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부개척 당시 삶의 터전을 찾아 동부에서 서부로의 대이동이 있었듯이, 우리도 산업화를 타고 시골의 많은 젊은이들이 일을 찾아 도시로 모여든 시절이 있었다.
일자리를 찾아 그렇게 도시로 내몰린 사람들은 추석과 설이 되면 너 나 할 것 없이 고향행 완행열차에 몸을 실었고, 그 열차로 13시간 이상 달려야 도착했던 곳이 우리들 고향 곡성이 아니었던가!
그 때만해도 개발행정시절이어서 고향의 마을마다 확성기에서 이른 아침부터 새마을노래가 울려 퍼졌고, 공지사항이 전달되고 나서 그 흥겹고 때로는 구성진 노래가락들이 흘러나왔던 고향의 풍광을 우리는 너무도 잘 기억하고 있다.
시골집 방 한편에서 깍지낀 양손을 베개삼아 들었던 귀익은 목소리의 그 구성진 노랫가락들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그 노랫말과 가락에 따라 객지생활의 그 애환이 주마등처럼 스치면 자신도 모르게 회한의 눈물을 훔치기도 했지만, 혼자서 피시시 웃어 본 기억 역시 새롭지 않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타♬향살이 몇♪해던가 손꼽아 헤어보니...(후략).” 하는 애절한 노랫가락을 난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객지생활에 지친 심신을 달래듯이 흉금을 파고드는 그 애절한 목소리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노래를 즐겨 불렀던 한사람을 추억하면 가슴이 저려오는 기분이 들어서이기도 하다.
우리는 각자 객지에서 떠돌다 명절이 되면 그렇게 고향을 찾았고, 명절이 끝나고 나면 마을확성기의 그 애절한 목소리와 숱한 아쉬움들을 뒤로 한 채 또 썰물처럼 모두 고향을 떠나왔었다.
다음 명절때에 다시 찾아올 것을 기약하면서...........
그런데
나이 열여섯에 고향을 떠난 후 추석과 설 명절을 60번하고도 수번을 더 보냈으면서도 단 한 번도 고향을 찾지 않는 딱 한사람이 이처럼 비가 내리는 날이면 그 속마음이 궁금해지면서 그리워진다.
고향을 떠난 후 단 한번도 고향을 찾지 않는 사람으로는 내가 아는 한 유일한 사람이다.
고향에 연고가 없어서?
단언컨대 그건 아니다.
혹자들은 그를 무정한 사람, 고향을 잊어버린 사람이라고도 말한다.
심지어는 독한놈이라고 힐난한 고향 어르신까지 보았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가 왜 그랬는가?”를 예단하여 비난할 권리는 아무에게도 없다.
다만, 나는 언젠가 그 또래친구들을 통해서 들었던 얘기로 그의 깊은 속마음을 헤아려 볼 뿐이다.
그는 객지에서 고향친구들과 술을 마시면 꼭 타향살이 노래만를 즐겨 불렀고,
그리고 부산에서 채 50이 되지 않아 스스로 친구들 곁을 떠났다고 했다.
부정의 극단은 긍정의 극단과 맥을 같이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 친구야말로 그 누구보다 고향을 더 사랑하고 그리워했으리라
그것도 온몸으로,
자기만의 방식으로
어릴적 보리피리 만들다 그 애와 다퉜던 기억이 웬지 마음에 걸린다.
마을 뒷동산에서 그 애와 깽깽이 하던 그 시절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성장하여 그 친구와 소주 한잔 하지 못한 게 못내 아쉽다.
고향 그리고 유년시절! -- 우리의 영원한 마음의 둥지가 아니겠는가!
앞서 간 그 후배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