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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09 해인사 대적광전 벽화와 주련
●대적광전 주련
▶처음 좀 서투른 글씨 2개는 7살의 고종 글씨이고 나머지는 흥선대원군의 글씨이다.
佛身普放大光明 불신보방대광명 부처님이 대광명을 두루 비추사
色相無邊極淸淨 색상무변극청정 형색모습 가이없이 지극 청정하시네
如雲充滿一切土 여운충만일체토 구름이 모든 세상에 가득하듯이
處處稱揚佛功德 처처칭양불공덕 곳곳에서 부처님의 공덕을 찬탄하시네
光相所照咸歡喜 광상소조함환희 서로 빛이 비치는 곳의 넘치는 환희여
衆生有苦悉除滅 중생유고실제멸 중생이 가진 고통을 씻은듯이 벗었도다.
정면이 대적광전 왼쪽은 법보단 오른쪽은 금강계단 뒷쪽은 대방광전이다.
●서쪽 법보단 벽화
▶팔만대장경 이운
경판(국보32 세계기록유산) 8톤 트럭 35대 분의 대장경판을 조심스레 포장해 지게에 짊어진 남정네와 머리에 인 여인네, 그리고 소달구지에 가득 실은 사람들이 끝이 안 보이는 긴 행렬을 이루어 남으로 남으로 내려간다. 행렬 맨 앞에는 향로를 든 동자가 길을 안내하고 수많은 스님들은 독경을 하며 뒤따른다. 조선 태조 7년(1398) 5월 강화도 선원사에서 서울의 지천사에 임시로 옮겨 모셨던 고려 팔만대장경을 경남 가야산 해인사로 이송해 갈 때의 모습이다.
▶소가된 스님
한산 습득의 정확한 생몰연대는 알 수 없으나 당나라 정관(貞觀:당 태종의 연호 627~649)년 간에 천태산 (天台山) 국청사(國淸寺)에 살았던 전설적인 인물들이다.
당시 국청사에는 풍간선사라는 도인이 계셨는데, 세상에서는 국청사에 숨어 산 세분의 성자라는 뜻에서 이들 세분을 국청삼은(團淸三隱)이라고 불렀다.
이 분들을 성자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 세분이 모두 불보살(佛菩薩)의 화현이기 때문이다.
즉 풍간스님은 아미타불의 후신이요 한산은 문수보살, 습득은 보현보살의 화현이라 한다.
비록 이 세 분이 불보살의 화현이라고는 하지만 이 분들과 같이 살던 사람들은 이들의 기이한 언행을 이해하지 못해 멸시하고 천대하기 일쑤였었다.
한산이란 이름은 국청사에서 좀 떨어진 한암(寒嚴)이란 굴속에서 살고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다.
늘 다 떨어진 옷에 커다란 나막신을 신고 다녔으며 때가 되면 국청사에 와서 대중들이 먹다 남은 밥이나 나물따위를 얻어먹곤 했다.
가끔씩 회랑을 천천히 거닐기도 하고, 어떤 때는 소리를 지르거나 하늘을 쳐다보며 욕을 하곤 해서 절에 있는 스님들이 작대기를 들고 쫓으면 손벽을 치고 큰소리로 웃으며 가버리기도 했다.
습득은 풍간스님이 길을 가다가 강보에 쌓여 울고 있는 것을 주워다 길렀다고 해서 그 이름을 습득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는 부엌에서 그릇을 씻거나 불을 때주는 일을 했는데 설거지를 하고 난 뒤 남은 밥이나 음식 찌꺼기를 모아 두었다가 한산이 오면 내주곤 했다.
한번은 주지스님이 출타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산아래 목장을 지나는데 한산 습득이 소떼와 더불어 수작하고 있음이 보였다.
먼저 한산이 소떼를 향하여 「이 도반들아 소생활 맛이 어떤가? 시주밥을 먹고 놀더니 기어코 이 모양이 되었구나.」 하더니
「오늘은 여러 도반들과 함께 무상법문을 나눌까해서 왔으니 내가 호명하는 대로 이쪽으로 나오라. 첫번째로 동화사 경진율사.」하고 호명하니
검은 소 한마리가 ‘음매-에’ 하고 한산 습득의 앞으로 나오더니 앞발을 꿇고 머리를 땅에 대고는 한산이 지적한 장소로 가는 것이었다.
「다음 천관사 형지법사.」 이번에는 누런소가 또 ‘음매-에’ 하고 대답하더니 절을 하고는 첫번째 소가 간 곳으로 걸어가는게 아닌가.
이렇게 하기를 30여회. 백여마리의 소떼중에 30마리는 스님들의 후신이다. 말하자면 시주밥 먹고 공부 않은 과보호 빚을 갚기 위해 소가 되었다는 것이다.
주지스님이 모골이 송연하여 쫓기듯 절로 올라가며 혼자 중얼거렸다.
「한산 습득이 미치광이 인줄 알았더니 성인의 화신이 분명하다」
일찌기 여구륜(閒丘亂)이라는 벼슬아치가 이 고을의 자사로 부임했는데 병이 들어 앓게 되었다. 그런데 이 병이 무슨 병인지 좋은 약, 용한 의원이 모두 소용없는 이른바 백약이 무효였다.
이를 안 풍간스님이 찾아가 뵙기를 청하자, 여구륜은 자기의 병세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의 말을 듣고는 풍간스님이 깨끗한 그릇에 물을 받아 주문을 외면서 그에게 뿌리자 언제 아팠더냐 싶게 금세 자리를 털고 일어나 앉는 것이었다.
자사가 크게 사례하고 설법해 주기를 청하자 풍간스님은 굳이 사양하며 「나 보다는 문수, 보현께 물어 보시오.」라고 하는 것이었다.
「두 보살께서는 어디에 계시온지 ?」
「국청사에서 불 때 주고 그릇 씻는 이들이 그들입니다.」라고 거듭 묻는 말에 대답하고는 유유히 사라져 가 버렸다.
이에 자사가 예물을 갖춰 국청사로 한산과 습득을 찾아 갔다. 마침 한산과 습득은 화로를 끼고 앉아 웃고 떠들고 있었는데, 가까이 간 자사가 절을 올리자 무턱대고 꾸짖는 것이었다.
옆에서 이를 지켜본 스님이 깜짝 놀라며
「대관(大官)께서 어찌 미치광이들에게 절을 하십니까?」
하고 말하자 한산이 자사의 손을 잡고 웃으며
「풍간이 실없는 소리를 지껄였군. 풍간이 아미타불인줄 모르고 우릴 찾으면 뭘하나?」라는 말을 남기고 문을 나선 뒤에는 다시 절에 들어오는 일이 없었다.
여구륜이 못내 아쉬워 옷과 약등의 예물을 갖추어 한암굴로 다시 찾아 갔다.
예배를 올리고 말씀을 기다리는데 「도적놈아! 도적놈아!」 라는 말을 남기고 한산 습득이 굴속으로 들어가자 돌문이 저절로 닫히는 것이었다.
이윽고 「너희들에게 이르노니 각각 노력하라.」라는 말이 들리고는 돌문은 완전히 닫혀져 버렸다.
여구륜은 성인을 친견하고도 더 법문을 듣지 못한 것을 섭섭히 여기며, 숲속의 나뭇잎이나 석벽, 혹은 촌락의 벽등에 써놓은 세분의 시(詩) 약 300수를 모아 책을 엮었다.
이 시집을 삼은집(三隨集)이라고 하며 우리나라에서도 「한산시」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전해오고 있다.
▶태조와 나한
태조 이 성계가 등극하기 전에 함경도 함흥에서 그 아버지 환조의 상을 당하고 장지를 얻지 못하여 답답하게 여기든 중이었다.
하루는 그 머슴이 산으로 나무를 하러 갔다가 스님 두 분이 산 아래를 가리키며
- 정말 명당자리군 당대에 군왕이 나겠는데
하니까 또 다른 스님이 말하기를
- 정말 그렇군요. 저 자리는 중국 같으면 틀림없이 천자가 날 자리입니다.
이와 같은 얘기를 엿들은 머슴이 곧 바로 이성계에게 달려가서 그 말을 전하였더니 그는 말을 타고 달려가서 두 스님을 뵙고 그 땅을 가르쳐 달라고 해서 그의 아버지를 장사지내 모시었으니 그곳이 바로 함흥의 정릉이라고 한다.
이렇게 하여 이 성계는 무학대사에게 명당을 얻어 쓰고 그 뒤에 이상한 꿈을 해몽해 주는 말씀을 듣고 왕이 될 줄을 예시 받았다. 그리고 공덕을 쌓기 위해 석왕사라는 절을 짓고 오백 나한을 모시기 위해 응진전을 지었다.
그때 마침 함경도 길주에 있는 광적사가 병화로 말마암아 패사가 되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광적사에 방치된 대장경일부와 오백 나한상을 석왕사로 옮겨 모시기로 작정하였다.
이 오백 나한상을 모셔 올 때에 철주에서 원산포까지는 배로 옮겼으나 원산으로부터 석왕사까지는 이 성계가 직접 돌로 된 나한상을 한 분씩 한 분씩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옮겨 모시었다.
오백이나 되는 나한상을 끝까지 한 분씩 잘 옮겨 모시어 498분을 석왕사로 옮겨 모시게 되었다. 그런데 맨 마지막 두 분만이 남게 되자 조금 귀찮은 생각이 들어 두 분의 나한상을 한꺼번에 운반하여 모시게 되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에 기도를 모시고 나서 살펴보니 맨 나중에 모셔온 존상 한 분이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를 않는 것이었다. 이 성계가 놀라서 사방을 두루 찾아 보았으나 종시 알 수가 없으므로 단념하고 있었더니 그날 밤 꿈 가운데 없어진 존상이 나타나서 말하되
- 그대가 그만큼 신심을 발하여 나한상을 하나씩 업어 오다가 나만은 따로 업어가지 않고 덧붙여 업어가니 그렇게 성의가 부족하여 되겠는가.
이런 푸대접 받기가 싫어서 나는 묘향산 비로암에 가 있으니 그리 알아라.
깜짝 놀라 깨어보니 꿈이었다. 곧 사람을 보내어 알아보게 하였더니 과연 그곳에 나한상 한분이 계신다는 것이었다. 이 성계가 곧 바로 그곧까지 가서 정중한 마음으로 다시 모시고 와서 참회하고 뉘우쳤으나 이튿날 보니 다시 없어지고 말았다. 할 수 없이 없어진 그 나한존상외 자리에는 명패만을 모시게 되었다.
이와 같은 연유로 해서 석왕사의 오백 나한이 모셔진 응진전에 한 분 성상이 모자라는 것은 이 때문이라고 한다.
이 성계는 이와 같이 오백 나한을 모시고 3년에 걸려 오백 성재를 정성껏 올리었다.
그 후 조선을 건국하고 등극한 태조 이 성계는 무학대사에게 가르침을 얻고자 하여 찾아 봤으나 행방을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팔도의 방백으로 하여금 무학대사를 찾아 모셔오게 하라는 영을 내렸다. 팔도의 방백들이 곡산(谷山) 에 이르러 고달산(高達山) 초막에 도승이 살고 있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혹시 그가 무학대사인가 싶어서 그들은 시종하는 사람들을 물리치고 친히 골짜기 윗봉에 올라가서 각각 그 관인(官印) 을 소나무 가지에 걸어놓았다. 방백의 일행이 초암에 이르러 본 즉 과연 눈빛이 빛나는 노장이 호미로 채전을 메고 있었다.
삼도 방백이 그에게 대화를 청하였다.
- 이 암자는 누가 지었읍니까?
- 이 절은 내가 지었소만……
- 이런 험산에 무얼 보고 지었습니까?
- 예, 저 건너 삼인봉을 응하여 지었지요.
- 어째서 저 봉우리를 삼인봉이라 합니까?
- 이곳에 절을 짓고 있으면 3도 방백이 와서 저 봉우리 나뭇가지에 인(印)을 걸어놓을 날이 있을것 같아서 그리 했지요.
스님의 대답에 방백들은 깜짝 놀라 일어나서 그 스님에게 예배를 하였으니 그는 과연 무학대사였다.
그들은 임금이 스님을 청한다는 말을 하고 모시고 가게 되었다.
태조는 크게 기뻐하며 곧 대사를 왕사로 모시고 천도의 일을 문의하였다.
무학대사는 여러 번 사양하였으나 끝내 물리치지 못하고 두루 도읍지를 고르다가 마침내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궁궐을 짓게 되었다고 한다
▶설신동자
한 수행자가 히말라야의 깊은 산속에서 홀로 고행하면서 많은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 때 제석천은 그가 과연 부처를 이룰 수 있는 굳은 믿음이 있는가를 시험하기 위하여, 나찰(사람을 잡아먹는다는 악한 귀신)로 변해 히말라야로 내려왔다.
나찰은 수행자가 사는 근처에 와서 과거 부처님이 말씀하신 시의 앞 귀절을 외웠다.
꽃은 피면 곧 지고 사람은 나면 이윽고 죽는다. 이 허무한 법칙은 생명있는 것들의 피할 수 없는 운영이로다.(諸行無常 是生滅法)
이 시를 듣고 무한한 기쁨을 느낀 수행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사방을 둘러 보았으나 험상궂게 생긴 나찰 이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저처럼 추악하고 무서운 얼굴을 가진 것이 어떻게 그런 시를 읊을 수 있을까? 그것은 마치 불속에서 연꽃이 피는 것을 바라는 격이리라. 그러나 혹 저것이 과거에 부처님을 뵙고 그 시를 들었는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하고 생각한 그는 나찰에게 물었다.
“당신은 어디서 과거 부처님이 말씀하신 시를 들었습니까? 나는 그것을 듣고 마치 망울진 연꽃이 피는 것처럼 마음이 열렸습니다”
“나는 그런 것은 모르오. 여러 날 굶어 허기가 져서 헛소리를 했을 뿐이오”
“그런 말씀 마십시오. 당신이 만일 그 시 전부를 내게 일러 주신다면, 나는 평생토록 당신의 제자가 되겠습니다. 물질의 보시(布旅)는 없어질 때가 있지만는 법(法)의 보시는 다함이 없는 것이니까요”
“당신은 지혜는 있어도 자비심이 없소. 자기 욕심만 채우려 하고 남의 사정은 모르니 말이오. 나는 지금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란 말이오”
“당신은 대체 어떤 음식을 먹습니까?”
“놀라지 마시오. 내가 먹는 것은 사람의 살덩이고 마시는 것은 사람의 따뜻한 피요. 그러나 나는 그것을 구하지 못해 괴로와하고 있소”
“그렇다면 나머지 반의 시를 들려 주십시오. 그것을 다 듣는다면 내 몸을 당신에게 드리겠습니다.
“누가 당신의 말을 믿겠소? 겨우 시 한 귀절을 듣기 위해 소중한 목숨을 버리겠다니….”
“당신은 참으로 어리석습니다. 마치 어떤 사람이 질그릇을 주고 보배로 된 그릇을 얻듯이, 나도 이 무상한 몸을 버려 금강석처럼 굳센 몸을 얻으려는 것입니다. 그러고 내게는 많은 증인이 있습니다. 시방삼세(十方三世)의 모든 부처님께서 그것을 증명해 주실 것입니다?
“좋소. 그러면 똑똑히 들으시오. 나머지 반을 말할테니”
하고 나찰은 시의 뒷 귀절을 외웠다.
살고 죽는데 대한 생각을 없애버리면, 쓸데없는 욕심이나 두려움이 사라진다네(生滅滅已 寂滅爲樂)
그는 이 시를 듣고 더욱 환희심이 솟았다. 시의 뜻을 깊이 생각하고 음미한 뒤에, 벼랑과 나무와 돌에 새겼다.
그리고 나무 위에 올라가 나찰에게 몸을 던지려 하였다.
그 때 나무의 신이 그에게 물었다.
“그 시에는 어떤 공덕이 있습니까?”
“이 시는 과거 모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가 이 시를 들으려고 몸을 버리는 것은 나 하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이렇게 말을 마친 수행자는, 이윽고 몸을 날려 나무에서 떨어졌다. 그런데, 그 몸이 땅에 닿기도 전에 나찰은 곧 제석천의 모양을 나타내어, 그를 받아 땅에 내려놓았다.
이를 지켜 본 모든 천신들이 그의 발에 예배하고 그 지극한 구도의 정신을 찬탄하였다.
▶무착
중국 오대산 중턱의 외딴 암자 금강굴에서 한 스님이 손수 밥을 해먹으며 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 스님은 어려서 출가하여 무착(821-900)이라는 법명을 받아 계율과 교학을 공부하다가 문수보살의 영지 오대산에 참배하고 문수보살을 친견하고자 기도를 하는 중이었다.
하루는 식량이 떨어져 산 아래 마을에 내려가 양식을 탁발해 올라 오다가 소를 몰고 가는 한 노인을 만나게 되었는데, 노인의 모습이 범상치 않음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뒤를 따르게 되었다.
한참을 뒤쫓아 가다 보니 전혀 보지 못했던 웅장한 절 한 채가 나타났다.
노인이 문 앞에 서서 “균제야! ” 하고 부르니 한 동자가 뛰어나와 소고삐를 잡아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안에 따라 들어가 노인에게 인사를 드렸더니, 동자가 아주 향기로운 차를 한 잔 내왔다.
노인이 묻기를
- 자네는 오대산에 무엇하러 왔는가?
- 저는 문수보살을 친견하여 그 가호를 얻고자 찾아왔습니다.
- 자네가 가히 문수를 만날 수 있을까? 자네 살던 절에는 대중은 얼마나 되고 어떻게 살아가는가?
- 300여명 되는 대중이 경전도 읽고 계율도 익히면서 살고 있습니다. 이곳은 어떠한지요?
- 전삼삼 후삼삼(前三三 後三三)이요, 용과 뱀이 뒤섞여 산다네.(龍蛇混雜 凡聖交參)
무착은 도무지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느새 밖은 어두워져서 무착은 노인에게 하룻밤 쉬어갈 것을 청하였더니
- 애착이 남아 있는 사람은 이곳에서 자고 갈 수 없네.
하고는 동자에게 배웅하게 하고 안방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이었다. 어둑해진 길가에 나와서 무착은 동자에게 물었다.
- 아까 노인에게 이곳 대중의 수효를 물었더니 '전삼삼 후삼삼' 이라고 하시던데 도대체 무슨 뜻인가?
하고 물으니, 동자가 큰 소리로
- 무착아!
하고 부르니 엉겁결에
-네.
하고 대답하자,
- 그 수효가 얼마나 되는고?
하며 동자가 다그쳐 묻는 것이었다. 무착은 또 다시 말문이 막혀 동자를 쳐다 보며
- 이 절 이름은 무엇입니까?
- 반야사라고 합니다.
하며 가리키는 곳을 쳐다보니 웅장하던 절은 금시에 간 곳이 없었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동자도 사라지고 없는데, 허공에서 한 귀절 게송이 들려오는 것이었다.
성 안내는 그 얼굴이 참다운 공양구요(面上無瞋供養具)
부드러운 말 한 마디 미요한 향이로다(口裡無瞋吐妙香)
깨끗해 티가 없는 진실한 그 마음이(心裡無瞋是眞寶)
언제나 한결같은 부처님 마음일세(無染無垢是眞常)
이렇게 문수보살을 친견하고서도 알아보지 못한 자신의 어리석음을 한탄하며, 무착은 더욱 수행에 힘써 앙산 선사(840~916)의 법을 이어받아 어디에도 거리낄 바 없는 대자유인이 되었다.
어느 해 겨울, 동짓날이 되어 팥죽을 쑤고 있는데 김이 무럭무럭 나는 죽 속에서 거룩하신 문수보살이 장엄하게 나타나서는
- 무착은 그 동안 무고한가?
하며 옛날 오대산에서 있었던 일을 회상시키며 먼저 인사말을 건냈다.
그런데 무착스님은 무엇을 생각했는지 팥죽을 젓던 주걱을 들어 문수보살의 얼굴을 사정없이 후려갈기는 것이었다. 문수보살은 놀래어
- 어이, 무착 내가 바로 자네가 그렇게도 만나고 싶어하던 문수일세 문수야!
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 말을 받은 무착스님은
- 문수는 문수요 무착은 무착이다. 만일 문수가 아니라 석가나 미륵이 나타날지라도 내 주걱 맛을 보여주리라.
하고 대꾸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문수보살은
- 쓴 꼬두박은 뿌리까지 쓰고 단 참외는 꼭지까지 달도다. 내 삼대겁을 수행해 오는 동안 오늘에사 괄시를 받아 보는구나.
하는 말을 마치고 슬며시 사라져 버렸다.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문수보살을 친견하기 위해 오대산 금강굴에서 3년 간이나 기도를 하고, 또 문수보살을 원불(願佛)로 모시고 다녔던 무착이었건만 깨달음을 성취한 뒤에는 문수보살이 스스로 나타나셨어도 도리어 호령을 하고 주걱으로 얼굴을 갈긴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진리를 체득한 선사들의 기백이요 실력인 것이다.
▶태조와 무학
조선의 태조는 누구나 다 아는 바와 같이 이 성계다.
그는 날로 부패해 가는 고려왕조를 탄식하여, 청운의 뜻을 품고 팔도강산을 두루 다니며 무예를 연마하고 정신을 단련하는 등 명산과 유서깊은 사찰을 찾아다니며 천지신명과 제불보살님의 가호를 빌기도 하였다.
한때 그가 함경도 안변 땅에 머물적에 이상한 꿈을 꾸었는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도무지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혼자서 곰곰히 생각다 못해 답답한 가슴을 안고 그 마을에서 해몽을 잘 한다는 점장이 노파를 찾아가서 묻게 되었다.
- 다른게 아니라 내가 간밤에 몇 가지 이상한 꿈을 꾸었기에 해몽을 좀 해 달라고 왔소.
하면서 꿈의 내용을 이야기했더니 이성계의 얘기를 듣고 깊이 생각하던 점장이 노파가 신중하게 말하기를
- 대장부가 받은 꿈의 계시를 어쩌 한낱 계집이 말할 수있겠습니까. 여기서 서쪽으로 40리쯤 들어가면 설봉산이 있고 그 산의 조그만 토굴에 도인 스님이 한 분 살고 계십니다. 그 어른에게 물어보시면 잘 일러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 성계는 노파가 일러준대로 설봉산을 찾아 도언 스님이 계신다는 토굴에 들어가 본즉 한 스님이 선정에 들어 있었다. 한참을 기다린 후에 이 성계는 스님에게 공경히 절을 하고 찾아 온 사연을 말하였다.
- 진세에 사는 사람이 의심스러운 일이 있어 이렇게 찾아왔아오니 자비로써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 무슨 일인지 말씀을 하여 보십시오.
- 실은 제가 간밤에 이상한 꿈을 꾸었는데 하도 궁금해서 일부러 찾아 왔습니다. 시골마을의 닭들이 일제히 울어대고, 하늘에서는 꽃이 비오듯 떨어지는 것을 봤습니다. 또 저는 헌 곳간에 들어가서 서까래 세 개를 등에 짊어지고 나오다가 거울이 깨어지는소리에 문득 꿈을 깨고 말았습니다. 무슨 불길한 징조는 아닌지요?
- 정말로 그러한 꿈을 꾸셨다면 남에게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꿈입니다. 이곳은 아무도 없으니까 가만히 들어보십시오, 마을의 닭들이 일제히 “꼬끼오”하고 울어 댄것은 “꼬뀌위 꼬뀌위”한 것이니 반드시 고귀한 지위에 오른다는 뜻입니다(高貴位). 헌 곳간에 들어가서 등에 서까래 세 개를 가로 졌으니 그 양이 임금 왕(王)자와 같습니다.
이 말을 들은 이 성계는 내심 형용할 수 없는 흥분된 마음을 감추고 다시 묻기를
-그러면 하늘에서 꽃이 떨어지고 거울이 깨어진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스님은 말 없이 붓을 들어 시 한 수를 적어 내 놓았는데 이 성계가 보니 이렇게 쓰여 있었다.
화락능성실(花落能成實)
경파개무성(鏡破豈無聲)
꽃이 떨어졌으니 열매가 맺힐 것이요.
거울이 깨어졌으니 소리가 요란할 징조로다.
하고 스님은 다시 이 성계의 얼굴을 자세히 보더니
- 장군의 면상을 본즉 군왕의 기상이 얼굴에 가득하지만 아직 겁기(劫氣)가 다 벗어지지를 못 하였으니 성현에게 기도를 올리고 공덕을 지어야 일이 성취되겠소이다. 이 일은 나만 알고 비밀을 지킬터이니 장군께서도 꿈 이야기를 입밖에 내지 말아야 하오. 아직도 3년의 시일을 기다려야 할터이니 그 동안에 이 자리에 절을 세워 오백 라한을 모시고 기도를 잘 드리도록 하시오.
하고 자세히 알려주었다. 이 성계는 자리에서 일어나 스님께 스승의 예를 올리고 그 뒤에도 가르침을 청했으니 이 스님이 바로 무학대사 이다.
이렇게 해서 이 성계는 자기의 출생지 안변 땅에 절을 지어 왕(王)자를 해석했다고 하여 ‘석왕사’(釋王寺)라 이름하고, 등극한 후에는 무학대사를 ‘왕사로 모시게 되었다
▶관음과 대세지보살
아득한 옛적 인도 남쪽에 조그만 나라가 있었다. 그 나라에 장나(長那)라는 부자가 예쁜 여자를 부인으로 맞아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그러나 한가지 근심이 있었는데 그것은 몇 년이 지나도록 자식이 없는 것이었다.
하루는 부인이 제단을 차려놓고 「천지신명이시여! 옥동자 하나만 점지하여 주시옵소서.」하며 지극정성으로 기도하고 빌었다. 기도를 잘 모신 영험인지 그 후로 태기가 있어 옥동자를 낳고 삼년이 지나 또 한 아들을 낳게 되었다.
장자는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큰 잔치를 베풀어 이웃사람들을 대접하였다. 또 예언가를 청하여 두 아이의 장래운명을 말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예언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두 아이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본 다음 「두 형제는 용모는 단정하고 고우나 부모와의 인연이 박해서 일찍 부모를 여윌 운명을 타고났습니다.」
이런 연유로 해서 형은 조리(早離), 동생은 속리(速離)라고 이름하였으니 일찍이 부모를 여윈다는 뜻이다.
그 뒤 몇 해가 지나 형은 열살, 동생은 일곱살이 되었는데 그해 삼월에 어머니는 홀연히 병이 들어 백약이 무효로 병세는 나날이 악화되어 갔다.
어머니는 두 아들을 불러 놓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조리야! 속리야! 엄마는 아무래도 병이 낳을 것 같지 않구나. 사람이 한번 태어나서 죽는 것은 누구라도 면할 수 없는 것이니 죽는 것은 무서울 것이 없다마는 너희 어린 형제를 남겨놓고 떠날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몹시 아프고 쓰리구나. 너희들은 내가 죽은 뒤라도 서로 도우며 착하게 살기 바란다.」
하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숨을 거두고 말았다.
두 아들은 식어가는 어머니의 시체를 붙들고 통곡하였다. 장자는 마을사람들의 도움으로 장사를 후히 지내고 두 아들을 더욱 극진히 사랑하며 몇 년을 살았을 때였다.
여러 사람들의 권유와 소개로 후처를 맞이 하였는데 새로 들어온 부인은 죽은 부인과 용모가 비슷하여 두 아들도 엄마가 다시 살아온 것처럼 좋아하였다.
새로 온 부인도 두 아이를 불쌍하게 여겼는지 귀엽게 여기고 사랑하였다.
그런데 다음해 큰 흉년이 들어 들판의 곡식을 하나도 수확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장자는 집안을 새 부인에게 맡기고 이웃나라에 가서 식량을 보물과 바꿔오기 위해 먼 길을 떠났다.
혼자 남게 된 부인은
「만일 영감이 안 돌아오면 저 아이들은 어떻게 키울 것인가 또 내가 저 아이들에게 상속해 줄 것이 아닌가. 두 아이는 장차 큰 장애가 되겠구나.」
이렇게 생각한 부인은 아이들을 없애려고 뱃사공을 매수하여 두 아이들을 멀리 갖다 버리게 하였다.
영문도 모른 채 낮선 무인도에 버려진 두 아이들은 좁은 섬 안을 미친 듯이 뛰어다니며 부모를 찾았으나 끝내 섬에는 사람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두 형제는 목이 터져라고 엄마 아빠를, 그리고 뱃사공 아저씨를 불렀지만 바람소리와 파도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조리와 속리 두 형제는 마침내 겹친 피로와 굶주림을 못 이겨 가엾게도 쓸쓸한 무인도에서 숨을 거두게 되었다. 죽음에 임박해서 아우 속리가 사람들에게 속아서 비참하게 죽게 되는 운명을 한탄하자 말없이 듣고 있던 형 조리는 아우를 위로하며 다음과 같이 타일렀다.
「나도 처음에는 세상을 저주하고 사람을 원망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찌할 도리가 없지 않은가! 차라리 우리가 다음 세상에 태어날 때는 이 고뇌의 체험을 인연으로 삼아서 우리와 같이 비운에 우는 사람들을 구원해 주자. 다른 사람을 위로해 주는 것이 바로 우리가 위로를 받는 길인 것을 일찍이 배우지 않았던가」
이 말을 듣던 아우도 비로소 형의 말뜻을 알아듣고 밝은 얼굴이 되었다.
이리하여 형과 아우는 하늘을 우러러 보며 거룩하고 크나큰 서원을 세웠다.
「우리는 여기서 죽더라도 내생에는 내생에는 성현이 되고 보살이 되어 우리와 같은 처지에 놓인 불쌍한 사람들을 구원해 주자.
또 세상에는 빈곤하고 병든 사람이 얼마나 많겠느냐. 그들에게 의복과 양식을 주고 온갖 병을 치료해 주자....」
하는 등의 서른 두 가지의 서원을 세우고 어린 두 형제는 서로 얼싸안고 숨져 갔다. 무인도에서 외롭게 죽어간 두 형제의 얼굴에는 조용하고 밝은 미소가 어리어 있었다고 한다.
이 섬의 이름이 보타락가산이며 형은 관세음보살이 되고 동생은 대세지보살이 되었다고 한다.
▶학소도림
당나라의 백락천 이라고 하면 유명한 시인이요, 뛰어난 경륜을 지닌 정치가이기도 하다.
그가 본래 학식과 총명이 뛰어난데다 벼슬이 자사(刺史)의 지위에 올라 자뭇 그 우월감에 충만해 있을 때 였다.
한 때 그가 항주의 자사로 부임한 후의 이야기이다.
하루는 그리 멀지 않는 사찰에 도림선사(741~824)라고 하는 이름난 고승이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백락천이, 내가 한 번 직접 시험해보리라 작정하고 선사가 머물고 있다는 절로 수행원을 거느리고 찾아갔다.
도림선사는 청명한 날이면 경내에 있는 오래된 소나무 위에 올라가 좌선을 하곤 하였다.
마침 백락천이 도림선사를 찾아온 날도 나무 위에서 좌선하는 중이었다.
백락천이 나무 아래 서서 좌선하는 스님의 모습을 올려다 보니 아슬아슬한 생각이 들어
"선사의 거처가 너무 위험합니다."
하고 소리치니, 선사가 아래를 내려다보며
"자네가 더욱 위험하네."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듣고 있던 백락천이 어이없어 하면서
"나는 벼슬이 자사에 올라 강산을 진압하고 또 이렇게 안전한 땅을 밟고 있거늘 도대체 무엇이 위험하단 말이오?"
라고 대꾸하는 것이었다.
선사는 그가 학문과 벼슬에 자만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고 이 기회에 교만한 마음을 깨우쳐주기 위해 곧바로 쏘아 부쳤다.
"티끌같은 세상 지식으로 교만한 마음만 늘어 번뇌가 끝이 없고, 탐욕의 불길이 쉬지 않으니 어찌 위험하지 않겠는가."
백락천은 자기의 마음을 환하게 꿰뚫어 보는 듯한 눈매와 자기가 자사라는 벼슬에 있음을 알면서도 당당하게 자기 할 말을 다하는 기개에 눌려
"제가 평생에 좌우명을 삼을 만한 법문 한 귀절을 듣고 싶습니다."
하고 애초에 선사를 시험하려 했던 불손한 태도를 바꿔 공손한 자세로 가르침을 청했다.
"나쁜짓을 하지말고(諸惡莫作)
착한 일을 받들어 행하라(衆善奉行)."
이같은 대답에 대단한 가르침을 기대했던 백락천은
"그거야 삼척동자라도 다 아는 사실이 아니요."
하고 신통치 않다는 듯이 말하니 선사는 침착한 어조로 다시 말했다.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지만 팔십 노인도 행하기는 어려운 일이네."
이 말을 들은 백락천은 비로소 깨달은 바가 있었다.
알고 있는 것만으로는 아무 쓸모가 없다.
그 가르침을 실천하여 인격화되지 않으면 아만과 번뇌만이 더할 뿐 진리의 길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는 것을...
그리하여 당대의 문장가 백락천은 그 자리에서 도림선사에게 귀의하여 불법의 수행을 돈독히 하였다고 한다.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려 주고 있는 백락천의 명문 시구들도 지행합일의 인격에서 울려 나오게 된 것이 아닐까.
북쪽 대방광전 벽화
▶사슴왕
아주 오랜 옛날, 베나레스의 사슴동산에는 500마리의 사슴들이 떼지어 살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황금빛 털로 장식된 사슴 왕은 다른 사슴들에 비해 유난히 크고 늠름하였다.
그 때 인간의 왕은 사슴고기에 맛을 들여 매일같이 사슴동산에 와서 한 마리씩 활로 쏘아 잡아갔다.
사슴들은 인간의 왕이 나타나기만 하면 두려워 떨면서 이리 뛰고 처리 뛰다가 화살에 맞아 죽어갔다. 또한 많은 사슴들이 섣부른 화살에 맞아 피를 흘리며 신음하였다.
이에 황금빛 사슴왕은 사슴의 우리를 모아놓고 말했다.
"많은 동료들이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느니 보다는, 차라리 이쪽에서 차례를 정해 스스로 나가 죽음을 기다리기로 하자."
죽을 때 죽더라도 차례가 아닌 다른 사슴들에게는 상처를 입히지 않고, 하루라도 불안에서 벗어나고 싶어서였다.
사슴왕은 인간의 왕에게 나아가 사슴들의 뜻을 전달하였다.
이렇게 되어 인간의 왕은 손수 활을 쏘지 않게끔 되었다. 자기 차례가 된 사슴은 제발로 걸어 나가면 왕의 요리사가 와서 그를 잡아가곤 했다.
그런데 하루는 새끼를 밴 암사슴의 차례가 되었다. 이런 사정을 알게 된 황금빛 사슴은 자기가 대신 죽기로 생각하고 앞으로 나아갔다.
다치지 않도록 왕이 특별히 주의를 준 바 있는 황금 빛 사슴이, 처형대 위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본 요리사는 왕에게 달려가 그 사실을 알렸다.
인간의 왕은 급히 달려와 황금빛 사슴에게 말했다.
"너만은 죽일 생각이 없는데 어째서 여기에 나와 죽음을 기다리고 있느냐?"
"오늘은 새끼 밴 친구의 차례가 되어 제가 대신 죽으려고 합니다."
사슴왕의 말을 들은 왕은 속으로 크게 뉘우치며 말했다.
"나는 너처럼 자비심이 깊은 자를 사람들 속에서도 보지 못했다. 너로 인하여 내 눈이 뜨이는 것 같구냐. 가거라 너와 암사슴의 목숨만큼은 살려주리라."
그러나 사슴의 왕은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우리 둘만의 목숨은 건질 수 있다 할지라도 다른 사슴들의 목숨은 어찌 되겠습니까?"
"좋다, 그들의 목숨도 구해 주리라."
"임금님의 자비로 저희 사슴의 우리들은 죽음을 면했지만 다른 동물들은 어찌 되겠습니까?"
"좋다, 다른 동물들의 목숨도 보호하지."
"거룩하신 임금님, 죽기를 싫어하고 살기를 좋아 하는 건 생명을 가진 모든 생물들의 한결같은 소망입니다. 날아 다니는 새들과 물속 고기들의 생명까지도 보호해 주십시오."
인간의 왕은 황금빛 사슴의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 생각하기를 「사람이나 짐승이나 살려고 하는 점에서는 조금도 다름이 없구나. 사슴왕처럼 동료 사슴을 살리기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않는 마용이야 말로 보살의 자비심 일 것이다. 내가 남에게서 무엇을 뺏어오는 삶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베풀어 줄 수 있는 생활만이 평화로운 세계를 가져 다 줄 것이다.」 하고 깨닫게 되었다.
이와 같이 하여 황금빛 사슴은 안간의 왕에게 모든 생물의 안전을 보장받고 동료 사슴들과 함께 숲에서 평화롭게 살았다.
*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를 본생담(Jataka)이라고 하는데, 이 이야기도 그 중의 하나로 황금빛 사슴왕이 바로 부처님의 천신이라고 한다.
▶세조와 문수
이조 7대 임금인 세조는 그의 조카인 나이 어린 단종을 패하고 왕이 되었기 때문에 그 죄악의 응보였는지, 아니면 단종의 모후가 세조의 꿈에 나타나서 힐책하되
「여보시오. 내 말 들어보시오. 아들이 나이가 어린 탓으로 당신이 섭정을 하고 있었으니 왕이나 조금도 다름이 없었을 터인데, 무엇이 부족하여 왕위를 빼앗고 영월로 귀양까지 보내더니, 다시 그렇게도 무참하게 죽여버렸단 말이요. 왕위가 그렇게도 탐이 나던가요? 이 더러운 양반아」
하고 침을 뱉었는데, 이런 까닭인지 세조는 이해로부터 온 몸에 등창이 생겨서 그 고통을 형언할 수가 없었다.
용하다는 의원도 신비한 영약도 아무런 효험이 없자, 세조는 병을 낫게 하기 위하여 지난 일을 진심으로 참회하고, 강원도 오대산이 문수보살외 상주도량으로 영험하다는 소리를 듣고, 상원사에 가서 문수보살님께 지극정성으로 백일기도를 드리게 되었다.
백일째 되는 날 몸이 가렵고 견딜 수가 없어서, 기도를 모두 마치고 개울로 나아가서 목욕을 하게 되었다.
혼자서 몸을 씻으면서 누가 등 좀 밀어 줬으면 하고 생각하는데, 마침 개울 옆 작은 샛길로 한 동자가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세조 임금은 동자를 손짓해 불러 자기의 등을 좀 밀어 줄 것을 부탁하였다.
동자가 그러마고 부드러운 손으로 등을 밀어 주는데, 가려운 부분들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다.
목욕을 마친 후, 세조 임금이 동자를 향하여 칭찬을 하고 다시 이르기를 “네가 나가서 행여나 사람을 만나더라도 상감 옥체에 손을 대고 흉한 종기를 씻어드렸다는 얘기를 해서는 안된다.”고 하였더니 동자가 미소를 지으며 “잘 알겠습니다. 상감께서도 후일에 누구를 보시던지 오대산에 가서 문수동자를 친견했다는 말씀을 하지 마시기를 부탁드립니다.” 하는 말과 함께 홀연히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세조의 생각에는 이 어린 것이 자기의 종기를 씻어주고 좋지 않은 소문을 퍼뜨릴까 염려하여 부탁한 것인데, 문수보살이 나타나서 자기 병을 고쳐주고 성인을 만났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 부탁을 받았으니 도리어 부끄럽고 송구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이후로 세조의 불치 종기는 씻은듯이 나아버렸으므로 환희와 감사한 생각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나라에서 제일가는 화공을 불러서 자기가 본대로 문수동자의 모습을 그리게 하고 또 조각하여 모시었으니, 지금의 상원사 선원에 모셔진 문수동자상이 곧 그것이다.
이 밖에도 세조가 상원사에 있을 때의 이야기가 하나 둘이 아니지만, 그 중에 한 가지는 세조 임금이 상원사에서 여러 대중 스님네와 같이 대중공양을 하는 데에 참례하여, 같이 공양을 받고 식사를 할 때이다. 세조 임금도 승려들이 사용하는 발우 4개를 펴놓고 음식을 받아서 공양하였다. 이 때 공양을 받기 전에 미리 천수를 받아 놓았다가, 식사를 끝낸 뒤에 반드시 이 물로써 발우를 씻는 것이다.
그런데 하루는 사미승 아이가 천수을 돌리면서
“처사님, 어서 물 받으십시오”
하고 말하자, 큰방의 대중스님네와 따라와 있던 신하들까지도 크게 두려워하며 곧 벌을 받을 줄로 알았는데, 세조는 사미승이 자기를 처사라고 불러 준 것을 큰 영광으로 여기며 사미승을 칭찬하고,
“네가 아니었으면 내가 누구에게 처사란 말을 들어보겠느냐.”
하며 오히려 큰 상을 내렸다고 한다.
또 한번은 세조가 법당에 올라가서 부처님께 예배를 드리려 하는데 문득 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나서 세조의 곤용포 자락을 잡아 끌면서 절을 하지 못하게 했다.
세조가 이상하게 여기고 사람을 시켜 법당을 살펴보게 하니, 탁자밑에 자객이 세조가 엎드려 절할 때 죽이려고 칼을 품고 노리고 있었다.
곧 자객을 붙잡아 내고 양묘전을 상원사에 하사하여 고양이를 기르게 하였다.
그러고 보면 세조 임금은 오대산에 들어가서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온몸의 고질 종기병을 완치하였고, 고양이 덕택에 죽을 목숨을 건졌으니 부처님의 은혜를 두텁게 입은 왕이라 하겠다.
그러기 때문에 세조는 불교의 탄압으로만 일관한 조선불교에 많은 공적을 이루기도 하였다.
▶부무은중경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 왕사성에 있는 기원정사에서 대비구 3만 8천인과 그 밖에 많은 보살 마하살들과 함께 계셨다.
그때에 세존께서 대중을 거느리시고 남방으로 나아가시다가 뼈 한무더기를 보시더니 오체를 땅에 붙이시어 그 마른 뼈에 정중히 예배하셨다.
이를 본 아난과 대중이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바로 삼계의 큰 스승이시며 사생(四生)의 어버이시라. 여러 사람들이 귀의하고 공경하옵거늘 어찌하여 이름 모를 뼈 무더기에 친히 절하시옵니까.」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이르셨다.
「네가 비록 나의 상족제자(上足弟子)이며 출가한지도 오래 되었지만 아는 것은 넓지 못하구나. 이 한 무더기의 마른 뼈가 어쩌면 내 전생(全生)의 조상이거나 여러 대(代)에 걸친 부모일 것이므로 내가 지금 예배한 것이니라.」
부처님께서 다시 아난에게 이르셨다.
「네가 이 한 무더기 마른 뼈를 둘로 나누어 보아라. 만일 남자의 뼈라면 무거울 것이며 여인의 뼈라면 검고 가벼우리라.」
아난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석존이시여 남자는 세상에 있을 때 큰 옷을 입고 띠를 두루고 신을 신고 모자를 쓰고 다니기에 남자인줄 아오며 또한 여인은 생전에 갖은 방법으로 치장하고 다니므로 여인인줄 알게 되오니다.
그러나 죽은 후의 백골은 남녀가 마찬가지 이옵거늘 어떻게 그것을 구별해서 알아보라고 하시옵니까.」
부처님께서 다시 아난에게 이르셨다.
「만일 남자라면 세상에 있을 때에 마소를 부리기도 하고 사람을 부려 크게 고생함이 없이 지내기도 할 뿐 아니라 때때로 가람에서 경을 외우고 법문을 들을 까닭으로 남자의 벼는 희고 무거울 것이요.
여인은 이 세상에 있을 때에 자녀를 낳고, 기름(育)에 있어 한번 아이를 낳을 때에 서말이나 되는 피를 흘리며 아기는 어머니의 젖을 여덟 섬 너말이나 먹느니라. 그런 까닭에 뼈가 검고 가벼우니라.」
아난이 이 말씀을 듣고 가슴이 터질 듯 하여 눈물을 흘려 슬피 울면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어머님의 은덕을 어떻게 하면 보답할 수 있아오리까.」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이르셨다.
「너는 이제 자세히 들어라. 내가 너를 위하여 분별해 설하리라. 무릇 사람이 이 세상에 있게 됨은 부모를 인연하기 때문이니라. 아버지가 아니면 나지 못하고 어머니가 아니면 자라지 못하나니, 어머니 몸속에 의지하여 달이 차면 이 땅에 태어나게 되느니라. 이로부터 어머니는 여덟섬 너말의 젖을 자식에거 먹이니 어머니의 은혜는 이루 다 말할 수 없느니라.」
어머니가 아이를 가지면 열달 동안의 신고(辛苦)는 무엇으로도 형용할 수 없다고 「부모은중경」에 설하고 있으며 어머니의 크나 큰 은혜를 크게 열 가지로 나누어 설하고 있다.
첫째 아이를 잉태하여 열달동안 온 정성을 기울여 지키고 보호해 준 은혜,
둘째 해산할 때 괴로움을 겪는 은혜,
셋째 자식을 낳고 모든 근심을 잊는 은혜,
넷째 입에 쓴 음식은 삼키고 단 음식은 아기에게 먹여주는 은혜,
다섯째 마른자리 골라 아이 눕히고 젖은 자리에 눕는 은혜,
여섯째 때 맞추어 젖을 먹여 길러준 은혜,
일곱째 똥 오줌 가려 더러운 것을 씻어주는 은혜,
여덟째 자식이 먼 길을 떠나면 생각하고 염려하는 은혜,
아홉째 자식을 위해 나쁜 일 하는 은혜,
열째 늙어 죽을 때까지 자식을 사랑해 주는 은혜
등으로 부모은중경에서는 자상히 말씀과 게송으로 설하고 있다.
고래(古來)로 동양에서는 백행(百行)의 근본을 효(孝)에 두었고 효의 사상은 인륜(人倫)의 근본이었다.
부처님께서는 태어나신지 7일만에 모친을 잃은 까닭에 부친보다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지극한 애정을 부모은중경을 통하여 말씀하고 계시는데 요즘처럼 인정이 메마르고 효의 사상이 잊혀져 가는 이 시대에 다시 한번 부처님의 말씀을 통해 부모님의 은혜가 지중(至重)함을 깨우쳐야 겠다.
▶아난의 지옥구경
난타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배다른 동생이다. 즉 부처님과 마찬가지로 정반왕의 아들이지만 부처님은 마야부인을 어머니로 하고 난타는 마하파자파티 부인을 어머니로 하였다.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후 고국인 카필라에 돌아왔을 때 마침 난타에게는 세가지 경사스러운 일이 겹쳐 있었다.
그것은 새 궁전이 완성되어 그곳으로 들어가는것, 신부를 맞아 결혼식올 올리는 것, 그리고 카필라국의 태자로 책립된다는 것 등의 일이었다.
특히 새로 맞이하는 신부는 나라에서 제일가는 미녀로 이름을 순다리라고 하였다. 부처님께서는 아우되는 난타를 제도 할 때가 되었음을 알고 성 안에 들어가 난타의 집으로 가셨다.
난타가 나와서 보니 부처님께서는 걸식을 하러와서 빈 바루를 들고 서 계셨다.
그래서 바루를 받아 음식을 담아 부처님께 드리려고 하자 부처님께서는 그것을 받지 않고 되돌아서 가는 것이었다.
난타는 하는 수 없어 어디선가 바루를 건네줄 생각으로 뒤를 따라 가다가 마침내 니그로다 정사에까지 오게 되었다.
부처님께서는 난타를 의자에 앉게하고 “착하다, 비구여 ! ” 하고 말씀하시자 저절로 머리가 깎이고 몸에는 가사가 입혀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난타의 생각은 집에 두고 온 부인의 모습이 생각나서 도망갈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러나 부처님이 언제나 그를 데리고 다니기 때문에 탈주의 기회가 좀처럼 오지 않았다.
이렇게 며칠이 지난 어느 날 그는 정사의 당번을 서라는 명령을 받았다.
낮시간에 부처님과 비구들이 걸식하기 위하여 밖에 나가면 한사람은 남아서 당번을 서는 것이다.
그는 드디어 탈주의 기회가 왔다 생각하고 부처님이 다니시는 큰 길을 피해 오솔길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모든 것을 빠짐없이 아시고 오솔길 맞은 편에서 오고 계셨다. 부처님께서는 가까이 다가가서 자비스럽게 말씀하셨다.
- 난타 ! 너는 아직까지도 집에 두고 온 부인생각만을 하고 있구나.
- 예, 그렇습니다. 부처님
부처님께서는 난타를 데리고 히말라야 깊은 산으로 가셨다. 그 산 속에는 한 마리의 늙은 원숭이가 있었다. 부처님께서는 원숭이를 가리키며
-부인은 미인이라는데 이 눈먼 원숭이와 비기면 어떻냐?
- 제 아내 순다라는 미인으로서는 인간 중에서도 겨룰 자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어찌하여 그녀를 눈먼 원숭이 따위와 비교하십니까?
그 다음 부처님께서는 난타를 데리고 천상계 (天上界)에 올라가 천상의 궁전을 구경시켰다.
궁전 속에는 500명이나 되는 아름다운 천녀가 미묘한 악기를 울리며 누구를 맞이할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궁금해진 난타가 천녀들에게 물었다.
- 누구를 맞이하기 위해 그토록 준비를 하십니까?
- 염부제라는 나라에 부처님의 동생으로 난타라는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은 출가하여, 계율을 지키고 수행한 공덕으로 다음 생에 이곳에 출생하여 저희들의 천자가 되십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그분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난타는 뛸듯이 기뻐하였다.
- 그 난타라는 사람은 바로 나입니다. 이대로 여기서 살게 해 주십시요.
- 안됩니다. 우리들은 천녀입니다만 당신은 인간입니다. 인간의 일생을 마치고 와 주셔요.
난타도 이에는 답할 말이 없어 그대로 부처님에게 돌아와서 천녀들에게 들은 것을 부처님에게 이야기 하였다.
- 네 아내는 미인이라고 하지만 그 천녀들과 비교하면 어떻냐.
- 제 아내와 천녀의 차이는 늙은 원숭이와 제 아내의 차이와 같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다시 난타를 데리고 염부제로 돌아왔는데 그 이래 난타의 수행은 비상한 것이었다.
그 후 부처님께서는 다시 난타를 데리고 지옥을 구경하였다.
지옥에는 큰 가마솥이 여러개 있고 그 중의 솥 하나는 펄펄 끓는 데도 옥졸들은 계속 나무를 집어 넣고 있는 것이었다. 난타는 옥졸들에게 물어 보았다.
- 여보시오, 다른 가마엔 모두 죄인이 벌을 받고 있는 모양인데, 이 가마는 계속 끓이고 있으니 어떤 까닭입니까?
- 염부제에 부처님의 동생으로 난타란 자가 있지요. 그는 출가했으니 다음 생에는 천상에 태어나겠지만 천상의 수명이 다하면 다시 이 지옥에 떨어지겠지요. 그래서 우리는 이 가마솥을 끓이며 기다리고 있소이다.
난타는 두려워 떨면서 부처님께 다가와서 어서 염부제로 돌아가자고 하였다.
- 너는 천상의 세계에 태어나고 싶어서 계율을 지키고 정진하는 것이냐?
- 아닙니다. 저는 천상에 살고 싶지 않습니다. 제발 지옥에만 떨어지지 않았으면 합니다.
이렇게 해서 더욱 수행에 전념하게 된 난타는 17일만에 아라한과를 성취하여 성인의 경지에 이르렇다고 한다.
▶원광법사 세속오계
신라 진평왕 때 모량부(牟梁部)에 귀산이라는 어진 선비가 살고 있었다.
하루는 같은 마을에 사는 친구 취항과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들이 사군자(士君子)들과 같이 어울려 놀려면 먼저 마음을 바르게 하고 몸을 근신해야 한다. 그러지 않는다면 필경 욕을 당하는 것을 먼저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러니 어찌 어진 사람을 찾아가서 도(道)를 묻지 않겠는가?」
두 청년은 가슬갑(嘉瑟岬)이라는 절에 계시는 원광법사(圓光法師)를 찾아가기로 작정했다.
이 때 원광법사는 중국에서 불법을 깊이 공부하고 교화활동 등으로 이름을 떨치다가, 왕의 간청으로 고국에 돌아와 대승의 법문을 펴고 크게 교화하니 국왕을 비롯한 온 백성이 그를 성인으로 우러렀다.
귀산과 취항은 곧 원광법사를 찾아 뵙고 공손하게 여쭈었다.
「저희들 세속 선비는 몹씨 어리석어서 아는 것이 없사오니, 바라옵건대 평생의 교훈으로 삼을 가르침을 주십시오.」
인정이 많은 원광법사는 그들의 물음을 갸륵하게 여겨 친절하게 일러주었다.
「불교에는 열 가지의 보살계가 있지만 너희들은 신하 된 몸으로서 필경 이것을 지키어내지 못할 것이다.
다만 세속인으로서 지켜야 할 다섯 가지 계가 있으니,
첫째는 임금을 충성으로 섬기는 것이요,
둘째는 부모를 효도로 받드는 것이요,
셋째는 벗을 신의로 사귀는 것이요,
넷째는 전쟁에 임해서는 물러서지 않는 것이요,
다섯째는 산 목숨을 함부로 죽이지 말고 가려서 한다는 것이다.
너희들은 이 일을 실행함에 소홀히 하지 말라.」
이것은 원광법사가 지은 것도 아니며 부처님의 말씀도 아니다. 오랫동안 신라 사람들에게 내려오던 미덕들 중에 당시의 젊은이들이 당연히 지켜야 할 일들을 원광법사가 덕목화(德目化)하여 그들로 하여금 평생을 지킬 교훈으로 삼게 한 것이었다.
그 다섯가지 중에서 마지막 것만은 원광법사의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에서는 절대 살생을 금하고 있는데 원광법사는 여기서 살생은 하되 가려서 하라고 했으니 불교의 가르침과는 어긋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이것은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살생을 안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므로, 어쩔 수 없이 살생을 해야 할 때에는 함부로 하지 말고 가리어서 하라는 것이다.
두 청년도 다섯 가지 중에서 네 가지는 잘 알 수가 있었으나 다섯번째 것은 처음 듣는 말이므로 다시 물었다.
「다른 것은 모두 이미 들었습니다만, 마지막에 말씀하신 산 목숨을 죽이되 가리어서 하라는 뜻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이에 원광법사는 살생을 가리는 데는 때를 가리는 것과 대상을 가리는 것의 두 가지가 있다고 설명해 주었다.
「6재일(六齊日)과 봄 여름에는 생물을 죽이지 않는 것이니 이것은 시기를 가리는 것이요, 집에서 기르던 말·소·닭·개 등을 죽이지 않고 조그만 목숨 즉 고기 한 점도 되지 않는 것은 죽이지 않는 것이니 이것은 대상을 가리는 것이다. 또 죽일 수 있는 것도 쓸 만큼만 죽이고 함부로 많이 죽이지 말라는 것이니, 이것이 곧 세속에서 지켜야 할 올바른 길인 것이다.」
「지금부터 이 오계를 받들어 실천하며 어김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두 청년은 기쁜 마음으로 공손하게 절을 하고 물러갔다. 그 뒤 두 사람은 전쟁에 나가서 모두 나라에 큰 공을 세웠다.
이 세속오계에서 원광법사는 불교의 참 뜻은 사회를 지도하고 정화하는 데 있으므로 반드시 불경이 불교적 의식에 따르지 않더라도 그 국가와 사회 및 개개인의 경우에 적합한 방법으로 일깨우고 가르쳐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그는 평생의 교훈이 될 가르침을 청하는 두 청년에 세속인으로서 지켜야 할 다섯가지 교훈을 일러주어 국민의 도리를 다하게 한 것이다.
이 세속오계가 곧 신라 화랑도의 근본 사상이 되었다.
이렇게 온 백성의 공경을 한 몸에 받았던 원광법사는 640년 황룡사에서 평안히 앉아서 세상을 마치니 세수 99세였다.
입적하실 때에 하늘에 음악소리가 가득하고 이상한 향기가 절 안에 가득차니, 모든 스님들과 신도들은 슬퍼하면서도 경사롭게 여기고 그것이 스님의 영감(靈感)임을 알았다.
나라에서는 우의(羽儀:의식에 장식으로 쓰던 새의 깃)와 장구(葬具)를 내려 임금의 장례와 같이 모셨다.
▶환적대사와 호랑이
환적(幻寂)스님께서는 평시에 호랑이를 타고 가야산 숲속을 누비셨다.
하루는 밖에 볼일이 있어서 나가시면서, 시자인 동자와 호랑이에게,
「동자야, 산문 밖에 볼 일이 좀 있어 내려갔다 올터이니 너희들 서로 사이좋게 놀아라.」라고 이르셨다. 스님께서는 곧 떠나셨다.
동자와 호랑이는 스님께서 출타하시자 마치 제세상이라도 만난 듯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신나게 어울려 놀았다.
어느덧 해가 서녁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둘은 배가 고픈 것을 느꼈다. 너무 정신없이 놀다보니 밥 때도 놓친 것이다.
스님께서는 아직 아니 오시고 저희들끼리 밥을 지어 먹기로 하고 동자는 부엌으로 들어갔다.
밥도 짓고 국도 끓이고 반찬을 만든다, 뭣을 한다. 한참 부산을 떨다보니, 그만 동자는 자기 손가락 중에 하나를 칼에 베어 버렸다.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고 굉장히 아팠지만 그 경황중에도 동자는 친구인 호랑이를 생각했다.
내가 이렇게 배가 고픈데 저놈은 몸집도 크니 오죽 배가 고플까, 하고 자기 손가락의 피가 그만 헛되이 흐르는 것이 아까와 친구인 호랑이의 입에 떨구워줬다.
호랑이에겐 참으로 감로수가 아닐 수 없었다.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이렇게 사람의 피가 맛있는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그렇게 조금 마시고 있다보니 배가 고픈데다가 호랑이는 그만 자기 본래의 동물적 습성이 발동하는 것을 참을 수 없게 되었다.
서로가 친구인 것을 까맣게 잊은 것이다.
그 자리에서 동자를 몽땅 먹어 치워 버렸다. 정신없이 먹다보니 어느새 바닥이 나고, 그야말로 누가 올까 무서웠던 것이다.
실로 눈깜짝 할 사이었다.
다 먹어치우고 나서 꺼억, 어참 요렇게 맛있는 건 첨이다, 하고 트림을 하며 잇빨을 쑤시다보니, 어허, 나 혼자만 먹다니, 동자는 어디 갔는가, 하고 두리번거리는 거와 동시에 아차, 그제서야 호랑이는 제정신을 차렸다.
아이고 이거 내가 동자를 먹어버렸잖아. 크, 큰일났구나.
당장 간이 콩알만해지고 스님의 불호령 같은 얼굴이 눈에 선하게 떠올랐으나, 이미 때는 늦은 것이었다.
이, 이일을 어쩌나.
호랑이는 먹은 것이 당장 소화가 안되고 걱정이 태산 같았다.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이라, 식후 연초가 또한 꿀맛이란 걸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도무지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입안이 소태처럼 썼다.
사지에 힘이 쭉 빠지고 어깨가 축 늘어지는 것이 더 이상 주눅이 들 수 없이 들어 백수의 왕인 호랑이의 체면이 말씀이 아니게 되어 버렸다.
그렇다고 달아날 수도 없었다.
어느 산촌 어느 골짜기 굴속에 꼬옥꼭 숨어도 스님은 단번에 찾아낼 것이었다.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만큼 호랑이는 스님을 잘 알고 있었다.
마침내 별이 총총한 밤에 스님께서 돌아오셨다.
스님께선 이내 모든 사실을 알아 차리셨다.
즉시에 스님의 주장자가 불호령과 함께 번쩍였다. 뒷다리 하나가 그대로 부러져 나갔다.
아주 생명을 끊어버릴까 하다가, 에라 이왕지사 한 목숨은 죽은 것이고, 네놈도 중생인 것은 마찬가지이니, 그대로 병신인 채로 살되, 다시는 내 눈 앞에 얼쩡거리지 말라 하고 놈을 가야산 밖으로 쫓아 버렸다.
그뒤부터 가야산에서는 호랑이의 씨가 말랐으며 자연 호식(虎食)이란 말도 없어지게 되었다 한다.
스님은 조선시대 사람으로 1603년에 태어나셔서 11세에 속리산 복천암에서 출가하셨다
1690년 해인사 백련암에서 입적하시니 세수 88이었다.
▶목어 이야기
옛날 어느 절에 덕 높은 스님이 몇 사람의 제자를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가운데 한 제자는 스승의 가르침을 어기고 제멋대로 생활하며, 계율에 어긋난 속된 생활을 일삼다가 그만 몹쓸 병이 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죽은 뒤에는 물고기 몸을 받아 태어났는데 등 위에 큰 나무가 솟아나서 여간 큰 고통이 아니었습니다.
하루는 스승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너 가는데 등 위에 커다란 나무가 달린 고기가 뱃전에 머리를 들이대고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습니다.
스승이 깊은 선정에 잠겨 고기의 전생을 살펴 보니, 이는 바로 병들어 일찍 죽은 자기 제자가 방탕한 생활의 과보로 고통받는 모습이었습니다.
이를 알고 가엾은 생각이 들어 수륙천도제를 베풀어 고기의 몸을 벗게 하여 주었습니다.
그날 밤 스승의 꿈에 제자가 나타나서 스승의 큰 은혜를 감사해 하며 다음에는 참으로 발심하여 공부할 것을 다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자기 등에 있는 나무를 베어 고기 모양을 만들어 부처님 앞에 두고 쳐주기를 부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소리를 들으면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교훈이 될 것이고, 강이나 바다의 물고기들은 해탈할 좋은 인연이 되겠기에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고기 등에 자라난 나무를 베어 고기 모양의 목어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차츰 쓰기에 편리한 둥근 목탁으로 변형되어, 예불이나 독경을 할 때 혹은 때를 알릴 때에도 사용하며, 그 밖의 여러 행사에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물고기는 잠을 잘 때도 눈을 뜨고 자므로 수행자도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해야 불도를 성취한다는 뜻에서 고기 모양의 목어를 만들어 아침 저녁으로 치게 하였다고도 합니다.)
우리나라의 큰 사찰에 가보면 대개 종각이 있고 이 종각에는 네 가지 법구가 갖추어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쇠로 된 범종과 가죽으로 만든 커다란 법고, 구름 모양의 운판, 그리고 고기 모양의 목어가 그것인데, 이 네 가지를 사물이라고 합니다. 범종은 고통 속에 살아가는 땅 밑 중생들의 해탈을 기원하며 울리고, 큰 북은 네 발 가진 짐승의 무리들을 제도하기 위하여 치는 것이며, 목어는 물 속 생물들의 구원을 위해 두드리는 것이며, 운판은 날아다니는 날 짐승과 온갖 곤충들의 안락을 바라며 소리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물의 울림 속에는 「원컨대 이 소리 온누리에 두루 퍼져 고통 받는 온갖 중생 다 함께 해탈케 하여지이다」하는 염원이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곧 뭇 중생의 행복과 해탈을 기원하고 생명의 존엄성을 일깨우는 자비의 소리인 것입니다.
▶달마와 혜가
혜가스님은 중국 낙양 무뢰 사람으로 어릴 때의 이름은 신광(神光)이다.
신광은 출가 전부터 많은 책을 두루 읽어 학덕이 뛰어난데다, 출가 후에도 여러 곳을 다니면서 수행에 전념했고 32세부터는 향산에 돌아와 8년 동안 좌선했다.
그리하여 자주 오묘한 이치를 이야기 하였으나, 마음의 편안함을 얻지는 못하였다.
신광이 하루는 탄식해 말하기를 『유교·도교의 가르침은 법도가 여리고 깊은 이치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근자에 멀리서 오신 덕 높은 스님이 소림굴에 계시다 하니, 그 분을 찾아가 물으면 의심한 바가 풀려 깊은 진리를 얻으리라.」하고 달마대사를 찾아갔다.
그 때 인도에서 건너온 달마대사는 소림굴에서 9년 동안 벽을 향하고 앉아서 전법할 시대가 도래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신광은 자기의 고민을 해결하겠다는 일념에서 조석으로 달마대사를 친견하러 나아갔으나, 스님은 항상 벽을 향하고 계셔서 가르침을 듣지 못하였다.
그러나 신광은 한 발자국도 떠나지 않고 계속 토굴 앞에 머물면서 스스로 자책했다.
『옛 사람은 도를 구하기 위하여 혈맥을 잘라 굶주려 죽어가는 이를 구하였고, 낭떠러지에서 몸을 날려 굶주린 호랑이를 살려 주었다. 옛날에도 오히려 이같이 하였거늘 나는 도대체 어찌된 것인가?』
그날 밤 하늘에서는 폭설이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신광은 날이 밝아 쌓인 눈이 허리를 넘을 때까지 돌장승처럼 서 있었다.
달마대사는 그때서야 눈 속에 서있는 신광을 보고 저으기 놀라고 가엾은 생각이 들어 비로소 입을 열었다.
『네가 눈 속에 오래 서서 뭘 구하려고 하느냐?』
달마대사의 물음에 신광은 비통하게 눈물을 흘리면서 간청했다.
『원컨데 스님께서는 감로문을 열어 널리 중생을 제도하소서.』
이에 달마대사는 신광을 준엄하게 꾸짖었다.
『모든 부처님의 위 없는 도는 오랜 겁 동안에 정진하여 어려운 일을 능히 행하고 참기 어려운 일을 능히 참아 이룬 것인데, 어찌 적은 덕과 지혜로서 그리고 경박하고 오만한 마음으로 참다운 법을 구하려고 하는가? 한갓 수고루움만 더하여 괴로울 뿐이다.』
이 말을 들은 신광은 훌연히 허리에 차고 있던 섬뜩한 패도(칼)를 들어 자기의 오른팔을 잘랐다.
이때 떨어진 팔을 때 아니게 피어난 파초 한 잎이 받아 들었다.
신광의 이같이 열렬한 구도의 마음을 보고 그가 불도를 수행할 만한 큰 그릇임을 안 달마대사는
『모든 부처님이 최초에 도를 구할 때에도 법을 위하여 몸을 잊었는데, 네가 지금 팔을 끊어 내 앞에 내놓았으니 구함이 있으리라.』
하신 후 곧 입문할 것을 허락하였다.
이에 「혜가(慧可)」라는 법명을 지어주고 제자로 삼았다. 그러자 혜가의 오른 팔은 다시 원상태로 돌아가 붙었다.
혜가가 스님께 여쭈었다.
『모든 부처님의 법인(法印)을 가르쳐 주소서.』
스님이 대답했다.
『모든 부처님의 법인은 사람에게서 얻는 것이 아니다.』
혜가가 다시 물었다.
『제 마음이 심히 불안합니다. 스님께서 편안케 해 주십시오.』
이에 달마대사는 중대한 가르침을 제시하였다.
『불안한 마음을 가져 오너라. 너를 위해 편안케 해 주마.』
그로부터 혜가는 물도 긷고 나무도 하면서 앉거나 눕거나 말할 때나 움직일 때마다 자기의 마음을 찾았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혜가가 이렇듯 피나는 정진의 6년 만에 홀연히 즐거움과 괴로움을 느끼는 마음이 본래 빈 것임을 깨달았다.
이렇게 뚜렷이 깨달았음을 보일 수 있게 되자 혜가는 달마대사와 다음과 같이 문답하였다.
『마음을 아무리 찾아도 끝내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내 너를 위해 마음을 편안하게 한 것이 끝났다.』
이렇게 해서 혜가스님은 달마대사로부터 법을 부촉받아 중국 선종의 제 2조가 되었다.
혜가스님은 552년 제자 승찬(僧璨)에게 법을 전하고 34년 동안 업도에 머물면서 설법하다가, 뒤에 관성현 광구사에서 〈열반경〉을 강하여 많은 사람들을 깨닫게 하시고 593년에 입적하시니 세수 107세였다.
▶혜능 디딜방아
혜능스님께서는 당 태종(太宗) 정관 12년 중국 최남부 지방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성은 노씨이며 3세때 아버지를 잃고 소년시절부터 나무 장사를 하여 늙은 어머니를 효성으로 봉양했다.
교육은 별로 받지 못했지만 그 마음은 진실하였다.
어느 날 시장으로 나무를 팔러 가다가 탁발승의 독경하는 소리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듣던 중 「응당히 머무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應無所住而生其心).」라는 구절에 홀연히 마음에 느끼는 바가 있었다.
독경한 스님에게 무슨 경이냐고 물으니 금강경(金剛經)이라하여 젊은이는 금강경 배우기를 간청하며 자기가 조금 전 듣고 느낀 바의 심경을 이야기 하니 탁발승은 황매산 오조(五祖) 홍인대사(弘忍大師)를 찾아가라고 소개해 주었다.
젊은이의 발심을 기특하게 생각한 탁발승은 금 열냥을 주면서 노모의 옷과 양식에 충당하여 노모를 봉양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젊은이는 어머니를 편히 모신 뒤 오조(五祖) 홍인대사(弘忍大師)를 찾아가 뵈옵고 예배하니 「네가 어디서 왔으며 무엇을 구하러 왔는가.」라고 묻자 영남 신주에서 오직 깨달음의 법을 구하러 왔다 하니 영남인은 오랑캐인데 어떻게 부처가 될 수 있는가 하였다.
이에 젊은이는 「사람은 남쪽 북쪽이 있지만 불성(佛性)에야 어찌 남북이 있겠습니까?」라고 답하였다.
홍인대사는 이 몇마디 말로 비범한 큰그릇인 줄 알았지만 다른 학인들의 눈치를 염려하여 큰 소리로 꾸짖듯 방앗간에 가서 일이나 하라고 몰아 내었다.
8개월이 지난 어느 날 홍인대사는 방앗간을 둘러보시게 되었다.
힘이 부족하여 돌을 등에 지고 열심히 방아를 찧는 노행자를 보시고 소견이 쓸만 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면서 말씀하시길 [혹 나쁜 사람이 너를 해칠까 염려하여 더 말하지 않은 것인데 네가 그 뜻을 알았느냐?] 라는 질문에 「예 저도 스님의 뜻을 짐작하였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어느 날 오조(五祖) 홍인대사(弘忍大師)는 문하대중을 모아 놓고 일대의 놀라운 포고를 했다.
「대중은 들으라. 세인(世人)들의 생사가 큰 일인데 너희들은 복이나 구하고 있지, 태어나고 죽는 괴로움을 벗어나는 진리는 구하지 않는구나. 너희들은 스스로 지혜를 보아서 본심의 지혜로운 마음을 게송으로 표현하여 나에게 가져 오라. 만일 진리를 깨달았다면 그대에게 초조 달마대사 이래의 가사(복전의, 예복, 수행자의 옷)와 발우(스님들이 공양 시 사용하는 밥그릇), 그리고 법(진리)을 전하여 육대조사를 삼겠노라.」 하였다.
그 당시 대중들 사이에서 오조의 법을 이어받아 육조가 될 자라고 지목을 받고 있던 신수대사(神秀大師)가 다음과 같은 게송을 지어 대중들이 다니는 복도 벽 위에다 이름을 밝히지 않고 붙였다.
身是菩提樹 心如明鏡臺
時時動拂拭 勿使惹塵埃
육체는 지혜의 나무
마음은 밝은 거울과 같으니.
항상 부지런히 털고 닦아
티끌 먼지 묻지 않게 하라.
오조 홍인대사는 아직 진리를 깨닫지 못한 게송임을 아셨다.
그러나 대중에게는 이 게송을 따라 수행하라고 했다. 노행자는 여전히 방아만 찧다가 어느 사마승이 외우는 신수대사의 게송을 듣고 아직 깨달음의 진의(眞意)는 증득하지 못했음을 평가하고 그날 밤 글을 잘 모르는 노행자는 동자에게 부탁하여 자기가 부르는 게송을 신수의 게송 옆에 써 달라고 했다.
菩提本無樹 明鏡亦非臺
本來無一物 何處塵擬埃
지혜는 본래 나무가 없고
밝은 거울 또한 대가 없노라.
본래 한 물건도 없거니
어느 곳에 티끌이 일어나리.
노행자의 게송을 본 대중은 놀라며 의아해 하였다. 그리고 「겉모습만 보고 사람을 알 수 없다. 우리가 육신 보살을 알아보지 못했다.」라고 수군거렸다.
조사께서는 노행자의 게송을 보시고 다음날 방앗간에 가셔서 허리에 돌을 달고 방아를 찧는 노행자에게 「쌀을 얼마나 찧었느냐?」고 물으시니 이에 노행자는 「쌀은 찧은지 오래되었사오나 키질을 아직 못하였나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이 말을 듣고 주장자로 방아를 3번 내려치고 돌아 가셨다. 그 뜻을 알고 삼경에 찾아가니 「네가 이제 제 6대조가 되었다. 잘 두호하고 지키어 널리 중생을 제도하라.」는 부촉을 하셨다.
노행자는 무명의 나무장사로서 출가한 지 8개월 만에 동토 초조 달마대사의 정법상승인의 의발과 법을 오조 홍인대사에게 전수받아 육조 혜능대사가 되었다.
▶애장왕비 전설
신라 애장왕비는 전신에 심한 피부병을 앓게 되어 백약이 효과가 없고 병은 날로 심해져서 드디어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되어 왕과 백성의 슬픔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가야산 산신령이 왕의 꿈속에 나타나서 “가야산에 가면 왕비의 병을 고칠 수 있는 약을 구할 수 있다.”라고 했다. 왕은 즉시 사람들을 보냈는데, 사신들은 가야산에서 글을 읽는 두 사람의 도승을 만나 왕비의 병을 고칠 수 있는 처방과 오색실을 얻어 돌아왔다.
긴 오색실의 한쪽은 왕비의 몸에 감고 다른 한쪽은 침전 앞에 있는 배나무에 감은 후 모두 그 밑에 모여 부처님에게 축원을 드렸더니, 왕비의 몸에서 작은 벌레가 무수히 기어 나와 오색실을 타고 배나무로 모두 옮겨가서 배나무가 말라죽고 왕비의 병이 말끔히 나았다.
왕은 기뻐서 즉시 가야산으로 사람을 보내 두 도승을 찾았다. 그들은 바로 순응과 이정이었다. 왕은 왕비의 병을 고쳐준 보답으로 그들의 소원을 물었다. 그리고 그들의 소원에 따라 가야산에 절을 짓고 이름을 해인사라고 했다.(802년)
▶퇴전선사와 홍련
당나라 중기 남양 등주 땅에 태어나 뛰어난 문장으로 후세에 당, 송팔대가의 한사람으로 추앙 받은 한퇴지는 처음에는 불교를 매우 배척하여 자사(주지사) 벼슬에 올라 불법을 비방하는 글을 자주 상소하다가 왕의 미움을 받아 서울(장안)에서 8,000리 떨어진 변방의 조주 자사로 좌천되었다.
그때 조주땅에는 태전선사라는 고승이 축융봉에서 10년간 수도에만 전념하여 생불로 추앙받고 있었다. 한퇴지는 문득 태전선사를 시험해서 불교를 다시 한번 깎아 내리고 싶은 생각에 그 고을에서 유명한 기생 홍련을 불러 계교를 일러 주었다. 만약 백일안에 태전선사를 파계시키면 후한상을 내리겠거니와 실패하는 날에는 죽음을 각오할 것을 약속했다. 홍련은 자신의 미모나 경력으로 봐서도 자신이 만만했다.
다음날 몸매를 더욱 아름답게 꾸미고 험한 산길을 올라 해질녁에야 스님의 암자에 도착하였다.
태전선사를 찾아뵙고 인사를 드린 홍련은,
「오래전부터 큰스님의 훌륭한 덕을 흠모해 오던 차 이번에 큰스님 시중도 들면서 백일기도를 올리고 싶어 먼 길을 마다 않고 왔습니다. 자비로 거두어 주십시오. 만일 거절하신다면 소녀는 이 자리에서 목숨을 끊고 말겠습니다.」
이렇게 하여 깊은 산골 외딴 암자에서 머물게 된 홍련은 일이 성사된 것처럼 마음 속으로 기뻐하였다.
다음날부터 건성으로 기도를 하고 태전선사의 시중을 들면서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지만 한달이 넘어가도 선사는 좌선에만 전념한 채 홍련을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일이 이쯤되자 마음이 조급해진 홍련은 온갖 수단방법을 동원하여 선사를 무너뜨리려 했지만 요지부동. 약속한 날은 하루하루 다가와서 마침내 약속한 백일이 내일로 다가왔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홍련은 이미 태전선사의 고매한 인품에 감동되어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경망스러운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렇지만 자사 한퇴지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으니 큰 화를 당할 일이 눈앞에 아른거려 약속한 백일이 되는 날 아침 태전선사 앞에 나아가 눈물을 흘리며
「큰스님 ! 어리석은 소녀가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조주자사 한대감의 명이 스님을 파계시키고 오라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사 저는 그 일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 대감님과 약속한 기일이 백일 오늘 저는 내려가면 큰 벌을 받아야 합니다.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하고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흐느껴 우는 홍련을 자애로운 미소를 띄우며 지켜 보시더니
「너무 염려말고 이리 가까이 오너라. 조주자사 한대감에게 벌을 받지 않도록 해 줄 것이다.」
하고는 붓에 먹을 묻혀 치맛자락을 펴게 하여 단숨에 글을 써 내려가니
「축융봉을 내려가지 않기를 10년(十年不下鷲融峰) 색을 보고 부질없음 알았기에 형체가 곧 물거품이라(觀色觀空郞色空)
어찌 법의 한방울 물을(如何一滴曺浮水) 홍련의 잎사귀 가운데 즐겁다 떨어뜨리겠는가(肯隨紅運一葉中)」
홍련의 치맛자락에 적힌 시를 본 한퇴지는 그후 태전선사를 참방하여 선사로부터 「불교의 어느 경전을 보았습니까?」하는 물음에
「별로 뚜렷하게 본 경전은 없습니다.」 라고 대답하자 선사가 다그치기를
「그러면 그대가 이제까지 불법을 비방함은 무엇 때문인가? 누가 시켜서 하였는가 아니면 자신이 스스로 하였는가? 만약 시킴을 받아서 하였다면 주인 시키는대로 따라하는 개와 다름없고 자신이 스스로 하였다면 이렇다 할 경전 읽음도 없이 어떻게 불법을 비방하는가? 알지 못하고 비방한 것이니 스스로를 속이는 일이나 다름없다」
하는 꾸짖음과 함께 심오한 가르침을 받아 그 후 한퇴지는 지극한 불자가 되어 마음을 깨치고 불교를 비방하던 그 붓으로 불법을 드날리고 삼보를 찬탄하는 문장을 후세에 남겼다.
동쪽 금강계단 벽화
▶앙굴마라
부처님 당시 사바티(사위성)에는 훌륭한 바라문 학자가 500명의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아힝사(불해)라고 하는 제자는 체력도 강하고 지혜도 뛰어날 뿐더러 그 용모도 아주 단정한 젊은이로서 스승의 두터운 신망을 받고 있었다.
어느 날 바라문이 집을 비우고 나간 사이에 바라문의 아내는 젊고 늠름한 아힝사를 자기 방으로 불러들여 유혹하려고 하였으나 아힝사는 침착하게 말하기를 “스승의 아내는 어머니와 같습니다. 그런 일은 생각조차 할 수 없습니다.’ 하고 거절하였다.
바라문의 아내는 젊은 제자에게 연정을 품었다가 창피를 당한 것이 분해서 자기 손으로 입고 있던 옷을 찢고 머리카락을 어지러이 하여 자리에 누웠다.
남편인 바라문이 돌아와 이상히 여겨 그 까닭을 물으니 “당신께서 가장 신망하는 제자 아힝사가 당신이 나간 사이에 내 방에 들어와 욕을 보이려다가 내가 반항을 하자 이렇게 옷을 찢고……”
하면서 흐느끼는 것이었다. 바라문은 속으로 분노가 치밀어 아힝사를 파멸시켜 버릴 방법을 생각하고는 자기 방으로 아힝사를 불러 이렇게 말했다.
“너의 학문은 이제 거의 완성단계에 이르렀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일만 마치면 비법을 전해주겠다”
영문을 모르는 아힝사가 이 말을 듣고 기뻐하며 “스승님께서 시키시는 일은 무슨 일이라도 하겠습니다” 하고 다짐을 하니 바라문은 벽장에서 한자루의 칼을 내어주면서 “지금 당장 거리에 나가서 백명의 사람을 죽이고 한 사람 한테서 손가락 한개씩을 잘라내어 목걸이를 만들어 돌아오너라. 그것으로써 너의 학문은 완성되는 것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아힝사는 칼을 받아 들고 몹시 고뇌했으나 스승의 명령을 절대적인 것으로 믿었던 그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거리로 뛰쳐 나갔다. 그러고 상대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여 손가락을 잘라 모았다. 손가락을 잘라내어 목걸이를 만든다는 뜻에서 사람들은 그 살인마를 “앙굴리말라”라고 불렀다. '앙굴리(Anguli)는 손가락, 말라(Mala)는 목걸이'라는 뜻이다.
거리에 탁발을 나갔던 비구들이 기원정사로 돌아와 부처님께 그 일을 알렸다. 부처님은 곧 탁발할 준비를 갖추고 거리로 나가셨다.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 그 길로 가시면 안됩니다. 그 길에는 앙굴리말라 라는 무서운 살인마가 있어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입니다.”하고 만류하였으나 부처님은 “내게는 두려움이라는 것이 없소”라고 말씀하시면서 살인마가 날뛰는 거리로 나아가셨다.
살인마 앙굴리말라는 드디어 아흔 아홉 사람을 죽이고 한 사람만 더 죽여 목걸이를 완성하기 위해 사람을 찾아 다녔다.
그때 그의 어머니가 소문을 듣고 자기 자식을 찾아왔다. 살인마는 눈이 뒤집힌 나머지 자기 어머니마저 죽이려 달려가는데 저 편에 부처님의 모습이 보였다. 살인마는 어머니를 젖혀두고 부처님을 쫓아가며 부르짖었다.
“꼼짝 말고 거기 섰거라. 정반왕의 태자야! 내가 바로 앙굴리말라이니 손가락을 내게 바쳐라.”
부처님은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앙굴리말라를 바라보셨다. 그는 부처님의 자비스럽고 위엄있는 모습을 대하자 조금전까지의 살기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이때 부처님은 조용히 말씀하셨다.
“앙굴리말라 나는 지금 이렇게 서있다.
너는 어리석어 무수한 인간의 생명을 해쳐왔고 나를 해치려 하지만 나는 여기 이렇게 있어도 마음이 평온하다.
너를 가엾이 여겨 여기에 왔다.
내가 이제 너에게 지혜의 칼을 다시 주리라.”
이 말을 듣자 앙굴리말라는 문득 악몽에서 깨어나 제 정신으로 돌아왔다. 마치 시원한 물줄기가 치솟아 오르는 불길을 꺼버리듯이 그는 피묻은 칼을 내던지고 부처님 앞에 꿇어 엎디어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
“부처님 저의 어리석음을 용서해 주십시오. 그리고 저를 제자로 받아 주십시오.”
그 뒤 그는 부처님을 따라 기원정사에 가서 설법을 듣고 지혜의 눈을 뜨게 되었다.
“부처님!
저는 원래 생명을 해치지 않는다는 뜻에서 아힝사(不害)라는 이름을 가졌으면서도, 어리석은 탓으로 많은 생명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씻어도 씻기지 않는 피묻은 손가락을 모아 목걸이를 만들었기 때문에 앙굴리말라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부처님께 귀의하여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소나 말을 다루려면 채찍을 쓰고 코끼리를 길들이려면 갈쿠리를 씁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채찍도 갈쿠리도 쓰지 않으시고 흉악한 제 마음을 다스려 주셨습니다.
저는 이제 바른 법을 듣고서 청정한 지혜의 눈을 떴으며, 참는 마음을 닦아 다시는 다투지 않을 것입니다.
부처님! 저는 이제 살기도 원치 않고 죽기도 바라지 않습니다.
다만 때가 오기를 기다려 열반에 들고 싶을 뿐입니다.”
▶의상 해인도
의상스님은 신라 제26대 진평왕 42년(A.D 620 315)에 왕실 김씨 한신공의 아들로 계림부(鷄林府)에서 출생하셨다.
출가전 스님의 이름을 일지(日芝)라 하는데 그것은 모친인 선나부인이 태몽에 「하늘에 해가 솟아오르고, 땅에는 쟁반만한 붉은 지초(芝草)가 빛나는 것을 보고」 일지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스님은 어려서 부터 총명하였으며, 또한 구도자적인 천성이 역연했다.
그리하여 그의 나이 19세 되던 12월 아버지께 나아가서 「저는 이 세속에서 삶의 뜻을 잃었압고 불법가운데 새 길을 찾고져 하오나 막지마소서.」라고 말씀드려 출가를 허락 받았다.
황복사 안함법사를 찾아가서 예배하니 「장하다! 네가 능히 세간의 그물을 뚫고 나옴이여!」라고 찬탄했다.
황룡사 금강계단에서 수계한 후, 7년 선배인 원효스님과 함께 백제땅으로 구도의 길을 떠나 보덕화상(普德和尙)에게 열반경과 유마경 등을 수학하였다.
그리고 다시 경전을 보다 깊이 중국에 가서 연구하고자 그의 나이 26세때 원효스님과 함께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다.
유학가는 도중 원효스님은 해골물을 마신 기연으로 홀연히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뜻을 요달하고 신라로 귀환하셨다.
그러나 의상스님은 이에 동요하지 않고 굳굳하게 홀로 구도의 길을 재촉하였다.
당나라 사신의 배에 의탁하여 양주(楊州)에 이르른 뒤 종남산 지상사, 지엄 화상의 문하에 이르르니 그의 나이 27세였다.
화엄종의 대조사이신 지염이 의상의 도착전날 꿈을 꾸니 신라로부터 한 큰 나뭇가지가 중국까지 뻗쳐, 그 가지 위에 봉황이 마니보주를 물고 있는데 빛이 널리 비치고 있었다. 꿈을 깬 뒤 지엽은 의상을 이렇게 맞이하였다.
「어젯밤 나의 꿈은 그대가 올 징조였소.」 지엄은 의상이 자기 제자 됨을 허락하시고 화엄의 깊은 뜻을 강설하시니 스승과 제자는 서로 깊은 신뢰와 보살핌으로 공부하여 몇 년이 지났다.
하루는 지엄화상이 의상을 보고 「그대가 지상사에 온지 벌써 4년, 화엄경을 읽어 그 대의를 대강 짐작했을 것이다. 「화염경」은 한 글귀 한 말씀도 부처님의 부사의(不思議)한 해탈경계를 설한 것이며 여래의 구경일승의 법문이다.」
이와 같은 지엄화상의 말씀을 듣고 공부를 계속하여 8년, 더욱 깊은 경지에 나아갔다.
그리고 다시 화장세계관(華藏世界觀)이며 볍계관(法界觀)등의 관(觀)을 닦아 부사의한 해탈의 경계와 만법의 연기 실상을 궤뚫어 보았다.
이러한 관법을 통하여 불부사의(佛不思議) 경계를 사무쳐 본 뒤로는 「화엄경」에 대한 의심이 다 풀려지고 중중 무진한 법계연기(法界緣起)의 도리가 거울속 그림자 모양 소연이 들어났다.
이렇게 「화염삼매」를 성취한 뒤 화엄경의 내용에 대한 확신이 생기어 화엄경의 대의를 한 그림으로 그리니 이것이 화염일승법계도(華嚴→乘法界圖)이다.
이 법계도는 법(法)과 불(佛)이 둘이 없고 부처와 중생, 마음이 다름없는 법계연기를 하나의 간단한 그림으로 나타낸 것이다.
의상스님께서 다시 이 법계도를 설명하는 한 송을 지어 붙이니 이를 법계송 또는 법성게라 한다. 그 게송은
法性圓廳無二相 諸法不動本來寂
無名無相總一切 證智所知非餘境.(생략)
법의 성품 원융하여 두 모습 본래 없고
모든 법은 고요하여 움직이지 아니하네
이름 없고 모습 없어 온갖 것 끊겼으니
깨친 지혜 알 바요 다른 경계 아니로다.
의상은 이 법계송을 지은 뒤 이것이 「화엄경」의 진리에 부합한가 확인하고자 설에 불을 지르고 그 불옆에 서서 발원하였다.
「의상이 이제 화엄의 깊은 뜻을 이 30구 210자의 게송으로 표현하였사오니 이것이 노사나 부처님과 문수·보현 3대 성존의 뜻에 합하오면 이 글이 타는 불속에 들어가도 타지 않을 것입니다.」
의상이 법계송을 불에 넣어도 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의상은 이 법성게를 지엄화상에게 내보이니 지염화상은
「참으로 장하고 장하다! 30구 게송속에 화염경 큰 뜻이 다 담기었다. 이 게송만 외워도 화엄경을 읽은 공덕과 같을 것이니 널리 유전토록 하라.」
이와같이 화엄종의 제2조이신 지엄화상은 의상법사가 깨달으신 바를 증명하시니 스승과 제자의 할일이 이에서 다하였다.
스님께서는 당나라의 신라 침입설을 듣고 17년만에 급히 신라로 귀국하여 신라땅에 화엄의 거룩한 진리를 설하시니, 후세에 일연선사는 다음과 같이 찬하셨다.
가시나무 헤치고 바다 건너서 티끌먼지 무릅쓰고 도를 찾았네
종남산 지상사의 문에 들어가 지엄화상 가르침에 도를 깨닫고
화엄의 아름다운 진리의 꽃을 고국땅에 돌아와 심으셨으니
종남산과 태백산이 같은 봄이네
▶원효
신라불교의 대성자로서 추앙되고 있는 원효스님은 속성이 설이시니, 압량군의 북쪽, 율곡 사라수 아래서 출생하시어 29세에 황룡사로 출가하셨다.
그때 당나라에서는 경·율·론에 통달하여 삼장법사가 된 현장스님이 29세에 큰 뜻을 세워 17년 만에 서역(인도)의 고승 대덕들을 찾아 불법과 학문을 연구하고 다시 당나라로 돌아온 해가 645년이었다.
나란타사의 계현스님에게 학습한 〈유가론〉 〈인명론〉 〈구사론〉 등으로 불법을 펴 장안과 많은 중생들을 교화하고 있다는 소식이 세상에 널리 펴졌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동방의 여러 나라 스님들은 현장스님에게 불법을 공부하기 위해 당나라를 찾아가게 되었다.
신라의 원효 스님도 육로로 고구려 변경을 넘어서 당 유학 길에 나서다가 국경을 지키는 병졸들에게 잡혀 많은 괴로움을 겪고 다시 신라로 돌아와 의상스님과 동행하여 백제 땅을 거쳐 바다로 요동까지 가서 무사히 닿아 길을 계속했다.
어느 날 해가 저문 뒤 원효 스님과 의상스님은 인가가 끊긴 산중에서 노숙을 하게 되었다.
두 스님은 바람을 피하여 무덤 사이에서 잠을 청했다. 한밤중 원효 스님은 심한 갈증을 느껴 눈을 뜨게 되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어둠 속에서 어떤 함박 같은 것이 보이고 그곳에 물이 고여 있기에 얼른 그 물을 입으로 가져다 해갈했다.
그 물맛은 그렇게 달콤할 수가 없었다.
스님은 단숨에 그릇을 비운 뒤 만족한 기분으로 새벽이 지날 때까지 잠을 푹잤다.
이튿날 아침에 일어난 스님은 간밤에 자신의 갈증을 풀어준 그릇을 찾으려고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이것이 어찌된 것인가, 스님이 그릇이라고 여겼던 것은 인간의 해골이 아닌가? 그리고 그 물은 거기에 고여있던 빗물이 썩었던 것이 아닌가!
스님은 불현듯 자신의 배를 뒤틀고 올라오는 구토에 ‘억, 억’ 하고 오물을 토하기 시작했다.
그때 스님은 문득 깨달았다.
간밤에 마셨던 물이 썩은 빗물인줄 모르고 마실 때에는 그렇게 달콤하고 감미롭던 것이 아침에 일어나 해골물인줄 알고 나서는 온갖 추한 생각과 구역질을 일으키지 않는가.
스님은 「마음이 일어나면 여러 가지 법이 일어나고, 마음이 사라지면 해골도 없는 것,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길 삼계가 모두 마음 뿐이라. 어찌 나를 속였으리요. 마음 밖에 법이 따로 없으니 어찌 따로 진리를 구하랴.
(心生則 種種法生/心滅則 觸 不二/三界 唯心/萬法 唯識/心外 無法/胡用 別求)」
이런 게송으로 자신이 깨달은 경지를 읊었다.
밤사이 원효 스님 곁에서 누워 자고있던 의상 스님은 일어나 당나라까지 먼 길을 다시 떠날 준비를 하다 아무런 채비를 하지 않는 스님에게 “원효 스님 왜 길 떠날 생각을 않으십니까?”라고 물었다.
원효 스님은 대답대신 의상 스님에게 “우리가 당나라 유학 길을 떠났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하기 위한 것입니까?” 라고 오히려 반문했다.
의상 스님은 얼른 “그야 도를 구하기 위함이지요”라고 대답하자 “그럼 이미 도를 구하였다면 더 이상 갈 필요가 없겠지요”하며 오던 길을 거슬러 다시 신라로 돌아와 그곳에서 깨달은 법을 가지고 중생들을 위해 설법하며 여러 곳을 돌아 다녔다.
스님의 높은 도덕은 온 신라를 덮고 널리 알려졌다.
하루는 스님께서 장안거리 (경주)를 다니며 “자루없는 도끼를 빌려주면 하늘 바칠 기둥을 찍으련다.”라고 외치고 다녔다.
이를 들은 무열왕은 “이는 귀부인을 얻어 훌륭한 아들을 낳겠다는 뜻이니, 나라에 큰 성현이 난다면 그보다 큰 이로움이 없으리라.”하는 생각으로 신하를 보내 과공주가 있는 요석궁으로 모시도록 했다.
스님을 문천 다리에서 만나거든 일부러 물에 빠뜨리라고 일렀다. 옷을 젖게된 스님은 그 옷을 말리느라고 할 수 없이 요석궁에서 유숙케 되었다.
그러한 인연으로 공주가 아들을 낳으니 그가 신라의 이두를 집대성 한 대학자인 설총이다.
스님은 그로부터 스스로 저자거리에 나와 속복을 입고 소성거사(小姓居士)라 하며 걸식을 마다 않고 광대들이 굴리는 큰 박을 무애(無碍)라고 이름지어 춤추고 노래하며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에게 포교하셨다.
스님은 세수 70으로 열반하실 때까지 여러 가지 기행과 설법과 방대한 저술 활동으로 초인적 행을 보이셨다.
중국에 널리 알려진 금강삼매경론 3권은 경주 황룡사에서 대중들에게 직접 강론하신 것이다.
저서 1,000여권 중 현재까지 전하여 오는 것은 240여권, 대승 소승의 삼장을 통털어 찬술한 점에 있어서는 일찌기 없었던 일이며 그 중에 원효 스님의 중심사상이 담긴 「십문화쟁론」은 오래된 법보로서 대승기신론과 더불어 불교인들이 공부해야 할 명저이다.
스님이 입적하신 해는 신문왕 6년 혈사에서 였고 지월록에 스님의 많은 일화가 적혀있고 고려시대 숙종때 대성화정국사(大聖和靜國師)라는 시호를 받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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