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드대학옌칭도서관의 한국고서들"이란 제목으로 허경진 지음.
웅진북스 2003 3월 20일 발행.
여기에는 한국관의 고서들이 4,000종이 넘으며 한국고서들이 수집되기 시작한 것은 1951년부터라고 한다. 소개된 책이나 내용들은 1900년 전후의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중 가해조천록(駕海朝天錄)이란 책이 소개되었다
이 책은 광해군13년 사간원 장령 안경(安璥)이 '변무사은양건사은'의 서장관으로 임명되어
떠나기 전부터 돌아온 뒤까지의 뱃길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라 한다.
안경이 기록한 초고는 세월이 오래 되면서 종이가 너덜너덜하여 232년 뒤인 1853년 9월 10대손 안정환이 다시 옮겨썼으며 그의 발문도 있다고 한다. 현재 옌칭 도선관에는 안정환이 필사한 "가해조천록" 1권이 소장되어 있으며 매장 20줄, 매줄 22자로 쓰여진 93장본이라고 한다.
책의 내용에서 정확이 가해조천록 안에 있는 내용인지는 알 수 없으나 책에 있는 대로 요약하면
광해군 13년5월
17일 평안도 안주에서 명 사신 유홍운을 만나 인사하고
20일 청청강에서 출발했다.
6월 20일 바다건너 등주에 내렸다.
한달 걸린셈인데 그 이유는 도중에 풍랑을 만나 오래 걸렸으며 10척 중 9척이 침몰되었다.
6월 4일 일기에
" 배에서 떨어진 자들과 떠다니는 시체가 서로 섞여 바다에 가득했다. 뱃전을 부여잡고 울부짖으며 죽음을 무릅쓰고 다투어 기어올랐다. 급박하고 절박한 와중에 간신히 8-9척의 방물을 옮겼다. 해가 저물어 어둑해지자 이번에는 후금 오랑캐가 떼를 지어 포를 쏘고 화살을 쏘았다. 미처 멀리 달아나지도 못했는데 큰비가 또 내리고 천둥과 바람까지 바다를 뒤집어 놓아 뱃사람들은 두려움에 떨며 속수무책으로 배가 가라앉는 것을 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열흘뒤(20일) 등주에 도착한 후 조정의 허락도 받지 않고 뱃길로 왔다고 관아에 끌려가 한차례 곤욕을 치렀다.
그런 뒤에 육로를 따라 북경에 들어갔다. 명이 망하기 직전이라 기강이 헤이해져 가는 곳마다 뇌물을 요구했다....
광종의 조문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석성에서 또 한차례 풍랑을 겪었다. 안주로 돌아왔다.
끝으로 안경은 이번 뱃길에서 죽음을 경험한 이유가 자신이 문관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 내 자손들은 영원히 문관 벼슬을 하지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위의 내용이 책 안의 줄거리 부분이었다. 어떠한 내용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위의 기록을 토대로 실록에서 전후 상황을 살펴보았다.
먼저 안경(安璥)의 기록을 살펴보면
* 선조실록 편수관 명단에서 통선랑(通善郞) 행 예조 좌랑(行禮曹佐郞) 신 안경(安璥)
* 광주(光州)의 진사 안경(安璥)《 광해 095 07/09/08(신사) 》
* 서장관 안경(安璥)《 광해 114 09/04/28(임술) 》
* 비변사 낭청 안경(安璥)《 광해 129 10/06/26(계미) 》
* <정사가 있었다.> 홍방(洪푲)을 동지사로, 안경(安璥)을 장령으로..《 광해 141 11/06/02(계축) 》
* 정사가 있었다. 정도(鄭道)를 집의로, 안경(安璥)을 장령으로, 《 광해 151 12/04/05(임자)》
* 금교 찰방 안경(安璥) 등을 다 파직시켰다.《 인조 003 01/09/24(신해) 》
실록의 기록에 안경이 조선의 진위사, 사은사로 가는데 서장관으로 갔다는 기록은 없다. 이때 모두들 뱃길이 위험하여 여럿이 죽었음으로 인해 가기를 꺼렸던 것으로 나와 있다.
그 이유는 실록의 기록에 있는데 사신 박이서(朴彛敍)와 진향사(進香使) 유간(柳澗), 진위사(陳慰使) 강욱(姜昱), 서장관 정응두(鄭應斗)가 경사(京師)에서 돌아오다가 폭풍을 만나 표류하여 죽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가해조천록의 내용대로라면 광해군12년(1621)의 일이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다시 광종이 죽자 명의 사신이 1621년 4월 12일 칙서를 가지고 들어온다. 그리고 21일 광해군은 권진기를 진위사로 임명하고 명의 사신을 따라 뱃길로 떠나게 한다. 이때 안경이 같이 간 것으로 보인다. 이때의 사은사는 최응허이며 6월 25일 광해군에게 올린 장계가 있다.
《 광해 166 13/06/25(을미) / 사은사 최응허의 장계 》
사은사 최응허(催應虛)가 장계하였다.
“중국 사신이 여순 항구에 도착하였을 때 밤중에 사나운 바람이 강하게 불어서 유 천사(劉天使)가 탄 배와 신이 타고 있던 배, 진위사가 타고 있던 배, 두 중국 사신의 짐을 실은 배 등 모두 9척의 배가 침몰되었습니다. 유 천사는 겨우 몸만 빠져나왔고 한인들 가운데에서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이 얼마인지 모릅니다. 신도 겨우 헤엄쳐 나와 표문, 주문, 공문을 물 속에서 건져냈는데, 토산물의 태반은 물에 떠내려가 유실하였습니다.”
가해조천록에는 권진기의 진위사 임명이 21일이나 실록은 24일로 되어 있다.
《 광해 164 13/04/24(을미) / 비변사 비밀 초기를 인해 진위사에 권진기를 임명하다 》
<비변사의 비밀 초기(草記)를 인하여 진위사에 권진기(權盡己)를 임명하라고 전교하였다.>
위의 두 기록은 안경의 가해조천록이 실록과 일치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다음의 기록을 보면 무언가 일치하지 않는 내용이 있다.
《 광해 170 13/10/24(신묘) / 권진기 일행이 이순의 은을 경비로 썼으니 보상 해줄 것을 명하다 》
비변사가 아뢰기를,
“<방금> 권진기(權盡己)의 <장계를 접하건대,> 험난한 길에 온갖 죽을 고비를 다 넘기고 살아서 돌아왔으니 참으로 다행한 일입니다. 일행의 여장이 모두 바다의 큰 파도 속에 빠져버렸는데 다행히 이순(李恂)이 허리에 차고 있던 은을 가지고 부족되는 경비에 썼다고 합니다. 그 수량이 겨우 30냥밖에 되지 않으니 해조에 지시하여 이순이 서울에 들어온 뒤에 곧 값을 쳐서 주게 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10월24일 위의 기록은 권진기(權盡己)일행, 즉 안경이 포함된 일행이 풍랑을 만나 죽을 고비를 넘긴 것으로 된다. 이런 와중에 10월 21일자의 기록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 광해 170 13/10/21(무자) / 박이서·유간·강욱·정응두 등 익사한 역관들에게 증직과 휼전을 명하다 》
도승지 이덕형(李德泂)이 아뢰기를,
“신 등이 진위사(陳慰使) 권진기(權盡己)가 올린 장계를 보니, 진향사(進香使) 유간(柳澗)과 서장관 정응두(鄭應斗)는 배가 침몰하여 익사하고 강욱(康昱)은 섬에서 병으로 죽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모두 재신이나 시종관으로서 명을 받고 중국에 갔다가 불행하게 모두 바닷물에 빠져 죽었으니, 소식을 들은 사람치고 가슴 아파하고 슬퍼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더구나 박이서(朴彛敍)는 소식이 전혀 없는데 물에 빠져 죽은 것이 확실하니 휼전을 베푸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해조로 하여금 품지하여 거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이어> 전교하기를,
“박이서·유간·강욱·정응두 등 및 물에 빠져 죽은 역관들은 나라 일을 위하여 위험한 길을 가다가 바다에 빠져 죽은 것이니, 매우 놀랍고 슬픈 일이다. 자급을 뛰어넘어 증직(贈職)하고 휼전을 두터이 베풀 것이며, 그 가족들에게 월봉(月俸)을 헤아려 지급하도록 하라.”
하였다.【대체로 이때에 와서 사신이 물에 빠져 죽었다는 확실한 통보가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진위사(陳慰使) 권진기(權盡己) 본인도 풍랑에 죽을 고비를 넘긴 것(가해조천록에 의하면)은 차지하고 앞의 풍랑에 죽은 사람들에 대한 장계를 올리고 있다.
그리고 이런 기록도 있다.
《 광해 170 13/10/20(정해) / 강욱의 영구 호송과 최응허 등이 와서 정박하면 치계하도록 명하다 》
전교하였다.
“유간(柳澗) 등의 일은 매우 놀랍고 슬픈 일이다. 강욱(康昱)의 영구를 각별히 호송할 것이며, 최응허(崔應虛) 등이 와서 정박하게 되면 곧 치계하도록 하라는 <일을 용천 부사(龍川府使)와 삼도 감사에게 하유하도록 하라.>”
결론적으로 실록의 내용에서 안경, 최응허, 권진기, 박이서 등의 인물을 중심으로 실록을 살펴 보면 하나의 풍랑 사건이 둘로 나눠지면서 안경의 가해조천록이 여기에 더하여 지게된다. 가해조천록이 사실의 기록이던 아니던 이 기록이 실록을 뒷받침하며 두 기록 사이에 입을 맞춘 흔적이 있어 보인다.
더 연구가 필요한 기록으로 생각된다.
앞 대륙조선사 자유게시판에 "표해록과 관련하여"-공간-라는 글이 있는데
이와 같은 맥락의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