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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속에 사라진 반공소년 이승복 사건 전모 나는 학교에 근무하면서 반공소년이승복 사건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잠시 도덕과목을 가르치기는 했어도 교과서에 이승복 사건이 실려있지 않아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정녕을 하고 폐교를 다니다 보니 학교마다 이순신동상과 독서상 그리고 이승복 동상과 마주치곤 했다. 그러나 별 관심 없이 지나쳐 버렸다. 잠시 뉴스에 이승복사건 조작설이 있기는 해도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 TV조선에서 그 당시 취재했던 기자가 나와서 설명을 하기에 인터넷을 서핑하여 아래 자료를 올려본다. (2012.11.1. 다음아고라 자유토론방)
1968년 3월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로 갔다. 1968년1월21일 북한 124군부대의 정예부대 31명이 청와대 기습작전을 펴 성공하지 못하고 김신조 1명이 생포되고 나머지 30명은 전원 사살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68년1월23일 푸레불로호납치사건 등 80여건이 있어 남북 극한대립상태였다. 그 중에서 1968년 10.30~11.2 3차에 걸쳐 북한124군부대 126명이 침투하여 109명이 사살되고 7명이 생포되었다. 국군은 38명이 전사하고 64명이 부상당했으며 민간인23명이 피살되었다. 정말 어마어마한 대사건이었다.
이 와중에 1968년 12월9일 일어난 사건이다. 국군이 남파공작원들의 침투를 11월2일 인지하고 소탕작전을 벌리던 중 일어난 사건이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기사 참조바람....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가는 것은 6.25전쟁도 북한이 일으켰으며, 천인공노할 도발도 북한이 200여차례 일으켰다. 그리고 지금도 적화통일을 위해 끊임없이 도발을 자행하고 있다. 만약 일본이 중국이 도발한다면 우리가 용서할 것인가? 같은 민족 즉 형제간이 이렇게 적대감을 가져야하겠는가. 6.25전쟁으로 남한이 60만 북한이 100만명이 전사하고 수많은 UN군과 중공군이 전사를 하였다.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된다.
그럼 북한이 왜 이렇게 남한을 못잡아 먹어 안달이 날까? 남한의 국가목표는 자유민주주의 수호와 세계 최고의 나라를 만드는 것이고.. 북한의 국가목표는 세계 최고의 공산국가 건설과 남북한 적화통일이다.
목표가 다르기 때문에 전략전술이 다를 수밖에~~~
이승복 기념관 : http://www.leesb-memorial.or.kr/ 강원도 평창군 용평면 노동리 326-1번지
<<< 중요 북한 도발 내용>>>
1958.2.15. KNA 남북사건 1968. 1.21 청와대 기습사건 124군부대 31명침투 30명 사살, 김신조 생포 1968. 1.23. 미정보함 푸에불로호 납북사건 1968.10.30.~11.2 울진삼척 무장공비침투사건 (무장공비126명침투하여 국군38명 피살64명중경상, 민간인23명피살됨. 1968.12.9. 반공소년이승복 산건(일가족 몰살, 큰형살아남 1969.12.11. KNL 기 남북사건, 승객12명 억류 1974. 8.15 육영수 영부인 피살사건 1983.10,9 아웅산테러사건 미얀마에서 전두환대통령 일행 피살(17명 사망,14명 중경상) 1987. 11.29 KAL기 폭파사건. 김현희 1999, 6.15 연평해전 2002.6.29. 서해교전 6명 사망, 수십영 부상 2007.7.12. 금강산 여행객 피살사건 2010.3.26. 천안함 격침사건 해군 46ㅁ명 전사 2010. 11.23 연평도 해전 . 해병 2명사망 16명 부상 민간인 2명사망 3명부상
<<<반공소년 이승복군과 임준환선생님>>> 임준환 선생님은 1994년부터 7년간 이승복기념관 교학과장을 지냈다. 사실 그 자리는 교육자로서는 그렇게 빛이 나는 자리가 아니었다. 원래 음악교사였던 임준환 선생님이 그 자리를 그렇게 오래 지킨 것은 바로 그 무렵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이승복사건 조작설 때문이었다. 분명히 있었던 사실을 조작이라고 떠들어대는 자들을 보면서 그는 분노했다. 임 선생님은 이승복사건 당시 마을 주민들을 찾아다니면서 증언을 수집했다. 그 결과 그는 이승복사건 당시 무장공비 침투하는 비상상황 속에서, 통신이 열악한 당시 취재조건 상 그때의 기사에 사소한 착오는 있지만 사건 자체는 진실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그는 이를 바탕으로 이승복의 형 이학관씨가 조작설 제기자들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는 것을 도왔다.
결국 이승복 조작설을 제기했던 자들은 소송에서 모조리 패하고 말았다. 여기에는 이승복기념관 교학과장 임기가 끝난 후에도 그 자리를 계속 지키면서 진실을 밝히고 소송을 도운 임준환 선생님의 공로가 결정적이었다. 임준환 선생님은 그 일에 그렇게 열심으로 매달린 이유에 대해"굳이 이유를 대라면 '나에게 주어진 직분을 다해야겠다'는 생각 때문"이라면서 "이승복 사건 조작설로 국민들이 혼란을 느끼고 있는데, 기념관 교학과장인 내가 아니면 누가 그걸 바로잡겠느냐"고 말했었다. 자신의 직분을 다하겠다는 임 선생님의 소박한 마음이 진실을 덮고 거짓말로 세상을 속이려던 자들의 음모를 날려버린 것이다. 바로 이런 분들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요, 이 나라를 지탱하는 힘이라는 생각이다.
임준환 선생님은 이승복기념관 교학과장을 마친 후에는 정선고등학교 교장을 지냈다.2009년에는 한국교직원공제회가 수여하는 2009한국교육대상을 수상했는데, 당시 상금을 장학금으로 내놓았다. 향년 60세. 흘륭하신 분이 너무 일찍 가셨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인물연구] 李承福기념관 교학과장 林駿煥씨
『학교에서 배운 대로 말하고 죽은 아홉 살 어린이에 대해 왜 그리도 집요하게 반기를 드는지… 정말 대단한 사람들입니다』●『李承福 사건이 진실임을 교사의 양심을 걸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조작설로 국민이 혼란 느끼는데 제가 아니면 누가 바로잡을 사람이 있었겠습니까』 林駿煥이라는 사람
지난 2월28일 점심 무렵 江原道(강원도) 平昌郡(평창군) 龍坪面(용평면) 路洞里(노동리) 소재 李承福(이승복) 기념관을 찾아갔다. 기념관은 전날 내린 눈으로 하얗게 뒤덮인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싼 너른 분지 한가운데에 자리잡고 있었다. 기념관 입구에는 「李承福 기념관 방문을 환영합니다」라는 현수막이 펄럭이고 있었지만, 기념관 앞 주차장은 텅 비어 있었다. 주차장 옆에는 제법 큰 휴게소가 있었지만, 손님이 없는 탓인지 황량함을 더할 뿐이었다.
사무실로 들어가 林駿煥(임준환) 선생을 찾아왔다고 하자, 50代 중반의 紳士(신사)에게 무엇인가를 설명하고 있던 中年(중년)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바로 李承福 기념관 敎學課長(교학과장) 林駿煥(48)씨였다. 그는 마침 新任(신임) 崔信益(최신익·57) 관장을 맞아 기념관 현황을 보고하던 참이었다.
『李承福 사건의 진실을 찾아 많은 일을 하셨다기에 취재하려고 왔다』고 방문 목적을 밝히자, 그는 쑥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사회에 훌륭한 일을 하시는 분들도 많은데 나처럼 특별히 한 일도 없는 평범한 사람을 다 취재하러 오느냐?』면서.
「李承福 사건」 조작說
林駿煥씨가 기념관 교학과장으로 부임한 것은 1994년. 관장실에 걸려 있는 역대 관장들의 사진을 보니 신임 崔信益 관장은 林과장이 다섯 번째로 맞는 관장이었다. 上司(상사)가 다섯 번이나 바뀌는 6년 동안 그는 한 자리를 지킨 것이다.
사실 기념관 교학과장으로서 林駿煥씨의 임기는 1998년까지였다고 한다. 그가 기념관을 떠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을 무렵 「李承福 사건 조작설」이 터졌다.
1998년 조작설을 처음 제기한 것은 6월25일字(자) 中央日報(중앙일보)였다. 中央日報는 1992년 자유기고가 金鍾培씨(현 미디어오늘 편집국부장)가 「저널리즘」 가을號(호)에 실었던 「『공산당이 싫어요』 이승복 신화 이렇게 조작됐다」라는 글을 뒤늦게 인용, 조작설을 제기했던 것이다.
이때 林駿煥씨는 기념관 명의로 중앙일보에 강력히 항의하려 했다고 한다. 그러나 주위 사람들이 李承福군의 유족들이 나서는 것이 타당하다며 그를 만류했다는 것이다. 중앙일보는 유족들의 항의를 받고 일주일 뒤 『李承福군의 형 李學官(이학관·47)씨는 「당시 현장에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라고 밝혀 왔다. 과거의 슬픔을 들춘 데 대해 유족들에게 사과한다』며 물러섰다. 하지만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같은 해 8월27일 「言論改革市民連帶(언론개혁시민연대)」에서 「改革을 위해 되돌아본 우리 言論의 부끄러운 과거들 - 정부수립 50년 한국신문 50년」이라는 제목의 전시회를 열었다. 이 전시회에서 言改連은 李承福 사건을 다룬 1968년 12월11일자 朝鮮日報 보도를 「정부수립 이후 誤報(오보) 50選(선)」 가운데 하나로 선정했다. 그 이후 파문은 급속히 확산되어 가기 시작했다.
특히 이 전시회를 다룬 9월22일字 MBC-TV 「PD수첩 - 誤報 그 진실을 밝힌다」가 던진 파장은 엄청났다. 그 도입부에서는 『초등학교 때부터 교과서에서 배워 사실이라고 믿었는데 여기 와서 보니 誤報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는 한 市民의 말이 소개되었다. 이 말 속에는 「李承福 사건 조작설」을 접하게 된 국민들의 충격과 허탈감이 잘 나타나 있었다. 林駿煥씨 역시 『기념관을 찾은 초등학생들까지 「아저씨, 이게 다 가짜라면서요? TV에서 봤어요」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억장이 무너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MBC의 「PD수첩」이 방송되기 5일 前에는 慶南每日新聞(경남매일신문)이 「아직도 학교에 李承福 銅像(동상)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다. 「李承福 사건 보도가 誤報임이 드러났음에도 초등학교 곳곳에 李承福 동상이 남아 있음」을 고발하는 내용이었다. 이 보도에 대해 慶南道 교육위원회 관계자들은 『그 보도내용이 사실이라면 조속히 조치를 취하겠다』라는 반응을 보였다.
林駿煥씨가 진상규명을 위해 무엇인가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무렵, 月刊朝鮮의 李東昱(이동욱) 기자가 내려왔다. 林씨와 李기자는 사건의 진상을 추적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들은 李學官씨를 비롯하여 인근 주민들의 증언이나 기록사진 등을 통해 李承福 사건의 진상에 접근할 수 있었다.
당시의 朝鮮日報 기사는 몇 가지 사소한 誤記 외에 사건의 實體(실체)를 전면 부정하면서 조작 운운할 정도의 誤報는 아니었다는 것이 그들이 얻은 결론이었다(月刊朝鮮 1998년 10월,11월호).
林駿煥씨의 끝나지 않은 전쟁
이후 「李承福 사건 조작설」의 파문은 점차 世人(세인)들의 기억에서 잊혀져 갔다. 이 문제가 다시 관심을 끈 것은 1999년 7월20일 서울地檢(지검)이 朝鮮日報가 명예훼손혐의로 고발한 言改連 관계자들을 불구속 起訴(기소)하고, 李學官씨 부자가 고발한 慶南매일신문의 김효영 기자를 벌금 200만원에 略式(약식)기소했다는 보도가 나왔을 때였다.
하지만 李承福 사건을 둘러싼 林駿煥씨의 전쟁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林씨는 그 후에도 李學官씨 부자의 「李承福군 死者(사자)명예훼손」 소송 수행을 돕는 한편, 사건의 진상을 보다 철저하게 규명하기 위해 당시 마을 주민들이나 共匪(공비) 토벌작전에 투입됐던 軍人들의 증언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해 온 것이다. 김병두 江原道 교육감은 林씨의 그러한 노력에 힘을 실어 주었다.1998년 12월9일 李承福 30주기 추도식을 마친 후 金교육감은 林과장이 「李承福사건 조작說」 파동이 마무리되기까지는 현직에 머무르도록 지시한 것이다.
소송과 관련하여 林駿煥씨는 작년 한 해 동안 네 번이나 유족이나 증인들을 수행하여 검찰이나 법원에 출두했다고 한다. 소송에 관해 그는 사법부의 판단을 기다리고 있는 입장인 만큼 말을 아꼈지만 검찰이 관계자들을 기소한 것이나, 재판부에서 사건을 진지하게 다루고 있는 데 대해 크게 고무되어 있는 것으로 보였다.
작년 11월30일 3차 공판 후 林씨는 피고소인들과 마주쳤다고 한다. 이때 林씨는 『당신들의 주장으로 李錫雨, 李學官씨 부자가 모두 돌았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자 그들은 『유족들에게 피해가 돌아갈 줄은 몰랐다. 유족들에게는 미안하다. 대신 사과의 뜻을 전해 달라』고 말하더라는 것이다. 林씨는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당신들이 잘못된 주장을 편 데 대해 국민, 유족, 기념관측에 사과할 것은 사과하는 것으로 일을 좋게 마무리하자』고 말했다고 한다.
진실을 찾아서
당초 「조작설」의 주장자들은 『나는 共産黨이 싫어요』라는 李承福군의 외침 자체가 조작이라는 식으로 문제를 제기했었다. 그러다가 月刊朝鮮과 朝鮮日報의 확인취재로 그 사실 자체를 부인하기 어려워지자, 그들은 그 말이 전파되는 과정이 석연치 않다는 식의 의혹에 무게를 싣기 시작했다. 林駿煥씨는 지난 1년여 동안 바로 이 부분을 보완하는 증언을 해 줄 수 있는 군인이나 주민 목격자들을 찾는 일에 주력해 왔다.
1998년 月刊朝鮮 10월호 기사 「『공산당이 싫어요』는 있었다」를 보면 1968년 12월10일 새벽 「半月形局집」 崔順玉(최순옥) 할머니와 함께 李承福군의 집으로 올라갔던 군인들의 이야기가 나온다(사건 개요 참조). 林駿煥씨는 우선 이들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30년 前 사건현장에서 이들이 崔할머니의 말을 전파하기 시작한 최초의 외부인일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이를 위해 그는 18차례나 국방군사연구소, 특전사령부 및 그 예하여단, 기무부대, 제11사단, 국가정보원 등에 공문을 보내거나 전화통화를 했다고 한다.
결국 林씨는 崔順玉 할머니의 증언에 나오는 「공수부대라든가 특수부대라든가 하는 부대원들」이 제11사단 수색 중대원들이었음을 알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수색중대장은 申丁(신정·예비역 육군소장, 現 울진군수) 대위였음을 밝혀냈다. 李承福군의 집에까지 와서 작전을 벌였던 부대와 그 지휘관을 확인한 것이다. 이후 林씨는 수차 申군수와 접촉을 시도했으나, 申군수가 공무에 바쁜 관계로 접촉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林씨는 여기까지 조사해 놓고 군인들을 통해 당시의 상황을 再구성해 보려던 노력을 일단 중단한 상태였다.
『당시 강원도 평창군·정선군 일대에서 共匪 토벌작전에 투입되었던 장병들을 만나 본 결과 대부분 자신들이 작전을 벌였던 정확한 지역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어요. 그들 가운데 李承福군의 집에 들렀던 장병들도 그곳에 잠깐 들렀다가 다시 生死를 넘나드는 戰場(전장)으로 향해야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 그들이 도중에 만난 산골 할머니(崔順玉씨)가 탄식하듯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을 것 같지는 않더군요』
다만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가 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당시의 급박했던 戰況(전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 申丁씨의 증언은 확보하고 싶다는 것이 林씨의 바람이었다.필자는 2000년 4월6일 申丁 군수와 전화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李承福 사건 다음날 새벽 申대위 휘하 중대원들이 李承福의 친척인 崔順玉씨라는 분과 사건현장으로 갔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에 관해 보고를 받으신 일이 있으십니까.
『내가 직접 현장으로 갔던 것은 아닙니다. 나는 현장과 떨어진 곳에서 작전을 지휘하고 있었습니다. 휘하의 3개 소대 중 한 소대가 현장에 갔고, 李承福 일가 학살에 대한 보고를 해 왔습니다. 문서로 보고한 것은 아니었고, 口頭(구두) 보고였습니다』
―당시 소대장 이름을 기억하십니까.
『金 무슨 소위였는데,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는군요』
―혹시 작전중에 申대위나 휘하 부대원들이 기자들과 접촉한 일이 있으십니까.
『그런 일은 없습니다』
―그럼 李承福군이 『나는 共産黨이 싫어요』라고 말하고 죽었다는 데 대해서 당시 이야기 들으신 것이 있으십니까.
『그건 당시 작전지역內에 즉각적으로 퍼진 소문이었습니다. 작전지역內에 있던 군인들은 모두 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申군수는 『요새 와서 李承福사건이 조작이었느니 뭐니 하는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있을 수 없는 얘기입니다. 李承福 사건은 명백한 진실입니다. 언론에서 그런 잘못된 주장들을 바로잡아야 합니다』라고 강조했다.
母女의 증언
한편 林駿煥씨는 당시 마을 주민들, 예비군, 경찰관 등을 상대로 한 조사에서도 나름대로 의미 있는 성과를 얻어냈다. 이들의 증언을 통해 林과장은 『나는 共産黨이 싫어요』라는 李承福군의 말이 전파되는 경위를 보다 분명히 할 수 있었다.
林과장이 확보한 증언들 가운데 특히 주목되는 것은 사고 당시 李學官씨가 최초로 들른 집 주인의 며느리인 徐某(68)씨와 徐씨의 딸 崔某(43)씨의 증언이다 (徐씨와 崔씨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 것은 이들이 私生活 보호차원에서 자신들의 이름이나 現 거주지가 언론에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뜻을 林씨에게 표시했기 때문이다).
林씨가 작성한 증언기록을 보면 徐씨는 李學官씨가 『승복이가 「공산당이 싫어요」, 이러고 죽었다』고 말한 것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종래에는 李學官씨가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李承福군의 말을 최초로 전한 곳이 「半月形局집」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林駿煥씨는 李學官씨가 그 직전에도 그 말을 한 곳이 있음을 밝혀 낸 것이다.
또 李學官씨가 당시 상황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데 대해 徐씨는 『못하지요. 어릴 적에 칼 맞아서 내려왔는데 그 기억을 어떻게 해요』라고 말하고 있다. 「조작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李學官씨가 당시의 상황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있음을 문제 삼곤 했었다. 徐씨의 말은 당시의 상황을 머리 속으로만 그리는 사람들과 현장목격자 간의 인식의 차이를 느끼게 해 주는 대목이다.
林駿煥씨가 직접 들려주는 徐씨의 딸 崔씨의 증언은 더욱 생생했다. 그는 먼저 1998년 9월17일 전화로 崔씨와 접촉, 사건 당시의 상황에 대한 증언을 얻어 냈다고 한다.
『崔씨는 사건 당시 열한 살이었어요. 崔씨는 집에서는 피투성이가 되어 내려온 학관이를 보기만 했고, 얘기를 들은 것이 없다고 해요. 하지만 가족들 및 學官이와 「半月形局집」으로 내려간 후의 일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더군요. 거기서 崔씨는 「半月形局집」 아주머니(崔順玉씨), 동네 아저씨, 아주머니들 앞에서 턱을 괴고 쪼그리고 앉아 벌벌 떨면서 학관이가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거예요. 李學官은 그때 「承福이가 공산당은 거짓말쟁이고, 싫다고 얘기하자, 공비가 승복군의 입에 칼을 꽂고, 식구들이 순식간에 죽었다」라고 말했답니다』
그밖에도 崔씨는 당시 崔順玉씨가 남자들의 바지를 찢어 李學官군을 응급처치하던 일들을 세세하게 기억하고 있더라는 것이다.
林과장의 회고담.
『1998년 11월19일 崔씨 집으로 李學官씨와 함께 崔씨 모녀를 찾아갔었죠. 李學官씨는 「내 이야기가 신문과 방송을 통해 세상에 알려진 것을 보면 내가 분명히 어디에서 누군가에게 당시의 상황을 이야기하기는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 나는 피를 너무 많이 흘리고 원체 경황이 없었다. 누구를 만났고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전혀 기억을 못하고 있었다. 오늘 두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 보니 비로소 그때의 상황을 이해하게 되었다」며 고마워하더군요』
徐씨 모녀 이외에도 강세혁, 김득수(당시 예비군), 김병묵씨(당시 경찰관) 등이 당시 상황에 대한 생생한 증언을 남겼다(記事 後尾의 사건 개요 참조).
生家도 원형대로 복원
이상의 증언들 못지않게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 林駿煥씨가 국가정보원에 의뢰해 찾아낸 당시의 대한뉴스 필름이라고 한다. 여기에는 1968년 12월10일 아침 李承福의 집마당에 학살당한 일가족의 시신이 놓여 있는 모습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는 것이다. 李承福 사건이 조작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당시의 사진을 보면 입이 찢어진 상처는 하나도 볼 수 없다」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이 필름을 보면 『李承福의 찢어진 입가에 피가 굳어져 있는 게 그대로 보인다』는 것이 林씨의 얘기다 .
林駿煥씨에게 『나는 共産黨이 싫어요』라는 李承福군의 말이 전파된 과정에 대해 물어 보았다.
―月刊朝鮮 1998년 10월호를 보면 崔順玉 할머니가 李承福군 일가의 시신을 수습하면서 옆에 있던 군인들에게 『야가 共産黨이 싫다고 하기에 입이 이렇게 찢겼대요』라고 말했다고 되어 있더군요. 이 군인들, 즉 제11사단 수색대 병사들에게서부터 이야기가 전파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아도 될까요?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아요. 그들은 곧 현장을 떠났다고 해요. 그들이 朝鮮日報의 姜仁遠(강인원) 기자 등을 만나서 이야기를 전한 것은 아닐 겁니다. 나는 「半月形局집」을 거쳐 李承福군의 집으로 올라 온 사람들을 통해 이야기가 전파되었을 것으로 봐요』
林씨가 그렇게 생각하는 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1968년 12월12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사진을 보면 崔順玉씨의 시동생뻘인 이수기, 이창기씨와 예비군 전재명씨의 모습이 보인다. 이들은 모두 李承福군의 집과는 반대방향에 살던 사람들로 李承福의 집에 오기 전에 「半月形局집」에 들러 밤중에 그곳에 있던 사람들로부터 李學官씨가 한 말을 전해 들었을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아마 이들을 통해 李學官씨 이야기가 전파되기 시작했고, 그 이야기가 기자들 귀에 들어갔으리라는 것이 林씨의 말이었다.
林駿煥씨가 하는 일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동안 수집했던 증언들을 비디오, 디스켓, CD롬 등으로 보존하고, 잘못된 자료와 기록들을 바로잡는 데에도 그는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중요한 일을 꼽으라면 아마 기념관 경내에 있던 李承福군의 生家(생가)를 올바로 복원한 일일 것이다. 종래 있었던 李承福군의 생가 모형은 실제와 터무니없이 동떨어져 있었다고 한다.
『내가 아니면 누가…』
『李學官씨는 사건이 일어나던 날을 이야기하면서 「윗방과 아랫방의 통로문이 저 안쪽에 있었다. 그래서 아랫방 안쪽에 앉아 옥수수를 까면서 윗방을 올려다보면 어머니가 메주 작업하는 게 다 보였다」고 했어요. 그런데, 먼저 있던 생가 모형에서는 그 통로문이 다른 출입구 쪽에 있으니,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 거예요.
집채에 문이라고는 윗방과 아랫방으로 들어가는 문 두 개하고 그 두 방을 연결하는 통로문 세 개밖에 없었다고 해요. 하지만 먼저 복원해 놓았던 생가 모형에는 뒤쪽에 큰 창문까지 만들어져 있더라구요. 게다가 火田民(화전민)이 벤 盜伐木(도벌목)으로 대충 지은 귀틀집이라야 맞는데, 기둥이 있는 제대로 된 토담집을 지어 놨었으니…』
기념관의 生家 모형은 작년 李學官씨와 당시 生家를 지었던 마을 목수의 考證(고증)을 얻어 原型(원형)대로 復元(복원)되었다고 한다.
林씨와 함께 돌아본 李承福군의 생가모형은 집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허름한 것이었다. 필자는 귀틀집이란 것을 말로만 들었지, 실제로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강원도 일대의 화전민들이 거주하던 귀틀집이 사라진 것은 1970년대 초. 1960년대 말 무장공비 사태를 겪으면서 화전민들을 강제로 疏開(소개)시키면서 귀틀집도 사라졌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생가 모형을 제대로 복원해 놓은 것은 李承福군 기념사업의 일환이 아니더라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밖에 林씨가 요즘 신경을 쓰는 일 가운데 하나는 기념관 옆에 있는 「속사초등학교 계방분교」를 기념관과 연계하여 정비하는 일이라고 한다. 李承福군이 다닐 무렵 계방분교의 학생수는 80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지속적인 학생수 감소로 계방분교는 1998년 3월1일 廢校(폐교)되었고, 그 시설의 관리권은 1999년 7월1일부로 기념관으로 넘겨졌다. 林駿煥씨는 李承福이 공부하던 교실은 원형 그대로 보존하고, 나머지 교실 두 칸은 그동안 수집한 자료 등을 전시하는 공간으로 활용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李承福 기념관에서 만든 「1999년 李承福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한 활동요약」이라는 文件(문건)을 보면 그는 거의 1년 내내 李承福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조금이라도 진상규명에 도움이 되겠다 싶으면 그는 사방으로 공문을 보내고, 전화통화를 하고, 인터뷰를 위해 달려 가곤 했던 것이다. 그렇게까지 그가 이 일에 열정적으로 매달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굳이 이유를 대라면 「나에게 주어진 職分(직분)을 다해야겠다」는 생각 때문이겠지요. 李承福 사건 조작설로 국민들이 혼란을 느끼고 있는데, 기념관 교학과장인 내가 아니면 누가 그걸 바로잡겠어요.
李學官씨 주변에는 딱히 그를 도울 만한 사람이 없어요. 나는 학창시절 고픈 배를 수돗물로 채워 가며 어렵게 공부한 사람이에요. 그래서 그런지 李學官씨처럼 외롭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보면 그게 꼭 내 일 같아요』
李承福은 「살려 달라」고 빌 틈도 없이 죽어
李承福 사건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 가운데는 아래와 같은 견해를 가진 사람들도 흔히 볼 수 있었다. 즉 『李承福군의 비극은 그 보도가 사실이냐 아니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어린아이가 「살려 주세요」를 외치지 못하고 이데올로기 교육에 물들어 「공산당이 싫어요」를 외쳤다는 것(하이텔 「큰 마을」- chamccol)』, 『산골마을 어린이가 다른 것도 아닌 思想(사상)문제로 「공산당이 싫어요」를 외치고 죽었다는 「팩트」는 그 당시 한국이라는 나라가 얼마나 혐오스러운 反共교육의 搖籃(요람)이었나를 全세계에 고백한 경우 (천리안 「나도 한 마디」 - everman)』 같은 주장들이 그것이다. 그러한 주장들에 대해 林씨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물어 보았다.
『李學官씨에 의하면 李承福이 그런 이야기를 할 때 그 애가 민주주의니, 공산주의니, 사회주의니 하는 體制(체제)를 알고 비교하는 식으로 이야기한 게 아니라고 해요. 당시 共匪들이 군인복장으로 나타났는데, 共匪건 그들을 토벌하러 온 국군이건 간에 군복 입은 사람을 본 것은 그 때가 처음이라고 하더군요. 그러니 李承福이나 그 가족들은 그들을 국군으로 생각했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 共匪가 「南韓(남한)이 좋으냐, 北韓(북한)이 좋으냐」고 물어 본 거예요. 承福이는 「우리 학교에서 선생님에게 배워서 다 안다. 공산당은 거짓말쟁이고, 우리는 北韓이 싫고 南韓이 좋다」고 대답한 것이고…』
여기서부터 林씨는 흥분하기 시작, 말투까지 달라졌다.
『그러자 共匪는 「다시 말해 봐. 너 뭐라고 그랬어」 그러며 멱살을 꽉 잡더라는 거라. 그래 놓고 치켜들며 「야」 소리를 지르니까 뒤에 있던 놈이 두말도 안 하고 대뜸 대검을 꺼내 입에다 꽉 처넣고 긋더래. 그렇게 순식간에 죽은 거야. 살려 달라고 빌고 말고 할 여유도 없이 순식간에 죽였어.
그 상황을 저쪽에서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제대로 듣기만 했어도 감히 그런 얘기, 「어린애가 살려 달라고 그랬어야 맞지」 그런 얘기는 못해』
李承福군은 상대방이 국군인지 共匪인지도 분명치 않은 상태에서 학교 선생님에게서 배운 것을 의심 없는 사실로 받아들이는 어린이다운 천진함으로 자기의 생각을 꾸밈없이 말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共匪는 李承福군이 「살려 달라」고 빌고 어쩌고 할 틈도 없이 그의 목숨을 앗아가 버린 것이다.
―「문제는 군사정권이 承福군을 反共(반공)의 영웅으로 우상화하는 데 열을 올렸다는 사실(김명걸 한겨레신문 논설위원)」이라는 식의 주장을 펴는 사람들도 많습니다만.
『反共은 당시로서는 「당연히」 필요했던 거예요. 南北대치상황 아래서 얼마나 많은 국민들이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무고하게 죽어갔습니까. 그런 현실 속에서 「나는 共産黨이 싫어요」라는 말을 하고 죽어간 李承福의 사례가 공산주의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고 판단한 겁니다. 그래서 李承福군의 일을 특별히 국민들에게 교육시킨 것이 왜 잘못입니까』
―그때로서는 그랬다 해도 지금도 反共이니 李承福 기념관이니 하는 것들이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요.
『물론 「지금은 공산주의가 全세계적으로 몰락한 마당에 우리만이 한 민족이면서도 서로 총부리를 겨누어야겠느냐」라는 주장도 있을 수 있겠지요. 그러나 우리 민족이 풍요롭고 자유를 누리며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공산주의는 「당연히」 배척할 수밖에 없어요. 그것은 지금 북한의 현실이 잘 보여 주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林씨는 햇볕정책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지금은 「햇볕정책」의 시대라고들 합니다. 사실 우리도 요즘 같은 시대에 기념관의 존재 의미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金大中(김대중) 대통령도 기회만 있으면 「튼튼한 安保」를 강조하고 있지 않습니까? 反共이라든가 李承福 기념관이라든가 하는 것들이 「햇볕정책」과 배치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조작설」에 대한 몇 가지 생각
이번에는 「李承福 사건 조작說」 같은 게 왜 나온다고 생각하는지 물어 보았다.
『우선 세월이 지나면서 그때의 어려웠던 상황이며 실정을 정확하게 모르고, 머리로만 추측하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이 한 원인일 겁니다. 둘째로는 종래 安保니 反共이니 하는 것들을 최우선시 하던 사고를 깨야겠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이것저것 문제가 있다고 들추다 보니 李承福 사건까지 건드리게 된 것 같기도 하고…』
林駿煥씨도 조작설의 배경에 관해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본 것 같았다.
『그리고 李學官씨가 기자들이 찾아와 물었을 때 사건의 진상이 전파된 경위를 확실하게 이야기해 줄 수 없는 처지였다는 것도 원인일 거예요. 李學官씨는 承福이가 한 얘기, 가족들이 끔찍하게 죽은 경위 등은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어요. 하지만 그는 그 뒤 집에서 빠져 나와서 병원으로 후송되기까지 누구를 만나 어떤 이야기를 해 주었다는 것은 기억하질 못해요.
서른여섯 군데나 刺傷(자상)을 입고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상황이었는데 그때 일어난 일들을 어떻게 기억하겠어요? 더욱이 그로서는 신문기자들이 누구를 만나 어떻게 취재해 보도했는지는 알 필요도, 알 수도 없었던 거예요. 李學官이는 자기가 모르는 것을 물어 보니 곤혹스럽고, 「모른다」고 대답할 수밖에…, 그걸 가지고 일부 기자들이 조작 운운하게 된 것 같아요』
李承福 사건의 진실을 추적해 온 그로서는 조작설에 대해 입에 담는 것조차 불쾌한 일일 것이다. 그래도 林씨는 조작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이해해 보려 애쓰는 듯 이렇게 말했다.
『李承福 사건에 대해 의문을 품거나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나름대로 생각하는 바가 있어 그러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국민의 의식을 흔드는 잘못된 견해를 피력하는 일이 없게 신중해야 하는데…. 설사 세부적인 내용에 있어서 사실과 좀 어긋나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바로잡으면 될 일이에요.
그걸 빌미로 사건의 본질 자체를 부정하고, 조작 운운하는 식으로 따지고 드는 것은 어른들의 무책임한 횡포라고 생각해요.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상식 이하의 주장이에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다른 숱한 역사적 사건들은 제쳐 두고 아홉 살 어린아이의 죽음에 대해서만 反旗(반기)를 드는 건지…』
林씨의 말끝에는 숨길 수 없는 노여움이 배어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확신에 찬 어조로 덧붙였다.
『사건이 있은 지 30여 년이 지난 후 할 수 있는 조사는 거의 다 해 보았어요. 그 결과 李承福군이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말을 했고, 그 때문에 죽었다는 것은 진실이었다고 확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건 30년간 교단에 섰던 교사로서 양심을 걸고 단언할 수 있어요』
『李學官씨나 주변 주민들의 경우, 李承福이 영웅화된 이상 여러 가지 이해관계가 얽혀 있어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도 있더라는 얘기를 슬쩍 꺼내 보았다. 林씨는 펄쩍 뛰었다.
『내가 그동안 겪은 바에 의하면 李學官씨 성품은 이해관계에 따라 말을 바꿀 사람이 못 돼요. 거짓말을 하면 바로 얼굴이 벌게질 사람이에요. 마을 사람들도 그래요. 외부에서 볼 때는 여기 기념관도 있고 사람들이 여기 온 김에 돈도 쓰고 가고 그러지 않겠느냐고 여길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여기 와서 밥 사먹고 가는 사람도 별로 없어요. 도시락 싸가지고 와서 먹고, 쓰레기만 버리고 가는데 무슨 그런…』
―자녀들과 李承福 사건이나 조작說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으십니까.
『평소 주말에 집에 가서는 李承福 사건과 관련된 증인을 만난 이야기를 애들에게 해 주곤 합니다(林씨는 지금 강릉의 가족들과 떨어져 기념관 옆의 관사에서 기거하고 있다). 조작說 이후 친구들이 이구동성으로 「李承福 사건은 가짜」라고 이야기하더랍니다. 애들은 나한테 들은 대로 「李承福 사건은 진실이다」라고 얘기해 주면 친구들도 진지하게 듣고 납득한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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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承福 사건의 槪要:학살·탈출·證言
1968년 12월9일 저녁 무렵 7명 가량의 共匪가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현재는 용평면) 계방산 기슭에 있던 火田民 李錫雨씨의 집에 들이닥쳤다. 이들은 1주일 전인 12월2일 울진·삼척지구에 침투한 武裝(무장) 共匪 8개조 120명 가운데 일부였다. 이때 집에는 李承福(당시 9세)군과 承福군의 어머니 周大河(주대하·34)씨, 형 學官(承權은 어릴 적 이름), 동생 承秀(승수·7), 承子(승자·4)가 있었다. 아버지 李錫雨(37)와 그의 어머니 姜씨는 이웃 주민인 강환기씨가 이사하는 것을 도와 주기 위해 출타중이었다. 국군 복장을 한 共匪들은 집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숙제를 하고 있던 李承福군에게 그가 사용하고 있는 연필이 어디서 났는가 등 몇 가지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共匪가 『남한이 좋으냐, 북한이 좋으냐?』고 물어 보자, 承福군은 『나는 共産黨이 싫다』고 대답했다. 承福군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共匪들은 대검 등으로 承福군 일가를 무참하게 학살했다(이날 12월9일은 承福군의 생일이었다). 承福군의 형 李學官씨는 共匪들에게 난자당한 뒤 어머니의 시신과 함께 퇴비 더미에 버려졌다.
李學官씨는 共匪들이 집을 떠난 후, 퇴비 더미에서 빠져 나와 30m쯤 떨어진 최재복씨 집(本文 중의 증언자인 徐某씨는 최재복씨의 며느리, 崔某씨는 그의 손녀이다) 등을 거쳐 1km 가량 떨어진 「半月形局집」으로 탈출해 와 있었다.
李學官씨는 여기서 李錫年씨의 부인 崔順玉씨로부터 응급처치를 받을 수 있었다. 이때 李學官씨는 본인은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承福군이 한 말을 비롯하여 참상의 경위를 주위 사람들에게 이야기했다.
한편 이웃인 강환기씨가 이사하는 것을 도와 준 후 승복군의 아버지 李錫雨씨는 어머니를 姜씨 집에 남겨 둔 채 집으로 돌아왔다. 李씨는 그를 집안으로 끌어들이려는 共匪들과 격투 끝에 오른쪽 대퇴부에 부상을 입고 탈출했다. 2km쯤 떨어진 강환기씨 집으로 돌아온 李씨로부터 共匪가 나타났다는 이야기를 들은 유경상, 강세혁씨 등이 신고 길에 나섰다. 이들은 노동리 이장 조길원씨 집을 경유하여 경찰에 공비 출현을 신고했다. 이들의 신고를 접하고 경찰관 김병묵씨, 예비군 김득수씨 등 12명으로 편성된 기동타격대가 출동했다.
김병묵씨 등은 「半月形局집」에서 李學官씨를 발견, 병원으로 후송했다.
李學官씨를 후송조치한 예비군들은 다시 李承福군의 집까지 올라갔으나, 학살의 흔적만 보고 일가의 시신은 발견하지 못했다. 李承福 일가의 시신을 발견한 것은 예비군들의 뒤를 이어 「半月形局집」에 나타나 崔順玉씨와 함께 현장으로 올라 간 제11사단 수색 중대원들이었다.
그후 10일 새벽 조길원씨 집에서 나온 강세혁씨와 조우한 제11사단 전투지원 중대병력들이 李承福의 집을 거쳐 갔다. 『나는 共産黨이 싫어요』라고 한 李承福군의 말을 포함하여 李군 가족이 학살당한 경위에 관한 이야기는 「半月形局집」으로 탈출한 李學官씨에 의해 최초로 발설되어, 이튿날인 10일 새벽에서 아침 사이 「半月形局집」을 거쳐 李承福군의 집으로 올라간 군인·예비군·주민들에 의해 전파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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