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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소설가의 방 원문보기 글쓴이: 익명회원 입니다
천국의 별
방 영 주
단기 앞 2817년 10월 7일이었다. 어제 치우천왕(蚩尤天王)의 황제 즉위식을 겸한 제천행사를 마쳤다. 오늘은 첫 어전회의가 있는 날이었다.
마가(馬加)와 우가(牛加)는 궁궐로 향하고 있었다. 그들은, 바로 앞에서, 백성들이 주고받는 말을 들었다.
"치우천왕은 자오지천왕(紫烏支天王)이라고도 해."
"그분이 우리 배달국(倍達國) 14대 임금이셔."
"치우는 우레가 크게 치고 많은 비가 와서 강산을 바꾼다는 뜻이야. 하긴 주술로 안개와 구름을 일으키고, 비까지 오게 할 수 있다는 분이니까."
"과연 그 이름에 걸맞은 임금이셔. 생김새부터가 다르시지. 헌걸 찬 용모에 불꽃이 파랗게 이글거리는 눈. 꽉 다문 완강한 입……."
"치우천왕의 통치 기간이 바로, 배달국 최고의 전성 시대가 될 거야."
"그래, 치우천왕은 무엇보다 전쟁에 귀신같은 감각을 가지고 있으니까."
"용맹이 타의 추종을 불허해."
"게다가 거푸집을 만들어 광석에서 구리와 철을 녹여 내는 기술도 있어."
"치우천왕께서 병관(兵官) 치우(蚩尤)의 관직에 계실 때, 화독에서 흘러내리는 쇳물을 보고 고안한 거지."
"위대한 발견이란 그런 우연한 계기에서 얻어지는 게 아닐까. 또 심상히 지나치는 다수의 무감각한 사람들 속에서, 특별한 어떤 예각을 소유한 자만이 건져낼 수 있는 게 아니던가."
"치우천왕이 그런 분이지."
백성들의 어투는 다소 들떠 있었다. 새로운 임금에 대한 기대감이 대화 사이에 넘쳐 나고 있었다. 마가와 우가도 마찬가지였다.
그럴 거였다. 환웅천왕(桓雄天王)이 신시(神市)에서 개천을 한 이후, 태평성대를 구가하는 동안, 백성들은 너무 안이해져 있었다. 그 이면에는 뭔가 터져 주기를 고대하는 어떤 바램도 섞여 있을 터였다.
치우천왕은 웅씨국(熊氏國)에서 비왕(裨王)의 임무를 마치고, 한동안 병관 치우의 자리에 있었다. 본시 치우의 직책은 세습되는 것이었으나, 그 소임을 맡은 자가 전사하였고, 그의 장자는 너무 어렸다. 치우천왕은 장차 일을 도모하기 위해 병법을 익혀 두고 싶었다. 그래서 자청하여 치우의 임무를 맡은 거였다. 치우천왕이 병관에 있을 때에는 어느 족속도 감히 배달국의 변방을 넘보지 못했다. 본명이 자오지였던 치우천왕은, 치우의 관직명을 그대로, 자신의 왕명에 사용하기로 했다. 이는 자신의 치국에서 국방력의 강화가 가장 중요한 시책이 될 거라는 암시이기도 했다.
그리고 치우천왕의 구리와 쇠의 생산, 이 역시 배달국의 영광을 되찾는 한 중요한 동인이 될 거였다. 다른 종족들이 사용하는 돌이나 나무로 만든 무기와는 대적이 될 수가 없을 터였다. 이는 또한 인류가 돌을 사용하는 데서, 본격적으로 쇠를 이용하는 단계로 이행되는, 역사적인 사건이기도 했다. 물론 환웅천왕 때부터 쇠를 사용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은 불을 사용하면서 부수적으로 얻은 소량의 것이었다. 거푸집을 이용한 대량생산은 치우천왕 이후부터였다.
앞에서 말을 주고받던 사람들은, 마가와 우가를 발견하고 목례를 하며 옆으로 물러나, 길을 비켜 주었다. 마가와 우가는 그들에게 미소로 답했다. 마가는 우가의 얼굴을 힐끗 봤다. 우가의 얼굴은 다소 어두워져 있었다.
마가가 말했다.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나?"
"환웅천왕이 개천을 하고 별 다른 말썽이 없었지. 그러자 나라의 기강이 해이해지고, 서쪽의 낌새가 심상치 않아졌어. 제후국들 중에서 모국인 우리 나라를 배반하고 도전하는 일도 늘어가고 있지. 더 이상 방치를 하면 나중에, 종주국인 우리 배달국이 어떤 망신을 당할지도 모르는 일이야. 끝내 치우천왕께옵서나 우리는 저승에 가, 조상들 앞에 얼굴을 못 들 일들이 연이어 발생할 지도 모르는 일이지."
우가의 말이 전혀 틀린 것은 아니었다. 처음 환웅천왕이 개국을 했던 상황과는 판이하게 동북아의 정세가 전개되고 있었다. 이제 부족이 부족을 치거나 합류하여 더 큰 집단으로 커 갔다. 모두 저마다 명실상부한 국가로서의 기틀을 다져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 중의 가장 큰 세력은 역시 동이족에서 갈려 나간 이들이었다. 그들은 배달국의 높은 문화와 정신을 배워 간 사람들이었기에, 그를 바탕으로 쉽게 토착민의 지도자가 되어, 힘을 축적하여 갈 수가 있었던 거였다. 그들은 근본을 잊고 배달국을 호시탐탐 노렸다.
마가는 땅바닥에 가래침을 탁 뱉었다.
"감히 배달국과 땅의 경계를 논한 염제신농(炎帝神農)이나, 배달국의 침략을 꿈꾸는 후안무치의 유망(楡罔)을 말하는군."
"특히 유망이 문제야."
유망은 배달국의 변경을 수시로 침략했다. 한밝산(백두산) 근처에서 원래부터 터를 잡고 살았던 사람들이나, 배달국에서 갈리어 나간 무리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이질화되었다. 서로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고, 많은 이해관계가 얽힌 때문이었다. 그들은 독립을 선포하며 조공 받치기를 거부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실력을 과시하기 위해 주변 소국을 규합하여 종주국인 배달국에 압력을 가하기까지 하였다. 유망이 그 대표적인 사람이었다.
마가는 피식 웃었다.
"우가는 너무 소심한 게 탈이야. 전화위복이라는 말도 있잖아. 나는 오히려 이런 기회가 배달국의 명성을 되찾고, 더 강한 나라로 발돋움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보는데. 두고 보게. 난 치우천왕님을 믿네."
"그건 나도 그래. 다만, 앞의 일에 대비해야 됨을 말하는 것일 뿐일세."
마가와 우가가 어전에 드니, 문무백관이 모두 모여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국사를 주고받다 보니 늦은 거였다. 마가와 우가는 그들에게 허리를 굽혀 미안함을 표했다.
저가(猪加)가 치우천왕에게 회의 준비가 다 되었음을 고했다. 치우천왕이 나와 용상에 앉았다. 마치 거대한 산 같았다. 용모뿐만이 아니라, 기상도 그랬다. 앞에 있는 사람들은 눈을 내리깔며 허리를 굽혔다. 그들은 치우천왕의 입에서 처음으로 무슨 말이 처음 튀어나오나 가슴을 졸였다. 그것이 치우천왕의 재임 기간 중 역점을 두어 추진할 화두였고, 또 자신들은 그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할 일일 터인 때문이었다.
치우천왕의 굳게 다물었던 입이 열렸다.
"짐은 등극을 하기 전부터 배달국이 점점 해이해져 가는 것과, 그로 인해 무력해지는 사태를 막을 방도에 대해 부심해 왔어요. 짐은 무엇보다 먼저 신시의 전통을 더욱 굳건히 계승하여,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우리의 천국(天國)인, 이 배달국의 기강을 쇄신해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따라서 제천의식을 더욱 숭상하여야 합니다. 그를 바탕으로 환웅천왕님이 천명한 홍익인간의 이상을 구체적으로 실현하여야 해요. 이는 국민 각자, 자신이 소속된 공동체만을 위한 것이 아니에요. 궁극적으로는 범세계적, 범인류적인 소망이기도 합니다. 그 모든 것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국방력의 강화가 시급한 문제예요. 나라를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거지요."
사관(史官) 신지(神誌)는 치우천왕의 말을 녹서(鹿書)로 속기하고 있었다. 마가와 우가는 서로 시선을 마주치며 웃었다. 자신들의 예상이 적중한 거였다. 치우천왕의 말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 구체적인 대안들이 필요해요. 우선 병관 치우는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문제가 많은 호씨족을 따로 분리하여 하삭(河朔)에 살도록 조치해요."
호씨족은 물론 환웅천왕 시대에 '신계(神戒)의 백성이 되고자 했던' 호랑이를 섬기는 부족이다. 그들은 100일간의 시험에서 부족한 족장으로 하여, 실패의 쓴잔을 마셔야 했던 족속이다. 그들은 아직까지도 천성이 사납고 잔혹한데다가, 무엇보다 배달국에 불만이 많았다. 그래서 고래로부터 신시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가 많았다. 그들은 본시 말로써 들을 인종이 아니었다. 힘으로라도 밀어내야 했다. 이제부터 호씨족은 아예 인간 취급도 못 받게 되는 위치로 전락하여 가고 있는 중이었다.
병관 치우가 물었다.
"폐하, 하삭이라 함은 어디를 가르침이시온지요?"
"황하의 물줄기가 가장 큰 굽을 이루는 곳으로, 그곳은 기름진 평야 지대이기도 하지요. 알고 보면 호씨족도 우리와 더불어, 전 인류의 조상이신 나반(那般)님과 아만(阿曼)님에서 갈리어 나간, 같은 형제들입니다. 하면은, 그들에게도 최소한 먹고살게는 해줘야 되지 않겠소. 그게 진정한 홍익인간의 이념이 아니겠소."
"지당한 말씀이옵니다. 하오나 그마저 거부하고 경거망동한다면 어찌하옵니까. 유망은 벌써부터 배달국의 불만 세력이며 호전적인 호씨족과 결탁하여 우리 종주국을 침략할 기회만 노리고 있사옵니다."
"심증만 가지고 그들을 마구 살상할 수는 없는 일이오."
치우천왕은 잠시 말을 끊고 생각했다. 그는 사실 배달국의 강역에서 유망의 세력과 호씨족을 몰아낼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유망은 자청하여 묘혈을 파고 있는 중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치우천왕은 차제에 그들을 모두 평정하고 종주국으로서의 위엄과 권위를 세우고 싶었던 것이다. 다만 무슨 업보인지는 모르지만 그들의 백성이 된 사람들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더구나 유망의 백성은 동이족에서 갈리어 나간 이들이었다.
치우천왕의 얼굴에는 결연한 의지가 빛났다.
"짐은 군사력을 통한 실력행사도 불사할 셈이오. 짐은 여러 방면의 인재들을 발탁하여 주요 직책에 등용할 것이오. 특히 대대로 나라에 큰공을 세운 명문거족과 짐의 가족 중에서 무예에 출중한 자 여든 한 명을 선발하여, 곧 개편될 군대의 장수에 임명할 터이오. 병관 치우는 그 장수들에게 병사들을 훈련 감독하는 임무를 다하게 하고, 유사시에는 배달국을 위하여 임전무퇴하여 목숨 바쳐 헌신할 것을 가르치도록 하시오."
"신 치우, 신명을 다하여 폐하의 명에 따르겠사옵니다."
"다른 의견이 있는 사람은 말해 보시오."
중신들은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치우천왕이 말했다.
"그럼, 오늘 회의는, 이만 마치기로 하겠소."
치우천왕은 자리를 떴다. 모여 있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화색이 감돌았다. 그들은 뭔가 모를 흥분감으로 들떠 있었다. 귀가하는 그들의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가벼웠다. 마가와 우가, 그리고 치우가 더욱 그랬다.
치우천왕은 갈로산(葛盧山)에서 광석을 캐내어, 무기에 앞서, 농기구를 먼저 만들도록 했다. 국민들이 우선 잘 먹고 잘 살게 하는 것이 임금 된 자로서의 도리라 생각한 때문이었다. 그를 바탕으로 국방력의 강화도 가능한 거였다. 치우천왕은 농관(農官)인 우가를 시켜, 보다 편리한 농기구와 그를 통한 과학적 영농법을, 연구 보급토록 했다.
몇 해가 지나자, 배달국의 백성들은 생산성이 현저히 향상되어 갔다. 그들은 배불리 먹고도 남았다. 세금을 내고 남은 곡물은 저마다 곡간에 비축하여, 앞으로 닥칠지도 모르는, 가뭄이나 홍수 등에 대처케 했다.
마가를 통해서는 소도단(蘇塗壇)에서 장차 국가의 동량이 될 청소년들의 심신 수련에 열성토록 했다. 삼신(三神)을 위한 계불행사( 行事)에도 정성을 다하였다.
치우천왕은 민생의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자 국방력의 강화에 혼신의 힘을 쏟았다. 그는 병관 치우에게 군사 훈련에 병행하여 새로운 병기도 다양하게 제조토록 했다. 치우천왕은 대궁(大弓), 오구장(五丘杖), 돌을 날리는 기계, 활틀을 놓고 활을 쏘는 태노(太弩) 등을 만들었다. 구리로 된 투구와 철로 된 갑옷도 갖췄다. 이들 신무기로 전술 연마에 최선을 다하도록 했다.
내막을 모르는 다른 족속들은 치우천왕이 동두철액(銅頭鐵額), 즉 구리로 된 머리와 쇠로 된 몸통을 가진 괴물이라고 쑤군거렸다. 아무튼 이제 배달국의 병사들은 높은 정신력에 다양하고 우수한 무기를 소유한 막강한 군대가 되었다. 감히 대적할 그 어느 종족도 없었다.
유비무한이었다. 치우천왕은 병관 치우시절부터 자신이 계획했던 일들을 하나씩 성공리에 추진하여 가고 있었던 거였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임금 혼자서 하는 일이 아니었다. 배달국 사람들은 누구나 분주해졌다. 그들은 활어처럼 살아 퍼덕이는 듯했다. 처음 환웅천왕이 신시를 개척할 때와도 같았다. 그들은 새나라 건설에 총 매진했다. 그 어느 누구도 자신의 시간적 물질적 사소한 이해관계 때문에, 불평 불만을 터트리지 않았다. 그저 치우천왕만 믿고 따를 뿐이었다. 원래가 그런 민족이었다. 배달족은 올바른 지도자만 만나면 자신을 돌보지 않고 온몸을 내던져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었다. 바로 그랬다. 그들은 다름 아닌, 환웅천왕 한 사람만을 믿고, 여러 가지 악조건과 힘겹게 싸우며, 이 한밝산까지 따라 온 사람들의 자손이었다.
치우천왕은 나름대로 모든 준비가 갖추어졌다고 생각했다. 치우천왕은 병관 치우를 불렀다. 치우는 치우천왕을 알현했다.
치우천왕이 말했다.
"지금 서토(西土)는 어떻소?"
"유망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사옵니다. 유망은 수도를 공상(空桑;진류)으로 옮기고 뭔가를 획책하는 듯하옵니다."
"내 이미 예상했던 일이오. 경은 오늘 즉시 군사를 이끌고 난하와 요수를 건너요. 그래서 유망의 본거지인 공상의 근처, 탁록(하북성 탁록현)에 진출하여, 잠시 머무르며 그들의 동태를 살피도록 하오."
치우천왕이 직접 선두에 나서, 공상을 향해 총공격 명령을 내려, 단번에 유망의 무리를 싹 쓸어 없애 버릴 수도 있었다. 배달국의 막강한 군사력은 그러고도 남았다. 그 어느 군대도 상대가 될 턱이 없었다. 그러나 치우천왕은 역시, 아무 죄도 없는 유망의 백성들이 마음에 걸렸을 터였다. 제후국의 하나인 그들도 본래 9환(九桓·九夷) 동이족(東夷族)의 하나였다. 치우천왕은 유망에게 일단 경고부터 하고 싶었던 거였다.
병관 치우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폐하, 무슨 말씀이시온지 잘 알겠사옵니다."
"신농씨(神農氏)의 나라를 이어받은 유망은, 종주국인 우리 배달국의 명령을 고의적으로 무시하며,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오만 방자하게 굴었지요. 게다가 자신의 백성들에 대한 독재와 횡포가 극에 달하고 있어요."
"과중한 세금과 부역으로 백성들은 허리가 휘어 가고 있사옵니다. 유망이 다스리는 나라에서는 도저히 살아갈 방도가 없사옵니다."
"그들도 우리의 형제요. 그런데 전혀 앞이 내다보이지 않아요."
"유망의 백성들은 후생 복지 제도가 제대로 갖춰져 있는 우리 배달국을 가슴에 그리고 있사옵니다. 유망은 그런 불만 세력은 서슴없이 제거시켜 버리게 하옵니다. 자신의 측근에 있는 신하들에도 그러하옵지요."
"무능한 폭군의 전형적인 한 양태지."
"신하들도 민초들을 그렇게 다룹니다. 국론은 분열되고, 급기야 백성들은 짐을 싸 배달국으로 야반도주해 오기가 일쑤였사옵니다."
"가시오. 가서 타일러요."
치우천왕은 목소리를 높였다.
"유망은 들으라! 그대의 나라는 복희씨, 신농씨로부터 대대로 배달국의 제후국이 아닌가! 그대는 이제부터라도 자신의 선왕들처럼 제후국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고, 삼신님을 올바로 섬겨라! 하여, 주변국과 그대의 백성들에게 홍익인간의 선정을 베풀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 치우천왕님의 뜻이다!"
치우천왕은 평상의 음성으로 돌아왔다.
"이렇게 말이오."
병관 치우는 허리를 굽혔다.
"천왕폐하, 알겠사옵니다."
병관 치우는 치우천왕의 명령을 받들어 실행에 옮겼다. 치우는 난하와 요수를 건너 탁록에 임시로 거처했다. 치우는 수하 몇을 대동하고 유망을 찾아갔다. 유망의 충혈 된 눈은 광기로 번들거렸다. 그는 전체적으로 지방 주머니 같았다. 작달막한 키에 살이 디룩디룩 올라 있었다. 치우는 저것이 백성들의 고혈이라고 생각되자 울컥 구토증이 솟았다. 치우는 애써 메스꺼움을 참으며 치우천왕의 말을 그대로 전했다. 유망은 치우를 처음 보고 깜짝 놀랐다. 말로만 듣던 치우천왕이 직접 찾아 온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와 너무도 닮아 있었다. 치우는 대장부다운 풍채에 근엄하고 완강했다.
유망은 기부터 죽었다.
"알았소. 내, 그리, 하리다."
유망은 일단 그렇게 대답을 했다. 한동안 치우천왕이 전한 말들을 이행하는 척도 했다. 그러나 병관 치우가 군사를 이끌고 탁록에서 배달국으로 철수하자 상황은 돌변했다. 유망은 결국 하나도 변한 것이 없었던 거였다. 오히려 유망은 전쟁 준비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그는 첩자를 배달국에 보내 전술과 무기 제조법 등을 알아 오도록 했다. 유망은 군사들을 강훈련 시켰으며 신무기도 만들게 하였다. 더구나 그는 병관 치우가 주둔했던 탁록으로 진출하여 성까지 쌓았다. 치우천왕은 이런 모든 정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치우천왕은 사신을 탁록성에 보내어 유망을 회유해 보려고 애썼다. 그런 노력은 네 번이나 모두 무위로 끝났다. 치우천왕은 마음을 달래어 꾹꾹 눌러 참았다. 치우천왕은 끝으로 다섯 번째의 사신들을 보냈다.
사신을 대하는 유망의 얼굴은 몹시 구겨졌다.
"이 건방진 치우놈의 졸개들아, 내 이미 알았다고 하지 않았냐."
유망은 전신을 부들부들 떨며 소리쳤다.
"누굴 뭐로 보는 거야. 내 장차 이 중원을 평정하여 호령할 대황제님이시다. 배달국도 예외가 아니다. 아니, 그 첫 번째 대상이 될 것이다."
유망은 칼을 빼어 들고 턱짓으로 밖을 가리켰다.
"저 드넓은 중원 땅을 차지하려면 우선 건방진 치우놈의 배달국부터 쳐야 된다. 그래, 나도 이제 참을 만큼은 참았다. 네놈들은 얼마 후에, 저승에서 다시 치우놈을 만나게 될 것이다."
유망은 조금치도 망설임 없이 배달국 사신들의 목을 베어 버렸다. 무모한 도발이었다. 유망은 화를 자초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명을 재촉한 거였다. 바야흐로 망국을 향한 힘찬 발걸음을 내딛은 것이기도 하였다. 유망은 신장 치우천왕에게 자신의 나라를 칠 확실한 명분을 준 것인 때문이었다.
치우천왕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확실한 도전이었다. 그대로 있으면 안 될 일이었다. 무엇보다 백성들에 체면이 서질 않았다. 치우천왕은 가급적이면 동족에게만은 피를 보이고 싶지 않았다. 모두 천국의 백성이 되어 홍익인간하며 살고 싶었다. 하지만 유망은 말로 해서 될 사람이 아니었다. 참는 데에도 한도가 있는 법이었다. 때론 단죄의 칼도 필요할 터였다.
치우천왕은 선두에 서 출전했다. 기마병과 보병이 긴 행렬을 이뤘다. 그들은 산을 넘고 물을 건넜다. 광활한 평야도 거쳤다. '蚩(치)' 자를 쓴 깃발들이 용처럼 긴 행렬을 이뤘다. 장엄한 광경이었다. 연변에 늘어선 인근 제후국의 동이족 사람들은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유망의 잦은 침략으로 생사의 사이를 오가던 그들이었다. 그들은 이제 폭군 유망은 제거되고 말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치우천왕은 유망의 성 근처에 당도했다.
치우천왕은 총공격 명령을 내렸다.
"군사들이여. 본시부터 삼신님과 환웅천왕님의 은혜를 입은 이곳을, 더럽히고, 스스로 명을 재촉하며, 인민을 괴롭히는 유망을, 삼신님과 환웅천왕, 그리고 이 치우의 이름으로 처단하라!"
치우천왕은 말을 타고 대검을 휘두르며 앞으로 내달렸다. 그 뒤를 엄선된 81명의 병법에 능한 정예의 장수들이, 칼과 굽은 창을 손에 쥐고 따랐다. 그들은 투구와 갑옷도 입었다. 모두 구리나 쇠로 만든 병기였다.
흙먼지가 하늘을 덮었다. 유망의 군사들은 처음에 치우천왕과 그의 병사들이 무슨 괴물들이 아닌 가도 싶었다. 혼비백산, 바로 그것이었다. 조잡하게 제작된 무기로 간신히 대항하던 그들은, 이미 치우천왕의 군대와 적수가 못됨을 파악했다. 탁록성 앞에서 대열을 지어 포진하고 있던 유망의 군사들은, 제대로 한 번 겨뤄 보지도 못하고 자신의 성으로 도망쳤다.
성의 누각에서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던 유망은,
"저런 병신 같은 자식들. 앞으로 나가 싸워라. 적의 앞에서 물러서는 자, 내 칼이 용서치 않으리라."
라고 외치며, 우선 자신의 군사들에 분통부터 터트렸다. 유망은 그것을 확인시키기라도 하려는지, 자신의 뒤에 숨는 장수 하나의 목을 칼로 쳤다. 장수의 잘린 목에서는 피가 분수처럼 솟았다. 유망은 자신의 칼에 묻은 선혈을 옷에 쓱 문질러 닦았다. 그는 잔혹하게 웃었다. 그 모습은 가히 상해(傷害)를 당한 짐승의 그것이었다. 유망의 병사들은 얼결에 싸우는 척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척'이었다. 하면 결과가 빤한 일이었다.
치우천왕의 궁사들은 대궁과 태노로 활을 쏘아 댔다. 포병은 기계로 돌을 날렸다. 성문을 격파하거나 성벽에 오르는 군사들을 위한 엄호사격이었다. 강하고 날카로운 화살과 커다란 돌이 성을 향해 날아갔다. 엄청난 양이었다. 화살이나 돌에 맞은 유망의 군사들은 썩은 고목처럼 성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끝을 뾰족하게 다듬은 거대한 나무가 성문을 뚫었다.
치우천왕의 쩌렁한 목소리가 울렸다.
"유망을 생포하여, 내 앞에 대령하라."
치우천왕의 군사들이 노도처럼 성안으로 몰려들었다. 성벽을 타넘기도 하였다. 피와 불꽃이 튀는 아수라장의 난투극이 얼마간 계속되었다. 결국 탁록성은 배달국에 함락되었다. 유망군은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탁록을 다시 내어 주었던 것이다. 구리나 철로 된 신무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치우천왕의 군대는, 감히 맞설 수조차 없음을 확실히 깨닫는 순간이었다.
치우천왕의 군사들은 유망을 찾았다. 그는 어디에도 없었다. 유망은 성의 후문을 통해 심복들만 데리고 탈출한 거였다. 상황을 알아차린 유망의 군사들은 싸움을 포기하고, 항복하여 목숨을 구걸하거나, 아예 도주해 버렸다. 유망은 비겁한 사람이었다. 그는 군왕은커녕 필부 이하의 인물이었으며, 죽어 그 피로써 죄를 씻게 해야 마땅할 존재였다. 치우천왕은 유망의 무리가 도망간 곳을 얼마간 뒤쫓다 말머리를 돌렸다.
치우천왕은 군사들을 향해 말했다.
"저들 중에는 같은 피를 나눈 사람도 얼마간은 섞여 있을 터이다. 시대를 잘못 타고 나 유망 같은 인간을 군주로 떠받들게 된 것이 문제가 되었을 뿐이다. 짐은 궁지에 몰려 도망치는 동족을 더 이상 살상하고 싶지가 않다."
치우천왕은 자신의 군사들을 뚫고 배달국을 향해 말을 몰았다. 군사들은 치우천왕에게 길을 터 주었다. 그리고 묵묵히 치우천왕의 뒤를 따랐다. 치우천왕은 신시를 향해 가며 다시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유망의 해 온 짓으로 봐서 여기서 그냥 말 인간이 절대로 아니었다. 게다가 유망은 지금 왕권마저 부지하지 못하는 절대 절명의 순간이었다. 이제 복희씨·신농씨가 세운 나라는 유망이라는 한 무능한 인간으로 하여 종치는 거였다. 아무리 인간 망종의 유망이라지만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 그는 곧 군사를 정비하여 다시 도전해 올 터였다. 치우천왕은 그 때를 기다리기로 했다.
유망은 다시 공상으로 후퇴해 있었다. 그는 성을 크게 중건했다. 그리고 배달국에서 빼낸 군사기밀과 병기 제조술을 더욱 발전시켜 갔다. 유망은 그를 바탕으로 군 조직을 개편하고 전술을 새로 익혔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구리나 철의 주요 생산지는 갈로산이었다. 그 산은 치우천왕의 영토 안에 있었다. 유망은 아쉬운 대로 인근 대산(태산)에서 철광석을 캐냈다. 그는 이제부터 조잡하지만 철제 병기도 대량으로 제조할 수 있었다.
유망의 도발은 예상외로 빨랐다. 유망이 탁록에서 패한 지, 2년도 안되어, 치우천왕에게 사신을 통해 도전장을 보냈다. 공상에서 자신과 한 판 겨뤄 보자는 거였다. 유망은 한때 도읍했던 탁록의 지형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지만, 이제 배달국의 변방으로 편입된 그곳에 가 겨루는 것보다, 자신의 성에서 적군을 맞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한 때문이었다. 이는 또 유인책의 하나이기도 했다. 유망은 호씨족에 더하여, 종주국인 배달국에 불만을 품은 제후국들을 규합하여, 동맹을 맺었다. 유망은 과중한 세금을 거둬, 동맹국에서 원군이나 용병을 끌어들여, 배달군이 진입할 길목의 여기저기에 심어 두었다. 유망은 계산하고 있었다. 치우천왕이 자신의 성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기진맥진한 상태일 게 틀림없을 터였다. 어쩌면 공상성에 오기 전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그러면 천하는 자신의 것이었다.
치우천왕은 병관 치우를 불러 이 문제에 대해 숙의하고 있었다. 유망을 탁록에서 몰아 낸 여세를 몰아, 차제에 대륙을 완전 평정해야 된다는 점에서는,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었다. 그러나 치우천왕은 전쟁을 계속 치르다 보면 다수의 죄 없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잃게 된다는 게 마음에 걸려 출병을 망설이고 있었다. 전쟁 중의 사상자는 군인보다 민간인이 더 많은 법이었다. 일반 백성들은 목숨만 빼앗기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에 속한 모든 것이 송두리째 뿌리 뽑히는 거였다. 치우천왕은 이를 염려하는 것이었다.
치우천왕의 얼굴은 침통하게 일그러졌다.
"싸우지 않고…… 몰아내지 않고…… 저들을 우리편으로 끌어들일 수는 없는가…… 그래, 그렇다면, 전쟁이란 필요악이란 말인가…… 아니, 알고 보면, 내 부덕의 소치인지도 모르지……."
병관 치우는 간곡히 고했다.
"세상은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험악하게 돌아가고 있사옵니다. 유망처럼 별별 이상야릇한 인간들이 다, 저마다 할거하여 천하를 꿈꾸고 있사옵지요. 그와 같은 작자들을 그대로 방치했다가는, 세상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아비규환을 면치 못할 터이옵니다."
치우천왕은 고개를 숙였다.
"환웅천왕님 당시에도 잘못된 인간들은 그 죄를 물어 아주 멀리 섬도로 축출하곤 했지요. 인간의 상식에서 용서받지 못할 중죄를 범한 사람은 태워 그 죄의 흔적마저 남기지 않도록 하셨고…… 그러나 아무 죄도 없는……."
"이는 환웅천왕님의 뜻을 따르는 일이기도 하옵니다. 다시 말씀드려, 유망과 같은 인종들에 본을 보이는 일이옵지요. 그래야 저 한밝산 삼신님의 비호 아래, 배달국 이념인 홍익인간의 이상향이 건설될 터이옵니다."
병관 치우는 목청을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유망의 아류들은 하루빨리 제거하는 게 배달국의 앞날을 위해 좋사옵니다. 그것은 또한 인류를 위하는 일이기도 하옵니다. 그런 세력들이 여기저기서 날뛴다면 세계의 평화는 보장할 수가 없는 일이옵지요."
치우천왕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러면 계불수행( 修行)이고 수증복본(修證復本)이고 하는…… 황궁씨(黃穹氏)부터 누대로 소망해 온 우리의 궁극적인 삶의 목표는…… 아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 되어 버리고 말겠지……."
병관 치우는 간절한 표정이 되었다.
"이번 기회에 그들을 아주 싹 쓸어버리고, 우리 조상들이 일찍이 터잡아 살던 실지(失地)들을 되찾아야 하옵니다. 이는 전 대륙을 총 지휘 할 교두보를 확보하는 일이기도 하옵지요. 갈석산, 난하, 요수, 탁록은 이미 우리의 수중에 들었사옵니다. 이제부터 공상, 기산, 화산 등지로 점차 세력을 확장해야 하옵니다. 천왕폐하, 제가 올리는 말씀을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치우천왕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병관은 출병을 서두르도록 하시오."
병관 치우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예, 천왕폐하!"
병관 치우는 전군에 총공격 명령을 내렸다. 배달군은 공상성을 향해 진격을 계속했다. 치우천왕이 선봉에 섰다. 그 뒤를 치우가 따랐다.
치우천왕은 자신의 대에서 꼭 이루어 내고 싶은 일이 있었다. 선대로 동북아 모든 제후국의 종주국인 배달국의 체면을 되찾고, 그들이 감히 모반을 할 염두조차 못 내게 할, 확실한 선을 그어 두고 싶었던 것이다.
치우천왕의 소망이 하나 둘 성취되어 가고 있었다. 치우천왕은 유망과 결탁하여 배달국에 반기를 든 호씨족과 제후국들을 차례로 물리치며 양수를 건너 진격을 계속했다. 연전연승하는 배달군의 위세는 질풍노도와도 같았다. 필사적으로 저항하던 반군들은 끝내는 겁에 질려 스스로 굴복하였다. 그들은 이제 치우천왕 소리만 들어도 지레 오줌부터 지렸다. 치우천왕은 한 해 동안에 무려 아홉 개의 제후 땅을 평정했다. 그 끝에 유망이 남았다. 하지만 치우천왕은 전혀 지친 기색이 아니었다.
치우천왕은 공상성을 포위하여 들어갔다. 치우천왕은 탁록을 지나고, 색도성(索度城)을 거쳐, 회대(淮垈)의 사이에 웅거하였다. 회대는 회수(淮水)와 대산(垈山)을 말함이었다. 그곳은 중원 대륙에서도 가장 기름진 평야 지대였으며, 황궁씨·유인씨(有因氏) 시대에 떨어져 나가 살던 토착민, 환인(桓因) 때 갈리어 나간 동이족, 환웅 배달국의 배달족 등이 이민을 가 살던 곳이었다. 특히 회수는 나라의 운명과 관련이 깊다고 여겨 동이족들이 해마다 모여 제사를 지내는 강이기도 하였다. 강의 근원은 동백산(하남성 남쪽)이었다. 이 강은 동쪽으로 안휘성 북쪽을 지나, 강소성으로 나가, 대운하에 합류되었다. 대산은 오악(五岳) 가운데 하나로 동악(東岳)인 태산을 가리켰다.
늙은 돼지와도 같은 유망은 오늘 밤 젊은 육체에 푹 빠져 있었다. 그는 두 해 전 호씨족장의 딸을 후궁으로 맞아들였다. 두 세력의 결속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서였다. 말하자면 정략결혼이었다. 유망은 후궁과 한바탕 격정적인 몸풀이를 끝내고, 그녀의 유두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후궁은 갑자기 몸을 움츠렸다.
"폐하, 두렵사옵니다."
유두와 젖꽃판 사이를 소요하던 유망의 손이 잠시 멎었다.
"뭐가?"
"치우가 바로 코앞에 와 있잖사옵니까."
"내 진작부터 그가 여기까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네. 아무리 배달군이라지만 한 해 동안에 자네의 호씨족을 거쳐 무려 아홉 개의 제후국을 정복해 왔어. 치우의 군사들은 지금쯤 지쳐 향수병에 걸려 있을 테지. 그들은 자신을 전쟁에 끌어들인 치우를 몹시도 원망하고 있을 거야. 다시 말해, 배달군의 사기는 말이 아니란 거지."
유망의 손은 후궁의 배 아래를 향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틀림없이 치우를 꺾을 수 있을 거야."
"꼭 그렇게 하여야 합니다. 족장인 제 어머니도 치우놈의 칼에……."
"걱정하지 말라. 내 이번 전쟁에서 꼭 치우놈의 목을 떨구겠어. 하면 천하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나의 것이지. 짐의 백성들로부터 신망을 다시 획득함은 부언할 필요조차 없어. 아니 그런 것쯤은 못 얻어도 좋아. 천제 앞에서 감히 어느 누가 제 명을 재촉하며 미쳐 날뛰겠는가. 내 왕비를 내쫓을 셈이네. 앞으로 자네는 천하를 호령하는 황제의 황후가 되는 것이지."
유망은 스스로에 도취되어 꽤 오랫동안 으흐흐, 웃었다. 도박이란 그런 거였다. 망상에 홀려 들어 판단력이 흐려지고, 결국은 돌이킬 수 없는 구렁텅이로 낙하하고 마는 것이었다. 그래, 유망은 분명 도박을 하고 있었다.
"신첩은 폐하만 믿겠사옵니다."
"암, 그래야지."
유망의 손은 다시 행동을 개시했다. 그것은 무성한 숲을 지나 질척한 곳으로 빨려 들고 있었다. 후궁은 거센 비음을 내며 유망의 품에 안겨 들었다. 유망은 후궁의 몸에 올라 타 2층을 지으며 신음했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는 한 쌍의 수퇘지와 암호랑이는 바야흐로 그들만의 두 번째 거사를 치르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닭의 울음이 들려 오고 있었다.
치우천왕은 편법을 쓰지 않았다. 아니, 그럴 필요가 없었다. 유망은 적수가 못되었다. 치우천왕은 유망에게 금일 진시에 공상성을 공격하겠다고 통보했다.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배달군을 맞으라는 뜻에서였다.
유망은 소호를 배달군의 토벌대장으로 임명했다. 유망은 소호가 배달군이 공상성에 도착하기 전에 격파해 주기를 기대했다. 아니면 배달군이 공상성에 다다르면 지쳐 전의라도 상실하게 만들어 줬으면 하고 바랬다.
유망은 소호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소호는 충분히 그럴 만한 기량을 가진 장수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소호는 본래 부모가 누구인지도 잘 몰랐다. 다만 그가 어렸을 때 '너는 복희씨의 여와계 자손이다'라는 소리를 주위 사람한테 들은 적이 있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소호는 복희씨, 소전 막배, 신농씨와도 핏줄이 이어지는 사람이었다. 뒤에 치우천왕과 한 판 격렬한 전쟁을 치르게 되는 황제헌원(黃帝軒轅)과도 혈맥이 닿는 사람이었다.
소호의 본명은 질(質)이었다. 질은 스스로 태호 복희씨의 자손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자랐다. 질은 나중에 자신의 이름을 태호(太昊·太 )의 다음 가는 사람이라는 뜻에서, 소호(少昊·少 )라 바꿨다.
소호는 복희씨의 도법을 자수(自修)했다. 배달국의 무예도 혼자 익혔다. 본시 총명한 그는 문무 모두가 일정한 수준에 다다라 있었다. 소호는 진작부터 유망의 눈에 들어 고급 장교로 임명되었다가, 급기야 이번 전투에, 총사령관으로 발탁된 거였다. 말하자면 그는 고아로 자수성가한 사람이었다.
소호는 대군을 이끌고 공상성을 나가 진을 치고 치우천왕의 군대를 기다렸다. 소호와 그를 따르는 장수들은 제법 구리와 철로 된 병기도 갖췄다. 원군과 용병으로 군대도 꽤 보강시켰다. 소호의 군사들은 승전 후에 자신들에 돌아올 몫을 가늠하며 사기도 제법 양양해 있었다.
소호는 눈을 크게 뜨고 시선을 태산 한 자락에 던졌다. 거기에 뽀얀 먼지를 안개처럼 일으키며 배달군이 진격해 오고 있었다. 소호는 우선 치우천왕부터 찾았다. 그를 목표물로 정해 말을 내달릴 셈이었다. 소호는 무엇보다 치우천왕의 목을 쳐 이번 싸움에 큰공을 세우고 싶었던 것이다. 예상한 대로 치우천왕이 선두에 있었다. 그를 따르는 군사들은 얼마 되지도 않았다.
소호는 코웃음을 치며 중얼거렸다.
"치우천왕이 우리를 너무 얕잡아 보고 있군."
소호는 목소리를 높였다.
"자, 돌격하라!"
소호는 앞장을 서며 말의 고삐를 힘차게 당겼다. 그의 병마는 적진을 향해 질풍처럼 내달렸다. 소호의 군사들은 사기가 충천하여 함성을 내지르며 대장의 뒤를 따랐다. 그런데 괴이한 일이었다. 치우천왕의 군대는 제대로 대적해 보지도 못하고 후퇴를 거듭하는 거였다.
소호는 외쳤다.
"이때다. 배달군은 여러 나라를 정복하고 먼길을 내달려 왔다. 그들은 지금 배고프고 지쳤으며, 고향을 그리는 중병에 걸려 있을 거다.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배달군을 하나도 남김없이 처치하라."
소호군의 추격은 가속이 붙었다. 그들은 태산 기슭으로 배달군을 몰아가고 있었다. 얼마 후면 태산이 배달군을 막아 줄 터였다. 소호군의 함성은 더욱 높아만 갔다. 헌데 소호는 한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자신과 일전까지 벌였던 치우천왕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아닌 것 같았다. 용모는 치우천왕과 비슷했지만 전술이 어딘지 서툴렀다. 그렇다면 치우천왕의 평가는 여러 면에서 과장되어 있었다는 말인가. 소호는 잠시 혼란스러웠다.
소호는 주위의 장수들에게 물었다.
"배달군을 이끌고 있는 저 자가 치우천왕이 맞는가?"
소호의 옆에 있던 한 장수가 답했다.
"아니옵니다. 그는 치우비(蚩尤飛)이옵니다. 치우천왕의 여든 한 명 장수 중 하나이옵지요. 치우비는 치우천왕의 조카이기도 하옵니다. 그러다 보니, 모양새가 비슷한 것이옵지요."
소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의 군사들은 이미 태산의 계곡 깊숙이 들어서 있었다. 소호는 말머리를 틀며 소리쳤다.
"아뿔싸, 우린 속았다. 군사를 돌려라."
소호는 이미 늦은 거였다. 양쪽 산에 매복해 있던 치우천왕의 군사들이, 돌을 굴리고 활을 쏘아 대며, 계곡으로 몰려들었다. 때맞춰 돌풍이 일고 안개마저 자욱했다. 마치 치우천왕이 신통술이라도 부리는 것 같았다.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면, 치우천왕이 천기를 미리 알아, 그 시간에 맞춰 소호군을 이곳으로 유인을 한 것인지도 몰랐다.
소호군은 방향 감각이 흐려져, 저희들끼리 살육을 일삼았다. 치우천왕이 직접 소호군 앞에 나타났다. 치우천왕의 대검은 허공에서 종횡무진 난무했다. 그의 칼은 마치 신이라도 들린 듯했다. 치우천왕 휘하 81명 장수들의 칼과 창도 그랬다. 소호의 군사들은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땅바닥에 몸을 눕혔다. 그 여세를 몰아 배달군이 물밀 듯 몰려들었다.
소호는 말고삐를 바짝 당겼다.
"공상성으로 빨리 후퇴하라."
소호는 겨우 살아 남은 얼마 안되는 장수와 병졸들을 이끌고 공상성으로 도망쳤다. 그 뒤를 바짝 치우천왕이 선두에 서 추격했다. 소호는 두려움에 떨고만 있는 유망에게 허겁지겁 전황을 보고했다. 벌써 성밖에는 배달군의 함성이 드높았다. 유망은 소호에게 벌을 줄 기회도 없었다. 그는 한시 바삐 공상성을 뜨는 것만이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는 데 상책이라고 생각했다. 유망은 서둘러 말에 올랐다. 그는 성의 후문을 통과해 말에 채찍을 가했다.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잠시 망설이던 소호도 유망의 뒤를 따랐다. 공상성에 곧 백기가 나부꼈다. 남아 있던 군사들과 백성들이 자진하여 꽂은 거였다.
치우천왕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흘렀다.
"모두 입성하여 공상성을 접수하라."
치우천왕의 뒤에 있던 치우비가 말했다.
"천왕폐하, 유망은 간교한 자이옵니다. 혹여 무슨 흉계라도……."
"이 상황에서 그가 무슨 잔꾀를……."
치우천왕은 가슴을 활짝 펴고 유유히 성안으로 들어갔다. 배달국 군사들이 보무도 당당하게 그의 뒤를 따랐다. 성에 남아 있던 자들 중, 대표로 보이는 한 장수가, 치우천왕의 앞에 와 무릎을 꿇었다.
"천왕폐하, 이 성과 저희들은 본시부터 배달국의 것이었사옵니다. 저희들은 공상성를 폐하께 돌려 드리고, 다시 신시의 백성이 될 것을 맹세하옵니다. 미욱한 인간들이라 물리치지 마시고 부디 저희를 거두어 주시옵소서."
"짐이 그래서, 손수 여기까지 온 것이오. 그간 폭군 유망의 치하에서 모두 고생이 많았소. 이제 걱정을 마시오. 짐은 앞으로 신계의 백성인 그대들의 안전한 생활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소."
공상성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무릎을 끓었다.
"치우천왕 폐하……."
"이제부터 각자의 생업에 최선을 다하도록 하오."
치우천왕의 앞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각기 제 갈 길로 흩어져 갔다. 치우천왕의 군대는 곧 공상성에서 철수했다. 아직 토벌할 곳이 더 남아 있었던 때문이다. 치우천왕의 군대는 이르는 곳마다 연승을 하여, 3개의 성을 더 접수했다. 쓰러진 반란군의 시체가 들판을 가득 메우고, 그 피가 강물이 되어 대지를 적셨다. 배달국의 서토, 중화 땅에 살던 모반군들은, 치우천왕의 기만 보아도 간담이 서늘해져 도망쳐 숨지 않는 자가 없을 정도였다. 잠시 어리석어 종주국인 배달국을 배반했지만, 애당초 그들도 같은 종족이었다.
치우천왕은 전투에서 숨진 모반군들을 위해 삼신에 제사지내며 그들의 명복을 빌었다. 치우천왕은 재 접수한 제후국을 자치에 맡겼다. 배달국처럼 대표를 선출하여 화백(和白)하도록 했다. 제후국으로서의 의무도 다하도록 일렀다. 그들은 치우천왕의 엄명에 따라 배달국의 제후 국민으로서 충성을 다하기로 맹세했다. 그러나 아무래도 탁록은 문제가 많은 곳이었다. 기왕에 살던 동이족에 호씨족이 뒤섞이면서부터 계속 된 거였다. 유망에 이어 또 다른 말썽꾼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황제헌원이었다.
탁록은 아무래도 배반의 땅인 모양이었다. 유망은 탁록의 유옹(有雄)에 숨어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병사의 훈련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유망은 다시 한 번 치우천왕에 싸움을 걸어 볼 심산이었다. 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추락한 명예와 선조인 복희씨·신농씨 등이 일으킨 나라를 되찾을 수 없을 터였다. 그런데 유망에게는 문제가 연달아 발생했다.
소호와 헌원은 모두 유망의 수하들이었다. 소호와 헌원은 피차간에 유망의 뒤를 이을 경쟁 상대이기도 하였다. 유망은 무능하면서도 고집스러웠다. 게다가 잔혹하고 폭력적이었다. 그에게 소속된 신하나 백성들 어느 누구도, 그를 신망하여 따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앞을 조금이라도 예견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유망은 곧 망하고 말 작자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을 터였다.
헌원은 자신의 충복들을 이끌고 선수를 치기로 했다. 유웅은 자신의 부친 계곤(啓昆)이 터를 닦은 곳이었다. 유웅에는 아직도 자신을 따르는 무리가 많았다. 헌원은 오래 전부터 세워 왔던 계획을 실천에 옮겼다. 그는 유망이 술에 취해 후궁을 끼고 잠든 사이에 시살 했다.
헌원은 유망에 이어 왕위에 오르며, 국호를 유옹국(有雄國)이라 하였다. 헌원은 아직 백성들로부터 신망을 얻고 있는 소호를 견제했다. 헌원의 올가미는 점점 소호의 목을 옥죄어 왔다. 소호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생명의 위험을 느낀 그는, 배달국으로 말을 몰아 야반도주했다.
소호는 치우천왕의 앞에 가 무릎을 꿇었다.
"신, 소호이옵니다. 신은 잠시 유망의 얕은 꾐에 빠져 감히 천왕폐하의 앞에 칼을 겨누었던 자이옵니다. 신은 죽어 마땅한 자이오나, 목숨만 살려 주시면, 폐하를 위하여 신명을 다 받쳐 충성할 것을 맹세하옵니다."
"짐은 아무리 적이었더라도, 자청하여 천부(天符)의 땅에 찾아 든 사람들을, 함부로 내치지 않는 사람이오. 그대도 기왕에 들어 알고 있겠지만, 또 그래서 당연히 짐을 찾아 왔겠지만, 짐은 투항을 하거나 이민을 온 사람들 저마다의 능력에 맞춰, 이 땅에서 올바로 살아갈 수 있도록 뒤를 힘껏 봐주고 있소. 소호, 그게 명실상부한 홍익인간이 아니겠소. 헌데 유망의 총사령관이었던 그대는, 왜 여기까지 오게 되었소?"
소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손바닥은 무심결에 목덜미로 가고 있었다. 거기에는 많은 양의 땀이 진득하게 고여 있었다. 소호는 다시 한 번 심호흡을 했다. 그는 지금까지의 자초지종을 치우천왕에게 고했다.
치우천왕은 사관 신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헌원은 대체 어떤 인물이오?"
"헌원은 배달국의 제후국인 소전국 공손(公孫)의 후손입니다. 공손은 소전의 한 지파(支派)였으며, 어려서부터 고아로 성장했습지요. 공손은 축산을 담당한 관리였는데, 어리석고 게을러, 가축을 잘 돌보지 못했습니다. 복희씨가 세운 우리 제후국인 진나라의 왕은, 그 죄를 물어 공손을 헌구(軒丘)로 유배시켰던 것이옵니다."
"헌원의 부친은?"
"계곤이옵니다."
"계곤?"
"소전의 장남 석년인 신농씨가 진나라를 이어받았으니, 소전국은 당연히 차남 욱의 자손으로 세습될 수밖에 없었지요."
"알고 있소."
"계곤은 바로 이 소전의 둘째 아들 욱(勖)의 아홉 대손 이지요. 계곤은 장성하자 북녘 유웅으로 옮겨가서 살았습니다. 거기서 규모가 작은 토착 세력의 왕 노릇을 하였사옵지요. 계곤은 해마다 형산에 가서 염제신농의 묘에, 그리고 번총에 있는 태호복희의 묘에도 참배했습지요. 계곤은 항상 부인 부보(附寶)를 대동하고 다녔사옵니다. 부보는 염제신농과 태호복희의 묘에 참배하러 갔다가, 북두칠성을 에워싼 검붉은 광채를 보고, 헌원의 언덕에서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래서 아들의 이름을 헌원이라 지었던 것이옵니다."
"검붉은 광채라…… 뭔가 피 냄새가 나는 듯도 하군……."
"계곤과 그의 부인은 헌원이 열두 살 때 유망과의 전투에서 죽었사옵니다. 고아가 된 헌원은 고단한 삶이 시작되었지만, 그래도 그는 복희씨와 신농씨의 후손이라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며 자랐지요."
"당연히 원한과 야망을 동시에 품고 성장했겠군."
"헌원은 자신을 숨기고 탁록에 있는 유망의 휘하에 들었사옵니다. 자신을 추종하는 무리들을 이끌고 말씀이옵니다. 권모술수에 능한 그는 승진을 계속하였습죠. 그러다 헌원은 얼마 전 유망을 없애고 임금의 자리를 약탈했사옵니다. 하오면 헌원은 소전국의 욱으로부터 열 대요, 처음 소전국을 봉토로 받은 막배로부터는 열 한 세손이 되는 자이옵니다."
"그렇다면 염제신농이나 황제헌원은 모두 부계가 소전이었고, 모계가 다 복희씨의 여동생 유와씨가 되는군요."
"예, 그러하옵니다. 염제신농의 강씨와 황제헌원의 희씨 성이 다같이 소전 막배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헌원은 한때 희수(姬水)의 물가에서 살았으므로, 성을 희(姬)로 하였던 것이옵니다. 헌원의 이름은, 또 공손(公孫)이라고도 불렸습니다. 아무튼 이런저런 사정으로 미루어 헌원도 갈 데 없는 우리 동이족이옵니다."
"헌원은 황제(黃帝)라 자칭하고 있다며."
"그러하옵니다. 헌원 자신이 토덕(土德)으로 임금이 되었고, 흙빛이 누런 까닭이라 하옵니다. 한 마디로 말씀드려 희대의 문제아 헌원은, 유웅국을 세우고, 자신을 복희씨, 신농씨와 함께 중화 삼황(三皇)의 하나라 자칭하며, 천하를 꿈꾸고 있는 자이기도 하옵니다."
"탁록에서도 변방, 그 유웅의 시골뜨기가?"
"꼭 그렇지만도 않사옵니다. 헌원은 한밝산에서 배달국 선인 자부선인(紫府仙人)을 만나 삼황내문(三皇內文)의 일부를 배워 간 자입니다."
치우천왕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그래요?"
"그 일은 사실은 이렇게 된 것이옵니다…."
신지의 설명이 계속되었다.
치우천왕은 침묵을 하고 경청했다.
황제헌원이 즉위를 하고 종주국의 치우천왕을 배알하러 가던 길이었다. 공손헌원은 명화(名華)의 저자 거리에서 걸인 같은 사람을 하나 만났다. 걸인은 헌원의 앞에 무릎을 끓었다. 헌원은 그를 자세히 보았다. 눈빛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헌원은 잠시 일행의 걸음을 멈추게 하였다.
헌원은 걸인을 쏘아보았다.
"웬 일이오?"
걸인은 벌떡 일어나 절을 하였다.
"천왕폐하, 절부터 받으시옵소서."
헌원은 기분이 좋아졌다. 뭔가 상서러운 징조만 같았다. 헌원은 자신을 향해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말에서 내려와 소리를 낮춰 물었다.
"그대는 내 꿈을 어떻게 그리도 잘 알고 있소?"
"전하의 얼굴에 나타나 있사옵니다. 언젠가 황제(黃帝)님의 소망은 꼭 이루어질 것이옵니다. 그때가 되면 소인을 잊지 마시옵소서."
"내 꼭 그대를 찾으리다. 여봐라, 저 자에게 복채를 두둑이 내리도록 하라."
걸인은 손을 훼훼 내저었다.
"아니옵니다. 저에게는 그런 것이 전혀 쓸모가 없사옵니다."
걸인은 말을 마치고 헌원의 얼굴을 자세히 뜯어보았다.
"허나, 다만……."
"다만?"
"외람 된 말씀이오나, 전하에게는 아직도 부족한 것이 있사옵니다. 그것을 채우려면 한밝산 천지 근처에 기거하는 자부선인(紫府仙人)이라는 분을 만나, 삼황내문경(三皇內文經)을 배우고, 그 책을 얻어야 할 것이옵니다."
"자부선인? 삼황내문경?"
"선약(仙藥)에서 제일 으뜸은 자부선인이 한밝산에서 나는 약초로 만든 금단(金丹)이고, 신선도서에서 제일로 치는 것은 자부선인이 지은 삼황내문경이옵지요. 경문은 녹도문(鹿圖文)으로 기록되었는데 세 편으로 나뉘어져 있사옵니다. 집안에 삼황내문경이 있으면 요기, 악귀, 염병, 앵화 등이 발을 붙이지 못하옵지요. 죽을병에 걸린 사람도 삼황내문경만 읽으면 회생하옵니다. 그 책을 소지하고 다니면 강과 바다에 발을 딛어 건널 수 있으며, 이무기와 용을 물리치고, 바람과 비와 안개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 하옵니다."
헌원은 거의 혼잣말처럼 뇌까렸다.
"왕년에 치우천왕도 자부선인에게 도를 전수 받았다는 설이 있던데…… 그래서 그가, 신통술을 부리는 것은 아닐까……."
걸인은 헌원의 말을 들은 모양이었다.
"여기에는 어느 정도 과장적인 부분들도 섞여 있습지요. 하지만 근거 없는 소문이란 없는 법입니다."
헌원은 뭔가 번쩍 뇌리를 치는 생각이 있었다.
"그래, 우선 그것부터 얻어 와야겠군. 고맙소."
헌원은 일행을 둘러보며 말했다.
"시간이 없다. 그만 여기를 떠나자."
헌원은 걸인으로부터 몸을 돌렸다. 그는 말에 올라 일행과 함께 한밝산을 향해 달렸다. 그러나 한밝산 신무성에 있는 치우천왕을 알현하러 가는 게 아니었다. 한밝산 정상 어느 곳에 있을 자부선인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헌원은 생각했다. 자신이 천하를 제패하려면 우선 치우천왕부터 굴복시켜야 했다. 헌원은 아직 여러 면에서 치우천왕의 적수가 못됨을 잘 알고 있었다. 패잔병들로 구성된 유망의 군대로 어떻게 감히 배달군을 칠 염조차 낼 수가 있단 말인가. 더구나 선두에 서 배달군을 총 지휘하는 사람은 신장(神將) 치우천왕이었다. 그래서 헌원은 치욕을 무릅쓰고 치우천왕에게 제후국의 새로운 왕이 되었다는 신고식을 하러 가는 길이었다. 어쩌면 편법을 사용한 자신은, 인정도 못 받고 내침을 당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헌원은 유옹성을 떠날 때 자신의 수하들에게,
"천하가 그냥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나는 지금 다만 배달국의 상황을 정탐하러 가는 것뿐이다. 따라서 천하를 거머쥐기 위한 자료가 필요하여 원정을 떠나는 것이다. 보다 많은 것을 얻기 위해서는 때론 적 앞에서 무릎을 꿇을 줄도 알아야 한다."
는 등의, 여러 가지 변명을 늘어놓았었다.
수하들은 헌원을 향해 일제히 고개를 숙였었다.
"폐하, 잘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나 헌원의 수하들은 내심 비웃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지금, 헌원의 사고는 점점 확장해 가고 있었다. 나도 치우천왕처럼 죽음에서까지 소생시킬 수 있다는 신통술을 부릴 줄 알아야 한다, 나와 적을 알면 백전백승이라 하지 않았던가, 어차피 치우천왕의 배알은 명분이잖는가, 허나 이제 돌려 생각하니 전혀 그럴 필요도 없다, 괜히 뒤에 치우천왕에게 무슨 언턱거리를 줄 수도 있다, 제후국의 제후 주제에 어쩌고 하는.
한밝산 무릎께를 지나자, 더 이상 말이 오를 수 없는 지형이 펼쳐지고 있었다. 헌원은 말에서 내렸다. 헌원은 수행원들을 그만 유옹성에 돌려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다만 치우천왕을 알현하기 위해서 같이 온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달라진 거였다. 군사들을 이끌고 자부선인을 만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자부선인은 군사들의 호위를 받고 나타난 자신에 아예 모습을 나타내지도 않을 거였다. 걸인의 말로 미루어 삼황내문경을 배우고 그것을 얻어 가려면 하루 이틀에 마감될 일도 아니었다. 수행원들 역시 유옹성에 돌아가 자신을 대신하여 해야 할 일들이 있었다.
헌원은 혼자서 한밝산 정상을 향해 힘겹게 올랐다. 그는 장군봉 아래에서 자부선인을 만났다. 목적이 있는 헌원은, 자신을 한껏 낮추며 말했다.
"자부선인님, 저는 유옹국의 제후 헌원이옵니다. 부디 부족한 저를 위하여, 치우천왕에게처럼 신통술을 가르쳐 주옵소서."
자부선인은 헌원을 마주하며, 처음부터 그의 전신에서, 피 냄새를 맡았다. 첫눈에 위험한 인물이었다. 그런 사람이 자신에게 신통술을 가르쳐 달라고 조르는 거였다. 자부선인은 한동안 망설이다, 이윽고 결정을 내렸다. 자신을 찾아 먼 곳에 온 사람을 그냥 돌려보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를 따라 와요."
자부선인은 헌원을 자신의 수도처인 삼청궁(三淸宮)으로 데리고 갔다. 자부선인은 헌원을 거기에 기거케 하며 마음을 씻는 도만 전수했다. 삼황내문경에서도 그런 부분을 기록한 것만 보여주었다. 자부선인은 헌원으로 하여금 스스로 깨달아 의로운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함이었다.
헌원은 자신의 목적과는 영 상반되는 자부선인의 언행에 부아가 치밀었다. 헌원은 기어코 삼청궁을 박차고 나가 자신의 성으로 돌아가 버렸다. 물론 삼황내문경을 얻지도 못한 채였다.
사관 신지는 자신의 말에 끝을 맺었다.
"…바로 이를 두고 이름이옵니다."
치우천왕은 허허, 헛웃음을 짓고 말했다.
"그래요. 하면 황제헌원이란 작자는 내 후배이기도 하군. 나도 왕위에 오르기 전 한때, 한밝산 삼청궁에서, 자부선인에게 도를 배운 적이 있으니까…… 내게도 삼황내문경과 금단의 선약이 있소. 하지만 그 책과 약은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한 자라야만 효험이 있는 거지요."
"그렇사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삼황내문경과 선약의 소문만 듣고 곡해하여 수많은 문제점들이 돌출 되고 있습니다. 환역(桓易)을 배반한 복희씨쪽의 주역(周易), 다시 말씀 드려 소위 도가(道家)의 무리들이, 혹세무민하여 사람들을 미혹에 처박는 일이 많사옵니다. 특히 요즘 서토에서 횡행하는 둔갑술, 장풍술, 축지술, 연단복식술, 방중술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옵지요."
"제후국의 의무를 진작에 파기하고 자부선인에게로 달려 가, 삼황내문경을 얼치기로 배운 헌원도, 그들 중의 하나가 되겠군."
사관 신지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천왕폐하, 헌원이 오만방자하여져 천방지축 날뛸 내일을 위해, 무슨 대책이 필요할 듯도 하옵니다."
치우천왕은 입을 굳게 다물고 미간을 찌푸렸다. 치우천왕은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눈치였다. 잠시 후였다. 치우천왕은 소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치우천왕이 물었다.
"경은 헌원과 오랫동안 함께 지내, 그에 대해 우리보다 알고 있는 바가 많을 것이오. 경은 그 자에 대해 아는 대로 말해 보오."
소호는 치우천왕을 올려다보았다.
"사관 신지의 말이 모두 맞사옵니다. 헌원은 극히 일부분이었지만, 한밝산에서 자부선인에게 천부의 도를 배운 자이옵니다. 게다가 그의 혈맥 한 가지에도 분명 동이족의 핏줄이 흐르고 있을 터이옵지요. 헌원은 본시부터 야망이 많았고, 그를 뒷받침할 만한 머리도 있었사옵니다. 다만 엉뚱한 곳에 그 좋은 것들을 사용할 뿐이옵지요. 어쩌면 비열한 방법으로 유웅국을 접수한 사건도 바로 그것을 증명하는 한 예인지 모르겠사옵니다."
"헌원은 유웅국을 탈취하고는, 배달국의 비제후국임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공공연히 떠벌렸다는데……."
"그것은 배달국에 대한 배반이며 정면도전이기도 하옵지요. 헌원은 왕권을 장악하자 곧 전시 비상사태를 선포했사옵니다. 그는 백성들에게 무거운 세금과 과도한 노역을 부담시켰지요. 헌원은 각 가구에서 한 명 이상씩의 남자에게 징병에 응하도록 하였습지요. 그것을 이행하지 못할 시에는 곡물을 내거나 징용에 나가야 했사옵니다. 남자가 없는 집도 예외가 아니었습지요."
"장수도 많이 보강했다는 말을 들었는데……."
"헌원은 천왕폐하를 본떠, 자신의 집안과 관리의 자제들 중에서 출중한 인물을 뽑아 장수로 임명하여, 적재적소에 배치했사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태호 복희씨의 후손인 풍후(風后)와 역목(力牧)이옵니다. 그들은 역사(力士)일 뿐만이 아니라, 신선도를 익힌 사람들이기도 하옵지요."
"풍후와 역목이라……."
"헌원은 그들로부터 복희씨의 8괘 이치로 된 진지법(陣地法)을 익혀 천왕폐하에게 취약한 부분들을 보충했사옵니다. 그리고 풍후와 역목을 군대의 총원수, 부원수로 삼고 군사의 명령권을 주었습지요. 헌원은 차출된 장수들에게 우선 군사 훈련부터 최선을 다하도록 하였사옵니다. 임무를 게을리 하는 자는, 그 경중에 따라 유배를 떠나거나 처형당해야 했지요."
치우천왕의 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래요……?"
소호는 눈을 내리 깔며 말했다.
"유옹국은 지금 살벌한 시국이옵니다."
"헌원은 유망보다도 더하면 더했지, 절대로 그 이하는 아니겠군."
"헌원은 확보된 막강한 노동력을 바탕으로 광석을 제련하여, 유망이 배달국을 모방하여 만들었던 것보다, 더욱 세련되고 다양한 병기로 개조토록 했사옵니다. 헌원은 호씨족의 수장들도 많은 재물을 들여 사왔습지요. 천왕폐하께옵서도 아시다시피 그들은 누대로 배달국에 원한이 많은 부족이 아니옵니까. 그들 수장은 많은 부하들을 이끌고 헌원의 휘하에 들었사옵니다."
소호의 목소리에는 어떤 간절함이 담겨 있었다.
"천왕폐하, 장차 서토의 앞날이 심상치 않사옵니다."
치우천왕의 눈길은 온화한 그것으로 바뀌었다.
"그만 일어나오. 그대는 헌원과 그가 차지한 유웅국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므로, 짐이 장차 헌원군을 토벌하는데 중히 등용해 쓸 것이오. 때가 되면 그대를 부를 것이니, 배달국과 짐을 위해 힘써 주오."
소호는 이마를 땅에 대었다.
"천왕폐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자, 이제 그만 일어나오."
"황공하여이다."
소호는 몸을 더욱 낮추며 흐느꼈다.
치우천왕은 우가에게 명했다.
"우가는 소호가 임시로 거처할 곳을 마련토록 하오."
우가는 허리를 굽혔다.
"천왕폐하, 분부 받들어 거행하겠나이다."
치우천왕은 뭔가 더 알아보고 싶었다.
치우천왕은 시선을 마가에게로 돌렸다.
"마가는 공상성과 탁록성의 화백회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오?"
"마가 아뢰옵니다. 작년에 공상과 탁록에 가 점검해 보니, 그곳의 백성들은 아직도, 유망의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사옵니다."
"한마디로 자립심이 부족하다는 말이군……."
"유망으로부터 해방된 그들은, 천왕폐하로부터 자치권을 부여받았지만, 그것을 제대로 활용할 줄을 모르옵니다. 화백의 대표자들은 대권을 놓고 연일 암투가 가시지 않고 있사옵니다. 모함과 암살의 연속이옵니다."
치우천왕은 허공을 보았다.
"신하들은 어디에 가서 줄을 서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 이겠지……."
마가는 민망해져 용안에서 시선을 떼며, 말을 받았다.
"그들은 연일 천당과 지옥을 오락가락 하는 기분일 터이옵니다. 백성들도 갈피를 못 잡아 우왕좌왕이옵지요."
치우천왕은 마가를 정시했다.
"그들 제후국의 국론과 국력은 당연히 분산되어 가고 있겠군…… 그러다 필시 헌원의 밥이 되고 말텐데……."
마가는 치우천왕을 다시 보았다.
"그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공상성과 탁록성에도, 유옹성의 헌원 같은 인간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는 때문이옵니다. 동이족이 서토에 흩어져, 많은 가지를 쳐 나가다 보니, 발생되는 필연적인 결과이기도 하옵지요. 먼 후대에 가서, 그들 동이족의 끝은 어디일까,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옵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지요. 인류의 수계제불이니, 수증복본이니 하는 말들은, 한낱 전설 속에 묻혀 버리고 말 터이옵니다. 어쩌면 얼마 후에, 서토에서 그런 이야기를 기억하는 사람조차 없을지도 모르옵지요."
마가는 입안이 타 드는지, 잠시 말을 쉬었다 이었다.
"서토는 날이 갈수록 세상 만사의 근본 이치도 모르고 날뛰는 자가 늘어가고 있사옵니다. 따라서 서토는 지금 각박하게 소용돌이치고 있사옵니다. 이것은 마치 미친 말을 거꾸로 타고 '누군가'의 채찍질에 쫓겨 마구 달리는 형상과도 같사옵니다. 천왕폐하, 급하옵니다. 중원 각지로 흩어진 우리 동이족을 위해, 한시 바삐 헌원과 같은 무리들을, 다시 평정해야 되옵니다."
"……."
치우천왕은 입을 굳게 다물고 천장을 봤다. 뭔가 쓸쓸한 기운이 등줄기를 타고 내렸다. 치우천왕은 가급적 제후국의 정치에는 직접 간섭을 하지 않으려 했다. 바꿔 말해, 동족을 믿고 기다려 온 거였다. 그것이 실책이었음을 자인할 수밖에 없었다. 치우천왕은 혼자 있고 싶었다.
배달국의 서토 중원에는 탁록을 중심으로 강력한 제후 셋이 대치하고 있었다. 북쪽은 대효(大撓)가 머물렀다. 동쪽에는 새 발자국을 보고 종주국의 녹도문을 새로운 문자로 발전시켜, 후대에 소위 '중화 문자의 시조'라고 일컬어지게 되는 창힐(倉 )이 버텼다. 서쪽 유웅 땅에는 바로 문제의 헌원이 있었다. 그들은 물론 근원을 따지면 모두가 동이족이었다.
헌원은 서토에서 점차 막강한 군사력을 겸비한 절대 군주로 부상하여 가고 있었다. 헌원은 대효·창힐과 전쟁의 승리를 통해 서토의 패권부터 차지하고 싶었다. 그것을 바탕으로 차후에 배달국을 치면, 천하는 갈 데 없이 자신의 손안에 들 터였다. 헌원은 대효와 창힐의 변경을 몇 번 침공해 보았다. 그들은 조금 치의 굽힘도 없었다. 대효와 창힐은 헌원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치우천왕의 제후국임을 포기하지 않고 있었던 때문이다. 제후국의 제후로 있는 그들은, 유사시 언제든, 배달국에 원병을 요청할 권리도 있었다. 더구나 그들은 헌원과는 달리 자부선인으로부터 정식으로 도를 깨우친 사람이었다. 대효와 창힐은 한밝산 천지에서 배달국 치수관(治水官) 공공(共工)과 함께, 천부경·삼일신고·삼황내문경·윷판으로 만든 환역(桓易) 등을 정식으로 전수 받았다. 또한 천간(天干)과 지간(地干)의 60갑자의 기술을 습득했으며, 배달국의 녹서를 익혔다. 그들은 자신이 다스리는 나라의 신하와 백성들에게 신망을 한 몸에 받는 제후였다.
헌원은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대효와 창힐의 땅은 때를 보아 정복하기로 했다. 헌원은 우선 유망이 잃었던 공상성과 탁록성부터 되찾기로 하였다. 우선 그들 성부터 유웅국에 포함시켜야 대효와 창힐을 쉽게 무너뜨리고 중원을 호령할 발판이 만들어질 거였다. 그를 바탕으로 치우천왕을 쓰러뜨리고, 자신이 꿈에도 그리던 천자가 되어, 탐욕의 대미를 장식하는 거였다.
헌원은 군대를 이끌고 공상성에 이어 탁록성에 쳐들어갔다. 그는 별로 힘을 들이지 않고 두 성을 쉽게 접수할 수 있었다. 헌원은 탁록성을 자신의 수도로 정했다. 탁록성을 꼭지점으로 유웅성과 공상성은 삼각형의 구도였는데, 중원 지방에서도 가장 많은 사람들이 터잡아 살고 있는 곡창 지대이며, 서쪽으로 갈리어 나간 동이족의 주 생활 무대이기도 하였다.
헌원은 이제 그 근방에서 막강한 실력자로 부상한 거였다. 그는 스스로 황제라 칭하며 치우천왕과의 일전을 벼르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배달국의 치우천왕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것을 기왕에 인지하고 있는 헌원은, 대효와 창힐에 손을 뻗쳤다. 헌원은 먼저 대효에 사신들을 보내 설득하기로 했다. 사신들은 대효에게 헌원의 뜻을 전했다.
대효는 대뜸 화부터 벌컥 내며,
"당신들의 헌원 같은 희대의 패륜아가 아닌 다음에야, 내가 어찌 감히 어버이국이며 종주국인, 배달국을 치자는 데 동조할 수가 있겠느냐"
그렇게,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사신들은 얼굴만 붉어져서 창힐에게로 갔다. 창힐도 마찬가지였다. 사신들은 헌원에게 돌아 가 이 사실을 보고했다.
헌원은 씹어뱉듯 말했다.
"개 같은 인간들……."
헌원은 온몸을 떨며 이를 빠득, 갈며 덧붙였다.
"차제에 아예, 그들도 없애 버릴 것이다."
헌원은 대효·창힐과 몇 차례 싸웠다. 그러나 모두가 막상막하였다. 대효와 창힐은 나중에 연합 세력을 구축하여 저항하였다. 여기에 배달국의 원군까지 가세한다면 더욱 어려운 상황으로 치닫고 말 터였다. 헌원은 괜한 소모전이라 생각되었다. 그는 계산을 달리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종주국인 배달국만 차지하면, 그들 나라도 자연히 자신의 속국이 되는 거였다. 헌원은 호랑이굴로 직접 뛰어들기로 하였다. 그는 드디어 배달국으로 창칼을 돌렸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동이족들끼리의 전쟁이었지, 중국의 소위 '한족(漢族)'이 낀 싸움은 아니었다. 한족이라는 어원이 불분명하고, 의미마저 모호한 명칭은, 아주 훨씬 뒤에 생긴 거였다. 바꿔 말해, 그들 종족은 아직 중원 땅에 태동하지도 않은 세력이었다. 그때만 해도 중원은 어디까지나, 동이족의 중요한 활동 무대였고, 배달국 제후의 땅이었을 뿐이다.
치우천왕은 기왕에 천하를 평정하고자 작심하고 있었던 사람이 아니던가. 또한 그것이 거의 성취되어 가고 있었던 터였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유망이 유배되다시피 한, 그것도 이미 평정한 탁록 지역에서, 헌원의 강력한 도전을 받게 되는 거였다. 치우천왕은 제후국을 너무 안이하게 방치했던 자신의 실수에 대해 깊이 반성했다. 동시에 헌원의 배은망덕한 행위에 대해 치를 떨었다. 치우천왕은 이번 기회에 헌원 같은 무리는 어디에서건 아주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하겠다고 결심을 굳혔다. 치우천왕은 이 문제에 대해 어전회의를 열었다. 그리고 연속하여 군사회의도 직접 주관했다. 병관과 장군급들만 참석한 자리였다. 병관 치우와 치우비를 필두로, 본시 신선도인이었던 거야(鉅野)·비렴(蜚廉)·빙이(氷夷), 그리고 신농씨의 후손에서 발탁되었던 회록(回祿) 등이 참석했다. 그들은 신기한 도술과 전법을 함께 자유자재로 사용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 그들은 또한 유망을 치는데 지대한 공을 세워, 치우천왕의 신망을 한 몸에 받는 이들이기도 하였다.
치우천왕은 장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아직도 짐의 소명만을 기다리고 있는 소호를, 헌원군 토벌의 상장군으로 발탁하고자 하는데, 그대들의 의견은 어떻소?"
치우비가 한 손을 가슴에 얹고 허리를 굽혔다.
"소호는 자신의 군왕을 한 번 배반한 자이옵니다. 그가 만약 어떤 상황에서 배달국에 등을 돌릴 시에, 우리 군사들은 결국 어떻게 되겠사옵니까. 장차 중차대한 문제가 연이어 발생할 수도 있을 터이옵니다. 천왕폐하, 소장의 충언을 심사숙고하여 주옵소서."
치우천왕은 낯을 찡그렸다. 치우천왕은 치우비의 마음을 꿰뚫어 읽고 있었다. 치우비는 지금 자신의 위치가 뜬금없이 나타난 자에게 옮겨감을 시기하고 있는 거였다. 치우천왕은 조카를 너무 과대 평가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치우천왕의 목소리는 다소 높아졌다.
"헌원이 어떻게 소호의 군왕이 될 수 있겠소. 더구나 소호는 헌원으로 인해, 자신의 꿈이 좌절되고, 목숨을 건 탈출을 감행한 사람이 아니오."
치우비는 눈치가 없었다.
"소호는 헌원의 먼 일가이기도 하옵니다."
"그렇게 따지면, 우리들 모두 마찬가지가 아니오."
"천왕폐하, 부디 통촉하여 주옵소서."
치우비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치우천왕은 마음을 돌렸다. 치우비는 어쩌면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치우비는 한때 배달국을 위해 소호와 목숨을 내놓고 전쟁을 치른 사람이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금의 치우비와 같은 심정에 처해 있을 터였다. 하지만 전쟁에 임하는 자가, 자신의 공이나 자신만을 위한 명분에 너무 치우치다 보면, 치명적인 화를 자초할 수도 있었다. 그것이 우려될 뿐이었다.
치우천왕의 음성은 부드럽게 바뀌었다.
"치우비 장군, 잘 생각해 보오. 우리는 모두 같은 종족이오. 헌데 유망이나 헌원 같은 반역자들 때문에, 이 모양새가 되었소. 소호는 헌원에 원한이 아주 많은 사람이오. 뿐만이 아니라, 소호는 누구보다도 유웅국의 군사기밀과 서토의 지리를 잘 알고 있어요. 소호는 분명 우리에게 큰 득을 줄 수 있는 사람이지요. 장군은 아직도 짐이 하는 말을 못 알아듣겠소."
치우비도 이쯤에서 생각을 바꾸고 있었다. 자신은 신선도를 수련했고, 누구보다도 백부인 치우천왕을 존경하는 사람이었다. 소호를 은근히 비난하며 자리 싸움이나 할 게 아니라, 헌원과의 전투에서 큰공을 세워, 치우천왕이 자신에 대한 평가를 다시 해주기만을 고대하는 수밖에 없었다.
치우비는 허리를 더욱 굽혔다.
"천왕폐하, 소장의 어리석음을 한껏 꾸짖어 주시옵소서."
치우천왕은 끝을 맺었다.
"짐은 장차 헌원군을 평정하는 데 소호를 상장군, 치우비를 우장군, 거야(鉅野)를 좌장군에 임명할 것이오. 그대들은 모두 힘을 합하여 배달국의 위엄을 회복하는 데 최선을 다해 주기 바라오."
병관 치우와 치우비를 포함한 장군들은 일제히 머리를 조아렸다.
"천왕폐하, 분부 받들어 거행하겠나이다."
"좋소. 그만 들 물러가오."
치우천왕은 용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심란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찾아가고 싶은 곳이 있었다. 치우천왕은 왕실을 나갔다. 어느덧 날이 저물어 가고 있었다. 어디선가 피리 소리가 들려 왔다. 누가 부는지 아주 잘 분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귀에 많이 익은 가락이었다. 치우천왕은, 각종 꽃들이 제 자태를 뽐내며 만개한 정원을 거쳐, 내전으로 향하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우리들은 태시부터 음악으로 이 세상이 열렸다고 생각하는 종족이었지. 아마도 팔여(八呂)의 음률이 아니었던가? 그래, 그랬지! 따라서 우리들은 누구나 음악을 배우고자 마음먹고, 조금만 연습하면, 저런 소리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올 터이지. 하여 천성이 저 맑은 하늘처럼 착한 지도 모를 일이야."
치우천왕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암, 그렇고 말고."
치우천왕은 요람에라도 들은 듯 마음이 편안해졌다. 치우천왕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우려, 피리 소리의 출처를 찾았다. 다름 아닌, 자신이 찾아가고 있는 내전에서였다. 치우천왕은 내전으로 걸음을 빨리 했다. 내전 앞 정원의 가장 큰 바위에, 한 여자가 걸터앉아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 황후였다. 황후는 본시 웅씨족의 여자였다. 환웅천왕 때부터의 배달국 관례에 따라, 치우천왕의 장자 치액특은, 웅씨족에 가서 잠시 비왕의 임무를 맡고 있었다. 장자는 치우천왕이 입적하면 그 뒤를 이을 터였다.
치우천왕은 다시 황후를 보았다. 언제 보아도 자태가 참 고왔다. 마음 씀씀이도 그랬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왕비는 백성들을 위해 노심초사 애쓰는 자신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지금 연주를 하는 중일 터였다. 치우천왕은 그 은근한 애정에 코끝이 찡해졌다. 국사에 바빠 한 번 제대로 안아 주지도 못한 아내였다. 미안하고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다. 여염집에 시집을 갔더라면 남편과 시댁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행복하게 살 여자였다. 그런 여자가 무슨 악연으로 이승에 왔기에, 자신 같은 남편을 만나 이 고생인가 싶었다. 더구나 황후는 한참 남자를 알 나이였다. 하지만 거의 매일 독수공방이었다.
"그것도 삼신님의 뜻이었을까…… 나를 내조하여 백성을 잘 다스리게 도우라는…… 아, 나의 여인이여……."
치우천왕의 눈가에 언뜻 물기가 비쳤다. 황후는 남편과 눈길이 마주치자, 피리를 입에서 떼고, 볼우물을 깊게 패며 웃었다. 치우천왕은 황후의 그 모습을 보며 모든 근심이 말끔히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치우천왕은 황후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빨리 했다.
황후는 아직도 웃는 얼굴이었다.
"마마, 어인 행차이옵니까?"
"왜, 내가 못 올 곳을 왔소."
"여기에 납신 지 반 년이 넘었사옵니다."
"허허, 그래요. 미안하오. 내 너무 바빴소."
"제후국들의 동태가 심상치 않은 모양이군요."
"그들 저마다 군사력을 키우며 종주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준비하고 있다오. 좋게 말해서 그렇고, 사실은 배달국에 모반을 획책하고 있는 거지요."
"탁록의 헌원을 말씀하시는군요."
"제후국들은 이제 엄청나게 비대해졌어요. 앞으로 헌원과 같은 인물들이 도처에서 계속 나타날 것이오."
"상심이 크시겠사옵니다."
"내 그래서…… 이렇게 오늘…… 비를 찾은 것이라오……."
"무슨 말씀이온지 잘 알고 있사옵니다."
"자, 이제 그만 내전으로 듭시다……."
치우천왕과 황후는 내전으로 들어갔다. 은은한 관솔불에 드러난 황후의 모습은 고혹적이었다. 치우천왕은 황후를 살포시 안았다. 황후는 다소곳이 치우천왕에 전신을 맡겼다. 치우천왕은 황후의 머리에서 진한 향내를 맡았다. 치우천왕은 황후의 껍질을 벗겨 나갔다. 치우천왕은 어머니의 품과도 같은 황후의 몸에 자신의 모든 번뇌를 털어 내고 싶었다. 황후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황후는 양팔을 벌려 가슴을 열었다. 그리고 치우천왕을 받아들였다.
생활 수준의 향상과 인구의 증가는 특권층을 양산했다. 가진 자는 더욱 많은 것을 요구하게 되었다. 인간의 탐욕이란 끝이 없는 모양이었다. 지배층은 강력한 법을 만들어 피지배층을 옭아매었다. 특권층은 호사스러운 생활에 탐닉해 들었다. 남보다 잘 치장하고 기름진 음식을 먹으며, 좋은 집에서 살고 많은 노예를 소유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따라서 그들 기득층은 더욱 많은 재물이 소요될 수밖에 없었다. 민초들은 그들을 위해 혹사당해야 했다. 심지어 자식을 파는 경우까지 있었다. 자연스러운 인간의 질서는 점점 파괴되어 갔다. 지배계급의 교묘한 농간에 인심은 날로 흉흉해 갈 뿐이었다. 치우천왕은 배달국의 신하와 제후들에게 그런 짓을 못하도록 엄히 일렀다. 알고 보면 유망이나 헌원 같은 무리들이 나타나 설치는 이유는 그에 대한 반발일 거였다. 치우천왕은 스스로 검소하게 살며, 그들의 잘못을 자신의 부덕으로 받아들여, 삼신께 빌기도 많이 했다. 그게 안되니까 할 수 없이 칼을 빼든 거였다. 치우천왕이 몸소 그들 제후국의 천왕 노릇을 하는 이유는, 그들을 식민화시켜 노예로 길들이기 위해서도, 배달국만 배불리 먹고살기 위함도 아니었다. 배달국 신시 선왕들의 유업을 받들어, 그들을 홍익인간화시켜 각자 자신의 몸을 닦아, 지구와 그에 딸린 별들을 관장하는 마고대신(麻姑大神)과 더불어 살던, 저 금단의 포도를 따먹은 지소씨(支巢氏) 이전의 인간 본래 모습으로, 전 인류가 되돌아가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 땅에 사는 이들은, 사람다운 데서 더욱 멀리 달아나고 있었다. 치우천왕은 가슴이 아팠다. 치우천왕은 소도단에서 백일기도에 들어가기로 하였다. 그런 계획이 있었던 터라, 자신이 직접 동족들 앞에 서, 칼을 휘두르고 싶지는 않았다. 사제자는 무엇보다 살생을 금해야 할 터였다. 그리고 배달국에는 잘 훈련된 병사들이 있었다. 그들을 이끌어 줄 탁월한 장수도 많았다. 그들만으로 충분했다. 치우천왕 자신이 직접 전투에 참여할 필요까지는 없었다. 막판으로 치달리는 상황만 아닌 다음에야 말이다. 치우천왕은 소호를 상장군으로 하여 헌원을 평정하도록 하였다. 치우비와 거야가 힘을 다해 그를 도울 터였다.
소호는 사기가 충천하여 병사들을 이끌고 탁록의 벌판으로 향했다. 그의 좌우에, 말을 탄 치우비와 거야도 따랐다. 소호는 내심 신이 났다.
소호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내가 천하무적의 배달군을 호령하는 상장군이 되다니……."
소호는 치우천왕의 배려에 새삼 감사할 뿐이었다. 배달국에 망명하여 목숨이나 간수하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그였다. 소호는 신명을 다해 자신의 책무를 완수하고 싶었다. 소호는 입을 꽉 다물고 끓어오르는 희열에 몸을 떨었다. 소호는 어서 빨리 헌원이 군대를 몰고 나타나기만을 고대했다. 헌원은 치사한 방법으로 왕위를 탈취하고 자신의 목숨까지 노렸던 자였다.
"나쁜 자식."
소호는 으드득, 이를 갈았다. 헌원이 눈앞에 나타나는 즉시, 단칼에 요절낼 심산이었다. 지평선에 먼지가 구름처럼 일고 있었다. 필시 헌원의 군대일 터였다. 소호가 기다리던 사람들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었다.
소호는 말의 고삐를 힘차게 당기며 달려나갔다.
"헌원, 네 이놈. 잘 만났다. 내 칼을 받아라."
소호의 뒤를 배달군이 질풍처럼 내달렸다. 헌원군도 그에 뒤질세라 속력을 높였다. 피아간의 거리는 지호지간(指呼之間)으로 좁혀 들었다.
헌원은 소호를 알아보고 외쳤다.
"소호야, 너는 언제부터 배달국의 개가 되었냐."
"이놈아, 개 눈에는 모두 개로만 보이냐. 아니다, 주인을 물어뜯어 죽이고 모국에까지 칼을 겨누는 네놈은, 개만도 못한 작자다."
"소호 네 이놈, 말이 많다. 내 곧, 네 입을 조용하게 해주겠다."
"우리 배달국에는, 사돈 남 말한다는, 속담이 있지……."
헌원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칼을 빼어 들었다. 그는 허연 이를 온통 드러내고 소호에게로 달려들었다. 두 사람의 검이 허공에서 불꽃을 튀겼다. 막상막하였다. 한참이 되어도 승부가 나지 않았다. 헌원은 시간 낭비라 생각되었다. 헌원은 몸을 돌려 배달군 깊숙이 뛰어 들었다. 소호도 그랬다. 소호는 거침없이 적을 베어 나갔다. 소호가 지나는 자리마다 헌원군은 푹푹 고꾸라졌다. 치우비와 거야의 신검(神劍)도 허공에서 춤을 췄다. 헌원군의 선혈이 땅과 허공에 낭자했다. 그것은 한 폭의 거대한 지옥도였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헌원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의 군사들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겨우 목숨을 부지한 그들은 슬금슬금 도망을 친 거였다. 헌원은 혼자서 적들과 힘겹게 대항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참패였다. 물론 헌원이 전군에 출동 명령을 내린 것은 아니었다. 풍후와 역목도 탁록성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헌원은 일단 배달국의 전력부터 시험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니었다. 배달군은 자신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강했다. 순식간에 자신의 군대는 절단이 난 것이었다.
헌원은 아직은 시기상조라 생각했다. 소호도 보통은 넘었다. 그를 보좌하는 치우비와 거야도 그랬다. 헌원은 무심결에 씹어뱉었다.
"만약 치우천왕까지 이 전투에 참여했더라면……."
헌원의 등골로 소름이 훑어 내렸다. 돌아가 때를 기다리며 더 많은 준비를 하여 차기를 노려야 했다. 헌원은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잽싸게 등을 돌렸다. 소호가 그의 뒤를 바짝 좇으며 소리쳤다.
"야, 헌원아. 내 입을 그냥 내버려두고 어딜 그렇게 바삐 가느냐. 이제 그만 돌아와서, 내 입을 막아 봐라."
"소호, 네 이놈……."
헌원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이를 갈았다. 헌원은 자신의 말에 힘차게 채찍을 가했다. 헌원은 넓고도 넓은 탁록의 벌판을 혼자 외롭게 내달렸다. 헌원은 모멸감으로 전신이 부들부들 떨려 왔다. 저만치서 자신의 남은 병사들이 고개를 푹 숙이고, 코가 잔뜩 늘어져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저마다 자기에게 떨어질 형량을 가늠하며 이미 초죽음이 되어 있었다.
탁록성으로 돌아 간 헌원은, 이번에 참전했던 수뇌급들을 즉시 처형했다. 나머지는 강등, 또는 금고나 태형으로 다스렸다. 헌원은 군기를 다시 세우고 맹훈련에 돌입했다. 풍후나 역목을 시켜 간간 배달국의 변경을 침범하기도 하였다. 국가 비상사태를 연장하며 백성들에게 위기의식을 고양시키기 위함이었다. 이는 백성들에게 국론을 전승 하나로만 통일시켜 과중한 세금과 부역을 덧씌우는 명분도 되었다. 하지만 풍후나 역목의 군사들은 출병하는 족족 크게 패하기만 했다. 인적 물적으로 출혈이 너무 컸다.
유웅국 탁록성의 헌원은 치우천왕과의 대결전을 위한 모든 준비를 마쳤다. 헌원은 자신의 성깔을 죽이며 많이도 기다려 왔다고 생각했다. 그 동안 헌원은, 군사를 확충했고, 병기도 꽤 보강했다. 병사들에게 진지법을 주축으로 전술도 많이 익히게 했다. 헌원은 자신의 전력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것 같다고 생각했다. 헌원은 총공격을 개시하기로 작심했다.
헌원은 전군에 출격 명령을 내렸다. 전번처럼 자신이 직접 총지휘관이 되어 앞장을 섰다. 풍후와 역목도 동참시켰다. 그들의 기세는 드높았다. 한동안 고요하던 탁록의 벌판은 헌원군의 함성과 말발굽 소리에 몸을 떨었다. 헌원군이 배달국의 변경에 다다랐을 때였다. 쨍했던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지며, 뇌성벽력이 치고, 폭우가 쏟아졌다. 꼭이 누구의 분노인 것만 같았다. 헌원군은 근원도 알 수 없는 어떤 공포감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헌원은 군사들을 향해 소리를 높였다.
"유웅의 병사들이여, 두려워 할 것 없다. 너희들은 세계의 최정예 부대다. 아무도 너희들 앞에 감히 맞서지 못할 것이다. 이제부터 우리는 배달국을 접수하러 간다. 자, 공격하라!"
헌원은 칼을 빼어 들고 적군을 향해 내달렸다. 사기를 회복한 그의 군사들이, 뒤를 따랐다. 헌원군은 배달국의 변방을 향해 돌진해 갔다. 그들은 질풍노도와도 같았다. 헌원군은 어렵지 않게 배달국의 변경을 넘을 수 있었다.
치우천왕은 막 백일기도를 끝냈다. 궁궐로 돌아가 잠시 쉬려던 그는, 문득 서쪽 하늘을 봤다. 검은 구름이 두텁게 층을 이루고 있었다. 치우천왕은 하늘의 상태를 자세히 살폈다. 치우천왕의 미간에 깊은 골이 졌다.
"저것은 필시 전운일 터……."
백일기도도 모두 헛일이었단 말인가. 치우천왕은 누구보다도 특히, 헌원을 위해 기도를 올렸다. 헌원이 마음을 바꿔 올바른 인간이 되어 달라고. 더구나 그를 직접 혼도 내줬다. 그런데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날뛰는 거였다. 헌원의 탐욕을 향한 집념은 끝간 데 없었다. 치우천왕은 어이가 없었다.
소호가 와, 치우천왕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천왕폐하, 소장 소호 아뢰옵니다. 다름이 아니오라, 헌원이 전군에 총공격 명령을 내렸사옵니다. 헌원은 손수 군사들을 이끌어, 배달국으로 쳐들어오고 있사옵니다. 헌원군은 얼마 전, 이미 국경을 넘었사옵니다."
"알고 있소……."
치우천왕은 백일기도에 들어 있었다. 어떻게 헌원의 도발을 알고 있었을까. 상장군 소호는 곧 자신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치우천왕은 신선도에 도통한 사람이었다. 그쯤은 눈과 귀를 빌리지 않아도 충분히 알 터였다.
소호는 묵묵히 치우천왕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치우천왕의 목소리에는 강력한 힘이 실려 있었다.
"그런 인간은 할 수 없소. 역시 무력으로 다스리는 수밖에. 이번에는 내가 직접 나설 것이오. 전 아홉 개 군을 네 개의 군으로 개편하여, 헌원군에 진격할 것이오. 상장군은 지금 즉시, 전군에 출전 명령을 내리시오."
"천왕폐하, 분부대로 거행하겠나이다."
소호는 자신의 자리로 물러갔다. 소호는 군사들을 집합시켜 놓고 치우천왕을 기다렸다. 잠시 후, 치우천왕은 투구와 갑옷을 갖춰 나왔다.
치우천왕은 기병과 최정예 보병을 이끌고 선봉에 섰다. 전군을 통솔하는 상장군 소호, 그리고 우장군 치우비와 좌장군 거야가 그 뒤를 바짝 좇았다. 수많은 배달국 군사들의 물결은, 꾸불텅한 길을 따라, 거대한 용처럼 꿈틀거렸다. 치우천왕의 초상화와 '蚩尤'(치우)라 쓴 깃발이 하늘을 향해 불쑥불쑥 솟아 나부꼈다. 그 모습은 가히 장관이었다.
헌원은 치우천왕이 몸소 참전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배달국 변방에서 자신의 활동 무대인 탁록의 벌판으로 물러나 진을 쳤다. 힘을 축적하여, 보다 유리한 곳에서 적을 맞아, 전투를 치르기 위해서였다.
배달군은 헌원군이 기다리고 있는 탁록의 근처에 당도했다. 치우천왕은 미리 준비한 격문을 첩자들을 시켜 탁록성 근처에 뿌리거나 붙이게 했다.
"그대, 헌원아! 동이족 삼신일체의 원리를 배반하고, 삼륜구서(三倫九誓)의 행함을 게을리 한 너는, 지금 즉시 반성을 하고, 짐의 앞에 와 무릎을 꿇을 지어다. 만약 짐의 이 명령을 거역한다면, 나뿐만이 아니라, 천지신명과 여기에 모인 배달국 군사들이 진노할 것이니라. 그대는 어찌 이 앞에서 살아남기를 바라겠는가. 그뿐만이 아니다. 너는 죽어서도, 삼신님께 그 죄를 면치 못할지니라. 네 이 어찌, 두렵지 않은가, 헌원아!"
헌원군은 탁록성을 배수진으로 하여, 배달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배달군은 헌원군에 접근해 들었다. 배달군은 적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진을 쳤다. 화살을 쏘면 거의 도달할 거리였다. 배달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그들은 신장 치우천왕과 함께 온 거였다. 오랜 강행군이었지만, 배달군은 조금도 지친 모습이 아니었다.
치우천왕은 자신의 군사들에게서 이탈하여 헌원군 쪽으로 말을 천천히 몰았다. 헌원은 같잖다는 표정으로 치우천왕을 봤다. 헌원은 땅바닥에 가래침을 탁, 뱉었다. 헌원은 잠시 비웃음을 띄었다. 그러나, 곧 웃음을 거뒀다.
헌원은 치우천왕을 향해 소리쳤다.
"치우 양반, 그대가 여기까지 몸소 웬일이오. 그냥 배달국 신무성에서 쉬시지, 여기까지 찾아와, 스스로 묏자리를 팔 게, 또 뭐요."
치우천왕은 헌원의 이죽거림을 무시했다. 치우천왕은 말의 고삐를 당겨 정지했다. 치우천왕은 헌원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그대 헌원아. 짐의 고함을 명심할지어다. 짐은 환국(桓國) 환인천제와 배달국 환웅천왕의 적손으로, 그 정통성을 보장받은 사람이니라."
헌원은 한쪽 다리를 방정맞게 떨었다.
"망아지……."
치우천왕의 긴 수염이 바람에 거세게 나부꼈다.
"짐은 환웅천왕의 홍익인간을 치국 이념으로, 동이족의 만세를 위하고, 수계(守誡)와 제불(諸佛)을 통한 자신의 수증복본에, 최선을 다해 온 바이다. 그렇다면 종주국인 배달국의 짐이, 이, 천하를 맡음이 마땅하지 않느냐."
"하품하는……."
"동이족의 작은 가지에서, 어찌어찌 갈라져 나간, 금수만도 못한 쭈그렁밤송이 같은 네가, 어찌 감히 천하를 넘보는가. 짐이 맹세하건대, 삼신님의 뜻을 받들어, 너를 벌할 것이니라."
"소리하고 있네……."
헌원은 말을 마치고 눈을 부릅떴다. 헌원은 치우천왕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헌원은 다시 냉소를 짓는 듯하더니, 허허허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헌원의 얼굴은 몹시 경직되어 있었다. 그의 그것은, 허약한 자의 자기 기만일 터였다. 치우천왕은 헌원의 언행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치우천왕은 격문에 썼던 내용을, 토씨 하나 바꾸지 않고, 자신의 말에 계속 이었다.
"그대, 헌원아! 동이족 삼신일체의 원리를 배반하고…."
헌원도 이미 치우천왕의 격문을 읽은 거였다. 헌원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르는 모욕감에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헌원은 장검을 높이 쳐들었다.
"네 목을 떨궈, 앞으로 절대 헛소리를 못하게, 만들어 주겠다. 자, 배달군을 쳐라. 전군, 앞으로-!"
헌원군은 배달군을 향해 몰려들었다.
치우천왕은 말머리를 배달군에 돌렸다.
"다시는 아무도 모반을 꾀하지 못하게, 저들을 확실히 무찔러라! 배달군에 감히 창검을 겨누는 자, 하나도 남기지 마라!"
치우천왕의 검이 허공을 가르며 번쩍 빛을 발했다. 그와 동시에 배달군의 대궁과 태노에서 화살이 날아 헌원군에 비오듯 쏟아졌다. 배달국은 동이족의 정통성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나라였다. 동이족의 이(夷)가 무엇이던가. '활을 잘 다루는 어진 사람'이란 뜻이 아니던가.
헌원군은 초반부터 배달군에 상대가 될 리 없었다. 배달군의 크고 힘찬 화살은 적군의 방패를 쉽게 뚫었다. 돌 틀에서 거대한 돌도 계속 날았다. 헌원군은 여기저기에서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헌원군의 선봉대가 무너졌다. 구리와 철로 만든 세련된 병기를 소지한, 배달국의 기마병대가 달려나갔다. 헌원군의 진지는 차례로 무너져 갔다. 배달군의 보병들은 힘을 얻었다. 그들은 적진 깊숙이 파고들어 적을 베어 나갔다.
말을 탄 치우천왕은 대검을 휘두르며 헌원을 향해 돌진했다. 헌원은 치우천왕에 맞서 힘겹게 대항했다. 헌원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치우천왕의 무술은 자신보다 한참 위였다. 치우천왕의 검술은 정말 사람의 것이 아닌 성싶었다. 신기에 가까웠다. 헌원은 계속하여 뒤로만 밀렸다.
잠시 후, 헌원은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봤다. 온통 배달군이었다. 이번에도 갈 데 없는 패배였다. 헌원은 먼저 말머리를 돌렸다. 헌원은 어쩔 도리 없이 후퇴 명령을 내렸다. 헌원은 패잔병들을 지휘하며 힘겹게 탁록성으로 도망쳤다.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던 치우천왕은, 전군에 철수 명령을 내렸다. 치우비가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아뢰었다.
"천왕폐하, 탁록성으로 계속 진격하여 헌원군을 전멸시켜야 하옵니다. 그래야 헌원 같은 자들이, 다른 뜻을 품지 못하옵니다."
"나 역시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소. 하지만 지금은 아니오. 나는 한 나라의 군왕인 동시에 신선도인이오. 그 위치에서 다시 한 번 자신을 반성해 봤소. 나는 그 동안 헌원으로 인해 너무 흥분해 있었소. 그것은 특히 신선도를 수련하는 사람으로서 옳지 못한 일이 아니겠소. 더구나 이번의 출전은 백일기도 직후이기도 하오."
"천왕폐하, 하오나……."
"나는 분기를 다스려 마음을 올바로 돌리기로 했소. 헌원은 악질이지만, 그래도 동족이오. 헌원의 군사들 대부분도 그렇고. 더구나 성안에 살고 있는 아무 죄도 없는 같은 민족을 살육할 수는 더욱 없는 일이 아니겠소. 더 이상 동족의 피를 보고 싶지 않으오. 하여, 군사를 물리기로 작정한 것이오."
소호가 아뢰었다.
"천왕폐하, 이쯤해서 헌원은 정신을 차렸을 것이옵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헌원은 자청하여 공물을 싣고 와, 폐하께 용서를 빌 터이옵니다."
"짐도 그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오."
치우천왕이 막 등을 돌리려는 찰나였다. 탁록성 성문 앞에 뽀얀 먼지가 일고 있었다. 말을 탄 한 무리의 사람들이 배달군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헌원의 군사들이 백기를 들고 투항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치우비는 치우천왕에게 주위를 환기시켰다.
"천왕폐하, 저들의 항복은 분명 헌원의 계략일 것이옵니다."
"계략?"
"일단의 투항자들은 헌원의 첩자들일 것이라는 말씀이옵니다."
"전혀 배제할 수 없는 일은 아니오. 저 서토의 헌원은 그 만큼 간교한 인간인 줄 내 이미 알고 있소. 하지만 아무려면 어때요. 치우비 장군, 사람을, 그것도 동족을 믿는다는 게 무슨 잘못이겠소."
"천왕폐하, 만약 저들이 헌원의 밀명을 띠고 배달국에 와, 어떤 농간을 부린다면 어떻게 하옵니까……."
"나는 언제나 종주국의 천왕답게 처신해야 돼요. 나는 가급적 피를 덜 흘리고 제후국들을 모두 통일할 거요. 반대 세력이나 불만 세력에 사사건건 의심하고 탄압을 하여서는 안될 일이오. 그것은 도처에 그런 사람들을 더욱 양산할 따름이 아니겠소. 그러다 보면 필시 그들도 놓치고, 내 자신도 잃을 터이오. 나는 아무 조건 없이 저들을 받아들일 것이오.""
치우비는 치우천왕의 도량에 다시 한 번 고개가 숙여졌다.
"소장의 어리석음을 꾸짖으소서. 헌원도 사람인 이상, 언젠가 천왕폐하의 깊은 뜻을 알 때가 있을 것이옵니다."
"그때가 돼야, 헌원은 나를, 자신의 진정한 왕으로 믿고 따를 게요."
"천왕폐하, 정말로 그러하옵니다."
치우천왕은 잠시 잃었던 회대지역과 강소성, 그리고 유옹성을 재 접수했다. 그곳의 성을 개축하고, 필요한 곳에는 성을 더 쌓았다.
헌원은 이제 탁록성 하나만으로 활동 반경이 좁혀졌다. 헌원은 탁록성의 방비를 더욱 굳건히 했다. 일테면 마지막 발악이었다.
치우천왕은 탁록성을 에워싸고 헌원이 항복하기만을 기다렸다. 탁록성에는 양식이 거의 바닥나 가고 있었다. 돌림병까지 나돌았다. 아사자와 병사자들이 연일 늘어갔다. 헌원은 할 수 없이 치우천왕을 직접 만나 단판을 짓기로 했다. 치우천왕의 인물됨을 잘 알고 있는 헌원은, 백기를 치켜세우고 단신으로, 치우천왕의 진중에 말을 몰았다. 이는 치우천왕의 인간적 약점(?)을 이용하여, 선의를 악의로 보답하고자 함이었다.
헌원은 치우천왕에게 무릎을 꿇었다.
"천왕폐하, 신의 잘못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앞으로는 제후국의 제후로서 모든 의무를 다하고, 신계의 질서에 따르겠나이다."
치우천왕은 헌원의 속을 꿰뚫어 읽고 있었다. 치우천왕의 안구에서 불길이 활활 토해지고 있었다. 헌원은 눈이 너무 부셔 앞이 다 캄캄하였다.
치우천왕의 음성만은 예상외로 부드러웠다.
"짐은 그대가 스스로 이렇게 찾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소. 아무튼 반갑소. 짐은 지금까지 그대의 일을 모두 불문에 붙이고, 탁록의 제후로 인증할 터이니, 동이족 삼신일체의 원리를 지키시오. 하여 종주국에 할 도리를 다하고, 삼륜구서(三倫九誓)의 행함을 게을리 하지 마오."
헌원의 목소리는 아주 간드러졌다.
"천왕폐하, 성은이 하해와 같사옵니다. 헌데 삼신일체와 삼륜구서는 무엇을 뜻하옵니까? 신이 폐하의 격문에서도 보았고, 폐하께옵서 저에게 누차 강조하시는 것으로 미루어, 어떤 특별한 의미가 있을 듯 사료되옵니다."
헌원은 물론 그 어휘들의 속뜻을 몰라서 물은 것은 아니었다. 헌원은 지금 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풍전등화의 처지에 놓인 자신이었다. 사태를 자칫 잘못 판단하였더라면, 조금만 시간이 늦었더라면, 자신은 제후는커녕, 목숨마저 부지하지 못하는 자리로 내몰렸을 터였다. 모든 것이 저 치우천왕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선은 치우천왕의 비위부터 맞춰야 했다. 헌원은 한숨 돌릴 시간을 벌고 싶었던 거였다. 목숨만 부지한다면 기회야 언젠가 다시 올 터였다. 헌원은 내심 칼을 갈고 있었던 것이다.
치우천왕은 헌원의 얼굴에서 진작에 그의 속셈을 모두 읽고 있었다. 치우천왕은 안타까운 눈초리로 헌원을 보았다. 하지만 저자가 누구이던가. 자력으로 아무나 제후의 자리에 오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헌원은 한편으로 백절불굴, 칠전팔기의 영웅이기도 했다. 다만 방향이나 목표가 잘못 되었을 뿐이다. 아까운 자였다. 저런 사람이 배달국을 위해 힘써 준다면…….
치우천왕은 왠지 씁쓸하고 서글픈 생각이 들어, 문득 하늘을 봤다. 많은 구름이 검은 색조로 낮게 가라앉아 우중충했다. 곧 적잖이 비가 쏟아질 터였다. 치우천왕은 무심결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헌원과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치우천왕은 그들을 위하여서라도, 저 진드기 같은 인간에게, 대답은 해줘야 했다.
치우천왕은 목청을 가다듬었다.
"삼신일체는 삼신님, 종주국, 제후국, 바꿔 말해, 마고대신님, 짐, 그대의 마음이 하나 됨을 의미한 것이오. 그것은 궁극적으로 환웅천왕께옵서 밝힌 홍익인간의 구현이 아니겠소?"
"지당한 말씀이옵니다. 그럼 삼륜은 군신, 부자, 부부의 도리이옵니까?"
"맞소. 하지만 짐은 삼륜 중에서 짐과 그대, 특히 군신간의 관계를 강조한 것이오. 짐은 그대를 지켜 주고, 그대는 짐을 보호해야 되지 않겠소. 지도층에서 먼저 모범을 보여야 한단 말이오. 구서는 그대가 백성들에게 가르칠 덕목이오. 그대는 백성들이 가정생활과 사회생활에서 효도하고, 자애롭고, 순종하고, 예의바르도록 가르쳐야 하오. 그래야 신계정토가 이루어지지 않겠소. 헌데 그대는 엉뚱한 일들에 너무 많은 것을 빼앗겨 왔소."
"항공하옵니다."
헌원은 머리를 더욱 조아렸다. 헌원의 숙인 얼굴은 처참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헌원은 속에서 불덩이 같은 게 불쑥불쑥 치밀었다. 헌원은 지금의 이 일을 평생에 씻을 수 없을 치욕이라 치부하고 있었다. 물론 신선도인인 치우천왕은 그 속까지 읽고 있었다. 치우천왕은 하늘을 다시 쳐다보았다. 더욱 검게 물들어 가는 하늘에서는 비가 질금거리기 시작했다.
치우천왕은 헌원을 서둘러 돌려보내고 싶었다. 잠시라도 그와 같은 인간과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치우천왕은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그만, 탁록성에 돌아가 보오. 가서는, 짐이 명한 대로 꼭 따라야 하오. 짐은 곧, 식량과 의약품을 그대의 성에 보낼 것이오."
"성은이 망극하여이다. 신, 다시는 불충한 마음을 품지 않겠사옵니다."
치우천왕의 목소리에는 날이 섰다.
"짐은 그대가 부디, 면종복배(面從腹背)하지 않길 바랄 뿐이오."
"신 헌원, 꿈에서라도 폐하에 따를 것이옵니다."
헌원은 자신의 성으로 돌아가기 위해 치우천왕의 진중을 떠났다. 치우천왕도 군대를 완전 철수하여 배달국으로 옮겼다. 하지만 헌원은 3년이 지나도 조공을 바치지 않았다. 속국으로서 지켜야 할 여타의 의무도 전혀 이행되지 못했다. 배달국에서 보내 준 것만 꿀꺽하고는 그만이었다. 그나저나 탁록은 외관상 조용했다. 서토에서는 한동안 어떤 도발도 없었다.
치우천왕은 알고 있었다. 헌원이 그쯤에서 그냥 말 인간이 아니란 것과 이 모든 것이 탁록을 또 한바탕 광풍 속에 휘몰아 넣을 전조라는 것을.
치우천왕은 헌원이 얼마나 자신을 속이며 버티나 두고 보기로 했다. 헌원이 언젠가 진심으로 자신의 앞에 굴복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헌원과의 싸움이 아니라, 전적으로 치우천왕 자신과의 대결이었다. 헌원이 자진하여 무릎을 꿇게 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헌원군을 대파하여 그를 죽인다 해도, 아무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다만 일개 장군으로서의 장쾌한 사건일 따름이지, 천왕으로서 자랑할 만한 일은 못될 터였다. 치우천왕과 헌원은 그 생각하는 바가 본질적으로 달랐던 것이다.
치우천왕은 헌원의 침공을 대비하여 별도로 준비하지 않았다. 군왕에서부터 필부에 이르기까지 모두 각자 맡은 일에 충실하면 될 터였다. 진정한 국력은 바로 거기서 나오는 거였다. 헌원 같은 인간이 아무리 설친다 해도, 별로 문제될 바가 아니었다. 치우천왕은 평상시처럼 국정을 운영해 갔다. 세금을 더 받거나 징집을 늘리지도 않았다. 군사들의 훈련을 강화하고, 무기들은 언제든 사용할 수 있게 잘 간수하도록 일렀을 뿐이다. 백성들에게 마음의 그늘을 드리우게 하고 싶지 않았던 때문이다. 만약 그렇게 해서라도 헌원을 굴복시킬 요량이었으면, 벌써 탁록성을 접수하고 남았을 터였다.
탁록에서는 귀화자가 계속 늘어갔다. 탁록성을 탈출하여 온 백성들은 헌원이 다시 전쟁 준비에 혈안이 되어 있다고 입을 모았다. 사실이 그랬다. 헌원은 백성들을 들볶았다. 탁록성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오줌 누고 거시기 구경할 사이도 없을 지경이었다. 그들은 못 먹고 헐벗었다. 끊임없는 노력 동원에 몸은 말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 생지옥에서 해방될 날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개중에 배달국에 동조하여 모반을 획책하거나, 탈출을 시도하는 자들도 있었다. 헌원은 그런 자들을 색출하면 가차없이 처단하였다. 헌원은 배달국만 무너뜨리면, 그들을 노예로 삼아, 자신의 백성들은 손 하나 까딱 안하고 대대로 잘 먹고 잘 살게 해주겠다고 구슬려 달랬다. 백성들은 빤한 거짓말인지 알면서도 코 꿴 마소처럼 아니 끌려갈 수가 없었다. 목숨이라도 부지하려면 어쩔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상장군 소호가 치우천왕을 알현했다.
"천왕폐하, 헌원이 다시 난을 일으켰사옵니다."
치우천왕은 충분히 예상한 일이었지만, 막상 닥치고 보니, 울컥 화가 치밀어 올랐다. 3년 전 자신의 앞에서 맹서하던 헌원의 가증스러운 모습이 새록새록 되살아났다. 치우천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정말 인간 말종이로고……."
치우천왕은 다시 나설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헌원은 그냥 두고만 볼 인종이 아니었다. 더 이상 속고만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배달국 백성들과 제후들의 눈이 있었다. 치우천왕은 전군을 인솔하여 헌원의 진중으로 쳐들어가기로 했다. 치우천왕은 군사들을 이끌고 탁록을 향했다.
헌원은 치우천왕이 오는 길목을 지켰다. 헌원은 탁록성 앞에 있는 큰산의 골짜기에 요새를 만들어 치우천왕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산을 막 넘어온 치우천왕은 헌원군을 발견했다. 치우천왕은 말의 속력을 높였다.
"적이 앞에 있다. 쳐라-!"
치우천왕의 군사들이 헌원군을 향해 질주했다. 적과의 거리가 점점 좁혀 들고 있었다. 헌원군의 진지는 전과는 달랐다. 구리 방패를 든 많은 군사들에 에워싸 있었는데 철옹성과도 같았다. 방패는 햇살을 받아 번쩍번쩍 윤이 났다. 배달군은 눈이 너무 부셔 잠시 멈칫 했다.
치우천왕은 하늘을 향해 양팔을 올렸다.
"구름아! 안개야!"
곧 운무가 몰려와 헌원군을 완전히 덮어 버렸다. 배달군은 치우천왕의 조화술에 힘을 얻었다. 배달군은 함성을 내지르며 파죽지세로 헌원군에 밀물처럼 몰려들었다. 적군 속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치우가 또 신통술을 부린다."
헌원의 목소리도 섞였다.
"우연의 일치일 따름이다. 두려워 말고 치우놈을 죽여라."
헌원군은 방향 감각을 잃고 저희들끼리 창칼을 겨눠 싸우기 일쑤였다. 진작에 헌원군은 전의를 상실했다. 그 틈새를 비집고 배달군은 종횡무진이었다. 얼마 후, 구름과 안개가 걷혔다. 헌원군의 시체가 탁록의 벌판에 즐비했다. 치우천왕은 헌원을 찾았다. 이참에 녀석에게 단단히 혼을 내줄 심산이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배달국 좌장군 거야에게, 등뒤로 달려드는 헌원의 모습이 시야에 잡혔다. 치우천왕은 소리쳤다.
"헌원, 이 비겁한 자식아, 잠시 기다려라."
치우천왕은 바삐 헌원에게로 말을 달렸다. 헌원의 졸개 몇이 치우천왕의 앞을 가로막았다. 치우천왕은 장검을 휘둘렀다. 칼날은 보이지도 않았다. 다만 허공에서 몇 차례 번쩍 빛을 발했을 따름이었다. 졸개들의 목이 땅바닥에 떨어져 나뒹굴었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치우천왕은 헌원을 다시 보았다. 헌원의 칼날이 거야의 목을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치우천왕은 말에서 몸을 날려 헌원의 칼을 거둬 냈다. 치우천왕은 공중회전 낙법을 써 착지했다.
헌원은 말 위에 거만하게 버티고 앉아 치우천왕을 향해 씩 비웃었다.
"폐하께서 애마를 놓치셨군. 그 상태로 나를 꺾을 수 있을까……."
치우천왕은 잠자코 칼을 축 늘어뜨리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의 몸짓이었다. 그러나 헌원도 무술에 일가견이 있는 이였다. 아무리 보아도 공격할 틈이 없다는 것을, 그가 모를 리 없었다.
헌원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치우천왕은 역시 무서운 사람이야……."
헌원은 비로소 치우천왕이 자신과 전혀 상대도 될 수 없는, 그런 경지에 이른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헌원은 잽싸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의 군대는 이미 망가진 뒤였다. 치우천왕의 장수들마저 자신을 에워싸 오고 있었다. 처참한 심정이었다. 자신은 다시 치우천왕에게 등을 보이고 탁록성을 향해 질주해야 될 터였다.
배달군과 헌원군의 이와 비슷한 전쟁이 10년간 70여 회에 걸쳐 계속되었다. 자존심과 탐욕의 싸움은 아주 모질고도 끈질기게 이어졌던 거였다.
이제 헌원은 몹시 지쳐 있었다. 더 이상 싸울 기력이 없었던 것이다. 헌원의 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여기서 주저앉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서토 중원에 이어 배달국을 평정하여, 천자의 꿈을 실현시키고자 목숨까지 내걸고, 그 동안 얼마나 많은 공을 들여왔던가.
헌원은 지금까지 패전의 원인을 면밀히 분석했다. 배달군은 무기와 전술이 탁월했다. 치우천왕의 운무작전도 아마 주된 패인의 하나일 터였다. 헌원은 병기를 더욱 세련되고 날카롭게 다듬었다. 돌틀과 활틀도 대량으로 제조했다. 거기에다 지남차(指南車)도 만들었다. 지남차는 항상 남쪽 탁록성을 향하는 전차였다. 치우천왕의 운무작전을 고려한 거였다. 그러나 헌원은 가장 중요한 것을 간과하고 있었다. 배달군의 가장 큰 무기는 다른 것이었다. 신선도와 치우천왕을 믿고 따르는 군사들의 정신력이었다.
헌원은 결국 마지막 항전을 치르기로 결심했다. 고양이에게 쫓기던 쥐가 벽에 몰리면 어쩐다던가. 뭐, 그런 거였다.
이번에도 배달군과 헌원군은 바로 지척에 대치하고 있었다. 일촉즉발이었다. 치우천왕은 헌원군을 향해 소리쳤다.
"헌원은 앞으로 나와라. 짐은 무고한 동족을 더 이상 살상하고 싶지 않다. 그러니 그대와 나, 둘이서, 겨루거나 담판을 짓자."
"치우야, 지남거로 무장한 우리 군사들을 보니, 겁이 나는 모양이구나."
"다시 이른다. 헌원은 앞으로 나와라!"
치우천왕은 헌원군 앞으로 말을 슬슬 몰았다. 부하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헌원도 할 수 없이 치우천왕을 따라 할 수밖에 없었다. 치우천왕과 헌원은 서로 마주보고 섰다. 치우천왕은 헌원을 달랬다.
"전쟁은 소수의 이익이나 헛된 명분에, 피아간의 많은 사람들에게, 불행을 안겨 주는 백해무익한 짓이 아니겠소. 게다가 되지도 않는 일을 억지로 추진하다 보면, 많은 무리수가 따르는 법이고, 종국에는 파멸의 길로 가게 되어 있지요. 헌원, 우리의 근본을 따져 보면 모두 한 형제나 다름없잖소. 난 다만, 형으로서, 그대가 진정으로 걱정이 되어서 하는 소리일 뿐이오. 그만 군대를 거두어 철수하오. 그리고 그대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요."
헌원은 자신의 부하들이 들을 수 있게 목청을 높였다.
"망아지 풀 뜯는 소리 좀 작작 하쇼. 난 절대 그렇게는 할 수 없소. 지금까지 잃은 병사가 얼마이며, 들인 공력이 그 얼마인데, 내가 여기에서 포기할 것 같소. 저승에 있는 부하들을 위해서라도, 내가 추진하는 이 일을 중도에서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오."
"그대가 언제부터 남을 위한 일을 추진하여 왔던가. 모두 그대 한 사람의 탐욕을 위한 억지가 아니었던가. 그대는 유망과 함께 우리 민족에게 아주 나쁜 선례를 남기고 있소."
헌원은 눈을 세모꼴로 만들었다.
"나쁜 선례라고?"
치우천왕은 목소리를 착 가라 앉혔다.
"바로 그대들 때문에, 앞으로 우리 민족의 많은 시련이 예상된단 말이오. 세월이 흐르면서, 자신의 민족을 배반하는 무리들이 도처에 창궐할 거라는 뜻이오. 먼 훗날, 그대들이 그들의 명분을 합리화시켜 줄 터이오. 내 앞에서도 지적했다시피, 한 사람이나 소수의 탐욕을 위해서 말이오. 결국에는 여러 이민족들이 그들을 앞잡이 삼아, 우리 동이족을 침략하여, 탄압하는 사례가 줄줄이 계속될 지도 모르는 일이오. 유망과 그대는, 지금까지 자신도 미처 모르는 사이에, 조상과 민족 앞에 엄청난 죄를 짓고 있었던 것이오."
헌원의 목소리는 한껏 높아졌다.
"교묘한 감언이설로 나를 꾀려 하지 마시오. 내가 만약 그대의 말을 따른다면, 우리의 백성들은 결국 당신네들의 노예로 전락하고 말 것이오."
치우천왕은 안타까운 표정이 되었다.
"그대는…… 진정…… 가엾은 인간이구려……."
"누가 할 소리!"
"헌원, 이제 그만 정신을 차려요. 그대는 일흔 번이 넘게 전투를 치러 왔지만, 배달군에 한 번도 승리한 적이 없잖소."
헌원은 말머리를 돌렸다.
"이번 한 번만 확실히 이기면 돼. 치우, 끝이 중요한 게 아니겠소. 하면, 역사는 그대와 나를 어떻게 기록할까?"
치우천왕도 기수를 틀었다.
"그대는…… 정녕…… 구제 불능의 인간이구려……."
치우천왕과 헌원은 거의 동시에 총공격 명령을 내렸다. 치우천왕은 예의 그 안개와 구름을 불러왔다. 우릉우릉 천둥이 치고 번개가 번쩍번쩍 하늘을 갈랐다. 비마저 세차게 쏟아졌다. 그것들은 삽시간에 헌원군을 덮쳐 들었다. 헌원군 쪽에서 보면, 꼭 귀신이 제문을 읽고 곡을 할 노릇이었다. 그것을 직접 목도해 온 사람들은 절대 우연의 일치만은 아니라고 판단되었다. 어쩌면 저렇게 참전하는 족족, 기후가 치우천왕 편에 유리하게 작용하는가 싶었다. 하면, 치우천왕의 신통술일 수밖에 없다고 결론지어야 했다. 헌원군은 그것이 마치 자신들의 죽음을 재촉하는 하늘의 계시로만 여겨졌다. 최후의 전투를 치르겠다고 만반의 준비를 해 온 헌원군이었지만, 애당초 사기는 말이 아니었다. 헌원의 병사들은 그 자리에 말뚝처럼 붙박여 버렸다.
헌원은 장검을 빼어 들고 외쳤다.
"겁먹을 필요 없다. 이제 우리에겐 지남거가 있다."
헌원군은 그제야 힘을 조금씩 회복해 갔다. 그들은 지남거를 앞세우고 배달군에 돌진해 들었다. 지남거는 자신들의 예상보다도 성능이 좋았다. 지남거에서는 화살과 돌이 쉴 새 없이 배달군을 향해 날았다. 헌원의 칼이 두려워, 죽음을 각오하고 달려드는, 헌원군도 만만치 않았다. 한동안 배달군과 헌원군 사이에 밀고 밀리는 접전이 계속되고 있었다.
치우비는 아무래도 이번이 헌원과의 마지막 전투일 것만 같았다. 치우비는 이참에 적장의 목을 베어 자신의 위치를 회복하고 싶었다. 치우비는 적진 깊숙이 뛰어 들었다. 치우비는 헌원의 앞을 떡 가로막았다. 헌원은 순간, 자신의 진중에 든 치우비를 치우천왕으로 착각했다. 헌원은 운무에 가려 앞이 잘 보이지 않았고, 무엇보다 둘의 용모가 비슷한 때문이었다.
헌원은 잘됐다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저자만 쓰러뜨리면 승리는 갈 데 없이 자신의 것이었다. 무엇 때문에 단신으로 여기까지 왔단 말인가. 자신의 곁에는 풍후와 역목도 있었다. 헌원의 얼굴로 냉소가 어렸다.
"어리석은 놈…… 오늘이, 네 제삿날이다……."
치우비는 온 힘을 모아 헌원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헌원은 사력을 다해 치우비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그때였다. 풍후와 역목이 헌원을 도와 치우비를 공격해 들었다. 치우비의 칼이 헌원의 목에 떨어지는 순간, 풍후의 철퇴는, 치우비가 탄 말의 다리를 박살 냈다. 치우비는 크게 휘청였다. 그와 동시에, 역목의 칼이 치우비의 목을 잘랐다. 치우비의 잘린 목은 땅바닥에 떨어져 통통 튀었다. 치우비의 몸통도 곧 말에서 떨어졌다.
헌원은 기쁨에 넘쳐 소리를 질렀다.
"치우놈은 죽었다! 배달군을 한 놈도 남기지 마라!"
헌원군은 함성을 내지르며 배달군을 향해 돌진했다. 치우천왕이 죽은 것으로만 안, 헌원군의 기세는 대단했다. 단숨에 배달군을 비질하듯 쓸어 낼 것도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멀리서 치우천왕의 호령이 들렸다.
"짐은 아직도 여기에 건재하다! 헌원아, 잠꼬대는 그만해라!"
헌원은 제 자리에 우뚝 섰다. 헌원은 뒤돌아 가, 말에서 내려, 쓰러진 자를 확인했다. 시신의 주인은 치우천왕이 아니었다. 전쟁을 할 때마다, 자신의 앞에서 어른대던 그 치우비였다.
헌원은 거의 신음 소리를 내었다.
"이런, 빌어먹을……."
헌원은 망연자실하여 멍청히 서 있었다. 어디선가 일진 광풍이 휘몰아쳐 헌원군의 지남거를 전복시켰다. 그것은 이어, 헌원군을 휩쓸고 갔다. 운무가 짙어졌고, 비는 더욱 세차게 쏟아졌다. 헌원군은 당황하여 저희들끼리 싸우기 일쑤였다. 그들 사이로 배달군의 돌과 화살이 무수히 쏟아져 내렸다. 헌원군은 썩은 고목처럼 푹푹 고꾸라졌다.
헌원은 이제 발악을 하다시피 했다.
"저 치우놈에게, 또 속고 있다. 모두 이 지역에서, 일단 후퇴하라."
비가 그쳤다. 구름과 안개도 서서히 걷히고 있었다. 헌원의 눈앞에 자신의 적나라한 실상이 펼쳐졌다. 지남거는 모두 망가져, 하늘을 향해 하나 둘 남은 다리를 치켜들고, 벌떡 누워 있었다. 대부분의 부하들은 죽거나, 다쳐 신음 중이었다. 지남거와 신무기 제조도 모두 허사였다. 치우천왕의 앞에서 그런 것들은, 겨우 장난감에 불과했었던 것이다. 비참한 기분이었다.
헌원은 치우천왕을 도끼눈으로 찍어 보며 치를 떨었다.
"치우, 네 이놈……."
헌원은 주위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확실히 진 전투였다. 어디로 보나 재기불능이었다. 그렇다 하여 천하를 꿈꾸던 자가, 여기서 그냥 무릎을 꿇을 수는 없는 일이라 생각되었다. 헌원은 이를 꽉 악물었다. 그는 장검을 휘두르며 치우천왕을 향해 돌진했다. 풍후와 역목이 그의 뒤를 따랐다.
배달군 쪽에서 소호와 거야가 달려가 그들을 막아내었다. 피아간에 막상막하였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헌원 쪽이 먼저 힘에 부치는 모양이었다. 그들은 조금씩 뒷걸음질을 쳤다. 곧 소호의 칼이 풍후의 목을 날렸다. 이어 거야의 창에 역목의 심장이 관통했다. 그들의 싸움을 조용히 관전하고만 있던, 치우천왕이 배달군을 향해 소리쳤다.
"헌원군을 남김없이 없애되, 누구든 항복을 하는 자는, 살려줘라."
배달군의 본격적인 적군 사냥이 시작되었다. 헌원군은 기왕에 전의를 상실한 뒤였다. 그래도 혹시나 하고, 마지막 희망을 걸었던 자신들의 지남거가 전복되면서부터 였다. 헌원군은 이제 제대로 대항도 못하고 등을 돌려 슬금슬금 도망쳤다. 배달군은 헌원군을 바짝 추격했다. 헌원군 중에서 스스로 무릎을 꿇어, 목숨을 구걸하는 자가 하나 둘 늘어가기 시작했다.
헌원은 사위를 둘러보았다. 부하들의 시체가 즐비했다. 믿었던 풍후와 역목마저 치우천왕도 아닌, 소호와 거야에게 힘없이 패했다. 헌원은 이제 혼자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그런 생각과 함께, 갑자기 사지에 힘이 빠져 달아났다. 마지막 남았던 기마저 풀풀 풀어져 어디론가 숨은 모양이었다.
헌원은 마음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 치욕의 현장에서 잠시 물러났다가, 기회를 봐, 한 번 더 도박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헌원은 얼마 안 남은 부하들을 칼을 휘둘러 모아 후퇴를 시작했다. 헌원은 부하들을 이끌고 얼마간 정신없이 달렸다. 그러다 깜짝 놀랐다. 자신의 바로 코앞에서 치우천왕이 떡 버티고 있었다. 치우천왕은 자신의 퇴로를 알고, 미리 와, 차단한 거였다. 헌원은 황급히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치우천왕은 헌원에게 담담히 말했다.
"내 그대를 기다리고 있었소. 이제 우리 둘이서 겨뤄야겠군."
외통수였다. 헌원은 피할 도리가 없었다. 치우천왕의 뒤에는, 자신의 부하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배달국의 엄청난 군사들이 떡 버티고 있었다. 소호와 거야를 비롯한 배달국 군사들의 입가에는 비웃음마저 담겨 있었다.
헌원은 머리를 재빠르게 회전시켰다. 치우천왕에게 다시 한 번 목숨을 구걸한다…….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치우천왕도 이제는 더 이상 속지 않을 것이다. 하면? 그렇다! 사나이답게 죽음을 택하는 일이다. 헌원은 자폭을 하는 심정으로, 두 눈을 질끈 감고, 치우천왕 앞으로 돌진해 들었다. 치우천왕은 속수무책으로 달려드는 헌원을 칼등으로 쳤다. 어깨를 맞은 헌원은 즉시 말에서 굴러 떨어졌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다. 헌원의 의식은 제 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헌원은 몽롱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치우천왕과 그의 군사들이 어슴푸레 보였다. 헌원은 이 모든 게 꿈이 아닌가 싶었다. 그는 천천히 몸을 움직여 봤다. 어깨가 떨어져 나갈 듯 아팠다.
헌원은 참담한 심정으로 무릎을 꿇었다.
"졌소, 날 죽이시오. 더 이상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지는 않겠소."
헌원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리고 자신의 목에 떨어질 치우천왕의 칼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헌원의 눈앞에 많은 일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었다가는 사라져 갔다. 고아로 성장하여, 유망을 없애고 천하를 거머쥐고자, 얼마나 애썼던가. 그런데 그 결말이 바로 이것이었다.
헌원의 눈가에 눈물이 질금거렸다. 그는 이를 악물어 막 터지려는 오열을 참아 내었다. 도대체 어디서 무엇이 잘못되었단 말인가. 그렇다, 모두가 저 치우천왕 때문이다. 헌원은 자신의 진정한 적은, 바로 자신이었음을,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헌원은 눈을 부릅떠 치우천왕을 노려보았다. 치우천왕의 입가에는 미소가 어려 있었다. 헌원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몰랐다. 치우천왕은 왜 칼등으로 자신의 어깨를 쳤을까. 이는 잡은 쥐를 가지고 놀겠다는 고양이의 심보가 아니겠는가. 곧, 치우천왕의 칼날이 자신의 목을 자를 거였다. 그래서 치우천왕이 저기, 저렇게 버티고 있었던 게 아니던가. 헌원은 다시 눈을 감았다. 그의 머리 위로 칼바람이 휙 스치고 지나갔다. 헌원은 부지간에 자신의 두부(頭部)를 만져 보았다. 머리칼만 잘려 나간 거였다. 헌원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했다.
헌원은 치우천왕 앞에 오체를 던졌다.
"치우천왕 폐하, 이 죄인을 죽여주시옵소서."
치우천왕은 말에서 내려 헌원의 손을 잡았다.
"헌원, 그만 일어나오. 내 지금까지 오늘이 있기만을 기다렸소. 그대는 개과천선하여 유웅국의 제후를 맡으시오. 이제부터는 사리사욕을 버리고, 제후국의 백성들을 위해 힘써 주오. 또한 소호장군은 할 일을 다한 것 같소. 경을 탁록국의 제후로 임명하오. 한동안 시끄러웠던 서토가 평온해졌으니, 이제 모두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이오. 누구 불만이 있소."
헌원은 몸을 추슬러 무릎을 꿇었다.
"천왕폐하, 성은이 망극하여이다."
소호가 한 발 앞으로 나가 읍을 했다.
"폐하, 신 제후국의 제후로서 신명을 다하겠사옵니다."
"그만 들 자신의 성으로 돌아가도록 해요."
헌원과 소호는 합창을 했다.
"치우천왕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헌원과 소호는 각자 자신의 성으로 떠났다. 치우천왕은 적진에서 용감하게 싸우다 죽은, 조카 치우비의 시신을 거둬 성대히 장사 지내고, 양지 바른 곳에 묻어 주었다. 그 앞에 공덕비도 세우도록 했다. 치우천왕은 군사들을 거둬 배달국으로 철수했다. 이제 환웅천왕이 하던 대로만 하면 될 거였다.
헌원과 소호는 어느 제후국의 제후보다도 배달국에 열성이었다. 그들 제후국에 어떤 특별한 일이 발생하면, 지체없이 배달국에 보고하고, 그 해결책을 치우천왕에게 물었다. 그들은 삼신을 위한 제천행사에 게을리 함이 없었으며, 화백회의도 올바르게 행했다. 수증복본을 위한 수행에도 열심이었다. 대효·창힐과 같은 제후들처럼, 그들은 민심을 얻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말하여 그들은 완전히 배달국 신계의 사람이 된 거였다. 특히 헌원은 서토에서 강력하게 부상하는 반란군 제곡고신을 자청하여 무찔렀다. 이로써 헌원의 충성심은 유감없이 발휘된 거였다. 이제 서토는 완전히 배달국의 손안에 들었다. 어쩌다 간간이 제곡고신과 유사한 반란이 있었지만 헌원과 소호가 앞장 서 그들을 토벌했다. 치우천왕이 내심 기대했던 바, 그대로였다.
단기 앞 2708년 10월 3일이었다. 이는 치우천왕의 재위 109년이 되던 해였으며, 그의 나이는 151세였다. 치우천왕은 거의 식음을 전폐하고 기도에 들어 있었다. 이번 치우천왕의 기도는 자신의 생전에 지은 죄를 삼신에게 빌기 위함이었다. 치우천왕은 제후국들의 위협이 계속되는 어려운 시기에 왕위를 물려받았다. 아마도 그게 비극의 씨였을 터이다. 다른 한편으로 보면, 시대가 그런 인물을 요구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치우천왕은 배달국을 요지부동한 반석 위에 올리기 위하여 끊임없이 전쟁을 치러야 했다. 그 과정에서 엄청난 사람들을 이승에서 떠나 보낼 수밖에 없었다. 치우천왕은 직접 수많은 동족도 살해했다. 치우천왕의 가슴 한복판으로 가끔 회한이 물밀 듯 몰려들었다. 그들의 가족은 지금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치우천왕은 피치 못할 사정이었다고, 스스로 돌려 생각해 보지만, 아무래도 살인은 살인이었다. 거기에 어떤 명분도 더하여 붙일 수는 없었다. 게다가 자신은 죽어 가는 생명도 되살려야 할 임무가 있는 신선도인이었으며, 배달국의 국시는 다름 아닌 홍익인간이었다. 그런데 자신은 종주국의 이익만을 생각하여, 반대 세력을 창칼로 탄압한 것이 아닌가 하는 자책이 들었다. 무슨 악업으로 이승에 왔기에 그랬는지 진정 모를 일이었다. 아니…… 그런 무리들을 방치하였더라면……? 더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고 고통을 받지는 않았을까……? 하지만 말이다……! 아, 그래…… 좀 더 좋은 방법은 없었을까……? 치우천왕은 서토를 평정하고부터 번민에 몸을 떨었다. 하여 치우천왕은 생의 마지막 백일기도를 하기로 결심한 거였다. 치우천왕은 매일 새벽에 일어나 목욕재계를 했다. 치우천왕은 떠오르는 해를 향하여 백 번 절하고, 무릎을 꿇어 향불을 살랐다. 전쟁에서 죽은 원혼들을 위무하기 위함이었다. 백일을 하루 같이 그랬다. 오늘이 그 마지막 날이었다. 동시에 자신의 삶을 끝막음하는 날이기도 하였다. 치우천왕은 진작에 그것을 알고 있었다.
치우천왕은 운사(雲師)의 부축을 받아 비척거리며 궁궐로 들었다. 거기에는 백관이 모두 모여 있었다. 웅씨국에서 한동안 비왕의 임무를 맡아보고 있던 치우천왕의 장자 치액특도, 부친의 부름을 받고 와 있었다. 치우천왕은 맏아들을 보자 참으로 반가웠다. 10년 만이었다. 벌써 아들의 나의 28세였다. 치우천왕은 늠름하게 장성한 치액특을 다시 보았다. 치우천왕은 모든 시름이 놓이는 듯했다. 치우천왕은 용상에 앉아 아들에게 미소부터 던졌다.
"치액특, 이리 가까이 와라."
치액특이 부친의 앞으로 나갔다.
치우천왕은 맏아들의 손을 잡았다.
"내 이제 그만, 너에게 왕위를 물려 줄 때가 온 모양이다."
"아바마마,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이옵니까?"
"오늘이 나의 임종일이다……."
"아바마마……."
치우천왕의 몸은 옆으로 비스듬히 기울었다.
"지금 어디서 누군가가 날 부르고 있어…… 헌데 알 수가 없군…… 너무 희미해…… 아마도 한밝산 높으나 높은 곳에 날아올라, 이 땅의 삼신을 주관하시는, 그 마고대신님은 아닐 터이지……."
치액특은 부친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아바마마, 고정하시옵소서."
치우천왕은 희미하게 웃었다.
"나의 피는 무척이나 더럽혀져 있을 테니까. 그런 영혼을, 저 순결한 한밝산이 받아 주겠어……. 아니야, 항상 어디서나 희생양이란 필요한 것이지……. 하여, 나도 삼신님에게 제사를 지낼 때면 늘 희생을 받쳤지……. 그래, 그것만은 삼신님께서도 받아 주셨어……. 아들아, 너만은, 날 피에 굶주려 날뛰었던 야차가 아니라,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고 기억해 주면 좋겠다……."
이번에는 치우천왕의 전신이 앞으로 쏠렸다. 안면과 손에 심한 경련이 일고 있었다. 호흡도 몹시 거칠었다. 치액특은 양팔을 벌려 부친을 안았다.
"아바마마, 정신을 차리옵소서……."
치우천왕은 단전에 힘을 모아 자세를 바로 했다.
"운사는 들으시오. 내, 오늘 부로, 장자에게 왕위를 양도하겠소. 이제 웅씨국 비왕 치액특은 배달국 15대 천왕이오. 오늘부터 시작될 제천행사가 끝나는 대로, 운사의 주관 하에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게, 황제 즉위식을 치러, 만방에 배달국 천왕의 권위를 세우게 하시오."
"천왕폐하, 분부 받들어 거행하겠나이다."
"운사, 또 있소."
"폐하, 어떤 영이옵니까?"
"소도터 한편에 지금 즉시, 마른 장작으로 단을 쌓게 하시오. 내가 죽으면 그 위에 올리고 불을 지르시오. 난, 동족을 살육한 인간이오. 그것도 아주 많이……. 한웅천왕님 시절부터 죄가 많은 사람은 태워, 그 죗값을 치르고, 죄의 흔적이 이 세상에 남지 않도록 했잖소……."
운사는 부복(俯伏)을 했다.
"항공하옵니다, 폐하. 제발 그것만은 거두어 주시옵소서."
백관이 모두 엎드려, 운사가 한 말을 복창했다. 치액특은 치우천왕을 붙들고 하염없이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치우천왕은 눈을 부릅떴다.
"운사는 날 힘들게 하지 말고, 내가 말하는 대로 따르시오. 거기에는 속죄의 뜻 이외에, 나의 소망도 하나 담겨 있소. 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죽 생각해 왔던 것이오. 나의 혼은 연기를 타고 저 하늘로 올라가 별이 될 생각이오. 그래서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어디서건 한민족을 침략하려는 기운만 일면 어김없이 나타날 것이오. 그 혜성은 구부러진 꼬리가 달렸을 터인즉, 그것이 가리키는 곳에, 틀림없이 적군이 있을 것이오. 미리 알고 대비를 하시오. 만약 그들이 침공하여 우리 민족이 어려운 상황에 처하면, 나는 배달족 군사들의 몸에 강림하여, 적을 물리치도록 도울 터이오."
치우천왕의 몸은 다시 흐트러져 가고 있었지만, 목소리만은 또랑했다.
"모든 일에는 흥망성쇠가 있는 법. 하지만 한배달족은 앞으로 어떤 어려운 일이 있어도, 결국은 저 한밝산 터를 중심으로 영원무궁할 것이오. 왜냐하면 삼신님이 돌볼 것이며, 저 하늘에 내가 버티고 있기 때문이오."
주위는 조용했다. 아니, 숙연했다. 만약 치우천왕이 신선도를 수련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그가 150세를 넘게 장수할 수가 없었을 뿐더러, 이렇게 정신을 차려 자신의 하고 싶은 말들을 논리적으로 남에게 옮길 수도 불가할 터였다. 이제 치우천왕은 혼신의 힘을 모아, 마지막 안간힘을 다하고 있었다.
"운사, 제천행사는 늘 하던 대로 하시오. 오늘 삼신님의 경배에 최선을 다하란 말이오. 그리고 모두 모여, 먹고 마시며, 노래하고 춤을 추시오. 죽음은 어쩌거나 새로운 탄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소. 여러분의 앞에 천왕이 또 나타났고, 저 하늘에는 별이 하나 더 추가되잖소."
치우천왕은 끝으로 남은 진기마저 다 써 버렸는지 축 늘어져 버렸다. 입멸에 든 거였다. 백관은 치액특을 따라 통곡을 터트렸다. 그러나 울고만 있을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치우천왕의 유언을 이행해야 했다.
운사는 오늘 저녁에 치우천왕의 장례식을 치르고, 내일 아침해가 떠오르는 시간에 맞춰,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기로 하였다. 그 나름대로, 뭔가 의미가 있을 듯 싶어서였다. 운사는 치우천왕의 명대로 음울한 장례식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여는, 축제의 한마당이 되도록 배려했다.
운사는 특히 이번 행사만은, 그 어느 때보다도, 성대하게 치를 생각이었다. 기실 치우천왕은 천수를 모두 누렸다. 업적 또한 대단했다. 치우천왕은 역대로 가장 넓은 영토를 소유한, 명실상부한, 황제였다. 치우천왕의 탁월한 전쟁 수행 능력으로, 한반도와 중원 땅 거의 전부가, 배달국의 강역에 포함되었던 것이다. 망자는 이 나라의 역사에, 길이 남을, 인물이었다. 이제 붕어 했다 해도, 그는 여한이 없을 터였다. 말하자면 호상 중의 호상이었다.
운사는 인접한 제후국들의 비왕과 고급관리를 초청했다. 배달국의 악사들도 불렀다. 제수용품과 제물들을 정성껏 준비했다. 소도단 한쪽에는 의식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위한 음식과 술동이가 즐비했다. 운사는 장작으로 제단을 만들어, 그 위에 염을 마친 치우천왕의 시신을 조심스럽게 올렸다.
소도단에는 시간의 지남에 따라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얼마 후, 해가 한밝산으로부터 길게 늘어진 한 산등성이 너머로 잠기어 들었다. 어둠이 미세하게 대지를 감싸 왔다. 때에 맞춰, 운사는 치우천왕을 눕힌 제단에 불을 붙이도록 명했다. 신지는 자신이 쓴 제문을 읽었다. 그것은 삼신에 대한 찬양과 치우천왕의 유언이 주가 되어 있었다.
마른 장작은 탁탁 소리내어 울며 타올랐다. 곧 장작 무더기와 치우천왕은 불길에 휩싸였다. 불길은 신명지게 화무(火舞)를 하고 있었다. 그에 따라, 어둠이 조금씩 뒷걸음질 쳐 도망치고 있었다.
운사의 주관 하에, 삼신께 제물을 올리는 폐백까지 마쳤다. 이어 천지를 진동시키는 풍악이 울려 퍼졌다. 선녀 복장을 한 무희들이 악기에 맞춰 춤을 췄다. 제사에 참석한 사람들은 어깻짓을 하며 박수를 치고 노래도 불렀다. 그들 중에는 저만이 갈고 닦은 기예를 한껏 뽐내 보이는 자도 있었다.
아무튼 치우천왕의 유언에 따라, 제천의식은 바야흐로 흥성스럽게 무르익어 갔다. 벌써 시간은 삼경을 넘기고 있었다. 제단의 불길은 시나브로 사위여 갔다. 어디선가 한바탕 거센 바람이 휘몰아쳤다. 안간힘을 쓰며 끝까지 버티던 불길은, 갑작스럽게 가뭇없이 사라져 버렸다.
검은 제단에서 뭔가 허연 것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그것은 서서히 사람의 형체를 갖춰 가고 있었다. 제천의식에 참석한 사람들은 웬일인가 싶어, 그 자리에 우뚝 서, 모든 동작을 멈췄다. 그들은 눈동자를 키우며 자세히 보았다. '허연 것'은 어딘지 치우천왕의 생시 모습과 아주 흡사했다. 그것은 잠시 제단을 돌며 우쭐우쭐 춤을 추더니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와 동시에, 천공(天空)에 한 혜성이 긴 꼬리를 끌며 나타났다. '허연 것'은 그쪽으로 날아가 하나가 되어 버렸다. 백성들은 생각했다. 치우천왕은 죽어서도 자신의 약속을 지킨 것이라고. 그래, 치우천왕은 이 땅의 전쟁으로부터 언제나 지켜 줄 신이 된 거였다. 백성들은 저마다 하늘을 향해 절을 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배꼽 저 밑바닥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오열을 삼켰다.
백성들은 제 목청을 다하여,
"아, 우리의 치우천왕이시어! 만세! 만세! 만만세!"
라고 외치며, 몸을 일으켜 세울 줄을 몰랐다. 갑자기 돌풍이 불며 지축이 흔들렸다. 한밝산 여기저기서 각종 짐승들이 서럽게 울부짖었다. ■
첫댓글 다 모았다가 잠 안올때 읽을께요, 좋은글 올려주심 캄솨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