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초구 문화유적 돌아보기
◇ 원지동 석불입상 및 석탑 : 서초구 원지동 362-4, 5 번지 (미륵당 옆 남쪽), /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93호
- 원터[院趾]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 미륵불
원지동에서 청계산 등산로로 진입하는 고속도로 굴다리 입구 오른편에 13㎡ 규모의 미륵당(彌勒堂)과 3층 석탑이 있다.
미륵당 안에는 높이 2m 정도의 백색입상(白色立像)인 미륵불이 있고, 장구, 목탁, 제기(祭器) 등이 갖추어져 있다. 이 미륵불은 원터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1년에 한 번씩 주민들이 이곳에서 동제(洞祭)를 지냈다.
원래 이 미륵불은 신비한 영험(靈驗)이 있어서 여기에 치성을 드리면 길흉화복을 계시한다 고 널리 알려지자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마차를 동원하여 미륵불을 반출하려다가 실패하였다. 사람들이 이곳 미륵불의 영험을 믿고 계속 몰려들자 일본인들이 미륵불의 배꼽을 쪼아냈는데, 그 후부터 미륵불은 영험한 능력을 상실했다고 전한다.
◇ 원지동 원터 [院基] : 서초구 원터6길 3(원지동 400) (원터마을 쉼터 앞)
- 조선시대에 출장하는 관리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던 원터[院基]
청계산 제1야영장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원터"가 위치하는데 한자로 "원기(院基)"라고도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공무(公務)로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숙식을 마련해 주기 위하여 교통요충지에 역(驛)과 원(院)을 설치하였다. 이곳에는 조선시대에 잠원나루에서 말죽거리를 거쳐 판교 이남으로 왕래하는 사람들을 위한 큰 원(院)이 있었다.
원지동 400번지 일대의 원(院)은, 1970년대에 취락구조 개선사업으로 석축(石築)은 없어지고, 비닐하우스가 세워져 있었다. 이 원터마을은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됨에 따라 주민들의 일부가 이전하였고, 옛 농촌주택은 현대식 주택으로 바뀌었다.
한편 원터에는 현재 수령 약 255년으로 추정되는 갈참나무(높이 21m)와 굴참나무(높이 27m) 두 그루가 서있다. 이 나무들은 1972년에 서울시 보호수로 지정되어 주말에 청계산을 찾는 많은 시민들의 휴식처와 만남의 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 원지동 고인돌 유적지 : 서초구 원지동 336-2번지 (경부고속도로변)
- 청동기 시대의 남방식 고인돌이 집단으로 위치했던 곳
1986년 「한강유역 서울 원지동 지석묘 조사연구, - 이형구 교수」 연구자료에 의하면 1984년 원지동 경부고속도로변에서 선돌(立石)과 고인돌군(支石群) 4개소가 발견되었으며, 원터마을 미륵당 야산에도 선사시대 지석묘와 석기 유물 및 일정 간격으로 열을 지어 있는 많은 괴석(塊石)들이 발견되었다고 하였다. 또한 미륵당 북쪽 150m 지점의 밭 가운데서도 7기(基)의 지석묘 군이 발견되었다.
원지동 미륵당에서 남쪽으로 약 100m, 고속도로 동쪽 20m 지점에서는 선돌 1기가 발견되었으며, 인근에 지석묘로 보이는 돌무리가 계속 확인되었다고 전한다.
원래 한강유역의 고인돌은 북방식(北方式) 지석묘가 주류를 이루고 있으나, 원지동 고인돌은 남방식(南方式) 형태의 지석묘로 추정되어 학계에 많은 관심을 보였는데 경부고속도로 확장공사로 훼손되었다.
◇ 충현정묘(忠賢旌廟) : 서초구 우면동 49번지 (암산 경로당 부근)
- 고려말의 충신 석탄 이존오 선생의 사당
고려 공민왕때 석탄(石灘) 이존오(李存吾, 1341년∼1371년) 선생은 정몽주(鄭夢周) 선생과 함께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올랐다. 언관(言官)을 지내던 26세 때 중 신돈(辛旽)이 자신의 권세를 이용하여 국정을 그르치고 왕과 용상에 나란히 앉아 있었으므로 그 무례함을 정면으로 힐책하자 신돈이 황급히 아래로 내려앉은 일이 있었다.
이 일로 이존오 선생은 신돈에 의해 좌천(左遷)되어 귀양가게 되었고, 은둔생활을 하다가 31세에 별세하였다. 이에 공민왕은 그의 충성심을 깨닫고, 성균관 대사성으로 추증(追贈)하였다. 저서로는 『석탄집(石灘集) 두 권이 있다.』
현재 우면동 암산경로당 뒤편에 있는 충현정묘에는 조선 후기 숙종 때(1714) 부여군에서 이전해 온 석탄 이존오 선생의 충신 정문(旌門)과 조선초 왕자의 난 때 공을 세운 그의 아들인 경절공(景節公) 이래(李來)도 함께 모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