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강이 천리인 실향민들의 땅 교동도
김정오
수필가. 문학평론가
고향을 가지 못하는 사람들..
인천시 강화군 북서쪽에 우리나라에서 열두 번째로 큰 섬, 교동도가 있다. 한강물이 서해와 만나는 그 물길 건너편이 북한의 황해도 연안군이다. 고려 말 문신 이색이 전국 8대 명산 가운데 하나로 꼽았던 교동도의 화개산에 을라 북쪽을 보면 북한의 황해도 연안군, 배천군이 눈앞에 있다. 북한은 한국 전쟁 뒤, 옛 연백군 이름을 연안군으로 바꾸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연백의 농민들은 가벼운 옷차림 그대로 쪽배를 타고 교동도로 건너왔다. 늦어도 며칠 안으로는 다시 고향집으로 돌아갈 것으로 생각했으나 그것은 꿈이었다. 그들은 그때부터 날마다 고향을 바라보면서도 다시는 갈 수 없는 실향민들이 되고 말았다.
교동도는 1997년부터 25.5㎞의 철책을 둘렀다. 전선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어서 통제구역이기 때문이다. 육지는 군사분계선(MDL)이 쳐 있지만 이곳은 바다 위로 보이지 않는 철책이 있다. 교동도는 큰 다리(校洞大橋)가 놓이기 전까지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외로운 섬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신분이 확실하면 누구나 쉽게 드나들 수 있다.
역사 깊은 교동“읍성”과 ‘향교’
강화도는 한강, 임진강의 수운과 서해안 방어를 맡았던 전략적인 군사적 요충지였다. 그래서 일찍이 읍성을 쌓고, 삼도수군통어사가 있었다. 그 가운데 교동도는 국제 관문이었고, 전략상 군사적 요충지였다. 경기 남양만에 있던 경기수영(京畿水營)을 강화도로 옮기고, 인조 7년(1629년) 교동도로 다시 옮겼다. 그리고 현을 도호부로 높이고, 4년 뒤 경기수군절도사를 삼도수군통어사로 승격시켰다.
이때 교동읍성의 성곽을 돌로 쌓고, 성의 둘레 430m, 높이 6m 규모로 동문을 통삼루, 남문을 유량루, 북문을 공북루라 이름하고, 3개의 문을 두었다. 그러나 동문과 북문은 1925년 을축년 대홍수1) 때, 폭풍우로 무너지고 남문인 홍예문만 남았는데 문 위에 문루를 올려 제 모습을 다시 찾았다. 성곽의 흔적은 남문 주변과 뒤쪽으로 약간 씩 남아 있다.
고려 인종 5년(1127년)에 화개산 북쪽에 현유(賢儒)의 삶을 우러르고 지역의 중등교육과 백성들의 교화를 위해, 한국에서 가장 먼저 향교를 세웠다. 그 뒤, 고려 충렬왕 12년(1286)에 고려의 문신 안향(安珦, 1243~1306)이 원나라에서 돌아오는 길에 공자 상을 들여왔다.
현재 있는 건물은 대성전(大成殿), 동무(東廡), 서무(西廡), 명륜당(明倫堂), 제기고(祭器庫) 등이 있으며. 대성전 안에는 5성(五聖), 송조2현(宋朝二賢) 및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을 기리고 있다.
조선시대는 나라에서 지원을 받아 운영했으나, 지금은 봄, 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奉行)하고, 초하루 · 보름에 분향만 올리고 있으며, 전교(典校) 1명과 장의(掌議) 몇 명이 있다.
연산군 유배지
교동은 고려, 조선시대 왕과 왕족의 유배지이기도 했다. 교동도가 유배지가 된 까닭은 서울과 가까운 외딴 섬이어서 격리와 감시가 쉬웠기 때문이었다.1506년 인조 1년, 9월 2일 조선 10대 연산군이 중종반정으로 왕위에서 쫓겨나 이곳으로 유배를 왔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 6일 죽음을 때까지 2달가량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던 ‘거쳐’가 있다.
교동도에는 황해도 연백군에서 넘어온 실향민들이 일군 땅 3,300만여㎡의 농경지가 있다. 고향을 떠나기 전 연백에서 농사를 지었던 실향민들은 이 땅을 비옥한 땅으로 일구어 냈다.
이들 실향민들과 함께 연백의 농사기술이 교동도에 들어왔고, 교동의 쌀은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6·25전쟁 당시, 곡창지대인 연백평야는 남과 북 모두가 빼앗길 수 없는 땅이었다.
인천 상륙작전으로 연합군이 들어오고, 인민군은 연백평야를 지키기 위해 모든 힘을 다 쏟았다. 연합군은 평양을 공격한 뒤, 바로 연백지역을 공격했다. 곡창지대였기 때문이다.
실향민 2세로 교동도 주민이기도 한 김영애 우리누리 평화운동 대표가 교동도를 자세히 안내 해주었다. 그녀의 부모님이 연백에서 이곳으로 피난을 왔다. 그런 인연으로 그녀는 평화의 섬 교동도를 알리는 홍보대사 일을 열심히 하고 있다.
그녀는 말한다. “교동도는 남북을 잇는 섬이자, 유라시아를 이어주는 거점 역할을 할 수 있는 곳이라고... 그러면서 교동도의 슬픔과 한을 그리고 내일의 희망을 힘주어 말한다.
그 가운데 “대룡 시장을 빼놓을 수 없다. 대룡 시장은 한국전쟁 때, 이곳으로 피난 온 황해도 연백사람들이 눈물로 일군 시장이다. 옛날부터 교동사람들은 연백 장에서 필요한 모든 물건을 사다 썼다. 그러다가 전쟁이 일어나자 고향을 떠난 연백 사람들이 이곳 교동에 연백시장과 닮은 시장을 열었다.
가게 이름들도 연백 식당, 연백 이발관, 연백 정육점 등 고향마을 이름을 내걸었던 가게들이 지금도 그대로 있다. 북한에서 사라진 연백이라는 이름이 이곳에 그대로 살아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곳이 바로 통일의 거점이 되는 곳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2007년 10·4 선언2) 에서 이 지역을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로 만들기로 했기 때문에 이 구상을 끝까지 지켜내야 한다고 말한다. 그 뒤로도 2018년 4·27 선언과 9·19 선언에서 그런 구상을 다시 화인 했고, 남북 합의문에도 들어가 있기 때문에 이 선언이 이루어지면 이곳이 평화의 낙원이 될 것인데 지금 북한은 딴지를 걸고 있어 안타까운 일이라고 말한다.
교동도 사람들은 6,25전쟁 때, 이곳으로 피난 와서 고향이 그리워 한 맺힌 삶을 살다가 세상을 떠난 이금옥 할머니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리고 아래와 같이 그가 쓴 시 “격강 천리라더니”를 읊조린다.
격강천리라더니
이범옥
격강 천리라더니
바라보고도 못가는 고향일세
한강이 임진강과 예성강을 만나
바다로 흘러드는데
인간이 최고라더니
날짐승만도 못하구나
새들은 날아서 고향을 오고가련만
내 눈에는 인간을 조롱하듯 보이누나
비 오듯 쏟아지는 포탄속에서
목숨을 부지하려 허둥지둥 나왔는데
부모형제 갈라져
반백년이 웬 말인가
함께 나온 고향친구 뿔뿔이 흩어지고
백발이 돼 저 세상 간 사람 많은데
남은사람
고향 발 디딜 날 그 언제일까?
이하 생략
교동도는 조선 태종(1418년) 때 황룡이 나왔다고 하는 황룡우물이 투명 덮개에 덮혀 눈길을 끌있다. 교동도 사람들은 북쪽 경계선을 마주 대하고 있으나 완충지대이기 때문에 한강 하구를 사이에 두고도 무기도입이나 군사적 충돌이 없는 평화로운 고장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교동도는 긴장 속에서도 평화가 함께 하는 섬이다. 넓은 평야와 더불어 봄 여름이면 해바라기가 아름답게 피고, 저수지에는 연꽃들도 그렇게 피어 있다 그리고 겨울이면 흰 눈이 너무도 아름답게 쌓이는 곳 그 어느 곳 보보다 더 평화로운 섬이 바로 교동도이다.
사진
김정오(金 政 吾 )
수필가, 문학평론가, 숭실대, 교육학박사, 경기대, 중국연변대학교 겸임교수, 러시아 국립극동연방대학교 교환교수, 강서문인 협회 회장(역) 한겨레역사문학회 회장, 서울 역사포럼 고문, 한국문인협회 이사(역),현 자문위원, 국제 펜클럽한국본부 이사(역), 한국일보 수필공모 심사위원장(역), 안중근의사기념관 홍보대사,「지구문학」편집인, 대한민국 문화예술대상 외 다수
수필집: 빈 가슴을 적시는 단비처럼- 그 깊은 한의 강물이여- 양처기질 악처기질- 한이여 천년의 한이여- 지금 우리는 어디쯤 와 있는가? -아름다운 삶을 위하여-푸른솔 이야기- (외 논저 및 평론 다수)
1) 1925년 7~9월 사이 네 차례 집중호우와 강력한 태풍으로 전국에서 사망 647명, 가옥 유실 6363호, 가옥붕괴 1만 7405호, 가옥침수 4만 6813호에 이르는 큰 피해를 냈다. 특히 7월 11일과 12일 사이에 황해도 일대에 300~500밀리미터의 큰비가 내리고, 14일엔 임진강과 한강 유역에 집중호우가 쏟아졌던 20세기 최대의 홍수였다.
2) 2007년 10월 4일 남북정상이 함께 발표한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