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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제10차 백팔사찰순례 날짜가 마침 정월 대보름날과 겹치는 바람에 다른 회차와는 달리 출발하는 시각을 조금 늦게 잡아서 오전 6시 50분으로 하였습니다. 집에서 보름을 맞을 가족들을 위해 준비하는 시간을 배려한 조정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날이 훤히 밝아서 출발하는 것은 오랜만이었습니다. 이번에 순례하는 곳은 전남 여수와 경남 사천 방면에 있는 고찰들이었는데, 먼저 여수의 흥국사에 들러 사시 예불을 드리고, 그 다음 돌산도에 있는 향일암로 갔다가, 사천 곤양에 있는 다솔사를 끝으로 해서 돌아오는 일정이었습니다. 우리가 탄 버스는 하단오거리에서 을숙도 하구언둑을 지나 남해고속도로로 향했습니다. 곧바로 차내에서 아침 예불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처음보다는 아침 예불에도 익숙해진 것 같았습니다. 이른 아침이라서 그런지 남해고속도로에 올랐지만 차들이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요즈음 자주 봄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오늘은 용케 맑아서 나들이하는 데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날씨였습니다. 서부산 톨게이트에서 진영까지는 멀리까지 산과 들이 봄나들이를 채비하는 분주한 모습들을 또렷히 감상할 수 있었는데, 진영휴게소를 지나자 사방으로 안개가 자욱이 끼어 있어 멀리까지 볼 수가 없었습니다. 아침 예불을 마치고 나서는 지난 번 순례부터 불교방송에서 DVD를 구입하여 순례를 가는 사찰에 대한 영상물을 보고 가게 되었는데, 이번에도 흥국사와 향일암에 대한 영상물을 보면서 사전에 어느 정도 그 사찰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중간에 문산 휴게소에 들러 잠깐 휴식을 취한 뒤에 한달음에 흥국사 주차장에 도착을 했습니다.
사시 예불 공양물도 있고 하여 일주문 밖의 주차장이 아닌 흥국사 안에 있는 주차장까지 버스가 들어가게 되어 일주문이며 천왕문 등을 걸어서 들어거지 않고 곧바로 대웅전으로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직 오전 10시가 되지 않은 시각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흥국사를 찾는 발길들이 아직은 초봄이라 때가 일러서 그런지 우리 일행들이 전부인 듯 보였습니다. 사시 예불 드릴 공양물들을 버스에서 챙겨 대웅전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대웅전 안에는 이미 다른 일행들이 제를 드린다고 먼저 와서 한 쪽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 일행은 남은 한 쪽에 방석을 준비하고 자리를 좁혀 앉았습니다. 가져온 공양물을 차려서 올리고 나자 곧바로 사시 예불에 들어갔습니다. 예불을 드리는 사이에 108배를 했는데, 처음 순례를 가서 할 때보다는 힘들지 않게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서 조금씩 적응이 되는 모양이었습니다. 사시 예불을 드리는 동안, 가까운 곳에 사시는 듯 한 차림의 할머니 두 분께서 들어오셔서는 연신 절을 하시는 모습이 전혀 낯설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절이라는 것은 자신을 낮추기 위한 예라고 들었지만, 좀처럼 낮추어지지 않는 자신을 뒤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불쑥불쑥 나타나서 일을 저질러 낭패를 겪게 하는 ‘나’라는 것을 108 사찰 순례를 통해 제대로 길을 들일 수 있기를 바래봅니다. 지난 번 은해사의 돈관스님으로부터 배운 바를 그대로 행하고 있는지도 다시 한 번 되새기며 돌아보았습니다.
<매표소와 일주문 앞에 있는 흥국사 안내도>
<주차장에서 바라본 영취산을 배경으로 한 일주문과 매표소>
<흥국사 일주문>
<일주문을 지나 흥국사 경내로 들어가는 길>
<영취교와 천왕문>
<영취교에서 본 흥국사 옆의 계곡>
흥국사(興國寺)는 전남 여수시 중흥동 17번지 영취산(靈鷲山, 510m) 기슭에 자리를 잡은 사찰로 화엄사의 말사(末寺)입니다. 고려 명종 25년(1195년)에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 1158∼1210년)이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며, 나라의 융성을 기원하기 위해 건립된 사찰이라고 합니다. 그 이후 여러 번 고쳐지었는데, 조선 인조 2년(1624년)에 계특대사가 건물을 고쳐 세워 지금에 이른 것이라고 합니다. 사찰 안에는 보물 제396호인 대웅전, 원통전, 팔상전, 부조전, 응진전, 심검당, 무사전 등 14채의 절집과 괘불, 보물 제578호인 대웅전 후불 탱화, 그리고 보물 제563호인 홍교가 있습니다. 처음 흥국사의 위치를 잡을 때 노스님이 나타나서 보조국사 지눌을 금성대로 안내하고는 영취산을 바라보며 “이곳에서 내려가면 절묘하고 빼어난 터가 있는데, 하늘이 아끼고 땅이 보호하는 불법이 크게 일어나는 도량이 될 것이다. 이곳에 큰 절을 세우고 절 이름을 흥국사라고 하라. 이 절이 잘 되면 나라도 잘 되고 나라가 잘 되면 이 절도 잘될 것이다.”라고 했다고 흥국사 사적기에 전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보조국사가 흥국사에서 송광사로 옮긴 후, 흥국사의 사세는 급격히 기울었다고 하며, 100여년 가까이 토굴과 같았다고 합니다.
<흥국사의 뒷 모습>
<동백꽃과 어우러진 흥국사 전경>
그 이후 원나라의 침략 때, 모두 불 타고 사찰은 폐사가 됐다고 합니다. 그 뒤 1560년에 법수대사가 학준, 신잠, 수인, 양희, 영두 등과 더불어 흥국사를 재건했는데, 이때 법당과 전각을 복원하고 원정과 선방을 건립해 가람을 중건했다고 합니다. 또한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는 이곳에서 의승 수군 400명이 조직된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임진왜란, 정유재란 당시에 모두 불타 없어졌고, 흥국사는 다시 폐허가 되어야만 했다고 합니다. 그 이후 1624년 계특선사가 가람을 삼중창하는 역사를 진행했는데, 그해 가을에 법당을 중건하고, 도반인 희, 익, 언과 더불어 모든 선방 및 요사채들을 재건했으며, 수시로 모든 당우와 범종을 주조했다 합니다. 또한 1633년 관음전을 건립했고, 1639년에는 홍교를 만들었으며, 1643년에는 첨성각, 1645년에는 정문, 1646년에는 봉황루를 건립해 사찰의 면모를 모두 갖추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1690년에 또 다시 대웅전을 중건하는 공사를 하게 됩니다. 이때 중건을 담당하신 분은 통일대사로 기존의 대웅전이 낮고 좁기 때문에 더 넓고 큰 대웅전이 요청되어 중건이 진행되었다고 합니다. 현재의 대웅전은 이 당시에 건립된 것이며, 기존의 대웅전 재목으로는 현재 대웅전 뒤에 있는 팔상전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 동안 개개의 건물 및 탱화는 수차례 보수 및 수리가 되어 현재까지 전해오고 있으며, 계속된 불사에 의해 혹은 예전과 모습이 달라지기도 하고 혹은 새롭게 조성하기도 해 현재의 흥국사를 이루고 있답니다.
<법왕문>
<흥국사 대웅전과 영취산 봉우리>
<대웅전의 부처님>
<무사전의 현판>
<무사전의 지장보살님>
<팔상전의 부처님>
<색다른 모습으로 지어진 원통전>
<원통전의 관세음보살님>
<용왕전 내부 모습>
호국 불교의 성지인 이곳 흥국사는 임진왜란 때 승병 훈련소로도 유명한 흥국사의 배치를 보면, 대웅전(大雄殿)을 주축으로 되어 있습니다. 경사지 위에 사천왕문(四天王門)을 지나 봉황루(鳳凰樓), 법왕문(法王門), 대웅전, 팔상전(八相殿)이 순서대로 일축선상에 배치되었고, 대웅전 전면 좌우에는 적묵당, 심검당이 있습니다. 사시 예불이 끝나자 곧바로 밖으로 나와 다른 일행들이 제를 드리는 동안 경내를 둘러보고 점심 공양을 한 뒤, 출발하기 전부터 이곳 영인 총무스님으로부터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니라는 법문을 듣기로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사시 예불을 드린 대웅전은 1963년 9월 2일에 보물 제396호로 지정되었는데,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지붕이며, 조선 중기의 건축으로 갑석(甲石)이 있는 단층 기단 위에 세워졌고, 정면 3칸은 기둥 사이를 같은 간격으로 분할하고 각각 4분합(四分閤)의 빗살문을 달아 전부 개방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이 빗살문은 상부를 구분하여 교창(交窓) 모양으로 의장하였으므로 문짝의 키가 높으며 따라서 주고(柱高)도 높이 잡았습니다. 특히 문고리가 크고 이 문고리를 한 번 잡기만 하면 행운이 온다거나 삼악(三惡, 지옥, 아귀, 축생)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 문고리에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는데, 임진왜란 때, 신검당 건물만 유일하게 남고 모든 사찰이 전소됐다고 합니다. 그 이후 대웅전은 송광사 설계 도면대로 지어졌고, 대웅전을 건축할 때 승려 목수 마흔 한 분이 천일 간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그 천일 기도를 할 때 서원(소원)은 "법당의 문고리를 한 번만이라도 잡아본 사람은 그 누구나 삼악(三惡)을 면하고 성불하게 해주십시오."하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법당의 문고리를 잡으면 행운이 온다고 전해오고 있습니다.
<대웅전의 문고리>
그리고 대웅전의 후불탱화(475×406cm, 견본착색[絹本着色])는 숙종 19년(1693년)에 제작되었으며, 1974년 7월 9일에 보물 제578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이것은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6보살, 사천왕상, 6대 제자, 6분 신불(六分身佛)과 기타 성문(聲聞)들이 배치된 그림입니다. 본존불인 석가모니불을 에워싸는 원형 구도로 가운데 수미단(須彌壇) 위에 연꽃 대좌를 마련하고 결가부좌한 석가여래가 앉아 있는데,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였으며, 뒤에는 키 모양의 광배가 있습니다. 머리에는 높다란 육계(肉髻)를 뾰족하게 표현했으며, 나발(螺髮)도 뚜렷합니다. 정상계주(頂上髻珠) 끝에서 흰 광선이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모습이 보이고 그 좌우로 시방불(十方佛)이 구름을 타고 오는 모습도 보입니다. 화기(畵記)는 첫머리에 주상삼전하(主上三殿下)의 수만세(壽萬歲)와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말을 적었고, 그 왼쪽에 이 그림을 그린 화원(畵員)의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또한 흥국사라고 하면 떠오른다는 유명한 홍교(1972년 3월 2일에 보물 제563호로 지정)는 인조 17년(1639년)에 축조되었으며, 화강석제로 높이 5.5m, 홍예구(虹霓口)의 너비 11.3m, 내면 너비 3.45m, 다리의 전체 길이 40m입니다. 물이 흐르는 암반 위에 편단석(扁單石)을 놓고 그 위에 동일형의 장방각재(長方角材)를 포개어 홍예를 구성하였는데, 앞뒤 양측 벽은 자연 잡석을 불규칙하게 쌓아 올려 완만하고 긴 노면(路面)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홍예의 종석(宗石)은 돌출한 용두각석(龍頭刻石)이며, 정상부(頂上部)에는 장방각재를 복개하였습니다. 홍예를 구성하는 석재는 총 86 덩어리이며 홍예 및 석축 위에는 흙을 깔아 자연 노면을 이루었고, 양변에 풀이 나 있습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홍예 석교 가운데 가장 높고 길다고 합니다. 홍예는 아랫부분에 나와 있는 용머리와 귀면상은 각각 호국과 잡귀 퇴치를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대웅전 뒷벽(진본)과 왼쪽(사본) 벽에 그려져 있는 관세음보살탱화는 조선시대 경종 3년(1723년)에 제작된 것으로 대웅전 중앙에 설치된 불단 고주(高柱)의 뒷면 토벽에 그려져 있으며, 크기는 389×336cm입니다. 이 탱화의 구도는 관세음보살이 반가부좌(半跏趺坐)에 정면관(正面觀)을 하고 선재동자(善財童子)를 옆에 배치하고 있는 조선 후기의 일반적인 형식입니다. 배경에는 왼편 암벽 위에 푸른 대나무가 묘사되고, 오른편 바위 위에는 정병(淨甁)에 버들가지가 꽂혀 있으며, 그 위로는 청조(靑鳥)가 빈 공간에서 관음을 향해 날고 있습니다. 또한 하단 우측으로는 선재동자가 서 있습니다. 이러한 구도는 고려시대의 수월관음도에서 흔히 나타나는데, 특히 고려시대의 관음보살상이 측면관을 취하고 의상이나 문양, 색채와 배경 등에서 채색을 중심으로 하여 현란할 정도로 치밀한 것과 달리 조선시대의 관음보살상에서는 정면관에 의상이나 문양이 단순하고 배경도 빈 공간이 많거나 암벽의 색깔을 수묵담채로 처리하는 등의 차이가 있습니다. 세부적으로 보면, 머리 위의 보관부터 어깨를 감싸면서 부드럽게 늘어뜨린 투명한 옷자락이 눈꽃처럼 하얗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얼굴은 동그스름하며 내리 뜬 작은 눈과 코, 입, 그리고 꼬불꼬불한 콧수염이 있습니다. 화불(化佛)이 그려진 빨간색의 보관은 밝은 초록색의 두광(頭光)과 대비되어 강렬하게 보이며 미끄러지듯 내려온 어깨선과 편안하게 무릎 위로 내린 손이 안정감 있게 처리되었습니다. 화사(畵師)는 당시 전라도와 경상도를 오가며, 18세기 초반에서 중반까지 왕성하게 활동을 했던 비구(比丘) 의겸(義謙)과 그 외 향오(香悟), 신감(信甘), 적조(寂照) 등이 참여하였다고 합니다.
<대웅전 뒷면에 있는 관세음보살탱화 진본>
<대웅전 왼편에 있는 관세음보살탱화 사본>
사시 예불을 마치고는 대웅전 안에서 후불탱화와 관세음보살탱화를 감상하고 밖으로 나와서는 무사전, 팔상전, 원통전을 돌아 박물관까지 내려오니 옛 해우소는 폐쇄가 되어 있고, 새로 지은 곳으로 방향 표시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사시 예불 내내 법당에서 예불에 참석하는 바람에 흥국사의 곳곳을 세밀하게 살펴볼 시간적 여유가 그다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팔상전에 있던 석가모니 부처님의 일생을 여덟 단계로 나누어 그린 불화인 팔상도는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곧바로 공양하는 곳으로 가서 일행들과 산사 특유의 점심 공양을 들었는데, 곁들여 나온 인절미와 시루떡이 맛이 있다고들 입을 모았습니다. 점심 공양이 끝나자 곧바로 총무스님의 법문이 있다고 하여 12시 20분까지 다시 대웅전 법당으로 모이라는 전갈이 있어 모두들 대웅전으로 향했습니다. 학교 같으면, 학생들이 모두 모이기 전에 선생이 먼저 와서 가르치겠다고 기다리는 형국이 벌어진 것도 오랜만의 일이었습니다. 곧바로 총무스님의 법문이 시작되었는데, 올 때부터 업과 출생에 관한 이치와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님을 확실하게 보여주겠다고 해서 잔뜩 기대를 했었는데, 아직 깨침이나 도(道)에 근접하지 못한 한 중생으로서는 도무지 말귀를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도하는대로 박수도 치고 귀를 쫑긋하며 조금이라도 알아들으려고 애를 썼지만, 그런다고 통할 수 있는 근기가 아니라서 그런지 시간이 지체되는데만 정신이 팔려 있었습니다. 이러다가 다음 순례지까지 제 시간에 맞추어 갈 수 있을지만 우려하며 안절부절만 했습니다. 결국 1시간 정도 늦은 출발이 이번 사찰 순례가 끝날 때까지 영향을 미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첫번째 그림은 도솔래의상(兜率來儀相)으로,
탄생을 위하여 도솔천을 떠나 흰코끼리를 타고 북인도의 카필라 왕궁을 향하고 있는 모습>
<두번째 그림은 비람강생상(毘藍降生相)으로,
마야(摩耶)부인이 산달을 맞아 친정으로 가던 도중 산기가 있어 룸비니 동산으로 가서 부처를 낳는 모습
(부처는 부인의 오른쪽 옆구리로 출생)>
<세번째 그림은 사문유관상(四門遊觀相)으로,
부처가 도성의 성문을 나가 노인과 병자, 죽어 실려 나가는 시체를 보고 북문에서 출가하는 사문을 만나 출가를 결심하는 그림>
<네번째 그림은 유성출가상(踰城出家相)으로,
29세 되던 해에 사랑하는 처자와 왕위를 계승할 태자의 자리를 버리고 성을 떠나 출가하는 모습>
<다섯번째 그림은 설산수도상(雪山修道相)으로,
6년 동안 갖은 고행을 겪으며 스승을 찾아다니다가 스승은 밖에 있지 않고 자기 안에 있음을 깨달아
부다가야의 보리수 아래에서 선정에 들어가는 모습>
<여섯번째 그림은 수하항마상(樹下降魔相)으로,
선정에 들어가 갈등이 심하지만 수행이 자신과의 투쟁임을 깨닫고 용맹 정진하여
마침내 마군의 항복을 받고 대오각성의 경지에 드는 모습>
<일곱번째 그림은 녹야전법상(鹿野轉法相)으로,
대오각성한 석가모니가 그곳에서 500리쯤 떨어진 녹야원으로 가서
처음으로 5명의 수행자에게 설법하여 그들을 귀의시키는 모습>
<여덟번째 그림은 쌍림열반상(雙林涅槃相)으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법을 전한 후 제행무상(諸行無常)과 용맹 정진할 것을 당부하고
사라쌍수 아래서 열반에 드는 모습>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해우소>
흥국사에 대한 DVD를 보면서 홍교가 유명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흥국사 안에서 홍교를 찾는다고 부산을 떨었지만, 홍교는 흥국사 경내와 직접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영취산 계곡을 따라 내려오는 맑은 물과 봄을 알리는 계곡의 어우러짐은 우리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어루만져 주고 있었습니다. 이미 산과 들, 계곡과 나무들은 겨울잠에서 깨어나 봄을 위한 채비에 부산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홍교는 일주문 앞에 있는 흥국사 주차장에 들어서기 직전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사진을 찍는다는 핑계로 혼자 일주문을 지나 홍교쪽으로 내달아서 위쪽과 아래쪽에서 홍교의 아름다운 장면들을 사진에 담았습니다. 우리 조상들의 지혜와 공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소담스럽고 우아한 자태, 거기에다 주변 경관과 멋지게 어우르지는 풍경에 한 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이미 한 시간 이상을 흥국사에서 지체가 된 상태여서 일행들은 서둘러 다음 순례지인 향일암을 향하기로 하고 버스에 올랐습니다. 조금은 느긋하게 시간적인 여유를 가지고 다닐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었지만, 계획된 일정을 맞추는 것이 처음 시작할 때의 취지에 맞는 일이고, 단체 생활에서는 서로 협조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최우선 되어야 하기 때문에 모두들 봄바람과 같이 발길을 옮기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아직도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니라는 의문이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는 것은 나뿐이 아닌가 했습니다. 그렇지만 흥국사를 돌아 흐르는 맑은 시냇물과 희망의 봄기운을 느끼면서 우리나라 훙하여 흥국사까지 흥하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향일암으로 향했습니다.
<위쪽에서 바라본 홍교>
<아랫쪽에서 바라본 홍교>
<홍교 중앙 아래쪽에 있는 용머리상>
<홍교 중앙 양쪽에 있는 귀면상>
<홍교의 위쪽 보행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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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생각만 돌이키면
원래 오고 감도 없고
나고 죽고도 없다고 했으니
구태여 화려한 말이나 사치스런 글로
삶과 죽음이 하나라고 우길 필요까지 있을까?
멀쩡하게 살아있을 때는
당연하게 여기는 삶이지만
죽음의 그림자가 눈앞에 닥치면
발버둥을 치며 매달리는 것 또한 욕심이고 집착이다.
생전에 삶과 죽음이 하나임을 안다면
나고 죽고에 꺼둘리지 않고
오고 감에 얽매이지도 않겠지만
눈이 멀고 귀가 먹어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고 살아간다.
한 생각만 돌이키면
너와 내가 둘이 아니고
삶과 죽음 역시 둘 아님을 단박에 알아차려서
바람처럼 구름처럼 막힘없고 걸림없이 그냥 그대로 살아갈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