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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회]
장백산은 대륙에 있는 산처럼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높은 산은 아니다.
하지만 산세가 힘차면서 영기가 어려 있어 사람들로 하여금 절로 경외감을 불러일으키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평소 장백산은 인근의 마을에 사는 심마니들이나 사냥꾼들이 아니면 사람들의 발걸음이 거의 없다.
장백산에는 그 흔한 무림 문파도 없었다. 중원의 다른 거대한 산에 무림 문파들이 하나 둘씩은 들어서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렇게 넓고 울창한 장백산이 무주공산으로 있다니.
예전에 인근 요령성이나 길림성의 몇몇 문파들이 세력의 확대를 노리고 이곳에 들어온 적이 있었다.
그러나 장백산에 들어온 무인들은 하나의 예외도 없이 다시 밖으로 나가지를 못했다. 이에 몇몇 문파들이 다시 사람들을 보냈으나 역시 예외는 없었다.
몇 번이나 무인들이 들어갔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들어갈 수는 있지만 돌아올 수는 없는 곳.
무공의 수위와는 상관이 없었다.
아무리 숫자가 많아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그곳에 저승으로 통하는 문이 있어 모든 것을 끌어들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들어간 무인들은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상황이 이쯤 되자, 인근에 있는 문파들은 결코 장백산 쪽으로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심마니나 나무꾼, 사냥꾼들 같이 일반 사람들의 신상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일반 백성들에게는 아무런 제재가 없지만 무인들만큼은 철저하게 거부하는 산, 그것은 어느새 인근의 주민들과 문파들에게 하나의 절대적인 규약처럼 전해져오고 있었다.
때문에 수십 년 동안 무인들의 발걸음이 끊있던 장백산.
그러나 오늘 이곳에 절대적으로 내려오는 그 불문율을 어기는 일단의 무리들이 있었다.
"모두 조심해라. 이곳은 안 좋은 소문이 도는 곳이다."
"옛!"
우두머리 남자의 주의에 서있던 부하 이십여 명이 힘차게 대답을 했다.
철권문(鐵拳門), 산동성 청도(靑島)에 자리를 잡고 있으며 강력한 권(拳)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모여 만든 패독적인 성향의 문파였다.
철권문의 문주 강철영은 바로 며칠 전에 지급으로 전해진 혁련후의 명에 의해, 철권문의 정예들을 이끌고 이곳 장백산으로 들어왔다.
"이곳에서 무가를 찾으라니..... 정말 암담하군!"
강철영은 울창한 장백산의 숲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혁련후에 의해 내려진 명령은 장백산 어딘가에 있다는 무가(武家)를 찾으라는 것이었다.
마도의 절대자인 혁련후의 명령이었기에 강철영은 그날 바로 청도를 출발해 오늘 장백산에 도착했다.
확실한 정보도 없고, 그 내용 또한 황당하게도 무공을 익힌 사람들이 있는 무가를 찾으라는 일이었기에 강철영은 암담한 심정이었다.
더구나 혁련후는 정작 중요한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들이 찾는 무가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있는 곳인지 말이다.
혁련후는 신황의 가문으로 추측되는 곳이 발견되면 직접 나서서 방문할 생각이었다. 때문에 강철영에게도 은밀히 추적만 하라고 했지, 접촉하라는 명령은 하지 않은 것이다.
하여튼 철권문에서는 이번 일에 문주인 강철영을 비롯해 최정예 이십여 명을 동원했다.
강철영은 철권문 내에서도 추적과 침입의 전문가인 석청, 성문 형제를 앞세워 사람이 있을만한 곳부터 뒤지기 시작했다.
석청, 석문 형제는 우선 장백산 인근에서 살아가는 화전민이나 사냥꾼들을 통해 정보를 얻어냈다.
생전 처음 보는 낮선 사람들이 장백산에 대해 물어보자, 화전민들은 의아한 듯 표정을 지으면서도 순순히 그들이 원하는 대답을 해주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제까지 돌아다니면서 파악한 장백산의 지형을 철권문의 무인들에게 상세히 알려주었다.
물론 그 이면에는 심상치 않은 기운을 풍기는 철권문의 무인들에 대한 두려움이 깔려 있었다.
철권문의 사람들이 물러간 후 화전민 마을의 촌장은 자신의 허연 수염을 쓰다듬으며 탄식처럼 중얼거렸다.
"허~어! 또다시 장백산에 피비린내가 풍기겠구나."
그는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수십 년 전에 이곳에 들어왔던 무인들을....
그 당시 이곳에 들어와 약탈을 자행하며 화전민의 마을을 차지하려던 무인들을 채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모두 싸늘한 시신으로 변하고 말았다.
마치 바위에 눌린 듯 처참하게 으깨진 시신들, 그 처참함 광경에 마을 사람들은 욕지기를 하며 울어야 했다.
비록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빼앗으려던 사람들이지만 그만큼 그들의 시신은 처참함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 이후로 몇 번인가 또 그런 일이 있었다.
이곳에 들어온 무인들은 어김없이 죽어나갔고, 마을 사람들은 그런 시신을 수습해야 했다.
그제야 마을 사람들은 알았다. 이곳 장백산에 상상하기도 두려울 만큼의 무서운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을,
그는 자신의 영역에 결코 일반인들이 아닌 무인들이 들어와 설치는 꼴을 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는 일반인들에게는 그 어떤 존재감도 들러내지 않았지만, 함부로 자신의 힘을 믿고 설치는 무인들에게는 그야말로 지옥으로 안내하는 저승사자였다.
이제는 기억에서 지워졌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무인들이 들어오자 촌장은 그날의 악몽이 다시 살아나는 듯했다.
그날의 일을 기억하는 몇몇 노인들은 고개를 흔들며 젊은 사람들에게 당분간 산의 출입을 금지하라고 단단히 일렀다.
촌장은 안개에 휩싸인 장백산의 산봉우리들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제발 산신께서 크게 노하지 않으셔야 할 텐데......"
석청, 석문 형제는 사람들이 살만한 곳으로 몇 군데를 추렸다.
광활한 장백산을 이십여 명에 불과한 인원으로 뒤지는 것이 힘이 드니 범위를 좁힌 것이었다. 그렇게 철저한 수색이 시작됐다.
철권문의 무인들이 사람이 살만한 곳이라면 그곳이 어디든 철저하게 뒤졌다. 그들의 수색은 며칠에 이루어졌다.
광활한 장백산을 뒤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철권문의 무인들은 모두 절정의 무공을 익혔기 때문에 일반사람들보다 훨씬 빨리 수색을 해나갈 수 있었다.
"이곳에도 없다면 반대편 봉우리를 뒤져야겠어. 아무래도 그쪽이 햇볕이 비추는 것이 사람들이 살기에 적합한 것 같거든."
"내 생각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이곳 계곡도 가능성이 없지는 않아.
식수를 구하기 용이한데다, 출입하는 통로마저 이렇게 좁으니 가히 한 명의 병사로 백 명의 적을 막을만한 곳이야."
"음!"
석문의 말에 석청이 동의를 했다.
그의 말마따나 이곳 역시 사람 살기에 최적의 조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문주인 강철영에게 전했다.
그러자 강철영은 자신의 부하들에게 각별히 주의할 것을 당부했다.
철권문의 무인들은 그렇게 이름 모를 계곡을 이 잡듯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이곳에서 사람의 흔적을 찾아냈다.
"사람의 발자국이다."
"그런데 무슨 발자국이 이렇게 큰 거지? 이 보폭 좀 봐."
석청, 석문 형제의 눈에 곤욕스런 빛이 떠올랐다. 분명 그들 눈앞에 보이는 발자국은 사람의 것이 분명했는데, 그 보폭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보통 일반 사람들의 보폭이 두 척 반 정도라고 볼 때, 지금 그들 앞에 있는 발자국 간의 거리는 세 척이 훌쩍 넘었다.
"보폭으로 추측해 보건데, 발작국의 주인은 키가 칠 척 반(225cm)정도 되겠군."
그들은 보폭으로 유추해낸 발자국 주인의 키에 질렸다는 얼굴로 대화를 나누었다.
보통 건장한 일반인의 키가 오 척 반(165cm)에서 육척(180cm)정도인데, 발자국의 주인은 그들보다 머리 둘 정도가 더 컸기 때문이다.
이정도의 키라면 가히 덩치가 산만할 것이다.
강철영 역시 바닥에 난 발자국을 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한 줄기 희열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키가 크다고 해서 강한 것은 아니다. 일반인이 아무리 키가 커봐야 무공을 체계적으로 익힌 무인을 당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곳의 특수성을 감안해볼 때, 발자국의 주인은 무공을 익혔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것은 곧 자신들의 임무가 막바지에 다다랐다는 것을 뜻했다.
강철영은 부하들에게 주의를 요구했다.
"이제부터는 은밀히 움직인다. 정황으로 보아 이곳에 마선께서 추적을 지시한 무가가 있을 확률이 높다. 모두들 주의하도록."
"옛!"
이십여 명의 남자들이 조용히 대답했다.
강철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석청, 석문 형제들에게 발자국을 추격할 것을 지시했다.
다시 조심스런 추적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무척이나 조심스럽게 발자국이 향한 방향을 추적해 나갔다.
그렇게 얼마나 추적을 했을까?
그들은 계곡의 가장 깊숙한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
누군가의 입에서 절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너무나 아름다운 주변경관 탓이었다.
기암절벽이 마치 병풍처럼 펼쳐져 있고, 그 한가운데 시원한 폭포와 계곡물이 흐르고 있다.
더구나 곳곳에 기화요초가 만발하여 풍취를 더해주니, 이곳이 마치 선계의 광경인 듯 보였다.
생전 처음 보는 절정에 그들은 할 말을 잊었다. 그들은 넋을 잃고 한참을 두리번거리고 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그때 석청이 손을 들어 어느 한 곳을 가리키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일행의 눈이 일제히 석청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향했다.
"저....."
누군가 무의식중에 말을 꺼내려다 황급히 자신의 손으로 입을 막았다. 철권문의 무인들은 기척을 최대한 죽인 채 석청이 가리킨 곳을 주시했다.
한눈에 보기에도 키가 칠 척 반이 훌쩍 넘어가는 기골이 강대한 중년의 남자, 정말 산만한 덩치라는 말이 그 남자를 위해 있는 말 같았다. 그만큼 남자의 덩치는 압도적이었다.
중년 남자는 폭포수 옆에 커다란 하얀 바위 위에 앉아있었는데,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이 마치 운공이라도 하는 듯 보였다.
강철영은 그를 잠시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혹여 저자가 마선께서 찾으라고 명령한 무가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일단 저자를 관찰해야겠구나.'
혁련후는 절대 자신들의 존재를 눈치 채지 못하게 하라고 명령했다.
때문에 강철영은 직접 그와 접촉하는 것보다 그를 관찰하는 것을 택했다. 철권문의 무인들은 나직이 포복을 한 다음 은밀한 시선으로 중년 남자를 관찰했다.
중년 남자는 하얀 바위 위에 가부좌를 튼 자세로 변함없이 앉아 있었다.
그는 마치 돌부처처럼 계속해서 같은 자세를 유지했는데, 만약 간간히 내쉬는 숨이 없었다면 진짜 석상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 호흡마저도 경악스러울 정도로 간격이 길었다.
그것은 그만큼 중년 남자의 내공이 심후하다는 것을 뜻했다.
만약 강철영이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면, 이 사실을 금방 알아차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불행히도 강철영은 너무나 먼 곳에 있었다.
꿈틀~!
어느 순간 중년 남자가 움직였다.
아니 중년 남자는 여전히 변함없는 자세였다. 움직인 것은 중년 남자가 아니라 그가 앉아있는 커다란 하얀 바위였다.
"저것은........?"
그 순간, 철권문의 무인들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들이 이제까지 바위라고 생각했던 물체는 다름 아닌 커다란 백호였던 것이었다. 머리끝에서 몸 끝까지 이 장이 넘는 거대한 덩치를 가진 하얀 호랑이.
크르릉~!
백호의 입에서 나직한 울음이 터져 나오며 커다란 눈이 번쩍 뜨였다. 그러자 마치 화등잔처럼 환한 빛이 뿜어져 나오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크릉~.
백호는 철권문의 무인들이 있는 곳을 바라보며 기분이 나쁘다는 듯이 울음을 터트렸다.
그에 철권문 무인들은 자신도 모르게 흠짓했다. 분명 백호의 울음소리는 자신들을 겨냥해 울린 것이기 때문이었다.
'들킨 것인가?'
장백산의 영물인 백호가 대단하다고 말은 들었지만, 설마 백여 장이 넘는 거리를 격하고 자신들의 채취를 발견할 줄은 미처 몰랐다.
물론 그때까지도 자신들은 백호를 단순히 커다란 바위라고 생각했지만.결국 철권문의 무인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록 백호에 의해서 그들의 모습이 들통 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두렵다거나 당혹스럽지는 않았다.
제 아무리 장백산의 백호가 영물이라 해도 자신들이라면 누가 나서도 백호를 죽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중년 남자에 대해서는 아직 어떠한 정보도 없었기에 쉽게 단언할 수 없었다.
어쨌거나 이왕 그들의 모습이 드러났기에 그들은 중년 남자에게 직접 이곳에 있는 무가를 확인하기로 결심하고 그에게 다가갔다.
백호는 그들의 기척을 발견한 처음을 제외하고는 울음을 터트리지 않았다. 단지 오연한 시선으로 그들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장백산의 백호가 천하에서 으뜸가는 영물 중 하나라더니, 과연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구나!'
커다란 바위처럼 대지를 받치고 있는 백호의 모습은 그 누가 보더라도 절로 감탄이 나올 만큼 위압적인 모습이었다.
그렇게 감탄 속에 철권문의 무인들이 백호 근처에까지 도달했을 때 중년 남자의 눈이 번쩍 떠졌다.
순간 철권문의 무인들은 엄청난 충격이 그들의 심장을 관통하는 것을 느꼈다.
실제로 어떤 충격이 그들에게 가해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만큼 중년 남자의 눈빛은 심혼을 울릴 만큼 강렬한 것이었다.
"또다시 불청객들인가?"
그는 나직이 중얼거리며 백호의 등에서 내렸다. 그러자 거대한 그의 몸이 한눈에 들어왔다.
거대한 백호 옆에 서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작아 보이지 않는 그의 덩치는 철권문의 무인들을 위축되게 만들었다.
그러나 강철영은 이에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입을 열었다.
"당신이 이곳 장백산에 자리를 잡고 있다는 무가의 사람이오?"
그러자 중년 남자가 매우 굵으면서도 저음의 목소리로 답했다.
"이곳에 무가 따위는 없다. 너희들은 그만 돌아가거라."
사람을 무시하는 그의 태도에 철권문의 무인들이 기분 나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강철영 역시 마찬가지였다.
강철영은 중년의 남자를 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당신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우리 역시 그렇게 만만한 사람들은 아니오.
이곳 장백산에 무가가 있다는 믿을만한 정보를 듣고 왔으니, 우리를 그곳으로 안내해주시오. 그럼 두말하지 않고 돌아갈 것이오."
그의 말에 중년 남자가 나직이 말했다.
"아직도 이곳 장백산에 미련을 두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는가? 하지만 이곳은 너희 같은 인물들이 들어올 곳이 못된다."
"이곳이 못 들어올 땅이라는 것은 내가 알 바가 아니오. 난 이곳에 있다는 무가를 찾아야 할 임무가 있소.
그것은 하늘이 두 쪽 나더라도 반드시 지켜야할 지상과제요."
강철영은 은근히 기세를 피워 올리며 중년 남자를 압박했다.
그러나 중년 남자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한마디 했다.
"돌아가라. 최후의 경고다."
이어 그는 자신의 옆에 붙어 있는 백호와 더불어 걸음을 옮겼다.
철저하게 자신들을 무시하는 중년 남자의 모습에 철권문 무인들의 얼굴에 노기가 떠올랐다.
그중에서도 이제까지 사람의 흔적을 찾느라 제일 고생했던 석청, 석문 형제의 화가 머리끝까지 치속아 있었다.
"이놈! 감히 이런 산구석의 촌놈이 어디서 지랄을....."
그들은 몸을 띄워 중년 남자의 머리를 뛰어넘으며 그를 가로막으려 했다.그러나 그 순간 들린 착 가라앉는 중년 남자의 목소리.
"더 이상 경고는 없다."
부~웅!
마치 거대한 통나무가 휘둘러지는 듯한 파공음과 함께 중년 남자의 주먹이 석청의 가슴에 작렬했다.
쿠~와~앙!
"케에엑!"
마치 벽련탄이 터지는 듯한 광음과 함께 석청의 처절한 비명소리가 장백산의 계곡을 울렸다.
순식간에 석청의 가슴에 거대한 바람구멍을 만든 중년 남자는 맹렬히 몸을 회전하며 팔꿈치로 석청의 바로 옆에서 날아오던 석문의 목덜미를 찍었다.
"이놈이.....!"
석문은 눈 깜짝할 사이에 자신의 동생이 죽은 것에 분노를 하며 자신의 절기인 천붕권(天崩拳)을 펼쳐냈다.
천붕권은 이름 그대로 하늘이라도 무너뜨릴만한 위력을 가진 권으로 철저한 패도를 지향했다. 그만큼 위력에 절대적인 자신이 있는 권이었다.
하지만 그런 석문의 천붕권은 남자의 팔꿈치에 촌각도 견뎌내지 못했다.
콰드득!
팔꿈치와 부딪힌 석문의 팔뚝은 허무하게 부러져 나가며 원래 중년 남자의 목표였던 목덜미까지 밀렸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남자의 엄청난 팔꿈치 공격은 석문의 팔뚝과 함께 그대로 목뼈까지 부숴버리고 만 것이다.
"...........!"
비명도 없었다. 목뼈가 부러진 석문은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다.
단 한 번의 지르기와 팔꿈치 공격이 만들어낸 참극, 강철영과 철권문의 무인들 눈에 분노의 빛이 떠올랐다.
"감히 철권문의 무인을 죽이다니! 아무리 마선의 명이라 해도 못 참겠다. 녀석을 내 앞으로 끌고 와 무릎을 꿇려라!"
강철영의 명령에 철권문의 무인들이 일제히 중년 남자를 향해 쇄도했다.
쉬이익~!
바람을 가르며 맹렬히 돌진해오는 철권문의 무인.
그러나 그들을 바라보는 중년 남자의 눈빛에는 여전히 어떤 감흥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지척으로 다가온 순간 그의 눈에 거대한 살기가 떠올랐다.
팟~!
그가 대지를 박찼다. 그러자 그 거대한 덩치가 엄청난 속도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남자들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쇄도했다.
거대한 바위가 산에서 굴러 내리는 듯한 그 모습에 남자들의 얼굴에 질렸다는 기색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들은 전혀 물러섬 없이 철권문의 절기인 패력대마권(覇力大魔拳)을 펼쳐냈다.
우우~웅!
패력대마권이 펼쳐지자 엄청난 경기가 일어나며 중년 남자를 향해 덮쳐왔다. 그러나 중년 남자는 전혀 물러섬 없이 경기의 그물을 향해 정면으로 부딪쳤다.
"감히, 우리의 권을 맨몸으로 감당하겠다는 말이냐?"
"아주 갈기갈기 찢어 죽여주마!"
그들은 자신들을 무시하는 중년 남자의 공세에 노기를 터트리며 더욱 공력을 가했다. 그러자 경기가 더욱 사납게 중년 남자를 향해 몰아쳤다.
슈우우~!
순간 그들이 격돌했다.
중년 남자는 철권문의 무인들이 뿜어낸 경력을 모두 자신의 왼쪽 어개 하나로 받아냈다. 그리고 믿을 수 없게도 그의 어깨에 작렬한 경력은 허무하게 사그라지고 말았다.
콰~아~앙!
이어서 터져 나온 엄청난 굉음.
"으아악!"
중년남자의 어깨에 제일 먼저 부딪친 철권문 무인 하나가 처참한 비명을 내지르며 뒤로 훨훨 날아갔다.
십여 장이나 뒤로 날아 바닥에 떨어져 내린 철권문 무인, 이미 그의 몸은 처참하게 몽개진 채 허무하게 숨이 끊어져 있었다.
엄청난 위력의 몸통 공격이었다.
이것은 중년 남자의 절기로, 마치 높은 산 위에서 커다란 바위가 떨어져 내리는 듯한 위력을 가진다해서 낙산암(落山岩)이라는 이름이 붙은 초식이었다.
위~잉!
이어서 중년 남자가 자신을 둘러싼 무인들을 향해 손발을 풍차처럼 휘둘렀다.
매우 단순한 듯 보이는 공격이었지만, 중년 남자의 손발에 걸린 철권문 무인들의 손발은 마치 수수깡처럼 허무하게 부러져 나갔다.
패도를 숭상하는 철권문 무인들의 공격은 남자에게 전혀 통하지 않았다.
중년 남자는 마치 온몸의 근육이 강력한 갑주라도 되듯 자신의 몸으로 철권문 무인들의 공격을 소화해냈다.
파바바방!
중년 남자의 손발이 움직이며 그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공기가 터져나가는 소리가 어지럽게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때마다 철권문 무인들이 처참한 비명을 내지르며 뒤로 날아갔다.
"크아악~!"
"케엑!"
중년 남자의 공격에 당한 철권문 무인들의 몸은 하나같이 처참하게 으스러져 있었다. 그만큼 중년 남자의 공격은 엄청난 위력을 자랑했다.
멀리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강철영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어, 어떻게 저런 무공이.............."
분명히 자신의 부하들이 펼친 무공이 중년 남자를 강타했지만, 중년 남자는 어떤 타격도 받은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부하들이 펼친 무공을 모두 자신의 몸으로 소화해 내며 팔꿈치와 무릎, 그리고 어개 등을 이용한 공격으로 철권문 무인들을 모두 어육으로 만들었다.
"으으으~!"
그 처참한 모습에 강철영은 자신도 모르게 앓는 듯한 소리를 내며 뒤로 주춤 물러섰다. 그리고 죽어라 경신술을 펼쳐 자리에서 벗어나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중년 남자는 이미 모든 사람들을 쓰러트리고 강철영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바위가 덮쳐오는 듯한 그 모습에 강철영은 이를 악물고 극성으로 경신술을 펼쳤다.
그러나 그가 채 몇 장 벗어나기도 전에 그의 등에 중년 남자의 어깨 공격이 작렬했다.
콰~득!
"크엑!"
등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통증에 강철영이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터트렸다.
순간 강철영은 눈앞에 확대되는 거대한 바위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중년 남자의 공격에 의해 몇 장 앞에 있던 거대한 바위까지 밀려온 것이었다.
순간,
콰~아~아~앙!
엄청난 굉음과 함께 바위에 먼지가 치솟아 올랐다.
쩌어억!
이어 바위가 두 조각으로 갈라지고 그 사이에 박혀있는 강철영의 모습을 중년 남자가 바라보고 있었다.
중년 남자의 강렬한 어깨 공격은 강철영의 척추를 산산조각 낸 것도 모자라 가로막고 있던 거대한 바위마저 동강내고 만 것이다.
그야말로 엄청난 위력을 가진 어깨 공격이었다.
중년 남자는 자신이 어육으로 만들어 놓은 강철영을 아무 감흥 없는 눈빛으로 바라보더니 중얼거렸다.
"이곳까지 대륙의 불청객들이 찾아오다니.... 분명히 나를 찾아온 것 같은데... 혹, 황이 때문인가?"
이미 오래전에 자신의 곁을 떠난 자신의 장남, 하지만 그는 자신의 장남을 걱정하지 않았다.
"자신의 일쯤이야 알아서 잘 해결하겠지. 그러고 보니, 원이가 내려간 지도 한 달이 지났구나. 지금쯤이면 대륙에 들어갔을 텐데......"
그의 둘째 아들도 얼마 전에 산을 내려갔다. 덕분에 얼마 전부터 그는 이곳에서 혼자서 생활하고 있었다.
크릉~!
그때 백호가 그의 곁에 어슬렁어슬렁 다가와 그 큰 몸을 중년 남자에게 비볐다. 딴에는 애교를 떠는 것이리라.
중년 남자는 그런 백호의 거대한 몸을 안아주며 잠시 중원이 있는 곳을 바라보다 산봉우리를 향해 몸을 돌렸다.
바람결에 그의 굵은 목소리가 흩날렸다.
"대륙이라........."
주르륵~!
초풍영의 뺨 위로 한 줄기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평소 신황이나 초관염 앞에서도 절대 위축되는 법이 없는 그의 모습을 생각해볼 때, 지금의 광경은 무척이나 생소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당사자인 초풍영은 그런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사, 사조님...."
그는 눈앞의 노도인을 보며 입을 열었다.순간 노도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어찌된 게..... 네놈은 한번 산을 내려가더니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냐?
아무리 성수신의에 관계된 일이라지만 명색이 도인인데, 그리 세속적인 일에 관심을 두고 본산에는 그리 무심한게냐?"
"죄....송합니다."
초풍영의 고개가 푹 숙여졌다. 그가 제 아무리 성격이 쾌활하고 겁을 모른다 할지라도 상대는 하늘보다 더 높은 그의 사조였다.
또한 그가 익히고 있는 삼재연혼검(三才燃魂劍)을 만든 장본인이기도 했다. 그러니 그가 어찌 함부로 입을 열 수 있겠는가!
"여하튼 수고 많았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꽤 많은 일을 겪었더구나."
"예.....!"
적엽진인의 따뜻한 말 한마디에 초풍영은 긴장이 조금 풀리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언제든 적엽진인은 그에게 어려운 사람이었다.
"이제 팽가주가 어느 정도 기력을 되찾았다고 하니 얼굴을 봐야겠다. 네가 앞장을 서거라."
"예! 사조님"
팽만우를 보러간다는 적엽진인의 말에 초풍영은 공손히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앞장섰다.
'에휴~! 사조님이 직접 내려오시다니, 이렇게 되면 형님과 세상을 돌아다니는 것은 물 건너갔구나.'
시실 초풍영은 앞으로도 신황을 따라 강호를 유람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적엽진인이 직접 세상에 나온 이상 그의 소박한 꿈(?)은 물 건너갔다고 봐야했다.
팽만우의 몸은 많이 좋아져 있었다.
초관염이란 걸출한 의원이 옆에서 치료하는데다 그의 심후한 내공이 스스로의 몸을 치료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그토록 중상을 입고 인사불성이 되었던 팽만우는 이제 스스로 조금씩 걸음을 움직일 수 있을 만큼 회복이 되어있었다.
팽만우는 정자에 앉아 마당에서 토닥거리며 다투고 있는 팽관수와 무이를 바라보았다.
아까부터 무슨 일인지 팽관수와 무이는 서로 내가 맞네, 네가 틀렸네 하면서 말싸움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큰소리가 나오지 않는 것이, 또 사소한 일을 가지고 다투는 것 같았다.
그들을 바라보는 팽만우의 눈빛에는 여러 가지 빛이 복잡하게 떠올라 있었다.
"불과 몇 달 사이에 두 번이나 죽음을 경험하다니....."
비록 불사조처럼 죽음의 늪에서 빠져나오긴 했지만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다.
그가 감회가 어린 눈으로 그렇게 한참동안 팽관수와 무이가 다투는 모습을 바라보다 옆에 조용히 서 있는 팽주형을 보며 말했다.
"천하대회의가 시작되었다고 하였느냐?"
"예! 아버님. 오늘부터 비무대회가 열린다고 하더군요."
"밖은 무척 시끄럽겠구나."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무림맹에서 만든 비무대로 몰려갔습니다."
무림맹의 내성이 열렸다.
평상시 일반 무인들은 절대 출입할 수 없는 내성이 열리고 그곳에서 비무대회가 진행되기 때문에 지금 무림맹은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나 다름없었다.
"회의는 언제 열린다고 하느냐?"
"비무대회가 열리는 중간에 같이 진행된다고 합니다. 일반 무인들의 눈과 귀는 모두 비무대회로 돌려놓고 중요 안건은 비중 있는 인사들로만 진행하려는 계획입니다."
"음! 제갈문다운 생각이로구나."
팽만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원래부터 비무대회라든지 무림대회는 일반 무림인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해 벌이는 경우가 많았다.
무인들의 이목을 집중시켜 놓고, 뒤로는 다른 일을 진행하는 것은 거대한 문파의 수장들이라면 한번쯤은 써먹는 수법이었다. 그만큼 효과가 확실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번 천하대회의에는 네가 가주의 자격으로 나가거라."
"아버님?"
뜻밖의 말에 팽주형이 놀란 얼굴을 하였다. 그러자 팽만우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이제 나는 강호의 일에서 완전히 은퇴를 할 게야. 벌써 두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어.... 이제 관수와 무이를 보며 낙을 찾을 것이다.
이제부터는 너의 시대다. 이제부터 팽가의 가주로써 모든 권한은 너에게 넘어간다."
"아버님. 그럴 수는 없습니다. 아직 아버님은 정정하십니다."
"이젠 쉬고 싶어 그런다. 세가로 돌아가면 정식으로 가주 직을 인계할 테니 그리 알거라. 그리고 이제부터는 네가 가문을 이끌거라."
"아버님!"
힘들고 지쳐 보이는 팽만우의 모습에 팽주형은 더 이상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때 팽광형이 다가오며 말했다.
"가주님, 무당의 적엽진인께서 뵙겠다고 찾아오셨습니다."
"이곳으로 뫼시거라, 주형이도 나가보고."
"알겠습니다."
대답과 함께 팽주형과 팽광형이 정자를 나갔다.
잠시 후, 혼자 남은 팽만우에게 적엽진인이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적엽진인은 반가운 얼굴로 팽만우를 보며 말했다.
"무량수불! 정말 오랜만에 뵙소이다. 그간 고초를 많이 겪었다고 들었는데 몸은 좀 어떻습니까?"
"허허~! 염려 덕분에 좋아졌습니다. 어서 앉으시지요."
"무량수불!"
적엽진인은 팽만우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 맞은편에 앉았다.
"큰일을 겪었다 들었습니다."
"부끄럽게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여러 사람 덕분에 위기를 넘겼습니다.
특히 무이, 저 아이의 백부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지요. 그 은혜를 다 어떻게 갚아야 할지 걱정입니다."
어느새 다툼을 끝내고 팽관수와 웃고 떠드는 무이의 모습을 보며 팽만우가 말했다. 그러자 적엽진인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무이에게 향했다.
그는 무이를 보며 말했다.
"참으로 귀여운 아이군요. 신황, 그 사람이 왜 그리 아끼는지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허허~!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아이지요. 저 아이 덕에 내가 살아가는 느낌이 가질 수 있어요. 무이의 백부는 저 아이 아버지와의 인연으로 이제까지 친자식처럼 돌봐주고 있지요."
"무량수불! 정말 인연입니다. 흔히 찾아볼 수 없는......"
적엽진인은 팽만우와 일상적인 대화를 나눌 뿐, 무림맹에 관해서는 다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그가 팽만우와 나눈 이야기는 그저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들이었다.
그들은 수많은 세월을 살아오면서 쌓은 경륜의 소유자답게 결코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를 쉽게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적엽진인은 잠시 말을 멈추고 팽관수와 이야기를 나누며 꺄르르 웃음을 터트리는 무이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보면 볼수록 호상(好相)이었고, 귀상(貴相)인 아이였다.
"지금 당장은 힘이 드는 일이 많겠지만, 워낙 인복과 좋은 인연을 타고났으니 나중에 필히 귀한 사람이 되겠군요."
"감사합니다, 진인, 기리 좋은 말씀을 해주셔서."
"사실대로 말한 것뿐입니다. 감사 받을 말이 아닙니다."
천살성의 기운을 억누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무이는 충분히 보호를 받아야 할 아이였다. 적엽진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팽만우는 잠시 적엽진인을 보더니 무이에게 소리쳤다.
"관수하고 무이, 이리로 잠시 와 보거라."
그의 소리에 팽관수와 무이는 떠들던 것을 멈추고 급히 이쪽을 향해 달려왔다.
"부르셨습니까?"
얼굴이 붉게 상기된 채 얼굴을 들이미는 무이의 모습에 팽만우는 웃음을 지으며 적엽진인을 가리켰다.
"인사드리거라. 무당의 최고 어르신인 적엽진인이시다. 세상에는 검선(劍仙)이라는 별호로 이름을 알리고 계시다."
그의 말에 팽관수와 무이가 예의 바르게 인사를 했다.
"팽관수가 무당의 검선께 인사를 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예의 바르게 인사를 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 적엽진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들이 있어 팽가의 앞날이 밝게 보입니다. 정말 두 사람 모두 뛰어난 기재들입니다."
"과찬의 말씀입니다. 하지만 나름대로 열심히는 합니다."
적엽진인의 말에 팽만우가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핏줄이 뛰어나다고 하는데 어떤 이가 흐뭇한 마음이 들지 않을까? 더구나 칭찬을 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자신보다 윗줄에 있는 실력자이다.
팽만우는 절로 흥겨운 마음이 드는 것을 느꼈다. 불과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의 마음은 상당히 무거웠는데 이제는 이리 흥겨운 마음이 드니,
정말 사람의 일이라는 것이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적엽진인이 관심을 가진 것은 매우 당연하게도 무이였다. 그는 무이의 맑은 눈망울을 보면서 인자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항상 깨끗하고 맑게 자라거라. 하늘은 너에게 매우 소중한 재능을 주었으니....."
"소중한 재능이요?"
무이가 의아한 듯 물었다. 무이는 아직 자신이 무슨 재능이 특별히 있다고 느껴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무이의 반문에 적엽진인이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타고나는 것은 꼭 육신의 재능만이 아니다. 너는 육신의 재능보다 더 소중한 것을 가지고 태어났음이니....."
적엽진인은 무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른 손으로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는 손 안에 들린 물건을 잠시 만지다 무이에게 건네주었다.
"이것을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거라."
적엽진인이 무이에게 건네준 것은 예전에 그가 벼락에 맞아 반쯤 탄 대추나무, 이른바 벽조목(霹棗木)을 우연히 발견하고 손수다듬어 만든 목걸이였다.
"별다른 것은 아니지만, 사악한 것들이 침범하지 못하게 너를 지켜줄 것이니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거라."
"와~! 고맙습니다. 도사 할아버지!"
무이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적엽진인이 주는 목걸이를 받아들었다. 그것은 무척이나 투박한 모양이었지만 왠지 따뜻한 느낌이 들게 했다.
"진인께서 너무 무리하시는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리 귀한 것을 주시다니."
팽만우가 무이가 들고 있는 목걸이를 보며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알고 있었다. 보기에는 투박하게 생긴 저 목걸이에 적엽진인의 도력이 담겨 있다는 것을. 그것은 일반 귀중품이나 금은세공품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예로부터 벼락에 맞은 대추나무는 귀신과 사악한 모든 것을 물리친다는 힘이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거기다가 적엽진인의 도력이 담겨 있으니 어지간한 도가의 부적보다 훨씬 영험한 효과를 볼 것이다.
그러나 적엽진인은 그리 귀한 것을 주면서도 별것이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허허~! 이 아이에게 빚을 지으려고 이 늙은이가 잔머리를 굴린 것입니다. 팽대협께서는 부디 너그럽게 봐주십시오."
"허어~!"
선물을 줘놓고 오히려 빚을 지으려고 한다는 적엽진인의 말에 팽만우가 나직한 탄성을 터트렸다.
적엽진인은 목걸이를 목에 걸고 웃음을 짓는 무이를 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아이야! 넌 그저 있는 그대로 밝고 깨끗하게 자라면 된다. 그것이 천하를 도와주는 것일지니.....'
그는 무이의 소명이 천살성의 기운을 억누르는 것이라 생각했다.
자신이 손을 쓴다면 천살성을 제압하지 못할 것도 없다고 생각 했지만,
그래도 제일 좋은 방법은 흉성이 아예 분출되지 않도록 적절히 제어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것이 적엽진인이 무이에게 바라는 바였다.
".........."
무이의 옆에는 이미 모두의 관심 밖으로 멀어진 팽관수만이 민망한 표정으로 입만 뻥긋거리고 있었다.
무림맹의 내성에 세워진 거대한 비무대.
표면이 고른 청석을 일 장 높이로 쌓아 만든 사방 십여 장의 이 비무대는 무림맹 내성 거대한 광장에 세워져, 어디에서 보건 한눈에 들어왔다.
이정도 규모의 비무대는 어느 곳에서도 보기 힘들었다. 그만큼 무림맹에서는 이번 비무대회에 심혈을 기울였다.
비무대 바로 옆에는 귀빈들을 위한 관람대가 특별히 마련되었다. 관람대에는 이미 무림에서 손꼽히는 고수들과 명가의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있었다.
그들은 근엄한 표정으로 앉아 잠시 후부터 벌어질 비무를 기다리고 있었다.
비무대 주위에는 인산인해를 이룬 사람들로 움직일 틈조차 없었다. 그 모두가 오늘부터 벌어질 비무대회를 구경 온 무인들이었다.
그들의 눈은 비무대 위에 있는 한 사람을 향해 집중이 되어있었다.
제갈문은 자신의 발밑으로 보이는 수많은 무인들을 보며 자못 오연한 미소를 지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발밑에 존재하고, 그들이 자신을 우러러보는 기분은 아마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만인의 머리 위에 존재하는 그 기분은 제갈문에게 모두의 머리 위에 서 있다는 우월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잠시 우월감에 젖어있던 제갈문은 곧 내공을 실어 비무대회의 시작을 알렸다.
"이렇게 많은 무인들이 천하대회의에 관심을 가져주신 것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저는 이번 천하대회의와 비무대회의 진행을 맡은 무림맹의 문상 제갈문이라고 합니다."
"와아아아~!"
"우와아~!"
제갈문이 자신을 소개하자 곧 떠들썩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제갈문은 자신을 연호하는 함성을 기분 좋게 즐기다 말을 이었다.
"우선 천하대회의에 앞서 모든 분들이 기분 좋게 즐길 수 있게 비무대회를 엽니다.
이번 비무대회를 특별히 부른다면 아마 신병쟁탈전(神兵爭奪戰)이라는 표현이 제일 좋을 것 같군요.
아마 여러분들도 명칭에서 느낄 수 있겠지만, 이번 비무대회의 성품은 다름 아닌 백무광 대협께서 보관하고 있던 고대의 신병(神兵)입니다."
"우와아아아~!"
제갈문의 말이 끝나자마자 군웅들이 거대한 함성을 내질렀다.
무기를 생명처럼 여기는 무인들에게 좋은 무기는 항상 관심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신병을 상품으로 내건다고 하니 눈이 뒤집힐 수밖에그들의 눈은 상품에 대한 욕심으로 번들거기 시작했다.
제갈문은 그런 광경을 보며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이것이 그가 원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그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둘러보며 말문을 이었다.
"이번 비무대회에 상품으로 걸린 신병은 저희 무림맹에서 특별한 경로를 통해 입수한 것으로, 혈영신도(血靈神刀)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단지 이름만 보자면 마도의 물건이라는 느낌이 드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고대의 명장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만든 물건으로써 피독(避毒), 피화(避火), 피수(避水)의 효능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주인의 내공까지 증진시키는 묘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아직 발견하지 못한 몇 가지 모용이 더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우와~!"
"그런 물건이......"
제갈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여기저기서 탄성이 쏟아져 나왔다.
제갈문이 말한 효능 중 하나만 있어도 명도(名刀)로 대접받는데, 혈영신도는 그런 묘용이 무려 네 가지나 있었다.
군웅들의 눈에는 탐욕의 빛이 더욱 진하게 어렸다.
당장 혈영신도만 얻는다면, 누가 되더라도 금방 절정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는 유혹이 그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었다.
제갈문은 뒤쪽 관람석 제일 높은 자리에 앉아있는 무림맹주 백무광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혈영신도는 원래 무림맹주이신 백무광 대협이 보관해오던 물건인데 이번 비무대회를 위해서 특별히 내놓으셨습니다. 대단한 결심을 하신 백무광 대협에게 박수를 보냅시다."
"우와아아~!"
"최고다."
"역시 백대협이다! 정말 배포가 크고만."
무인들은 조용히 앉아 미소를 짓고 있는 백무광의 이름을 부르며 환호를 했다.
그에 백무광은 조용히 손을 들어보였다.
"이제부터 참가신청을 받겠습니다. 각 문파에서 오직 한 사람만 내부의 추천을 통해 나올 수 있고,
낭인들이나 개인자격으로 참석하는 무인들은 엄격한 심사를 통해 참가가 결정됩니다. 그리고 비무는 이제부터 칠 일 동안 계속해서 벌어지게 됩니다."
제갈문은 계속해 비무대회의 규칙과 기타 주의할 점을 군웅들에게 설명했다. 군웅들은 그런 제갈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신황은 무림맹의 높은 건물 지붕에서 그 광경을 보며 눈을 빛냈다. 그의 옆에서는 겨우 적엽진인의 손에서 탈출한 초풍영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혈영신도(血靈神刀)라니...., 제갈문상이 말대로라면 정말 대단한 신병이 분명한데, 무림맹에서 엄청난 무기를 상품으로 내걸었군요.
이거, 무인들이 두 눈을 뒤집고 비무대회에 참가하겠는데요?"
"혈영신도라......"
신황은 신병의 이름을 나직이 중얼거렸다.
피 냄새가 물씬 풍기는 이름이었다. 그 점이 마음에 걸리는 신황이었다.
신병쟁탈전의 참가자는 상상을 초월했다.
분명 여러가지 제약을 두고 사람을 엄선해 받겠다고 했지만, 이미 보물에 눈이 먼 참가자들은 그런 소소한 제약 따위는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 대회에 참가할 자격을 얻으려 전 방위로 노력을 했다.
때문에 비무대회 접수처는 수많은 사람들로 인해 인산인해를 이뤘다.
이미 혈영신도라는 보물에 눈이 먼 사람들을 보며 신황은 몸을 돌렸다.
그러나 초풍영은 무언가 미련이 남는지 그 자리에 계속해 앉아있었다.
신황은 그런 초풍영의 모습을 잠시 보더니 말했다.
"너도 신병에 욕심이 나느냐?"
그의 말에 초풍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라면 거짓말이죠. 하지만 그보다는 비무대회에 더욱 마음이 끌립니다.
혈영신도가 상품으로 걸린 이상, 평소에는 모습을 보이지 않던 수많은 고수들이 대회에 참가할 겁니다. 그들을 상대한다면....."
초풍영은 벌써부터 몸이 근질거리는 것 같았다.
무인이라면 누구라도 자신의 무위를 만천하게 펼치고 싶어 한다. 그래서 자신의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을 하고 싶어 한다.
그것은 초풍영도 마찬가지였다.
이제까지 신황과 붙어 다니면서 장족의 발전을 한 그는 이번 기회에 자신의 무공이 어느 정도나 되는지 몸으로 직접 체험하고 싶었다.
초풍영의 얼굴에서 승부욕을 읽은 신황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훗~! 그렇다면 참가해야지."
"저도 그러고 싶은데.... 하필 무당에서 대사형이 와서...., 그 양반도 분명 대회에 참석한다고 할 텐데."
초풍영은 이번에 본산에서 무당의 제자들과 같이 내려온 대사형 서문수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분명 그 역시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할 것이다. 그러나 한 문파에서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너무 많은 사람이 몰릴 것을 염두에 둔 무림맹이 그렇게 규약을 정했기에 두 사람이 참여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 양보할 생각이냐?"
"일단 이야기를 해보고요. 제가 아무리 철없이 날뛰는 놈이라도, 윗사람에 대한 예의까지 없는 사람은 아닙니다. 대사형이 참가하겠다면 양보를 해야지요."
"음!"
그의 말에 신황이 고개를 끄덕였다. 초풍영의 말이 일견 타당하기 때문이다.
초풍영은 그런 신황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형님은 대회에 참가하지 않습니까? 형님이 참가한다면 우승은 따 놓은 당상일 텐데요."
"나에게 무기 따위는 필요 없다."
"하긴....."
신황의 광오한 말에 초풍영은 수긍했다.
온몸이 무기인 사람이 신도 따위가 무슨 필요가 있으랴. 더구나 신도만큼이나 예리한 칼날을 몸에 가지고 있는 사람인데.
"일단 우리 무당파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대사형을 만나 봐야겠습니다. 그리고 결정을 해야죠."
"음!"
초풍영의 말에 신황은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날리려 했다. 하지만 그는 일순 동작을 멈추고 사람들이 몰려있는 비무참가를 신청하는 곳을 봤다.
그에 초풍영도 얼떨결에 같이 고개를 돌렸다. 초풍영의 얼굴이 찡그러졌다.
"저거....염화 아니에요?"
"그런 것 같군."
수많은 인파 속, 당당하게 사람들을 헤치고 신청서를 써내는 여인, 그녀는 다름 아닌 홍염화였다.
"아까부터 보이지 않는다 했더니, 저기에 있었군요."
신청서를 서낸 뒤 해맑게 웃음을 짓고 있는 홍염화, 그녀의 얼굴은 곧 흥분으로 인해 붉게 상기되 있었다.
"어라~! 저 사람은......"
초풍영은 홍염화의 뒤편에 줄을 서 있는 사람 중, 또 한 명 낮익은 사람을 찾아냈다.
수많은 사람들 틈에 있었지만 단연 눈에 띄는 미모를 자랑하고 있는 여인, 그녀는 다름 아닌 마선 혁련후의 딸인 혁련혜였다.
"혁련소저마저 대회에 참가를 하다니, 이거 잘하면 우리가 아는 사람 대부분이 이 대회에 참가하겠습니다."
"................"
신황은 잠시 홍염화와 혁련혜의 얼굴을 바라보다 밑으로 몸을 날렸다. 그에 초풍영도 자신의 뒷머리를 긁적이며 따라 내려갔다.
"저 두 여인이 같이 싸우게 된다면 정말 볼만하겠군."
걱정인지, 아니면 바람인지 모를 초풍영의 말이 바람에 흩날렸다.
무당파의 숙소는 팽가가 머무는 곳의 바로 옆 건물이었다.
팽가와 마찬가지로 독립된 별채를 제공받은 무당파는 숙소에 머물면서 이번 천하대회의 기간 동안 건의해야 할 안건과 여러 가지 현안들을 의논하고 있었다.
실질적으로 무당의 제일 어른은 적엽진인이었지만, 그는 무당의 일에 대해서는 나 몰라라 하고 있었기에 실질적으로 백우진인이 모든 것을 결정하고 진행해야 했다.
때문에 여러 가지 일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 백우진인의 머릿속은 무척이나 복잡했다.
지금 백우진인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이.....놈!"
푸들푸들 떨리는 그의 수염, 그의 눈은 분노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초풍영이 무릎을 꿇고 앉아있었다.
그는 자신을 보며 분통을 터트리는 사숙 앞에서도 무척이나 태연한 모습이었다.
백우진인은 말을 어렵게 한 자 한 자 씹어 뱉었다.
"그러니까, 네놈이 오랜만에 찾아와서 한다는 말이......, 비무대회에 참가하겠다?"
"헤헤~! 꼭 그러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러면 어떨까 해서요."
"노~옴!"
마침내 백우진인이 큰 소리를 내뱉었다. 그러자 초풍영의 머리가 자라처럼 움츠러들었다.
"넌 도대체 정신이 있는 놈이냐, 어떻게 된 놈이냐? 네 숙부를 핑계대고 무당산을 내려간 게 벌써 얼마냐?
그래, 나도 네 숙부이신 초대협을 평소에 흠모하고 존경하단. 때문에 장문사형한테 말씀드려 네 녀석을 내려 보냈다.
그런데 그렇게 내려 보냈더니 산에는 돌아올 생각도 하지 않고 이제까지 싸돌아다니다, 이제 와서 겨우 한다는 말이 비무대회에 대표로 내보내 달라고?"
"헤헤!"
백우진인의 이유 있는 호통에 초풍영이 멋쩍은 웃음만 지었다.
"이번 비무대회에는 대제자인 문수가 나가기로 이미 결정되었다."
"그 결.....정 바뀌기는 힘들겠죠?"
"이놈! 그래도 말귀를 못 알아듣고."
"안다구요, 알아요! 그냥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에요."
백우진인의 말에 초풍영은 더 이상 자신이 나가겠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아무리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고 하더라도 더 이상 우기는 것은 그도 분에 넘치는 일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백우진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그는 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보며 말을 이었다.
"평소 산문 밖을 나서는 법이 없는 사숙께서 친히 이곳에 오셨다. 아직까지 우리에게 특별한 말씀은 없으셨지만 분명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그러는 것일 게다"
'거야 그렇겠지요. 하여간 나이도 드실 만큼 드신 분이 아직까지도 정정하시다니까? 아마 백 살이 넘어도 카랑카랑하실 겁니다.'
초풍영은 속으로 그리 생각했다.
어떻게 된 게 자신의 사조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쩌렁쩌렁한 모습을 보였다. 마치 세월마저도 그의 기백에 비켜가는 것처럼 말이다.
“여하튼 어지러운 형국이다. 그러니 너는 당분간 자중하고 있거라.
그리고 말이 나와서 그렇지, 네 대사형도 이제 어느 정도 경험을 쌓아야 할 때이다. 그러니 아무 말 말거라.”
백우진의 말에 초풍영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가 생각해도 그의 대사형인 서문수는 너무 산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같은 또래의 젊은이들이라면 누구나 바깥 생활에 동경을 갖는데, 그는 우직하다 싶을 정도로 무공에만 몰두했다.
때문에 서른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가 산문 밖으로 나온 것은 겨우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었다.
도인으로써는 반길만한 성품이지만 한 문파를 이끌어갈 수장으로써는 그 경험에 있어 부족한 것이 틀림없다.
때문에 무당에서 이번에 서문수에게 많은 것을 채험할 기회를 주고자 했다.
“에구~! 그럼 이번 비무대회는 대사형이나 응원하면서 구경해야겠군요.”
“잘 생각했다. 그리고 말이 나온 김에 문수가 연무하는 것을 도와주려무나.”
“비무 말인가요?”
“너도 신대협과 붙어 다니면서 많은 경험을 쌓았을 것 아니냐? 그것을 문수에게 알려주란 말이다.”
백우진인은 신황을 인정하고 있었다.
적엽진인과 혁련후 같은 절대자들이 인정하는 남자를 믿지 않으면 누구를 믿는다 말인가? 때문에 백우진인은 신황이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그래서 그와 같이 다니면서 수많은 실전을 겪은 초풍영 또한 인정했다. 이러니저리니 말은 많아도, 그의 재능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바로 백우진인인 것이다.
“에휴~! 뭐, 사백님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그런데 대사형이 날 온전히 상대해주려나 모르겠네요. 꽁하는 성격에 나한테 화풀이하면 곤란한데....”
“훗, 녀석.”
끝까지 여유만만한 초풍영의 모습에 백우진인은 그만 헛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끝까지 초퐁영답다 여기면서 말이다.
“대사형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아마 후원에서 검을 수련하고 있을게다.”
“알겠습니다. 전 대사형에게 가보겠습니다.”
자신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나가는 초풍영의 뒷모습을 보며 백우진인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밖을 돌아다니더니 조금은 그릇이 커진 것 같구나.’
무당의 산문을 벗어나 있는 사이 더욱 성장을 한 것 같은 초풍영을 보며 마음이 기꺼운 백우진인이었다.
백무광은 자신의 거처에 홀로 앉아 있었다. 그는 비무대회를 알리는 개회식에 참석을 한 후 돌아와 조용히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있었다.
무림맹에 들어온 지 벌서 이십 년이 넘었지만, 그는 아직도 사람이 많은 자리가 부담스러웠다.
때문에 오늘처럼 특별한 날이 아니라면 결코 많은 사람들이 있는 자리에서 오래있지 않는다.
그는 잠시 탁자 위에 놓은 찻잔을 들고 향을 즐기다 한 모금 마시고 내려 놓았다.
“칠 일, 칠 일이라........”
좀처럼 표정에 변화가 없는 백무광의 목소리가 자신도 모르게 떨려나왔다. 그만큼 오늘은 그에게도 무척이나 중요한 날이었다.
백무광은 걸음을 옮겨 한쪽 벽으로 다가갔다. 그는 벽에 설치된 몇 가지 기관을 어루만졌다. 그러자 벽 한 면이 통째로 스르릉 움직이며 숨겨진 통로를 들어냈다.
이곳은 누구도 모르는 그만의 공간이었다. 그의 심복이라 할 만한 제갈문도 모르는, 오직 그 자신만을 위한 공간.
그가 이곳을 발견한 것은 그가 무림맹에 들어온 지 이 년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아주 우연한 기회에 이곳을 발견한 백무광은 그날부터 이곳을 오직 자신만의 공간으로 꾸몄다.
통로는 지하로 향해 있었다.
끝없이 지하로 이루어진 비밀통로, 통로의 천장에는 야명주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단지 하나만으로도 금화 수천 냥의 값어치를 지닌다는 야명주가 통로를 따라 쭉 박혀있었다. 덕분에 횃불이 없어도 길을 구별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마침내 백무광이 도착한 곳은 지하 깊숙한 곳에 있는 밀실이었다.
무림맹이 세워질 당시에 만들어진 밀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잊힌 이곳은 아무도 그 존재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덕분에 백무광은 아무런 부담 없이 밀실을 이용할 수 있었다.
사방 삼 장 정도의, 그다지 크지 않은 밀실, 하지만 외부와 완벽하게 차단되어있기에 백무광은 자신이 귀하게 생각하는 물건들을 이곳에 보관했다.
밀실의 벽면에는 각종 병기들이 눈에 띄었다.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기운이 흐르고 있는 신병들, 백무광은 그중에서도 유난히 맑고 청량한 기운을 풍기고 있는 삼 척 길이의 장도를 들었다.
“혈영신도(血靈神刀), 세상의 모든 신병들을 능가하는 마병(魔兵), 천마(天魔)가 쓰던 유일한 무기.”
백무광은 혈영신도를 잡은 손을 통해 느껴지는 전율적인 기운을 즐겼다.
이미 인간이 익힐 수 있는 한계까지 무공을 익혔다고 자부하는 그였지만 혈영신도에서 느껴지는 전율적인 기운은 항상 그를 소름끼치게 만들었다.
그 정도로 혈영신도의 기운은 압도적이었다.
그는 잠시 혈영신도의 감촉을 즐기다 내려놓았다. 더 이상 혈영신도를 들고 있다가는 그 역시 마성에 물들 것 같았기 때문이다.
“천마(天魔), 무림 역사상 가장 강했다고 전해지는 인물, 그러나 그는 모습을 감추고 오직 이 도만 남겼다.”
백 년 전 홀연히 나타나 살육을 자행한 인물, 무림맹이 결성되기까지의 결정적인 단초를 제공했던 인물, 그가 바로 천마였다.
이젠 사람들의 기억에서 거의 잊혀 졌지만, 아직 그를 기억하고 있는 몇 명의 원로 고수들은 아직도 그의 이야기만 나오면 무의식 중에 몸을 떨 정도로 그는 무서운 위명을 날렸다.
천마는 무림을 종횡할 당시 무기를 쓰지 않아 사람들은 그가 무기를 쓰지 못 할 거라 생각하지만, 실은 그의 진짜 무공은 바로 혈영신도를 이용해 펼치는 도법이었다.
하지만 사용한 적이 거의 없어 사람들은 그런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백무광은 눈에 섬뜩한 광기를 피워 올리며 중얼거렸다.
“나를 고향에서 발 돌리게 만든 그 저주스런 가문을 이 세상에서 지워버리기 위해서라면, 난 이보다 더한 선택도 할 수 있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은 그야말로 역천지로(逆天之路), 어쩌면 죽어서도 자신이 원하는 세상으로 가지 못하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제까지 수십 년을 고민하고 번민했지만 이 이상 방법을 생각해내지 못했다.
웅 웅 웅~!
백무광의 광기를 느꼈는지 혈영신도가 나직이 흐느낌을 토해냈다.
밀실은 순식간에 백무광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광기와 혈영신도의 울음소리로 인해 음산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신병쟁탈전의 일정이 잡혔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참가를 신청했기에 조를 분산해 대회를 치르기로 결정되었다.
천(天), 지(地), 홍(紅), 황(黃), 모두 네 조로 나뉘어 칠 일 동안 신병쟁탈전은 벌어지기로 일정이 잡혔다.
또한 구대 문파의 장로들이나 무림에서 위명을 날리는 전대의 고수들이 참관인으로 선택되어 공정한 비무가 되도록 관전을 하기로 했다.
예상보다 규모가 커지자 무림맹에서는 급히 여분의 비무대를 급조해 예선을 치르고, 결선진출자가 가려지면 그때 중앙비무대를 이용하기로 했다.
이제 바야흐로 신병쟁탈전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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