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논어집주(論語集注) - 3 - 팔일(八佾) - ⑨ |
1 | 子曰 夏禮吾能言之 杞不足徵也 殷禮吾能言之 宋不足徵也 文獻不足故也 足則吾能徵之矣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라의 예법을 내가 능히 말할 수 있지만, 기나라에서 증거를 댈 수 있는 것이 없으며, 은나라의 예법을 내가 능히 말할 수 있지만, 송나라에서 증거를 댈 수 있는 것이 없으니, 이것은 문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문헌이 넉넉하다면 내가 능히 증거를 댈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셨다. 杞, 夏之後. 宋, 殷之後. 徵, 證也. 文, 典籍也. 獻, 賢也. 言二代之禮, 我能言之, 而二國不足取以爲證, 以其文獻不足故也. 文獻若足, 則我能取之, 以證吾言矣. 기나라는 하나라의 후예국이다. 송나라는 은나라의 후예국이다. 徵은 證이다. 文은 典籍이고, 獻은 현자다. 2대의 예는 내가 능히 말할 수 있지만, 두 나라에는 취하여 증거로 삼을 것이 부족한데, 그 문과 헌이 부족하기 때문이고, 만약 문과 헌이 충분하다면, 곧 내가 능히 그것을 취해서 내 말을 증명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이다. 史記杞世家 東樓公者 夏后禹之苗裔也(杞國名 東樓公諡號也) 又宋世家微子開者 殷帝乙之長子而紂之庶兄也(微子名啓 今云開者 避漢景帝諱也) 사기의 杞世家에는 동루공이라는 사람이 夏나라 임금 우의 후예라고 하였다(기나라의 이름은 동루공의 시호다). 또한 宋世家에는 미자개라는 사람이 은나라 제을의 장자이면서 紂王의 庶兄이라고 하였다(미자의 이름은 啓였으나, 지금 開라고 부르는 것은 漢景帝를 피하여 숨겼(諱)기 때문이다). 朱子曰 孔子言我欲觀夏道 是故之杞而不足證也 吾得夏時焉 我欲觀商道 是故之宋而不足證也 吾得坤乾焉 說者謂 夏時爲夏小正 坤乾爲歸藏 聖人讀此二書 必是大有發明處 歸藏之書今無傳 주자가 말하길,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나는 하나라의 道를 살펴보고자 하여 이런 까닭으로 杞나라에 갔으나 증거가 부족하였다. 나는 이곳에서 夏時를 얻었다. 나는 상나라의 도를 살펴보기 위하여 이런 까닭으로 송나라에 갔지만, 증명하기에 부족하였다. 다만 나는 여기서 곤건을 얻었다.’고 하셨다. 해설하는 자가 말하길, 夏時는 하나라의 小正(달력)이고, 坤乾은 歸藏(은나라의 易法)이라고 하였다. 성인께서 이 두 권의 책을 읽고서, 반드시 드러내어 밝히신 부분이 많이 있었을 것이다. 歸藏이란 책은 지금 전해지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問孔子能言夏殷之禮而無其證 是時文獻不足 孔子何從知得 曰 聖人自是生知聰明 無所不通 然亦是當時賢者識其大 不賢者識其小 孔子廣詢博問 所以知得 杞國最小 所以文獻不足 누군가 묻기를, “공자께서는 하나라와 은나라의 禮를 능히 말할 수 있었지만, 그것을 증명할 수 없었을 뿐입니다. 이 당시에 문헌이 부족하였는데, 공자께서는 어디로부터 지득하였을까요?”라고 하였다. 말하길, “성인께서는 당연히 나면서부터 아시기 때문에 총명하여 통달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러나 역시 당시에 현자는 그 큰 것을 기억하고 있었고, 현명하지 못한 자는 그 작은 것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공자께서 널리 자문하고 널리 물어보아서 알게 된 것이다. 杞나라는 제일 작았기 때문에 문헌이 부족하였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問夏殷之禮 杞宋固不足徵 然使聖人得時得位 有所制作 雖無所徵而可以義起者 亦必將有以處之 曰 夏殷之禮 夫子固嘗講之 但杞宋衰微 無所考而證吾言矣 若得時有作 當以義起者 固必有以處之 누군가 묻기를, “夏殷의 禮를 기나라와 송나라에서 본래부터 증명하기에 부족하였지만, 그러나 성인으로 하여금 때를 얻고 지위를 얻어서 제작하는 바가 있도록 하였다면, 비록 증명할 것은 없더라도 의미로써 참작하여 만들어낼 수 있는 것(以義起者)이라면, 또한 반드시 장차 처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말하길, “夏殷의 禮는 공자께서도 본래 일찍이 익히신 적이 있었다. 다만 기나라와 송나라가 쇠미하였기에 고증할 수 없어서, 자신의 말을 증명할 수 없었을 뿐이다. 만약 때를 얻어서 제작함이 있었더라면, 마땅히 의미로써 참작하여 만들어내는 것 정도는 정말로 반드시 처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潛室陳氏曰 三綱五常 固不待取證 若其制度文爲 隨時損益者 何限 旣無文獻可證 雖聖人不能意料臆說也 잠실진씨가 말하길, “三綱五常은 본래 증거 취하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 制度나 문장(文)과 爲(사업)처럼, 때에 따라 덜어내고 보태주는 것이라면, 어찌 한정(끝)이 있겠는가? 이미 증명할만한 문헌이 없다면, 비록 성인일지라도, 뜻으로 헤아리고 억측하여 말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
2 | 雙峯饒氏曰 杞宋二國文獻 雖皆不足 然以杞較宋 宋去殷近 猶有存者 杞去夏遠 且不能自振 想見尤甚 所以孔子又言 吾說夏禮 杞不足證 吾學殷禮 有宋存焉 或問夏殷之後 其文獻旣皆不足 不知孔子於何考證而能言之 曰 殘編斷簡 當時豈無存者 聖人聰明睿智得其一二 則可觸類以知其餘 況周之禮 實監二代而損益之 則周之文亦可推之以知夏殷忠質之變 但無徵不信 不信則民不從 故聖人雖能言之 而終不敢筆之於書以示後世 若當時杞宋可證得 聖人論著三代之禮 與周禮並存以爲百王損益之大法 豈不甚妙 惜乎 杞宋旣不足以證二代之禮 其後周之文獻 亦淪亡於戰國干戈與暴秦坑焚之餘 三代禮樂之敎影滅 無復遺響於後世 可歎也已 쌍봉요씨가 말하길, “杞와 宋 두 나라의 문헌은 비록 둘 다 부족하였지만, 그러나 기나라를 가지고 송나라와 비교하자면, 송나라는 은나라로부터 가까웠기에, 그래도 보존된 것이 있었다. 기나라는 하나라로부터 멀었을 뿐 아니라, 또한 스스로 떨쳐 일어나지 못하였으므로, 아마도 (부족함이) 더욱 심하였을 것이다. 이 때문에 공자께서 또 말씀하시길, 나는 하나라의 禮를 말하지만, 기나라에는 증거가 부족하고, 나는 은나라의 예를 배웠는데, 송나라에 보존된 것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셨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누군가 묻기를, “夏殷시대 이후에 그 문헌이 이미 모두 부족하였는데, 공자께서는 어디에서 고증하여 그것을 말씀하실 수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말하길, “남은 木編이나 끊긴 竹簡일망정, 당시에 어찌 보존된 것이 하나도 없었겠는가? 성인께서는 총명하고 예지가 있었으니, 그 한둘을 얻는다면, 비슷한 것을 의지(觸)하여 그 나머지를 알 수 있었던 것이다. 하물며 주나라의 禮도 실제로 夏殷 2대를 감안하여 그것을 덜거나 더한 것이었으니, 주나라의 文을 또한 미루어서 하나라의 忠과 은나라의 質이 변한 것을 알 수가 있었던 것이다. 다만 증빙이 없으면 믿지 않고, 믿지 않으면 백성들이 따르지 않기 때문에, 성인께서는 비록 그것을 말할 수 있었을지라도, 끝내 감히 그것을 책에 적어서 후세에 보여줄 수 없었던 것이다. 만약 당시에 기나라와 송나라에서 충분히 증명할 수 있었더라면, 성인께서 3대의 예를 논하고 저술해서, 주나라의 예와 나란히 보존시킴으로써, 百王이 덜고 더하는 大法으로 삼았을 것이니, 어찌 대단히 멋진 일이 아니었겠는가? 애석하도다! 杞나라와 宋나라는 이미 2대의 예를 증명하기에 부족하였고, 그 후로 주나라의 문헌 또한 전국시대의 전쟁과 포악한 진나라의 분서갱유에 빠져 없어진 나머지, 삼대의 禮樂의 가르침은 그림자마저 사라져서, 후세에 더이상 메아리를 남길 수조차 없게 되었으니, 그저 탄식할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胡氏曰 文獻不足非全不可考 特有闕耳 호씨가 말하길, “문헌이 부족하다고 해서 전혀 고증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저 빠뜨리는 부분이 있을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雲峯胡氏曰 夫子旣能言之 猶曰無徵不信 其謹重如此 此凡三見禮運以爲 之杞得夏時 之宋得坤乾 中庸 則以爲杞不足證 有宋存焉 合而觀之 蓋雖得夏時坤乾之文 雖於宋略有存焉者 然其爲文獻要 皆缺略而不完也 故夫子論之 운봉호씨가 말하길, “공자께서 이미 그것을 말할 수 있었음에도 오히려 증거가 없으면 믿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으니, 그 삼가 신중함이 이와 같았다. 이것은 무릇 세 번 보인다. 예기 예운에, 기나라에 가서 夏時를 얻었고, 송나라에 가서 坤乾을 얻었다고 하였고, 중용에서는 기나라는 증명하기에 부족하였고, 송나라에는 보존된 것이 있었다고 하였는데, 이를 합하여 살펴보면, 비록 夏時와坤乾의 글을 얻었을지라도, 아무리 송나라에 대략이나마 보존된 바가 있다고 할지라도, 그러나 그것이 문헌의 요체가 되기에는 모두 缺略(모자라고 생략됨)되고 완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자께서 이를 논하신 것이다.”라고 하였다. ○ 茶山曰: “能言, 明世無能言之者. 孔子博學, 故能言之. 然無徵不信. 若使杞ㆍ宋有文有獻, 則必與夫子所言相合. 故曰: ‘吾能徵之’. 吾能徵者, 自信之辭也.” 다산이 말했다. “능히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세상에 그것을 능히 말할 수 있는 자가 없음을 밝힌 것이다. 공자는 박학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능히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증거가 없으면 믿지 않는다. 만약 기나라와 송나라에 문이 있고 헌도 있었다면, 반드시 공자가 말한 바와 서로 부합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말하길, 내가 그것을 증명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내가 능히 증명할 수 있다는 것은 자신하는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