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골절(骨折)
이두백
우리의 몸을 이뤄주고 활동을 지탱해주는 뼈는 몇 개일까? 신생아일 때는 약 450개에 달하지만 자라면서 서로 뭉치고 합쳐져서 270개 단계를 거치고 성인이 되면 206개라고 한다.
요새 새삼, ‘나에게 이 206개의 뼈들이 온전히 남아있는 것일까? 일부가 없어져 더 적어진 것은 아닐까?’자문자답해 본다. 그 이유는 4번에 걸쳐 뼈 몇 개가 뚫어졌거나 부러졌었기 때문이다.
첫 번째는 1970년 여름방학으로 기억된다. 광주광역시에 유명한 이비인후과 병원이 있었고 명의라는 소문이 동기동창 친구들 사이에 파다하게 퍼져, 시골에 내려가지 않고 자취집에 머물면서 마음먹고 진찰을 받아봤다. 병원진찰을 받아보니 코 안쪽 뼈에 만곡증이 있고 그대로 놔두면 비후성비염, 축농증 등을 유발하여 장기적으로 생활이나 학습에 큰 지장이 될 수 있다며 수술을 권했다. 그래서 젊은 혈기를 믿고 과감히 수술대에 올랐다. 당시 마취기술이 발달 되지 않던 때였던지 기계로 코 안의 한쪽 뼈를 깎아내는데 그렇게 아플 수가 없었다. 상당시간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였다. 담당의사분께선 수술이 잘 되었다며, 그날 바로, 코 안 다른 쪽 뼈 깎는 것까지를 권했으나, 너무 아파 그 병원을 도망 나오듯이 뛰쳐나왔고 그 뒤엔 어떤 이비인후과 병원을 지나더라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두 번째는 1980년대 중반 어느 해, 직장에서 가진 부서대항 축구경기를 하면서였다. 상대편 팀에서 하늘 높이 공을 차올렸기에, 그 공을 머리로 받아 내 공으로 만들려고, 상대편 선수와 있는 힘을 다해 뛰어올랐다. 그런데 상대편 선수는 동작이 빨랐던지 나를 고의로 피했던지, 내 몸만 허공에 붕 떴고 내 몸무게와 중력의 힘에 의해 왼팔을 먼저 짚으며 나뒹굴었다. 그 순간 왼팔이 모두 부러져 떨어져나간 듯한 통증이 느껴졌고 호흡도 가빠졌다. 눈을 떠보니 다행히 왼팔은 붙어있는데 팔목이 부러져 축 늘어졌고 손가락들도 움직여지질 않았다. 바로 회사 앞 병원으로 가서 수술을 했고 무조건 머리 위로 왼팔을 올리라고 하여 상당기간, 잘 때나 근무 중에도 깁스한 팔을 높게 들고 다녔다. 절차에 의해 장애인 여부 판정을 했으나 등급은 매겨지지 않았고 관절 일부가 없어졌다고 했다.
세 번째는 2007년 11월에 두 번에 걸친 뇌수술을 할 때였다. 직장에서 안전모를 쓴 상태로 낮은 천장에 심하게 부딪쳐, 두개골 안에서 뇌를 보호하고 있는 3개의 막중 경막이란 곳에서 실핏줄이 파열되었었다고 한다. 3주간 피가 조금씩 흘러 쌓여 뇌 한쪽을 쭈그러트리며 중심에서 상당히 밀어내면서 위기상황을 초래했다. 장녀 결혼식 상견례가 있어 서울에 올라온 때에 위기상황을 맞았기에 119차를 불러 바로 병원에 갔고, 바로 수술이 가능하다는 또 다른 병원으로 앰뷸런스차를 타고 가서, 한 밤 중에 두개골 두 곳을 뚫는 수술을 했고 중환자실에 입원했었다. 16년이 지난 지금도 이마 위쪽 부분의 두개골엔 패인 살이 메꿔지지 않은 채 만져지곤 한다.
네 번째는 올 9월 1일, 왼 발목 골절되어, 광주광역시 정형외과병원에 가서 약 5센티미터 길이의 나사식 철심을 2개 박는 수술을 한 경우였다. 그날, 고향 영광 동생의 꾸지뽕밭에 가서 꾸지뽕 열매들 수확하는 일 도울 때는 소풍 가듯이 기분이 좋았다. 그곳에서 깃재를 넘어 장성 처가마을에 가서, 밤에 아내의 집안 아저씨격인 90세 어르신을 찾아뵙고, 올 봄 사별하신 아주머니와의 오랜 인생살이, 아주머니 없이 생활해 오신 6개월의 애환 등을 듣다보니 꽤 시간이 흘렀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옆에 개천이 있고 축대도 있었는데 그 푹 꺼진 축대에 발을 헛디뎌 왼발목이 골절되었고 양쪽 손바닥엔 상처를 조금 입은 것이었다. 왼 발목 골절을 수술해준 정형외과 의사 말에 의하면, 수평방향의 왼발목뼈와 함께 왼발 정강이뼈 두 개 중 바깥쪽 가는 뼈도 같이 골절되기 마련인데 내 경우엔 특이하게 발목 수평방향 뼈 일부만 골절되었다고 한다.
왼 발목이 골절되고 보니 일상생활에 제약이 많고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집안에선 빌려온 휠체어 도움을 받으나, 가까운 곳에만 나가더라도 두 개의 목발 신세를 져야했다. 그리고 두 개의 발로 생활한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큰 축복이고 고마운 것인가를 실감했다. 역설적으로, 68년에 교통사고로 왼쪽 허벅다리를 잃으시고 35년간 목발생활을 해 오신 내 부친의 어려움들을 떠올려봤다. 또한 여러 건강 사정상 오래 고생해오거나, 휠체어나 목발 등을 오래 사용해온 친구들에게도 안부전화를 하게 되었다.( 창원 최영복 친구, 광주광역시 김무열 친구, 최석중 친구 등등)
왼 발목 수술 후 5주 정도 지나서, 한쪽 목발만 사용해서 걸어도 훨씬 편리함을 느낀다. 또 왼발 디딜 때 발목 내부에서 생기던, 쑤시고 쏟아지는 듯한 통증이 완화되어 가니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무심코 왼 발목이 무엇에 부딪쳤을 때 깜짝깜짝 놀라던 경우들도 줄어드니 웃음이 나온다. 5개월 정도 지나면 두 개의 철심도 뺄 수 있다니 그땐 달리기도 하고 걸음걸이의 가치와 무게감도 한껏 더 느껴가자.
2. 내 젊은 시절 신세진 먼 친척들
이두백
1960년대~1970년대에, 지방에서 서울에 올라와서 대학입학시험을 보거나 취직시험을 볼 때엔 대부분 친척집에 의탁했다. 당시의 호텔이나 여관의 비용이 낮은 수준이 아니었겠지만, 전반적으로 열악한 가정경제수준과 대가족제의 전통과 흔적이 조금은 이어진 때문이었었다. 고속도로나 고속열차도 없거나, 많지 않을 시기여서 먼 거리를 오가면서 필요한 일들을 보려면 충분한 시일 전에 서울에 올라와 친척집에서 짧게는 2~3일, 때로는 1~2주 신세를 지면서 일들을 보곤 했다.
내 경우엔 문래동에서 생활하시는 이모님 댁과 면목동에서 생활하시던 8촌 형님 댁, 후암동에서 생활하시던 8촌 누님 댁을 찾곤 했다. 독자이신 부친과, 3형제였으나 형님과 동생 두 분이 일제 강점기에 두만강 건너 만주로 갔기에 사실상 독자로 지내오신 조부님을 두었기에, 가까운 4촌이나 6촌 친척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먼 친척집에서 숙식은 겨우 해결되나 문제는 막판 대입시험 준비나 공무원 혹은 회사 취직시험 마무리 준비에 필요한 조용한 환경과 공부시간 확보의 어려움이었다. 요새 같은 도서실이나 고시원, 커피집 등 편의공간도 없던 때라 친척들의 어려운 생활환경 파고에 휩쓸리거나 함몰되곤 했다. 어린 3남매 기르시며 가사일 바삐 해대던 이모님 댁에서는 지속되는 어린아이들 울음소리에 공부는커녕 숙면도 취하기 힘들었다. 도라지 껍질을 벗기면서 생활비 벌던 8촌 누님 댁에서는 매일 지속되는 부부싸움의 소음과 격한 감정의 소용돌이들에서 빠져나올 방법이 없었다.
설 명절 며칠 앞두고 면목동 8촌 형님 댁 찾아갈 때는 자세한 주소나 전화번호도 없이 용마산 부근과 운영하시던 철공소상호만을 가지고 찾아갔다. 요새 같은 휴대폰 검색 기능도 없었고 상세한 시내버스 노선안내도 없던 때였다.
차가운 겨울날씨에 이곳저곳을 찾아 헤매다가 술을 좋아하시던 8촌 형님의 취향을 기억하여 술집 몇 곳을 들려, 결국 형님 댁을 찾았고, 고향소식들과 영광 어머니께서 손수 만들어 싸주신 쑥떡 뭉치를 드렸더니 반가워하셨다.
그리고 약 10일 철공소 소음들 속에서 내 공부를 했고 취업시험도 통과했었다. 동시에 형님의 두 아들 학습도 지원해줬고 형님의 막내아들 초등학교 조기입학도 지원해줬다.
세월이 50~60년 흘러 2023년 추석명절이 되니, 대입시험이나 취직시험 볼 때 신세를 졌던 먼 친척 분들의 배려가 고맙게 생각났다. 대부분 벌써 고인들이 되셨다. 몇 자녀들에게는 전화로 안부를 여쭈었다. 문래동에서 아현동으로 옮겨 생활하시는 87세 이모님께는 명절용돈도 즐겁게 보내드렸다. 용돈 드리면 받으실 내 조부님, 부모님께서 모두 이 세상에 안 계시니, 용돈 잘 받았다고 전화해 오시는 이모님 목소리가 매우 다정하게 느껴졌다. 역으로 취업공부 준비 중에 서울 중구 황학동 우리 집에서 상당기간 기거했던 생질(여동생아들)이 아내 및 두 자녀랑 찾아와서 즐거운 시간을 같이 가지니 추석명절이 한껏 풍성해진 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