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여자라고 숨어서 벌벌 떨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들도 싸움을 도웁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순찰사이던 권율은 선조 26년(1593년)
승장 처영(處英)이 이끄는 승군을 포함한 정병 2천 300여명을 거느리고 행주산성에 진주하였다.
1593년 2월 11일 우끼다 히데이에가 이끄는 3만 왜군은 행주산성을 겹겹이 포위하였다.
일본은 우세한 병력으로 아홉차례나 그 산성을 맹공격했다.
산성에는 정병 2천 300명과 남녀노소 백성이 다 동원,전투에 참여한다.
모든 백성들이 힘을 모아 싸운 것이다. 그래야 1만 여명 밖에 안된다.
조선은 병력이나 무기 등에서 일본에 열세를 면치 못하는 힘겨운 전투였다.
왜군의 계속된 공격으로 화살이 떨어지자 여자들이 전투에 나선 것이다.
여자들은 우선 가마솥을 걸어 놓고 물을 끓였다.
아낙네들은 긴 치마를 잘라 짧게 덧치마를 만들어 입었다.
그들은 치마폭에 돌을 주워 담아 싸움을 거들었다.
여자들은 치마에 돌을 담아 병사들에게 날라다 주었다.
치마에 담아 나른 돌멩이들은 아주 좋은 무기가 되었다.
행주치마의 어원이 바로 여기서 비롯되었다고 전한다.
왜군들의 공격이 시작되자 뜨거운 물을 함지박에 퍼 담았다.
병사들은 여자들이 끓여준 뜨거운 물을 왜군들에게 쏟아 부었다.
왜군은 이날 7진으로 나누어 9차례에 걸친 맹공격을 가해 왔으나
모두 패하여 적은 1만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퇴진하였다고 한다. 왜군에게는 대참패였다.
조선은 이 전투에서 기적의 대승을 거둔것이다.
이순신의 한산대첩, 김시민의 진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인 행주대첩이다.
권율장군이라는 특출한 인물과 함께 행주산성의 군인들과 모든 백성들이 힘을 합쳐 이루어낸 눈물겹고 장한 싸움이었다.
당시 부녀자들의 공을 기리는 뜻에서 행주라는 지명을 따서 ‘행주치마’라고 하였다고도 한다.
행주치마라는 이름이 바로 여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남아(男兒)는 감의기(感意氣)요, 공명(功名)을 수복론(誰復論)하랴!!"
1953년 2월 행주대첩에 임하면서 권율장군이 병사들에게 남긴 말이다.
권율장군의 말은 이렇게 풀이할 수 있다.
"남자는 오직 의의와 기만을 생각할 뿐이지, 어찌 부귀와 명예를 따지겠느냐!"
권율은 1537년에 태어나 45세의 늦은 나이에 병과로 출사하여 1598년까지 7년 동안 일본의 침략전쟁을
온몸으로 막아내며 맞서 싸웠던 사람이다. 조정에서는 그의 공을 높이 평가하여 군의 총사령관인 도원수에
임명하려했다. 뜻밖의 인물이 권율의 도원수 승진을 반대하고 나섰다.
병조판서 이항복이었다. 선조임금과 조정대신들은 모두 의아해했다.
당시 병조판서 백사 이항복은 다름 아닌 권율의 사위였기 때문이다.
사위가 장인의 승진을 반대하다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이항복으로서는 충분히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당시는 전쟁 중이었지만 이미 선조임금 초기부터 시작된 당쟁이 여전히 치열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장인이 도원수로 승진하면 반대파에서 어떤 시비를 걸어 물고 늘어질지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또 지원군으로 참전한 명나라 군대의 사사건건 생트집에 고생이 심할 장인을 위하는 마음도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선조임금은 권율을 도원수로 임명했다.
그리고 실제로 조선군 총사령관인 권율장군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명나라 군대의 시기질투와 생트집에 엄청난 상처와 마음고생을 했다.
권율은 참혹하고 지루했던 7년 전쟁이 끝난 이듬해 63세의 나이로 죽고 말았다.
첫댓글 잘 보았습니다. 양주시 장흥에 권율장군묘가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