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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산책 스크랩 백거이(白居易) / 중국 고전명시 감상 ④
그냥바바 추천 0 조회 44 16.08.24 17:3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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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전명시 감상 ④ 백거이(白居易) / 심경호

 

④ 백거이(白居易, 772~846) 한가함의 미학

 

1.

 

《문기유림(問奇類林)》이라는 중국 책에 보면, 조화옹(造化翁)이 사람에게 공명(功名)과 부귀(富貴)는 아끼지 않지만 ‘한가한 것[閒]’만은 아낀다고 했다. 1년간 객원교수 생활도 쉴 틈이 없었지만, 2월 중순에 귀국하여 본직에 복귀하니 정말 한가할 여유가 없다. 마침내 이명(耳鳴)을 앓고, 독감까지 겹친 데다가, 안면 오른쪽이 약간 마비되는 증세가 있어서 하루걸러 한 번씩 병원을 찾고 있다.

그러니 이런 시구가 생각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한가한 사람 아니면 한가함을 얻지 못하니 不是閑人閑不得

한가한 사람이 등한한 사람은 아니라네 閑人不是等閑人

 

등한한 사람이란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란 말이다. 마지막 구는 한가한 사람은 결코 별 볼 일 없는 사람이 아니라 진정으로 자신의 내면이 충실한 사람이란 뜻이다.

 

위의 시구를 실어둔 《문기유림》은 관직에 급급하거나 금전에 연연하는 사람들을 위해 다음과 같이 신랄한 말을 퍼부었다.

 

조화옹이 사람에게 공명과 부귀는 아끼지 않지만 ‘한가한 것[閒]’만은 아낀다. 천지 사이에는 천지 운행의 기틀[機]이 발동하여 돌고 돌아 한순간도 정지하는 때가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천지도 한가할 수 없는데 하물며 사람에 있어서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러므로 높은 벼슬에 많은 녹을 받는 사람이나 청직(淸職)이나 현직(顯職)에 있는 사람이 그 얼마인지 알 수 없으나 세속을 떠나 물러나 있음을 즐기는 자는 매우 적다. 그리하여 그들 중에는 날마다 재산을 모으고 좋은 집을 지으려는 생각뿐이나 한 번도 뜻을 이루지 못하고 먼저 죽고 마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다행히도 집에서 먹고 지낼 수만 있다면 정말 한가한 생활을 즐기도록 하는 것이 좋을 텐데도 전대만 꼭 간수하려고 손을 벌벌 떨고, 금전 출납부만 챙기면서 마음을 불안하게 먹고 있으니 어찌 낮에만 분망하겠는가.

밤 꿈에도 뒤숭숭할 것이다. 이러한 처지에 있다면 좋은 산수와 아름다운 풍경에 대해서야 어찌 일찍이 맛을 알겠는가. 그리하여 부질없이 생(生)을 수고롭게 하다가 죽어도 후회할 줄 모른다.

이들은 실로 돈만 모을 줄 아는 수전노(守錢奴)로서 자손을 위하여 소나 말과 같은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 수전노보다도 더 심한 자가 있으니, 그들은 자손을 위하여 거의 독사나 전갈처럼 되기도 한다.

 

허균도 이 논리에 동조했기에 그의 《한정록(閒情錄)》 속에 이 글을 전재해 두지 않았겠는가.

한시의 작가 가운데 한가로움의 미학을 추구한 사람이 있다. 당나라 시인 가운데서도 동시대의 한국과 일본에 큰 영향을 끼친 백거이(白居易, 772~846)가 그 사람이다.

 

 

長恨歌

 

 

백거이라고 하면 〈장한가(長恨歌)〉와 〈비파행(琵琶行)〉을 연상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두 시는 모두 《고문진보》에 수록되어, 조선시대 이후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한문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우선 이 시들을 읽으면서 큰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었을 터이다.

 

〈장한가〉는 백거이가 38세 때 지은 작품으로, 당나라 현종과 양귀비의 로망스와 이별의 애환을 매우 몽환적으로 그려 보이고, 시어 자체가 아름답다. 이규보도 장편서사시 〈동명왕편(東明王篇)〉을 지을 때 〈장한가〉의 형식을 참고로 했다. 〈비파행〉은 백거이가 강주(江州)의 사마(司馬)로 좌천된 이후 46세 때 지었다고 하는데, 어느 가을날 저녁 친구를 전송하는 일을 발단으로 해서, 버림받은 늙은 기생의 운명을 통해 자신의 적막감과 울분을 토로한 장편이다.

 

하지만 백거이는 이 두 장편 때문에 유명한 것만은 아니었다. 조선 초의 안평대군은 백거이 시집에서 오언율시, 칠언율시와 칠언절구를 대상으로 185수를 뽑아 《향산삼체법(香山三體法)》을 간행하게 하기까지 했다.

백거이의 시가 왜 한국과 일본에서 널리 유행했을까?

가장 큰 이유는 시어가 쉽고 주제가 선명하다는 점 때문이다. 곧, 한자문화권의 지식인들이라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시가 지닌 큰 장점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그가 한가로움의 미학을 추구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나는 가만히 생각해 본다.

 

2.

 

非老亦非少 늙지도 않고 젊지도 않다

年過三紀餘 삼기(서른)를 지난 나이

非賤亦非貴 천하지도 않고 귀하지도 않다

朝登一命初 일명을 갓 얻어 조정에 올랐으니

才小分易足 재주 작으니 분수 차기 쉽고

心寬體長舒 마음 넉넉하니 몸도 언제까지고 느긋하다

充腸皆美食 내장을 채우는 것은 맛난 음식

容膝卽安居 무릎을 들일 만하면 곧 편안한 거처

況此松齋下 하물며 이 소나무 서실에서

一琴數帙書 거문고 하나, 서너 질 책을 두고

書不求甚解 책은 심해(甚解)를 구하지 않고

琴聊以自娛 거문고로 잠깐 스스로 즐긴다

夜直入君門 밤에는 숙직하여 군주의 문에 들어가고

晩歸臥吾廬 저물녘 돌아와 내 초가에 눕나니

形骸委順動 형해는 천리의 움직임에 내맡기고

方寸付空虛 방촌은 늘 공허하게 둔다

持此將過日 이런 식으로 매일을 보내어서

自然多晏如 저절로 편안하여

昏昏復默默 어둑하고 또 묵묵하나니

非智亦非愚 똑똑하지도 않고 어리석지도 않도다

 

백거이가 36세 무렵에 지은 〈송재자제(松齋自題)〉라는 시이다. 제목은 소나무 숲 가까이 마련한 서실에 스스로 적는다는 뜻이다.

 

백거이는 나이가 몇 살이든, 젊다거나 늙었다거나 여기지 않고 적절한 연령이라고 만족해했다. 관직이 어떤 품계에 있든 정말 적절한 상태에 있다고 만족해했다. 50세 때 지은 〈서액조추직야서의(西掖早秋直夜書意)〉에서는 “오품 벼슬은 천하지 않고, 오십 나이는 요절이 아니지(五品不爲賤, 五十不爲夭)” 라고 했다. 늘 자신이 적절한 상태에 있다고 간주하고 스스로를 납득시킨 것이다.

 

백거이는 자(字)를 낙천(樂天)이라 하여, 백낙천(白樂天)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원래 적은 지금의 산시성(陝西省) 위남현(渭南縣)인 하규(下?)이지만, 허난성(河南省) 정주(鄭州)에서 태어났다. 중소지주 가정 출신으로, 29세 때인 800년에 진사 시험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갔다. 3년 뒤 발췌과(拔萃科)에 급제함에 따라 교서랑의 벼슬을 받았고, 또다시 재식겸무명어체용과(才識兼茂明於體用科)에 급제하여 주질현위(??縣尉)에 제수되었다가 한림학사로 승진하고, 3년 동안 습유(拾遺)의 직에 있었다.

 

간관(諫官)의 직책에 있을 때는 대량의 풍유시(諷諭詩)를 지어, 시사를 풍자하고 폐단을 비판했다. 이처럼 초기에는 득의의 시절을 보냈으나, 44세 때인 815년에 강주(江州)의 사마(司馬)로 좌천되었다. 강주는 지금의 장시성(江西省) 구강시(九江市)를 말한다. 당시 백거이는 좌찬선대부(左贊善大夫)로 있었는데, 군벌들이 재상 무원형(武元衡)을 암살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범인을 체포하라고 황제에게 주청했다가 직분을 넘어선 행위라는 죄목으로 탄핵을 받아 강주 사마로 좌천된 것이다. 이 유배 때 소외감을 담은 시가 저 〈비파행〉이다.

몇 해 뒤 충주(忠州)의 자사(刺史)로 옮겼다가 51세 되던 820년 서울로 돌아와 중서사인이라든가 지제교라든가 하는 관직을 맡았다. 이 무렵에는 세상일에서 벗어나려는 정서를 시에 담아내었다. 그러나 이후 25년 동안 중앙 관직에 있으면서 비교적 순탄한 생활을 보냈다. 만년에는 황태자의 보육 고문인 태자소부와 법무부장관의 직인 형부상서의 지위를 사퇴하고 안락하게 지냈다. 시문집으로 《백씨장경집》 71권이 전하는데, 3천8백여 수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琵琶行

 

 

백거이의 시는 거의 실시간으로 한국과 일본에서 읽혔다. 백거이의 지기인 원진(元?, 779~831)은 백거이 문집인 《백씨장경집(白氏長慶集)》의 서문에서, “계림 상인이 저자에서 구하기를 아주 절실하게 하면서, 동국의 재상은 번번이 많은 비용을 치르고 시 한 편과 바꾸었으며, 아주 가짜인 것은 재상이 곧바로 변별할 정도였다고 말한다.”고 적었다. 백거이는 실제로 신라와는 긴밀한 관련이 있다. 그는 810년에 당나라 헌종이 신라 헌덕왕[김중희(金重熙)]에게 보내는 국서를 대신 지었고, 821년에서 822년에 이르는 사이에 신라에서 온 하정사(賀正使) 김충량(金良忠)이 당나라에서 벼슬을 받고 귀국할 때 당나라 목종의 제서(制書)를 지었다.

 

그런데 백거이는 자신의 시를 고조(古調, 즉 고시)와 율시(절구를 포함함)로 나누고, 고조를 다시 풍유(諷諭)·한적(閑適)·감상(感傷)의 셋으로 분류했다. 그 자신은 풍유의 부류에 속하는 신악부(新樂府)를 가장 가치 있다고 여겼다. 〈신악부서(新樂府序)〉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모두 9,212언으로, 나누어 50편을 만들었다. 편에는 정해진 구가 없고 구에는 정해진 자가 없으니, 짜임은 뜻에 매이지, 형식에 매이지 않았다. 맨 앞의 구는 강목을 제시하고, 마지막 장은 뜻을 드러내니 《시경》 300편의 체제를 따른 것이다. 표현은 질박하고도 곧게 해서, 보는 사람이 쉽게 깨닫게 하고자 했다.

시어는 솔직하고 절실하게 해서, 듣는 사람이 깊이 경계하도록 하고자 했다. 사실은 실상에 근거하고 사실적으로 해서, 채집하는 사람이 믿고 전하도록 했다. 체제는 순탄하면서 거리낌이 없어, 악장과 가곡으로 전파될 수 있게 하고자 했다. 총괄해서 말하면, 군주를 위하고, 신하를 위하며, 백성을 위하고, 사물을 위하며, 사실을 위하여 지었지, 문채 자체를 위해 지은 것이 아니다.

 

백거이는 시의 정치적 기능에 대해 뚜렷하게 자각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원진에게 보낸 서한인 〈여원구서(與元九書)〉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간관(諫官)으로서 다달이 간서(諫書: 임금에게 간하는 奏章)를 아뢰어 왔다. 하지만 계주(啓奏)하는 이외에도 사람의 병통을 구제하고 시사의 어그러짐을 비보(裨補)할 수 있는데, 간서로 곧바로 지적해 말하기가 어려울 때는 그때그때 시로 노래하여 그것이 차츰차츰 전해져 군주의 귀에 들리기를 바랐다. 이로써 위로는 군주가 세상일에 대해 듣는 것을 더욱 넓히고, 나랏일을 걱정하고 애쓰는 것에 도움을 주며, 다음으로 군주의 장려에 보답하고, 언관(간관)으로서의 책무를 조금이나마 다하고, 아래로는 내 평생의 뜻을 다하려고 했다.

하지만 어찌 알았으랴, 뜻을 성취하기도 전에 후회가 생겨나고, 말이 군주의 귀에 들리기도 전에 비방이 이루지다니! 다시 더 여러분에게 할 말을 하고 싶다. 나의 시 〈하우(賀雨)〉를 듣고 뭇 사람들은 주절대면서 적절하지 않다고 말하고, 나의 시 〈곡공감(哭孔戡)〉을 듣고 뭇 사람들은 얼굴의 생기가 없어지고 모두 기뻐하지 않는다.

〈주중음(奏中吟)〉을 들으면 권문세가와 황실에 가까운 자들은 서로 눈짓하면서 얼굴색을 바꾼다.

〈낙유원기족하(樂遊園寄足下)〉을 들으면 정치의 권세를 쥔 자들은 팔을 걷어붙이고, 〈숙자각촌(宿紫閣村)〉을 들으면 군대의 권력을 쥔 자들은 이를 간다. 대개 이와 같아서 일일이 들 수도 없을 정도이다. "

 

身是諫官,月請諫紙啓奏之外,有可以救濟人病裨補時闕而難於指言者,輒詠歌之,欲稍稍遞進聞於上:上以廣宸聰,副憂勤;次以酬恩?,塞言責;下以復吾平生之志。豈圖志未就而悔已生,言未聞而謗已成矣!又請爲左右終言之:凡聞僕賀雨詩,而衆口籍籍,已謂非宜矣;聞僕哭孔戡詩,衆面脈脈,盡不悅矣;聞《秦中吟》,則權豪貴近者相目而變色矣;聞樂遊園寄足下詩,則執政柄者扼腕矣;聞宿紫閣村詩,則握軍要者切齒矣。大率如此,不可偏?。

 

 

한탄 조로 말하기는 했어도 백거이는 시의 정치적 기능을 강렬하게 의식하고 있었고, 또 그러한 시들을 은근히 자부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후대 논평자들 가운데는 백거이가 감상의 부류에 넣은 〈장한가〉나 〈비파행〉이야말로 예술적 가치가 더 높다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지만 〈장한가〉는 군주의 비밀스러운 연애사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유학자들의 비판을 받았고, 〈비파행〉은 마음속 울분을 토로했다는 점에서 역시 점잖은 지식인들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에 비해 그의 한적의 시들은 비난한 사람들이 없는 듯하다. 한적의 시들은 질박함과 솔직함의 정신세계 때문에 특히 사랑을 받아왔다.

 

물론 백거이의 시는 정치와의 연관성을 떠나 사실주의적 작풍 때문에 높은 평가를 받기도 한다. 〈신악부〉 가운데 〈태항로(太行路)〉는 본래 부부 사이의 관계를 보조관념으로 사용해서 군주와 신하의 관계가 순탄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풍자한 시이다. 태항산의 험로를 묘사한 표현이 사실성이 매우 뛰어나고 인생살이의 고난을 비유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어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太行之路能?車 태행산 길은 수레를 부수지만

若比人心能坦途 사람 마음에 비하면 탄탄한 길

巫峽之水能覆舟 무협의 물은 배를 뒤엎지만

若比人心是安流 사람 마음에 비하면 순탄한 흐름

人心好惡苦不常 사람 마음의 호오는 정말로 변덕스러워

好生毛羽惡生瘡 좋아하면 깃털도 낳고 싫어하면 악창을 돋우네

與君結髮未五載 그대와 혼약 맺은 지 오 년도 못되어

忽從牛女爲參商 홀연 견우·직녀가 삼별·상별같이 되다니  忽從 : 豈期

古稱色衰相棄背 용모가 쇠하면 버려진다고 옛사람이 말했거니

當時美人猶怨悔 당시 미인들도 원망하고 후회했으리

何況如今鸞鏡中 하지만 지금 거울 속을 들여다보면

妾顔未改君心改 저는 얼굴 그대론데 낭군 마음 변하다니요

爲君薰衣裳 낭군 의상에 향훈을 뿌려도

君聞蘭麝不馨香 낭군은 사향 맡고도 향기롭다 하지 않고

爲君盛容飾 낭군 위해 화장하고 치장을 해도

君看金翠無顔色 낭군은 금빛 비취빛을 보고도 태깔이 없다 하네

行路難 행로가 험난하나니

難重陳 험난함을 다시 말하기 어렵도다

人生莫作婦人身 사람이 태어나되 부인의 몸은 되지 마오

百年苦樂由他人 백년의 고락이 남에게 달린다오

行路難 행로가 험난하기

難於山 산보다도 어렵고

險於水 물보다도 험하나니

不獨人間夫與妻 인간세상 남편과 아내 사이만 그런 것 아냐

近代君臣亦如此 근래의 군주와 신하 사이도 이와 같다오

君不見左納言,右納史 그대는 못 보았소, 왼 켠 납언과 오른 켠 납사가

朝承恩, 暮賜死 아침에는 군은을 받들지만 저녁에는 죽임을 하사받는 것을

行路難 행로가 험난하나니

不在水不在山 물길에 있지 않고 산길에 있지 않고

只在人情反覆間 오로지 인정이 이리 뒤집고 저리 뒤집는 속에 있다네  只 : 隻

 

 

인심의 번복(飜覆)이 인생행로를 험준하게 만든다는 논리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수긍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게다가 백거이는 감정의 문제를 매우 중시했다. 그는 뤄양(洛陽) 시절에 쓴 시를 모은 《낙시》의 서문 〈서낙시(序洛詩)〉에서 이렇게 말했다.

 

 

"고금의 가시(歌詩)를 두루 보니, 《시경》과 《이소》의 이후, 소무(蘇武)와 이릉(李陵) 이래로 포조(鮑照)와 사영운(謝靈運)의 무리가 뒤를 잇고 다시 이백과 두보의 무리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에 사인(詞人)들 가운데 이름난 자가 수백 명이요 유전(流傳)되는 시장(詩章)이 수만 편이지만,

그 유래한 바를 보면 대부분 참소를 입고 억울하게 쫓겨나거나 군대에 종군하든가 먼 곳으로 여행을 하든가 하며 얼고 주리거나 병들고 늙어서는 삶과 죽음으로 갈리거나 난리 등의 이유로 생이별하여 마음속에서 감정이 일어나고 마음 밖에서 문장이 모양을 갖춘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분노하고 우려하며 원망하고 마음 아파하는 작품이 고금을 헤아려 열에 여덟아홉이었다."

序洛詩,樂天自序在洛之詩也。

予歷覽古今歌詩,自風騷之後,蘇李以還,次及鮑謝徒,?於李杜輩,其間詞人聞知者累百,詩章流傳者鉅萬,

觀其所自,多因讒?譴逐,征戍行旅,凍?病老,存歿別離,情發於中,文形於外,

故憤憂怨傷之作,通計今古,什八九焉。

 

 

백거이는 시의 ‘수용’ 면에서도 감정의 기능을 매우 중시했다. 즉 그는 〈여원구서〉에서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것으로는 감정보다 앞서는 것이 없고, 말보다 먼저인 것이 없으며, 소리보다 절실한 것이 없고, 뜻보다 깊은 것이 없다.”라고 했다.

 

진실한 감정을 담아내는 것이 참된 시이고 또 그것이 사람을 감동시킨다고 본 점은 시의 창작 과정과 수용 과정을 설명한 탁월한 논리이다.

 

하지만 백낙천은 비애의 감정을 극복하는 출구를 찾았다. 그렇기에 앞서의 〈서낙시〉에서 그는 자신이 낙양에서 거주하는 5년 동안 지은 432수 가운데, 친구의 죽음과 아들의 죽음을 슬퍼한 10여 편을 제외하고는 모두 술에 마음을 의탁하거나 거문고에서 뜻을 얻어 괴로워하는 말이 한 글자도 없고 근심과 탄식을 드러낸 말이 한마디도 없다고 했다. 그는 “한적유여(閑適有餘), 감락불가(?樂不暇)”라고 했다. “한적하여 한껏 넉넉하고, 술로 즐기느라 다른 겨를이 없었다.”고 말한 것이다.

 

백거이는 그보다 앞서 강주 사마로 좌천되어 인생에서 가장 불우한 삶을 살았던 시기에도 〈구월취음(九月醉吟)〉의 시를 지어 비애의 감정을 넉넉히 극복했다. 곧 47세 때인 818년에 지은 것으로, 당시는 바로 자신의 울분을 늙은 기생의 넋두리에 가탁했던 〈비파행〉을 지은 때이기도 하다.

*구월취음(九月醉吟) : → 구일취음(九日醉吟)

 

 

有恨頭還白 한 맺힌 나는 머리 되려 희었건만

無情菊自黃 무심하게 국화는 노랗게 피었구나.

一爲州司馬 한번 강주의 사마가 되어선

三見歲重陽 세 번이나 중양의 철을 만나네.

劍匣塵埃滿 칼집에는 먼지만 가득하고

籠禽日月長 새장의 새는 날로 달로 커가네.

身從漁父笑 신세는 어부가 웃는 대로 내버려두고

門任雀羅張 문 앞은 참새그물 펼칠 정도.

問疾因留客 손님이 병문안 오면 그를 만류하고

聽吟偶置觴 시 읊는 소릴 듣고는 술잔을 놓는다.

歎時論倚伏 시절을 한탄하여 의복(倚伏: 禍福)을 따지고  (歎 : 嘆)

懷舊數存亡 옛 친구가 그리워 죽은 이를 헤아려본다.

奈老應無計 늙음을 어이하랴, 아무 계책 없는 걸.

治愁或有方 수심 다스릴 방도는 그나마 있나니,

無過學王勣 왕적을 배움보다 나은 것 없기에   勣 : 績

唯以醉爲鄕 오로지 취향으로 고향을 삼으리.

 

 

 

 

강주 사마로 유배되어 세 번째 중양절. 머리는 희어 가는데, 국화는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해마다 노란 꽃을 피운다. 나 자신을 돌아보면 한심하다. 사용할 일이 없어 상자에 넣어 둔 채로 먼지를 뒤집어쓴 칼과도 같고, 새장에 갇힌 채로 시들한 시간을 보내는 작은 새와도 같다. 세간에서 추방된 몸은 굴원과 같아 비웃음을 살 뿐, 찾아오는 사람이라곤 없다. 누군가 병문안을 오면 그대로 그를 만류하여 시 읊고 술잔을 교환한다. 사람의 일이란 뜨고 잠김이 있는 법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고, 옛 친구 가운데 누가 죽었는지 손꼽아 본다. 노쇠해 가는 것은 어쩔 길 없지만, 슬픔을 치유하는 데는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다. 저 왕적의 흉내를 내어 술에 젖는 방법이 있다.

 

곧 백거이는 취향에 들어감으로써 슬픔을 넉넉히 치유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정말로 술을 마실 줄 아는 시인이었던 것이다. 그가 남긴 〈하처난망주(何處難忘酒)〉 일곱 수는 멋진 시다.

 “하처난망주(何處難忘酒)”란 “어느 곳, 어느 때에 술 잊기 어려운가?”라는 말로, “어디서 술 생각 간절한가?”라는 뜻이다. 〈하처난망주〉의 첫 수는 이러하다[이미 다른 글에서 소개했지만 새삼 되읽어보기로 한다.

 

 

何處難忘酒 어디서 술 생각 간절한가?

長安喜氣新 장안에서 희색이 오를 때라네.

初登高第日 처음 과거에 장원급제하고는

乍作好官人 잠깐 새 좋은 관직을 얻었나니

省壁明張榜 중서성 벽에 합격 방문 붙었고  ?

朝衣穩稱身 조복은 이 몸에 꼭 들어맞았다.

此時無一盞 이러한 때 한 잔 술이 없다면   ?

爭奈帝城春 서울의 봄을 어찌하리.

 

 

과거에 합격해서 득의양양한 기분일 때 한 잔 술이 없으면 안 된다는 내용이다. 백거이는 자신이 젊은 시절 진사 급제했던 때를 회상하면서, 다른 사람도 과거에 합격해서 행복감에 도취되어 있을 때는 반드시 술 생각이 간절하리라고 생각했다.

 

둘째 수는 높은 이상을 이루지 못한 채 청장년의 세월을 흘려보내고 작은 고을에서 옛날 친구를 만난다면 그 기분이 어떨까를 상상했다. 해후(邂逅)의 즐거움보다는 고생에 찌든 모습을 서로의 얼굴에서 읽어내고 자기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며 눈물을 떨어뜨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한 때 한 잔 술이 없다면 그 슬픈 심경을 어이 풀겠는가, 백거이는 상상했다.

 

 

何處難忘酒 어디서 술 생각 간절한가?

天涯話舊情 하늘가에서 옛 정을 이야기할 때라네.

靑雲俱不達 우리 모두 청운의 꿈은 이루지 못하고

白髮遞相驚 머리만 희었기에 깜짝 놀라나니,

二十年前別 이십 년 전 이별하여

三千里外行 삼천 리 밖을 돌아다녔구나.

此時無一盞 이러한 때 한 잔 술이 없다면

何以敍平生 무슨 수로 평소 마음을 풀어보나.

 

 

아마도 백거이는 강주 사마로 좌천되어 쓴맛을 보았던 일을 회상하고, 뜻과 일의 괴리를 경험한 모든 사람의 보편적인 심경을 이 시에서 담아냈는지 모른다. 조선 후기의 문학가 김창협(金昌協)은 백거이의 시는 도에 가까우며, 그의 시를 읽으면 느긋하게 자득할 수 있고 세상의 슬픔과 번뇌를 다 잊을 수 있다고 했다. 그의 논평이 가장 정곡을 찔렀다고 나는 평소 생각하고 있다.

 

 

顧炳? <인간하처난망주人間何處難忘酒)^^

 

 

 

3.

 

 

香山九老

 

香山九老

 

백거이는 폭건과 야복 차림에 지팡이를 짚고 혼자 걸어가는 초상이 전했다. 관직에 있지만 일민(逸民)으로서 넉넉한 삶을 살았던 모습으로 추억되어 온 것이다. 백거이는 부유하지는 않았으나 가난하지도 않았다.

만년에는 낙타를 팔아치우고, 애첩 번소(樊素)를 돌려보냈으며, 뤄양(洛陽)의 용문(龍門) 향산(香山)에서 거사(居士)를 차처하며 유유자적한 삶을 살았다. 뤄양에서는 낙사(洛社)라는 시사를 결성하여, 자신을 포함한 아홉 노인이 시주로 즐겼다. 그 모임을 향산구로(香山九老)라고도 한다.

 

 

?三川(1930~2004) 香山九老秋???色?本?心 1988年作款?:_香山九老秋??。?在戊辰秋月,浙??三川?香山九老?于海上寓???。

 

 

香山九老

 

백거이는 유교를 공부했지만 불교와 도교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였고, 중년 이후로는 특히 불교에 심취했다. 거사를 자처한 것도 유마거사를 모델로 한 것인지 모른다. 삼교를 넘나들면서 초탈했던 그를, 한자문화권의 지식인들은 매우 사랑했다.

고려의 이규보는 〈백낙천의 병중십오수(病中十五首)에 화답하여 차운하다(次韻和白樂天病中)〉라는 제목의 연작시 15수를 지으면서 그 병서(幷序)에서 이렇게 창작의 동기를 밝혔다.

 

 

"나는 본시 시를 좋아한다. 이것은 비록 오래 지녀온 버릇이기는 하지만, 병이 들자 평소의 곱절은 더 좋아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까닭은 알지 못한다. 사물을 접하여 흥이 깃들 때마다 읊지 않는 날이 없어서 그러지 않으려 해도 어쩔 수가 없다. 그래서 이것도 역시 병이라고 생각하게 되어, 언젠가 〈시벽편(詩癖篇)〉이란 글을 지어 뜻을 밝힌 일이 있는데, 이것은 스스로 서글퍼해서 그런 것이었다. 또 식사할 때마다 겨우 몇 숟갈을 떠먹고는 오직 술만 마셨기 때문에 늘 이것을 걱정했다. 그런데 백낙천의 《백향산집(白香山集)》 후집(後集)에서 노경에 지은 시들을 보니 대부분 병중에 지은 것이었고 술 마시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중의 한 시[자해(自解)]에서는 이렇게 읊었다.

 

내 또한 선정에 들어 숙명을 살펴보니           我亦定中觀宿命

윤회전행에 빚진 것은 시가였던 모양이로군   多生債負是歌詩

아니라면 어이하여 미친 듯이 읊조리고         不然何故狂吟詠

병든 뒤에 이전보다 더 많이 짓는단 말인가    病後多於未病時

 

〈수몽득견희질추(酬夢得見喜疾?)〉라는 시에서는 “가물가물 베 이불 밑에서, 병과 취기와 잠이 어우러지네(昏昏布衾底, 病醉睡相和)”라 했고, 〈복운모산(服雲母散)〉이란 시에서는 “약기운 가시고 날 저물자 밥 세 숟갈 먹는다(藥消日晏三匙食)”라고 했는데, 나머지 다른 것들도 이와 비슷하다.

나는 이 뒤로는 대단히 여유가 생겨서 ‘나뿐만이 아니라 옛 분들도 역시 그러했다. 이건 모두가 오랜 버릇 때문이니 어찌 하는 수 없는 것이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또 백낙천은 병가(病暇)를 얻은 지 1백 일 만에 퇴임했는데, 나도 요즘 퇴임을 요청하려 하는 중이어서 병가를 얻은 날까지 계산해 보니 1백 10일이 된다. 뜻밖에도 이처럼 두 사람이 비슷하다.

다만 내게 없는 것은 번소(樊素)와 소만(少蠻)과 같은 첩들인데, 이 두 첩도 백낙천이 68세 되던 해에는 놓아 보내 주었으니, 이때에는 아무 상관도 없게 된 것이 아닌가.

아아, 재주나 덕망은 백낙천을 못 따르겠지만 늙어서 병이 난 다음의 일들은 나와 비슷한 점이 아주 많다. 그래서 그의 〈병중십오수〉에 화답함으로써 속에 담긴 정을 펴보려고 한다."

 

次韻和白樂天病中十五首

 

予本嗜詩。雖宿負也。至病中尤酷好。倍於平日。亦不知所然。每寓興觸物。無日不吟。欲罷不得。因謂曰此亦病也。曾著詩癖篇以見志。盖自傷也。又每食不過數匙。唯飮酒而已。常以此爲患。及見白樂天後集之老境所著。則多是病中所作。飮酒亦然。其一詩略云。

我亦定中觀宿命。多生債負是歌詩。不然何故狂吟詠。病後多於未病時。

酬夢得詩云。昏昏布衾底。病醉睡相和。服雲母散詩云。藥消日晏三匙食。其餘亦난001倣此。予然後頗自寬之曰。非獨予也。古人亦爾。此皆宿負所致。無可奈何矣。又白公病暇滿一百日解綬。予於某日將乞退。計病暇一百有十日。其不期相類如此。

但所欠者。樊素,少蠻耳。然二妾亦於公年六十八。皆見放。則何與於此時哉。

噫。才名德望。雖不及白公遠矣。其於老境病中之事。往往多有類予者。因和病中十五首。以?其情。

 

 

樊素

 

 

 

허균(許筠)은 《한정록》에 백거이에 관한 사항을 여럿 수록했다. 그것들을 보면 백거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내가 작년 가을에 처음으로 여산(廬山)에서 노닐다가 동서편 숲 사이에 있는 향로봉(香爐峯) 아래 이르러 주위를 살펴보니, 운수(雲水)와 천석(泉石)이 너무도 절경이라 그대로 버려둘 수 없었다. 이에 초당(草堂) 한 채를 지었다. 앞에는 큰 소나무 10여 그루와 대나무 1천여 그루가 있는가 하면, 푸르른 댕댕이는 장원(牆垣)이 되고, 하얀 돌은 교도(橋道)가 되었으며, 흐르는 물은 초당 아래를 둘렀고 뿜어 나오는 샘물은 처마 위에서 떨어지는가 하면, 푸르른 버드나무와 하얀 연(蓮)이 못과 언덕에 즐비했다. 대저 이곳의 경치가 이처럼 절경이므로 매번 혼자 찾아가서 10여 일씩 지내곤 한다. 나의 한평생 좋아하는 바가 다 여기에 있으니, 돌아오기를 잊을 뿐 아니라 일생을 그냥 거기서 마칠 수도 있다.

 

나는 어려서부터 늙기에 이르도록 아무리 1~2일간 머물러 있게 되더라도 흙을 져다가 대(臺)를 만들고 돌을 모아 산(山)을 만들고 물을 막아 못을 만들곤 했다. 그런데 지금 여산(廬山)이 신령스럽고 절승(絶勝)의 경치가 나를 기다리고 있어 마침내 나의 좋아하는 바를 얻게 되었으니, 내가 앞으로 자유로운 몸이 되면 왼손으로는 처자(妻子)를 이끌고 오른손으로는 거문고와 책을 안은 채 여산으로 가서 만년을 보내어 나의 평생소원을 이루고야 말겠다. 여산의 맑은 샘과 하얀 돌도 나의 이 말을 알아들었을 것이다.

 

백거이는 이렇게 한가함을 추구하는 한편, 술 또한 사랑했다. 술은 한가함의 미학을 추구하는 절호의 매개물이었다. 67세 되던 838년에는 아예 자신을 취음선생이란 가공의 인물에 가탁해서 〈취음선생전(醉吟先生傳)〉을 지었다. 이때 그는 태자빈객동도분사(太子賓客東都分司)라는 명예직에 있었으나 사실상 은퇴해 있었다.

 

 

"취음선생이란 사람은 그 이름, 출신지, 관직을 잊어버렸다. 홀홀하여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한다. 관리로서 삼십 년을 지내고, 노년이 가까워지자 낙양으로 물러났다. 사는 곳에는 대여섯 무(畝)가량의 연못, 수천 그루의 대나무 숲, 수십 그루의 큰 나무가 있으며, 정자, 누, 배, 다리 등이 작기는 하지만 그 형태를 갖추고 있다. 선생은 거기에서 평안함을 얻었다. 집은 가난했지만, 입는 옷이나 먹을 것에 곤란을 겪을 정도는 아니다. 나이를 먹었다고는 하여도 늙어 정신이 혼몽할 정도는 아니다. 천성이 술을 지나치게 좋아했고, 거문고에 탐닉하고, 시를 혹애했다. 술친구, 거문고 동무, 시 벗과는 자주 함께 노닐었다. 그들과의 교유 말고도 불교에서 마음의 위안을 얻어, 소승·중승·대승 모두에 걸쳐 불법을 배웠다.

 

숭산의 승려 여만(如滿)은 공문[불교]의 친구이고, 평천 사람 위초(韋楚)는 산수의 벗이며, 팽성의 유몽득(유우석)은 시의 벗이고, 안정의 황보낭지[皇甫曙]는 술벗이다. 그들과 만날 때마다 즐겁게 놀아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잊을 정도였다. 낙양 거리의 안팎 6, 70리 안에 있는 도관, 사원이나 별장 중에 물·바위·꽃·대나무를 갖춘 정원이 있으면 발걸음을 옮기지 않는 곳이 없었다. 저택에 술과 거문고가 있으면 방문하지 않는 집이 없었다.

서적과 가기(歌妓)가 있으면 가보지 않은 곳이 없었다. 낙양의 지사로부터 서민의 집에 이르기까지 연회에 초대되면 또 늘 그곳으로 향했다. 아름다운 시절과 멋진 풍경을 만날 때마다, 혹은 눈이 내린 아침이나 달이 뜬 밤일 때, 마음에 드는 친구들이 오면 반드시 그들을 위해 우선 술동이의 먼지를 털고 다음에 시 상자를 열었다.

술이 한창 오르게 되면, 스스로 거문고를 잡아 궁성을 연주해서 〈추사(秋思)〉의 곡을 한번 손가락으로 튕겼다. 흥이 오르게 되면, 동복에게 법부의 현관 악기를 조율하게 하여 〈예상우의곡〉을 합주하게 했다.

만일 환락이 극에 달하게 되면, 다시 어린 가기에게 〈양류지(楊柳枝)〉의 최근 가사 10수장을 노래하게 했다. 마음껏 즐기고 완전히 취해버릴 때까지 계속했던 것이다. 종종 흥에 겨워 이웃집까지 신발을 끌고 가든가, 지팡이를 손에 잡고 시골로 가든가, 말 타고 거리에 나가 보든가, 상자를 메고 교외에 나가거나 했다.

편여에는 거문고 하나, 베개 하나, 도연명과 사영운의 시집 서너 권을 넣어 두었다. 상자의 가로대 좌우에 술병을 매달고는 물가를 찾거나 산을 조망한다든가, 기분이 내키는 대로 갔다. 거문고를 끌어안고 술잔을 잡아당겨, 흥이 다하면 돌아왔다. 이러한 생활을 어느새 십 년간 계속했다. 그 사이에 매일 지은 시가 천여 수이며, 매년 주조한 술이 수백 곡이 넘는다. 십 년 전후의 시와 술은 포함시키지 않고도 그렇다.

 

처자, 형제, 조카들은 과도하지 않을까 염려하여 비난한다든가 했지만,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자꾸 비난하자 이렇게 대답했다. “도대체 인간의 성질이란 것은 적당한 때에 그치지를 못하고, 아무래도 푹 빠져드는 법이야. 나도 중용을 지켜 멈출 수가 없소. 하지만 만일 불행히도 내가 금전을 좋아해서 이식을 하여, 재산을 늘리고 집을 윤택하게 하려다가 화를 초래하고 몸을 위태롭게 했더라면 어찌했을까?

혹은 만일 불행히도 도박을 좋아하여 수만금의 돈을 걸어 재산을 기울게 하고 처자를 거리 맡에 헤매게 했더라면 어찌했을까? 혹은 만일 불행히도 단약을 좋아하여 의식의 비용을 덜어서 연단을 만들거나 수은을 태운다거나 해서 아무 것도 성취하지 못하고 몸을 망쳤더라면 어찌했을까? 지금 다행히도 나는 그러한 것을 좋아하지 않고, 술과 시로 유유자적하고 있소. 방종이라고 한다면 방종이겠지만, 아무 것도 손상 입히는 것이 없어. 저 세 가지를 좋아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 않은가! 그렇기에 유령은 아내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왕적은 취향에서 노닐며 돌아오지 않은 게야.”

 

드디어 젊은이들을 이끌고 술집에 들어가 술동이를 에워싸고 털썩 앉아 얼굴을 쳐들고는, 깊이 탄식을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 천지 사이에 태어나 능력도 행실도 고인에게 도저히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저 검루보다는 풍족하고 안회보다는 장수하고 있으며, 백이(伯夷)보다는 먹는 데 곤란을 겪지 않고 영계기(榮啓期)보다는 훨씬 유쾌하고 위숙보(衛叔寶)보다는 튼튼하다. 얼마나 행복한가! 더 이상 무엇을 바라랴! 만일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버리고 만다면 어떻게 노후를 지낼 수 있을까?”

취음선생은 〈영회시(詠懷詩)〉를 읊조려 이렇게 노래했다.

 

抱琴榮啓樂 거문고 끌어안으니 영계기의 즐거움

縱酒劉伶達 술을 마음껏 마심은 유령의 달통함

放眼看靑山 시선을 놓아서 청산을 바라보고

任頭白髮生 머리에 백발이 생기든 말든 괘념 않는다

不知天地內 모르겠네, 천지 사이에

更得幾年活 다시 몇 년이나 더 살지

從此到終身 이제부터 몸이 끝날 때까지는

盡爲閑日月 모두 다 한가한 세월로 삼으리

 

시를 다 읊고 나서 껄껄 웃고는, 항아리를 들어 탁주를 뒤섞어, 다시 몇 잔을 입으로 가져가, 완전히 취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취해서는 다시 깨고, 깨서는 다시 시를 읊으며, 읊고서는 다시 마시고, 마셔서는 취했다. 취하는 것과 시 읊는 것을 마치 순환하듯 반복했다. 이렇게 하여 신세를 꿈같이 여기고 부귀를 구름처럼 덧없는 것으로 간주하며, 세계를 방안의 장막이나 자리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인생 백 년을 한순간이라고 생각하여, 멍멍하게 우두커니 있어서, 늙음이 육박하여 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상태로 되었다. 이것이야말로 옛날에 말했듯이 술에 의지하여 완전한 경지를 얻었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 취음선생이라고 호를 했다.

 

이때는 개성 3년, 선생의 나이는 67세로, 수염은 완전히 희었고, 두발은 반쯤 벗겨졌으며, 이빨은 둘이나 빠졌다. 하지만 술을 마시면서 시를 읊는 흥취는 전혀 쇠하지 않았다. 처자를 돌아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제까지 나는 쾌적했다. 지금부터 이후로 나는 이 흥취가 어떻게 될지 스스로 알 수가 없다”라고.

 

마지막에서 백거이가 “지금까지는 만족스러웠지만 이후의 일은 알 수 없다”고 말한 것은 달관의 뜻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白居易:醉吟先生傳

 

醉吟先生者。忘其姓字。?里。官爵。忽忽不知吾爲誰也。宦遊三十載。將老。退居洛下。所居有池五六。竹數千竿。喬木數十株。臺?舟橋具體而微。先生安焉。家雖貧。不至寒?。年雖老。未及?。性嗜酒。耽琴。? 詩。凡酒徒琴侶詩客。多與之游。游之外。棲心釋氏。通學小中大乘法。

與嵩山僧如滿爲空門友。平泉客韋楚爲山水友。彭城劉夢得爲詩友。安定皇甫朗之爲酒友。每一相見。欣然忘歸。

洛城?外六七十里間。凡觀寺丘墅有泉石花竹者。靡不游。人家有? 酒鳴琴者靡不過。有圖書歌舞者靡不觀。自居守洛川。? 布衣家以宴遊召者亦時時往。每良辰?景或雪朝月夕。好事者相過。必爲之先拂酒?。次開詩?。詩酒旣?。乃自援琴。操宮聲。弄秋思一遍。若興發。命家?調法部絲竹。合奏霓裳羽衣一曲。

若歡甚。又命小妓歌楊柳枝新詞十數章。放情自?。酩酊而後已往往?興?及?。杖於?。騎遊都邑。肩?適野。

?中置一琴。一枕。陶謝詩數卷。?竿左右懸雙酒?。尋水望山。率情便去。抱琴引酌。興盡而返。如此者凡十年。其間日賦詩約千餘首。日釀酒約數百斛。而十年前後賦釀者不與焉。

 

妻?弟姪慮其過也。或譏之。不應。至于再三。乃曰凡人之性。鮮得中。必有所偏好。吾非中者也。設不幸吾好利而貨殖焉。以至于多藏潤屋。賈禍危身。奈吾何。

設不幸吾好博奕。一擲數萬。傾財破産。以至于妻子凍餓。奈吾何。設不幸吾好藥。損衣削食。?鉛燒汞以至于無所成有所誤。奈吾何。今吾幸不好彼而自適?盃觴諷詠之間。放則放矣。庸何傷乎。不猶愈?好彼三者乎。此劉伯倫所以聞婦言而不聽。王無功所以遊醉?而不還也。遂率子弟入酒房。環釀甕。箕踞仰面。長?太息曰。吾生天地間。才與行不逮於古人遠矣。而富於黔婁。壽於顔回。飽於伯夷。樂於榮啓期。健於?叔?。幸甚。幸甚。餘何求哉。若捨吾所好。何以送老。

 

因自吟詠懷詩云。

 

抱琴榮啓樂。縱酒劉伶?。放眼看?山。任頭生白髮。不知天地?。更得幾年活。從此到終身。盡爲閑日月。

吟罷自?。?甕撥?。又引數盃。兀然而醉。旣而醉復醒。醒復吟。吟復飮。飮復醉。醉吟相仍。若循環然。繇是得以夢身世。雲富貴。幕席天地。瞬息百年。陶陶然。昏昏然。不知老之將至。古所謂得全?酒者。故自號爲醉吟先生。

于時開成三年。先生之齒六十有七。鬚盡白。髮半?。齒雙缺。而觴詠之興猶未衰。?謂妻子云。

今之前吾適矣。今之後吾不自知其興何如。

 

 

4.

 

백거이는 스스로 자기의 묘지(墓誌)를 썼는데, 거기에 스스로의 사상과 지향, 취미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밖으로는 유행(儒行)으로 몸을 닦고, 안으로는 석교(釋敎, 불교)로 욕심을 제거하고, 옆으로는 도(圖)ㆍ사(史)ㆍ산(山)ㆍ수(水)ㆍ금(琴)ㆍ주(酒)ㆍ영가(?歌)로 뜻을 즐겁게 했다."

 

〈취음선생전〉에서 백거이는 인간 행복의 다섯 가지 조건을 열거했다.

돈에 곤란을 겪지 않을 것, 충분한 수명을 누릴 것, 먹는 것에 곤란을 겪지 않을 것, 인생을 즐겁게 받아들일 것, 몸이 건강할 것 등이다. 그러면서 각각의 조건에서 최저한의 상태에 있었다고 알려져 있는 옛사람들을 거론하여, 자신은 그들보다 나은 조건에 있다고 안도했다. 그 너글너글한 심리를 어떻게 하면 배울 수 있을까?

 

이즈음 여유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니, 백거이가 〈취음선생전〉 속의 〈영회시〉에서 말한 구절이 강한 울림을 준다.

 

 

모르겠네, 천지 사이에

다시 몇 년이나 더 살지

이제부터 몸이 끝날 때까지는

모두 다 한가한 세월로 삼으리

不知天地?。更得幾年活。

從此到終身。盡爲閑日月。

 

 

심경호 | 고려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1955년 충북 음성 출생.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일본 교토(京都)대학에서 《조선시대 한문학과 시경론》으로 문학박사 학위 취득. 저서로 《강화학파의 문학과 사상》 《한국한시의 이해》 《김시습평전》 《간찰, 선비의 마음을 읽다》 《책, 그 무시무시한 주술》 등과 역서로 《주역철학사》 《불교와 유교》 《중국자전문학》 《일본서기의 비밀》 등이 있음. 성산학술상과 일본 시라카와 시즈카(白川靜) 선생 기념 제1회 동양문자문화상 수상. 한국학술진흥재단 선정 제1회 인문사회과학 분야 우수학자.

 

/ 유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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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齋自題(時?翰林學士)」白居易


非老亦非少,年過三紀餘。非賤亦非貴,朝登一命初。
才小分易足,心寬體長舒。充腸皆美食,容膝?安居。
況此松齋下,一琴數帙書。書不求甚解,琴聊以自娛。
夜直入君門,?歸臥吾廬。形骸委順動,方寸付空虛。
持此將過日,自然多晏如。昏昏複默默,非智亦非愚。

 

 

 

 

西掖早秋直夜書意 自此後中書舍人時作。

 

?風起禁掖,新月生宮沼。

夜半秋暗來,萬年枝??。

炎?遞時節,鐘鼓交昏曉。

遇聖惜年衰,報恩愁力小。

素餐無補益,朱綬虛纏繞。

冠蓋棲野雲,稻粱養山鳥。

量力私自省,所得已非少。

五品不?賤,五十不?夭。

若無知足心,貪求何日了?

 

 

??

 

白居易(唐)的《西掖早秋直夜?意 自此后中?舍人?作。》?自全唐?。

 

五品不??,五十不?夭。"若无知足心?求何日了"

①西掖:指中?省。因在大明?宣政殿西?,?西省、西掖。原?作于唐穆宗??元年(公元821年),白居易五十??,?任中?舍人。??句是?,人要有知足之心,才???????做官做到五品官,不?下?。

人活到五十而死,不?夭折。若?有知足之心,那必?是?得无?,永无止息。??朝中有牛李??日?尖?,白居易的?多朋友卷入?方,互相??,?他最好的朋友元?,急于?取,不?手段,勾?宦官,排?有功于朝廷的宰相裴度,引起他的不?。

白居易?此境地,左右??,十分?心,曾上?穆宗,穆宗又不采?他的意?。于是心灰意冷,深刻??到官?的黑暗,曾?出“宦途?味已??”的感?。??句?就反映了??情?,感到无所作?,退而求其次,以知足保和之心,慰自己心?意?之情。后句亦?含着????得无?者的??。言?意深,?含?富,耐人?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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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元九書

 

作者:白居易

 

月日,居易白。微之足下:自足下謫江陵至於今,凡所贈答詩僅百篇,每詩來,或辱序,或辱書,冠於卷首,皆所以陳古今歌詩之義,且自?爲文因緣與年月之遠近也。僕?愛足下詩,又諭足下此意,常欲承答來旨,?論歌詩大端,?自述爲文之意,總爲一書,致足下前。累歲已來,牽故少暇,間有容隙,或欲爲之,又自思所陳亦無足下之見,臨紙復罷者數四,率不能成就其志,以至於今。今俟罪?陽,除?櫛食寢外無餘事,因覽足下去通州日所留新舊文二十六軸,開卷得意,忽如會面,心所蓄者,便欲快言,往往自疑不知相去萬里也。?而憤?之氣,思有所洩,遂追就前志,勉爲此書,足下幸試爲僕留意一省。

 

夫文?矣。三才各有文:天之文,三光首之;地之文,五材首之;人之文,六經首之。就六經言,詩又首之。何者?聖人感人心而天下和平。感人心者,莫先乎情,莫始乎言,莫切乎聲,莫深乎義。詩者:根情、苗言、華聲、實義。上自賢聖,下至愚?,微及豚魚,幽及鬼神,?分而氣同,形異而情一,未有聲入而不應,情交而不感者。聖人知其然,因其言經之以六義,緣其聲緯之以五音,音有韻,義有類,韻協則言順,言順則聲易入,類?則情見,情見則感易交。於是乎孕大含深,貫微洞密,上下通而一氣泰,憂樂合而百志熙。五帝三皇所以直道而行,垂拱而理者,?此以爲大柄,決此以爲大竇也。故聞「元首明股肱良」之歌,則知虞道昌矣;聞「五子洛汭」之歌,則知夏政荒矣。言者無罪,聞者作戒,言者聞者,莫不兩盡其心焉。?周衰秦興,採詩官廢,上不以詩補察時政,下不以歌洩導人情,乃至於諂成之風動,救失之道缺,於時六義始?矣。國風變爲騷辭,五言始於蘇李,蘇李騷人皆不遇者,各繫其志發而爲文,故河梁之句止於傷別,澤畔之吟歸於怨思,彷徨抑鬱不暇及他耳。然去詩未遠,梗??存,故興離別則引雙鳧一?爲?,諷君子小人則引香草惡鳥爲比,雖義類不具猶得風人之什二三焉,於時六義始缺矣。晉宋已還得者蓋寡:以康樂之奧博,多溺於山水,以淵明之高古,偏放於田園,江鮑之流又狹於此,如梁鴻五噫之例者,百無一二焉!於時六義?微矣。陵夷至於梁陳間,率不過嘲風雪、弄花草而已。噫!風雪花草之物,三百篇中豈捨之乎!顧所用何如耳。設如「北風其?」,假風以刺威虐也;「雨雪??」,因雪以愍征役也;「棠?之華」,感華以諷兄弟也;「采采??」,美草以樂有子也。皆興發於此而義歸於彼。反是者可乎哉!然則「餘霞散成綺,澄江淨如練」、「離花先委露,別葉乍辭風」之什,麗則麗矣,吾不知其所諷焉,故僕所謂嘲風雪、弄花草而已,於時六義盡去矣。唐興二百年其間,詩人不可勝數,所可?者:陳子?有《感遇詩》二十首、鮑防有《感興詩》十五首。又詩之豪者,世稱李杜,李之作,才矣,奇矣,人不逮矣!索其風雅比興,十無一焉。杜詩最多,可傳者千餘篇,至於貫穿今古?縷格律,盡工盡善又過於李,然撮其《新安吏》《石壕吏》《潼關吏》《塞蘆子》《留花門》之章、「朱門酒肉臭路有凍死骨」之句,亦不過三四十首。杜?如此,況不逮杜者乎!僕嘗痛詩道崩壞,忽忽憤發,或食輟哺、夜輟寢,不量才力,欲扶起之。嗟呼!事有大謬者,又不可一二而言!然亦不能不?陳於左右:

 

僕始生六七月時,乳母抱弄於書?下,有指無字之字示僕者,僕雖口未能言,心已默識,後有問此二字者,雖百十其試,而指之不差,則僕宿習之緣,已在文字中矣。及五六歲,便學爲詩,九歲?識聲韻,十五六始知有進士,苦節讀書,二十已來,晝課賦夜課書,間又課詩,不遑寢息矣,以至於口舌成瘡、手?成?,旣壯而膚草不?,盈未老而齒髮早衰,白瞥瞥然如飛蠅垂珠在眸子中也,動以萬數!蓋以苦學力文所致。又自悲矣家貧多故,二十七方從?試。旣第之後,雖專於科試,亦不廢詩,及授校書?時已盈三四百首,或出示交友如足下輩,見皆謂之工,其實未窺作者之域耳。自登朝來,年齒漸長,?事漸多,每與人言多詢時務,每讀書史多求理道,始知文章合爲時而著,歌詩合爲事而作。是時皇帝初?位,宰府有正人,屢降璽書,訪人急病。僕當此日,擢在翰林,

身是諫官,月請諫紙啓奏之外,有可以救濟人病裨補時闕而難於指言者,輒詠歌之,欲稍稍遞進聞於上:上以廣宸聰,副憂勤;次以酬恩?,塞言責;下以復吾平生之志。豈圖志未就而悔已生,言未聞而謗已成矣!又請爲左右終言之:凡聞僕賀雨詩,而衆口籍籍,已謂非宜矣;聞僕哭孔戡詩,衆面脈脈,盡不悅矣;聞《秦中吟》,則權豪貴近者相目而變色矣;聞樂遊園寄足下詩,則執政柄者扼腕矣;聞宿紫閣村詩,則握軍要者切齒矣。大率如此,不可偏?。

不相與者號爲沽名,號爲??,號爲?謗。苟相與者,則如牛僧孺之誡焉,乃至骨肉妻?皆以我爲非也。其不我非者,?不過三兩人:有鄧?者,見僕詩而喜,無何而?死;有唐衢者,見僕詩而泣,未幾而衢死;其餘則足下,足下又十年來困?若此。嗚呼!豈六義四始之風天將破壞不可支持耶?抑又不知天之意,不欲使下人之病苦聞於上耶?不然,何有志於詩者不利若此之甚也!

 

然僕又自思關東一男子耳,除讀書屬文外,其他?然無知,乃至書??博可以接?居之歡者,一無通曉,?其愚拙可知矣。初應進士時,中朝無?麻之親,達官無半面之舊,策蹇?於利足之途,張空?於戰文之場,十年之間,三登科第,名入衆耳,跡升?貫,出交賢俊,入侍冕旒。始得名於文章,終得罪於文章,亦其宜也!日者又聞親友間?:禮吏部?選人,多以僕私試賦判傳爲準的,其餘詩句亦往往在人口中。僕?然自愧,不之信也。及再來長安,又聞有軍使高霞寓者欲聘娼妓,妓大誇曰:「我誦得白學士《長恨歌》,豈同他妓哉!」由是增價。又足下書云:到通州日,見江館柱間有題僕詩者,復何人哉。又昨過漢南日,適遇主人集衆樂娛他賓,諸妓見僕來,指而相顧曰:「此是《秦中吟》《長恨歌》主耳。」自長安抵江西,三四千里,凡?校佛寺逆旅行舟之中,往往有題僕詩者,士庶僧徒孀婦處女之口,每每有詠僕詩者。此誠雕蟲之?,不足爲多,然今時俗所重正在此耳。雖前賢如淵雲者、前輩如李杜者,亦未能忘情於其間。古人云:「名者公器,不可以多取。」僕是何者?竊時之名已多,旣竊時名,又欲竊時之富貴,使己爲造物者,肯兼與之乎!今之?窮,理固然也。況詩人多蹇,如陳子?杜甫各授一拾遺,而?剝至死;李白孟浩然輩,不及一命,窮悴終身;近日孟郊六十,終試協律;張籍五十,未離一太祝。彼何人哉!彼何人哉!況僕之才,又不逮彼。今雖謫在遠郡,而官品至第五,月俸四五萬,寒有衣、饑有食,給身之外施及家人,亦可謂不負白氏之子矣!微之微之,勿念我哉。

 

僕數月來檢討囊?中,得新舊詩,各以類分,分爲卷首:自拾遺來,凡所遇所感,關於美刺興比者,又自武德訖元和,因事立題,題爲「新樂府」者,共一百五十首,謂之「諷諭詩」;又或退公獨處,或移病閒居,知足保和吟翫情性者一百首,謂之「閒適詩」;又有事物牽於外,情性動於內,隨感遇而形於歎詠者一百首,謂之「感傷詩」;又有五言、七言、長句、短句,自一百韻至兩韻者四百餘首,謂之「雜律詩」。凡爲十五卷,約八百首,異時相見,當盡致於執事。微之,古人云:「窮則獨善其身,達則兼濟天下。」僕雖不肖,常師此語。大丈夫所守者道,所待者時。時之來也,爲雲龍爲風鵬,勃然突然,陳力以出;時之不來也,爲霧豹爲冥鴻,寂兮寥兮,奉身而退。進退出處,何往而不自得哉。故僕志在兼濟,行在獨善,奉而始終之則爲道,言而發明之則爲詩。謂之「諷諭詩」,兼濟之志也;謂之「閒適詩」,獨善之義也。故覽僕詩者,知僕之道焉。其餘雜律詩,或誘於一時一物,發於一笑一吟,率然成章非平生所?,但以親朋合散之際,取其釋恨佐?。今銓次之間,未能刪去,他時有爲我編集,斯文者?之可也。

 

微之,夫貴耳賤目,榮古陋今,人之大情也!僕不能遠徵古舊,如近歲韋蘇州歌行,?麗之外,頗近興諷,其五言詩又高雅閒澹,自成一家之體,今之秉筆者誰能及之!然當蘇州在時,人亦未甚愛重,必待身後,然後人貴之。今僕之詩,人所愛者,悉不過雜律詩與《長恨歌》已下耳,時之所重,僕之所輕。至於諷諭者,意激而言質;閒適者,思澹而詞迂。以質合迂,宜人之不愛也。今所愛者,?世而生獨足下耳,然千百年後,安知復無足下者出而知愛我詩哉。故自八九年來,與足下小通則以詩相戒,小窮則以詩相勉,索居則以詩相慰,同處則以詩相娛,知吾罪吾,率以詩也。如今年春遊城南時,與足下馬上相?,因各誦新艶小律,不雜他篇,自皇子陂歸昭國里,迭吟遞唱不絶聲者二十里餘,樊李在傍無所措口。知我者以爲詩仙,不知我者以爲詩魔。何則?勞心靈、役聲氣,連朝接夕不自知其苦,非魔而何?偶同人當美景,或花時宴罷,或月夜酒?,一詠一吟,不知老之將至,雖?鸞?遊蓬瀛者之適無以加於此焉,又非仙而何?微之微之,此吾所以與足下外形骸,脫?蹟,傲軒鼎,輕人?者,又以此也。當此之時,足下興有餘力,且欲與僕悉索還往中詩,取其尤長者,如張十八古樂府,李二十新歌行,盧楊二?書律詩,竇七元八絶句,博搜精?編而次之,號「元白往還詩集」,衆君子得擬議於此者,莫不?躍欣喜,以爲盛事。嗟乎!言未終而足下左轉,不數月而僕又繼行,心期索然,何日成就!又可爲之歎息矣。又僕嘗語足下,凡人爲文,私於自是,不忍於割截,或失於繁多;其間??,益又自惑。必待交友有公鑒無姑息者,討論而削奪之,然後繁簡當否得其中矣。況僕與足下爲文尤患其多,己?病之,況他人乎!今且各纂詩律,?爲卷第,待與足下相見日,各出所有,終前志焉,又不知相遇是何年,相見在何地,?然而至則如之何!微之微之,知我心哉!

 

?陽臘月,江風苦寒,歲暮鮮歡,夜長無睡。引筆鋪紙,?然燈前,有念則書,言無次第。勿以繁雜爲倦,且以代一夕之話也。微之知我心哉,樂天再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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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行路-借夫婦以諷君臣之不終也

 

太行之路能?車,若比人心是坦途。

巫峽之水能覆舟,若比人心是安流。

人心好惡苦不常,好生毛羽惡生瘡。

與君結發未五載,豈期牛女?參商。

古稱色衰相棄背,當時美人猶怨悔。

何況如今鸞鏡中,妾?未改君心改。

?君熏衣裳,君聞蘭麝不馨香。

?君盛容飾,君看金翠無?色。

行路難,難重陳。

人生莫作婦人身,百年苦樂由他人。

行路難,難於山,險於水。

不獨人間夫與妻,近代君臣亦如此。

君不見左納言,右納史,朝承恩,暮賜死。

行路難,不在水,不在山,隻在人情反覆間。

 

 

??

白居易(唐)的《太行路-借夫?以?君臣之不?也》?自全唐?:卷426-10。

 

【注?】:太行之路能??

①?若比君心是坦途

②?巫?之水能覆舟

③?若比君心是安流

④①太行句:太行山路崎??行,往往造成?毁人亡。

②坦途:平坦之路。

③巫?之水:巫?水急浪高,舟行??。

④安流:平安的水道。

 

《太行路》是《新?府》五十首中的一首,?下注:“借夫?以?君臣之不?也。”??句是?,太行山路??行,能?毁??,若比起君心?,?多?平坦;巫?里的水能?覆船只,若比起君心?,?多?平?!?刺之意?而易?,遣???有力,?剌深刻,所?“其言直而切,欲?之者深?也”。

 

人生莫作?人身?百年苦?由他人??句是?,生而?人,?在不要作女?身。女人可怜,一生中的日子,是苦是?,全由他人(男子)安排,多悲哀,少??。以封建社??女受?迫的??,暗?君臣?系,臣下缺乏自立,身无自由,苦多?少,命?全由君王所左右。委婉含蓄,?藉深?,耐人琢磨。

 

--引自李?洲?著之《全唐?佳句?析》

 

(小提示:如果?想??《太行路-借夫?以?君臣之不?也》相??句的上一句或者下一句是什?,可以在?面右上角的“???索”中?入?要??的?句,回??可?到??句的上句或下句。注意上半句和下半句?入?不要留有空格和?点符?!)

 

 

 

《初入太行路》(作者:白居易) 唐??析

 

初入太行路(1)

  作者:唐·白居易 (2)

 

天冷日不光,太行峰?茫(3)。

??此中?,今我方?往(4)。

?蹄?且滑,羊?不可上(5)。

若比世路?,?自平于掌(6)。

 

卷424_40【初入太行路】白居易

 

天冷日不光,太行峰蒼莽。

嘗聞此中險,今我方獨往。

馬蹄凍且滑,羊腸不可上。

若比世路難,猶自平于掌。

 

【注?】

(1)《初入太行路》一?,借?太行山之崎??峻,揭示人世道路更??辛的??。此外?人?有一首《太行路》,?此?立意?同。

(2)白居易(772?846):字?天,?年自?香山居士。下圭?(今?西渭南)人,生于新?(今?河南)。德宗?元十六年(800)中?士。是中唐新?府??的主要代表,??主??人。

(3)日不光:天色昏暗,?有光亮。?茫,亦作“?茫”。??,迷茫。

(4)??:早就??。?往,?自前往,无人同行。

(5)羊?:指太行羊?坂。

(6)世路:比???生活的道路。?自,仍,??得。

 

【作者介?】

 

  白居易(772?846),字?天,?年自?香山居士,后人?白香山、白傅、白太傅,原籍太原,后?居下?(今?西渭南)。是唐代的杰出?人和文?家,他的?歌?材?泛,形式多?,?言平易通俗,?白居易?“?魔”、“?王”、“?豪”、“?史”等,日本?界??白居易?“?神” 。其?,在唐代?白居易的?呼是“?仙”之?,?看唐宣宗的?:“?玉?珠六十年,??冥路作?仙?浮云不系名居易,造化无?字?天。童子解吟?恨曲,胡?能唱琵琶篇,文章已?行人耳,一度思卿一?然。”唐德宗?元十六年(800)?士,由校??累官至左拾?。在此期?,他?心朝政,??上?言事,??了不少???,要求革除弊政,因而遭??忌恨,被??江州司?。此后他?任忠州、杭州、?州等地刺史。官?刑部??。更多古?欣?文章敬??注“?古堂???”的白居易的?全集?目。(http://xigutang.2014qq.cn)

 

  白居易主?“文章合??而著歌?合?事而作”(《?元九?》)。他?元?一起,倡?旨在揭露?弊的“新?府??”,?了《秦中吟》十首,《新?府》五十首等,???社?的黑暗??作了深刻批判。在??上,白居易?以平易??著?,在??就流布??。有《白氏??集》,存?近三千首,?量之多,?唐人之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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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序洛詩序

 

序洛詩,樂天自序在洛之詩也。予歷覽古今歌詩,自風騷之後,蘇李以還,次及鮑謝徒,?於李杜輩,其間詞人聞知者累百,詩章流傳者鉅萬,觀其所自,多因讒?譴逐,征戍行旅,凍?病老,存歿別離,情發於中,文形於外,故憤憂怨傷之作,通計今古,什八九焉。

世所謂文士多數奇,詩人尤命薄,於斯見矣。又有以知理安之世少,離亂之時多,亦明矣。予不?,喜文嗜詩,自幼及老,著詩數千首。以其多也,故章句在人口,姓字落詩流,雖才不逮古人,然所作不?數千首,以其多矣,作一數奇命薄之士,亦有?矣。今壽過耳順,幸無病苦,官至三品,免罹饑寒,此一樂也。太和二年詔授刑部侍?,明年病免歸洛,旋授太子賓客分司東都,居二年就領河南尹事,又三年病免歸,履道里第,再授賓客分司。自三年春至八年夏,在洛凡五周歲,作詩四百三十二首,除喪朋、哭子十數篇外,其他皆寄懷於酒,或取意於琴,閑適有?,?樂不暇,苦詞無一字,憂嘆無一聲,豈牽?所能致耶,蓋亦發中而形外耳。斯樂也,實本之於省分知足,濟之以家給身閑,文之以觴詠弦歌,飾之以山水風月。此而不適,何往而適哉??又以重吾樂也。予嘗云:「理世之音安以樂,閑居之詩泰以適。」?非理世,安得閑居?故集洛詩,別?序引。不獨記東都履道里有閑居泰適之?,亦欲知皇唐太和歲有理世安樂之音,集而序之,以俟夫采詩者。甲寅歲七月十日云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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九月醉吟(唐)白居易?的古?

 

前月月明夜,美人同?光。

??一以?,今夕坐相忘。

?落芙蓉露,疑??被香。

 

前月月明夜,美人同遠光。

?塵一以間,今夕坐相忘。

風落芙蓉露,疑余繡被香。

 

 

 

九日醉吟

 

有恨頭還白,無情菊自黃。

一?州司馬,三見歲重陽。

劍匣塵埃滿,籠禽日月長。

身從漁父笑,門任雀羅張。

問疾因留客,聽吟偶置觴。

嘆時論倚伏,懷舊數存亡。

奈老應無計,治愁或有方。

無過學王績,唯以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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勸酒十四首·何處難忘酒七首(白居易 唐詩)

 

  何處難忘酒,長安喜氣新。
  初登高第後,乍作好官人。
  省壁明張榜,朝衣穩稱身。
  此時無一?,爭奈帝城春。

 

  何處難忘酒,天涯話舊情。
  ?雲俱不達,白發遞相驚。
  二十年前?,三千里外行。
  此時無一?,何以?平生。

 

  何處難忘酒,朱門羨少年。
  春分花發後,寒食月明前。
  小院回羅綺,深房理管弦。
  此時無一?,爭過?陽天。

 

  何處難忘酒,霜庭老病翁。
  暗聲啼??,幹葉落梧桐。
  ?爲愁先白,?因醉暫紅。
  此時無一?,何計奈秋風。

 

  何處難忘酒,軍功第一高。
  還?隨露布,半路授旌?。
  玉柱剝蔥手,金章爛?袍。
  此時無一?,何以騁雄豪。

 

  何處難忘酒,?門送?多。
  斂襟收涕淚,簇馬聽笙歌。
  煙樹?陵岸,風塵長樂坡。
  此時無一?,爭奈去留何。

 

  何處難忘酒,逐臣歸故園。
  赦書逢驛騎,賀客出都門。
  半面?煙色,滿衫?淚痕。
  此時無一?,何物可招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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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 東國李相國後集卷第二 > 古律詩

 

次韻和白樂天病中十五首

 

予本嗜詩。雖宿負也。至病中尤酷好。倍於平日。亦不知所然。每寓興觸物。無日不吟。欲罷不得。因謂曰此亦病也。曾著詩癖篇以見志。盖自傷也。又每食不過數匙。唯飮酒而已。常以此爲患。及見白樂天後集之老境所著。則多是病中所作。飮酒亦然。其一詩略云。我亦定中觀宿命。多生債負是歌詩。不然何故狂吟詠。病後多於未病時。酬夢得詩云。昏昏布衾底。病醉睡相和。服雲母散詩云。藥消日晏三匙食。其餘亦난001倣此。予然後頗自寬之曰。非獨予也。古人亦爾。此皆宿負所致。無可奈何矣。又白公病暇滿一百日解綬。予於某日將乞退。計病暇一百有十日。其不期相類如此。但所欠者。樊素,少蠻耳。然二妾亦於公年六十八。皆見放。則何與於此時哉。噫。才名德望。雖不及白公遠矣。其於老境病中之事。往往多有類予者。因和病中十五首。以?其情。

 

 

 

白居易:醉吟先生傳

 

醉吟先生者。忘其姓字。?里。官爵。忽忽不知吾爲誰也。宦遊三十載。將老。退居洛下。所居有池五六。竹數千竿。喬木數十株。臺?舟橋具體而微。先生安焉。家雖貧。不至寒?。年雖老。未及?。性嗜酒。耽琴。? 詩。凡酒徒琴侶詩客。多與之游。游之外。棲心釋氏。通學小中大乘法。

與嵩山僧如滿爲空門友。平泉客韋楚爲山水友。彭城劉夢得爲詩友。安定皇甫朗之爲酒友。每一相見。欣然忘歸。

洛城?外六七十里間。凡觀寺丘墅有泉石花竹者。靡不游。人家有? 酒鳴琴者靡不過。有圖書歌舞者靡不觀。自居守洛川。? 布衣家以宴遊召者亦時時往。每良辰?景或雪朝月夕。好事者相過。必爲之先拂酒?。次開詩?。詩酒旣?。乃自援琴。操宮聲。弄秋思一遍。若興發。命家?調法部絲竹。合奏霓裳羽衣一曲。

若歡甚。又命小妓歌楊柳枝新詞十數章。放情自?。酩酊而後已往往?興?及?。杖於?。騎遊都邑。肩?適野。

?中置一琴。一枕。陶謝詩數卷。?竿左右懸雙酒?。尋水望山。率情便去。抱琴引酌。興盡而返。如此者凡十年。其間日賦詩約千餘首。日釀酒約數百斛。而十年前後賦釀者不與焉。

 

妻?弟姪慮其過也。或譏之。不應。至于再三。乃曰凡人之性。鮮得中。必有所偏好。吾非中者也。設不幸吾好利而貨殖焉。以至于多藏潤屋。賈禍危身。奈吾何。

設不幸吾好博奕。一擲數萬。傾財破産。以至于妻子凍餓。奈吾何。設不幸吾好藥。損衣削食。?鉛燒汞以至于無所成有所誤。奈吾何。今吾幸不好彼而自適?盃觴諷詠之間。放則放矣。庸何傷乎。不猶愈?好彼三者乎。此劉伯倫所以聞婦言而不聽。王無功所以遊醉?而不還也。遂率子弟入酒房。環釀甕。箕踞仰面。長?太息曰。吾生天地間。才與行不逮於古人遠矣。而富於黔婁。壽於顔回。飽於伯夷。樂於榮啓期。健於?叔?。幸甚。幸甚。餘何求哉。若捨吾所好。何以送老。

 

因自吟詠懷詩云。

 

抱琴榮啓樂。縱酒劉伶?。放眼看?山。任頭生白髮。不知天地?。更得幾年活。從此到終身。盡爲閑日月。

吟罷自?。?甕撥?。又引數盃。兀然而醉。旣而醉復醒。醒復吟。吟復飮。飮復醉。醉吟相仍。若循環然。繇是得以夢身世。雲富貴。幕席天地。瞬息百年。陶陶然。昏昏然。不知老之將至。古所謂得全?酒者。故自號爲醉吟先生。

于時開成三年。先生之齒六十有七。鬚盡白。髮半?。齒雙缺。而觴詠之興猶未衰。?謂妻子云。

今之前吾適矣。今之後吾不自知其興何如。

 

 

??《白氏長慶集》白氏文集卷第六十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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酬夢得見喜疾?(白居易 唐詩)

 

暖臥摩綿褥,晨傾藥酒螺。

昏昏布?底,病醉睡相和。

末疾徒雲爾①,?年有幾何。

須知差與否,相去校無多。

 

按:① 傳云:“風淫末疾,末謂四肢。”

 

 

早服雲母散(白居易 唐詩)

 

曉服雲英漱井華,寥然身若在煙霞。

藥銷日晏三匙飯,酒渴春深一碗茶。

每夜坐禪觀水月,有時行醉玩風花。

淨名事理人難解,身不出家心出家。[1]

 

釋義此詩收錄于全唐詩454卷第70首。

  雲母散,是當時道家的一種據說有養生功效的粉狀藥劑。這首詩所描寫的便是早上起來服了雲母散之後的感覺。按本詩所述,可能是一種能致人迷幻的藥。

  雲英,是雲母的一種,這裏代稱雲母散。

  井華,這裏指井華水,是早晨第一次汲取的井泉水, 中醫認爲此水味甘平無毒, 有安神、?靜、?熱、助陰等作用。

  寥然,這裏指一種平和安?之態。

  煙霞,道家認爲神仙居住的都是雲霧?繞,煙霞??的地方,煙霞在此處含有仙境的意思。

  晏,指遲,?。

  酒渴,指酒後口渴。從詩的上文來看,也可能指從這種迷幻藥勁中醒來後的口渴。

  水月,水中月影,常形容明淨。此處?指一種心如明鏡的狀態,又指一種鏡花水月的虛幻。觀水月,在此處是參?的意思。

  風花,隨風飄蕩的花。玩風花,在此處指一種逍遙不?的狀態。

  淨名,指淨名經,乃維摩?經之通稱。維摩?,梵名 Vimalaki^rti,意譯淨名。例如吉藏所作維摩經之論疏有

 

二,一書稱爲淨名玄論,一書稱爲維摩經義疏。又玄?將維摩?經譯爲無垢稱經,玄?以後則皆以淨名經稱之。

[2]此處也泛指佛經。

  “曉服雲英漱井華,寥然身若在煙霞。”此句平鋪直?,講自己早上吃了雲母散還喝了井華水,心神十分安?,像是身在煙霞??的仙境之中。

  “藥銷日晏三匙飯,酒渴春深一碗茶。”藥勁過了,天也?了,吃了三小勺的飯,口渴了就喝點茶。此句描寫的是一種?心寡欲,閑適無爭的生活,也是道家所倡導的養生方式。

  “每夜坐?觀水月,有時行醉玩風花。“每天?上坐?悟道,偶爾行個醉,玩點?灑。此句描寫的是詩人夜間的恬淡又不?的生活。逍遙,也是道家所向往的一種理想境界,所以道家人物一般都比較放浪形骸,不拘一格。

  ”淨名事理人難解,身不出家心出家。“(雖然)佛經上的道理人們都覺得難以理解,可我身未出家,心?已經出家了。此句講詩人自己有從佛之心。古時候的詩人一般都喜歡言有盡而意無窮的表達方式,所以尾句一般都要來點意境的升華。此句的“身不出家心出家”便有些這樣的意思。此句不僅總括上文,也是對本詩意境的一種升華,使其不只是簡單地停留在?事之上。此句的妙處更在于其所凝練出的哲理與上文的銜接,是如此自然而然,水到渠成。其藝術感染力之所以能穿越千古,更是因爲?深刻地揭示了人性所存在的矛盾,引起了他人的共鳴。

  作者簡介白居易(772年~846年),漢族,字樂天,?年又號香山居士,我國唐代偉大的現實主義詩人。是中國文學史上負有盛名且影響深遠的唐代詩人和文學家,他的詩歌題材廣泛,形式多樣,語言平易通俗,有“詩魔”和“詩王”之稱。官至翰林學士、左贊善大夫。有《白氏長慶集》傳世,代表詩作有《長恨歌》、《賣炭翁》、《琵琶行》等。白居易故居紀念館坐落于洛陽市郊。白園(白居易墓)坐落在洛陽城南琵琶峰。(王朝網路 wangchao.net.cn)

 

 

 

 

 

古美女標準:膚發唇齒,對胸無要求

 

 

左「素口」右「蠻腰」:白居易的風流人生

 

作者:新浪讀書

 

元和二年(807年),白居易在周至任縣尉,這時他已36歲,依然是孑然一身。孤獨和寂寞折磨著他,他只有寄情於花草,把花當作情人。他的《?題新栽薔薇》詩直呼出了他的心聲:“少府無妻春寂寞,花開將爾作夫人。”白居易直到37歲才結了婚,婚後和楊氏夫妻關係?不壞,但白居易仍然時時想起少年時代的女友湘靈姑娘。當年湘靈姑娘曾送給白居易一雙鞋子,白居易一直保存著,多年來,不論在朝在野,走到?裡就帶到?裡。

元和十年(815年),白居易貶江州司馬,於是又將鞋子帶到了江州。第二年春天,他將衣物一類的東西?在院子裡?太陽,忽然見到那雙鞋子,少年時的歷歷往事便一起湧上心頭。他又想起了當年的湘靈姑娘。

這時白居易已是45歲的人了,仍禁不住思??騰,感歎再三,賦詩抒情:“中庭?服玩,忽見故?履。昔贈我者誰,東?嬋娟子。因思贈時語:『特用結終始,永願?履?,雙行復雙止。』自吾謫江郡,漂泊三千里,?感長情人,提?同到此。今朝一??,反覆看未已。人只履猶雙,何曾得相似?可嗟復可惜,錦表繡?裡。況經梅雨後,色?花草死。”

 

素口蠻腰,蓄妓玩樂,始自東晉,唐代比較普遍,而在白居易身上表現得最?突出。?了滌除人生煩惱,白居易以妓樂詩酒放縱自娛。他蓄妓與嗜酒無度,直到暮年。從他的詩中知姓名之妓便有十幾個,最出名的是小蠻和樊素。唐孟棨《本事詩·事感》中記載:“白?書(居易)姬人樊素善歌,妓人小蠻善舞,嘗?詩曰:櫻桃樊素口,楊柳小蠻腰。”也就是說,美姬樊素的嘴小巧鮮?,如同櫻桃小蠻的腰柔弱纖細,如同楊柳

現代人形容美女說櫻桃嘴、小蠻腰或楊柳腰,就是從白居易那裡學過來的。

 

?外據《容齋隨筆》上說,白居易有首詩,叫做《小庭亦有月》云:“小庭亦有月,小院亦有花。菱角執笙簧,谷兒抹琵琶。紅?信手舞,紫?隨意歌。左顧短紅袖,右命小?娥……”白居易自己做注說:“菱、谷、紅、紫,皆小臧獲名。”臧獲,?家妓。詩中的菱角、谷兒、紫?、紅?等女子都是他的小妾或家妓。早年白居易曾上書極力反對皇帝選美,不想白居易後來也?溺於聲色之中。當然唐代士大夫們蓄妓?非只有白一人,是一種?普遍的現象。

 

白居易後來老了,體弱多病,決定賣馬和放妓,他不希望他們?著自己吃苦。但是他心愛的馬居然反顧而鳴,不忍離去。樊素和小蠻等人對白居易還是蠻有感情的,?們都不忍離去。樊素感傷落淚地說:

“主乘此駱五年,銜?之下,不驚不逸。素事主十年,中?之間,無違無失。今素貌雖陋,未至衰?。駱力猶壯,又無??。?駱之力,?可以代主一步;素之歌,亦可以送主一杯。一旦雙去,有去無回。故素將去,其辭也苦;駱將去,其鳴也哀。此人之情也,馬之情也,豈主君獨無情哉?”

白居易也長歎道:“駱駱爾勿嘶,素素爾勿啼;駱返廟,素返閨。吾疾雖作,年雖頹,幸未及項籍之將死,何必一日之內棄?兮而別虞姬!素兮素兮!?我歌楊柳枝。我姑酌彼金缶,我與爾歸醉?去來。”

 

 

素口?腰

 

樊素?小?原?唐代大?人白居易小妾,素善歌,?善舞。白居易有??二女,“?桃樊素口,?柳小?腰”,

后素口?腰作?成?用于形容美貌的女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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