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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현대사산책 1950년대 2권
제5장 1954년, 자유당 독재체제의 구축
● 1954년 일지 ●
1953~1954년 이승만의 족청계 제거 작업, 본격적인 자유당 독재체계 구축
3월 30일 제3대 국회의원 총선거 실시
1954년 6월 안호상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족청 동지인 무소속 후보였던 김동욱을 위한 후원연설을 했고, 김동욱이 자유당 후보를 이기고 당선된 게 화근으로 작용, 내란선동죄, 국사보안법위반, 선거법위반, 북한괴뢰정권 자진해 돕기 등의 명목으로 구속됨)
4월 6일 이승만 정권, 5월 20일 선거에서 후보등록의 전제로서 “개헌(중임제 제한 철폐)조건부로 입후보”할 수 있다고 담화발표(개헌지지는 공천의 전제조건이 됨).
4월 26일 한국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정치회담인 제네바회담 개최.
5월~ 이승만 정권, 조봉암 선거등록 방해공작.
6월 9일 공식적으로 상업주의를 표방하며 한국일보 창간.
7월 27일 동북아시아 전역, 특히 공산권을 대상으로 한 국제선교방송인 극동방송 개국
7월 28일 미국을 방문한 이승만, 미국상하 양원 합동회의에서 제3차 세계대전을 촉구하는 초강경연설을 함(->이에 미국은 이승만의 호전성에 불안감을 느껴 미군을 2개 사단만 남겨놓고 4개 사단 철수하겠다고 발표)
8월 독도에 등대를 세우고 경비대를 파견(52년 1월 18일 공포된 평화선(연안으로부터 평균 60마일을 한국의 해양주권영역으로 간주)은 65년 6월 한일협정이 체결 때까지 유지됨)
8월 18일 국회, 야간에 국회를 소집하여 유엔군 일부 철수에 대한 발대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킴.
9월 7일 국회에 개헌안 제출(->대통령 중심제, 국무총리제, 대통령 궐위 시 부통령의 자동승계제, 중대 사항 국민투표제 관련 내용)
10월 12일 뉴델리 밀회사건(->1953년 6월 2일 국회의장 신익희가 뉴델리 공항에서 납북된 조소앙과 만나 밀담을 나누어 제3세력을 규합해 남북협상을 추진하여 한국의 중립화를 도모하였다고 주장) ☛ 개헌에 대한 명분을 국민투표제로 호도하던 자유당에게 호재로 작용.
11월 4일 국회 긴급동의로 들어온 “납북협상 중립배격 결의안”통과
11월 11일 반공결의문 채택
11월 20일 개헌안 상정
11월 27일 제90차 국회본회의는 표결에 들어감(개표결과, 출석의원 203명 중 찬성은 헌법개정에 필요한 136표에 1표가 모자라는 135표였다. 자유당 원내총무 이재학은 135가 3분의 2라는 담화를 발표, 이른바 사사오입 논리 등장)
11월 29일 국회 개헌안 ‘사사오입’ 이론을 적용하여 통과시킴
11월 30일 국회에 호헌동지회 결성
12월 23일 한국 최초의 민영방송인 기독교방송(CBS) 개국
제6장 1955년, ‘우상정치’와 ‘동원정치’
● 1955년 일지 ●
3월 15일 동아일보 오식사건
4월 18일~24일 인도네시아 반둥에서 ‘아시아-아프리카 회의’개최. ‘평화 10원칙’ 채택(->반둥회의는 식민주의의의 종식과 미소간의 냉전에서 중립을 지키는 비동맹을 추구하기 위해 아시아와 아프리카 국가들 사이에 긴밀한 유대관계를 형성할 목적으로 개최된 것)
☛ 이승만은 당시 제3세계의 화두인 “평화공존”을 “친공”으로 간주하며, 반둥회의를 미국보다 더 강경한 태도로 비난함.
5월 9일 미국, 서독의 비무장원칙을 무시하고 나토에 가입시킴
5월 14일 소련, 바르샤바조약기구 설립
8월~ 북진통일운동의 일환으로 중립국 감시위원단 축출 시위가 전국적으로 일어남(->유엔 결의에 따라 휴전 감시단으로 입국한 중립국 감시위원단 중 체코와 폴란드 등 공산국가 대표를 축출하기 위한 시위가 일어남)
8월 13일 이승만, 휴전협정 즉시 폐기와 북진통일 주장
9월 14일 대구 매일신문사 테러사건(->학생들의 중립국 감시위원단 축출시위가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매일신문 주필 최석채는 13일자 “학도를 정치 도구로 이용하지 말라”는 사설을 써서 관제시위 비판했지만, 자유당의 사주를 받은 폭력배가 신문사를 습격함->백주 대낮의 테러는 테러가 아니다(경북도청 사찰과장 발언)라는 유명한 말 여기서 나옴)
9월 19일 민국당의 발전적 해체와 범야권 통합신당인 민주당 창당(->조봉암의 참여를 지지하는 서상일, 장택상, 신도성의 민주대동파와 조봉암의 참여를 반대하는 조병옥, 장면, 곽상훈 등의 자유민주파가 대립을 하다가 호헌동지회의 자유민주파와 다른 보수세력이 합세해 창당한 것이 민주당이다)
12월 22일 민주당 참여를 거부당한 혁신계 야당 세력은 조봉암, 서상일, 이동화를 중심으로 ‘진보당창당준비위원회’구성.
● 주요 내용 ●
- 전후 1954년, 1955년의 사회상 -
I. 정치상황
1. 이승만 중심의 독재체제의 구축
1) 이승만의 족청계 제거를 통한 안정적인 권력기반 구축
정치적 변화 가운데 먼저 이승만의 대통령 연임과 자유당을 통한 확고한 권력 장악을 들 수 있다. 이승만은 제2대 국회의 구성상 정상적인 방법, 즉 국회 내 간접선거로는 불가능하였던 제2대 대통령직을 5.26 정치파동(정부가제출한 대통령직선제와 양원제에다 국회가 제안한 개헌안 중 국무총리의 요처에 의한 국무위원의 임명, 국무위원에 대한 국회의 불신임 결의권 등을 덧붙인 것으로 절충형식, 심야에 국회의원을 강제연행, 경찰 군대와 테러대가 에워싼 국회에서 기립표결로써 강압적으로 가결)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승만이 안정적인 권력기반 구축을 마련하는 데 결정적 사건은 자유당 내 족청계의 제거 였다. 이승만은 자유당을 통한 의회 내 다수당을 형성하고 군과 경찰조직 및 관료조직, 여권 단체 및 무소속 세력을 포섭한 데 이어, 창당 주도세력인 이범석과 족청계를 제거하여 정부 및 국회에 확고한 권력기반을 다졌다. 물론 이 같은 정치과정은 합헌적 제도가 아니라 정치책략과 헌정파괴의 행태를 통해 이루어졌다.
자유당은 애초 창당 당시 이승만의 언질을 받은 이범석이 주축이 돼 국민회, 대한청년단, 노총, 농총, 대한부인회 등 각종 사회단체들이 결합된 원외자유당에 원내의 의원들 다수가 발췌개헌 이후 권력을 좇아 참여함으로써 형성된 정당이다. 내분은 불가피했다.
이승만의 이범석 견제는 이미 1952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이범석이 자유당 부통령후보로 지명됐음에도 불구하고 무소속의 함태영을 지지하고 경찰 및 행정력을 동원함으로써 이범석을 낙선시켰다.
이승만은 이 무렵 자유당 개편론에서 정부 당수제를 폐지하고 대신 총재제도를 도입하고, 중앙상무집행위원회-중앙감찰위원회 등을 폐지하고 소수의 집행부서를 설치하는 것 등을 내용으로 자유당 개편을 주장한 바 있었다. 이 또한 족청계의 거세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 당시 이범석은 부당수였고 중앙상무집행위원회 등의 당 기관은 족청계에 의해 완전 장악돼 있었기 때문이다.
족청계의 권력의 힘을 보여준 사건은 소위 장택상 입당 거부이다. 족청계의 득세가 심해지자 반족청계에서는 견제를 목적으로 장택상의 입당을 추진했다. 그런데 장택상이 이끌던 신라회는 장택상을 제외하고는 전원 입당이 이뤄졌는데 장택상만은 이범석의 견제로 입당이 좌절되는 사태가 일어난 것이다. 표면적 입당거부사유는 "친일파, 반정부파, 민족반역자"였지만 실상은 제2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장택상이 이범석을 반대함으로써 깊어진 감정의 골과 장택상에 대한 이범석의 견제심리 때문이었다. 이범석이 점차 권력을 확보해 감에 따라 이승만은 족청계를 통해 자신의 입지를 안전하게 구축해갔다.
2) 사사오입 개헌을 통한 장기집권의 야욕
사사오입 개헌이란, 1954년 제1공화국의 제3대 국회에서 이승만에 대한 3선제한의 철폐를 핵심으로 하는 헌법 개정안을 통과시킨 제2차 헌법개정을 말한다. 1952년의 발췌개헌을 통하여 대통령 선거를 직선제로 함으로써, 그 해 8월 5일 실시된 대통령 선거로 이승만의 중임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 중임하기 위하여 헌법의 장애요소를 제거할 필요를 느낀 자유당과 이승만은 헌법상 대통령과 부통령의 임기는 4년으로 하고, 재선에 의하여 1차 중임할 수 있는 3선 금지조항을 고치려고 하였다.
이에 따라서 자유당은 개헌을 위해서 1954년 5월 20일에 실시되는 민의원 선거에 이를 찬성, 추진할 것이라는 서명을 받고 후보자를 공천하였고 많은 당선자를 확보하였다. 또한 무소속의 인사들을 다수 포섭하여 개헌준비를 진행시켰다.
이러한 개헌준비를 바탕으로 1954년 11월29일 자유당은 국회에서 ‘사사오입’이라는 기괴한 논리를 적용해 정족수 미달의 헌법개정안을 불법적으로 통과시켰다. 이로써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 제한을 철폐함으로써 이승만의 영구 집권을 향한 법적 통로를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3) 이승만의 우상정치▪동원정치, 종교의 정치도구화, 곡필언론의 이승만 찬양
이승만은 자신의 권력기반을 확고히 하고 반공주의를 확산시키기 위해서 종교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는데, 이승만 정권이 행사한 종교개입의 잣대는 정권에 도움이 되느냐 아니냐에 따른 것이었다. 불교계의 정치적 예속성의 심화(제1차 유시를 시작으로 7차례나 유시를 내리면서 불교계에 지속적으로 개입)와 기독교 및 유교의 정치적 도구화를 통해 권력 장악을 목적으로 종교를 좌지우지하는 행태를 보였다.
기독교 역시 이승만 정권과 공생관계를 유지해 나갔고, 미국과 대통령이라는 강력한 배경과 손을 잡는데 집중적인 관심을 쏟았다. 대부분의 교회가 가장 친정부적인 조직체로서 자유당의 하수인 노릇을 서슴없이 했고, 외국으로부터의 원조가 기독교 교회들로 집중되었다. 또한 곡필언론들의 이승만 찬양 및 관료들의 이승만 찬양 역시 극에 달하였다.
II. 이데올로기
1. 이승만식 반일주의와 반공주의, 북진통일론
☉ 반일주의
☞ 친일파 청산에 반대하며 오히려 이들을 대폭 기용한 이승만 정권과 모순되는 것이 이승만의 반일주의이다. 그러나 이것은 감정적 반일주의로써 일제 식민지 지배에 대한 일반 대중들의 처참한 기억을 동원하는 시대정치이데올로기로 구실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반공에는 항상 반일이 따라다녔으며 어느 부분에서는 이승만 정권은 반공보다 반일을 더 강조했다. 물론 여기에도 체제 정당화와 대중 동원을 위한 목적 이외에 정치적 반대 세력을 무력화 시키려는 당략적 목적을 갖고 있었다는 숨은 의도가 있었다.
당시 가장 강력한 정치 반대 세력이었던 민주(특히 구파)의 실세들이 한민당에 뿌리를 둔 친일 지주들이었다는 점에서 이승만은 은근히 민주당 지지를 친일 행위로 몰기도 했다.
☉ 반공주의
분단 이후 “반공”은 어느 정권 하에서건 우리 사회의 가장 중요한 지배 이데올로기가 되어왔다. 이승만은 1950년대 중반 미소 양대 진영 간의 평화 공존 움직임에 대해서까지 맹목적으로 반발하며 반공주의로 반응했다. 반공주의를 철저하게 정치 탄압과 정권 유지의 수단으로 사용함으로써 스스로가 내세운 또 다른 이데올로기인 자유 민주주의를 스스로 짓밟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시도 때도 없이 반대 세력 및 골치 아픈 반대 세력을 빨갱이로 몰며 공격하였다.
☉ 북진통일 이데올로기
50년대를 그 이후와 구별시켜 주는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통일 이데올로기라고도 불리는 북진통일 이데올로기이다. 이는 45년 분단 이전의 통일된 한국과 분단된 두 개의 국가 간의 전쟁이 일반인들의 기억에 생생히 살아 있고, 또한 분단 상황이 완전히 기정사실로 내면화 되지 않은 상황 속에서 이승만은 취약한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북진통일론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다. 북진통일 이데올로기는, 조봉암과 진보당의 평화통일론에 대하여 민주당과 언론들이 줄곧 비판을 하는 모습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승만 정권이 자유당뿐만 아니라 보수 야당과 언론 등에 의해서도 공유되고 있던 명실상부하고 확고한 1950년대의 이데올로기였다.
II. 경제상황
1) 전후의 경제정책, 미국에 의존한 원조정책
북진 통일 이데올로기의 이면에는 경제 발전 이데올로기의 상대적인 결여내지 부재가 존재한다. 이승만 정권에는 경제 발전에 대한 관심과 문제의식이 상대적으로 결여되어 있었고, “50년대의 경제 정책 = 어떻게 하면 미국의 경제 원조를 극대화시킬 것인가”의 “원조 정책”이 전부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48년 정부 수립 기념사에서 이미 이승만은 토지 개혁이나 경제 발전에 대한 어떠한 정책이나 포부도 밝히지 않은 채 “가장 필요하게 느끼는 것은 외국의 경제 원조”라고 천명할 정도로 “경제문제=원조문제”라는 경제관을 확고히 했다.
따라서 남한 경제는 미국의 원조경제에 의존하는 예속자본주의의 길을 걷지 않을 수 없었으며, 관료와 재벌이 유착된 천민자본주의, 관료자본주의는 한국경제의 기본적 속성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한국경제는 미국에 예속되었을 뿐 아니라 미국의 동북아 전략에 따라 한일국교정상화 이후 들어온 일본 자본에도 예속되었다. 이런 경제적 예속과 더불어 한국전쟁 중에 군사작전권까지 넘겨줘 대한민국은 사실상 절름발이 주권국가로 전락하고 말았다.
2) 전후의 경제모습
원조 물자 및 귀속 재산의 불하를 둘러싸고 관권과 밀착된 일부 재벌이 형성됨으로써 이들에 의한 생산의 집중과 이에 따른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불균형 현상이 나타났고, 이러한 과정에서 특혜와 관련된 기업가 정신의 타락 및 부조리 만연, 소비풍조의 확산, 3차 산업의 비대화 및 대외 의존성의 심화 등 여러 가지 부작용이 나타났다.
III. 사회상
1. 군부 및 상층부의 부정부패의 심화
동족상잔의 전쟁을 치른 나라에서 신성하다고 여겨지던 군대는 대표적인 부정부패의 소굴 중의 하나였다. 장교들의 사치, 향락, 타락, 부패의 만연, 비공식 뒷거래의 만연화, 군장성들의 사병 부식비 착복, 미국 원조물자의 악용, 정치자금 조달용 부정부패 등이 자주 발생했다. 대표적인 예는, 1956년 대선자금조달용으로 1955년에 일어난 “원면사건”이다. 이는 미국으로부터 월동용 군 피복과 군용 이불을 만들기 위해 도입된 미화 약 50만 달러어치의 원면을 군용으로 쓰지 않고, 상인들과 결탁해 이를 부정처분한 후 이 돈을 이기붕에게 헌납한 사건이다.
1954년~1961년까지 한국군에게 제공된 미국의 군사원조 총액은 13억 8천만 달러였다. 이러한 물적 자원의 확보에 따라 한국군은 이승만의 거대한 정치조직을 움직이는 데 필요한 정치자금의 주된 공급원이 되었다.
2. 전사회적으로 팽배하는 미국지향성
1950년대 중반의 대중가요는 유난히 미국 지향성을 드러냈는데, 이는 당시 사회적으로 일고 있던 ‘국민명랑화운동’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전쟁의 한과 슬픔을 벗어나 국민들이 명랑해지기위해서 미국에 원조를 받는 바가 큰 남한의 경우, 미국을 이상향으로 생각하는 국민정서가 지배적이었다.
3. 잡지들의 활약
1950년대는 잡지가 큰 힘을 발휘한 시기였다. 가장 대표적인 잡지는 <사상계>, <학원>
<희망>, <신태양>이었다. 청소년 대상 잡지인 <학원>을 읽었던 학생들이 대학에 들어와 <사상계>를 읽으며 예비 지식인층을 형성할 정도로 이 두 잡지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또한 문단의 권력으로 비유되는 <현대문학> 역시 <문학예술><자유문학>과 함께 간행되어 왕성한 창작활동을 전개하였다.
◈◈ 여기서 잠깐 ◈◈
이승만 정권이 자신의 권력기반을 다지기 위한 작업에 치중하며 미국에 의존한 원조정책을 중심으로 정권을 유지해 나갔다면, 북한의 상황은 어떠했을까?
◉ 북한의 정치변화
한국전쟁 이후 북한에서 일어난 가장 큰 정치적 변화는 박헌영과 남로당의 몰락이었다. 박헌영은 해방과 더불어 조선공산주의운동의 대표주자로 떠올랐고, 북한 정권수립 후 조선노동당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명실상부한 2인자였으며 김일성과 함께 한국전쟁을 이끈 주역이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분단으로 굳어지면서 박헌영의 ‘남조선 해방의 꿈’은 사라졌고 그의 위상도 추락하였다. 한국전쟁 과정에서 김일성의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박헌영, 무정, 허가이가 차례로 제거되면서 김일성의 지도권은 보다 확고해졌다.
◉ 북한의 경제변화
전쟁에 북한이 입은 추정 피해액 4천2백 억 원은 1949년 당시 북한 국민소득의 6배 내지 1953~1957년까지 5년 동안의 북한 전체예산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휴전과 함께 북한에 닥친 가장 주된 과제는 전쟁으로 입은 피해를 빠른 시일 내에 복구하는 일이었다. 북한은 휴전회담이 성사되자마자 곧바로 당 중앙위원회를 열어 전후 복구건설과 사회주의 경제건설의 방향 등을 토의 결정했다.
1953년 8월 5~9일 개최된 조선노동당 제6차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는 ‘중공업을 우선적으로 발전시키면서 동시에 경공업과 농업을 급속히 발전시킨다’는 전후 경제건설의 기본노선을 결정하는 한편, 전후 경제복구건설을 3단계로 나누어 추진하기로 방침을 세웠다.
제 1단계에서는 6개월~1년 안에 전후 복구건설을 위한 준비와 정리사업을 진행하고, 제2단계에서는 3개년 계획을 실시하여 경제를 전쟁 전인 1949년 수준으로 회복시키며, 제3단계에서는 제1차 5개년 계획을 실시하여 사회주의 공업화의 기초를 구축한다는 것이다.
* 1단계(1953년 8월~ 6개월)
-> 전후복구준비단계
* 2단계(1954년~1956년)
-> 인민경제복구발전 3개년계획이 본격으로 실시되었다. 기본과제는 파괴된 경제를 전쟁 전인 1949년 수준으로 복구하고 인민생황을 안정시키는 것이었다. 이 작업은 경제는 전쟁 전 수준으로 복구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해방 전부터 물려받은 식민지적 편파성을 극복하여 경제의 자립적 기반을 강화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이 기간 동안 사회주의적 개조를 위한 농업협동화 사업이 시작되었다.
3개년 계획은 공업생산을 2.6배로 늘리고 농업생산은 전쟁 전의 수준으로 향상시킨다는 의욕적인 목표를 세웠다. 이로써 공업생산은 1953년 대비 2.8배 증가하여 전쟁 전인 1949년보다 1.8배나 넘어서게 되었다. 이 가간 동안 농업 분야에서는 관개시설의 확장에 주력해 8만7천 정보의 관개면적이 늘어났고 양수 능력도 2.7배로 성장했다. 그 결과 1956년 곡물생산량은 시작연도보다 24%, 전쟁 전인 1949년보다 8%늘어났다.
이밖에 운수, 체신, 주택, 교육, 문화, 보건시설과 도시복구건설사업도 성공적으로 진행되어 국민소득은 전쟁 전보다 146%, 1954년 대비 2.1배로 증대되었다.
외부적으로는 소련과 중국 등 사회주의 형제 국가들의 다양한 지원으로 경제복구를 위한 물질적 재원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회주의 국가들은 1954년ㅂ터 점차 지원을 감소하여 1960년 이후에는 완전히 중단되었다. 다만 공장, 발전소, 철도복구 등 복구과제를 분담하는 형태로 북한을 지원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북한관련 내용은 '북한50년사'에서 발췌)
첫댓글 대~충 정리한 내용이에요. 병창선배님~ 출력을 못해 갈 것 같은데, 대신 몇 부 좀 출력해 주세요~ 부탁해용^^
굿~ 알겠슴다
훌륭했어~ 원더풀! 부라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