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도교신문 제86.87호
포덕158(2017)년 4월 4일(화요일)
가시밭길 동학, 천도교의 역사를 보여주는 태묘
태묘와 대신사 가족의 묘
1982녀 시천교가 공식적으로 청산되고
포덕129년(1988)
시천교의 잔여재산이 천도교로 귀속되면서
태묘도 천도교 소유가 되었고
이후 포덕131년(1990) 3월 10일
태묘 앞에 ‘동학창도주수운최제우스승님’라 새긴
지금의 대신사 묘비가 들어섰고
이때 박씨 사모님의 묘소와
대신사의 모친 한씨의 묘도 함께 성역화하였다
이후 포덕138년(1997)
대신사의 아들 세정. 세청의 묘도 새롭게 단장하였다
우리 천도교인들은
용담성지를 방문하면 테묘를 참례한다
태묘는 잘 단장되어 있고
태묘 아래쪽에는 대신사 사모님을 비롯한 두 아들
그리고 며느리들의 묘도 아담하게 조성되어 있다
이것만 보면 참으로 다복해 보이는 가족묘이다
그러나 환원하신 지 백년도 훨씬 지나
양지 바른 능선에 함께한 남편과 아내와
두 아들 그리고 며느리다
그것도 목 잘려 죽고 매 맞아 죽고
굶어 병들어 죽은 이들의 묘다
우리는 대신사의 태묘를 참례하며
동학, 천도교가 걸어왔던
형극의 역사를 마주치게 된다
혹자는 말한다
수운 대신사는 유교의 테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그러나 대신사의 삶을 알고
그 가족이 걸었던 가시밭길 역사를 알게 되면
이런 턱없는 이야기는 쏙 들어간다
대신사께서는 당시의 목숨과 가족들의 목숨과
당신의 제자들의 숱한 목숨까지 바쳐
다시 개벽의 길을 열었던 것이다
이런 사실을 마주하게 되면
저절로 눈시울이 붉어졌다
대시사의 묘비문,
박씨 사모님과 세정, 세청의 묘비문은
동학, 천도교가 걸었던
형극의 역사를 그대로 보여준다
[동학창도주수운최제우스승님묘비문]
아! 거룩하고 위대하시도다
겨레의 자랑이자 인류의 영광인
만고의 대성인이 여기 고요히 누워계시니
이 어른이 동학의 시조 수운최제우 스승님이다
일찍이 갑신 포덕36년 전(단기4157)
시월 이십 팔일 경주의 이곳 건너 마을 가정리에서
서운이 집을 두르고 향기가 가득하며
구미산이 삼일간 진동할때
부친 근암 최옥 선생과 한씨의 육신을 빌려
탄생하시었으니 본관은 경주요 이름은 제우요
자는 성묵이요 호는 수운이다
얼굴은 관옥이요 총명이 사광보다 더해서
팔세에 입학하여 만권시서를 무불통지하신 후에
이십세에 나라와 창생의 장래를
크게 걱정하신 나머지 제세안민의
대도를 이루시고자 방방곡곡 찾아들어
인심풍속 살피시고 만고풍상 겪은 일을
노래지어 소창하며 구도생활을 하시다
삼십이세 되시던 을묘 3월에 울산에서
한 신선으로부터 천서 한 권을 전해받으시고
다욱 수도에 열중하시다가 삼십육세 되시던
기미 시월에 용담정에 돌아오신 후
제세안민의 도를 깨달으시기 전에는
산문 밖에 않으리라 맹세하시고
정심수도하시니 천은이 막극하여
삼십칠세 되시던 포덕 원년(단기4193)
갑자 시월 초오일에 도즉천도 학즉동학인
만고없는 무극대도를 한울님께 받으시고
법을 정하고 글을 지어
풍운같이 모여드는 후학들을 지도하시다
사십세 되시던 계해 8월 14일
해월 최시형 스승님께 도통을 전수하시고
득도하신 지 불과 사년 만인 포덕 5년(단기4197)
갑자 3월 10일 대구장대에서
겨례의 마음 속에
인내천진리의 씨앗을 심으시고 순도하시니
슬프다! 세상사람들이 선각자를 몰랐어라
아! 영원불멸의 얼이시여
장차 용담수가 흘러 사해의 근원이 되고
구미산에 봄이 와서 온 세상이 꽃동산 되리니
억만년이 무궁토록
온 인류와 더불어 함께 살아가시도다
포덕131년(단기4333) 3월 10일
[대신사 자당 한씨 묘비문]
하원갑 이세상에 남녀간 자식없어 탄식하고 하는말이
우리도 이세상에 명명한 천지운수 남과같이 타고나서
기궁한 이내팔자 일점혈육 없단말가
그러그러 지내나니 윤신포태 되었더라
십삭이 이미되매 일일은 집가운데 운무가 자욱하여
내금강 외금강이 두세번 진동할 때
홀연히 산기있어 아들아기 탄생하니 기남자 아닐런가
이세상 무극대도 전지무궁 아닐런가
포덕131년 11월
[대신사 부인 박씨 묘비문]
현숙한 내집부녀 이글보고 안심하소
거룩한 내집부녀 자세보고 안심히소
거룩한 내집부녀 근심말고 안심하소
춘삼월 호시절에 태평가 불러보세
포덕전 33년 울산에서 태어나시어
17세 때 대신사와 혼인하여
첩첩이 험한 일을 겪으시다
대신사께서 득도 후 포덕하실 때 맨 처음 입도하여
정성과 공경을 다하시다 대신사 순도후
계속 관의 지목이 극심하여 두 아들과 딸을 거느리고
이곳저곳 피아여 옮겨다니면서
말로 다 할 수 없는 형극의 길을 밟으시었다
포덕 13년에 아들 세정이
양양 옥에서 장사 당하는 아픔을 겪으시고
포덕 15년 1월 26일
강원도 정선 싸내에서 48세를 일기로 순도하시다
자 세정 세청
서 허찬 안연원
손 문수
증손 현석 현손 영락
5대손 상수 상신 포덕131년 11월
[대신사의 장남 세정묘비문]
최세정 어른은 정미(1847)년에 용담정에서
부친 수운 최제우 선생과 모친 밀양 박씨사모님의
장남으로 태어나 학업에 이어 약관 16세부터
천제를 지내며 목검 춤을 추는 등 수행을 하였으며
17세에 강릉 김씨와 결혼하였다
수운대신사께서 순도하신 후부터
영월 양양 인제지역 도인들을 지도하였으며
경오(1870)년 3월 에는 영월 소미원에 은거하면서
도인들을 직접지도하여 도중의 추앙을 받았다
신미(1871)년 영해교조신원운동 직후
인제군 기린면 봉덕동에 은거하던 중
다음해 1월 26일 관헌에 체포되어
5월 12일에 심한 장벌로 26세를 일기로 순도하였다
천도교중앙총부는 님의 유해를 찾을 길 없어
부득이 포덕 138년 6월 순도하신
양양군 군향리 8번지(옛 관아터)의 흙을 담아
이 곳 부인묘에 함장하고
님의 거룩한 순도정신을 기리고자
비를 세워 후세에 전한다
포덕 138년 6월 20일 천도교중앙총부
[대신사의 차나 세청묘비문]
최세청 님은 을묘(1855)년에
부친 수운 최제우 선생과 모친 밀양 박씨 사모님의
차마남으로 태어나 청빈한 생활 속에서 전전하다가
17세되는 신미(1871)년에
양구 김씨와 결혼하였으며
을해(1875)년 1월 22일 영월군 소미원
장기서 집에서 병을 얻어
21세를 일기로 환원하시다
포덕138년 6월 20일 천도교중앙총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