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의 증언
전화벨 소리에 눈을 뜬 것은 아침 일곱 시가 훨씬 지난 뒤였다.
교환에게 모닝 콜을 부탁하고 침대에서 그냥 잠에 떨어졌던 것이다.
3층 객실 창문에는 동아 호텔 간판이 투사되어 빛나게 보이고 있었다.
"형규, 안 일어날 거야?"
"야, 조금만 더 자자구. 이거 피곤해서 미치겠구나야."
"게으르긴... 어서 일어나."
문호가 형규를 애써 깨워 샤워실로 보내고 룸 서비스에 부탁하여 커피를 두 잔 주문했다.
부산에 도착한 것은 새벽 3시 15분이었다.
조금이라도 눈을 붙여야 낮에 뛰어다닐 수가 있을것 같아 둘은 부산역에 있는 동아 호텔에
투숙했던 것이다. 샤워를 마치고 나오는 형규가 한결 가볍고 상쾌해 보였다.
"자, 오늘 계획을 짜 보자구. 어때 같이 뛰는 것보다 각자 뛰는 게"
문호가 수첩을 뒤적이며 형규에게 의사를 타진해 보았다.
그러나 형규는 이미 샤워를 하며 생각을 굳혀 논 터였다.
"좋지, 난 말야. 생각이 따로 있으니까. 에, 내가 오후 다섯 시까지 로얄 호텔 커피숍에 가
있을 테니까 그리로 연락하라구. 문호는 오늘 어떻게 뛰겠어."
"난 아무래도 시경에 들러서 김만호 쪽으로 뛰어야겠어.
자넨 진남포 쪽을 알아보는 게 좋을 텐데."
"좋아, 각자 뛰자구."
둘은 호텔을 빠져나와 거리로 나섰다.
한국 제일의 항구 도시이며 역사 깊은 도시라고는 하지만 아직은 서울에 비교할 만한
도시는 되지 못했다. 차량의 숫자며 건물의 밀도가 훨씬 미치지 못했다.
부산 공원 앞길에서 둘은 헤어졌다. 오후 다섯 시에 로얄 호텔에서 만나기로 했다.
문호는 곧바로 시경으로 발길을 돌렸다.
곽영근 형사 과장. 그는 경찰 대학에서 같이 강사 노릇을 한 적이 있었다.
매우 침착하고 생각이 깊은 사람이었다. 문호보다 나이도 훨씬 많았다.
사무실엔 아직 아무도 출근하지 않았다. 여덟시 삼십 분은 되어야 출근한다고 했다.
문호는 다시 거리로 나와 근처 다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수첩을 꺼내 메모를 보며 오늘 해야 할 일들을 구상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김만호를 만나 성기준의 현재 소재지를 파악하는 일이었고 다음이
두 사람의 관계를 추적하는 일이었다.
만약 둘 중에 하나라도 고강진과 손이 닿는 부분이 있기만 하면 막바로 성기준을 연행하여
공범 여부를 밝힐 작정이었다.
이 생각 저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에 벌써 출근할 시간이 다 되었다.
다시 시경으로 들어가자 곽 과장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새벽에 도착하셨겠군요. 마중을 나갔어야 했는데."
"별말씀 다 하십니다. 혼자 온 게 아니라서 별로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같이 오신 분은."
"아, Q신문 사회부 민형규 차장입니다. 지금 다른 곳에서 취재하고 있죠."
"민형규 기자라면 지난번 소위 '덫' 사건으로 유명해졌던 그 기자..."
곽 과장도 민형규를 잘 알고 있는 듯 했다.
"네, 저하고는 대학 동창이죠. 이번 사건에 몹시 구미가 당기는모양입니다.
또 따라나섰죠. 하여튼 참 비상한 친구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건 그렇고. 아침 식사는 "
"여기서 유명한 북어국으로 때웠습니다. 아주 시원하게 먹었습니다."
"하하, 부산 오시니까 생선 냄새밖엔 나는 게 없죠? 잠깐만 앉아 계십시오.
한 이십여 분 회의 좀 하고 나오겠습니다."
이곳 부산도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사는 대도시답게 크고 작은 사건들이 매일같이 발생하고
있었다. 특히 외국인 뱃사람과 이곳 적선지대의 여성 관계로 심심치 않게 사건이 터지고
있음을 알수 있었다.
문형동 디스코 홀 집단 싸움이며 화재 사건이 사회면을 장식하고 있었고 경제면은 봉제
하청업자들의 불황으로 부도업체가 늘어간다는 기사도 보였다.
문호는 몇장 더 뒤지다가 진남포의 동생이 해운대에서 자살한 기사를 찾아냈다.
85년부터 공해 지역에 하루 1천kg의 분노를 버리기로 했다는 커다란 기사 밑에 1단 20행
정도의 크기로 사진과 함께 실려 있었다.
'동백섬 바위 틈에서 변사체 발견.'
남부 경찰서는 지난 1일 오전 동백섬 바위 틈에서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28, 29세 가량의
장님 여인 시체를 발견했다. 시체는 바위의 평면 부분에서 발견되었는데 경찰은 다량의
수면제를 복용하고 자살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유서는 발견되지 않았으며 신원을
조사중이다.
문호는 기사를 오려 수첩에 꽂아 넣었다. 잠시 후 곽 과장이 회의를 마치고 나와 자기
방으로 안내했다.
"오래 기다리셨죠? 이거 미안해서."
"원 별말씀을 전보도 잘 받았고 또 여러 가지로 협조해 주셔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쪽 상황이 어떤지 궁금하군요."
곽 과장은 캐비닛을 열어 한 뭉치의 서류를 꺼내 한참 뒤적이더니 노란 화일로 묶은
서류를 뽑아 냈다.
"에, 요약해서 말씀 드리자면... 먼저 김만호 회장부터 설명해야겠군요.
여기 서면이라는 곳은 공장 지대로 유명한 곳입니다. 이곳에 대진 무역상사라고 있는데
생산 제품은 고무류, 염색업, 섬유류 등입니다. 이곳 회장이 바로 김만호 씨죠.
부산 지역에선 입김이 센 편입니다. 부산 토박이로 대대로 갑부였고 또 재산 관리도 잘해서
아주 알뜰하게 꾸려가고 있죠. 그런데 이분이 지난 30일 갑자기 고혈압으로 쓰러졌습니다.
병원에서는 어떤 충격을 받고 쓰러진 것 같다고 합니다만... 여하튼 가족들이 병원으로
옮기고 손을 써서 위험한 고비는 넘겼는데 그날 저녁 병원에서 또 행방불명이 되었습니다.
그의 신분상 경찰에서는 극비에 수사를 시작했습니다."
곽 과장은 김만호의 실종 사건과 소각된 서류에서 발견된 내용을 자세히 설명했다.
"편지의 내용이 송전되자 저는 그만 깜짝 놀랐죠. 아주 중요한 사실이 드러난 것입니다.
그래서 내려오시라고 연락 드린 거구요."
"놀라운 사실이 어떤 거죠? 곽 과장은 입을 다물고 잠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곽 과장의머리에서 감감히 떠올랐다가는 또 안개처럼 사라지던 성기준이라는 인물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문호가 먼저 말을 꺼냈다. "저는 지금 성기준이란 사람을 가장 유력한 공범으로 떠올리고
있습니다. 사건이 너무 미묘해서 한 마디로 단정하긴 어렵지만..."
"그렇다면 사건은 점점 더 분명해지는군요. 사실 김만호는 고강진의 아버지였습니다."
"네? 김만호가 고강진의?"
"맞습니다."
"아니 그걸 어떻게."
"조금 전에도 말씀 드린 바와 같이 김 회장이 충격으로 쓰러졌다고 하던 것은 고강진의
피살이 보도되었기 때문입니다. 또 자기 사무실에서 태우다 만 종이는 고강진이
김회장에게 즉 아들이 아버지에게 보내는 서신이었습니다. 김 회장은 지금 대답을
안하고 있지만 끝까지 버티지야 못하겠죠."
"결국 그렇게 되었군요. 고강진을 죽인 것은 김만호의 사주를 받은 성기준,
그리고 사건 자체는 성기준이 뒤에서 조종하고...
김만호와 성기준의 합작품인데 범인은 행방을 모르겠고..."
"지금 상황으로서는 별달리 생각할 방법이 없군요."
"그건 논리에 맞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그 사건은 어떻게 되는 거죠?"
"네 ?"
"아, 아닙니다. 좋습니다. 그럼 일단 김만호와 성기준을 만나기로 하죠."
"둘 다 김 회장 자택에 있습니다. 똑똑한 형사들을 붙여놓았습니다.
움직이는 대로 보고하라구요."
둘은 곽 과장이 대기시켜 놓은 차에 올라탔다. 곽 과장은 무엇을 결심했는지 입을 꽉
다물고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곽 과장이 상대할 사람은 적어도 대진 물산의 김만호 회장이었다. 섣불리 건드릴 만한
위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걱정이 되었으나 문호의 지원으로 다소 용기를 얻었던 것이다,
무엇이 겁나서가 아니라 아무래도 같은 동향보다는 처음 보는 사람이 다루기 훨씬 편하기
때문이었다. 둘, 즉 김만호와 성기준은 이번 고강진 피살 사건에 깊숙이 간여되어
있음을 알수 있었다.
문제는 직접적인 단서를 잡는 데 있었다. 직접적인 단서를 잡기 위해서는 두 사람을
유도 심문하여 자백시키고 증거물을 내놓도록 만드는 길밖엔 없었다.
차는 경찰서를 빠져나와 시청을 돌아 태종대 방향으로 달리고 있었다.
약 10달쯤 달리자 태종대가 마주 보이는 어느 커다란 저택이 나타났다.
차는 그 자택 앞에 멈춰섰다. 대리석 기둥에 김만호라는 문패가 걸려 있었다.
곽 과장과 문호가 내리자 작업복 인부가 경례를 딱붙였다. 미리 대기시켜 놓았던 형사들이었다.
"별일 없었나?"
"네, 사뭇 조용했습니다."
"수고했어. 오늘은 이만 철수해."
부하들을 돌려보내고 곽 과장은 대문 밑에 있는 인터폰을 눌렀다.
비디오 장치가 되어 있는지 문은 아무 저항 없이 스스로 열렸다.
정문에서 현관까지는 돌계단으로 되어 있었고 돌계단 좌우로는 잔디밭으로 되어 있었다.
정원에는 상록수와 꽃나무들이 겨울 채비를 한 채 가득히 심어져 있었고 정원 구석에는
풀장까지 있었다.
현관 건물에서 40대의 잘생긴 남자가 나왔다.
곽 과장이 문호의 귀에다 대고 그가 김만호의 맏아들임을 알려 주었다.
"이거 매일 고생이 많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무슨 일이 있으신가요?"
"아침부터 실례가 많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있으신가요?"
"곽 과장이 오시는 걸 아시고 지금 응접실로 나와 계십니다."
"서울서 오신 성기준 씨는..."
"지금 같이 계십니다.
오늘쯤은 곽 과장님이 한번쯤 더 오실 거라고 아침부터 말씀하고 계셨죠
. 자 아무튼 안으로 들어갑시다."
곽 과장과 문호는 응접실로 안내되었다. 문호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응접실은 보통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응접실이 아니었다. 글자 그대로 궁궐을 방불케 했다.
말로만 듣던 이태리제 소파와 휘황한 샹들리에, 각종 골동품들이 질서 정연하게
진열되어 있었고 응접실 옆으로 홈 바아가 있는데 알 수 없는 각국의 양주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투명한 유리창 밖으로는 남해
바다와 태종대가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 소파에는 김 회장 혼자 앉아 있었다,
성기준은 보이지 않았다. 둘은 김 회장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그는 요 며칠 사이에 얼굴이 몹시 수척해 있었다. 그러나 거만한 말투나 몸짓은 평소의
태도에서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다리를 꼬고 비스듬히 소파에 누워 파이프에 불을
붙이며 천천히 말을 꺼냈다.
"나에게 아직도 무슨 일이 남았소?"
문호가 무슨 말인가를 꺼내려고 몸을 추스리자 곽 과장이 옆구리 찌르며 말렸다.
"저 회장님 어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지금 호적에 올라 있는 아드님 외에..."
"아아, 또 그 얘기요. 그건 어제 말씀 드리지 않았소. 아니 호적에도 없는 아들을 대라니,
세상에. 여보 내가 벌써 육십을 훨씬 지났는데 그래 지금 내가 바람이라도 피울 나이라고
생각하오. 허참."
"..."
"무슨 다른 용건이 있어 온 거 아니오? 자 차나 들고 얘기합시다."
가정부가 쟁반에 따뜻한 차를 끓여 왔다.
커피도 흔한 국산차도 아니었다, 문호나 곽 과장으로서는 일찍 맛보지 못한 그런 향기로운 차였다.
"차맛이 괜찮죠? 북구라파 사람들이 겨울에 많이 마시는 차랍니다."
차를 마시는 동안 문호는 자꾸만 주위를 살펴보았다,
당연히 나타나야 할 성기준이 끝내 보이지 않았습니다. 애써 태연하려 했지만 끓어오르는
조바심을 주체할 수 없었다.
"저, 회장님 전화 좀 써도 괜찮을까요?"
문호가 김 회장을 바라보자 파이프로 테이블 위의 전화를 가리켰다. 사용해도 좋다는 신호였다.
문호는 서울 수사 본부로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김만호가 듣도록 큰 소리로 부하를 불렀다.
"아, 나 반장이야. 누구? 최 형사. 음, 별일 없지.
지금부터 서울역, 강남 터미널, 김포 공항 국내선을 봉쇄해서 성기준. 아, 성 박사
그 사람 말야 눈에 띄는 대로 연행해. 괜찮아, 걱정 말고. 내가 책임질 거니까."
수화기를 내려놓고 김만호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 보았다. 안색이 창백해지며
당황하는 빛을 보였다.
"아니, 여보쇼. 성 박사가 뭐 어쨌다는 거요."
"본인은 극구 부인하고 있지만 저희들 판단은 따로 있습니다."
"무슨 판단이요, 도대체."
"공범이요, 공범. 죽은 당신 아들 고강진 살인 사건 공범을 얘기하는 겁니다."
"뭐라구요? 고강진. 걔가 어째서 내..."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곽 과장이 말을 막고 나섰다.
"김 회장님이 더이상 버티시면 저희들도 무례하게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조용히 시작해서 조용히 끝나도록 협조해 주십시오."
"아니 갈수록 태산이라더니... 끝내자니, 뭘 끝내자는 거요.
전화 걸어요. 당신네 국장하고 직접 통화 좀 합시다."
"국장님이요? 직접 거시죠. 걸어서 어쩌겠다는 겁니까?"
문호가 테이블 위의 수화기를 들어 김 회장에게 건네 주었다, 김 회장은 처음 보는 젊은
형사가 의외로 강경하게 나오자 그만 당황하고 말았다. 경찰 국장과는 평소 친분도
두터웠고 또 경찰서 과장쯤 평소 우습게 알고 있었는데 막상 사건으로 만나고 보니
생각과는 달랐다. 더구나 고강진이 자기의 아들임을 알고 온 것이 확실해지자 그만
기가 죽어 버리고 만 것이다. 그뿐인가 공범으로 몰리게 된 성기준을 서울로 빼돌리고
난 직후여서 더욱 그랬다.
성기준은 절대 물러설 수 없다며 버텼지만 자기의 입장을 생각해서 참아달라고
간곡히 부탁하여 둘이 들이닥친 것을 알았을 때 바로 뒷문으로 내보냈던 것이다.
"좋소, 사과합니다. 그러나 용건만은 분명히 합시다."
"네, 더욱 좋습니다. 저희들도 시간이 남아 돌아가는 것은 아니니깐요."
"여보, 젊은 형사. 고강진이라는 배우가 어떻게 내..."
문호가 피우던 담배를 재떨이에 부벼끄고는 김 회장을 노려보았다.
"회장님, 담배 연기는 사라져도 냄새는 오래 남습니다, 성기준 씨가 여기서 사라졌다고
제가 놓칠 것 같습니까? 제 별명이 사냥개입니다. 왜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하시죠.
성기준 씨 체포는 시간 문젭니다. 국장을 부르신다고요? 국장 아니라 내무부 장관을
불러도 내 소관은 아무도 간섭 못합니다. 이 박문호가 그렇게 우습게 보이십니까?
그리고 회장님은 고강진을 아드님이 아니라고
우기시는 데 이미 다 밝혀진 사실을 가지고 왜 고집을 피우십니까.
꼭 성기준 씨 같이 말입니다. 성기준 씨가 뭐랬는지 아십니까. 다른 범인 목격자는
다 애꾸라고 하는데 본인만 애꾸가 아니라고 고집 피웠습니다. 두 눈이 말짱하다는 거죠.
그 고집 참 기묘한 공통점입니다. 자, 그러지 마시고 솔직하게 털어놓고 이야기합시다."
문호는 일어나서 소파 주위를 천천히 걸으며 다시 담뱃불을 붙였다.
김 회장이 결심하고 고백할 시간적 여유를 주겠다는 제스처였다.
그러나 김 회장은 조금도 자세를 흐트리지 않고 소파에 기댄 채 두 눈을 꽉 감고 있었다.
그렇게 십 분이나 흘렀다. 잠시 후 눈을 뜨며 몸을 뒤척이더니 무엇을 결심했는지 손으로
탁자를 탁 치며 말을 꺼냈다.
"자, 말하죠. 고강진, 걔는 내 아들입니다. 틀림없는..."
"그런데 왜 죽였습니까?"
소파를 돌며 걷던 문호가 딱 멈추어 서서는 김 회장을 노려보며 소리를 버럭 질렀다.
"당신네들이 뭐라고 해도 상관없소.
그러나 내가 그 아이의 아버지라는 것이 세상에 알려질까 두려워는 했어도 죽인 일은 없소.
그건 당신네들이 잘못 짚은 거라 이겁니다. 좀더 알아보시오."
문호는 김만호의 이런 소리에 정색을 하고 마주 앉았다. 정식으로 그를 옭아맬 작정이었다.
그의 얼굴에 가까이 대며
"회장님, 저 좀 보시죠."
하며 단호한 어투로 지시하자, 누워서 눈을 지그시 감고 있던 그가 허리를 일으키며
눈이 휘둥그래졌다.
"회장님 모든 행위나 사고에는 논리적인 것만이 통용됩니다.
말장난이나 발뺌이나 궤변 같은 것은 이 시대에는 통하지 않습니다.
물론 저희들이 회장님을 의심하는 것도 뚜렷한 물적 증거가 없으니 말장난으로 그칠
소지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부터 드리는 제 말이 논리에서 벗어나거나
지나친 추측이라고 판단하시면 말씀해 주십시요. 그러면 다른 방법을 강구해 볼 테니까요.
저희들은 몇 가지 자료를 수집했습니다.
그 첫째가 죽은 고강진이 회장님 바로 김만호 당신의 아들이라는 점입니다.
다행히 그 점은 회장님이 긍정 하셨으니까 이 문제를 더 이상 거론할 필요가 없습니다.
둘째, 회장님은 최근까지 죽은 고강진으로부터 협박을 받고 있었습니다.
고강진은 자기의 친아버지가 김만호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습니다.
자기가 성공하기 전까지는 그런 문제는 염두에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일단 연예인으로 정상을 달리게 되자 문제가 달라진 것입니다.
우선 연예부 기사들이 가십 (gossip)으로 다루기 시작한 것입니다.
'과연 고강진의 생부가 누구냐' 별별 억측이 다 나돌았죠.
고강진 자신도 까막득히 잊었던 아버지 문제를 점차 의식하게 된 것입니다.
어머니를 조르기 시작했겠죠. 시달리다 못한 어머니가 아버지 얘기를 해주었을테구요.
S-TV에서 조사한 바로는 고강진 어머니는 젊은 시절 한때나마 연극 배우였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회장님은 돈의 힘으로 한동안 동거 생활을 했거나 아니면 엔조이
정도로 관계를 맺었겠죠. 그러나 그 여인은 당신에게 잊혀버릴 여인이 되었고 회장님은 그
녀가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의 생활비를 주어가며..."
"아니, 잠깐..."
김 회장이 문호의 말을 갑자기 중단시켰다.
"지금까지의 얘기는 거의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틀린 점은 지적을 하고 넘어갑시다.
오해받기는 싫으니까요. 고강진 어머니가 내게서 떠날 때는 내게서 소식도 없이 가버렸습니다,
그후 그가 아이를 낳았다는 소문만 들었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 줄은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난 물질적으로나마 도움을 주려고 했지만 난 끝내 그 일에 실패하고
말았고 또 그 일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고강진이 불쑥 나타났죠.
자기의 어머니 사진과 함께. 당신이 몹시 당황했으리라는 것은 쉽게 납득이 갑니다.
왜냐하면 고강진의 요구가 너무 무리였기 때문입니다.
그 요구 조건이란 자기를 김만호 당신의 호적에 입적시켜 달라는 것 아니었습니까?
바로 그거였죠. 그런데 문제는 회장님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호적에 아들 하나 더 오르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이겁니다.
회장님은 차기 국회에 진출하겠다고 공언하셨죠.
자칫 루머가 퍼지면 큰 타격을 입게 되고 제일 두려워했던 점은 바로 그것 아닙니까.
그리고 다음으로 큰 문제는 가정 내부에 있었습니다.
자녀들은 소위 당신네들이 얘기하는 딴따라가 같은 호적에 형제로 입적하는 것을
결사 반대하리라는 것을 예측했겠죠. 그러나 사실은 '엉뚱한 사람이 아들로 입적되어
재산 상속의 몫이 적어져 반대할 것이다'라는 진실한 반대가 큰 벽이라는 것도 잘 알고
계셨을테구요. 또 아버지의 권위 문제도 있고, 회장님이 주저하며 시간을 끌자 이번에는
고강진이 계속 압력을 넣는 편지를 띄우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자 결심을 굳히셨죠. 처음부터 낳지 않은 셈치자 까짓거 없애 버리자
이렇게 생각한 거죠."
김 회장이 파이프로 테이블 위의 유리를 딱 때렸다. 유리가 우지끈 하고 깨어져 버렸다.
벌떡 일어나며 문호를 노려보았다.
"뭐라구요? 아니 그런 비약이 어디 있습니까?"
"회장님 조금만 참고 더 들어보세요.
아까도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비약적인 상상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절대 논리에 어긋나는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회장님은 궁지에 몰리게 된 것입니다. 가족들과 사회 어느 것 하나
포기할 수 없는 당신의 재산이니까요. 그래서 힘세고 담력 있는 사람을 골랐습니다.
그리고 회장님이 구성하신 치밀한 연극에 투입시켰습니다. 아직도 우리는 범인이
어떤 방법으로 열차를 탈출해 나갔는지 그 방법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방법도
곧 알게 됩니다, 회장님도 신문을 보셔서 알고 계시겠지만 건장한 남자라면 신장이
평균 170cm이상 몸무게 70kg이상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덩치 큰 사람이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이 가능한 사람은 회장님밖에 없습니다.
기막힌 연극에 조연으로 등장한 또 한 사람의 배우가 있었으니까요.
그게 바로 성기준 씨 아닙니까?"
말을 잠깐 멈춘 문호가 잔에 남아 있는 차로 목을 적시며 김 회장을 바라보았다.
이 때 응접실과 딸린 방문이 열리며 그의 장남이라는 사람이 흥분된 얼굴로 나타났다.
"여보 당신 듣자듣자 하니 못하는 소리가 없는데 뭐가 어쩌고 어째요?
고강진이 우리 아버지 아들. 그럼 내 동생이란 말이오? 그리고 성 선생님이 살인 공범자라구요.
당신 경찰이라고 말을 그렇게 함부로 해서..."
"그만 그만. 네가 왜 나서는 게야. 물러가 있어, 어서.
그리고 어디 그 재미있는 영화 구경 좀 더 하자구.
넌 나가 있으라는데 왜 그렇게 멍청하게 서있어, 서있길..."
김 회장이 아들에게 소리 지르자 꿈쩍하고 놀라더니 들어왔던 문으로 다시 나갔다.
김 회장이 빙긋이 웃음을 띠어 보이며 다시 얘기를 계속하라는 듯 파이프를 꺼덕이며
눈을 감는다.
"회장님은 성기준씨와 범인을 불러다 치밀한 계획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범인은 고강진의 별장에서 목졸라 살해한 다음 대형 백에다 시체를 집어넣고 미리 예약된
열차에 올라탔습니다. 성기준씨는 맞은편 침대차에 승차했구요.
열차가 대전에 도착하기 직전에 성기준은 범인을 불러내어 화장실에 숨도록 지시하고
뒤따라 자신도 화장실로 들어갔죠. 그리고 승무원이 복도에 어슬렁거릴 무렵 화장실에서
나오는 겁니다. 화장실엔 아무도 없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시사한 셈이 되는 것입니다.
승무원이나 범인이 연기처럼 사라졌다고 생각한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고강진시체가 발견되어 어수선한 틈을 이용하여 승강구로 나왔다가 열차가 대전 도착을
위해 속도를 줄일 때 뛰어내리는 거죠. 그 길만이 그가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습니다."
"당신 이제 보니 참 재미있는 청년이구만. 그래 증거는?"
"증거요? 증거야말로 참으로 재미있는 게 있죠.
성기준 씨는 수사에 혼선을 빚기 위해 스스로 범인 목격자임을 자청하고 나선 겁니다.
그리고는 범인은 애꾸가 아니다. 자기와는 대화도 나누고 담뱃불도 빌려갔다 이겁니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스스로 포박당할 끈을 제게 맡긴 것이나 다름없었죠. 그가 범인이 애꾸가 아니다라고 말한
것은 있을수 있는 일입니다. 잘못 볼 수도 있으니까요.
아니면 관심 없이 흘려 버릴 수도 있는 문제니까요. 문제는 그가 애꾸다 아니다 하는 게
아니라 범인은 성기준 씨에게 담뱃불을 빌려달라고 말한 사실이 있다고 진술했는데
사실 범인은 그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순간 김 회장의 얼굴이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분명히 무엇인가에 충격을 받은 것이 분명했다. 이 표정을 놓칠 문호가 아니었다.
힐끗 쳐다보고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김 회장은 다시 입술을 지그시 물며 눈을 감았다.
"그래, 성 박사가 범인에게 담뱃불을 주었다는 얘기는 범인과 성 박사 두 사람만이 나눈
대화일 텐데 당신은 무슨 증거로 그런 대화를 나누었다는 게 허위 진술이라는 겁니까?"
"말씀 드리죠. 범인이 성기준 씨게게 담뱃불을 빌려달라고 말했을 때는 열차가 막 출발한
직후라고 했습니다.
그 후 천안에 도착할 때까지 그 앞을 지나간 사람은 사건 당시 목격자로 나섰던 바바리를
입은 여인 한 사람뿐이었는데 이 여자도 범인 얼굴을 보고 스산한 무서움이 들어
되돌아왔다고 증언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드리는 말씀의 초점은 열차가 천안을
막 출발할 무렵입니다. 아까 말씀 드린 바바리 여인이 열차가 출발하는 진동에 잠이
깨어 커튼 사이로 밖을 내다보니까 범인의 침대에서 담배 연기가 나오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것은 두 가지를 의미합니다.
그 하나는 범인은 그 때까지 침대 속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는 얘기구요,
또 하나는 그가 성기준 씨에게 담뱃불을 빌리지 않았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건 무슨 뜻이죠."
"아직 이해가 가지 않으십니까. 조금 전 범인은 성기준 씨에게 담뱃불을 빌려달라고
했다는데 그러면 범인은 담배만 가지고 있었고 라이터나 성냥이 없었다는 얘기가 되죠."
"그렇구만... 그래서요."
"그런데 열차가 천안에서 출발할 때는 그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는 이겁니다."
"그 때도 누구에게선가 빌리지 않았을까요?"
"아닙니다. 사건 당일 범인 목격자는 자진해서 다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담뱃불을 빌려 주었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또 객관적인 증거도 있었습니다, 열차가 천안에 도착할 무렵이면 승객은 물론이고
승무원까지도 깊은 수면에 빠지거나 푹 쉬는 시간입니다. 승무원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서울서 천안까지 불과 한 시간 남짓한 시간을 침대차로 갈 사람이 없기 때문이죠.
조사에서 밝혀지기도 했지만요. 그 시간에 담배가 피우고 싶었어도 라이터나 성냥이
없으면 포기했거나 승무원에게 빌렸어야 하는데 승무원 누구도 그런 사실은 없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음--"
김 회장은 눈을 감은 채 깊은 신음을 뱉고 있었다.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김 회장님 한 가지만 더 여쭤 보겠습니다. 고강진이 회장님의 아드님이란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누굽니까?"
"..."
"극히 소수의 사람이죠? 김 회장님이 젊어서부터 가까이 했던...
모든 얘기를 다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 같은 사이. 이번 사건 때문에 김 회장님이 자주
불러내리며 의견을 나누었던... 성기준 그 사람 아닙니까?"
회장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이런 사실이 세상에 알려질까 봐 회장님은 전전긍긍하고 있었습니다.
그 한 가지 증거를 말씀 드릴까요. 회장님은 범인 증발 연극 외에 자신이 증발하는 연극을
또 한 번 연출했습니다.
그 중요한 목적은 고강진으로부터 날아온 편지, 사진 등을 병원에서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 가지고 있던 그것들을 소멸시키는 게 큰 부담이 갔죠.
고강진이 죽은 것을 확인하고 순간적인 쇼크로 입원은 했지만 마음은 거기에만
쏠려 있었습니다. 인멸, 증거 인멸 그 목표를 위해서 식구들을 병원으로 소집하게
했고 집안이 비어 있는 틈을 이용하여 탈출한 거죠. 회장님은 모든 것을 소각했다고
생각하시겠지만 경찰에서는 그 증거물들을 고스란히 입수해
냈습니다."
"뭐라구, 증거물을... 그건 내가 태워 버렸는데."
"하하 이제서 고백을 하시는군요. 회장님은 경찰과 가족들 그리고 직원들이 들이닥치자
미처 다 타지 못한 종이 뭉치를 쓰레기통에 버렸습니다.
회장님이 과학 수사가 어디까지 온 줄 아십니까? 잿더미 속에서도 글씨는 판독이 됩니다.
저희들은 그걸 입수한 겁니다."
"아-- 아-- "
김 회장이 머리를 움켜쥐며 쓰러졌다. 가족들이 쫓아나와 부축을 하고 있었다.
그는 무의식중에도 손을 허공에 내저으며 헛소리처럼 중얼거렸다.
"그러나... 난... 난 걔를 죽이지 않았어. 난 걔가 죽었기 때문에 쇼크를 당한 거야.
정말이야. 성기준, 그 사람이 부질없는 짓을 한 모양이군."
문호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족 중 누군가 의사를 부르고 난리를 피웠다.
누군가 돌아서며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소리가 문호의 귀를 스쳤다.
"쳇, 왜 재산 분배는 안하는지 모르겠어."
큰아들의 부인 즉 김만호의 큰며느리였다.
순간 문호는 부산의 대재벌 김만호의 회장의 대진 물산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을수 있었다.
의사가 도착하기 전에 김 회장은 의식을 회복했다.
누운 채 그는 곽 과장과 문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박문호라고 했죠? 당신... 논리에 빈틈은 없었소.
모든게 당신네들이 수사한 그대로이고, 내가 고강진 애비라고 말을 했지만 이를
믿기에는 너무 문제가 많았소. 그 여자는 내게서 잠깐 머물다 말없이 떠나 버렸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저했던 건 그런 이유가 있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절대 죽일
생각은 없었습니다. 나이는 들었어도 나도 야망이 있는 사람이외다. 재산은 애들한테
나누어 주고 정계에서 남은 여생이나 바치려고 했던 겁니다, 믿어주십시오.
내 아들이라고 찾아온 녀석을 내가 왜? 어떻게 죽일수 있습니까?"
그의 말은 진실로 가득 차 보였다. 액면 그대로를 다 믿을 수는 없지만 어쩌면,
이 사건의 배우는 김만호가 아닌 성기준일지도 모를다는 의혹이 떠올랐다.
그리고 김만호가 고강진을 아들로 인정하지 못하는 심정도 이해는 갔다.
문호는 혈액형 조사로 부자 확인을 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문호가 이 사건이 발생한 처음부터 성기준을 공범자로 보았을 때는 방송국측과의
관련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김만호의 갑작스러운 출현으로 사정은
급회전하여 부산으로 무대가 옮겨졌다.
김만호와 성기준 그리고 고강진으로 이어지는 끊을 수 없는 튼튼한 끈을 실감하게 되었다.
그러나 문호가 고심하고 있는 또 하나의 사건 즉 진남포의 피습과 박영숙의 자살 사건.
이쪽, 즉 김만호의 방향에도 진남포가 낄 만한 틈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진남포와 고강진 사건은 어떤 관계가 지속적으로 유지되고 있는 것이
확실한데 도무지 헤아려 잡아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아무래도 문제는 사건 배후의 실제 인물이 성기준인가 김만호인가 하
는 것이 가장 큰 초점이었다. 김만호의 태도로 보아서는 범행에 직접 간여하지
않은 듯한 예감도 들었다. 그렇다면 이 사건은 모두가 성기준이 진두 지휘했단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호의 가슴에는 어딘가 석연치 않은 찌꺼기가 앙금처럼 남아 있었다.
성기준의 너무나도 떳떳한 행동 때문일까?
시간이 얼만가 지난 후에서야 주치의가 도착했다. 오는 즉시 혈압부터 재 보았다.
위험 수위까지 올라 있다고 했다. 체온은 별 이상이 없었다. 의사는 김 회장에게 절대
안정을 강력히 요구했다.
"회장님 특실을 마련해 드릴 테니 입원을 하시죠. 아무래도 안정하기에는 집보다는
병원이 훨씬 유리하니까요. 면회도 엄격히 통제하시고 또 잡념을 깨끗이 잊으셔야 합니다,
오늘 당장이라도."
"아냐 아냐, 일이 너무 커졌어. 잘못하다가는 큰 오해받게 생겼어. 오해로 끝날 일
같으면 별것 아닌데 잘못하면 치명상을 입게 돼. 한 이삼 일은 지나봐야 알겠어.
이거 요새 나 때문에 고생이 많군. 진정제나 한 알 주고 돌아가라구.
무슨 일 있으면 다시 연락할 테니까."
"호흡은 좀 어떻습니까?"
"호흡도 힘들지만 머리가 몹시 아프군."
"혈압 증세라 그렇습니다. 주사를 한 대 놔 드리죠. 좀 가라앉을 겁니다."
의사가 간호원에게 주사를 놓도록 지시하는 동안 문호는 주치의를 데리고 베란다로 나갔다.
"서울 특별 수사반 박문호 형삽니다. 몇 가지 여쭤볼 게 있어서요."
"아, 네, 그런데 회장님 주변에 무슨..."
"뭐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그보다도 혹시 회장님 혈액형을 아시는지."
"아다마다겠습니까. 제가 10여 년 이상을 보살펴 드리고 있는데. 회장님은 O형입니다."
"혹시 N, MN, M으로 구분하는 것도 해놓으셨는지."
"물론입니다. 회장님은 MN형입니다."
"역시 생각대로군. O형에 MN이라... 그러면 꼭 맞아떨어지는데."
"네? 무슨 말씀이신지."
"아닙니다. 그냥 혼자말로... 그런데 회장님 최근 다른 증세를 호소하신 일은 없었습니까?"
"뭐 별달리... 엊그제 졸도 사건 외에는."
"감사합니다."
문호와 주치의는 다시 응접실로 돌아왔다.
의사의 말에 의하면 김 회장에게 별다른 변화가 없는 것은 분명했다.
의사와 간호원이 돌아가고 가족들을 다시 다른 곳으로 보내놓고 세 명만이 남았다.
"회장님 한 마디만 더하고 물러가겠습니다 고강진은 O형이고 또 다른 구분으로
N형임이 밝혀졌습니다. 또 고강진 어머니도 O형에 MN형임이 밝혀졌구요.
이것은 무슨 말이냐 하면 과학적 근거에 따르면 가령 김 회장님이 고강진이 아버지일
수 있는 혈액은 조사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는 말이 성립됩니다. 저희들 조사와 주치의
답변은 정확하게 일치되었습니다. 회장님의 혈액은 O형에 MN 형이면 고강진의
아버지로 믿어도 좋다는 거죠. 그런데 회장님 피는 O에 MN형입니다. 즉 고강진은
회장님의 아들이란 뜻이죠."
"..."
"어떻게 할까요? 저희들은 돌아가겠지만 성기준 씨에 대해서 하실 말씀은..."
"없어요. 아무 것도."
"그럼 필요할 때 다시 찾아뵙도록 하죠."
문호와 곽 과장은 의례적인 인사만 나누고 돌아섰다.
"자, 점심 시간도 훨씬 지났는데 어디 가서 식사나 합시다. 어디로 갈까요?"
곽 과장이 문호에게 식사를 제의해 왔다.
"부산이야 제가 어떻게 압니까. 곽 과장님이 안내하십시오. 저야 생선에 불고기,
뭐 먹는 거라면 닥치는 대로 다 먹는 잡식 동물이니까요. 하하."
"좋습니다, 불고기라면 해운대가 좋고 생선회라면 자갈치쪽이 좋은데...
자 불고기로 합시다. 해운대집 괜찮거든요. 어이 기사! 해운대 갈비집으로 몰아."
문호와 곽 과장을 태운 승용차는 다시 도심으로 들어와 부산역을 지나고
지하철 공사가 한참인 해운대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김 회장을..."
문호가 곽 과장에게 질문했다.
"글쎄요. 지금 제가 어떻게 판단을 해야 좋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무리 자기
출세에 지장이 있다고 해도 그는 성공한 사람이고 쌓아놓은 명예가 있는데 사람을
죽일 생각까지 할까요. 더구나 아버지라고 찾아온 사람을...
문제는 성기준 씨는 어떻게 등장하느냐 무슨 역할을 맡았느냐 이게 문제죠."
"저도 지금 그 생각입니다. 그 사람이 열쇠를 가지고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고민하고 있는 것은 진남포 사건입니다.
그의 동생이 자살했죠. 또 목격자에 따르면 범인은 억센 경상도 사투리를 쓴다고 했구요.
진남포 자신은 좀체로 입을 열지 않고...
지금 Q 신문 민 기자가 나름대로 취재를 하고는 있지만 진남포측이야 피해자니까
무슨 기대를 걸 수는 없지만 요는 고강진 사건과 진남포 사건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느냐 이게 문제입니다. 과연 두 사건이 같은 성질의 사건이냐 별개의 사건이냐
이게 중요한 겁니다."
기묘하게 얽힌 사건. 지금까지 문호가 겪은 사건 중 이렇게 기묘하게 얽힌 사건도
흔하지는 않았다. 사건들은 언제나 문호에게 정면으로 도전해 왔고 그 때마다
문호도 한치의 양보 없이 도전에 대응해 왔었다. 때로는 엉뚱한 사람을 범인으로
쫓다가 세월만 보낸 사건도 있었고 또 어떤 사건은 순식간에 경쾌하게 마무리 지은
사건도 있었다.
또 어떤 사건은 범인이 제발로 걸어오는 웃지 못할 '헤프닝'이 벌어지기도 했었다.
어쨌든 이러한 미묘한 사건이 터질 때마다 문호의 마음은 일면 무겁고 초조하기도
했지만 또 다른 일면에는 사건 추적과 해결이 재미있기도 했다. 지능범 담당 형사의
특수 체질이라고나 할까. 열차에서 연기처럼 사라진 범인, 김만호의 출현,
고강진과의 새로운 관계 노출, 성기준의 알 수 없는 행동, 진남포 피습 현장의 미스터리...
하나하나가 얽힌 실처럼 복잡했지만 어딘가 숨어 있는 실마리를 찾으면 또 사건은
일사천리로 풀려가기도 했다.
수사의 즐거움은 바로 이런데 있었다.
이때 과장이 한 마디 불쑥 내던졌고 이 말에 문호는 가슴이 섬찍했다.
"박문호 씨, 만일 말입니다. 만에 하나라도 성기준이 공범이 아닌 경우는 어떻게 됩니까?"
이 말은 문호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약점의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다.
지금까지 추리해 온 바에 의하면 그는 갈 데 없는 공범이어야 했다.
그러나 곽 과장의 말대로 만일 그가 이번 사건과 전혀 관계없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되나.
정신없이 뛰어다니다가도 그 문제만 머리에 떠오르면 그만 마음이 흐트러져 버렸다.
상황 증거만으로는 사건해결이 되지 않는다. 직접 증거. 그게 있어야 할 텐데.
지금으로서는 전혀 증거를 포착할 수가 없었다. 정말 우연의 일치로 성기준 씨가 범인의
맞은편 좌석에 앉아 부산에 가는 길이었다면 지금까지의 수사는 모두 백지가 되는 것이다.
고강진이 죽던 날 증발한 이화영도 어이없이 끝나 버렸다.
그런데 만일 지금까지 자기 스스로도 두렵게 생각해 왔던 성기준 공범 가능성이
깨어져 버린다면... 그렇게 된다면 지금까지의 고생은 도로아미타불이 되는 것은 물론
수사 방향도 어떻게 설정해야 할지 앞이 캄캄할 뿐이다.
박문호가 대답을 못하고 우물쭈물 하자 곽 과장이 다시 말을 이었다.
"만일 말입니다. 성기준이 공범이 아니라면 수사 방향은 어디로 잡힐까요?
오늘 김만호 회장을 만나고 나서는 그 생각이 자꾸 떠오르는군요."
"글쎄요. 사태가 그쪽으로 기울어진다면... 글쎄요."
둘은 한동안 아무 말도 못하고 차창만 내다보고 있었다.
초겨울의 을씨년스러운 해수욕장과 비치 호텔을 옆으로 끼고 돌아 이 곳 신생 도시인
해운대로 들어섰다. 5, 6년 전만 해도 이런 건물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시내 못지 않게 크고 깨끗한 건물들이 꽉꽉 들어차 있고 보지 못하던
호텔과 여관들이 즐비하게 서있었다.
해운대 갈비집은 해운대의 끝쯤에 위치하고 있었다.
시간도 시간이려니와 계절적으로도 관광객이 없는 때라 그런지 생각보다
훨씬 조용했다.
곽 과장은 문호를 따뜻한 방으로 안내했다.
"저 때문에 폐가 많습니다."
"원 별말씀을. 부산에 오셨으니 제가 모셔야죠.
만일 제가 서울에 갈 일이 있으면 못 본 척하실 작정입니까?"
둘은 허허거리며 웃고 오랜 만에 편한 마음으로 식사를 주문했다.
"곽 과장님 잠깐만 앉아 계십시오. 서울에 전화 좀 걸고오겠습니다."
"거 참, 박문호 씨 어지간하군요. 아, 식사나 하고 일을 보시든지...
자 자, 천천히 들고 소화나 되거든 시작합시다."
곽 과장의 만류에 엉거주춤 서 있던 문호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서울서 천지 개벽할 일이 생겨도 부산 해운대 갈비나 뜯고 놀랍시다.
요샌 놀랄 일이 너무 많아서..."
둘이 잡담을 나누고 있는 사이 식사가 날라져 오고 반주용 맥주가 몇 병 따라왔다.
둘은 마음을 푸근하게 풀어놓고 고기를 뜯기 시작했다.
식사가 어지간히 끝나자 문호가 더 이상 못 기다리겠다는 듯 벌떡 일어났다.
"아무래도 전화 한 번 걸어야겠습니다.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문호는 곽 과장에게는 미안했지만 자꾸만 이상한 예감이 들고 마음이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종업원의 안내를 받아 전화기가 있는 곳으로 가서 다이얼을 돌렸다.
문호가 전화를 걸러 나간 사이 곽 과장은 문호의 예리한 판단과 부지런한 성격,
그리고 유창한 화술에 저으기 놀라고 있었다.
대학강의 시절 알기는 했지만 막상 수사 업무에 부딪치고 보니 일에 임하는 태도나
머리 회전에는 그만 혀가 내둘러지고 말았다.
사람이 겉보기와 속이 똑같구나 생각을 하고 있는데 문호가 헐레벌떡 숨가쁘게 뛰어들어왔다.
"곽 과장님 일이 또 뒤엉키기 시작했습니다."
얼굴이 창백한 채 말도 제대로 못하는 문호를 보고 곽 과장이 벌떡 일어났다.
"뭐가 말입니까?"
"성기준을 체포하려고 수사망을 펼쳐놓고 사무실에서 상황 점검을 하던 부하에게,
찾아온 사람이 있었답니다.
약 한 시간 되었다는데 그 사람은 그 사건 당시 현장에 있던 신부랍니다.
바로 범인을 목격했던 장본이기도 하죠. 이분이 오늘 신문 기사를 읽고 경찰측의
추리에 구멍이 나 있다면서 나를 만나보겠다는 겁니다.
그 사람 말대로 대전 도착하기 전 화장실에는 아무도 없었다는 겁니다.
그걸 자기가 증명해야겠다구요. 절대 아니랍니다.
성기준의 공범혐의는 순식간에 깨지고 우리는 수사 방향을 잃게 된 것입니다."
문호는 창백한 얼굴로 곽 과장을 바라보았다.
"지금 몇 시죠?"
"세 시 반입니다."
"서울 가서 신부님을 만나보아야겠습니다. 아무튼 빨리 올라가야겠는데요.
조금 있으면 민 기자와 약속 시간입니다. 만나는 대로 즉시 올라가야 합니다."
문호는 말을 마치자 식탁 뒤에 있는 소파에 털썩 주저 물러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