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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도란 |
위치 : 경남 거제시 장목면 시방리 면적 : 3,7597㎡ (유인도 11개 중 9번째로 작은 섬이다.) 크기 : 해안선길이 3.7㎞, 최고점 77.8m 인구 : 2010년 53세대 124명 (어촌계원40가구)
이물도(利勿島)·학섬이라고도 한다. 거제시 장승포항에서 북쪽으로 11㎞, 거제도 시방리 해안에서 동쪽으로 600m 해상에 위치한다. 이수도는 시방, 흥남과 함께 시방리로 되어 잇다. 이수마을 본래 이물섬(利勿島) 즉 시방(矢方)을 향하여 날아갈 형국이라 학섬이라 하였는데, 뒤에 대구어장의 산란해역으로, 또한 일본인의 멸치잡이 권현망이 들어와 부자마을이 되자 바닷물이 이로와 이수(利(水)로 바꾸었다.
섬의 형태가 두루미(학)을 닮았으며, 본토 쪽으로 뻗은 반도의 남쪽과 북쪽에 완만한 만입(灣入)이 있는데, 이곳에 사빈(砂濱)이 형성되어 선박이 쉽게 정박할 수 있다. 취락 역시 이곳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나머지 해안은 모두 암석해안으로 곳곳에 해식애가 발달하였다. 구릉이 많고 평지는 10% 정도에 불과하다. 주요 농산물은 옛날에는 논이 있었으나 지금은 폐농이 되고, 약간의 언덕에 밭을 일구어 고구마, 마늘도 생산한다. 그러나 그 규모가 매우적다.
이수도 어업은 해방 전 ‘마수기’, ‘마스시끼’ 란 사람들이 정치망과 기선저인망 어업을 하던 곳이데, 그 후 우리나라 사람이 인수받아 운영하고 있다. 이수초등학교 앞의 어장막은 세양수산소속으로 박정호씨가 운영한다. 이수도 어장은 1970년대까지만 하여도 물반 고기반 이었으나 지금은 어장이 좋지 못하다. 그러나 거제도 다른 곳에 비해서는 다양한 고기가 잡히는 곳이다.
주변 해역은 대구의 산란해역으로 난해성 어류가 많지만 겨울에는 한해성 어류도 회유한다. 멸치, 갈치, 고등어, 도미,·대구, 도다리, 아귀, 물미기 등이 많이 잡히며 자연산 김·미역·굴 멍게 등도 있다. 섬 내에서 고려시대 토기 다수와 신석기시대 토기 1점이 발굴되었고, '방시만노순석(防矢萬弩循石)'에 얽힌 전설과 8·15광복 직전에 앞바다에 가라앉았다는 일본의 보물수송선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수도는 식당이 없으며 작은 슈퍼가 있음, 낚시점 없음, 모기가 좀 있음, 바람이 심하다. 일주 도로가 불편하여 운동화가 필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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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도 안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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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도 관광포인트 |
이수도는 개발이 되지 않아 자연그대로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아직 둘레길도 없으나 희미한 염소길을 가다보면 그런대로 갈만하다. 이수도 관광 시 꼭 가보아야 할 곳은?
거가대교 사장교와 흰여삼형제섬 조망/ 여름 해산물채취/ 방시만노순석/ 이수도 패총/수도초등학교 및 어장막 둘러보기/ 해안절경 구경하기 / 낚시 및 어촌체험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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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도 개발계획 |
이수도와 행정안전부가 선정한 '찾아가고 싶은 섬'으로 선정
-사업기간: 2013~2016 -예산 28억 (국비20억,지방비5억,민자3억) -사업내용: “ 사슴이 살고 있는 섬”이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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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건수의 이수도답사기 |
오랜만에 이수도를 찾았다. 이수도를 가려고 하면 시방에서 도선을 타야한다. 도선은 08:00분부터 118:00분까지 2시간마다 다닌다. 시방 선착장에는 그물 일을 하는 외국인 근로자 4-5명을 만날 수가 있었다. 언제 인지는 몰라도 우리나라에는 3D 업종에 외국인 근로자가 대부분 차지하고 있다. 시방에서 이수도 까지는 도선으로 약7분 걸리는 가까운 거리다. 이수도 선착장에 내리니 부둣가에서 그물을 손질하는 어부들이 있다. 요즘은 별다른 고기가 잡히지 않는 철이기 때문에 이때를 맞아 그물손질을 해야 한다고 하였다.
다시 몇 걸음 걸어가니 이수도 초등학교가 나온다. 1970년대 까지는 이수도 인구도 700여명에 달하여 학교의 규모가 굉장했으나 1980년 산업화 되므로 인해 인구도 줄고 학생 수도 줄어 더디어 2003년 폐교하고 말았다. 이수도 초등학교는 1942.3.2일개교하여 2003년 폐교할 때 까지 600여명을 졸업생을 배출했으며, 2대 교장은 김영삼 전직대통령이 맡기도 하였다. 이런 저런 회상을 하면서 학교 앞에 있던 ‘조개무덤’을 찾으려 했으나 지난 ‘매미’태풍 때 쓰러가고 지금은 시멘트 포장을 하여 그 흔적도 찾을 수가 없다.
동네 뒷길을 향하여 올라가노라니 이수도 마을과 함께 ‘해상콘도’ 즉 해상낚시터가 보인다. 겨울철인대도 불구하고 낚시꾼이 여러명 보인다. 조금 가노라니 염소 방목장이 보이고 곳곳에서 나를 반기는 듯 꿩들이 푸드득 푸드득 거리며 날아오른다. 몇 해 전 울릉도 식물탐사 같을 때 그 많던 꿩이 생각난다. 여기도 마찬가지 인듯하다. 어떤 연유로 섬에 살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지금은 꿩의 천국이다.
조금 더 걸어가니 탁 트인 바다가 눈앞에 펼쳐진다. 동쪽으로는 백도(흰여)삼형제가 망망대해에 외로이 떠있고 그 뒤로 가덕도와 등대가 시야에 들어온다. 어린 시절 부산을 가다 동머리 끝에서 파도를 만나 겁에 질린 생각이 떠오른다. 북쪽으로 낚시배들이 점점이 떠 있고, 저 멀리엔 거가대교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거가대교 현장을 한눈에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곳은 이곳이 최적일 것이다.
이수도를 둘러보니 방목한 염소의 천국이라 식물의 종류가 거의 없다. 염소들이 먹지 못하는 쑥, 억새들뿐이다. 해변가를 둘러보아도 해안가 식물들이 거의 없다. 아마 염소들의 피해가 아닌가 쉽다. 눈앞에 펼쳐진 황홀경에 취해 두어 시간 동안 보내다가 돌아왔다. 오면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곳을 유채(油菜)천국으로 만들면 아마 최고의 관광지가 될 것 이라고 생각을 했다.
선창에서 이수도 전어촌계장 박정배 씨를 만나 이수도에 대해 여러 가지 의견을 주고받았다. 현재 이수도는 40여 가구에 70여명이 살고 있으며 대부분 어업에 종사하고 있다. 가구당 연간 소득은 6,000만원-8,000만원 정도이나 이거저것 떼고 나면 별로 수익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이수도는 아직까지 다른 어촌에 비해 고기가 많이 잡이는 편이며 그런대로 어촌으로서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앞으로 이수도의 가구당 연소득을 높이기 위해 전복양식장을 추진 중에 있으며 부대사업으로 어촌체엄마을과 해상콘도 운영으로 복합어촌을 만들어 살기 좋은 어촌마을을 이룩하려고 모두 힘을 모우고 있다고 하였다. 이수도 섬 전체를 유채와 매화를 심어 관광지화 하는 방안에 대해 여러 가지 얘기를 주고받다가 돌아왔다. | ||||||||||||||||||||||||||||||||
이수도비석 이야기 |
< 부싯돌학당 카페지기 박정희선생님의 이수도와 시방 비석 이야기>
대금에서 고개를 넘어 외포 쪽으로 가다보면 섬이 하나 보인다. 좋은 물이 많이 난다 하여 利水島(원래는 '이물섬'으로 불렀던 것)라 부른다. 조그마한 섬에서 물이 좋고 또 많이 난다는 게 여간 신기한 일이 아닌데 지금은 어찌된 노릇인지 물이 귀하다는 인상을 준다. 기상 변동이 심한 시대 탓인지 몇 년 전 이수도에 갔을 때는 물을 구하기 어려워 분교 선생님이 받아두신 물로 겨우 점심을 지어 먹었다. 이수도는 대금산에서 내려다보면 학의 생김새를 닮았다고 해 '학섬'이라고도 한다. 이수도와 마주해 있는 언덕 마을은 矢方(흔히 '살방'이라고들 부르는)인데 마치 활을 쏘는 것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 이처럼 이수도와 시방은 학의 모습과 활을 쏘는 모양을 하고 있어 풍수지리로 볼 때 서로 겨누고, 막아야만 하는 운명 속에 놓여 있었다고 전한다. 그래서 지금도 두 곳을 이야기할 때면 으레 비석에 얽힌 사연부터 등장한다.
이야기는 조선 말엽쯤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원래 이수도는 주변이 황금어장이고, 물도 풍부하여 시방보다 훨씬 살기 좋은 마을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턴지 건너 마을 시방에 비해 고기도 덜 잡히고 살기가 어려워 진 것이다. 여건을 보자면 이수도가 더 잘 살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자 이수도 사람들은 시방을 질시했고 시방보다 잘 살기 위한 대책 마련에 나섰다.
때마침 풍수지리에 능한 도사가 나타나 말하기를 이수도의 학이 시방의 화살에 맞아 죽는 형국이라 이수도가 가난하므로 방패에 해당하는 비석을 세워 막으면 잘 살 수 있다고 일러 주었다. 그 말대로 이수도 사람들은 시방의 화살은 막는 방시순석(防矢盾石)을 마을 뒷산에 세웠다. 그러자 정말 이수도는 부자가 되었고 이번에는 시방 마을이 쇠락해져 가는 것이었다. 이수도에 비석이 서고부터 시방이 가난해졌다고 시방 사람들은 이수도의 비석을 부수려 했으나 이수도 사람들은 시방 사람들을 섬에 얼씬도 못하게 막았다. 그동안 다정하게 지내오던 두 마을은 이때부터 원수지간이 되었다.
고심 끝에 시방에서는 이수도의 비석을 뚫을 수 있는 쇠화살을 쏜다는 뜻으로 마을 앞에 비석을 세웠다. 이것이 지금도 남아 있는 방시만노석(放矢萬弩石)이다. '만노'란 쇠로 된 화살을 말한다. 이렇게 되자 처지는 다시 바뀌었다. 결국 이수도에서 쇠화살을 막을 방시만노순석(防矢萬弩盾石)을 원래의 방시순석 위에 덧세움으로써 오랜 분쟁은 일단락되었다. 더 이상 어리석은 싸움을 되풀이 하지 않으려는 일단의 깨우침과 함께 화의가 이루어진 것이다.
두 마을에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는 비석을 종이와 연필로 간단히 탁본을 해보며 시방과 이수도 사람들은 어떤 생각들로 두 비석을 보는지 궁금해졌다. 이제 그 어느 쪽도 많이 잡을 고기가 없는데... 후손들의 뇌리 속에 과거의 싸움은 어떻게 남아 있을까? 사람들은 떠나고, 더군다나 서로 탓하며 싸울 만한 힘을 가진 젊은이도 없는데...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이 어장을 빼앗아가 호경기를 누렸다는 이수도 해역은 70년대 까지도 대구가 지천이었다. 뿐만 아니라 갖가지 고기와 해조류가 널려 있었다는데 이제 모든 것은 옛말이 되었다. 한때 600명도 넘게 살았다는 이수도에서 지금은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찾기 힘들다. 교통도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외포중학교로 통학하는 아이들은 일기가 사나울 때면 통학선을 탈 수 없어 결석을 해야 한다. 섬사람들의 소망은 시방과 연결하는 다리를 만들거나 시방과 이수도 사이의 바다를 메워 길을 내는 것이다. 거리나 수심의 조건상 그렇게 불가능한 일도 아니라고 한다.
내가 이수도를 처음 찾았을 때는 이 섬에 대한 아무런 지식도 선입관도 없는 상태였다. 마을의 전설도, 해묵은 분쟁도, 지금의 처지도 아는 바가 없었다. 어쩌면 그래서 더 티 없이 섬에 안겨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섬은 맑으면서도 밝았고 한없이 다정하게 다가왔다. 오래전 내가 속해 있던 한 모임에서 이수도를 택해 가을놀이를 갔다. 배 시간이 남아 있어 시방 방파제에서 장난들을 하다가 섬으로 가는 배에 올랐을 때 배 안에는 마을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볕이 아직은 따가운 가을 오후. 우린 아이들처럼 환호하며 섬을 돌았다. 돌담집과 작은 학교. 그리고 바다... 들길에는 긴 풀들이 자라 있었다. 산에서 보는 억새와는 사뭇 다른 숱이 많고 짙은 색을 띤 풀이었다.
바닷가 포근한 곳에 텐트를 친 후 부지런히 나뭇가지를 주워 모았다. 밤새 모닥불가에서 노래를 했다. 기타 소리에 실리는 회한과 다짐, 뉘우침과 결의... 소주 대병이 비워지고 있었다. 그때는 80년대였고 나는 이십대에 걸쳐져 있었다. 밀물에 떠밀려 모닥불가 노래가 끝났을 때는 긴 밤도 지새운 후였다.
새벽이 가까울 무렵. 일출을 보기 위해 아직도 어두운 길을 나섰다. 풀섶에 발을 적시며 한참을 걸어 산등성이를 넘고 공동묘지까지 지나 바위절벽에 도착했다. 동터오는 시간 이 절벽 위에서 바다를 보지 않고 이수도를 이야기 할 수 있을까? 장엄함과 신비로움 따위의 한정된 표현으로는 오히려 그르칠 뿐이다. 세상의 어둠이 그렇게 걷힐 수만 있다면. 그렇게 빛이 찾아 온다면... 장대한 바다가 드러나고 그 위에 이미 그물을 내린 배들이 떠가는 모습을 우린 말 없이 바라보았다.
시방에는 200살도 더 된 팽나무가 있다. 잎이 무성한 종류는 아니지만 고된 일상을 누이게 하는 그늘은 충분하다. 지난 가을. 그날도 볕이 따가웠다. 그늘 밑에는 마침 어른들이 계셔서 이런 저런 살이를 기웃거릴 수 있었다. 멸치를 잡고 낮에는 그물의 흙을 터는데 일흔이 넘어도 그 힘든 일을 하는 것이다. 팽나무 옆 조그마한 간판이 내걸린 회사(?)에 소속(고용)되어 월급제로 일을 하고 있단다.
넓은 평상에서는 잔멸치를 말려 일일이 가린 후 '청정수역 멸치'라는 익숙한 상표의 상자에 담고 있었다. 시어머니와 젊은 며느리가 그 일을 하고 있 길래 거들었다. 바다에도 벌레가 있고 또 자잘한 다른 어종이 함께 잡혀 멸치만 따로 가려내야 했다.잠시 후 갈치를 트럭에 싣고 팔러 나갔던 아들이 돌아왔다. 100상자도 넘는 갈치를 장목 일대에 방송을 해가며 판 것이다. 젓갈용 갈치였기에 짧은 시간에 다 팔 수 있었던 모양이다. 멸치에다가 갈치까지. 보기와는 달리 꽤나 규모 있는 어장을 운영하는 듯했다.
그늘에서 쉬던 아저씨(할아버지)들이 구령(장단)에 맞춰 그물을 털기 시작했다. 그런 것도 도리깨질이라고 하는지. 카메라에 그 모습을 담으려니 아저씨들은 잘 찍어 달라며 폼을 잡으셨다. 웃느라고 사진을 제대로 못 찍을 지경이었다. 여유와 농담과 땀 그리고 먼지. 사진에는 나타날 리 없는 그 정경이 사진보다 더 선명히 남을 것이다. 새참으로 사온 아이스크림을 나눠 주시길래 맛있게 먹었다. 요즘에는 새참도 많이 달라졌다. 막소주나 탁배기가 아닌 경우가 많아진 것 같다. (2000년 어느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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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도 옛지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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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물섬이 한인물합니다,
이수도의 아름다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