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역사편에서,,,
875년 헌강왕(憲康王) 즉위.
이찬 위홍(魏弘)을 상대등으로 삼고, 대아찬 예겸(乂謙)을 시중으로 삼고, 수도과 지방에 있는 사형수 이하의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876년 2월 황룡사(皇龍寺)에서 모든 스님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백고좌(百高座)를 열어 불경을 강론하였다. 왕이 직접 행차하여 들었다. 7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878년 4월 당나라 희종(僖宗)이 사신을 보내 왕을 사지절개부의동삼사검교태위대도독계림주제군사신라왕(使持節開府儀同三司檢校太尉大都督雞林州諸軍事新羅王)으로 책봉하였다. 7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려다가, 황소(黃巢)의 난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중지하였다. 8월 일본국 사신이 오니, 왕이 조원전(朝元殿)에서 접견하였다. 879년 2월 왕이 국학에 행차하여 박사 이하에게 강론을 하도록 명하였다. 3월 왕이 나라 동쪽의 주와 군을 순행하였는데,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사람 넷이 왕의 수레 앞에 와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그들의 모습이 해괴하고 차림새가 괴이하여, 당시 사람들이 그들을 산과 바다에 사는 정령(精靈)이라고 여겼다. 6월 일길찬 신홍(信弘)이 반역을 일으켰기에 사형에 처하였다. 10월 왕이 준례문(遵禮門)에 나아가 활 쏘는 것을 관람하였다. 11월 왕이 혈성(穴城)의 들에서 사냥을 하였다. 880년 시중 예겸이 사직하였기에, 이찬 민공(敏恭)을 시중으로 삼았다. 8월 웅주(熊州)에서 상서로운 벼이삭을 진상하였다. 9월 9일 왕이 좌우의 신하들과 월상루(月上樓)에 올라가 사방을 바라보니, 금성에 민가가 즐비하고 노랫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왕이 시중 민공을 돌아보면서 말하였다. “내가 들었는데, 지금 민간에서는 짚이 아닌 기와로 지붕을 덮고, 나무가 아닌 숯으로 밥을 짓는다 하니 과연 그러한가?” 민공이 대답하였다. “저도 역시 일찍이 이와 같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어서 또 아뢰었다. “왕께서 즉위하신 이후로 음양이 조화롭고 바람과 비가 순조롭고, 해마다 풍년이 들고 백성들은 먹을 것이 풍족하며, 국경이 안정되고 도시에서는 즐거워하니, 이것은 왕의 어진 덕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입니다.” 왕이 기뻐하며 말하였다. “그것은 그대들의 도움에 힘입은 것이지 나에게 무슨 덕이 있겠는가?” 882년 4월 일본국 왕이 사신을 보내, 황금 3백 냥과 명주(明珠) 10개를 진상하였다. 12월 고미현(枯彌縣)의 여자가 한 번에 아들 셋을 낳았다. 883년 2월 왕이 삼랑사(三郞寺)에 행차하여 문신들에게 각각 시 한 수씩을 짓도록 명하였다. 885년 2월 호랑이가 궁궐에 들어왔다. 3월 최치원(致遠還)이 돌아왔다.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황소(黃巢)의 난을 평정한 것을 축하하였다. 886년 북진(北鎭)에서 “적국 사람이 진에 들어와 나무 조각을 나무에 걸어 놓고 돌아갔다.”고 말하면서 그 나무 조각을 가져다 바쳤다. 거기에는 “보로국(寶露國)과 흑수국(黑水國)사람들이 모두 신라국과 화친하고자 한다.”는 열다섯 글자가 쓰여 있었다. 6월 왕이 병으로 편안하지 못하자 전국의 죄수들을 석방하고, 또 황룡사에서 백고좌를 열어 불경을 강론하였다. 7월 5일 헌강왕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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