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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하기 좋은 곳 스크랩 인천 개항장 풍경(7) - 사진엽서로 보는 인천 근대 -
에버수문장 추천 0 조회 30 10.12.12 18:1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사진엽서와 오리엔탈리즘

사진은 19C에 도입되는데, 당시 화가의 그림에만 익숙해져 있던 사람들에게 그림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정교한 세부묘사를 보여주는 신기한 발명품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1871년(고종 8) 신미양요 때 미 해군의 종군사진사가 보고용으로 한국사람들을 찍어간 것에서 알려지게 됐으며, 그 뒤 개항이 되고 일본 등과 왕래가 많아지면서 사진술이 들어오고 1884년에는 사진관도 생기게 됐다.

   
 
  ▲ 인천항엽서  
 

사진엽서 역시 회엽서(繪葉書)라는 이름으로 대한제국 시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사진관이나 민간인쇄소를 통해 대량생산됐다. 당시 사진엽서 중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부분이 “조선풍속”이라는 제목의 사진들이다. 엽서는 대개 8장에서 10장이 한 세트로 판매되기도 했는데, 주로 조선을 방문한 외국인을 위한 관광기념용이었다. 물론, 개항이 되면서 조선에 들어왔던 외교관, 선교사, 교사, 기자 등 서구의 이방인들도 자신들의 생활방식과는 전혀 다른 조선인들의 생활모습을 신문기사로 소개하면서 그림 혹은 삽화로 남기거나 기록사진과 함께 사진엽서를 만들었다. 그렇지만 오늘날까지 여러 경로를 통해 수집되는 사진엽서의 대다수는 주로 일본인들이 제작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진엽서에는 있는 그대로의 풍경만을 감상할 수 없는 시각이 있다. 즉, 근대 속에서 생성된 제국주의와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시선이 교묘하게 투영돼 있다는 사실이다. 오리엔탈리즘은 서구 중심의 보편주의에 따라 서구는 우수하고 비 서구는 열등하다는 논리를 이데올로기화해 동양을 열등한 타자(他者)로 본 시각이다. 동양인들을 게으르고 비논리적이라 보는 이러한 관점은 동양이 서구의 지배를 받아 마땅하다는 논리를 함축한다. 일제는 같은 문화권과 지리적 인접성에도 불구하고 조선을 마치 서구적 시각으로 타자화 시킨 것이다.

   
 
  ▲ 홍예문거리엽서  
 
조선풍속 중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오리엔탈리즘적 요소는 여성·기생·어린이·서민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것에서부터 각 계층별 인물과 함께 조선인들의 복장·미신·오락·유희·족보·무당·연중행사 등 각종의 생활양식을 포함한 것인데 그 바탕에는 조선의 전근대성, 경제적 낙후성과 정체성, 혹은 비위생과 야만성이 배경이 되고 있다. 나아가 이러한 현실에서 일제가 조성한 여러 건축물과 도로 등 발전상을 사진엽서로 재현함으로써 식민지 근대화의 주역이라는 그들의 역할을 이른바 ‘근대화 시혜론’의 입장에서 강조하고 있다.    
당시 경성에서 사진엽서를 생산했던 히노데상행(日之出商行)은 조선풍속 관련 엽서를 많이 만들어 냈는데, 1929년 조선매일신문사(朝鮮每日新聞社)에서 간행한 『대경성(大京城)』이라는 책에 따르면, “하루 판매량이 1만 매를 웃돌고, 같은 상점에서 소유한 원판 가짓수만 해도 명소 7백종, 풍속 6백 종에 달하여…인쇄공장은 직영과 전속을 합해 4개소를 보유하고 있지만 지금까지 제품이 부활할 만큼 성황을 이루고 있다.”라고 해 사진엽서들이 대량으로 생산·유통됐음을 언급하고 있다.
또 일제 강점기에는 철도의 대중화와 함께 근대 관광문화가 생성됐는데, 일제의 관광진흥책은 경제적 효과뿐 아니라 식민지 국민에게는 개발을 담보로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는 정책이기도 했다. 사진엽서의 유행 역시 이러한 관광진흥정책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지금도 관광지로서 각광을 받고 있는 온천이나 해수욕장 등을 소개하는 관광 팜플렛과 관광인(觀光印), 관광안내책자 등이 바로 사진엽서와 유사한 시각이었던 것이다.

 # 사진엽서 속의 이국적 도시, 인천

인천지역을 소재로 한 사진엽서 역시 이러한 시각과 맞물려 있었다. 1883년 인천이 개항되면서 개항장에는 인천해관과 인천감리서가 설치되고, 각국 영사관과 외국인 거류지가 만들어졌으며, 응봉산을 중심으로 각국공원이 조성되고 주변에 청국조계·일본조계 및 각국공동조계가 생겨났다. 각국의 상·공업시설과 종교·교육·문화시설도 빠르게 설립됐고 근대문물이 이식되면서 이국적인 정취마저 자아내게 됐으며, 특히, 세창양행 숙사, 파울바우먼 주택, 헨켈 저택, 오례당, 존스톤 별장 등 서양식 주택은 당시 인천인들이

   
 
  ▲ 월미조탕  
 
경험하지 못한 인천 속의 서구세계였다. 또 최초의 서양식 호텔과 공원, 경인철도부설, 하와이 이민, 팔미도 등대, 기상대 등  근대적 의미에서 우리나라 최초에 해당하는 역사가 사진엽서를 통해서도 전개됐다.
이런 인천 개항장 풍경은 사진엽서에 반영돼 당시의 거리모습과 사회변화를 공감할 수 없는 지금의 우리에게 비교·연구할 수 있는 자료로 활용되기도 한다. 개항 초기는 주로 일본, 청국, 각국 조계지와 번화한 거리 모습이 각국 영사관과 함께 담겼으며, 1910년 이후로 가면서 점차 홍예문, 월미도와 인천역 그리고 인천항과 동양유일의 갑문과 도크 등 일본인에 의한 건설된 소위 ‘식민도시 인천’을 관광차원에서 홍보하고 근대화를 선전하는 기념물들이 주로 사진엽서에 담겨졌다. 특히, 러일전쟁 당시 팔미도와 소월미도 부근에서 발생했던 제물포해전에서 자폭하는 러시아 함대의 모습을 담은 사진엽서는 지금껏 유통되고 있어 일본인들이 당시를 자랑스럽게 기억하고자 얼마나 많은 양의 승전기념 엽서를 생산했는지 짐작이 된다.

최근 동영상매체의 활용이 인터넷 세대의 성장과 더불어 빠른 추세로 확산됐다. 이러한 매체들 중에서도 가장 주목을 받는 것이 근·현대 생활사 복원에 요긴하게 이용되는 사진자료이다. 특히, 100년을 전후한 시
   
 
  ▲ 제물포해전당시 코레츠호 폭발  
 
기, 거리의 풍경, 건축, 의복 등 생활의 변천사를 긴 설명 없이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어 “코드 없는 메시지”라는 정의대로 누구나 쉽게 이해하고 흥미롭게 여기고 있다. 그런 뜻에서 이제 정형화된 문헌자료나 일반적인 기록물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코드”의 사진이 주는 역사의 의미까지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사진엽서가 우리의 근대 생활상을 전적으로 대변하는 완전한 자료라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역사적 자료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을 두고 지속적인 발굴과 수집을 필요로 하고, 더 많은 자료의 확보를 통해 이에 대한 정확한 분석과 비판을 통해서만이 그 의의를 갖는다.
이와 같이 사진엽서는 일제강점기라는 특수한 시기에 성행됐고, 당시 조선인들의 풍속 등 생활사를 담고 있다는 사실에서 오늘날 역사를 연구하는 한 방법으로 종종 응용되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일제 강점기가 갖는 시대적 한계를 비판적으로 인식한 바탕에서 조심스럽게 활용돼야 할, 그것도 여러 근대사 자료 중의 하나일 뿐이라는 점이다.

  <※자료제공=인천시 역사자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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