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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懲毖錄)이란? 국보132호
“시경에 ‘내가 지난일의 잘못을 징계하여 뒤에 환난이 없도록 조심한다.’는 말이 있는데 이것이 저술 목적임을 밝히고 있다” 전쟁이 끝난 뒤, 뒷날을 경계하고자 하는 뜻
징비록(懲毖錄)은 전쟁의 원인과 상황, 군국정무에 관한 문서와 기록, 류성룡 자신이 해결한 정책적 문제, 그리고 자신의 시절 논평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양한 문서기록과 필자의 객관적인 기술과 논평이 수록되어 있어 임진왜란에 대한 사료적 가치가 대단히 높다.
유성룡(柳成龍), 『징비록(懲毖錄)』, 필사본, 26×27㎝, 국보 제132호,
유성룡(柳成龍 1542년~1607년), 『징비록(懲毖錄)』,은 임진왜란 당시 영의정이었던 유성룡이 전쟁이 끝난 뒤, 뒷날을 경계하고자 하는 뜻에서 1592년(선조 25)에서 1598년까지의 일을 직접 기록한 것이다. 책에는 전쟁 전 일본과의 관계, 전쟁 발발과 진행 상황, 정유재란 등의 다양한 내용이 담겨 있다. 1936년 조선사편수회에서 조선사료총간(朝鮮史料叢刊) 제11집에 『초본징비록(草本懲毖錄)』이라는 제목으로 영인한 바 있다.
■저자: 유성룡(柳成龍 1542년~1607년)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안동 출생이다. 퇴계 이황(李滉)의 문하생으로 공부했으며, 명종 21년(1566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로 임명되면서 벼슬길에 올랐다.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임명되어 군무를 총괄하였으며, 이순신(李舜臣)과 권율(權慄) 등의 명장을 천거하여 등용시켰다. 피난에 나선 선조를 평양까지 호종(扈從)했으며,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과 함께 평양을 수복하는 데 기여했다. 영의정 겸 4도 도체찰사를 겸하면서 화기제조, 성곽수축, 군비확충 등에 노력했다.
1598년 반대파의 탄핵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한 뒤로는, 조정의 거듭된 부름에도 불구하고 여생 동안 저술에만 몰두했다. 『징비록』 외에도 『서애집』, 『신종록』, 『운암잡기』, 『난후잡록』 등의 저서가 있다.
■안동하회(安東河回)마을
●안동하회(安東河回)마을 중요민속자료 제122호
태백산에서 뻗어온 지맥이 화산(花山)과 북애(北厓)를 이루고, 일월산에서 뻗어온 지맥이 남산과 부용대(芙蓉臺)를 이루어 서로 만난 곳을 낙동강이 S자형으로 감싸 돌아가므로, 하회마을을「山太極 水太極 - 산과 물이 태극 모양」또는「蓮花浮水形-물에 떠있는 연꽃 모양」이라 부른다. 풍수지리에 따른 마을의 주산(主山)을 화산(花山)이라 부르고, 부용대 앞을 흐르는 낙동강을 화천(花川)이라 함은 연화(蓮花)에서 비롯한 이름이라 한다.
하회마을의 풍산류씨의 세거 이전에는 허씨(許氏)와 안씨(安氏)가 먼저 세거하였다고 한다. 하회마을에는 “허씨 터전에 안씨 문전에 류씨 배판”이란 말이 전래되고 있으며, 하회탈의 제작자가 「허도령」이었다는 구전(口傳) 및 강건너 광덕동의 건짓골에 허정승(許政丞)의 묘가 있어 지금도 해마다 류씨들이 벌초를 하고 있으며, 숭정(崇禎)15년(1642)의 동원록(洞員錄)에는 류씨 이외에도 극히 적은 가구의 허씨와 안씨(安氏)가 함께 기재되어 있다.
풍산류씨는 본래 풍산 상리에 살았으므로 본향(本鄕)이 풍산(豊山)이지만, 제7세 전서(典書) 류종혜(柳從惠)공이 화산에 여러 번(가뭄,홍수,평상시) 올라가서 물의 흐름이나 산세며 기후조건 등을 몸소 관찰한 후에 이곳으로 터를 결정했다고 한다.
입향에 관하여「나눔」의 전설이 있는데, 집을 건축하려 하였으나 기둥이 3번이나 넘어져 크게 낭패를 당하던 중 꿈에 신령이 현몽하기를 여기에 터를 얻으려면 3년 동안 활만인(活萬人)을 하라는 계시를 받고 큰고개 밖에다 초막을 짓고 지나가는 행인에게 음식과 노자 및 짚신을 나누어주기도 하고, 참외를 심어 인근에 나누어주기도 하면서 수많은 사람에게 활인(活人)을 하고서야 하회마을에 터전을 마련할 수 있었다고 한다. 입향후 풍산류씨들은 계속된 후손들의 중앙관계에의 진출로 점점 성장하였으며, 입암(立巖) 류중영(柳仲영), 귀촌(龜村) 류경심(柳景深), 겸암(謙菴) 류운룡(柳雲龍),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선생 등의 조선중기에 배춣한 명신들로 더욱 번창하게 되었다.
풍산 유씨의 씨족마을로 유운룡·유성룡 형제 대(代)부터 번창하게 된 마을이라고 한다. 낙동강 줄기가 S자 모양으로 동·남·서를 감싸돌고 있고 독특한 지리적 형상과 빼어난 자연경관을 갖추고 있다. 유씨가 집단 마을을 형성하기 전에는 대체로 허씨, 안씨 등이 씨족으로 살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고유의 하회별신굿탈놀이로 유명한 이 마을은 크게 남촌과 북촌으로 나눌 수 있으며 유서 깊고 제법 크기를 갖춘 많은 문화재를 잘 보존하고 있다. 특히 별신굿에 쓰이던 탈들은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데, 그 제작 연대를 고려 시대로 추정하고 있어 마을의 역사가 뿌리 깊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대표적 가옥이라 할 수 있는 양진당(보물 제306호), 충효당(보물 제414호), 북촌택(중요민속자료 제84호), 남촌택(중요민속자료 제90호), 옥연정사(중요민속자료 제88호), 겸암정사 (중요민속자료 제89호) 등 많은 건축들은 조선시대 사대부가의 생활상과 발달된 집 구조 등을 연구하는데도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더할 수 없이 멋스러운 경치에 민속과 유교 전통을 잘 유지하고 있는 곳으로 우리나라 정신 문화의 연구·보존·발전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마을이다.
●하회마을에는 서민들을 위한 놀이와 선비들을 위한 놀이가 병존하엿다.
하회별신굿탈놀이(河回別神) ------ 굿을 겸한 탈놀이 중요무형문화재 69호
하회선유불꽃놀이 ------ 시회(詩會)를 겸한 불꽃놀이
●명칭 하회탈및병산탈(河回탈및屛山탈) 국보 제121호
경상북도 안동군 하회마을과 그 이웃인 병산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탈로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탈놀이 가면이다.
하회탈로는 11개가 전해지는데 주지 2개, 각시, 중, 양반, 선비, 초랭이, 이매, 부네, 백정, 할미 탈이 있다. 이 밖에 총각, 별채, 떡다리 탈이 있었다고 하나, 분실되어 전하지 않는다. 병산탈로는 2개가 남아 있다.
한국의 가면은 대개 바가지나 종이로 만든 것이 많아서 오래 보존된 예가 드물며, 그 해 탈놀이가 끝난 후 태워버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하회탈과 병산탈은 드물게 보이는 목조탈이며, 격식과 세련됨을 갖춘 유물이다.
원래 해마다 정월 대보름에 거행되는 별신굿에 쓰이던 것이며, 마을마다 따로 가면들을 보존해 왔을 뿐만 아니라 탈에 대한 금기나 제약이 매우 엄격했다. 이 탈의 재료는 오리나무이며 그 위에 옻칠을 두겹 세겹으로 칠해 정교한 색을 내고 있다. 턱은 따로 조각되어 있어서, 아래턱을 노끈으로 달아 놀이할 때 움직이게 함으로써 생동감을 주도록 되어 있다. 하회 가면 중에서도 특히 양반과 백정은 세련된 입체감과 표현기교를 보여주고 있다.
이 탈들의 제작자와 제작연대는 알 수 없으나 마을에는 허도령이 만들었다는 전설이 있다. 다만 하회마을에 살았던 사람에 대한 기록으로 허씨가 살았고, 안씨 집안이 들어온 후, 유씨가 조선 전기에 살았다고 기록이 되어 있어 대체로 고려 중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여진다.
●하회별신굿탈놀이(河回別神굿탈놀이) 중요무형문화재 제69호
별신굿이란 3·5년 혹은 10년마다 마을의 수호신인 성황(서낭)님에게 마을의 평화와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는 굿을 말한다. 경북 안동 하회마을에서는 약 500년 전부터 10년에 한번 섣달 보름날(12월 15일) 내지는 특별한 일이 있을 때 무진생(戊辰生) 성황님에게 별신굿을 해왔으며 굿과 더불어 성황님을 즐겁게 해드리기 위하여 탈놀이를 하였다.
하회별신굿탈놀이는 각시의 무동마당·주지마당·백정마당·할미마당·파계승마당·양반과 선비마당·혼례마당·신방마당의 8마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놀이를 시작하기 전 대내림을 하는데, 정월 초이튿날 아침 성황당에 올라가 당방울이 달린 내림대를 잡고 성황신을 내리면 당방울을 성황대에 옮겨 달고 산에서 내려온다. 성황대와 내림대를 동사 처마에 기대어 세우고 비로소 놀이가 시작된다. 등장인물로는 주지승·각시·중·양반·선비·초랭이·이매·부네·백정·할미 등이 있다. 파계승에 대한 비웃음과 양반에 대한 신랄한 풍자·해학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하회별신굿탈놀이는 제사의식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특히 각시탈은 성황신을 대신한다고 믿어 별신굿 외에는 볼 수 없고, 부득이 꺼내볼 때는 반드시 제사를 지내야 한다. 또한 탈을 태우며 즐기는 뒷풀이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놀이에 사용되는 탈은 주지탈 등을 포함하여 모두 10종 11개로 오리나무로 만들었으며 옻칠과 안료를 두세겹 칠하여 색조의 강도를 높였는데, 원본은 1964년 하회탈 및 병산탈(국보 제121호)로 지정되었다. 탈놀이의 반주는 꽹과리가 중심이 되는 풍물꾼이 하며 즉흥적이고 일상적인 동작에 약간의 율동을 섞은 춤사위로 이루어진다.
하회별신굿탈놀이는 우리나라 가면극의 발생이나 기원을 밝히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어 중요무형문화재 69호로 지정되었다.
테스 형! 세상이 왜 이래? 정말 묻고 싶은 이야기이다. 이것의 답을 찾아야 비로소 문제의 해결이 있을 수 있다.
미래는 과거의 결산이다. 그러므로 역사를 돌아보는 이유는 다가올 미래를 알기 위함이다.
함석헌 옹은 역사를 설명하기를 “한 사람이 잘못한 것은 모든 사람이 물어야 하고, 한 시대의 실패를 다음 시대가 회복할 책임을 지는 것”이라고 명료하게 답했다.
오늘의 세태는 보수나 진보나 누구라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임을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세상이 가관이기 때문이다. 위정자들이나 민초나 정상적이지 않다.
똥개의 특성은 한 마리가 짖으면 온 동네 똥개 모두가 이유도 없이 합창이 된다. 이유도 모르고 똥개 스스로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르는 체....
나는 역사서인 <징비록>을 몇 차례 읽었다. 읽으면서 이처럼 중요한 역사서가 있을까하는 생각을 하지만, 우리 주변에는 <징비록>을 읽어 본 사람이 많지 않은 것 같다. <징비록>은 국보 제132호이다.
더 놀란 사실은 몇 해 전 일본을 방문했을 때 일본서적 중에서 <징비록>을 발견하고 어떻게 이것이 일본사람이 읽는 것인지 의아했었고 한국에 돌아와서 알게 된 것은 <징비록>이 1647년에 간행되었고, 일본에서는 1695년에 번역되어 간행된 것을 알게 되었다.
에도시대에는 일본 지식인들 사이에 베스트셀러였다는 것을 듣고는 읽어야 할 사람은 읽지 않고 경계의 대상인 일본인들이 읽었다는 사실에 난감하기만 하였다.
난 전국을 다니면서 강의나 강연할 기회가 많은 사람으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징비록>을 읽기를 권유하고 있다. 역사의 교훈을 망각하면 수모의 역사는 되풀이 되는 것이다. 우리 역사가 임진왜란, 병자호란, 일제 강점기라는 뼈아픈 역사가 왜 반복되었는가? 이것은 우리가 역사를 게을리 하고 역사의 교훈을 잊은 탓이다. 민족의 자존심을 짓밟히는 수모의 역사가 또 다시 되풀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우리가 스스로 자강할 수 있도록 우리를 담근질 해야 하는 것이다.
<징비록>은 유성룡이 임진왜란 직전의 국내의 정세에서부터 임진왜란의 실상과 왜란 후의 상황을 냉철하게 서술한 역사서이다.
유성룡은 <징비록> 자서에서 <징비록>을 저술한 까닭을 “시경에 ‘내가 지난일의 잘못을 징계하여 뒤에 환난이 없도록 조심한다.’ 말이 있는데 이것이 저술 목적임을 밝히고 있다”
<징비록>을 읽노라면 울분을 삮일 수가 없게 된다. 어떻게 그렇게 망하는 일만 골라서 하였는지? 즉 총체적 난국이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왕은 백성을 팽개치고 도망가기에 급급했고 신하들은 자신의 안위만을 살폈고, 장수들은 싸움한 번 제대로 하지 않았고 군사들은 뿔뿔이 흩어져 도망갔다. 이런 것을 바라보는 백성은 원망하고 통곡하다 급기야 분노하여 경복궁에 불을 질렀다.
이것은 약과에 불과하다. <징비록>에는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지금도 반복되는 기막힌 사실들이 빼곡히 들어 있다.
왜군 침입 후 첫 승전을 올렸던 부원수 신각은 도원수 김원명이 자신을 따라 도피하지 않았다며 명령불복종 죄로 몰려 우상 유홍의 주청으로 참형되었다. 신각이 전투에 이겼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조정에서 참형을 중지하려고 선전관을 보냈으나 이미 집행한 후였다.
한산도대첩을 승리로 이끈 이순신도 모함을 받아 투옥되었으며, 그를 추천한 유성룡도 공격을 받았다.
함경도 회령부의 아전인 국경인은 그곳으로 피난 온 선조의 두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을 포박하여 왜장 가등청정에게 데려가 항복했다.
경상좌병사 이각은 부산이 함락되자 병영으로 재빨리 돌아와서 맨 먼저 제 첩을 피난시키고 본인은 새벽녘에 도망쳤다. 그러자 성안의 인심이 흉흉해지고 많은 군사들은 무너졌다.
<징비록>에는 일본 사신들이 조선의 상태를 어떻게 파악했는지 기술하고 있다. 1586년 일본 사신 다치바나 야스히로는 예조판서가 베푼 잔치자리에서 술에 취해 자리 위에 후추를 흩어 놓았다. 그러자 기생들과 악공들이 다투어 줍느라고 소란을 피우는 것을 보고 통역에게 “너희나라는 망할 것이다. 기강이 허물어졌으니 망하지 않기를 어찌 기대할 수 있겠는가”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임금의 피난 행렬이 의주까지 이르고 나라가 망할 지경에 이르자 서둘러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당신들이 도움을 준다면 속국 정도가 아니라 아예 명나라로 편입하겠다고 구걸외교를 펼치는 사태까지 있었다. 이런 경우를 본다면 징비의 절실함을 깨닫지 않을 수가 없다. 참으로 눈이 아찔한 것을 어쩔 수 없다.
유성룡은 <징비록>을 통해 우리가 얻어야할 교훈으로
첫째, 한 사람이 정세를 잘못 판단하면 천하의 큰 일을 그르칠 수 있으며
둘째, 나라의 최고 자도자가 국방을 다룰줄 모르면 나라를 적에게 넘겨주는 것과 같고
셋째, 전쟁 같은 큰일을 닥쳤을 때에는 반드시 나라를 도와줄 만한 후원국이 있어야 한다는
세 가지로 정리했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생각해봐야 할 것은 임진왜란 당시의 문제가 지금 반복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성찰할 일이다. 아니 반복되고 있으니 신속히 고쳐야 한다는 것이다. 임진왜란의 작태가 고스란히 지금도 자행되고 있다는 것이 나의 시각이다. 작금의 국가의 위태함이 보인다. 위정자의 기강이 무너졌다. 정치인들이 부끄러움을 모르고 있다.
이제 유성룡이 말처럼 “지난 일의 잘못을 징계하여 뒤에 환난이 없도록 조심”해야 한다. 과거의 역사에서 절박함을 배우고, 미래를 대비하려는 자세가 없다면 수모와 치욕의 역사는 다시 찾아올 것이 자명하다.
2020.11.26. 박관후 철학박사
■징비록을 집필한 곳-옥연정사(玉淵亭舍)
경북 안동시 풍천면 광덕리 20 ☎054-854-2202
경북 안동시 하회마을 부용대(芙蓉臺) 아래 절벽 끝에 집을 지은 옥연정사(玉淵亭舍)
부용대(芙蓉臺)은 무궁화꽃 비슷하게 생긴 아욱과의 꽃입니다. 그런데 한자가 '연꽃 부, 연꽃 용'이어서 연꽃을 뜻하기도 합니다. 부용대처럼 지명에 사용되는 경우는 거의 대부분 연꽃의 의미입니다.
만송정(萬松亭) 숲
●명칭 안동하회마을만송정숲(安東 河回마을 萬松亭 숲) 천연기념물 제473호
경북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1164-1 등
만송정 숲은 낙동강이 하회마을을 휘돌아 흐르며 만들어진 넓은 모래 퇴적층에 위치하며, 조선 선조 때 문경공 류운용이 마을 맞은편 부용대의 기를 완화하기 위하여 1만그루의 소나무를 심어 조성한 숲이다.
하회마을, 백사장, 낙동강 그리고 부용대 등과 어우러져 경관이 뛰어난 마을숲으로 경관적,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크다.
■옥연정사(玉淵亭舍) ●명칭 하회옥연정사(河回玉淵精舍) 중요민속자료 제88호 경북 안동시 풍천면 광덕리 20 안동 하회마을은 풍산 유씨의 동족마을로 빼어난 자연경관과 민속·유교 전통을 잘 유지하고 있는 조선시대 양반촌이다. 이 집은 서애 유성룡(1542∼1607) 선생이 학문 연구와 제자를 키우기 위해 세운 것이다. 조선 선조 19년(1586)에 지었으며 하회마을 부용대 동쪽 강가에 자리잡고 있다. 크게 문간채, 안채, 별당채, 사랑채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각 따로 떨어져 一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대문채는 앞면 6칸·옆면 1칸 크기로 뒷간과 광들로 이루어져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안채가 있는데 앞면 4칸·옆면 2칸 크기이다. ㅡ자형 평면 가운데 부엌을 두고 좌우로 방을 배치한 특이한 구성으로 양반집에서는 보기 드문 예이다. 별당채는 안채 바로 뒤편으로 있으며 앞면 3칸·옆면 2칸 크기이다. 제일 규모가 작은 건물로 온돌방과 2칸 대청을 두었다. 유성룡 선생은 이곳에서『징비록』(국보 제132호)을 집필하였다고 전한다. 사랑채는 앞면 4칸·옆면 2칸 크기로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양쪽에 1칸씩 방을 두고 툇마루로 꾸며 놓았다. 양반집이지만 이 지역 민가의 기본형인 도토마리(베틀에서 실을 감는 기구)집 형식으로 가운데 부엌을 두고 양쪽에 방을 둔 점이 독특하며, 정사(精舍)다운 지형 요건,『징비록』을 집필한 유서 깊은 곳으로 귀하게 평가 받고 있다.
겸암정사의 반대편 산기슭에는 서애가 세운 옥연정사가 있습니다. 대문인 용호문.
정문 용호문 앞 옥연정사와 징비록 안내판
용호문 앞에는 서애가 소나무를 심은 뒤 남긴 시가 새겨진 비석이 있습니다.
'북쪽 산 아래 흙을 파서 서쪽 바위 모퉁이에 소나무 심었네
흙은 삼태기에 차지 않고 나무 크기 한 자가 되지 않네
흔들어 돌 틈에 옮겼으니 뿌리도 마디마디 상했으리라
땅은 높아 시원하여도 가꾸기엔 물이 적을듯한데
비 이슬 젖기엔 더디면서 서릿바람 맞기엔 빠르겠구나
늙은이 일 좋아 억지 부려 보는 이 속으로 어리석다 웃을 테지
어찌하여 늙은이 나이 들어 자라기 힘든 솔을 심었을까
나 비록 그늘 보지 못해도 뉘라서 흙 옮겨 심은 뜻은 알겠지
천 년 지나 하늘 높이 솟으면 봉황의 보금자리가 되리라'
대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안채 완심재(玩心齋) 완심재(玩心齋)는 안채에 있는 안방으로 마음을 즐거이 노니는 곳이라는 뜻.
서애가 조용히 거처할 곳을 짓기 위해 부용대 기슭에 터를 잡았으나 재력 부족으로 집을 짓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때 탄홍 스님이 각종 물자를 지원해준 덕분에 10년에 걸쳐 옥연정사를 완공할 수 있었습니다. 안채에 해당하는 '완심재(玩心齋)'는 탄홍 스님이 거주하면서 공부하던 곳이라고 합니다. 서애 선생을 위해 10년 시주로 이곳을 지어준 탄홍스님이 기거하시며 공부하셨던 곳이란다.
대문을 들어서면 왼쪽으로 사랑채-원락재(遠樂齋)
원락재(遠樂齋) “친구의 내방을 기다린다”의 뜻. 원락재(遠樂齋)는 서애가 ‘징비록’을 쓴 곳입니다. ‘논어’에 가장 먼저 나오는 ‘친구가 멀리서 찾아오니 즐겁지 아니한가(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에서 따온 이름이라고 합니다.
원락재 앞마당에는 분재를 방불케하는 수령 460여년 된 소나무가 있습니다. 서애가 63세때 심은 수십그루 나무 중 하나라고 합니다.
■옥연정사(玉淵亭舍): 서애 류성용 대감이 낙향하여 거처하던 가옥
사랑채 문을 지나면 원락재(遠樂齋) 앞 보호수 465년된 소나무
사랑채인 원락재를 지나면 옥연서당 옥연서당(玉淵書堂) 후학을 양성하던 곳(세심재(洗心齋)
세심재(洗心齋) “마을믈 씻는다”는 뜻인 이 곳은 서당으로 쓰던 곳입니다. 주역 ‘계사상전’의 ‘성인은 이로써 마음을 씻어 아무도 모르게 은밀한 곳에다 감추어 둔다(聖人以此洗心退藏於密)’는 말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세심재 방안에 '광풍제월(光風霽月)'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맑게 갠 날씨에 부는 바람과 비가 갠 뒤에 뜨는 밝은 달'이라는 뜻입니다. 북송 시대의 유학자인 주돈이의 인품을 표현하는 말로 유학자들 사이에 널리 알려진 표현이라고 합니다. 세상이 잘 다스려지고 있다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옥연정사의 원래 명칭은 옥연서당이었습니다. 서애는 ‘옥연서당기’에서 ‘강물이 흐르다 이곳에 다다르면 깊은 못이 되었다. 그런데 그 물빛이 깨끗하고 맑아서 마치 옥과 같기 때문에 옥연서당이라 했다. 옥의 깨끗함과 못의 맑음은 모두 사대부가 귀하게 여겨야할 도리이다’ 라고 썼습니다. '광풍제월'은 비가 갠 뒤의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을 뜻하는 말.
옥연정사의 남쪽 문인 간죽문(看竹門)입니다. '대나무를 보는 문'이라는 뜻 입니다. 서애는 매일 아침 저녁으로 이 문을 나와 부용대 반대편에 있는 겸암정사를 찾아갔다고 합니다. 절벽의 벼랑을 지나는 위험한 길이어서 지금은 폐쇄돼 있습니다.
하회마을에서 나룻배를 타고 오갈 수 있다. 옥연정사로 들어올 수 있는 문입니다.
대나무를 보는 문이라는 뜻의 간죽문(看竹門).
題看竹門(제 간죽문)
細雨春江上(세우춘강상)/ 前山淡將夕(전산담장석)
不見意中人(불견의중인)/ 梅花自開落(매화자개락)
보슬비 봄 강 위에 내리고/ 앞산이 엷어지며 저녁이 되려하네.
마음에 그리는 사람 볼길 없는데/ 매화는 절로 피었다 지누나.
<서애 류성룡>
■하회마을 서애 류성룡 집(충효당忠孝堂, 보물 제414호)
충효당(忠孝堂, 보물 제414호) 조선 중기 이름난 문신이었던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1542∼1607) 선생의 집이다.
선생은 여러 벼슬을 두루 거치고 임진왜란 때에는 영의정으로 전쟁의 어려운 상황을 이겨내는데 많은 공헌을 한 분이다. 선생이 쓴'징비록'과'서애집'은 임진왜란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 받고 있다.
사랑채 대청에 걸려 있는 ‘충효당(忠孝堂)’ 현판은 명필가였던 허목(1595∼1682)이 쓴 것이라고 한다.
뒤뜰의 유난히 가지가 많은 소나무, 만지송(萬枝松)이다. 이 나무는 서애선생의 13대 종부 '신안 박씨'가 화산에서 옮겨 심은 것이라고 한다.
영모각(永慕閣): 유물 전시관이 있다.
■화천서원(花川書院)
화천서원(花川書院). 겸암 류운룡(류성용의 형)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정조 때 세운 서원
화천서원의 정문인 유도문과 뒤편의 지산루
화천서원 강당
화산서원 문루인 지산루
■겸암정사(謙菴精舍)
겸암 (謙菴) 류운용 (柳云龍1539∼1601)
겸암 (謙菴) 류운용 (柳云龍)-운암(서애) 류성룡의 형님이 겸암 류운용이다.
류운용은 1601년 돌아가시고 안동 천등산에 묘소를 정했다가 1643년 인근 조화곡으로 옮긴다. 그후 1898년(1838 ?)에는 다시 이곳 단양 영춘땅으로 이장하였다.(墓初在府西天燈山後四周甲戊戌移葬永春之常山越-비문 중에서)
그 연유로 이 산이 바로 류운용의 호를 따서 겸암산이라 했다. 그리고 겸암산이 유사한 발음인 계명산으로도 변하게 되지 않았을까 추정한다.
류운용의 묘는 그후 1931년에 지금의 안동으로 이장하게 된 것이다. 아마도 천문지리에 밝아 이곳 단양이 명당터임을 알고 유언을 한 것은 아니었을까?(훗날 홍씨가 비기를 가지고 올터인데 그곳에 내 무덤을 쓰라는 유언)
임진왜란 때 류성룡은 임금에게 형님의 보직을 파하기를 간하였다. 자기를 대신해 어머니를 돌봐야 된다는 청이었다. 그 류성룡도 단양에 수운정을 짓고 살았었다. 형님도 이곳을 죽은 후 음택지로 자리잡은 것이 우연은 아닐 듯 싶다.
난을 피하는 십승지로 알려진 단양의 진가를 본것이라!
겸암정사. 부용대 서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서애 류성룡의 친형인 겸암 류운룡이 명종 22년(1567년) 학문연구와 제자 양성을 위해 지었다고 합니다.
암은 서애와 함께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 인동현감, 풍기군수, 원주목사 등을 역임했는데 벼슬을 한 기간은 짧은 편입니다. 벼슬길에 나가기 보다는 자연속에서 학문에 전념하고자 했다고 합니다. 현재 겸암정사에는 후손이 거주하고 있는데 하회마을 주민으로부터 몸가짐이 반듯하고 대쪽같은 양반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겸암정사의 누처마에 걸려있는 편액입니다. '강도수덕(講道修德:도리를 강론하고 덕을 닦는다)', '강신수의(講信修義:믿음을 강론하고 의리를 닦는다)', '강척수의(講戚修誼:친족의 의리를 강론하고 우의를 닦는다)'는 문구와 겸암정강수계라는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허수료(虛受寮). 배우고 싶어도 돈이 없는 사람에게는 돈을 받지 않고 가르쳐준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겸암정. 군자는 스스로 자기 몸을 낮춘다는 뜻으로 주역의 겸괘에서 취한 당호라고 합니다. 퇴계 이황의 친필인데 진품은 별도 보관하고 있고 복제품입니다.
'암수재' 조용히 뭄을 닦는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강습재'. 학문을 강론히고 익히는 곳이라는 뜻인 듯합니다. 대체로 후학 양성의 취지에 맞는 편액들이 많았습니다.
겸암정사 누마루에서 바라본 하회마을쪽 풍경.
'겸암정사'. 조선 중기 서예가로 이름 높았던 원진해가 어렸을 때 쓴 글이라고 합니다
●명칭 하회겸암정사(河回謙菴精舍) 중요민속자료 제89호
경북 안동시 풍천면 광덕리 37
안동 하회마을은 풍산 유씨의 동족마을로 빼어난 자연경관과 민속·유교 전통을 잘 유지하고 있는 조선시대 양반촌이다.
이 집은 서애 유성룡(1542∼1607) 선생의 맏형인 겸암 유운룡(1539∼1601) 선생이 학문 연구와 제자를 가르치기 위해 세운 것이다. 조선 명종 22년(1567)에 지었다고 하며 부용대 서쪽 높은 절벽 위에 자리잡고 있다.
정사(사랑채)는 하회마을이 바라다 보이는 남쪽 절벽 위편에 안채는 정사 뒤쪽에 배치하였다. 정사는 2층 누각 형식으로 앞면 4칸·옆면 2칸 크기이다. 가운데에 대청 4칸을 두고 좌우로는 방을 두었다. 방 앞쪽으로 좁은 퇴를 마련하였으며 ‘겸암정’이라고 쓴 현판은 스승인 이황 선생의 글씨라고 한다. 안채는 ㄱ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고, 대청을 중심으로 왼쪽에 부엌 2칸과 안방 2칸, 오른쪽에 건넌방 2칸을 두었다. 안방과 건넌방 앞쪽으로는 툇마루를 마련해 놓았다. 짚을 이어 올린 헛간채는 안채 왼쪽에 자리잡고 있다.
높은 절벽 아래 굽이도는 강줄기, 자연이 어울린 진풍경을 느낄 수 있는 곳으로 정사(精舍)다운 지형 요건과 전통이 배어 있어 귀한 자료가 되고 있다.
■하회마을 겸암 류운룡 집(양진당(養眞堂, 보물 제306호)
양진당은 겸암 류운룡(1539∼1601)의 집으로 매우 오래된 풍산 류씨 종가이다.
입암 류중영(1515∼1573)의 호를 빌어 ‘입암고택(立巖古宅)’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류중영은 류운룡의 아버지이다. 양진당은 류운룡의 6대손 류영(1687∼1761)의 어릴 때 이름에서 따 온 것이다.
안동 풍산류씨 금계재사 국가민속문화재 제288호
경상북도 안동시 권태사길 116 (서후면, 안동 풍산류씨 금계재사)
숭실재
영모루
안동 풍산류씨 금계재사는 조선시대 명재상 서애 류성룡의 부친 입암 류중영의 묘소를 수호하고 묘제를 지내는 곳으로 16세기 중반 이전 사찰 건물을 인수하여 사용하다가 18세기 초부터 누각을 비롯한 여러 건물을 지어 튼口자형 배치를 이룸
- 전면에 두 개의 누를 둔 흔치 않은 큰 규모의 재사로 누·재사건축의 유형과 변천사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사료일 뿐 아니라 안동지역을 대표하는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특히 사찰건물이었던 숭실재의 주심포계 공포와 고식의 영쌍창 및 벽체구성 등은 양식편년의 귀한 자료임
- 풍산류씨 문중에서는 유교적인 제례의 관습을 확립해 나가는 과정에서 조상의 묘소를 관리하고 조상을 숭배하는 것을 문중 내부적으로 족회소를 만들어 전승할 있도록 하였고, 족중입의(族中立議) 등의 문서 통해 후손들이 어떻게 조상을 모실 것인지를 남겨 후손들이 그대로 시행하도록 한 점 등은 유교적 이념 확립과 조상숭배의식을 잘 보여 주고 있으며, 시대적인 변화에 따라 차이는 있을 수 있어도 현재도 후손들이 거의 그대로 전승하고 있어 중요민속문화재로 지정하여 보존할 가치가 있음
'안동 풍산류씨 금계재사는 서애 류성룡(1542~1607)의 부친인 입암 류중영(1515~1573)의 묘소를 수호하고 묘제를 지내는 곳이다. 16세기 중반 이전에 사찰로 사용하던 숭실재을 인수하여 사용하다가, 18세기 초부터 영모루, 대문간채 등 여러 건물을 지어 현재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중국 11곳, 일본 5곳인데.. 한국, 10년간 글로벌 100대 기업 진입 '0곳'
한국일보 김기중기자 2020.12.13.
대한상공회의소 전경. 한국일보 자료사진
최근 10년간 ‘글로벌 100대 기업’ 순위에 새롭게 진입한 국내 기업이 단 한곳도 없는 것으로 조사됐다. 또, 정부가 역점을 두고 추진하는 창업은 진입장벽이 낮은 생계형 창업에만 몰리는 모습이 관찰됐다.
대한상공회의소는 13일 ‘국제비교로 본 우리 기업의 신진대사 현황과 정책시사점’ 보고서를 공개하고 이 같은 조사 결과를 밝혔다. 대한상의가 최근 10년간 경제 전문지 포브스 선정 글로벌 100대 기업(포브스 글로벌 2,000 기준)에 대한 국가별 신규진입 현황을 조사한 결과, 중국기업 11곳, 미국기업 9곳, 일본기업 5곳이 진입했지만 한국기업의 신규진입은 없었다.
한국은 2010년부터 올해까지 삼성전자 단 한 곳만 글로벌 100대 기업에 포함됐다. 올해 발표된 순위에서 미국기업 37곳, 중국기업 18곳, 일본기업 8곳이 글로벌 100대 기업에 속했다. 대한상의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를 맞아 4차 산업혁명 물결이 가속화되고 있어 혁신 강국과 격차가 더 벌어질 가능성이 크다”며 “신산업 구조 전환의 골든타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포브스가 올해 발표한 ‘세계의 억만장자’ 현황을 대한상의가 분석한 결과, 10억 달러 이상 자산가 중 자수성가 기업인 비중은 한국이 57.1%(28명 중 16명)로, 미국(70%), 중국(98%), 영국(87%), 일본(81%) 등 주요국보다 크게 낮았다. 글로벌 평균은 69.7%였다.
이번 보고서에서는 국내 창업 유형 변화 추이도 분석했다. 올해 상반기 전체 창업 기업 가운데 기술에 기반한 ‘기회형 창업’ 비중은 14.4%에 그쳤고, 생계형 창업 등 ‘비기회형 창업’ 비중은 85.6%에 달한 것으로 나타났다.
김문태 대한상의 경제정책팀장은 “기회형 창업이 늘고 자수성가 기업인이 많이 나와야 경제ㆍ사회 전반의 규제가 속도감 있게 바뀌며 투자와 혁신이 촉진된다”며 “신산업ㆍ스타트업의 기회를 제약하는 낡은 법과 제도 전반을 혁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기중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