용하곤 했다.(이런 개념은 근자의 안동지방 여간집에서 일반적이었다) 만일 동해안이나 혹은 영주․봉화 등지에 서 마당을 중심으로 아래채를 배치하는 집이 있다면 이것은 20세기 이후 새롭게 이입되기 시 작한 경기지방의 공간 개념이 첨가되었기 때문이라고 확언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해 서는 안될 것은 고대사회에서는 구들 시설이 일반적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구들은 일찌감치 발생했지만 고려 때 와서야 일반화되기 시작했으며 그것도 서민들의 주거에서만 일부 노인들 의 방에 쓰였고 요즘과 같이 양반집에서도 일반화된 것은 장판지가 일반화되기 시작한 17세기 이후에나 가능했던 것으로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때의 방은 마루를 깔았거나 혹은 흙바닥에서 생활했으며 서민 주택에서 일부 공간에 원시적인 구들을 채용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할 수 있다. 따라서 고대에는 주요한 공간만을 틀집으로 만들어 폐쇄적으로 만들고 나머지 공간은 요즘의 사방집처럼 거의 통간에 가깝게 이용했을 것이다. 안동형 여간집이 더욱 축소된다면 전면이 툇간으로 만들어질 수 있다. 그러나 이때는 집안 고대 민가의 원형과 간잡이 변천의 계통 75 에서 필수적인 부엌이 작아지는 데다 복판에 마루를 둔다는 것 자체가 대단히 권위적인 공간 개념인 까닭에 서민들에게 선호될 수 있는 공간 개념은 아니다. 그렇지만 방 하나를 희생해서 정지간을 뒤쪽까지 쓰는 간잡이는, 드물지만 남해안 지대에서 이와 같은 집을 볼 수 있으며 제주도 주택의 공간 개념은 대체로 이와 같다. 이것은 난방을 하는 아궁이와 밥짓기를 하는 화덕이 분리되었던 시기, 혹은 제주와 같은 특수 지역에서는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어떤 간잡이 방식의 원형은 반드시 성장해 가는 것만이 아니고 어떤 이유에서 작아 질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몰락한 귀족은 당시 서민들이 이용하는 간잡이 방식을 채용하 는 것이 아니고 자신이 살았던 간살이의 축소한 형태를 취한다는 것이며, 이것은 각각 다른 발전 계통을 가지고 복잡하게 성장한다는 가정인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어느 혁명적 시기에는 어떤 형식이 전반적인 권위를 가지고 유행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또한 안동형 여간집이 축소될 때 전면간을 모두 툇간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필요 불가결 한 부엌을 제외하고 봉당과 마구간을 생략한다면 이것이 오늘날의 곱은자집과 그 간잡이가 같 다. 다만 이것은 용마루를 ㄱ자로 꺾어야 하고 회첨이 생기기 때문에 구조체가 복잡하고 어렵 지만 귀족의 살림집에서 꼭 필요한 당과 동서의 방, 그리고 거기에 딸린 부엌을 갖춘 집이 탄 생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꼭 안동형 여간집에서 발생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 것이 안동형 여간집의 간잡이와 유사하다는 것이지 오히려 여기에서 발전했다고 말할 수도 있 다. 여간집은 외부로부터 폐쇄적인 까닭에 비위생적이지만 곱은자집은 전면에 대해 개방적이 므로 마당 중심의 공간 개념에서는 자연스러운 것이며, 비록 면적에 비해 부재가 많이 소요되 지만 간수에 비해서는 물론이고 면적에 비해서도 처마밑 공간이 많이 나온다. 따라서 다포집 이 발생했던 14세기 경 주심포집 대신 다포집으로 대체되었던 같은 이유로(자세한 내용은 나 의 글, 1993, <목재 생산사 입장에서 본 한국 목조건축의 발달>,《문화환경보전과 건축》, 발언. 참조) 곱은자집이 발생하고 유행했을는지 모른다. 당시에도 여전히 서민들은 10간 이상의 살림 집을 지을 수가 없었는데 새로운 농법에 의해 부를 축적한 지방의 중소 지주들이 법의 테두리 안에서 좀더 크면서도 위생적인 공간을 요구했을 수도 있다. 영주․안동지역에서 ㄱ자 집이라고 한다면 모두 20세기 들어와서야 이입되기 시작했던 것 인데 필자가 채집한 민가 가운데 영주의 권덕수 집(《한국의 민가》1권, 396쪽.)은 비록 남도의 4간 간잡이를 기본으로 하고 있긴 하지만 외곽담장 안으로 몸채를 둘러싸는 안 마당을 담장으 로 막고 일각대문과 마구간을 덧붙여서 이것이 원래 여간집의 공간 개념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영서지방의 정원채집은 경기도의 영향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안마당을 따로 담장으 로 둘러치고 있어서 이것이 사방집의 한 변형임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아래에서 다시 한번 설명하겠지만 중부지방의 곱은자집이 여기 사방집에서부터 출발함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76 민속학 연구 3호 (2) 영동형 양통 여간집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사방집을 축소할 때 뒤쪽을 생략하질 않고 양쪽 가의 한쪽을 없 앨 수도 있다. 이것은 구조의 완결성을 존중하지 않고 당시까지 널리 이용되었던 서민 주택인 말대집의 영향을 받는다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방식이다. 원래 사방집의 구조라는 것이 살림 방은 귀틀집으로 만들고 여기에 뼈대를 얽어서 세겹집, 다른 말로 세마루집을 만드는 것이므 로 세 줄의 지붕 구조를 갖는다는 뜻으로 이 가운데 서민 생활에서 가장 필요 없는 공간인 한 줄을 생략하면 영동지방의 양통집으로 된다. 안동형 여간집이 어쩌면 구조 완결적 분할식 간 잡이 방식이고(따라서 안동형 여간집은 증대된 평면 형식을 갖지 못한다. 단지 약간의 간살의 변화만 있을 따름이다) 귀족적인 느낌을 준다면 영동형 양통집은 결합식 구조와 간잡이 방식 이며 민중적인 느낌을 준다. 말하자면 전자가 고차원적 격식의 구조 방식을 쓴다면 후자는 단 순하고 간이한 구조 방식을 이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필경 간살이는 한쪽으로 봉당과 부엌이 딸린 정지간을 두고 복판에 앞으로 마루와 뒤로 구 들을, 마루 윗머리에는 상방과 구들 머리에는 도장을 배열하며 대문은 집의 한 쪽인 봉당 앞 에 마련된다. 이것이 영동형 양통집 간잡이의 전형이지만 강화․옹진의 여(섯)간 팔자집에서는 봉당과 부엌의 정지와 마루, 상방까지가 통간으로 되어 흙바닥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부가 축 적되면 여기에 들마루를 시설하며 이것을 봉당마루라고 부른다. 상방이란 사랑방 이전의 공간 개념으로 체용의 용(用)으로 정리되므로 원래는 개방되었다고 추측해 볼 수 있으므로, 이것은 어쩌면 영동형 여간 양통집의 원형일는지도 모른다. (3) 여간집의 축소와 확대 한편 이것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널리 애용되고 있는 3간 퇴집의 조형(祖型)이 된다. 양통집 이 경제적 이유로 축소되면 앞간의 간사이를 줄이는데, 이것의 간잡이는 뒤로 정지․안방․머 릿방과 앞으로 앞퇴를 두며 복판에는 마루를 놓고 아래쪽은 봉당으로 쓰이는 토방을 만들거나 정지와 통간으로 쓰기도 하며 머리 쪽으로는 토방을 두거나 혹은 작은방을 붙이기도 한다. 이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계통으로 이어지는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부언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마당 중심으로 전면이 개방되기도 하고 양통집이 유행하는 지역에서는 여전히 전면에 벽을 처서 폐쇄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전적으로 짐승이나 도둑의 침입을 막기 위한 것이며 치 안이 확보된 평야지대에서는 주기론적 영향을 받아서 자연과 호흡할 수 있는 마당으로 개방하 고 생활 자체를 마당 중심으로 활동한다. 이 모두가 성리학적 공간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영동형 양통집에서는 흔히 정지간을 한 간보다 훨씬 크게 만들어서 아래쪽으로 고방과 마 구간을 시설하는 것이 일반적이다.(함경도에서는 고방 대신 방아간을 두기도 한다) 마구간을 고대 민가의 원형과 간잡이 변천의 계통 77 집안에 두는 것은 기후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고 비록 비위생적이긴 하지만 앞서 설명 한대로 짐승이나 도둑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규모가 커지면 아래간을 하나 더 달아 내어 아예 4간 집으로 만드는 수도 있다. 아래간에는 농사가 없는 집인 경우 종종 구들을 시 설해서 작은방으로 쓰기도 하고, 혹은 잠실로도 이용했던 시기가 있었던 듯 싶다. 이 작은방 (모방)은 흔히 몸채의 구조와는 별도로 만들어져서 삽입되므로 필요에 따라 설치했다가 식구 가 제금나가면 없애기도 했는데 이것은 지역에 상관없이(제주도와 함경도) 민중의 일반적 삶 의 모습이었다. 또한 아래간을 두지 않고 머리 쪽에 구들을 증축해서 사랑방으로 쓰는 경우도 흔히 있었는 데, 이것은 남․녀간 공간 구분을 중시하는 성리학적 공간 개념을 담아 내는 것으로서 조선 후기에나 발생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아래간도 달아 내고 머리간도 달아 내는 5간×2간 의 양통집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마도 조선조에는 집의 간수로 세금을 먹였던 모양인데, 4간 집까지는 웃3 알4간 집이라고 해서 구조체가 3간가(三間架)이므로 3간 집으로 쳐줬는데 5간 집에 이르면 이것을 용납하지 않았던 듯 싶다. 어쩌면 양통집이므로 5간이라고 하면 면적으로 는 10간에 해당하므로 서민들은 10간 이상을 넘지 못한다는 규정에 걸려서 아무런 부속채도 지을 수 없었으므로 농사를 짓는 집에서는 헛간채 없는 것을 견디지 못했을는지 모른다. 어쨌 든 전면 5간의 집은 19세기 말에 와서야 발생하며 그 이전에는 함경도의 부자집에서만 존재했 었다. 남쪽에서는 4간 이상의 집이 되면 겹집으로 간잡이를 변경하지 양통집을 유지하지는 않 는다. 삼남지방에서 가끔 발견되는 양통집은 모두 전면 3간 집에 한정되지 이를 넘지는 않는 다. (4) 삼남지방의 4간 겹집 그렇다면 삼남지방에서 널리 유행했던 4간 집은 어떤 계통을 지녔을까? 이것은《택보요전 》에서 보듯 삼남지방 민택의 기본 간잡이인데 아마도 17세기 이후 크게 유행하여 가장 일반적 인 평면 유형으로 자리잡은 듯 하며, 이것은 자유로운 장인들에 의해 규격[分數]화하여 제작되 었던 듯하다. 또한 이것은 격물치지를 중시하는 주기론적 공간 개념을 반영하고 있으며 당시 새로운 계급으로 부상하던 상업 자본가들에게 지지를 받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주로 수장공간으로 쓰였던 마루 앞벽을 과감히 없애 버리고 수장공간을 한쪽으로 몰아 두면서 사회 적 공간으로 기능을 바꾸었다. 그러나 비록 이것이 고대사회의 사방집처럼 근세사회(근대 여명 기)를 열기 위한 새로운 간잡이로서 전문가에 의해 계획되었다고는 하지만 어딘가 그것에 선 행하는 평면 형식은 있었던 것임에 틀림없다. 이것은 자유로운 장인 조직(문중)에 의해 유행되지만 당시의 신흥 부자인 상업 자본에 의 78 민속학 연구 3호 해 뒷받침되므로 거의 일정하게 규격적으로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다. 당시는 대체로 재료는 집주인이 사 오고 대목이 일식으로 임금을 지급 받는 임금 도급 방식이었으므로 구조체는 분 수에 따라 거의 똑같게 만들어졌고 간살이만 약간의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한일자집을 선택 하는 것도 거의 같은 이유 때문인데 꺾음집은 조작하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재료와 품이 많이 들어가기 때문에 맘먹고 일당으로나 지급하는 양반집이 아니면 선택하기가 어렵게 된다. 말하 자면 오늘날 아파트가 ㄱ자 집은 전혀 없고 한일자집만 있는데서도 알 수 있다. 어떻든 구조 적으로 제일 간단하고 세금을 계산할 때 쓰는 간수는 많지 않으면서도 면적이 큰 간잡이를 채 용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이것이 당시에 민중들 사이에 발생했던 8간 양통집이었다. 농사공간은 필요없거나 따로 마 련할 수 있었으므로 아래쪽으로 정지간, 다음에 앞에는 마루와 뒤로 구들과 도장 그리고 머리 칸에는 사랑방을 두는 간잡이가 전면을 개방하면서 툇간으로 변모하는 것이다. 요즘은 도장이 구들로 시설된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원래 이 공간은 수장공간이므로 마루로 되었을 것이 틀림 없다. 이런 평면 형식은 3량가로 결구 되어 있으며 가운데 기둥도 고주를 쓰지 않고 들보 머 리에 바로 갓보(퇴량)를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 바로 양통집의 구조 모습임을 알 수 있다. 이것 은 오래된 집에서 흔히 보는 구조 방식으로서 1고주 5량과 같이 발달된 구조와는 다른 계통을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어떻든 오래된 4간 집에서는 대청 앞을 판문으로 막고 있어서 여전히 마루를 수장공간으로 쓰는 관습이 남아 있었음을 본다. 이것이 주기론의 태두라고 할 수 있는 우암이 살던 충청도를 중심으로 마루를 개방하는 공간개념으로 발전해 간다. 안마당을 외부공 간으로 보지 않고 내부 공간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필경 역동적이었던 민중들은 한일자집을 중심으로 부를 축적하면 하나씩 지어서 마당을 중 심으로 ㅁ자로 만들었고 처음부터 경제력을 확보할 수 있었던 양반들은 한꺼번에 집을 짓기 때문에 재료가 많이 들고 복잡하지만 동선이 짧고 안살림이 안방을 중심으로 이루어질 수 있 도록 입구자집을 지었다. 한편 18세기에 이르러 도시화가 급속도로 진행되면서 서민들은 너른 땅을 마련할 수 없을 경우, 작은 대지에 가장 많은 집 면적을 앉힐 수 있는 꺾음집을 선호하 기도 했다. 이것이 얼마 전까지 남아 있었던 서울이나 평양의 서민 주택이었다. (5) 입구 ㅁ자집 한일자집과 꺾음집은 전혀 다른 구조 방식을 갖는다. 전자가 하나로 완결형을 보이는데 반 해서 꺾음집은 2개 이상의 구조체를 연결해야 하는데 구조가 복잡해질 뿐 아니라 회첨이나 추 녀 부분의 서까래 처리가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대까지 양반집에서 선호했던 것은 앞 서 말한 바와 같이 이것은 동선이 짧게 계획될 수 있어서 안에서 집안을 장악하기가 손쉬웠기 고대 민가의 원형과 간잡이 변천의 계통 79 때문이다. 어쨌든 결론부터 말하자면, 한일자집은 그것이 양통집이던 외통의 퇴집이던 간에 우리나라 민가의 조형이라고 할 수 있는 사방집이 축소되면서 탄생하는 것이라면 입구 ㅁ자집은 이것이 확대되면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사방집이 증축되면 그것의 구조 특성상 앞으로밖에 늘어날 수 없으며 4간×4간 집으로 만들고 싶어도 복판 공간에는 빛이 들지 않기 때문에 위생상 좋지 않을 뿐 아니라 지붕이 대단히 높아져서 왕궁이 아닌 이상 개인 주택으로는 재료도 많이 들고 법적으로도 곤란하다. 따라서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똬리집이 발생한다. 사방집의 복판을 틔 워 버리면 집은 큰데 나지막하게 지을 수 있고 재료도 적게 들며 집안에 환기와 빛이 들어와 서 좋다. 다만 문제인 것은 안뜰에 떨어지는 빗물의 처리와 회첨의 방수 문제이나 이것은 기 술의 발전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런 입구 ㅁ자집은 언제쯤 발생했을까? 나는 이것이 임제종계의 선종(지줄의 정 혜결사)의 공간 개념(미학)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하므로 13세기 이후 논농사가 일반화 되고 볏짚으로 지붕을 해 덮던 이후일 것으로 본다. 똬리집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볏짚같이 방 수의 성능이 좋고 가공성이 용이한 지붕 재료가 일반화됨으로써 가능했다고 본다. 새는 특성 상 굴곡이 많은 똬리집에서는 쓰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샛집의 가장 큰 단점이 용마루라는 사 실을 보면 잘 알 수 있으며 기와집으로도 굴곡이 많으면 지붕을 잇기가 어려워진다. 똬리집이 발전하면 안마당이 있는 4간×4간 집도 가능하게 되는데 이것의 간잡이는 거의 사방집과 같음 을 알 수 있다. 봉당은 그대로 대문간으로 되고 고방 자리에는 복판의 공청 마루가 뒤로 밀려 서 대청으로 되며 안방의 줄은 부엌, 안방, 웃방 순으로 배열되고 아래쪽에 부엌광이 시설되는 정도의 변화가 있다. 머리쪽 줄 간살이도 비슷한데 사랑방을 마구간 자리에 놓고 머릿방인 건 넌방과 사랑방 사이에 고방을 두는 경우도 있다. 영남지방의 오래된 집에서는 봉당 옆에 사방 집과 똑같이 마구간을 여직 배치하는 집도 있었다. 말하자면 사방집이나 입구 ㅁ자집이 모두 시대를 달리하면서 상류주택의 집으로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입구 ㅁ자집이 주기론자들에 의해서 민중들의 집의 영향을 받아 튼입구자집으로 발전한 다. 서유구의《임원십육지》에 보면 전래의 ㅁ자 집이 사랑과 안채가 붙어 있어서 안의 불필요 한 소음까지 듣지 않으면 안되고 빛과 환기가 불량하므로 집을 붙이지 말고 떼어놓아야 한다 고 주장하는 글이 있다. 말하자면 꺾음집이란 입구 ㅁ자집이 축소되면서 최소한의 집으로 한 쪽만 지어지기도 하고 이것이《임원십육지》에서 처럼 미학적으로 그 가치가 뒷받침됨으로서 부잣집 사이에서도 일반화되기 시작한다. 그렇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사대부가 아닌 서민층 의 부자들이 선호했던 집이고 주로 상업 자본이 성장했던 남도지방에서 유행했었다. 여기서는 이에 대한 자세한 간잡이는 설명하지 않겠다.《한국의 민가》에서 튼 ㅁ자 집을 보면 여러 가 80 민속학 연구 3호 지 유형을 볼 수 있을 것이며, 이것은 원래 사방집으로부터 발전하는 것도 있지만 변천 과정 에서 당시에 유행하던 남도의 4간 집의 간잡이 방식이 끼워들기도 함을 본다. Ⅲ. 감새 고대사회가 완성되면 상류 주택으로서 3×3간의(《삼국사기》에서 보이는 장광이 3의 배수 인) 집이 탄생한다. 간살이는 우물 정자로서 하나의 정형인 평면이었을 것이다. 이 집은 비록 사방이 같기는 했지만 까치구멍 즉, 당머리(상량대 머리)쪽으로 출입했으므로 확장되면 세로로 긴 평면으로 되는데 이것은 일본의 중세 주택과도 동일한 유형이다.(이것은 우리나라 내륙 산 간지대나 태백산맥 동쪽의 영동지방, 황해도 광주산맥과 옹진반도 등에 분포했다) 이것은 지고 한 것이 존재한다고 믿었던 고대인들의 가치관(미관)을 반영한 것이다. 일본 민가의 간잡이 발전 계통도 고대 민가의 원형과 간잡이 변천의 계통 81 한국 민가의 발전 계통도 82 민속학 연구 3호 그러나 이런 정형의 평면이 경제적 여건으로 말미암아 축소되어 건축되면 뒤의 한 줄이 없 어지고 대신 담장을 둘러싸고 뒤안 공간을 만들어서 그 기능(수장 기능)을 대신하는데 이런 유형의 주택은 안동지방에 분포했었다. 반면에 좌우와 체용(體用)이라는 공간 개념에서 사방집 오른쪽 용의 공간을 생략하면 오늘날 영동지방의 양통집으로 된다. 따라서 안동지방의 여간집 은 구조적으로 완성형인 까닭에 가로로 확대되는 평면 형식을 만들지 못하고 사방집 형식으로 만 되지만, 영동지방의 양통집은 좌우로(사방집 형태로는 앞․뒤로) 증설이 가능했으므로 8간 내지는 10간의 다양한 평면 형태를 탄생시켰으며 이것이 축소되어 3간 퇴집으로까지 되는, 우 리나라 민중들이 오랫동안 사랑했던 여러가지 형식의 한일자집으로 되었다. 한편 사방집은 집의 규모가 크긴 하지만 빛이 들지 않고 환기가 되질 않아서 위생상 대단 히 좋지 않았으므로 복판의 공청 지붕을 틔워서 똬리집을 창출해 냈다. 이것은 구조상 회첨을 두어야 했으므로 방수 등에서 대단히 어려운 기법이었지만 기술의 발달로 이를 극복할 수 있 었다. 이 똬리집의 간수가 늘어나면 입구 ㅁ자집으로 된다. 이 입구자집은 주기론적 입장에서 건물을 나누면 ㄱ, ㄴ자형의 꺾음집(곱패집)의 결합인 튼입구자집으로 발전한다. 따라서 집의 중심 개념은 고대 우물 정자형 사방집인 경우 내․외부 공간이 확실히 구분되 어 있었으므로 집의 복판에 나침반을 두고 간잡이를 했다.(이는 중․근대의 일본 민가의 공간 개념과 일치한다) 그러나 이것이 나누어져서 한일자집으로 되어 안마당이 외부 공간으로서가 아니고 내부 공간으로 인식할 때는 안마당을 포함하는 중심 개념으로서 나침반을 처마 밑에 두어 공간 계획을 했으며, 입구자나 튼입구자집으로 발전했을 때는 집의 중심은 마당 중심이 라는 개념으로 변천해 갔다. 다시 말해서 마당이 외부공간으로서가 아닌 내부공간으로 인식되 었다는 의미이다. 마당은 빛우물[天井]로 인식되었으므로 나무를 심지 못하게까지 법제화되었 다.(이 내용은《경국대전》등의 법전에 있는 것은 아니고 지방의 수령이 관습법으로 지키게 했 던 것 같다) 필경 여기서는 일반적으로 일인 학자들에 의해 주장되었던 일원론적 민가 발전 계통도를 부정하면서(그림 일본 민가의 간잡이 발전 계통도에서 보듯 그들은 자신의 민가도 그렇게 정 리하고 있는데 이는 자료가 빈곤해서 그렇거나, 아니면 사적 관점을 상실했기 때문이기도 하 다) 역사의 발전이 변증법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민가의 발전 계통 또한 변증법적으로 변천해 간다는 사실을 주장했다. 다시 말해서 발전이란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만 성장해 가는 것이 아니고 큰 것이 시대에 따른 가치관의 변화로 말미암아 나누어지기도 하고 나누어진 작은 것 은 또다른 계통으로 성장하기도 해서, 동시대에 서로 다른 형식이 존재하면서 갈등 구조를 갖 기도 하고 어떤 때는 이것이 지금의 아파트 간잡이처럼 한 방향으로 통일되었다가 다시 분화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고대 민가의 원형과 간잡이 변천의 계통 83
끝으로 현 아파트의 간잡이는 안채[體]와 사랑[用]의 개념에서 사랑 공간이 생략된 채 남도 지방의 4간 한일자집이 서울식 곱은자집과 변형 결합하면서 탄생했다는 주장인데, 이같은 근세 이후의 민가 발전 계통도는 차후의 또 하나의 과제로 미루겠다. 1996. 7. 배노미 집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