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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四十九回 公子鮑厚施買國 齊懿公竹池遇變
제49회: 공자포가 후하게 베풀어 나라를 사고 제의공이 죽지에서 변을 당하다.
話說,士會同壽餘濟了黃河,望東而行。未及里許,只見一位年少將軍,引著一隊軍馬來迎,在車上欠身曰:「隨季別來無恙?」士會近前視之,那將軍姓趙名朔,乃趙相國盾之子也。三人下車相見。士會問其來意,朔曰:「吾奉父命,前來接應吾子還朝,後面復有大軍至矣。」當下一聲砲響,車如水,馬如龍,簇擁士會同壽餘入晉去了。秦康公使人隔河瞭望,回報康公,大怒,便欲濟河伐晉。前哨又報:「探得河東復有大軍到來,大將乃是荀林父郤缺二人。」西乞術曰:「晉既有大軍接應,必不容我濟河,不如歸也。」乃班師。
한편, 사회와 위수여가 황하를 건넌 후 동쪽을 향하여 갔다. 일 리도 못 가서 한 소년 장군이 한 떼의 군마를 이끌고 영접하러 나온 것을 보았다. 그가 전차 위에서 몸을 굽히며 말하기를, “수계(사회)께서는 그간 별고 없으신지요?” 했다. 사회가 가까이 가서 보니, 소년 장군은 성이 조(趙)이고 이름이 삭(朔)인 상국 조돈의 아들이었다. 세 사람이 수레에서 내려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사회가 온 뜻을 물으니 조삭이 말하기를, “제가 부친의 명을 받들어 돌아오는 수계를 영접하기 위해 나왔습니다. 뒤에 대군이 와 있습니다.” 했다. 그때 포성이 한번 울리고 수많은 수레와 말들이 물밀듯이 들이닥쳐 사회와 위수여를 태우고 진(晉)나라로 갔다. 진강공이 사람을 시켜 황하의 건너편에서 멀리 바라보게 하니 그 사람이 돌아와, 사회가 돌아간 것을 보고했다. 진강공이 크게 노하여 황하를 건너 진(晉)나라를 치려고 하는데, 정탐병이 또 보고하기를, “탐지해 보니, 황하 건너 동쪽 편에 또 다른 대군이 도착했는데 대장이 곧 순림보와 극결이라고 합니다.” 했다. 서걸술이 말하기를, “진(晉)나라가 이미 대군을 보내 지원하니 틀림없이 우리가 황하를 건너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돌아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진강공이 회군했다.
荀林父等見秦軍已去,亦還晉國。士會去秦三載,今日復進絳城,不勝感慨。入見靈公,肉袒謝罪。靈公曰:「卿無罪也。」使列於六卿之間。趙盾嘉魏壽餘之勞,言於靈公,賜車十乘。秦康公使人送士會之妻孥於晉,曰:「吾不負黃河之誓也!」士會感康公之義,致書稱謝,且勸以息兵養民,各保四境。康公從之。自此秦晉不交兵者數十年。周頃王六年,崩,太子班即位,是為匡王。即晉靈公之八年也。時楚穆王薨,世子旅嗣位,是為莊王。
순림보 등은 진(秦)나라 군사가 물러나자 그들도 역시 진(晉)나라 국도(國都)로 돌아왔다. 사회가 3년만에 진(秦)를 떠나 오늘은 다시 강성(絳城)에 돌아와서 감개무량함을 이길 수 없었다. 입조하여 진영공을 뵙고 웃통을 벗어 죄를 용서해 달라고 했다. 진영공이 말하기를, “경에게는 죄가 없소.” 하고, 육경의 반열에 서도록 했다. 조돈이 위수여의 공로를 칭찬하고 영공에게 말하자 그에게 전차 10대를 하사했다. 진강공(秦康公)은 사람을 시켜 사회의 처자를 진(晉)나라로 보내주면서 말하기를, “나는 황하에 맹세한 것을 어길 수는 없다.”라고 했다. 사회는 진강공의 의리에 감격하여 편지를 써서 감사했다. 그리고 군사들을 쉬게 하고 백성들을 돌보면서 사방 변경을 굳게 지키라고 조언했다. 강공이 사회의 말을 좇아 이로부터 진(秦)나라와 진(晉)나라는 수십 년간 서로 싸우지 않았다. 주경왕(周頃王) 6년(기원전 613년)에 경왕이 죽고, 태자 반(班)이 즉위하니, 이가 광왕(匡王)이다. 이때가 진영공(晉靈公) 8년이었다. 그해에 초나라 목왕(穆王)이 죽고 세자 여(旅)가 자리를 이으니, 이가 초장왕(楚莊王)이다.
趙盾以楚新有喪,乘此機會,思復先世盟主之業,乃大合諸侯於新城。宋昭公杵臼、魯文公興、陳靈公平國、衛成公鄭、鄭穆公蘭、許昭公錫我,並至會所。宋、陳、鄭三國之君,各訴前日從楚之情,出於不得已。趙盾亦各各撫慰,諸侯始復附於晉。惟蔡侯附楚如故,不肯赴會。趙盾使郤缺引軍伐之,蔡人求和,乃還。齊昭公潘,本欲赴會,適患病,未及盟期,昭公遂薨。太子舍即位。其母乃魯女子叔姬,謂之昭姬。昭姬雖為昭公夫人,不甚得寵。世子舍才望庸常,亦不為國人所敬重。公子商人,齊桓公之妾密姬所生,素有篡位之志,賴昭公待之甚厚,此念中沮,欲候昭公死後,方舉大事。
조돈은 초나라가 상을 당한 틈을 타서 앞세대의 맹주 자리를 찾기 위해 제후들을 신성(新城)에 모이게 했다. 송소공(宋昭公) 저구(杵臼), 노문공(魯文公) 흥(興), 진영공(陳靈公) 평국(平國), 위성공(衛成公) 정(鄭), 정목공(鄭穆公) 난(蘭), 허소공(許昭公) 석아(錫我)가 모두 회맹장에 도착했다. 송(宋), 진(陳), 정(鄭) 삼국의 제후들은 전날에 초나라를 따른 사정이 부득이하였음을 호소했다. 조돈이 각각 위로하니, 제후들이 다시 당진 편에 서기 시작했다. 오직 채후만은 여전히 초나라에 붙어 회맹에 참석하지 않았다. 조돈이 극결을 시켜 군사를 이끌고 가서 정벌하니 채후가 화의를 청하여 이에 극결이 돌아왔다. 제나라 소공(昭公) 반(潘)은 본래 회맹에 참석하기로 했으나 그때 마침 병이 나서 회맹에 참석하지 못했고, 마침내 죽었다. 태자 사(舍)가 즉위했다. 그의 모친은 노나라 여자인 숙희(叔姬)인데, 사람들이 소희(昭姬)라고 불렀다. 소희는 비록 제소공의 부인이었지만 총애를 받지 못했고, 세자 사(舍)도 재주와 명망이 범상했기 때문에, 나라 사람들이 존중하지 않았다. 공자 상인(商人)은 제환공의 첩 밀희(密姬)의 소생인데, 평소에 군주의 자리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나 제소공(齊昭公)이 상인을 아주 후하게 대했기 때문에 그 생각을 잠시 묻어 두고 소공이 죽기를 기다렸다가 대사를 도모하려고 했다.
昭公末年,召公子元於衛,任以國政。商人忌公子元之賢,意欲結納人心,乃盡出其家財,周卹貧民,如有不給,借貸以繼之,百姓無不感激。又多聚死士在家,朝夕訓練,出入跟隨。及世子舍即位,適彗星出於北斗,商人使人占之。曰:「宋、齊、晉三國之君,皆將死亂。」商人曰:「亂齊者,非我而誰?」命死士即於喪幕中,刺殺世子舍。商人以公子元年長,乃偽言曰:「舍無人君之威,不可居大位,吾此舉為兄故也。」公子元大驚曰:「吾知爾之求為君也久矣,何乃累我?我能事爾,爾不能事我也。但爾為君以後,得容我為齊國匹夫,以壽終足矣!」商人即位,是為懿公。
제소공은 말년에 위(衛)나라에서 공자 원(公子元)을 불러 국정을 맡겼다. 공자 상인은 공자 원의 현명함을 시기하여, 자기도 인심을 얻기 위하여 재산을 모두 털어 빈민들을 두루 구제했다. 구제를 계속할 수 없자 빚을 내서까지 빈민들을 구제하니, 백성들이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많은 자객을 집에다 모아 놓고 아침저녁으로 훈련을 시켜서 출입할 때 데리고 다녔다. 세자 사가 즉위하자 그때 마침 북두칠성 사이에 혜성이 나타났다. 상인이 사람을 시켜 점을 쳐보게 하니, 말하기를, “송, 제, 진(晉) 세 나라의 군주들은 모두 장차 변란 중에 죽을 징조입니다.” 했다. 상인이 말하기를, “제나라에서 변란을 일으킬 사람이 나 말고 누구겠는가?” 하고, 즉시 자객들을 시켜 상막(喪幕) 안에서 세자 사를 찔러 죽였다. 상인은 공자 원이 연장이므로 이에 거짓으로 말하기를, “세자 사는 군주의 위엄이 없어 군주 자리에 앉힐 수 없었습니다. 나의 이번 거사는 형님을 위한 것입니다.” 하니, 공자 원이 크게 놀라 말하기를, “나는 네가 오랫동안 군주 자리를 노려 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어찌 나에게 책임을 떠넘기려고 하느냐? 나는 능히 너를 모실 수 있지만 너는 나를 모실 수 없다. 단지 네가 군주가 된 후에 나를 용납하여 제나라의 필부로 여생을 마치게 해 주면 족하다!” 하니 상인이 즉위했다. 이가 제의공(齊懿公)이다.
子元心惡商人之所為,閉門托病,終身入朝。此乃是公子元的好處。且說昭姬痛其子死於非命,日夜悲啼。懿公惡之,乃囚於別室,節其飲食。昭姬陰賂宮人,使通信於魯。魯文公畏齊之強,命大夫東門遂如周,告於匡王,欲借天子恩寵,以求釋昭姬之囚。匡王命單伯往齊,謂懿公曰:「既殺其子,焉用其母,何不縱之還魯,以明齊之寬德?」懿公諱弒舍之事,聞「殺子」之語,面頰發赤,嘿然無語。單伯退就客館。懿公遷昭姬於他宮,使人誘單伯曰:「寡君於國母未之敢慢。況承天子降諭,敢不承順?吾子何不謁見國母,使知天子眷顧宗國之意?」
공자원은 마음속으로 상인이 한 짓을 미워하여 문을 닫고 병을 핑계하여 평생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공자 원의 좋은 점이었다. 한편 소희(昭姬)는 그 아들이 비명에 죽은 일을 슬퍼하여 밤낮으로 흐느껴 울었다. 이에 별실에 가두고 음식을 마음대로 주지 못하게 했다. 소희가 몰래 궁인들에게 뇌물을 주어 편지를 노나라에 보냈다. 노문공은 제나라의 강함을 두려워하여 대부 동문수(東門遂)를 주나라에 보내 광왕(匡王)에게 고하여, 천자의 은총을 빌려 소희를 감옥에서 석방하려고 했다. 주광왕은 선백(單伯)을 제나라에 보내 제의공에게 말하기를, “이미 그 아들을 죽이고 어찌 그 모친까지 감옥에 가둘 수 있단 말인가? 어찌하여 소회를 석방하여 노나라로 돌려보내 제나라의 관대함을 보여주지 않는가?” 하니, 제의공이 태자 사를 시해한 일을 꺼리던 중에 세자를 죽였다는 말을 듣고 뺨이 붉어지며 아무 말도 대꾸하지 못하였다. 선백이 물러나 객관으로 갔다. 제의공이 소희를 다른 궁궐 로 옮겨 놓고, 사람을 시켜 선백을 달래어 말하기를, “저희 군주께서는 국모에게 감히 태만하지 않습니다. 하물며 천자께서 유지를 내리시니 어찌 감히 따르지 않겠습니까? 사자께서는 저희 국모를 뵙고 천자께서 동성의 제후국(노나라)을 돌보아 주신다는 것을 어찌 알게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했다.
單伯只道是好話,遂駕車隨使者入宮謁見昭姬。昭姬垂涕,略訴苦情,單伯尚未及答,不虞懿公在外掩至,大罵曰:「單伯如何擅入吾宮,私會國母,欲行苟且之事耶?寡人將訟之天子!」遂並單伯拘禁,與昭姬各囚於一室。恨魯人以王命壓之,興兵伐魯。論者謂懿公弒幼主,囚國母,拘天使,虐鄰國,窮凶極惡,天理豈能容乎?但當時高國世臣,濟濟在朝,何不奉子元以聲商人之罪,而乃縱其凶惡,絕無一言?時事至此,可嘆矣!有詩云:「欲圖大位欺孤主,先散家財買細民;堪恨朝中綬若若,也隨市井媚兇人!」
선백은 다만 좋은 뜻으로 하는 말인 줄 알고, 즉시 수레를 몰아 사자를 따라 입궁하여 소회를 알현하였다. 소희가 눈물을 흘리며 간략하게 억울한 심정을 호소하였다. 선백이 아직 대답하기도 전에, 뜻밖에 제의공이 밖에서 갑자기 나타나며 큰소리로 욕하기를, “선백이 어찌 제멋대로 내 궁궐로 들어와 국모와 몰래 만나 구차한 일을 벌이려고 하는 것인가? 과인은 장차 이 일을 천자께 고발하리라!” 하고 마침내 선백을 구금하고, 소희와 각각 한 방에 가두었다. 제의공은 노나라가 왕명으로 자기를 압박한 것을 괘씸하게 여겨 군사를 일으켜 노나라를 쳤다. 후세의 사람들이 논하기를, 제의공은 어린 군주를 죽이고, 국모를 감옥에 가두었으며, 천자가 보낸 사자를 구속했을 뿐만 아니라 이웃 나라를 침략했으니, 진실로 극악무도한 사람인데 하늘이 어찌 그를 용납했는지 모를 일이라고 했다. 다만 그 당시 고씨(高氏)와 국씨(國氏) 등의 세신(世臣)들이 모두 조정에 있었는데 어찌하여 공자 원을 받들어 상인의 죄를 성토하지 않고, 그 흉악함을 내버려 두고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지, 그때 일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가히 탄식할 일이라고 했다. 시를 지어 이르기를, “군주의 자리를 도모하여 어린 임금을 속이고, 먼저 가재를 털어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을 샀다. 슬프다, 조정의 대신들은 꼼짝을 못하고, 그대들 역시 시정 사람들처럼 흉악한 자에게 아첨했구나!” 했다.
魯使上卿季孫行父如晉告急。晉趙盾奉靈公合宋、衛、蔡、陳、鄭、曹、許共八國諸侯,聚於扈地,商議伐齊。齊懿公納賂於晉,且釋單伯還周,昭姬還魯,諸侯遂散歸本國。魯聞晉不果伐齊,亦使公子遂納賂於齊以求和。不在話下。卻說,宋襄公夫人王姬,乃周襄王之女兄,宋成公王臣之母,昭公杵臼之祖母也。昭公自為世子時,與公子卬、公孫孔叔、公孫鐘離三人,以田獵遊戲相善;既即位,惟三人之言是聽,不任六卿,不朝祖母,疏遠公族,怠棄民事,日以從田為樂。司馬樂豫知宋國必亂,以其官讓於公子卬。
노나라가 상경(上卿) 계손행보(季孫行父)를 진(晉)나라로 보내어 위급함을 고했다. 진(晉)나라 조돈은 진영공을 모시고 송(宋), 위(衛), 채(蔡), 진(陳), 정(鄭), 조(曺), 허(許) 여덟 나라 제후들을 호(扈) 땅에 모이게 하여 제나라를 칠 일을 상의했다. 제의공이 진(晉)나라에 뇌물을 바치고, 선백을 석방하여 주나라로 돌아가게 하고, 소희는 노나라로 돌려보냈다. 제후들은 곧 해산하여 본국으로 돌아갔다. 노나라는 진(晉)나라가 제나라를 정벌하지 않자 공자수(公子遂)를 사자로 보내어 뇌물을 제나라에 바치고 화의를 청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한편 송양공의 부인 왕희(王姬)는 즉 주양왕의 누이로서 송성공(宋成公) 왕신(王臣)의 모친이며 송소공(宋昭公) 저구(杵臼)의 할머니다. 송소공이 세자였을 때, 공자앙(公子卬), 공손공숙(公孫孔叔), 공손종리(公孫鍾離) 세 사람과 사냥을 다니며 같이 즐겨 놀아서 서로 사이가 좋았다. 이미 즉위한 후에 송소공은 오직 세 사람의 말만 듣고 여섯 대신들에게 나라의 일을 맡기지 않았고, 조모에게 문안드리지 않았으며, 공족(公族)들을 멀리하고, 백성들의 일을 돌보지 않으며, 매일 사냥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다. 사마(司馬) 낙예(樂豫)는 송나라에 틀림없이 변란이 일어날 것을 알고 그의 관직을 공자앙에게 양보했다.
司城公孫壽亦慮禍及,告老致政,昭公即用其子蕩意諸,嗣為司城之官。襄夫人王姬老而好淫,昭公有庶弟公子鮑,美艷勝於婦人,襄夫人心愛之,醉以酒,因逼與之通,許以扶立為君。遂欲廢昭公而立公子鮑。昭公畏穆襄之族太盛,與公子卬等謀逐之。王姬陰告於二族,遂作亂,圍公子卬公孫鐘離二人於朝門而殺之。司城蕩意諸懼而奔魯。公子鮑素能敬事六卿,至是,同在國諸卿,與二族講和,不究擅殺之事。召蕩意諸於魯,復其位。公子鮑聞齊公子商人,以厚施買眾心,得篡齊位,乃效其所為,亦散家財,以周給貧民。
사성(司城) 공손수(公孫壽) 역시 화가 자신에게 미치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늙었다고 고하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송소공이 공손수의 아들 탕의제(蕩意諸)를 써서 사성의 관직을 물려받게 하였다. 송양공의 부인 왕희는 나이가 들었지만 음탕한 여자였다. 송소공에게는 공자포(公子鮑)라고 하는 서제(庶弟)가 있었는데 용모가 여자보다 더 예뻤다. 송양공의 부인이 마음속으로 사랑하여 술을 먹여 취하게 한 후에 핍박하여 통정했다. 공자포를 송나라 군주의 자리에 앉히겠다고 약속하고 송소공을 폐하고 공자포를 세우려고 했다. 송소공은 송목공과 송양공의 종족들이 너무 번창하여 두려움을 느껴, 공자앙과 모의하여 그들을 나라 밖으로 몰아내려고 했다. 왕희가 이 사실을 몰래 두 종족들에게 말하니 마침내 내란이 일어났다. 두 종족들은 공자앙과 공손종리를 조문 앞에서 살해했다. 이에 사성(司城) 탕의제는 두려워서 노나라로 달아났다. 공자포는 평소에 송나라의 육경(六卿)들을 높이 받들어서 이에 이르러 나라 안의 경들과 두 종족들을 화해시켜 함부로 서로 죽이지 않도록 힘썼다. 공자포는 송소공에게 권하여 탕의제를 노나라에서 불러와 그의 관직을 돌려주도록 했다. 공자포는 제나라의 공자 상인(商人)이 백성들에게 후하게 베풀어 그들의 마음을 산 후에 제나라 군주 자리를 찬탈했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도 즉시 그를 본받아 역시 가산을 털어 빈민들을 구제했다.
昭公七年,宋國歲飢,公子鮑盡出其倉稟之粟,以濟貧者。又敬老尊賢,凡國中年七十以上,月致粟帛,加以飲食珍味,使人慰問安否。其有一才一藝之人,皆收致門下,厚糈管待。公卿大夫之門,月有饋送。宗族無親疏,凡有吉凶之費,傾囊助之。昭公八年,宋復大飢,公子鮑倉廩已竭,襄夫人盡出宮中之藏以助之施,舉國無不頌公子鮑之仁。宋國之人,不論親疏貴賤,人人願得公子鮑為君。公子鮑知國人助己,密告於襄夫人,謀弒昭公。襄夫人曰:「聞杵臼將獵於孟諸之藪,乘其駕出,我使公子須閉門,子帥國人以攻之,無不克矣。」鮑依其言。
소공 7년 송나라에 기근이 들자 공자포가 그의 창고에 있던 곡식을 모두 내놓아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했다. 또한 노인을 높이고 현자를 존경하여 나라 안에 70살 이상이 된 노인은 매월 곡식과 비단을 주고, 진기하고 맛있는 음식을 더해 주며 사람을 시켜 안부를 묻고 위문했다. 그 밖에 한 가지 재능이나 기술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자기 문하에 모이게 하여 음식을 후하게 차려 대접했다. 또한 매월 공경대부들의 집 앞으로 음식을 보내고 친소를 불문하고 종족들의 경조사에는 재산을 털어 도왔다. 소공 8년에 송나라에 다시 큰 기근이 닥쳤으나 공자포의 창고는 이미 비어 있었다. 송양공 부인(왕희)이 궁중에 보관하고 있던 것을 내어 그가 베풀도록 도왔다. 온 나라 사람들이 공자포의 인자함을 칭송하게 되었다. 송나라 사람들은 친소와 귀천을 가리지 않고 사람마다 공자포가 군주가 되기를 원했다. 공자포는 나라 사람들이 자기를 돕는 것을 알고, 송양공 부인에게 송소공을 죽일 모의를 밀고했다. 송양공 부인이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저구(송소공)가 장차 맹제(孟諸)의 늪으로 사냥을 나간다고 하니, 그 수레가 나가는 것을 틈타 내가 공자수(公子須)를 시켜 성문을 닫게 하겠다. 너는 나라 사람들을 거느리고 그를 공격하면 못 이길 리가 없을 것이다.” 하니, 공자포가 그 말을 따랐다.
司城蕩意諸,頗有賢名,公子鮑素敬禮之。至是,聞襄夫人之謀,以告昭公曰:「君不可出獵,若出獵,恐不能返。」昭公曰:「彼若為逆,雖在國中,其能免乎?」乃使右師華元,左師公孫友居守。遂盡載府庫之寶,與其左右,以冬十一月望孟諸進發。纔出城,襄夫人召華元公孫友留之宮中,而使公子須閉門。公子鮑使司馬華耦號於軍中曰:「襄夫人有命:『今日扶立公子鮑為君。』吾等除了無道昏君,共戴有道之主,眾議以為何如?」軍士皆踴躍曰:「願從命!」國人亦無不樂從。華耦率眾出城,追趕昭公。
사성 탕의제는 자못 어질다는 평판이 있어, 공자포가 평소에 예를 갖추어 공경했다. 그때 양공 부인의 음모를 듣게 되어 소공에게 고하기를, “주군께서는 사냥을 나가시면 안 됩니다. 만약 사냥을 나가신다면 돌아오시지 못할까 걱정됩니다.” 하니, 송소공이 말하기를, “저들이 만약 반역을 일으키려 한다면, 비록 도성 안에 있다 한들 능히 면할 수 있겠는가?” 했다. 이에 우사(右師) 화원(華元)과 좌사(左師) 공손우(公孫友)에게 성을 지키라고 했다. 마침내 창고에 보관하고 있던 송나라의 보물들을 수레에 싣고 그의 측근들과 함께 겨울 11월에 맹제의 늪으로 사냥을 나갔다. 소공의 일행이 성문을 나서자 양공 부인이 화원과 공손우를 불러, 궁중에 머물게 하고 공자수를 시켜 성문을 닫도록 했다. 공자포가 사마 화우(華耦)를 시켜 군사들에게 외치게 하기를, “양공 부인이 명하시기를, ‘오늘부터 공자포를 군주로 세우라.’고 하셨다. 우리는 무도한 혼군을 몰아내고 도를 갖추신 분을 함께 추대하려고 한다.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하니, 군사들이 모두 펄쩍 뛰어오르며 말하기를, “원컨대 명을 따르겠습니다.” 했다. 나라 사람들 역시 즐겁게 따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화우가 무리를 인솔하여 성을 나가서 소공을 추격했다.
昭公行至半途聞變,蕩意諸勸昭公出奔他國,以圖後舉。昭公曰:「上自祖母,下及國人,無不與寡人為仇,諸侯誰納我者?與其死於他國,寧死於故鄉耳!」乃下令停車治餐,使從田者皆飽食。食畢,昭公謂左右曰:「罪在寡人一身,與汝等何與?汝等相從數年,無以為贈,今國中寶玉,俱在於此,分賜汝等,各自逃生,毋與寡人同死也!」左右皆哀泣曰:「請君前行,倘有追兵,我等願拼死一戰。」昭公曰:「徒殺身,無益也。寡人死於此,汝等勿戀寡人!」少頃,華耦之兵已至,將昭公圍住,口傳襄夫人之命:「單誅無道昏君,不關眾人之事。」昭公急麾左右,奔散者大半,惟蕩意諸仗劍立於昭公之側。
송소공의 행렬은 중도에서 변란 소식을 들었다. 탕의제가 소공을 권하여 다른 나라로 달아났다가 후일에 거사를 도모하라고 권했다. 소공이 말하기를, “위로는 할머니가, 아래로는 백성들이 모두가 과인을 원수처럼 대하고 있는데, 제후들 중 누가 나를 받아들이겠는가? 다른 나라에서 죽기보다는 차라리 고향에서 죽겠소!” 했다. 이에 명령을 내려 수레를 세우고 음식을 준비하여 사냥을 따라온 사람들을 모두 배불리 먹였다. 식사를 마치자 송소공이 좌우를 향해 말하기를, “죄는 과인 한 사람에게 있지, 그대들과는 무슨 관계가 있겠소? 그대들은 수년간 나를 따랐는데 내가 해 준 게 없었소. 지금 나라의 보물이 모두 여기에 있소. 여러분에게 나누어 주겠으니 각자가 도망가서 살 것이며, 과인과 함께 죽지 마시오.” 하니, 좌우의 시종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청컨대 주군께서는 앞서가십시오. 만약 추격병이 있으면 우리가 목숨을 걸고 한 번 싸우겠습니다.” 했다. 송소공이 말하기를, “헛되이 목숨을 버린다면 무익한 일이오. 과인은 여기서 죽을 것이니, 여러분은 과인을 생각지 말라.” 했다. 조금 있으니, 화우가 이끄는 군사들이 이르러 송소공을 포위하고 양공 부인의 명을 전하기를, “다만 무도한 혼군만 죽일 뿐이니 다른 사람은 관계가 없는 일이다.” 했다. 송소공이 좌우를 급히 불렀으나 태반이 흩어져 도망가 버리고, 오직 탕의제가 칼을 들고 소공 옆에 서 있었다.
華耦再傳襄夫人之命,獨召意諸。意諸嘆曰:「為人臣而避其難,雖生不如死!」華耦乃操戈直逼昭公,蕩意諸以身蔽之,挺劍格鬥。眾軍民齊上,先殺意諸,後殺昭公,左右不去者,盡遭屠戮。傷哉!史臣有詩云:「昔年華督弒殤公,華耦今朝又助凶。賊子亂臣原有種,薔薇桃李不相同。」華耦引軍回報襄夫人。右師華元,左師公孫友等合班啟奏:「公子鮑仁厚得民,宜嗣大位。」遂擁公子鮑為君,是為文公。華耦朝賀畢,回家患心疼暴卒。文公嘉蕩意諸之忠,用其弟蕩虺為司馬,以代華耦。母弟公子須為司城,以補蕩意諸之缺。
화우가 탕의제를 따로 불러 양공 부인의 명을 다시 전하니, 탕의제가 듣고 한탄하며 말하기를, “남의 신하가 되어 그 어려움을 피한다면 비록 살아도 죽는 것만 못하다.” 했다. 화우가 이에 과(戈)를 잡아 송소공을 찌르려 하자, 탕의제가 몸으로 막고 칼을 들고 대항했다. 군사들과 백성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먼저 탕의제를 죽이고 다음에 송소공도 죽였다. 좌우의 도망치지 않은 측근들도 모두 살해당했다. 애달프다! 사관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옛날에는 송나라의 화독이 상공을 시해하더니, 오늘은 그 아들 화우가 반역자를 도왔구나. 난신적자는 원래 그 종자가 따로 있으니, 장미와 복사꽃 오얏꽃은 같지 않구나!” 했다. 화우가 군사를 이끌고 돌아가서 양공 부인에게 복명했다. 우사 화원, 좌사 공손우(公孫友) 등이 같이 상주하기를, “공자포는 어질고 후덕하여 민심을 얻었으니 마땅히 군주 자리를 이어야 합니다.” 하니, 마침내 공자포를 군주로 옹립했다. 이가 송문공(宋文公)이다. 화우가 조당에서 축하한 후에 집으로 돌아가 심장에 통증을 느끼고 갑자기 죽었다. 송문공이 탕의제의 충성심을 가상하게 여겨 그 동생 탕훼(蕩虺)를 사마로 임명하여 화우를 대신하게 하고, 동복동생 공자수(公子須)를 사성(司城)으로 삼아 탕의제를 대신하게 했다.
趙盾聞宋有弒君之亂,乃命荀林父為將,合衛、陳、鄭之師伐宋。宋右師華元至晉軍,備陳國人願戴公子鮑之情,且歛金帛數車,為犒軍之禮,求與晉和。荀林父欲受之。鄭穆公曰:「我等鳴鐘擊鼓,以從將軍於宋,討無君也。若許其和,亂賊將得志矣。」荀林父曰:「齊宋一體也,吾已寬齊,安得獨誅宋乎?且國人所願,因而定之,不亦可乎?」遂與宋華元盟,定文公之位而還。鄭穆公退而言曰:「晉惟賂是貪,有名無實,不能復伯諸侯矣。楚王新立,將有事於征伐,不如棄晉從楚,可以自安。」乃遣人通款於楚,晉亦無如之何也!髯仙有詩云:「仗義除殘是伯圖,興師翻把亂臣扶。商人無恙鮑安位,笑殺中原少丈夫!」
조돈이 송나라에서 군주가 시해당한 변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순림보를 장수로 삼아 위(衛), 진(陳), 정(鄭) 세 나라의 군사들과 연합하여 송나라를 쳤다. 송나라 우사 화원이 진(晉)나라 군영에 가서 나라 사람들이 공자포를 군주로 추대했다는 사정을 설명하고, 또 황금과 비단을 여러 수레에 싣고 와서 군사들을 위로하는 예를 취하며 화의를 청했다. 순림보가 그것을 받아들이려고 하자 정목공이 말하기를, “우리가 종을 울리고 북을 쳐서 군사를 모아 장군을 따라 송나라에 온 것은 그 군주를 시해한 자를 토벌하러 왔는데 만약 우리가 화의를 허락한다면 앞으로 난신적자들이 장차 뜻을 얻을 것이오.” 했다. 순림보가 말하기를, “제나라와 송나라는 같은 사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제나라에는 관대하게 대했는데 어찌 홀로 송나라만을 토벌하겠습니까? 또한 송나라의 백성들이 원해서 추대하여 군주를 정했으니 또한 옳지 않습니까?” 하고, 마침내 송나라 화원과 맹약을 맺고 송문공을 인정한 후에 진(晉)나라로 돌아갔다. 정목공이 군사를 물리면서 말하기를, “진(晉)나라가 오직 송나라의 뇌물만을 탐하여, 패자(霸者)라는 이름만 있지 실상이 없어, 그들은 다시 제후의 우두머리가 될 수 없다. 초나라 왕이 새로 섰으니 장차 정벌을 일삼을 것이다. 차라리 진(晉)나라를 버리고 초나라를 따라야 나라가 안전할 것이다.” 하고, 이에 사자를 보내 초나라와 수호를 맺었다. 진(晉)나라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염선(髥仙)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정의를 밝혀 무법을 토벌함이 패주의 일인데, 군사를 일으켜서 오히려 난신적자를 도왔다. 상인(商人)은 탈이 없고 포(鮑)도 지위를 굳혔으니, 중원의 대장부가 없음을 다만 웃을 뿐이라.” 했다.
再說,齊懿公商人,賦性貪橫,自其父桓公在位時,曾與大夫邴原,爭田邑之界,桓公使管仲斷其曲直,管仲以商人理曲,將田斷歸邴氏,商人一向銜恨於心。及是弒舍而自立,乃盡奪邴氏之田,又恨管仲黨於邴氏,亦削其封邑之半。管氏之族懼罪,逃奔楚國,子孫遂仕於楚。懿公猶恨邴原不已,時邴原已死,知其墓在東郊,因出獵過其墓所,使軍士掘墓,出其屍,斷其足,邴原之子邴歜隨侍左右,懿公問曰:「爾父罪合斷足否?卿得無怨寡人乎?」歜應曰:「臣父生免刑誅,已出望外,況此朽骨,臣何敢怨?」
한편 제의공(齊懿公) 상인은 타고난 성품이 탐욕스럽고 횡포하여, 그 부친 제환공이 재위할 때부터 이미 대부 병원(邴原)과 밭의 경계를 가지고 다투었다. 환공이 관중을 그 시비를 가리게 했다. 관중은 상인에게 잘못이 있다고 판단하여 밭을 병원에게 돌려줬다. 상인이 그 일을 계속 원통하게 생각했다. 후에 세자 사(舍)를 시해하고 스스로 군위에 올라 즉시 병원의 밭을 모두 빼앗았다. 또한 관중이 병씨의 편을 든 것에 한을 품고 관씨의 봉읍을 반으로 깎았다. 관씨 종족들은 죄를 받을까 두려워하여 초나라로 도망쳤다. 관씨의 자손들은 마침내 초나라에 벼슬을 살았다. 제의공은 병원에 대한 원한이 다 풀리지 않았으나 그때 병원이 이미 죽었다. 그의 묘가 동쪽 교외에 있는 것을 알고, 사냥길에 그 묘를 지나가다가, 군사들을 시켜 그 무덤을 파서 그 시신의 꺼내어 발을 자르게 했다. 병원의 아들 병촉(邴歜)이 제의공을 수행하여 측근에 있었다. 제의공이 병촉에게 묻기를, “네 아비의 죄는 다리를 자르는 것이 합당하냐? 경은 과인에게 원한이 없느냐?” 하니, 병촉이 대답하기를, “신의 아비가 살았을 때 형벌을 면한 것이 이미 바라던 것 이상인데, 하물며 이 썩은 뼈를 끊었는데 신이 어찌 감히 원망하겠습니까?” 했다.
懿公大悅曰:「卿可謂幹蠱之子矣!」乃以所奪之田還之。邴歜請掩其父,懿公許之。復購求國中美色,淫樂惟日不足,有人譽大夫閻職之妻甚美,因元旦出令,凡大夫內子俱令朝於中宮。閻職之妻,亦在其內,懿公見而悅之,因留宮中,不遣之歸,謂閻職曰:「中宮愛爾妻為伴,可別娶也。」閻職敢怒而不敢言。齊西南門有地名申池,池水清潔可浴,池旁竹木甚茂。時夏五月,懿公欲往申池避暑,乃命邴歜御車,閻職驂乘。右師華元私諫曰:「君刖邴歜之父,納閻職之妻,此二人者,安知不銜怨於君?而君乃親近之。齊臣中未嘗缺員,何必此二人也?」
제의공이 크게 기뻐하며 말하기를, “경이야말로 가히 간고(幹蠱 ; 자식이 부모의 사업을 이어받아 잘 처리함)의 아들이라 하겠다!” 하고, 이에 빼앗은 밭을 돌려주었다. 병촉이 부친의 시신을 다시 묻기를 청하여 제의공이 허락했다. 제의공이 다시 나라 안의 아름다운 여인들을 사 오게 하여 음탕한 즐거움으로 날이 부족했다. 어떤 사람이 대부 염직(閻職)의 처가 매우 아름답다고 칭찬했다. 새해 원단(元旦)에 명령을 내려 모든 대부는 부인들과 함께 중궁에서 조회를 하라고 했다. 염직의 처도 그 속에 있었다. 제의공이 보고 기뻐하며 궁중에 머물게 하여 집으로 돌려보내 주지 않으면서, 염직에게 말하기를, “중궁이 그대의 아내를 사랑하여 동무가 되었으니 그대는 다른 부인을 얻도록 하시오!” 했다. 염직이 분노가 치밀었으나 감히 말하지 못했다. 제나라 도성 서남문 밖에 이름이 신지(申池)라는 연못이 있었다. 그 연못의 물이 매우 청결하여 목욕할 만했다. 연못의 주위에는 대나무가 아주 무성했다. 때는 여름 5월이라 제의공이 신지에 가서 더위를 피하고자, 즉시 병촉에게 수레를 몰게 하고 염직에게 참승(驂乘)을 명했다. 우사 화원이 몰래 간하기를, “주군께서는 병촉의 부친에게 월형(발을 자르는 형벌)을 가했고, 염직의 처를 빼앗았습니다. 이 두 사람이 어찌 주군에게 원한을 품고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주군께서 그들을 친근히 하시니, 제나라의 신하 중에 아직 결원이 생기지도 않았는데, 하필이면 그 두 사람을 데려가십니까?” 했다.
懿公曰:「二子未嘗敢怨寡人也,卿勿疑。」乃駕車遊於申池,飲酒甚樂。懿公醉甚,苦熱,命取繡榻,置竹林密處,臥而乘涼。邴歜與閻職浴於申池之中,邴歜恨懿公甚深,每欲弒之,以報父仇,未得同事之人,知閻職有奪妻之怨,欲與商量,而難於啟口,因在池中同浴,心生一計,故意以折竹擊閻職之頭。職怒曰:「奈何欺我?」邴歜帶笑言曰:「奪汝之妻,尚然不怒,一擊何傷,乃不能忍耶?」閻職曰:「失妻雖吾之恥,然視刖父之屍,輕重何如?子忍於父,而責我不能忍於妻,何其昧也!」
제의공이 말하기를, “두 사람은 지금까지 과인을 원망한 적이 없다. 그대는 의심하지 말라.” 했다. 이에 수레를 몰아 신지에 가서 놀았는데 술자리가 아주 즐거웠다. 제의공이 많이 취하여 너무 더워서 수놓은 비단 침대를 가져오게 하여 깊은 대나무 숲속에 설치하게 하고 그 위에 누워서 더위를 식혔다. 병촉과 염직이 신지에서 목욕을 하다가, 병촉이 제의공에 대한 원한이 너무 깊어 매양 제의공을 살해하여 아버지의 원한을 갚고자 했으나, 아직 그 일을 함께할 사람을 얻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염직이 아내를 빼앗긴 원한을 가졌음을 알고 그와 더불어 의논하려 했으나 입을 열기가 어려웠다. 연못에서 함께 목욕하게 되자 마음속에 한 계책이 떠올라 일부러 대나무를 꺾어 염직의 머리를 쳤다. 염직이 성을 내어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업신여기오?” 하니, 병촉이 웃음을 띠고 말하기를, “너는 마누라를 빼앗기고도 오히려 화를 내지 않더니, 한번 쳤다고 무슨 상처가 났느냐? 그것도 참지 못하느냐?” 했다. 염직이 말하기를, “아내를 잃은 것은 비록 나의 치욕이지만, 그러나 네 아비 시신의 다리를 자르는 것을 보고만 있은 너의 치욕은 경중이 어떠하냐? 자식이 아비의 치욕을 참고서 내가 아내를 빼앗긴 치욕을 참고 어쩌지 못한다고 꾸짖으니, 그 어리석음을 어찌하겠는가?” 했다.
邴歜曰:「我有心腹之言,正欲語子,一向隱忍不言,惟恐子已忘前恥,吾雖言之,無益於事耳。」閻職曰:「人各有心,何日忘之,但恨力不及也。」邴歜曰:「今凶人醉臥竹中,從遊者惟吾二人,此天遣我以報復之機,時不可失!」閻職曰:「子能行大事,吾當相助。」二人拭體穿衣,相與入竹林中,看時,懿公正在熟睡,鼻息如雷,內侍守於左右。邴歜曰:「主公酒醒,必覓湯水,汝輩可預備以待。」內侍往備湯水。閻職執懿公之手,邴歜扼其喉,以佩劍刎之,頭墜於地。二人扶其屍,藏於竹林之深處,棄其頭於池中。(懿公在位纔四年耳。)
병촉이 말하기를, “내 가슴 속의 말을 그대에게 하고 싶었는데, 지금껏 이 말을 꺼내지 않은 것은, 오직 그대가 이미 전날에 당한 치욕을 이미 잊어버리지 않았나 걱정했기 때문이오. 그렇다면 내가 비록 말을 한들 그 일에 무익할 따름이오.” 하니, 염직이 말하기를, “사람은 각기 생각이 있는데, 어느 날엔들 잊었겠소? 단지 힘이 미치지 못함을 한탄했소.” 했다. 병촉이 말하기를, “지금 흉악한 놈이 취하여 대나무 숲에 누웠으니, 이곳에 따라온 사람은 오직 우리 두 사람이오. 이것은 하늘이 우리에게 원수를 갚으라고 주신 기회이니, 이때를 놓쳐서는 아니 되오!” 하니, 염직이 말하기를, “그대가 능히 큰일을 행하면, 내가 마땅히 돕겠소.” 했다. 두 사람이 몸을 닦고 옷을 입은 후 함께 대숲 속으로 들어갔다. 보니 그때 제의공은 깊이 잠이 들어 코고는 소리가 우레 같고, 내시가 좌우에 지키고 있었다. 병촉이 말하기를, “주공께서 술에서 깨어나시면 반드시 끓인 물을 찾을 것이니 너희들은 미리 준비를 해라.” 하니, 내시들이 끓인 물을 준비하러 갔다. 염직이 제의공의 손을 잡고 병촉이 목을 눌러 허리에 찬 칼로 목을 베었다. 제의공의 머리가 땅에 떨어졌다. 두 사람이 제의공의 시체를 들어 대나무 숲 깊은 곳에 감추고 그 머리는 연못 속에 버렸다. (제의공이 군주 자리에 있은 지 겨우 4년이었다.)
內侍取水至,邴歜謂之曰:「商人弒君而立,齊先君使我行誅。公子元賢孝,可立為君也。」左右等唯唯,不敢出一言。邴歜與閻職駕車入城,復置酒痛飲,歡呼相慶。早有人報知上卿高傾國歸父,高傾曰:「盍討其罪而戮之,以戒後人?」國歸父曰:「弒君之人,吾不能討,而人討之,又何罪焉?」邴閻二人飲畢,命以大車裝其家資,以駢車載其妻子,行出南門,家人勸使速馳,邴歜曰:「商人無道,國人方幸其死,吾何懼哉?」徐徐而行,俱往楚國去訖。高傾與國歸父聚集群臣商議,請公子元為君,是為惠公。髯翁有詩云:「仇人豈可與同遊?密邇仇人仇報仇。不是逆臣無遠計,天教二憾逞凶謀。」
내시들이 물을 가지고 오니, 병촉이 말하기를, “상인은 군주를 시해하고 자리를 찬탈했다. 제나라 선군께서 우리를 시켜 죽인 것이다. 공자원은 어질고 효성이 지극하니 군주로 세울 수 있을 것이다.” 하니, 내시들이 “예, 예” 하고, 감히 한마디도 말하지 못했다. 병촉과 염직이 수레를 몰고 성안에 들어가 다시 술상을 차려 마음껏 마시고 환호하며 서로 축하했다. 어떤 사람이 보고 그 일을 상경인 고경(高傾)과 국귀보(國歸父)에게 보고했다. 고경이 말하기를, “그놈들을 잡아들여 죄를 물은 후에 죽여서 후세 사람들에게 경계로 삼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국귀보가 말하기를, “군주를 시해한 자를 우리가 치지 못했는데, 그 사람들이 그를 쳤으니 그것이 무슨 죄가 되겠습니까?” 했다. 병촉과 염직 두 사람은 술을 다 마시고 큰 수레에 가산을 싣고 다른 수레에 처자를 태우고 남문을 통해 나갔다. 집안사람이 수레를 빨리 몰라고 권하자 병촉이 말하기를, “상인이 무도하여 나라 사람들이 그 죽음을 다행으로 여길 것인데 내가 무엇이 무서워서 빨리 간단 말이냐?” 하고 천천히 말을 몰아 모두 초나라로 가버렸다. 고경과 국귀보가 군신들을 모아 상의하여 공자원을 받들어 군주가 되기를 청하니, 그가 제혜공(齊惠公)이 되었다. 염옹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어찌하여 원수를 데리고 함께 논단 말인가? 원수를 가까이하다가 원수에게 죽임을 당했구나! 이것은 역신이 대비를 안 했다기보다, 하늘이 두 사람을 시켜 흉악한 자를 죽인 것이라!” 했다.
話分兩頭。卻說魯文公名興,乃僖公嫡夫人聲姜之子,於周襄王二十六年嗣位。文公娶齊昭公女姜氏為夫人,生二子,曰惡,曰視。其嬖妾秦女敬嬴,亦生二子,曰倭,曰叔肹。四子中惟倭年長。而惡乃嫡夫人所生,故文公立惡為世子。時魯國任用三桓為政。孟孫氏曰公孫敖,生子曰穀,曰難。叔孫氏曰公孫茲,生子曰叔仲彭生,曰叔孫得臣。文公以彭生為世子太傅。季孫氏曰季無佚,乃季友之子,無佚生行父,即季文子也。魯莊公有庶子曰公子遂,亦曰仲遂,住居東門,亦曰東門遂,自僖公之世,已與三桓一同用事。
이야기는 두 갈래로 나뉜다. 한편, 노문공(魯文公) 흥(興)은 곧 노희공(魯僖公)의 정부인 성강(聲姜)의 아들인데, 주양왕 26년(기원전 626년)에 군주의 자리를 이어받았다. 노문공이 제소공의 딸 강씨를 맞이하여 부인으로 삼아 아들 둘을 낳았는데 이름을 각각 오(惡)와 시(視)라 했다. 문공이 다시 진(秦)나라 출신의 첩인 경영(敬嬴)을 사랑하여 또한 아들 둘을 낳았는데, 이름을 왜(倭)와 숙힐(叔肹)이라고 했다. 네 아들 중 오직 공자 왜(倭)가 가장 나이가 많았으나, 오(惡)가 정부인 소생이므로 공자 오(惡)를 세워 세자로 삼았다. 그때 노나라는 삼환(三桓 ; 노환공의 후예인 孟孫氏, 叔孫氏, 季孫氏)에게 정사를 맡기고 있었다. 맹손씨(孟孫氏)는 공손 오[孟孫敖]를 말하는데 아들 곡(穀)과 난(難)을 낳았다. 숙손씨(叔孫氏)는 공손자[叔孫玆]를 말하는데, 아들 숙중팽생(叔仲彭生)과 숙손득신(叔孫得臣)을 낳았다. 노문공은 숙중팽생을 세자 태부로 삼았다. 계손씨(季孫氏)는 계무일(季無佚)을 말하는데, 그는 계우(季友)의 아들이고, 계무일(季無佚)은 계손행보(季孫行父)를 낳았는데, 그가 계문자(季文子)다. 노장공(魯莊公)에게는 공자수(公子遂)라는 서자가 있었는데 그가 공자 수(遂)이고 또는 중수(仲遂)라 했다. 그는 동문 근처에 살았으므로 또한 동문수(東門遂)라고도 했다. 노희공(魯僖公) 치세 때부터 이미 삼환(三桓)은 모두 같이 정사를 돌보고 있었다.
論起輩數,公孫敖與仲遂為再從兄弟,季孫行父又是下一輩了。因公孫敖得罪於仲遂,客死於外,故孟孫氏失權,反是仲孫氏、叔孫氏、季孫氏三家為政。且說公孫敖如何得罪。敖娶莒女戴己為內子,即穀之母;其娣聲己,即難之母也。戴己病卒,敖性淫,復往聘己氏之女。莒人辭曰:「聲己尚在,當為繼室。」敖曰:「吾弟仲遂未娶,即與遂納聘可也。」莒人許之。魯文公七年,公孫敖奉君命如莒修聘,因順便為仲遂逆女。及鄢陵,敖登城而望,見己氏色甚美,是夜竟就己氏同宿,自娶歸家。仲遂見奪其妻,大怒,訴於文公,請以兵攻之。
촌수를 따진다면 공손오와 중수는 재종형제간이며, 계손행보도 또한 같은 촌수였다. 공손오가 중수에게 죄를 지어 외국에서 객사하였으므로 맹손씨가 권력을 잃고, 이후로는 중손씨(仲孫氏), 숙손씨(叔孫氏), 계손씨(季孫氏) 등 세 잡안이 노나라의 국정을 맡았다. 한편, 공손오가 어찌하여 죄를 지었는가 하면, 공손오가 거(莒)나라 여자 대기(戴己)에게 장가들어 부인으로 삼았는데, 즉 곡(穀)의 어머니다. 그 여동생 성기(聲己)를 취하였는데, 곧 난(難)의 모친이다. 대기가 병이 들어 죽고, 공손오가 천성이 음탕하여 다시 거나라의 기씨(己氏)의 딸을 맞아들이려고 했다. 거나라의 기씨가 거절하기를, “성기가 아직 있으니 마땅히 그 애를 계실로 삼으시오.” 하니, 공손오가 말하기를, “내 재종 아우 중수가 아직 장가들지 않았으니 중수와 혼인시키겠습니다.” 했다. 기씨가 허락했다. 노문공 7년에 공손오가 노나라 군주의 명을 받들어 거나라에 수호 사절로 가서, 임무를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중수를 위하여 기씨의 딸을 데려가려고 했다. 언릉(鄢陵)에 이르러 공손오가 성에 올라 기씨의 딸을 보았는데 매우 아름다웠다. 그날 밤 결국 기씨의 딸에게 가서 동침하고 자신이 취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중수는 아내가 될 여자를 빼앗기고 크게 노하여 노문공에게 호소하면서 군사로 칠 것을 청했다.
叔仲彭生諫曰:「不可。臣聞之:『兵在內為亂,在外為寇。』幸而無寇,可啟亂乎?」文公乃召公孫敖,使退還己氏於莒,以釋仲遂之憾。敖與遂兄弟講和如故。敖一心思念己氏,至次年,奉命如周,奔襄王之喪,不至京師,竟攜弔幣,私往莒國,與己氏夫婦相聚。魯文公亦不追究,立其子穀主孟氏之祀。其後敖忽思故國,使人言於穀,穀轉請於其叔仲遂。遂曰:「汝父若欲歸,必依我三件事,乃可。無入朝,無與國政,無攜帶己氏。」穀使人回復公孫敖。敖急於求歸,欣然許之。敖歸魯三年,果然閉戶不出。
숙중팽생이 간하기를, “안 됩니다. 제가 듣기로는, ‘군사가 나라 안에서 움직이면 난이 되고, 나라 밖에서 쳐들어오면 침략이라고 합니다. 요즘에 다행히 외국의 침략이 없는데 나라 안에서 난을 조장하려고 하십니까?” 했다. 노문공이 즉시 공손오를 불러 기씨를 거나라로 돌려보내서 중수의 노여움을 풀라고 했다. (공손오는 기씨를 거나라로 돌려보내어) 공손오와 중수 형제가 화해하여 옛날처럼 지냈다. 그러나 공손오는 오로지 기씨를 생각하다가, 다음 해에 군주의 명을 받들어 주나라 양왕의 문상을 가게 되어, 낙양에 가지 않고 끝내 조문 폐백을 지닌 채 사사로이 거나라로 가서 기씨와 부부로 합쳤다. 노문공 역시 그 일을 추궁하지 않고 그의 아들 공손곡에게 맹씨의 제사를 주관하게 했다. 그 뒤에 공손오가 갑자기 고향 생각이 나서 사람을 시켜 곡에게 말을 전하기를, 그 아저씨 중수(仲遂)에게 고향에 돌아갈 수 있게 청하라고 했다. 중수가 말하기를, “너의 부친이 만약 돌아오고 싶다면 반드시 내가 말하는 세 가지 조건을 받아들이면 된다. 조정에 나오지 말고, 국정에 관여하지 않으며, 기씨를 데려오지 말아야 한다.” 했다. 공손곡이 사람을 시켜 공손오에게 전했다. 공손오는 급히 돌아오고 싶어 흔연히 허락했다. 공손오가 노나라에 돌아온 지 3년이 지나도록 과연 문을 닫고 나오지 않았다.
忽一日,盡取家中寶貨金帛,復往莒國。孟孫穀想念其父,踰年病死。其子仲孫蔑尚幼,乃立孟孫難為卿。未幾,己氏卒,公孫敖復思歸魯,悉以家財納於文公,並及仲遂,使其子難為父請命。文公許之,遂復歸。至齊,病不能行,死於堂阜。孟孫難固請歸其喪於魯。難乃罪人之後,又權主宗祀,以待仲蔑之長,所以不甚與事。季孫行父讓仲遂與彭生得臣是叔父行,每事不敢自專。而彭生仁厚,居師傅之任。得臣屢掌兵權,所以仲遂得臣二人,尤當權用事。敬嬴恃文公之寵,恨其子不得為嗣,乃以重賂交結仲遂,因以其子倭託之,曰:「異日倭得為君,魯國當與子共之。」
갑자기 어느 날, 집안의 보물과 돈과 비단을 챙겨서 다시 거나라로 가 버렸다. 맹손곡은 그 부친을 생각하다가 이듬해 병으로 죽었다. 그 아들 중손멸(仲孫蔑)이 아직 어렸기 때문에 그의 동생 맹손난이 경이 되었다. 오래지 않아 기씨가 죽었다. 공손오가 다시 노나라에 돌아오고 싶어 그의 재산을 모두 문공과 중수에게 바치고 그의 아들 맹손난을 시켜 자기의 귀국을 청하게 했다. 문공이 허락하자 마침내 다시 돌아가다가 제나라에 이르러 병이 나서 가지 못하고 당부(堂阜)에서 죽었다. 맹손난이 노문공에게 간곡하게 청하여 노나라에 실어와서 상을 치렀다. 맹손난은 곧 죄인의 자식이라 종족의 제사는 주관했으나 곡의 아들 중손멸이 장성하기를 기다리며 그다지 정사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계손행보(季孫行父)는 중수(仲遂)와 팽생(彭生) 및 득신(得臣) 등이 모두 자기에게는 숙부의 항렬이었기 때문에 매사에 감히 제 맘대로 하지 못했다. 팽생은 인자하고 후덕했고 세자 사부를 맡았다. 득신이 여러 번 병권을 장악했으므로 중수와 득신 두 사람이 권력을 잡아 정사를 처리했다. 경영(敬嬴)이 문공의 총애를 믿고 그 아들이 세자가 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생각하여 많은 뇌물로 중수와 결탁하여 그 아들 공자 왜를 중수에게 부탁하면서 말하기를, “훗날에 왜가 군주의 자리에 오르게 되면 마땅히 노나라를 그대와 함께 다스리겠소.” 했다.
仲遂感其相託之意,有心要推戴公子倭。念:「叔仲彭生,乃是世子惡之傅,必不肯同謀。而叔孫得臣,性貪賄賂,可以利動。」時時以敬嬴所賜分贈之,曰:「此嬴氏夫人命我贈子者。」又使公子倭時時詣得臣之門,謙恭請教,故得臣亦心向之。周匡王四年,魯文公十有八年也。是年春,文公薨,世子惡主喪即位。各國皆遣使弔問。時齊惠公元,新即大位,欲反商人之暴政,特地遣人至魯,會文公之葬。仲遂謂叔孫得臣曰:「齊魯世好也。桓僖二公,歡若兄弟。孝公結怨,延及商人,遂為仇敵。今公子元新立,我國未曾致賀,而彼先遺人會葬,此修好之美意,不可不往謝之。乘此機會,結齊為援,以立公子倭,此一策也。」叔孫得臣曰:「子去,我當同行。」畢竟二人如齊,
중수가 경영의 부탁하는 뜻에 감격하여 공자 왜를 추대하려는 마음을 품게 되었다. 중수가 생각하기를, “숙중팽생은 바로 세자 오의 태부이니 틀림없이 함께 도모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숙손득신은 성품이 탐욕스러워 뇌물을 좋아하니 이익으로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하고, 때때로 경영이 준 재물을 나눠주며, 말하기를, “이것은 영씨(嬴氏) 부인이 나에게 명하여 그대에게 주는 것이오.” 했다. 또 중수는 공자 왜를 때때로 득신의 집에 가게 하여 공손하게 가르침을 청하게 했다. 그래서 득신도 공자 왜에게 마음이 갔다. 주광왕(周匡王) 4년(기원전 609년)은 노문공 18년인데, 이해 봄에 노문공이 죽고 세자 오가 장례를 주관하여 노나라 군주로 즉위했다. 각국이 모두 사자를 보내어 조문했다. 그때 제나라 혜공(惠公) 원(元)이 새로 즉위하여 제의공 상인의 폭정을 바로 잡고자 특별히 사자를 노나라에 보내 문공의 장례에 참석하게 했다. 중수가 숙손득신에게 말하기를, “제나라와 노나라는 대대로 우호 관계를 맺어 왔소. 특히 노환공(魯桓公)과 노희공(魯僖公) 두 군주 때에는 형제처럼 지냈었소. 제나라에서 제효공(齊孝公)이 원한을 맺어 상인에 이어졌고 마침내 원수가 되었소. 지금 제나라에서 공자 원이 새로 즉위하였으나 우리나라는 아직 축하 사절을 보내지 않았는데, 저쪽에서 먼저 사람을 보내 장례에 참석했으니, 이것은 우호 관계를 맺고자 하는 좋은 뜻이오. 우리도 사자를 보내 감사의 말을 전하지 않을 수 없소. 이번 기회에 제나라와 수교를 맺고 그들의 도움을 받아 공자 왜를 군위에 앉히는 것도 한 가지 계책이오.” 하니, 숙손득신이 말하기를, “그대가 간다면 내가 마땅히 동행하겠소.” 했다. 마침내 두 사람이 제나라로 갔다.
商量出甚事來,且看下回分解。
무슨 일을 꾸밀 것인지, 다음 회를 보면 풀릴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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