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 이삭 팰 무렵
사방 천지에 만록이 무성하던 여름도 어느덧 끝자락을 향하고, 들녘에서는 논배미마다 벼 이삭이 패기 시작했다. 벼의 일생 중 생육이 가장 왕성한 시기라 하면 벼 낟알이 영글어 가는 처서 전후일 듯하다. 아울러 8월 18일을 ‘쌀의 날’로 지정한 이유는 사람의 생명을 책임지는 쌀의 소중함에 대해 새롭게 일깨우기 위함이 아닐까 생각한다. 쌀은 옥수수, 밀과 함께 세계 3대 식량작물이다. 그런데 쌀을 주식으로 하는 한국인들의 입맛이 점차 서양화되면서 밥보다 빵을 선호하는 이들이 증가함에 따라 쌀 소비량은 감소세를 이어가고 있다. 이 같은 변화와는 별도로, 쌀 생산의 안정화만큼 중요한 국가 전략은 없다고 확신한다. 굳이 식량 안보를 거론할 필요도 없이 쌀독에 쌀이 그득하면 왠지 든든한 것은 인지상정이다. 벼의 꽃말은 ‘풍요’다. 황금빛으로 곱게 물든 가을 들판에 서면 누구라도 마음이 풍요로워진다. 벼농사에 있어 첫 번째 성패는 우량 볍씨를 싹틔운 뒤 파종상자에 파종하고 육묘하는 과정에 달려 있다. 어린모를 옮겨 심을 논은 미리미리 논갈이와 써레질을 해 둔다. 사실 오뉴월 땡볕 아래 사람의 손으로 일일이 ‘손모심기’를 하던 추억은 이제 빛바랜 자료 화면과 사진 속에서나 떠올릴 만하다. 이앙기나 콤바인 등 농기계를 이용한 ‘기계모심기’와 ‘기계 수확’이 이미 보편화된 덕택이다. 그렇다고 해서 결코 전 과정이 기계화된 것은 아니므로 사람의 손길을 거쳐야 하는 일들이 여전히 많다. ‘물대기’도 그중 하나다. 이삭이 생길 때부터 이삭이 팰 때까지는 뿌리 기능을 촉진시키기 위해 사흘간 물을 대고 이틀간 물을 빼는 식으로 ‘물 걸러대기’를 해 준다. 이삭이 패는 동안에는 물을 적절한 높이로 가두었다가, 이삭이 전부 패고 나면 다시 ‘물 걸러대기’를 하여 벼가 잘 여물도록 돕는다. 이삭이 팬 지 한 달여가 지나면 논에서 물을 완전히 빼는 ‘물떼기’를 한다. 벼의 생육 단계에 맞춰 관수와 배수를 적절히 실시하는 것은 물 관리 더 나아가 논 경작의 기본이다. 특히 냉해나 가뭄 상황에서 농부의 순발력이 요구된다. 또한 병충해 발생 시 쌀 품질의 하락과 생산량의 감소를 막기 위한 신속한 대응력이 필요하다. 벼의 생육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환경적 요소는 토양, 일조량, 강수량이지만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요소는 농부의 관심과 돌봄이다. 쌀 한 톨을 얻는 데는 여든여덟 번의 수고의 손길이 따른다고 한다. 다른 건 몰라도 밥 가지고 투정하면 안 된다. 누군가 지어 낸 우스갯소리인지는 몰라도 도시 아이들은 벼를 한해살이풀이 아닌 나무로 여긴다. 나무에서 벼 열매를 따는 줄로 착각하는 마당에 벼꽃의 존재는 더군다나 알 리가 없다. 그러나 벼도 엄연히 꽃을 피운다. 겉껍질 속에 들어 있는 6개의 수술 꽃가루와 씨방 안의 밑씨인 암술이 만나 수정이 이루어지면 열매가 달리고 꽃이 핀다. 다만 출수와 동시에 개화한 벼꽃은 이내 시드는데다 워낙 볼품이 없어서 주목받는 경우가 드물다. 물론 인간은 밥만 먹고 사는 존재가 아니다.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는 말처럼 명색이 만물의 영장인 인간에게 육신을 위한 밥이 전부일 수는 없다. 하지만 제 아무리 잘난 사람도 사나흘만 굶고 나면 뭣이 중한지를 온몸으로 느낀다. ‘목구멍이 포도청’,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 ‘수염이 석 자라도 먹어야 산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 같은 속담이 그저 허튼소리가 아니다. 여느 농사일처럼 쌀농사 역시 하늘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다. 기상 흐름을 사전에 예측할 수 있다면 농사짓는 데 큰 보탬이 되지만, 예보보다 중계가 전문인 우리 기상청을 전적으로 신뢰하기가 어렵다. 이래저래 농가의 애로사항이 많다. 여하튼 ‘쌀의 날’을 맞이하여 한 가정의 주방을 책임지는 주부의 자격으로 알곡을 비롯해 쌀겨, 왕겨, 볏짚까지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벼느님’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2021. 8. 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