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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모당은 분명 3년 시묘살이를 하는 여막을 뜻하는 것 같은데, 終은 끝나다, 극에 이르다, 완료되다, 죽다 라는 의미인 바, 終慕라는 말은 그리움을 끝낸다는 말인가, 부모가 죽어 그립다는 말인가, 그리움이 극에 이른다는 말인가.
종모당은 그리움을 끝내는 집, 그리움이 극에 달하는 집, 부모가 죽어 그리움의 집, 그리움이 완료 되는 집 등으로 해석 되니, 필자도 정확한 정의를 하기가 어렵다.
시묘살이 여막(廬幕)이 곧 종모당이니 3년 시묘 후에는 그리워하는 것을 끝낸다는 의미의 집이란 말인가. 市西 金璇이 終慕라는 단어를 썼기에 시서가 뜻하는 종모를 정확히 알고 싶다.
그런데 종모당 題 맨 마지막 부분에 이렇게 정의하였다. “終身孝慕 曷有其極 玆以之名其堂曰終慕” 즉 죽을 때까지 사모함이 어찌 끝이 있으리요. 그래서 그 당을 이름 하여 종모라 하였다.
종모는 그리움의 끝이 없다는 말이었다. |
김선은 1568년(선조1)-1642년(인조20) 시대의 대문장가로 나주에 살았으며, 남간의 부 덕양공이 임란 때에 의병으로 나아갈 때 남간 형제를 김선 댁에 맡겼다는 기록이 있어, 아버지의 친구이면서, 남간 형제의 문학적 도반으로 볼 수 있다. 남간은 1584년-1638년 시대의 사람이니, 김선보다 16년 후배이면서 4년 먼저 돌아가신 것이다. |
嗚呼今之天乃三代之天也(오호금지천내삼대지천야)/아! 지금의 하늘은 삼대의 하늘이요
今之人乃三代之人也(금지인내삼대지인야)/지금의 사람도 삼대의 사람이다.
是何天其天而人不人歟(시하천기천이인불인여)/그런데 어째서 하늘은 그 하늘인데 사람은 그 사람이 아닐까.
爲人父(위인부)/사람의 아비 된 자는
皆止於慈(개지어자)/사랑이 머물고 있는데도
爲人子(위인자)/사람의 자식들은
鮮敦于孝(선돈우효)/효행을 돈독히 하여야 하는데
逮德下衰(체덕하쇠)/후세에 와서 덕이 내려가고 쇠하여
人失其天歟(인실기천여)/사람들은 그 천성을 잃을 것인가.
<해설>
○三代之天의 삼대(三代)는 하(夏)ㆍ은(殷)ㆍ주(周)의 시대를 말한다.
○三代之人의 삼대는 항상 본인을 중심으로 하면 父-我-子이다.
○天其天而人不人은 하, 은, 주 나라는 그대로인데, 父-我-子 삼대 중에 한사람이 죽으면 삼대가 깨어져버리므로 이러한 표현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受中正之氣(수중정지기)/곧고 올바른 기운을 받고
荷付畀之重(하부비지중)/짊어지고 있는 중책을 지고
知其性之所有而全其天者(지기성지소유이전기천자)/자신의 성품을 알아
이에 그 천성을 보전한 자는
獨於羅應瑞見之矣(독어나응서견지의)/홀로 나응서에게서 보았다.
<해설>
○중정(中正)은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고 치우침이 없이 곧고 올바름을 뜻한다.
○畀之重 즉 중책은 곧 孝라고 생각됨
生而粹美(생이수미)/태어 나면서 순수하고 아름다워
文章糟粕(문장조박)/문장이야 찌꺼기 같지만
長而純備(장이순비)/자라서는 순전히 갖추어졌으니
孝悌醢醬(효제해장)/효우애가 해장처럼 잘 숙성되어
侍奉春萱(시봉춘훤)/그대 아버지를 시봉함에
專務和順(전무화순)/오로지 힘 쏟고 도리에 따랐으며
菽粟盡歡(숙속진환)/평범한 음식이지만 기쁨으로 해드리고
定省不倦(정성불권)/혼정신성을 게을리 하지 않고
憂疾無違(우질무위)/병이 나면 근심하고 옆을 떠나지 않았으며
色難能養(색난능양)/안색을 살펴가며 봉양을 잘하였으며
不有其身(불유기신)/그 몸을 아끼지 않았고
不私其財(불사기재)/그 재물을 사사로이 쓰지 않으니
論其行已(논기행이)/말하자면 그의 행동이
此焉大槪(차언대개)/대강 이러 하다는 것이다.
<해설>
○조박(糟粕)은 학술ㆍ예술 따위 학문을 옛 사람이 다 밝혀내고 남은 찌꺼기라는 뜻.
“文章糟粕(문장조박)/문장이야 찌꺼기 같지만” 이지만 이것은 작가가 남간의 효를 치켜세우기 위해 잠시 문장을 낮추는 표현이라고 보아야 한다.
○효제(孝悌)는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에 대한 우애
○춘훤(春萱)은 아버지를 남이 나에게 말할 때는 春府丈=椿府丈(춘부장), 春丈=椿丈(춘장), 春堂=椿堂(춘당), 春萱=椿萱(춘훤)이라고 한다 .
○정성(定省)은 혼정신성(昏定晨省)의 줄인 말로 아침 저녁으로 부모의 안부를 물어 살피어 효도하다 란 뜻이다.
不幸嚴府(불행엄부)/불행히도 그대 부친이
沈疴二載有奇(침아이재유기)/해묵은 병으로 2년간을 앓아눕자,
迎醫必拜(영의필배)/의원을 맞을 때에 반드시 절을 하고
湯藥親嘗(탕약친상)/약을 다리면 반드시 몸소 맛을 보았다.
不齒解帶(불치해대)/쫓겨난 사람의 복장으로 허리띠를 풀지 않았으며
由中非外(유중비외)/중심에서 울어 나오고 겉으로 꾸민 것이 아니었다.
<해설>
○ 불치(不齒)는 쫓겨난, 끼이지 못한 으로 해석하여야 한다.
《예기(禮記)》 옥조(玉藻)에 “흰 관에 검은 띠를 두른 것은 자성의 관이고, …… 다섯 치의 끈을 드리운 것은 게을리 노는 선비의 꾸밈이며,
검은 관에 흰 테를 두른 것은 쫓겨난 사람의 복장이다
[縞冠玄武 子姓之冠也 垂緌五寸 惰遊之士也 玄冠縞武 不齒之服也].” 한 데서 온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題羅應瑞 終慕堂 幷書/金璇-2
재벌번역과 해설/나천수
“終慕堂 幷書 ”에서 본 바와 같이 墓碣銘 병서, 墓誌銘 병서, ○○ 병서 등의 옛 기록을 볼 수 있다. 병서(幷書)라는 글자는 작게 써 붙였다. 병서라는 말은 묘갈명이든, 묘지명이든 죽은 자의 소개를 하는 형식의 틀이 있는데, 글을 청탁 받은 자가 죽은 이에 대하여 사적 교류 인연 내지는 사회적 존경의 인물이었을 경우에 이 형식의 틀에 덧붙여서 작가가 자신이 쓰고 싶은 글을 글 후미에 붙여 써 넣은 것을 말한다.
종모당 병서에서도 보면 제일 끝 말미에는 김선이 마지막으로 남간을 단 몇 마디의 시문으로 앞글 전체를 녹여 넣을 수 있는 名文章으로 끝을 냈었다.
이것이 곧 병서라는 뜻이다. |
석호와 남간은 친형제이다. 그런데 스승이 같고, 스승이 같으니 사귀는 친구도 같다. 두 분 다 문장가라서 문학 도반에 아버지의 친구들도 있다. 석호, 남간은 형과 동생이면서 친구요, 동창생이요, 인생 반려자였다. 두 분은 문학을 통해 당대의 많은 문장가와 교류를 하였다. 문학이란 그래서 노소를 뛰어 넘는 교류를 할 수 있는 것이다. |
噫(희)/탄식하노니
膝下愛慕(슬하애모)/부모 슬하에서 사랑하고 그리워함이
曷有其極(갈유기극)/어찌 그 끝이 있었겠는가.
及乎丁虞(급호정우)/상을 당하게 되어서는
葬適從權(장적종권)/장례 기간 동안에는 시의(時宜)를 좇아 변통하고
六朔枕苦(육삭침고)/6개월 동안 결코 누워 자지 않았으며
水糜無醢(수미무해)/ 물과 죽만 먹고 젓갈을 들지 않았다.
安葬先兆(안장선조)/선영에다 안장을 하고
結廬階側(결여계측)/묘 곁에 여막을 지어
朝朝環哭于瑩域(조조환곡우형역)/아침마다 묘역을 돌면서 곡을 하고
暮暮亦如之(모모역여지)/저녁마다 그렇게 하였다.
<해설>
○ 종권(從權)은 시의(時宜)를 좇아 변통함을 의미
○六朔枕苦(육삭침고)는 6개월 동안 잠이 오면 앉아서 졸지언정 결코 베개를 베고 마음 편하게 누워 자지 않았다는 뜻이다.
○水糜無醢(수미무해)는 당시의 반찬은 거의 모든 것이 소금에 절인 것이다.
無醢는 절인 젓갈을 들지 않았다는 뜻이다.
風雨號泣于天(풍우호읍우천)/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하늘을 향해 소리내어 울었으며
霜雪亦如之(상설역여지)/서리가 내리나 눈이 올 때도 그러했다.
僾僾若見(애애약견)/어렴풋이나마 아버지를 뵈려
望望不及(망망불급)/바라고 또 바라지만 미치지 못하는구나.
<해설>
○僾僾若見(애애약견), 望望不及(망망불급)은 이미 돌아가신 아버지를 다시 한 번 만이라도 뵙고자 하는 소망으로 풍우상설에도 불구하고 소리를 내어 곡을 하지만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표현한 것이다.
節哀順變難爲公說(절애순변난위공설)/변고를 따라 슬픔을 조절한다는 것은 공에게 통하지 않은 말이었고
有數節文(유수절문)/손가락을 셀 수 있는 예절에 관한 규정은
先賢奚取(선현해취)/선현의 말이지만 어찌 취할 것인가.
<해설>
○ 과거의 장례 예법을 보면 그 격식이 복잡다단하다.
상복에서, 제물 차리는 것, 호곡의 방법 등 망자에 따라 슬픔의 수위를 나타내야 하는 지침을 남간은 취하지 않고
자신의 효행 철학에 따라 상례를 치룬다는 표현으로 보인다.
蔬糲經朞(소려경기)/나물과 거친 밥으로 1년을 지내니
氣力憊衰(기력비쇠)/ 몸은 고달파서 해쓱하고 쇠약(衰弱)해 져서
上塜下廬(상봉하여)/무덤에 오르고 여막으로 내려옴도
扶杖倩人(부장천인)/지팡이를 붙잡고 사람에 의지했다.
<해설>
○ 상총(上塚)은 성묘라는 뜻인바, 塜(봉)과 총(塚)은 같은 의미인 듯하다.
봉으로 읽을 때는 “먼지일 봉”이고 총으로 읽을 때는 “무덤 총”이니
여기에서는 무덤 총으로 읽어야 맞을 것 같다.
○ 倩人의 倩도 “남자의 美稱 천”으로 읽기도 하고 “사위 청”으로 읽기도 한다.
倩人은 즉 사람을 고용하다(북한어), 또는 사위 청이니 “사위 놈”으로 보면 지팡이를 짚거나 사람에 의지를 해야 설수 있다는 표현 같다.
大小連居喪(대소연거상)/대련 소련의 거상도
孰善於公(숙선어공)/어찌 공보다 나겠으며
玉田雍伯(옥전옹백)/옥전의 楊雍伯일지라도
孰其倫擬(숙기윤의)/누가 그 인륜을 흉내 낼 수 있는가.
<해설>
○소련(小連)과 대련(大連)은 두 사람 모두 동이(東夷)의 사람으로 부모상(父母喪)을 잘 치렀다 함. 《論語 微子》
大小連居喪은 상에 임하여서는 소련과 대련보다 남간이 앞선다는 의미로 표현한 것이다.
○이언직(李言直):1631(인조 9, 신미)~1698(숙종 24, 무인)의 소개를 보면 효행(孝行)이 지극하여
중형(仲兄)과 함께 3년을 여묘(廬墓)하여 대소연(大小連)의 칭호를 받았다 는 기록이 나온다.
○小學(소학) 제4편인 稽古篇(계고편)에 小連(소련)과 大連(대련)의 親喪(친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小連 大連 善居喪(소련 대련 선거상): 소련과 대련은 친상을 당하여 잘 처리했다.
三日不怠(삼일불태): 어버이가 돌아가신 뒤에 사흘 동안 지극히 애통해 함을 늦추지 않았으며,
三月不解(삼월불해): 석 달 동안 해이하지 않았으며,
期悲哀(기비애): 기년까지 즉 1년 동안 슬퍼하고 애통해 하였으며,
三年憂(삼년우): 삼년 까지 근심하였다.
東夷之子也(동이지자야): 소련과 대련은 동이족의 아들이다 즉 단군의 자손이다
○옹백(雍伯)은 한 고조(漢高祖) 때의 장수이다. 이름은 치(齒), 봉호는 십방후(什邡侯)이다.
한(漢) 나라 옹백(雍伯)은 천성이 효성스러웠는데,
부모가 죽자 무종산에 장사 지냈고, 연 소왕(燕昭王)의 무덤도 이 산에 있다고 한다.
○玉田은 일명 무종(無終)의 옥(玉)으로 춘추 시대 양백옹(楊伯雍)이 무종산(無終山)에서 선인에게 물을 먹여 준 보답으로 돌 씨를 얻어 뿌렸더니
온통 백옥(白玉)이 생산되는 옥전(玉田)으로 변했다는 전설이 있다. 《搜神記 卷11》
三年於此(삼년어차)/삼년 동안을 여기에서 지내며
一不到私(일부도사)/한 번도 私家에 이르지 않았고
朔望入城(삭망입성)/초하루 보름에만 성에 들어갔으니,
爲慈親故也(위자친고야)/어머니를 뵙기 위해서였다.
<해설>
○옛 읍지를 보면 반드시 효행의 인물을 열거하였다.
금성읍지에도 많은 효자들이 열거되었는데, 석호 나해구 남간 나해봉 두 분의 기록도 있다.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고려사절요 제12권 > 명종 광효대왕 1(明宗光孝大王一) > 임인 12년(1182)
3월에 군기주부(軍器注簿) 장광부(張光富)가 3년 동안 시묘살이 했다고 하여, 그 집 문과 마을 거리에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였다.
○고봉집(高峯集) > 고봉속집 제2권 > 잡저(雜著) >
김자강(金自强)은 성주(星州) 사람입니다. 그는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봉양하면서 뜻을 어김이 없이 잘 받들어 순종하였습니다.
어머니가 죽자 상(喪)을 치르는 데 있어 부도(浮屠)의 법을 쓰지 않고 일체 《주자가례(朱子家禮)》의 예문(禮文)을 따라서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습니다.
복이 끝나자 다시 아버지를 위해 또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종족들이 그를 말려 억지로 끌어내서 집으로 돌아가게 하고는 이어 그 여막을 불태워 버렸습니다. 그러나 자강은 힘껏 뿌리치고 다시 돌아와 무덤 아래 엎드린 채 3일 동안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종족들이 그의 효성에 감동하여 다시 그를 위해 여막을 지어 주니,
또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습니다. 국초(國初)에 정려(旌閭)를 내려 표창하였습니다.
噫窮天哀慕(희궁천애모)/아, 하늘 끝까지 닿은 어버이를 그리는 사모함이
曷有其極(갈유기극)/어찌 그 끝이 있으랴.
毓德先世(육덕선세)/선세에서 덕을 쌓아
流慶後昆(유경후곤)/ 경사가 끊임없이 후손에게 이어지니
英材碩德(영재석덕)/영재와 덕(德)이 높은 사람이
以嗣以續(이사이속)/연달아 이어진다.
玆豈非羅城君(자기비나성군)/이에 어찌 나성군의 덕이 아니랴.
以鋸卿先卜于長興洞(이거경선복우장흥동)/鋸卿(大官)으로써 먼저 장흥동에 자리를 잡아
有發福而大我門闌者乎(유발복이대아문란자호)/발복이 되어 가문을 창대한 것이 아니겠는가.
<해설>
○毓德은 덕을 기른다는 의미
○羅城君은 羅公彦을 말한다.
○玆豈非羅城君(자기비나성군)
以鋸卿先卜于長興洞(이거경선복우장흥동)
위 글을 음미해 보면, 고려사 正史에서 찾아볼 수 있는 선대의 업적은 나성군 나공언부터이다.
윗대의 인물은 족보 기록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김선은 鋸卿(톱 거, 벼슬 경)이란 단어를 쓴 듯하다.
나주 보산동 장흥동 선산을 최초로 잡은 사람이 나성군이라는 해석이 되고, 또 한편으로는 장흥동 선산에 최초로 모셔진 사람으로 해석 할 수도 있다.
어찌되었든 장흥동 명당 터를 선산으로 삼아서 발복하였다고 김선은 표현하고 있다.
題羅應瑞 終慕堂 幷書/金璇-3
재벌번역과 해설/나천수
□ 금성읍지에서 본 석호, 남간 형제분의 행적 기록들
(1) 사마안(司馬案) : 羅海鳳(나해봉/진사) (2) 음사(蔭仕) : 羅海龜(나해구/禧陵參奉) 羅海鳳(나해봉/參奉, 別提) (3) 인물(人物) : 羅海鳳(나해봉) (4) 일덕(逸德) : 羅海鳳(나해봉) (5) 문장(文章) : 羅海鳳(나해봉) (6) 행의(行誼) : 羅海龜(나해구) (7) 충절(忠節) : 羅海鳳(나해봉) (8) 효행(孝行) : 羅海龜(나해구), 羅海鳳(나해봉) |
필자가 남간 할아버지의 효행기를 재해석하면서 많은 것을 느낀다. 효는 분명 가치의 개념이지만, 오늘날에는 효는 수치의 개념으로 바뀌어져 있다. 평소에 얼마나 많은 용돈을 드리고, 많은 여행을 보내 드리는 등 숫자적 효행을 주장하다가 끝내는 효사랑 병원에 돈을 주고 위탁하여 버린다. 역지사지 입장으로 보면 그 자신도 수치의 개념으로 대우 받다가 수치 속에 묻혀 죽을 것이 뻔하다. 남간 할아버지 시대에는 父子가 일체인 듯하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부모는 부모, 자식은 자식으로 구분되어져 있다. 그래서 이 효행기를 읽은 모든 사람들은 다만 옛이야기로만 여길 것이다. 효자는 하늘이 내린다고 한 것은 그만큼 어렵다는 말일 것이다. |
噫(희)/탄식하노니
泣血草廬(읍혈초여)/초려에서 피눈물 흘린다.
奉先恩孝(봉선은효)/선조의 은혜를 받들며 효도하려고
攀號若堂(반호약당)/ 흙집 같은 묘에서 울부짖는다.
如求如從(여구여종)/구함과 좇음이 같고
新花滿樹(신화만수)/꽃이 새로 피어 나무에 가득하면
魂若來遊(혼약래유)/혼이 와서 노는 듯하고
繁陰漫山(번음만산)/짙은 그늘 산에 펼쳐지면
神如歸之(신여귀지)/신이 돌아오신 듯 하였으리라.
<해설>
○ “如求如從(여구여종)/구함과 좇음이 같고” 구절을 앞에 붙여 해석할지, 뒤에 붙여 해석할지 애매하다.
사람의 人性은 表裏 즉 겉과 속이 같아야 한다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초려에서 피눈물 흘리는 겉모습과 효의 가치관이 같아야 한다는 뜻에서 如求如從의 표현을 쓴 듯하다.
如求如從의 표리가 같아질 때에 아버지의 혼을 볼 수 있고, 아버지의 신을 느낄 수 있다는 표현인 것 같다.
嚴霜殺草(엄상살초)/엄한 서리가 풀을 죽이면
慮魂不安(려혼불안)/혼이 불안할까 염려하고
凍雪封松(동설봉송)/무덤 옆의 소나무에 얼음과 눈이 쌓이면
念神無托(념신무탁)/신이 의탁할 데가 없을까 생각에
怵愓悽愴(출상처창)/놀라지고 몹시 슬프고 애달파
四時一般(사시일반)/하루에도 네 번 마찬가지 상태였어라.
<해설>
○ 이제 갓 성토한 묘에는 아직 잔디 풀도 성하지 못하고, 묘 옆의 소나무는 마치 돌아가신 분을 지키는 수호신처럼 서 있는데,
서리가 내리니 잔디는 말라 죽고, 눈이 내리니 눈이 쌓인 소나무 가지가 휘어져 있어서, 돌아가신 분의 혼이 의지할 데가 없어져 가, 그것을 걱정하는 마음이 하루에도 네 번(아침, 낮, 저녁, 밤) 그러하다는 표현이다.
日復日日(일복일일)/하루가 다시 하루로 이어지고
年又年年(년우년년)/일 년이 다시 일 년으로 이어지는 동안에
瞿瞿於斯(구구어사)/이곳에서 놀라 허둥대고
皇皇於斯(황황어사)/이곳에서 허둥지둥했으며
設香火於斯(설향화어사)/이곳에서 향화를 베풀고
聚兄弟於斯朞悲哀於斯(취형제어사기비애어사)/이곳에서 형제가 모여 1년동안 여기에서 슬퍼하고
三年憂於斯(삼년우어사)/3년 동안 여기에서 근심을 했다.
<해설>
○瞿瞿는 ① 지조가 없는 모양. ② 놀라 허둥대며 잘 못 보는 모양.
③ 바삐 두리번거리는 모양. ④ 눈을 동그랗게 뜨고 똑바로 보는 모양. ⑤ 예절을 잘 지키는 모양으로 해석되는데,
여기에서는 놀라 허둥대며 잘 못 보는 모양으로 봄이 타당하다.
○皇皇은 ①아름답고 성한 모양 ②황황(遑遑) 으로 해석되는데
여기에서는 遑遑 즉 마음이 몹시 급(急)하여 허둥지둥하는 모양으로 봄이 타당하다.
月到茅簷(월도모첨)/달이 초가집 처마에 이르면
如見顔面(여견안면)아버지의 얼굴을 본 듯하고
風來竹窓(풍래죽창)/바람이 죽창에 오면
如聽聲音(여청성음)/아버지의 목소리를 듣는 듯하다.
土床烟足(토상연족)/토방에 노을이 머무르면
恐親膚寒(공친부한)/아버지의 살이 추울 것을 두려워하고
蒲薦睡退(포천수퇴)/부들 거적에서 잠을 물리치면
恐親懷復(공친회복)/아버지가 돌아와 품을 것을 두려워한다.
<해설>
○ 이 부분은 사부곡(思父曲)이라 할 수 있다.
여막의 처마 끝에 걸린 달이 마치 아버지가 와서 내려다 본 듯하다는 표현, 여막의 대나무 창살로 된 문으로 부는 바람의 소리가 마치 아버지의 목소리 같이 들린다 하였다.
○ 무덤 토방에 햇빛이 지고 노을이지면 무덤 속의 아버지 살결이 추울까 걱정이고, 행여 남간 자신이 여막의 부들 거적위에서 잠을 쫓고 있는데, 아들이 춥다고 주무셔야할 아버지가 잠에서 깨서 돌아와 안아줄 것도 걱정스럽다 하였다.
즉 자신 때문에 무덤 속의 아버지가 편히 쉬지를 못한다는 표현이다.
出入起居(출입기거)/나가고, 들어오고, 서고, 앉음에
如反而息(여반이식)/집으로 돌아와서는 부모가 오기를 기다리는 듯이 하고
俯就跂及(부취기급)/너무 앞서는 자는 조금 낮추고, 모자라는 자는 좀 더 노력해서
不限遺憲(불한유헌)/후세에 전해지는 가르침에 국한하지 않고
練慨祥廓(연개상곽)/슬픔을 겪지만 봉분 둘레는 상서롭게 하였다.
不拘常制(불구상제)/항상 정해져 있는 제도에도 불구하고
君子所難(군자소난)/군자의 어려운 바를
公其易歟(공기역여)/공은 쉽게 했구나.
<해설>
○부취(俯就)는 내려와 앉음, 굽혀 따라간다[俯就] 뜻
○常制는 상기(喪期)를 의미
○練慨祥廓(연개상곽)의 해석은 필자의 얕은 식견으로 정확한 해석을 하기가 어렵다.
타 문집에서 보면 같은 시문구를 찾아 볼 수 있다.
o 면우집(俛宇集) > 俛宇先生文集卷之百二 > 書 > 答李致三에도
始死如窮。殯如求葬如望。練慨祥廓。與顔丁居喪之節不同。
o 검재집(儉齋集) > 儉齋集卷之四 > 詩 > 洪監司 禹寧 挽
轟驅不祥廓崢嶸(굉구불상곽쟁영)
아직 해석 문이 붙여지지 않고 있어서 참고만 할 뿐이다.
필자의 얕은 식견이지만 練慨祥廓(연개상곽)을 해석하자면
“슬픔을 겪지만(練慨) 봉분 둘레는 상서롭게 하였다(祥廓)”가 가장
멋진 해석 같다.
噫終身孝慕(희종신효모)/아! 죽을 때까지 사모함이
曷有其極(갈유기극)/어찌 그 끝이 있으리요.
玆以之名其堂曰終慕(자이지명기당왈종모)/그래서 그 당을 이름 하여 종모라 하고
敢以老拙語(감이노졸어)/감히 못난 늙은이의 말로
爲之記(위지기)/기를 하고
又爲詩曰(우위시왈)/또 시를 지으니
<해설>
市西 金璇은 남간보다 16세가 많으니 이 글 지은 시기가 71세를 넘긴 나이이다. 남간이 3년 시묘살이 중에 종모당이란 여막의 명칭을 지어 주었기 때문에 71세+3년(시묘기간) 하면 74세이다.
시서도 74세에 돌아가셨다.
그렇다면 종모당 글이 시서의 최후 작품 같다.
終慕는 그리움의 끝이 아니라 終身孝慕 즉 죽을 때까지 사모하라는 뜻이니, 종모는 끝이 없다고 김선은 일갈을 한 것이다.
長興洞孝子廬(장흥동효자려)/장흥동 효자의 집
生有崖死無窮(생유애사무궁)/생은 끝이 있어도 죽음은 끝이 없다.
廢蓼莪念羹墻(폐료아념갱장)/육아를 폐하고 갱장을 생각하니
知音明月淸風(지음명월청풍)/소리를 알아준 것은 밝은 달과 맑은 바람
生則養死則守(생칙양사칙수)/살아서는 봉양하고 죽어서는 묘를 지키니
誰謂孝無始終(수위효무시종)/그 뉘가 이 효도를 시종이 없다고 하리요.
<해설>
이 부분이 김선의 幷書라고 한 자신이 쓰고 싶은 글을 붙인 부분이다.
○蓼莪는 《시경》〈소아(小雅) 육아(蓼莪)〉를 말한다.
여기에서 “아버지가 없으면 누구를 믿으며 어머니가 없으면 누구를 믿을꼬. 나가면 근심을 품고 들어오면 이를 곳이 없노라.〔無父何怙 無母何恃 出則銜恤 入則靡至〕” 하였고,
“길고 큰 아름다운 쑥이라 여겼더니, 아름다운 쑥이 아니라 제비 쑥이로다. 슬프고 슬프다 부모여, 나를 낳으시느라 몹시 수고롭고 병드셨도다.〔蓼蓼者莪 匪莪伊蔚 哀哀父母 生我勞瘁〕” 하였다.
“작은 병이 텅 빔이여, 큰 항아리의 수치로다.[甁之罄矣 維罍之恥]”라고 하여 부모에 대한 자식의 책임을 강조한 말이 나온다.
○羹墻은 늘 사모하는 것을 말한다. 요 임금이 죽은 뒤에 순 임금이 담장을 대해도 요 임금의 모습이 보이고, 국을 대해도 요 임금이 보였다 한다. 《後漢書 卷63 李杜列傳》
여기에서 갱장을 인용한 것이다.
○知音은 춘추 시대에 금(琴)을 잘 탔던 백아(伯牙)가 지음(知音)의 벗 종자기(鍾子期)가 죽자 금 소리를 들을 사람이 없다 하여 금의 현(絃)을 모두 끊고 다시는 타지 않았다는 고사를 원용하였다. 《列子 湯問》
여기에서 知音을 인용한 것이다.
첫댓글 저런 움막에서 한 겨울을 어떻게 지내셨을까!!!
題羅應瑞 終慕堂 幷書/金璇은 남간집 p238~246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