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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시청 국제협력팀/ 중국어 번역 담당자에게 의뢰한 중국 일조시 "포은정몽주선생" 자료가 도착 했다. 박승호 포항시장님의 특별 면담 주선으로 중국 일조시 부 비서관 일행 면담에서도 포은 정몽주선생에 대한 유적지 발굴이 중국 일조시 차원으로 진행 되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을 접했고, 국내에서도 발견되지 않은 자료임을 감안 긴급 입수하여 포항시청 국제협력팀에게 협조를 받아 거제됨을 알림니다.
이 지료는 이번 포은문화축제 기획도중 박태윤 팀장에 의해 발견되어 여러차례 수소문 끝에 번역본을 입수한 가운데 포은선생의 고향 영일(迎日) 특히, 태양을 숭배하는 사상이 중국과 일치하는 가운데 영일 고향에서도 해를 맞이하는 고장임을 강조하는 하는 부분이 이색적이다.
고향 영일(迎日)이 연오랑 세오녀의 고장이며, 바로 삼족오(三足烏)의 고장이 우연의 일치임을 반드시 감안하고 살펴 봐야만 할 것이다.
"한국대유(韩国大儒)"郑梦周: 명나라 신라인 집거지역 방문
최근 몇 년간 중국 일조시 도낙(涛洛-tao luo)진에 위치한 천대산(天台山)이 유구하고 신비로운 태양문화로 인해 국내외에 이름을 날리고 있다. 고고학자들의 깊은 연구에 따라 천대산을 노래한 수많은 문객들중 어디서 본 듯한 고려문인 정몽주라는 이름이 나타나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기재에 따르면 명나라 홍무년간(주원장시기) 정몽주선생이 중국 사행길에 일조 천대산 아래의 신라촌을 방문하여 세편의 중요한 시를 남겼다고 한다.
<일조현(日照县)>
海上孤城草树荒 最先迎日上扶桑 我来东望仍搔首 波浪遥望接故乡
<일조 천대산(日照天台山)>
天台飘渺渤海间 不纳凡人只见仙 幸得神女施发力 从此琅琊多一山
<천대산 안기사(天台山安期祠)>
饥餐紫霞渴饮露 无思无为神自渡 朝采仙药暮炼丹 不吐不纳登仙去
첫 번째 시에서 시인은 <산해경(山海經)>의 <塘沽上有扶桑,十日所浴>의 뜻을 인용하여 일조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하였고 바다 맞은편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보여주었다. 두 번째 시에서는 <죽서기년(竹书纪年)>의 여와가 하늘을 메워 바닷위의 선산을 낭야일대로 옮겼다는 전설을 인용하여 일조 천문대의 유래를 소개하였다.
이 전설은 현재 유네스코 산하의 민간예술국제단체 IOV 중국사이트에 수록되어 있다. 세 번째 시는 방선도(方仙道,도교의 전신)의 시조인 안기생(安期生)이 천대산에서 두루미를 타고 신선이 된 전설을 소개하였다. 이로 보아 그때 당시 태양문화연구와 관련된 일부 증거와 출처가 정몽주선생의 시구에서 유래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정몽주선생에 대하여
한국의 역사상 정몽주선생은 특별한 인물이다. 정몽주(서기1337-1392), 고려 영일현사람,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 이름은 “장주몽접(庄周梦蝶)”에서 유래되고 호는 공자의 “오불여로포(吾不如老圃)”에서 유래된 것이다.
정몽주선생은 조선 교려왕조 말기의 정치가, 외교가, 철학가이며 문학가로서 동방이학종사, 한국의 대유학자로 불리우고 있다. 정몽주선생은 한국문화에 큰 영향을 미치는 인물로 현재까지도 한국에는 포은학회, 포은종약원 등 전문연구기구들이 있다.
한국 영천시에는 정몽주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명종 8년(1553)에 설립된 임고서원이 있으며, 서원에는 정몽주선생의 “포은문집(圃隐文集)”, “지봉실기(芝峰实记)”, “성리군학(性理军书)” 등 200여권의 중요한 저서들이 소장되어 있다. 서원 입구측에 500여년 역사를 가진 은행나무가 있고 임고서원은 부래산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이 부래산은 중국 거현의 부래산과 이름이 같은바 우연인지, 포은선생이 생전에 부래산에 대해 특별한 정을 가진 것 때문인지 알수가 없다.
명나라시기 한중 양국의 이해관계가 밀접하고 교류가 빈번하였다. 한국의 유명한 철학가, 문학가로서 정몽주선생은 중국의 유교학, 이공학과 역사학을 연찬하여 한국의 일대 유학가로 되었다.
정몽주선생은 6차에 걸쳐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그중 3차 명태조황제를 면견하여 외교사명을 성공적으로 완성하고 유교문화를 조선에 보급하게 되었다. 1383년 고려국 내란 시 명나라의 출병계획에 앞서 정몽주선생은 아주 긴박한 시간 내에 위기를 무릅쓰고 황제에게 하승표(賀圣表)를 상주하여 양국의 긴장관계를 완화시키고 고려 사람들은 전쟁의 재난을 피하게 되었다. 2년 뒤, 정몽주선생은 또다시 외교 사절로 명나라로 가게 되었다.
이번 사행시 명나라에 대한 조공을 감면한것 외에 가장 중요한것은 고려국에서 명나라의 관복제도를 시행하는 허락을 받은 것이다. 지금까지도 한국의 전통 명절 시에는 명나라 관복의 풍채를 볼 수 있다.
포은선생은 학식이 깊고 공훈과 업적이 천추에 남아있으며 그의 강인하고 충절을 다하는 고상한 인격은 지금까지도 한국 국민들이 우러러 존경하고 있으며 그를 한국 역대 충신의 대표적인 인물로 삼고 있다.
정몽주선생이 일조시에 가게 된 연유
중국 당나라시기 한국은 신라왕조시기이다. 태화(서기827~서기835)전 산동연해지역에는 신라 인구를 노비로 매매하는 현상이 심각하였다.
당시 신라는 해마다 전국적으로 흉년에 허덕이면서 자식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등 비참한 국면이 나타나고, 팔려간 신라사람들은 해적들에 의해 다시 중국에 노비로 팔려가기도 하였다. 영태원년(서기765년) 당나라 평노치청의 초임 절도사 이정기(고구려인)가 등주, 래주, 해주,기주, 제주 등 연해지역을 점거하고 치청진의 할거세력을 키웠으며 해적들이 고려노비를 매매 하는 것을 방임하였다.
서기 819년, 당나라는 치청진 이씨의 할거세력을 평정후 산동연해지역의 신라인 매매행위를 금지시키기 시작하였다.
그후, 당나라정부는 전후로 서기 823년과 서기 828년에 두차례에 걸쳐 신라인 노비판매 금지령을 내리고 중국에 있는 신라인을 모두 귀국시키는 조치를 취하였다. 그러나 귀국해도 갈곳이 없는 일부 신라인들은 당나라에 남아 바다인근에서 생활하면서 산동연해지역의 신라교민 집거마을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중 일조시 동항구 도낙진 천대산아래에 신라촌과 신라사가 있었다. 신라촌 동측의 봉황산정에 오래된 은행나무가 있었는데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 나무는 제1대 당나라 신라인들이 심은것이며 산동연해지역의 어민들이 바다로 나가는 중요한 좌표이며 신라인들이 바다건너 고향을 바라보는 곳이였다고 한다. 아쉽게도 이 나무는 문화혁명시기에 훼손되었다.
일조는 옛날 거국(莒国)에 속하며 거국과 한국은 역사적으로 교류가 많았다. 그러나 거국의 눈부신 동이문화외에도 정몽주선생이 이곳을 방문하게 된것은 또다른 이유가 있었다.
한국학자들은 "중국대륙 산동성 일조현에 한 신라촌이 있는데 그곳의 선조는 한국의 영천시 사람이며 신라시기(당나라) 중국의 동부 연해(일조현)지역에 노예로 팔려가 그곳에서 몇 세대를 살았다.
포은 정몽주선생이 중국 사행길에 일조현 신라촌에 탐방한적이 있다"라고 기재하였다.
역사적으로 정몽주선생을 "충성과 절의"의 대표인물이라고 한다. 정몽주선생은 중국 사행기간에 신라인이 집거하는 남쪽의 일조에서 북쪽의 봉래까지 모두 방문하여 신라교민을 위해 좋은 일을 많이 했으며 고향을 그리는 시를 많이 지었다. 정몽주선생의 중국활동에 대해 유관 연구문헌에는 "고려말엽 중신 유학대사 정몽주는 외교사절로 수차 중국을 방문하고 수로를 이용하여 등주에서 상륙하였으며, 대량의 산동반도를 칭송하는 시와 노래를 지었다.
당시 산동을 주제로 한 시와 노래로는 "산동노인(山东老人)","제성현문소(诸城县闻箫)", 즉목현(即墨县), 봉래각(蓬莱阁), 봉래력·시한서상(蓬莱驿·示韩书状), 사문도(沙门岛), 용산역(龙山驿), 일조현(日照县), 내주해신묘(莱州海神庙), 교수현별교유서선(胶水县别教谕徐宣), 4월1일 고밀현문앵(四月一日高密县闻莺) 등이 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정몽주와 일조 신라촌
현재 중국내에서 정몽주선생이 일조 신라촌을 방문했던 흔적들을 찾아보기 힘들지만 한국에서는 지금까지도 주요 이슈가 되고 있다.
일부 신라후손들이 일조에 시조를 찾아오거나 인터넷에 기사를 발표하여 논의하기도 한다. 이직이라는 한국인이 쓴 기사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조상들의 말에 의하면 나의 선조는 한국 영천시 사람이며 신라시기(당나라) 중국의 동부연해지역에 노예로 팔려가 그곳에서 몇 세대를 살았다. 당송년간 일조는 제염소와 염관이 소재하여 낭야일대에서 풍요롭고 번화한 지역으로 신라촌 인구가 가장 많았다.
명홍무년간 포은 정몽주선생이 외교사절로 중국의 일조현에 오게 되었고 그때 당시 나의 조상은 신라촌장이었으며 포은선생과 수행원들이 신라촌에 머물었다.
당시 한족과 한국인이 장기간 섞여 사는 형태여서 산동연해지역에 이러한 전형적인 신라촌은 보기 드물었다.
신라촌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수가 없고 위치는 일조현 남쪽의 큰 소금선창과 부두근처에 있었다고 한다. 부두와 멀지 않은 곳에 작은 산이 하나 있었는데 이 산은 옛날 중국인들이 태양신에 제사를 지내는 곳이고 신라촌은 그중 한 산골짜기에 위치하며, 그곳 사람들은 천일염을 만들고 고기를 잡으며 농업으로 위주로 살았다고 한다".
이로 보아 이직선생이 말하는 이 곳이 바로 일조시 도낙진 천대산의 탕곡인것이 분명하다. 지금까지도 이 산위에는 신라사 유적지가 일부 남아있다. "한성(汉城)의 꽃"이라는 한국 작가는 "고향 어른들의 소개에 따르면 명홍무년간 정몽주선생은 산동 연해일대의 천대산 아래의 신라촌과 신라사를 방문하였고, "일조현"이라는 시외에도 두편의 시를 더 지었다고 한다"라는 글을 낸적이 있다. 이것이 바로 앞에서 언급한 세편의 일조에 관한 시편이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정몽주선생은 일조 천대산 신라촌에서 세가지 큰 일을 해냈다고 한다,
첫째, 신라촌 맞은켠의 신라사 부근에 신라서원을 설립하여 신라촌 유사이래 첫 학교가 생기게 되었다.
둘째, 뿌리를 찾고 대를 이어가기 위해 정몽주선생은 일조의 신라촌에서 젊은 후손들을 데리고 귀국하였다.
셋째, 신라촌 동측 봉황산위의 백과(은행)나무아래에 "일조현"이라는 시구를 새긴 비석을 세웠다. 고향이 영일현이라는 우연함과 이국타향의 태양을 숭배하는 같은 정서로 인해 정몽주선생은 "最先迎日上扶桑" 등과 같은 좋은 시구들을 지어냈다.
일조 신라촌의 흥망성쇠
고려 유학가 정몽주선생이 일조 신라촌에 머물었던 시기는 명나라 홍무년간이다. 이는 일조 일대의 신라촌 역사가 당나라시기부터 명나라 초기까지 지속되었다는것을 말해주며 산동연해지역에서는 기적이라고 볼수 있다. 그러나 이국타향에서 수백년을 생존한 일조 신라인역사의 흔적이 명나라시기에 사라진것은 무었때문인지, 그 시기의 사회적 불안요소와 관련되는 것인지?
역사자료에 의하면 명나라 건문년간(1399~1402) 연나라 왕 주체(朱棣)가 4년간 정난의 변(靖难之役)이라는 전쟁을 일으켜 거주(莒州)는 폐허상태에 이르렀다.
명나라 보전인(莆田人) 정운은 "여주를 지나는 소감(过莒有感)"에 "황량한 40리길에 두세가구의 농가뿐이다"라고 적어 당시 거주의 삭막함을 설명해주었다. 최근에 발견된 불교계를 떠들썩하게 한 "해곡진씨 석봉사 재건비문(海曲秦氏石凤寺重修碑记)"에는 “연건문년간에 산불이 갑자기 일어나 경서사찰이 한순간에 훼손되었다”라고 적혀있어 일조 신라촌도 그때 당시 전쟁과 산불로 인해 사라질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본다.
그후 이곳으로 이전해온 후세(일조 진씨)가 신라사 유적지에 신라사 석상을 이용하여 석봉사를 지었다고 한다. 놀라운 것은 1년전 천대산 석봉사 유적지에서 사람들은 온전하지 않은 이 진귀한 석상을 발견했다고 한다. 초보적인 감정을 거쳐 이 석상은 당나라초기 석각 조각상이며 이로부터 당나라 천대산에 신라사와 신라촌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얼마전 한 대만 진씨는 “상원촌인(上元村人)”이라는 필명으로 부친의 유언을 인용하여 이런 기사를 낸적이 있다. “천대산의 망선간 노모동굴 아래에 당나라 신라인이 지은 신라사라는 사철이 있고 사철 한쪽에 명나라 초기 고려 유학가 정몽주가 세운 신라서원이 있었다.
그러나 사철과 서원은 건문년간에 산불로 없어지고 진씨가 재건하여 석봉사라고 명칭하고 이곳 향불이 왕성하여 1년에 한번씩 열리는 석봉사묘회는 대낙진의 가장 성대한 행사였다. 그러던중 어느 해의 묘회에서 나무칼로 살인하는 비극이 발생하여 그때로부터 석봉사는 부진하여 청나라말기 석봉사와 노모동굴이 거의 폐허로 되었으나 거국(莒国)의 군주가 제사를 지내고 석봉사를 재건하여 비석을 세웠으며 정몽주가 “일조현”이라고 비문을 새겼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청나라 말기 일조 교안사건시 독일군이 천대산의 하원촌에서 철수시 수십대의 마차를 이용하여 망선간의 거국군주 제사비석과 석봉사 재건비석 및 정몽주가 비문을 세긴 “일조현” 등 비석을 실어갔다고 한다. 그 당시 어떤 사람이 독 황실 개인박물관에서 이 진귀한 문물들을 직접 보았으나 그 뒤로는 행방불명이라고 한다.”
행방불명이 된 것은 이러한 진귀한 문물뿐만 아니라 천대산에서 수백년간 존재한 신라촌 역시 일찍이 명나라 중기에 사람들의 시선에서 갑자기 사라진 것이다.
한중양국은 지리적으로 가깝고 문화적으로 비슷하여 문화교류역사는 중국의 수, 당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양 국민은 서로 배우고 경험을 교환하면서 눈부신 문화를 창조하였다.
신라사, 신라촌에서 이국의 문학가 정몽주선생까지 이는 반세기를 이어온 한중 양국의 교류사이다. 이러한 역사속에는 바다 맞은편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바다를 사이둔 양국민의 정이 담겨져 있을뿐 만 아니라, 흥성한 시기에서 전쟁까지, 그리고 지금까지 전해져온 시편들과 이야기들이 있다. 이 모든 것들은 일조의 천대산에 지울수 없는 흔적들을 남겼다.
<포항시청 국제협력팀 /송순애 중국어 번역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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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한국의 역사상 정몽주선생은 특별한 인물이다. 정몽주(서기1337-1392), 고려 영일현(지금의 포항)사람,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 이름은 “장주몽접(庄周梦蝶)”에서 유래되고 호는 공자의 “오불여로포(吾不如老圃)”에서 유래된 것이 ... 圃隱이 논어에 나오는-오불여노포(吾不如老圃)”...즉 나는 나이먹은 농부보다 못하다....라는 말에서 나왔다는 걸 새로 공부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