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2.20. 월요일 KBS 1 라디오 "즐거운라디오안동입니다"에 소개할 이야기 자료<석보면 원리 두들마을>
1. 석보면 원리 두들마을 유래
석보石保는‘끝없는 복된 땅으로서 돌의 굳건함처럼 사람을 보존하는 곳’이라는 의미로 돌석石자에 보전할보保자로 '石保석보'라 하였으며, 원리는 조선시대에 광제원이 있었던 마을이어서 원리라하였고, 두들마을은 언덕위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입니다.
원리리(院里里) 두들마을은 동쪽에 영덕군 창수면과 남쪽에 지품면 토구리와 북쪽에 영양읍의 양구리를 연접하고 있습니다.
석보면 소재지 마을이며. 석보면행정복지센터ㆍ경찰서파출소와 석보초등학교ㆍ석보중학교가 있고 보건지소와 우체국ㆍ농협 등의 기관들이 있습니다.
이 곳에는 조선 시대에 지역민의 복지를 위한 광제원(廣濟院)이 있었습니다. 1640년 병자호란(丙子胡亂)을 당하여 이 곳에 자리를 잡은 석계 이시명 선생의 후손들이 모여 들어 재령 이씨 집성촌을 이루게 된 마을입니다. 지금은 60여호에 120명의 인구가 살고 있습니다.
마을앞에 흐르는 인지천(주남천) 가에 있는 언덕 바위에는 석계 선생의 아들인 항재(恒齋) 이숭일(李嵩逸) 선생이 새겼다는 세심대, 낙기대, 동대, 서대 등의 글씨가 유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한편 정부인안동장씨유적비가 마을의 앞 낙기대 언덕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조선조 선조 때부터 양반가 음식 요리에 관한 서책을 한글로 쓴 분이며, 詩, 書,畵, 음식,가정화목에 기여한 공로가 많아 여중군자로 불리어 오는 훌륭하고 자랑스러운 인물입니다.
원리(院里) 두들마을라는 명칭은 조선 시대 이 곳에 나라에서 세운 광제원(廣濟院)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들에 위치한 원이 있던 마을이라고 하여 원리두들마을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광제원은 사람들의 복리를 위하여 세운 것으로 주로 의료 문제를 효과적으로 풀기 위하여 둔 기관입니다. 조선조 고종 무렵에 세운 것입니다.
2. 석계 이시명이 터를 딱은 마을
두들마을은 퇴계 이황의 학맥을 이은 석계 이시명 (1590~1674) 선생이 1640년 터를 닦은 곳으로 훌륭한 학자와 시인, 독립운동가 등이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한국문학의 거장 이문열 작가의 고향마을 이기도 한 이곳에는 여산정사를 비롯하여 석계고택, 석간고택. 주곡고택. 석천서당 등 30여채의 전통가옥들과 한글로 쓴 최초의 음식조리서 '음식디미방'의 저자 여중군자 장계향 선생을 기리는 예절관과 유적비, 조선 후기 양반가의 전통음식을 맛볼 수 있는 "음식디미방체험관" "전통주체험관" 장계향문화체험교육원 등이 마을의 주산인 광려산 아래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마을 들머리에는 언덕밑에 주남천 (인치천) 흐르고, 마을 안산인 병암산 밑으로 화매천이라는 내가 흐르고 마을 앞에는 '섬들(섬모양의 농지)'있습니다.
시냇물이 산태극,물태극으로 굽이 돌아 산과 맞닿은 언덕머리에 자리했다하여 두들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합니다.
3. 두들마을 재령이씨'의현당'의 가훈
"가난한 사람을 구휼하고, 사회를 위하여 봉사하며 어려운 사람을 도우라"
"내 재산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길거리의 사람의 생명이다."를 강조하는 가훈입니다.
"지고 밑지며 살아라" "지고 살면 사람을 얻는다, 밑지고 살면 세상을 얻는다."는 가훈이 전해 지고 있습니다.
4. 두들마을에 있는 문화재
석계고택, 석천서당, 유우당, 석간고택, 주곡고택, 광록정, 만석꾼지지집, 병암고택 등이 있습니다.
5. 두들마을 8경
두들마을에는 아름다운자연경관 8경이 있습니다. 두들마을 8경은 광려산, 병암산, 낙기대, 세심대, 동대, 서대, 석천서당, 광록정입니다.
6. 석계고택
조선 인조,현종 때의 학자인 석계 이시명(1590-1674)선생과 정부인 안동장씨가 살던 집으로 석계선생은 안동에서 임종하였으나 정부인은 이곳에서 임종 때까지 살았습니다.
이 고택은 4칸 규모의 ㅡ자형 맞배기와집인 사랑채와 5칸 규모의 ㅡ자형 맞배기와집인 안채가 = 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전면에는 최근에 신축한 3칸 규모의 평대문을 세웠으며 주위에는 방형의 토석담장을 둘렀습니다.
사랑채는 중문칸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마구와 고방을 두고 우측에는 사랑방과 사랑마루를 두었습니다.
안채는 좌측으로부터 부엌. 안방. 대청. 상방이 연접해 있는데 안방옆의 마루 후면에는 판벽을 둘러 고방을 설치 하였습니다.
상방의 우측벽에는 상.하방 사이에 문꼴을 내어 문을 달았는데 밖으로는 세살문을 안쪽으로는 판장문을 설치 하였으며 안방에는 코쿨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안채 역시 가구는 삼량가의 간결한 구조입니다.
7. 石川書堂석천서당
석천서당은 1640년(인조18)에 영해에서 석보로 온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이 터를 잡고‘석계초당’을 지어 13년 동안 살았던 곳입니다. 1674년에 석계 선생이 안동에서 세상을 떠나자 1676년(숙종2)에 상을 마친 넷째 아들 항재(恒齋) 이숭일(李嵩逸, 1631~1698)이 고향으로 돌아와 선업을 이었습니다.
이숭일이 세상을 떠난 뒤 70여 년 만에 만와(晩窩) 이인훈(李仁壎)의 주도로 퇴락한 초당을 개축하여 ‘석천서당(石川書堂)’ 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선친인 이시명의 호 ‘석계(石溪)’를 피해서 ‘천(川)’자로 바꿔서 이름을 지었다고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1711∼1781)의 기문에 실려 있습니다.
좌해(左海) 이수영(李秀榮, 1809~1892) 의 『석천서당중수기(石川書堂重修記)』를 살펴보면 석천서당은 1891년에 다시 한 번 중수를 거쳐서 오늘날의 규모를 이루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8. 석간고택
영양석간고택은 석계 이시명 선생의 아들중 넷째 항재 이숭일의 후손인 좌해공 이수영이 후진양성과 강학을 위한 살림집인 정침과 독서공간인 정사이며 현재는 소설가 이문열의 생가로 유명 합니다.
좌해공 이수영은 1832년(순조32년) 석보면 화매에서 학문연마와 심신 수신에 노력하고,수양에 심혈을 기울리기 위해 형제들과 시를 짓고 유람을 하였습니다.
1852년(철종3년) 태백산에서 돌아온 이수영을 위해 문중형제와 친구들이 8칸(서실4칸,살림집4칸) 규모의 집을 지어 주어, 살았으나, 1859년 (철종10년) 산불이 나서 불타버렸습니다.
그 후 1883(고종20년)제자들이 이수영을 위해 원리리에 살림집을 지은후 강학할 수 있는 건물을 짓고 "여산정사"라고 명명하였습니다. 여산정사는 뒷 산인 광려산에서 이름을 따온 것입니다.
한국전쟁(1950년)이 끝난후 이문열의 조모가 집안 친척인 이철호에게 집을 팔고난뒤 여산정사는 석간정사 및 정침이라 하다가 문화재로 지정되면서 석간고택으로 이름을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석간고택은 사랑채.안채.고방채가 있다.살림집인 정침은 정면4칸,측면 5칸반 규모의 'ㅁ'자형 건물이며, 독서실인 정사는 정면3칸 측면1칸 규모의 맞배기와집입니다.
좌해공 이수영은 석계 이시명 선생의 넷째아들 항재 이승일의 7세손으로 1800년대 가학을 이어 정리하고 기록한 학자입니다.
석천서당,광록초당,남악정을 중수 하도록 했으며.저서로 좌해 유고9권과 부록2권이 있으며 -좌우명은 "공경함으로서 안을 바르게 하고 옳음으로 밖을 곧게 한다"입니다.
9. 유우당
재령인 이상도(1733-1835)가 건립한 가옥인데.장자인 이기찬의 호를 따라 당호를 유우당이라 하였습니다.
이 집은 원래 주남리에 있던 것을 후손인 이돈호가 현위치인 두들마을로 이건하였는데,이돈호는 파리장서 사건에 가담하여 독립운동에 이바지한바 있으며, 몽구 이병각시인의 생가이기도 합니다.
당초 'ㅁ'자형태였으나 이후 기능이 부가되어 '날개집'형태가 되었으며.사대부들의 예학사상과 엄격함.그리고 도덕성을 느낄 수 있는 고택입니다.
10. 주곡고택
경북도민속자료제114호96.12.5 지정된 고택으로 조선시대의 가옥,조선 중기의 유학자 '이도'가 지었던 것을 후손들이 순조30년 (1830)에 이곳으로 옮겨 지은 집입니다.
'ㅁ'자형 구조이며 사랑방의 편리를 위하여 다양하게 꾸민 벽장과 감실방,벽장 아래로 끌어 내릴 수 있는 널로된 제사상이 돋보입니다.
또한 부엌에 물을 담아 두고 쓰는 큰 독인 물두멍이 남아 있느며.경북북부지역의 전형적인 민가건물로 보기드믄 옛생활문화의 흔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11. 원리리도사댁 만석꾼집
1800년대 건립. 두들마을의 좌후측에 남향하여 자리잡고 있는데,인근에서는 이 집을 만석군집이라고도 부릅니다.
전면에 세운 3칸 규모의 평대문을 들어서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ㅁ자형의 정침이 자리잡고 있으며 정침의 우측에는 4 칸 반 규모의 초옥인 방아간채가 배치되어 있습니다.
정침은 정면 9칸.측면 5 칸 규모의 ㅁ자형 건물이다.사랑채는 중문칸의 좌측에 자리잡고 있는데,평면은 마루방을 중심으로 좌우에 1칸과 2칸씩의 온돌방을 연접시켰으며 전면에는 퇴칸을 두었습니다.
안채는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건너방과 안방을 연접시켰으며 안방의 전면에는 부엌을 연접시켜 우익사를 이루게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