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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구의 (경북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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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머리말
Ⅱ. 시의 형식과 의 성장 배경
Ⅲ. 의 시에 나타난 자아의식
1. 삼락와 을 통한 삼락
2. 인 고향을 통한 와
3. 밝은 이미지와 의 지향
4. 을 넘어 의 세계를 지향
5. 의 출현과 를 지향
Ⅳ. 맺음말
8 과 73
<논문 요약>
본고는 신당( ) 정붕( : 1467~1512)의 시에 나타난 그의 지향의
식을 고찰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신당의 시 7수 가운데 1수를 제외하면 모두 7언( ) 시이다. 신당이 정
형시( )만을 지었다고는 할 수 없겠으나, 현전하는 시는 정형시인
근체시( )뿐이다. 이를 두고 보면, 첫째 청렴( )ㆍ강직( )한
성격을 바탕으로 원칙( )을 가장 중시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청송부사를 재임할 때의 일화( )에서 잘 알 수 있다. 둘째 평소 그는
정신적으로 여유가 있었다. 이는 그가 남긴 시가 대부분 7언 시라는 것
을 보면 알 수 있다.
그가 어려서는 스승인 한훤당 김굉필, 작은아버지인 정석견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의식의 성장은 그가 성균관에서 공부할 때 만난 벗
들과 교유하면서부터 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시에 나타난 지향의식으로는 첫째 두 가지 좋아함과 세 가지 즐거
움을 통한 정신적 풍요로움을 추구하였다는 점이다. 둘째 안식처인 고향을
통하여 마음의 자유와 평화를 추구하였다. 셋째 밝은 이미지를 통하여 긍
정적인 세계를 지향하고 있다. 넷째 혼돈을 넘어 질서의 세계를 지향하고
있다. 다섯째 초인의 출현과 호걸( )한 선비를 지향하고 있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신당 정붕은 자아의식이 확실한 조선 전기의
선비였다. 그의 의식을 통하여 볼 때 다른 선비들의 모범이 된다. 현재
까지 전하는 시가 비록 적을지라도 그의 시를 통하여 볼 때 그의 의식
의 흐름은 조선 전기 선비들의 모범이 되고 있다. 이점이 신당( ) 정
붕( )이 우리문학사상에 차지하는 위상( )이다.
주제어: 지향( ), 풍요, 자유, 긍정, 호걸지사( ), 질서.
삶과 그의 시에 나타난 9
Ⅰ. 머리말.
본고는 신당( ) 정붕( : 1467~1512)의 시에 나타난 그의 지향의
식을 고찰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경상도 선산 지역은 인재가 많이 배출
되기로 소문난 고장이다. 본고는 선산의 인물의 한시를 고찰하는 일환
으로 신당 정붕의 한시를 고찰하려 한다. 신당은 일선십현( ) 가
운데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좁게는 선산 구미 인물이지만 이를 확대
하면 조선의 인물이 된다. 따라서 본고를 통하여 조선 전기 선비들의 의
식흐름의 일단을 알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정붕의 자는 운정( ), 호가 신당( ), 본관이 해주( )로 경상도
선산 출신이다. 한훤당( ) 김굉필( )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성종 17년(1486) 진사가 되고, 동23년(1492)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벼슬이 홍문관 교리( )에 이르렀다. 연
산군 10년(1504)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경상도 영덕에 유배되었으나, 현
명하게 처신하여 몸을 보존하였다. 1506년 중종반정 이후 청송부사(
)를 지내다가 재임 3년 만에 임지에서 죽었는데 그의 나이 46살 되
던 해였다. 그는 천성이 매우 청백하여 의가 아닌 것은 행하지 않았다.
일찍이 『안상도( )』를 지어 스스로 경계( )하였다. 퇴계( )
이황( )은 그의 학문이 깊다고 칭찬하였다. 문하( )에 송당( )
박영( ) 등을 배출하였으며, 선산 구미 의 금오서원( ), 개령
( )의 덕림서원( )에 제향되었다.
본디 신당의 시는 3제( ) 4수( )에 불과하였으나1), 최근에 신당의 후
손2)이 3수를 더 찾아내서 현전하는 시가 6제 7수이다. 본고의 대상에서
1) “ , , .” , 「 」( ,
).
2) 신당의 후손인 의 가 한 새로 발견한 라는 책(2001.
6)에서 신당의 3수의 시를 찾아낸 경위를 서술하고 있다. 실제 필자가
의 ( )을 확인한 결과 3수의 시가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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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신당이 남긴 한시 7수를 대상으로 하며 필요에 따라 다른 문헌을 참
고하기로 한다. 본고의 진행방법은 동서양의 비평방법을 융합한 인문주
의 비평 이론이다.
Ⅱ. 시의 형식과 의 성장 배경
신당의 시 7수 가운데 1수를 제외하면 모두 7언( ) 시이다. 물론 그가
5, 7언 시 외에 다른 시를 짓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겠으나, 현재 남아
전하는 시를 두고 보면 칠언절구( ) 1제 2수, 칠언율시( )
4수, 오언절구( ) 1수이다.3) 이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신당이
정형시( )만을 지었다고는 할 수 없겠으나, 현전하는 시는 정형시
인 근체시( )뿐이다. 이를 두고 보면, 첫째 그가 가장 중시한 것이
원칙( )이었다는 점이다. 조선 전기는 문학 담당층이 양반 또는 사대
부 중심으로 상류층이었다. 특히 선비들은 정형( )을 중시하였다. 물
론 그 중에는 자신의 재주를 자랑하고 싶어 변칙( )을 쓰는 사람도
있었다. 이 당시에 유행한 시조( )도 평시조가 대부분이었다. 평시조
는 한시에 있어 근체시와 마찬가지로 엄격한 형식이 있다.
원칙을 지켰다는 점은 그의 시에서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일상생활
에서도 드러난다. 그가 청송부사를 재임하고 있을 때 영의정( ) 성
당의 작품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본고에서도 신당의 시가 7수라는 것을 인
정하면서 이 7수의 시를 대상으로 를 전개하여 나가기로 한다.
지금까지 에 대한 연구도 위의 의 과 에 실려
있는 논문 4편이 전부이다. 곧 문경현의 “조선 선비의 귀감 정붕”, 이완재의
“신당 정붕 선생의 안상도와 도학”, 홍우흠의 “신당 정붕의 한시 소고”, 차장
섭의 “신당 정붕의 생애와 정치․사상적 역할” 등이다. 이들 논문에서는 구체
적으로 작품을 분석하여 새로운 의미를 도출하기보다는 가계와 학통, , 「
」 등에 대하여 개괄하는 정도에 머물고 있다.
3) 홍우흠의 앞의 논문에서도 ‘ 6 의 ’라고 하여 신당의 시의
, , , 등을 간략히 소개하고 있다. (홍우흠, 앞의 논문, 84-87
쪽 참조).
삶과 그의 시에 나타난 11
희안( )의 요구에 대한 신당의 정중한 거절4)에서도 신당의 성품이
청렴( )ㆍ강직( )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공( )과 사( )를 분명히 구분하였다. 공무( )에 있어서는 위
의 예에서처럼 엄격하였다. 그러나 평소 그의 성격은 너그러웠다. 그의
성격이 너그러웠다는 것은 그가 남긴 시를 보면 알 수 있다. 7수의 시
가운데 여섯 수가 7언 시이다. 7언 시는 5언 시에 비하여 호흡이 길다.
호흡이 길다는 것은 그만큼 여유가 있다는 말이다. 성질이 조급하거나
강한 사람은 7언 시보다는 5언 시를 즐겨 지을 수밖에 없다.
신당의 시 7수 가운데 칠언율시가 4수이다. 근체시에서 가장 모범이 되
는 시가 칠언율시이다. 이 칠언율시는 정형( ) 가운데 정형이다. 평측(
)은 말할 것도 없고, 운( ) ․ 점( ) ․ 대장( )이 다 맞아야 하기 때문이
다. 현재 남아 있는 신당의 시 가운데 칠언율시 또는 칠언절구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것은 그가 그만큼 규범을 잘 지켰다는 말이 된다.
많은 사람들이 신당의 의식은 한훤당 김굉필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
다. 이점에 대해서 부정은 할 수 없다. 그러나 그의 지향의식이 자리 잡
은 것은 한훤당( )이라는 스승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그가 성균관
에 들어가서 같이 학문한 사람들의 도움도 컸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무오사화 때 화를 입은 한재( ) 이목( : 1471 - 1498)의 「지난날을
생각하며 자진에게 다시 줌( )5)」 칠언고시를 보면 신당에 대
한 언급이 나온다.
그대와 성균관에서 지내던 일 생각하니,
마음 서로 통해 다 호걸이요 영웅이었네.
운정의 고상한 의론은 막힌 곳을 뚫었고,
여숙의 온화한 기운 봄바람이 불어온 듯.
4) “ …( )… , , ,
, , , .” 2,
.
5) , 1( 18, 170쪽).
12 과 73
…… ……
그대와 운정이 부모님의 상을 당하여서
추운 산에 피눈물 흘리며 소나무 심었네.
편지 써 푸른 하늘에 띄워 보내려 하나,
翺 그 편지 높이 날지 않아 보내기 어려웠네.
…… ……
이 시는 한재( )가 성균관에서 신당과 같이 공부할 때 지은 것이
아니라 그 뒤에 지은 것이다. 곧 그가 공주( ) 귀양살이에서 풀린 뒤
가을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6) 위 시를 보면 한재( )와 신당( )이
성균관에서 같이 공부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재는 1489년(성종 20)
그의 나이 19살 때 진사시에 합격해 성균관의 유생이 되었고, 그의 나이
25살 되던 해 1495년(연산군 1)에 별시문과( )에 장원 급제하였
다. 신당은 1467년에 태어나 그의 나이 19살 되던 해인 1486년(병오)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25살 되던 해인 1492년(임자)에 문과에 을과로 급제
하였다. 신당이 한재보다 4살 위이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지만 두
사람 모두 19살에 소과에, 25살에 대과에 급제하였다. 이 두 사람이 만
난 시기는 한재가 성균관에 들어간 해인 1489년부터 신당이 문과에 급
제한 해인 1492년 사이가 된다. 일찍 대과에 급제한 것으로만 보면 이
두 사람은 당시에 아주 뛰어난 인재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재 자신이 성균관에서 같이 공부했던 사람들은 서로 마음이 통하여
영웅호걸과 같은 사람들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영웅호걸은 무력으로 힘을
쓰는 장군이 아니라 지성( )의 영웅호걸이었다. 그만큼 그들의 의식이
막히지 않고 깨어 있었던 것이다. 그 가운데 그가 또 칭찬하는 사람이 바
로 운정( )과 여숙( )이다. 여숙은 조광림( : 1463~1494)을 가리
킨다. 그의 호가 심재( )인데 1486(성종 17) 진사시에 급제하고, 1492년
(성종23) 별시문과에 급제, 승정원 주서( )를 지냈다. 정암( ) 조광
6) , “ 의 시에 나타난 ” 과 66,
, 2013. 6. 7-36쪽 참조.
삶과 그의 시에 나타난 13
조( )의 종형( )으로, 퇴계 이황은 그를 선인( )7)이라 하였다.
무오사화(1498)와 갑자사화(1504)는 신당 자신에게 크나큰 충격을 주
었다. 무오사화 때 그와 함께 성균관에서 공부하였던 한재( )가 극형
을 당하였다. 갑자사화 때는 그 자신이 연루되어 경상도 영덕에 유배되
었다. 갑자사화 때는 역시 성균관에서 같이 공부하였던 심재( ) 조광
림( )의 사촌인 정암( ) 조광조( )가 극형을 당하였다. 그가
목숨을 잃지는 않았지만 이 두 번의 사화( )를 겪는 동안 그의 생각
이 많이 달라졌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것은 그 주변의 친한 사람들이 화
를 입어 죽거나 귀양 갔으며, 그 자신도 유배당하였기 때문이다.
Ⅲ. 의 시에 나타난 지향의식
1, 와 을 통한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살아가면서 추구하는 방향은 크게 두 가지
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물질의 풍요로움이냐 아니면 정신적 풍요로움
이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신보다는 물질의 넉넉함을 추구한다. 물
질적 풍요로움을 추구하는 사람의 학문은 구이지학( )이 될 수밖
에 없고, 정신적 풍요로움을 추구하는 사람의 학문은 위기지학(
)이 될 수 있다. 신당( ) 자신보다 4살이 많으며 중종 때 좌의정을
지낸 이요당( ) 신용개( : 1463-1519)에게 지어준 「호남으로
돌아가는 이요당 주인을 전송함( )8)」이라는 시를 들
어 이 점에 대해서 논의를 계속하기로 한다.
남국의 산천이 영․호남으로 갈라지니,
7) “ , , . , ( , ,
, ).” 5, 「 」 .
8) , 「 」.
14 과 73
그 사이에 구름이 몇 겹이나 겹쳤나.
슬프도다 송옥처럼 돌아가려는 그대,
우계에서 애태우며 그대와 헤어지네.
지혜롭고 어진 마음 기르는 곳 찾아,
공맹학 하지만 글 잘하는 이 드물어.
이요당( ) 앞 삼락 겸하였으니,
종쳐 밥 먹는 집도 꼭 그렇지 않으리.
이요당( ) 신용개( )가 갑자사화( )에 연루되어 장형
100대를 맞고 전라도 영광에 유배되었다. 이요당이 영남에서 호남으로
떠나려 한다. 영남과 호남 사이 거리는 한양( )보다 가깝지만 사람들
의 내왕이 잦지 않아 상대적으로 멀게 보인다. 지리산이 가로놓여 있어
길이 험하다. 좌천( )되어가는 이요당의 앞길에 험한 산길과 물길이
놓여 있다. 그것을 생각한 자아가 안타깝기만 하다.
함련( )의 출구( )에서 자아는 이요당의 모습에서 옛날 전국시
대의 굴원( )의 모습을 연상하고 있다. 송옥의 시에서처럼 돌아가려
는 그대라 하였으니까.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송옥( )은 전국 시대
초( ) 나라의 문학가이다. 그는 굴원( )의 제자로서 굴원의 문장과
절개를 이어받았다. 굴원의 추방( )을 슬퍼하며 지은 그의 유명한 시
「구변( )」9)이 있다.
또 대구( )에서 자아는 우계에서 애태우며 그대와 헤어진다고 하였
다. 우계( )는 당( ) 나라 유종원( )이 그곳에 귀양 가서 살았던
중국 호남성( ) 영주시( ) 서남쪽에 있는 냇물이다. 여기서는
호남 지방을 가리킨다. 이 함련에서는 굴원과 유종원의 고사를 원용하
여 신용개가 좌천되어 가려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수연( )에서는
산천 곧 자연의 험난함을 묘사하였다면, 함련( )에서는 지명( )을
앞세웠지만 그곳으로 가는 사람 곧 이요당의 앞길이 험하다는 것을 암
시하고 있다.
9) “ , , .” 「 」.
삶과 그의 시에 나타난 15
수연( )과 함련( )에서 자아는 이요당( )의 앞길이 어렵고
험난함을 묘사하였지만, 경련( )에 가면 이 분위기가 달라진다. 경련
에서는 먼저 자아와 그 주위의 현재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그것은 지혜
롭고 어진 마음 기르는 곳 찾아, 공맹학을 하지만 글 잘하는 이 드물다
고 한 것이다. 자아가 추구하는 것은 지( )와 인( )이다. 곧 요산요수
( )10)가 이요( )이다. 산을 좋아하고 물을 좋아하여 인자하고
지혜로운 이요당이 세 가지 즐거움, 곧 맹자가 말한 인생삼락( )을 겸
하였다. 사람이 사욕을 버리면 몸과 마음이 편안하여 누구에게도 부끄
러움이 없게 된다. 세 번째 즐거움인 이 세상의 영재를 얻어 교육하는
것이 최상의 목표라면 그에 앞서 가장 중시해야 할 것이 맹자가 말한
두 번째 즐거움이다. 두 번째 즐거움을 성취하여야 세 번째의 즐거움에
이를 수 있다. 자아가 보기에는 이요당이 이를 이미 달성하고 있는 것
같다. 이는 곧 자아의 이상이기도 하다. 맹자가 말한 세 가지 즐거움을
누리는 사람은 부자라고 하여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다. 미연( )의 대
구( )에서 자아가 말한 종을 쳐서 여러 사람들에게 식사 시간을 알린
다음에, 솥을 벌여 놓고 회식하는 종명정식지가( )라 하여
모두 행복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처음 두 연에서 자아는 좌천되어 가는 이요당의 앞길의 험난함에 대한
안타까움을 묘사하였다. 그러나 뒤의 두 연에서는 이요당이 이룬 이요(
)와 삼락( )을 자신이 이루고 싶어 한다. 공자와 맹자가 추구한 삶을
살아가려는 것이 그의 삶의 목표이다. 마음의 자유가 없으면 이를 달성할
수가 없다. 자아가 물질보다는 정신적 풍요로움을 추구하고 있다.
2. 인 고향을 통한 와
인간은 누구나 마음이 편안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것은 희망일 뿐 대
부분의 사람들은 그 대상, 정도의 차지는 있지만 마음을 편안히 둘 때가
10) “ , . , . , .” 12, 「 」
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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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다 특히 어떤 일에 . 괴로움을 당할 때 사람들은 마음의 고향을 찾게 된
다. 고향은 어머니 품과 같아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 신당 역
시 그러하였다. 그의 작품 가운데 「유배지에서 벗과 헤어지며(
)11)」라는 시 2수를 차례로 들어 이에 대한 논의를 해 보기로 한다.
한강에 찬바람이 부니 기러기 날고,
꽃 지는 강촌엔 꾀꼬리 우짖는다네.
언제나 머나먼 고향으로 돌아가서,
그대와 같이 술잔 기울일 꿈을 꾸네.
위 시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신당( )이 귀양 가 있을 때 벗 가운
데 누가 찾아왔다. 그런데 그 친구가 이제 떠나려 한다. 기구( )를 보
면 자아는 한강에 찬바람이 부니 기러기가 난다고 하였다. 이는 신당이
임금에게 미움을 사서 영덕으로 귀양 갈 때를 묘사한 것 같기도 하다.
한강에 찬바람 불고 기러기가 날아다닐 때 영덕으로 왔다. 그러나 지금
은 승구( )처럼 꽃이 지고 꾀꼬리 우는 늦봄이 되었다. 자아가 귀양
와 있는 타향이 한강에 찬바람 불고 기러기 날아다니는 겨울과 같이 삭
막하다. 그러나 꽃 지는 강촌, 곧 고향은 꾀꼬리는 따스한 봄날과 같다.
타향은 찬바람ㆍ기러기, 고향은 따뜻한 봄ㆍ꽃ㆍ꾀꼬리와 연결된다.
여기서 자아는 타향이 아니라 고향을 그리워한다. 언제나 머나먼 고향
으로 돌아가서 그대와 함께 술잔 기울일 꿈을 꾼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자아가 말한 고향은 생태 또는 정신 고향이다. 생태이든 정신이든 고향은
마음의 안식처이다. 몸과 마음이 편안히 쉴 수 있는 곳이 고향이다.
위의 시가 자아가 영덕으로 유배를 와서 자신의 마음의 안식처인 고향
을 생각한 것이다. 유배지에 있는 자신을 찾아온 친한 벗이 떠나려하자
그를 배웅하면서 지은 것이 다음 시이다. 이 시에는 자아의 참담한 마음
이 녹아 있다. 시의 내용을 들어 이에 대한 논의를 계속하기로 한다.
11) , 「 」.
삶과 그의 시에 나타난 17
서쪽으로 떠나는 그대와 누각에 오르니,
검은 구름 앞산에 끼더니 비바람 몰아쳐.
이별의 한 깊지만 누구에게 말 하리요,
해산 지는 달 아래 파도소리만 들리네.
먼저 자아는 서쪽으로 떠나는 그대와 함께 누각에 올랐다고 하였다.
자아 곧 , 신당과 그의 벗이 있는 곳은 동해안, 곧 경상도( ) 영덕(
)이다. 신당( )이 1504년(연산군 10) 홍문관 교리로 있을 때 연산군
( )이 방탕한 생활에 대하여 직간하다가 곤장( ) 40대를 맞고 영
덕으로 유배당하였다.12)
서로 헤어지기 전에 자아와 그의 친구가 누각에 올랐다. 이 때 자아의
심정이 참담하기만 하다. 동해안에서 어딘지는 모르지만 자아의 벗이 서
쪽으로 떠나려 한다. 서쪽, 검은 구름, 비바람, 달, 파도소리 등의 시어는
밝거나 희망적이지 않다. 서쪽은 하루로 말하면 오후요, 한해로 말하면
가을이다. 하루, 또는 한 해가 다 가려는 때이기 때문에 희망적이지 않다.
또 오행으로 보면 서쪽은 금성( )을 지니고 있어 강하다. 가을이 되면
숙살기( )가 들어와 이 세상의 온갖 사물이 시들거나 성장을 멈추게
된다. 검은 구름도 마찬가지이다. 검은 색은 계절로 보면 겨울이다. 겨울
이 되면 모든 것이 얼어붙는다. 검은 구름은 밝거나 희망적인 것이 아니
라 어둡고 절망적인 것을 뜻한다. 자아가 살고 있는 앞산에 검은 구름이
자욱이 끼었다. 구름만 낀 것이 아니고 이윽고 비바람이 몰아친다. 이는
자아 자신에게 희망이 없다는 말과 통한다. 현재 자아가 처한 상황이 그
만큼 절망적이다. 잠시 동안이나 같이 있었던 벗이 떠난다니 의지할 곳
이 없어진다. 유배지에서 자아 홀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전구( )에 가면, 이러한 이별의 안타까움을 자아가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다. 자아의 곁에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자아 자신만을 남
겨두고 벗은 서쪽으로 떠나가려 한다. 이제 남은 것은 쉼 없이 출렁이는
바닷물과 그 물을 비추는 달빛뿐이다. 바다에 접해 산이 있으니 그것이
12) 55, 10년 9월 18일( ) .
18 과 73
해산 이다 자아 ( ) . 홀로 바닷가에서 가고 싶은 그 마음의 고향을 생각
한다. 이 고향은 마음의 안식처도 되겠지만 자아 자신의 정신적 자유
Liberty 도 된다. 자아가 얽매임 없이 마음대로 자유를 만끽하고자 한다.
그러나 지금은 그 때가 언제인지 기약할 수도 없다. 다음의 「송광문과
헤어지며( )13)」라는 시도 역시 그가 영덕에 있을 때 지은 것이
다. 그 내용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흥이 사라지니 시를 짓기가 어렵고,
여러 가지 생각에 술 취하지 않네.
유배를 당하여도 임금님 그리운데,
오포엔 아침 구름이 자욱이 깔렸네.
광문( )이 누구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자아가 머물고 있는 귀양지에
송광문( )이 찾아왔다. 며칠을 묵었는지, 아니면 금방 왔다가 떠나는
지는 모르지만 이제 자아가 그와 헤어지려 한다. 아니, 송광문이 자아를
떠나려 한다. 헤어진다는 것은 희망적이 않다. 서로 화합이 아니라 위화
( )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평상시가 아니라 귀양지에서 찾아온 친구와
이별하니 그 외로움이 더욱 짙어진다. 마음이 쓸쓸하니 시흥( )이 일
어나지 않는다. 흥이 일어나야 시 짓고 노래 부를 마음이 생긴다. 유배(
)는 외부와의 단절 또는 고립( )을 의미한다. 고립되어 있던 자아에
게 찾아온 송광림이 떠나려니 자아가 다시 고립되고 있다.
승구( )에 가면 자아가 흥이 일어나지 않을 뿐 아니라 술도 취하지 않
는다. 이는 자아가 극도로 긴장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정신을 놓아야 술이
취하게 되는데, 마음이 긴장하면 정신을 놓지 않는다. 여러 가지 생각이 자
아의 머릿속에서 일어난다. 그 가운데 가장 큰 것은 다름 아닌 유배된 몸이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몸이 자유로우면 마음도 자유로울 수 있다. 마음대
로 떠나가는 송광문과 그렇지 못한 자아가 대조를 이루고 있다.
전구( )에 가면, 유배를 당하여도 자아는 임금님이 그립다고 하였
13) , 「 」.
삶과 그의 시에 나타난 19
다 조선 시대까지 관직을 . 맡았다가 어떤 일에 연루되어 유배당하는 선
비들이 임금을 원망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예를 들면, 고려 시대 정서
( )의 「정과정곡( )」이나 조선 시대 이항복( )의 시조에
서도 자신이 섬기던 임금은 원망하지 않았다. 이는 전제군주제(
) 아래에서 임금에게 반항할 수 없었던 것이다. 자아도 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조선 전기는 더욱 더 왕권 중심의 중앙집권제( )
가 시행되었기 때문이다.
결구( )에 가면, 자아는 자신의 외로움을 자연을 통하여 달래려 한
다. 자아가 오포( )에 아침 구름이 자욱하다고 하였다. 오포( )는 조
선시대 영덕현( )에 속해 있던 포구 이름이다.14) 아침은 희망적이다.
구름은 시간에 따라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일반적인 경우 구
름은 덧없음, 허무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시에서의 구름은 아침 햇살을
막는, 곧 희망을 막는 구름이다. 아침 해가 떠오르는 때 구름이 자욱이 끼
어 햇살을 막고 있다. 이는 마치 떠나가는 친구 때문에 자아의 마음이 괴
로운 것과 서로 통한다. 곧, 인간과 자연이 서로 교감하고 있다.
위 세 수는 신당이 영덕에 유배되었을 때 지은 시이다. 따라서 그 지향
의식도 평상시와는 다르게 나타난다. 그것은 그 자신의 마음이 평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아 자신이 가장 갈구하고 있는 것이 자유이다. 이 자
유를 자아는 마음의 안식처인 고향을 통하여 추구하려 하고 있다. 그러
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희망에 불과하였다. 그 자신이 유배되어 있어 자
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아는 유배지에서도 당시의 임금을 원망하지
않았다. 이는 그가 전제군주제에서의 왕의 존재에 대하여 부정하지 않고
있다는 말이다. 이것이 자아의 지향의식의 한계이기도 하다.
그러나 다음 세 수의 시는 이들 시에서 나타나는 정서와는 사뭇 다르다.
이 시들은 일선지( ) 나 신당실기( ) 에 실려 있는 것이 아
니다. 이 시들은 담헌( ) 김극검( )의 담헌시집( ) 에 실려
있다. 물론 진위( )의 논란이 있을 수도 있지만, 현재로서는 담헌시집
14) , 25, .
20 과 73
에 실려 있는 이 세 수의 시는 신당의 작품이라 할 수밖에 없다.
3. 밝은 이미지와 의 지향
담헌시집 에 실려 있는 시 3수는 일선지 나 신당실기 에 실려 있
는 시들과는 다소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가장 두드러진 것이 첩자( )
또는 첩어( )의 사용이다. 첩자를 사용하였다고 하여 신당의 시가 아
니라고는 할 수 없다. 담헌시집 에 신당의 작품으로 되어 있고, 이들
시가 다른 문집에는 실려 있지 않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는 시에 나타
난 이미지가 밝고, 긍정적이라는 점이다. 앞의 시는 그가 유배지에 있을
때 지은 것이고 이 시들은 그가 유배지에서 풀려나 지은 것으로 보인다.
아무리 담대( )한 사람일지라도 그 상황이 어떠하냐에 따라 마음의
움직임도 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의 「흰구름( )15)」이라는
시를 들어 이에 대한 논의를 계속하기로 한다.
옥황상제의 숨결인가 흰 구름 떠나가니,
동서남북 온 누리에 때때옷을 입힌 듯.
숨어 사는 도사가 약을 캐는 산 속이나,
아름다운 선녀가 짜고 있는 베틀에도.
천만 년 인간 세월 비바람과 조화하니,
온 누리엔 시비 논쟁 모두 다 사라졌네.
여기서 기봉( )까지 그 거리 얼마일까,
저녁노을이 흩어져 하늘가로 옮아가네.
하늘에 흰 구름이 떠가는 것을 보고 자아는 옥황상제의 숨결인가 하
고 의아해 한다. 옥황상제는 하늘에 있는 전설상의 임금이다. 물론 유교
가 아닌, 도교에서 말한 상상의 임금이다. 이것만 두고 보면 자아가 초
인문정신( )을 주장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자아의 정신이
초인문세계( )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시에 운치를 부여하기
15) , 」 1( , 113-114쪽).
삶과 그의 시에 나타난 21
위하여 이렇게 묘사하였다. 정통 선비들도 가끔씩은 초인문적( )
표현을 하고 있다. 예를 들면 조선시대 성리학의 대가로 알려진 퇴계(
) 이황( : 1501-1570)이 그의 나이 33살 되던 해(1533) 지은 「가야산
을 바라보며( )16)」라는 가야산을 묘사한 시에서도 성모( )ㆍ금
당( )ㆍ옥실( )ㆍ진선가( )ㆍ최선( ) 등의 말을 쓰고 있다.
따라서 시어만을 가지고 그 사람의 지향의식을 단정해서는 안 된다. 자
아가 무엇을 말하고자 한 것인가를 알아야 한다.
구름은 형체가 없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실체가 없는 구름은 덧없
음을 의미하가도 한다. 그러나 이 시에서의 구름은 사뭇 다르다. 흰 구
름이 떠가니 사방에는 마치 색동옷을 입힌 것처럼 아름답다고 하였다.
자아는 저녁노을에 물든 하늘에 뜬 구름을 보고 이렇게 표현하였다. 색
동옷은 어린아이들이 입는 옷이다. 때때옷은 절망적인 것이 아니고 희
망적이다. 자아가 비록 시간적으로는 황혼녘이지만 이를 부정적으로 받
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
함련( )에서는 숨어 사는 도사가 약을 캐는 산 속이나, 하늘서 온
예쁜 선녀가 짜는 베틀 위에도 이 무지개 색깔이 비치고 있다. 은은( )
과 영영( )이 쌍성( )과 첩자( )로 의태어로 생동감을 주는 동시
에 여러 가지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근체시에서 쌍성( )이나 첩자( ),
첩운( )의 사용은 금기( ) 사항으로 되어 있다. 이 쌍성과 첩자, 첩
운은 시에 있어 분위기를 살려주며 음악성과 회화성을 부여한다. 시인은
첩운, 첩자의 효능을 잘 살려 시를 한층 더 돋보이게 하고 있다.
경련( )에 가면, 자아가 천만 년 인간 세월 비바람과 조화하니 온
누리엔 시비 논쟁이 모두 다 사라지겠다고 하였다. 오랜 세월 동안 인간
은 자연과 더불어 살아왔다. 그 가운데 비와 바람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
라 사람들의 삶이 달라진다. 우순풍조( )라는 말이 그냥 생긴 것
이 아니다. 같은 소리는 서로 응하고 같은 기운은 서로 찾는다.17) 사람
16) , 1( 31, 11쪽)
17) “ , , , , , .” 1,
22 과 73
들도 자기와 마음이 통하는 사람과 만난다. 오랜 세월 동안 자연 질서에
따라 조화하니 이 세상에 시비 논쟁이 사라졌다. 이것이 자아의 바람이
다. 그러나 어느 시대이건 시비논쟁이 없었던 적이 없다. 그만큼 인간이
사는 세상에는 옳고 그른 것을 따지는 일이 그치지 않는다. 자아는 이러
한 시비 논쟁이 그치기를 바라고 있다. 이는 공자의 생각18)과 같다.
자아의 시선이 다시 먼 곳을 향한다. 미연( )에 가면 여기서 기봉
( )까지가 얼마나 될까 하고 자문( )한다. 기봉은 고유명사일수도
있겠으나 보통 명사로 보아도 무방하다. 산봉우리의 형태가 기이하게
생겼다는 말이다. 기이하게 생긴 산봉우리에 저녁노을이 붉게 물들어
있다. 산봉우리는 힘이 있다. 둥근 것이 아니라 뾰족하기 때문이다. 힘차
게 솟아 있는 산봉우리를 자아가 바라본다. 이 때 자아의 심정은 낙적이
지도 비관적이지도 않다. 그저 담담할 뿐이다. 그러나 푸른빛의 산이 있
어 그 이미지가 희망적이다. 일반적으로 저녁노을은 그다지 희망적이지
않다. 하루 해가 넘어가는 시점에 있어서이다. 그러나 자아가 바라본 저
녁노을은 비관적이 아니다. 푸른 산 빛과 어우러져 밝은 심상( )을 드
러내고 있다. 이러한 심상이 자아의 지향의지와 연결된다. 곧 자아의 지
향의식이 밝고 긍정적이라는 것이다. 눈에 보인 대상이 같을지라도 그
대상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가짐에 달려 있다. 비록
자아의 심정이 담담하지만 이 심정이 시어( )의 이미지와 결부하여
그 의식이 밝게 드러난다.
4. 을 넘어 의 세계를 지향
일반적으로 까마귀의 상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반
포보은( )하는 효도 또는 효성의 상징이다. 둘째는 검은 마음을
지닌 사람, 또는 엉큼한 사람의 상징이다. 일반적으로 백로( )와 상대
되는 말로 쓰인다. 신당은 까마귀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 이 점에 대하
.
18) “ , , , .” 12, 「 」 .
삶과 그의 시에 나타난 23
여 그의 「까마귀( )19)」라는 시를 들어 논의해 보기로 한다.
남북으로 날아다니는 너희 까마귀 보나니,
월나라 들판 날지 오랑캐 하늘엔 날지 않네.
낙담한 연단( )은 세는 머리 싫어했고,
유명한 양웅은 태현경에서 너를 그렸다네.
가을바람 불어오니 가마 탄 직녀 추워하고,
조조는 달 밝은 밤 까치 남으로 간다했네.
새 가운데 효성스런 새 사람들은 아는가,
정성 다해 반포보은하는 까마귀 새끼라네.
수연( )을 보면, 자아는 까마귀의 자유에 대하여 읊고 있다. 남북으
로 날아다닌다고 하였으니, 까마귀가 어디든지 그 날고 싶은 대로 날아
다닌다. 이 모습을 자아가 보고 있다. 그런대 까마귀가 자유롭게 날지만
그 나름대로 나는 방향을 선택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윤리 또는 문명이
없는 지역으론 날지 않는다. 자아가 봤을 때 월나라는 문명, 도덕이 있
는 나라이고 오랑캐는 그렇지 못한 나라이다. 공자가 논어 에서 말한
주( )나라 왕실( )을 높이고 이적( )을 물리친다20)는 것과 같다.
이는 바로 자아의 문화의식이다.
함련( )에 가면 자아는 실의에 빠진 연단이 세는 머리카락을 싫어
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자아는 까마귀의 검은 모습을 독자들에게 환기
한다. 연단( )은 연( ) 나라 태자 단( )을 가리킨다. 그가 진( ) 나라
에 볼모로 잡혀 있을 때 탄식하였더니 까마귀 머리가 하얘지고 말 머리
에 뿔이 나서 연단을 풀어주었다21)고 한다. 이는 불가능이 가능으로 바
뀌었다는 말과도 통한다. 대구( )에 가면 자아는 양웅의 태현경(
) 에도 까마귀의 모습을 형상화 하고 있다고 한다. 출구와 마찬가지로
19) , 앞의 책, 114쪽.
20) “ , .” 14, 「 」 , 제18장.
21) “ , , , . , , ,
, . , , . .”
.
24 과 73
자아가 까마귀의 모습이 검은 것을 묘사하고 있다.
경련 출구 ( ) ( )에서는 가을바람 불어오니 가마 탄 직녀 추워한
다고 하여 까마귀를 견우와 직녀를 이어주는 매개자로 보고 있다. 실제
로 7월 칠석이 되면 까치가 견우와 직녀 사이의 다리를 놓아주어 머리
털이 빠진다고 한다. 그런데 자아는 까마귀가 이 둘 사이는 잇는 매개자
역할을 한다고 하였다. 자아는 견우와 직녀가 탄 용마( )를 영가(
)라 하여 신성시 하고 있다. 이는 곧 까마귀가 하늘의 두 별을 화합하
여 주기 때문이다. 곧 자아의 의식은 위화( )가 아니라 화합( )을
지향하고 있다 할 수 있다. 여기서 화합은 사람과 사람, 사람과 사물, 사
물과 사물이 서로 조화롭게 되는 것이다. 대구( )에 오면, 자아가 조
조는 달 밝은 밤 까치 남으로 간다하였네라 하여 조조의 「단가행(
)」 끝부분에“달 밝은 밤에 별은 드문드문, 까마귀와 까치 남으로 날아
가네. , ”라는 구절을 용사하고 있다. 사람이나 사물
이나 변화를 거듭한다. 한 영웅이 나타나면 다른 군웅( )의 역할이 시
들해진다. 자아가 조조의 시에서 느낀 것은 변화하는 자연의 이치 가운
데 지극한 도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고자 하
는 것이 자아의 마음이다. 달과 별은 떴다가 진다. 또 그 크기나 밝기가
차이가 나는 것 같지만 언제나 영측( )을 반복한다. 곧 낮이 가면 밤
이 오고 밤이 오면 낮이 온다. 시간의 길고 짧음은 있을 지라도 밤낮의
변화는 끊임없다. 이것이 바로 도( )이다. 주역 에서는 한번 음이 되고
한번 양이 되는 것을 도라 한다22)고 하였다.
미연( )에 가면 자아는 까마귀를 통하여 인간의 효성( )을 강조
하고 있다. 말 못 하는 짐승이지만 까마귀는 반포보은( )한다. 그
런데 사람은 어떠한가? 물론 효자는 자신을 낳아준 부모께 효도하지만,
불효자는 그렇지 않다. 자식들이 아무리 부모께 효도한다고 하여도 부
모가 자식을 사랑한 것만큼 할 수 없다.
이처럼 자아는 자유의 몸, 문화의 주체, 불변의 지조, 매개자( ),
22) “ .” .
삶과 그의 시에 나타난 25
효성 등으로 까마귀를 묘사하고 있다. 이는 까마귀를 통하여
자아가 드러내고자 하는 생각, 곧 자아의 지향의식이다.
5. 의 출현과 를 지향
한훤당( ) 김굉필( )의 문하에서 도학의 기초를 익힌 신당
( )이 자신의 작은아버지인 한벽재( ) 정석견( : 1444-1500)
을 따라 서울에 갔다. 그곳에서 그가 위기지학( )을 하면서 일생
을 보내려하였다. 그러나 숙부( )의 강권( )으로 그의 나이 25살
되던 해(1492) 식년문과( )에 을과( )로 급제하여 환로( )에
나아갔다. 그는 ① 어려서부터 식견이 있었으며 도량이 넓었고, ② 성리
학에 침잠하여 정묘한 경지에까지 이르렀으며, ③ 벼슬길에 나아간 뒤
에도 관직을 그만 두고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였다.23) 그의 「느티나무(
)24)」라는 시를 보면 이러한 그의 삶의 지향의식이 녹아 있다.
무더위 동신단 느티나무에는 들지 않으니,
신비하게 가지와 잎에서 바람이 일어나네.
요사스런 뱀 숨는 걸 요즘 사람들이 봤고,
현학이 둥지 찾았다고 옛 노인들이 말하네.
우뚝 버텨 겨울 추위 속에도 숨을 쉬는 듯,
때때로 상쾌한 바람도 은근히 일으킨다네.
마을 입구에 홀로 우뚝 선 저 장군나무여,
여름철에 글공부하는 벗 없는 것이 섭섭해.
사상( )은 마을 어귀에 있는 동신단( ) 위를 가리키며, 분유(
)는 느티나무를 의미한다. 또 분유( )는 한 고조( ) 유방( )의
고향을 가리키는 말인데 일반적으로 고향을 가리키는 말로 쓴다. 따라서
23) “ , . …( )… , , ,
. …( )… .” , 앞의 책, . .
24) , 위의 책, 114-115쪽.
26 과 73
시 제목의 분유( )는 중의적( )으로 고향과 느티나무를 동시에
의미한다. 이 느티나무는 보통의 나무가 아니다. 음력 정월보름을 전후하
여 이곳에서 제사를 지낸다. 그것이 동신제( )이다. 이 나무는 대단
히 크다. 자아의 고향마을 어귀에 있는 느티나무도 보통 큰 나무가 아니
다. 햇볕이 내리쬐는 여름에도 볕이 들지 않는다. 햇볕이 들지 않으니 그
나무 밑은 시원하다. 뿐만 아니라 그늘을 드리운 나무에서 바람까지 일
어난다. 여름날 더위를 피하기에는 이 나무 밑보다 좋은 곳이 없다. 이처
럼 수연( )에서 자아는 느티나무의 위대ㆍ신비성을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함련( )에 가면 세대에 따라 이 느티나무를 보는 시각이 달
라졌다. 요즈음 사람들은 느티나무에 파인 홈 안으로 요사스런 뱀이 숨
었다 하고, 나이든 노인들은 느티나무 줄기에 생긴 구멍 안으로 현학(
)이 둥지를 텄다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뱀은 사악한 동물로 간주된다.
반면 학( )은 길조( )로 고고한 인품을 지닌 사람으로 인식하여 왔
다. 요즈음 사람들이 느티나무 줄기에 난 구멍 안으로 뱀이 들어갔다고
하는 것은 물로 그 광경을 보았을 수도 있다. 실제로 느티나무 안으로
뱀이 들락거리는 것을 필자도 어려서 본 적이 있다. 또 옛 노인들이 고
고한 학이 느티나무 구멍 안에 둥지를 텄다는 것도 거짓이 아니다. 학이
아닐지라도 백로( ) 떼가 느티나무 위에 앉아 있는 것을 수 십 년 전
만 하여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물론 지금은 한적한 시골에서는 이러
한 광경을 볼 수 있다.
이 두 광경에 대하여 우리는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요즈음 사람들
은 뱀을, 옛 노인들은 학을 보았다고 하는 것이다. 자아가 생각하기에,
그가 살았던 동시대의 사람들은 생각이 부정적이고, 옛 노인들은 생각
이 긍정적이다. 나무는 하나이지만 이처럼 세대에 따라, 보기에 따라 그
보이는 것이 달리 보인다. 여기서 자아는 물론 요즈음 사람들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자아는 느티나무에 신령스런 학이 둥지
를 텄다는 노인들의 견해를 따르려 한다. 이는 자아의 생각이 그만큼 부
정적이 아니라 긍정적이라는 것을 말한다. 또 하나는 자아의 역사관이
삶과 그의 시에 나타난 27
옛날이 좋고, 옛날의 사실( )을 숭상한다는 상고주의( )에 바
탕을 두고 있다. 이러한 역사관은 공자의 역사관 가운데 하나이다. 자아
가 이 상고주의를 견지한 것은 그의 의식이 옛날의 순수( ), 고졸(
)한 정신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련( )에 가면 자아 자신과 느티나무가 교감하고 있다. 겉으로는 느
티나무의 위용을 묘사하고 있지만, 안으로는 자아 자신의 위대함을 암시하
고 있기도 하다. 자아는 느티나무가 우뚝 버텨 겨울 추위 속에도 숨을 쉬
는 듯하고, 때때로 상쾌한 바람도 은근히 일으킨다고 하였다. 앞의 시에서
도 그렇지만, 낙락( )과 시시( ) 두 개의 첩자( )를 통하여 자아가
그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낙락( )은 의태어로 나무
등이 우뚝 선 모습을 나타낸다. 시시( )는 ‘때때’라 하여 ‘때 ’를 강
조하는 말이다. 느티나무가 잎은 떨어졌지만 겨울 추위 속에서도 숨을 쉬
는 것 같다. 나무가 크니 겨울에 바람이 불면 나무 가지 사이에서 소리가
난다. 물론 작은 나무에서도 그 소리가 날 수 있다. 그러나 작은 나무보다
는 큰 나무에서 나는 소리가 더 웅장하다. 자아는 이 느티나무에서 상쾌한
바람이 은근히 일어난다고 하였다. ‘상뢰발( )’이라는 말은 다른 곳에
도 있지만, 고문진보( ) 25)에 나오는 말이다. 자아가 바람이 상쾌
하다고 하였으니 겨울에 부는 바람은 아니다. 아마도 이 바람은 늦봄부터
여름에 부는 바람일 것이다. 즉, 날씨가 더워진 뒤에 불어오는 바람이다.
이 바람이 불어오면 그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더위를 잊게 된다. 자
아가 이 나무처럼 주위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기 바란다. 곧 자아 자신이
이 나무처럼 주위 사람들한테 영향력이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
미연( )에 가면 자아는 또 다시 마을 입구에 선 느티나무를 보고 홀
로 우뚝 선 장군나무라 하고 있다. 홀로 우뚝 선 나무의 대명사는 소나무
이다. 홀로 선 소나무를 낙락장송( ), 장군송( ), 대부송(
)이라 부르고 있다. 겨울의 추위 속에서도 소나무는 시들지 않는다. 자아
가 보기에는 마음 입구에 버티어 선 느티나무 또한 비록 입은 떨어졌지만
25) “ , .” , , 「 」.
28 과 73
한 겨울에도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들은 이 느
티나무를 신성시( ) 하고 있다. 정월에 동신제를 지내는 곳이 바로 느
티나무 선 곳이기 때문이다. 이 느티나무를 사람에 견주면 호걸지사(
)라 할 수 있다. 자아가 선비이기 때문에 자아는 선비 가운데서도 국
량( )이 큰 선비를 지향하고 있다. 자아가 공부하는 선비들을 모아놓고
여름철에는 이 느티나무 밑에서 글공부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나 자아가
보았을 때 현재로서는 여름이 되어도 공부하러 오는 선비가 없을 것 같다.
이것을 자아가 섭섭해 하고 있다. 섭섭해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이루려는 생
각이 있다는 말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이문회우( )’이다.26) 이는
자아가 순정( )한 선비가 되는 것을 지향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실제로 신당( )은 엄정( )하고도 순정한 선비였다. 그의 제자인
송당( ) 박영( : 1471-1540)과의 일화에서 이 사실을 알 수 있다. 신
당이 바랐고 실천하고자 하였던 것이 성의( )ㆍ정심( )을 바탕으로
격물( )ㆍ치지( )였다. 그는 엄정하고 학문이 정순( )하였지만 시
대를 만나지 못하여 그 뜻을 펼칠 수가 없었다. 따라서 마을 어귀에 버티
어 선 느티나무를 보고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묘사하고 있다.
Ⅳ. 맺음말
본고는 신당( ) 정붕( : 1467~1512)의 시에 나타난 그의 지향의
식을 고찰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신당의 시 7수 가운데 1수를 제외하
면 모두 7언( ) 시이다. 신당이 정형시( )만을 지었다고는 할 수
없겠으나, 현전하는 시는 정형시인 근체시( )뿐이다. 이를 두고 보
면, 첫째 그가 원칙( )과 규범을 중시하였다는 점이다. 원칙을 지켰다
는 점은 그의 시에서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일상생활에서도 드러난다.
그가 청송부사를 재임할 때의 일화( )에서 잘 알 수 있다. 이를 통하
여 볼 때 신당의 성품이 청렴( )ㆍ강직( )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6) “ , , .” 12, 「 」 제24장.
삶과 그의 시에 나타난 29
둘째 그는 공무 ( )에 있어서는 위의 예에서처럼 엄격하였지만, 평
소 그의 성격은 너그러웠다. 그의 성격이 너그러웠다는 것은 그가 남긴
시를 보면 알 수 있다. 그의 성격이 너그러웠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법도
의 범위 내에서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어려서는 스승인 한훤당( ) 김굉필( ), 작은아버지인
한벽재( ) 정석견( )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의식의 성
장은 그가 성균관에서 공부할 때였다. 그 때 만난 벗 가운데 한재( )
이목( ), 운정( ) 성중엄( ), 심재( ) 조광림( ) 등과
교유하면서부터 라고 할 수 있다.
무오사화(1498)와 갑자사화(1504)는 신당 자신에게 크나큰 충격을 주
었다. 그가 목숨을 잃지는 않았지만 이 두 번의 사화( )를 겪는 동안
그의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
그의 시에 나타난 지향의식으로는 첫째 두 가지 좋아함과 세 가지 즐
거움을 통한 정신적 풍요로움을 추구하였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
이 물질적 풍요로움을 추구하였지만 신당은 위기지학( )을 통한
정신적 풍요로움을 추구하였다. 둘째 안식처인 고향을 통하여 마음의
자유와 평화를 추구하였다. 그가 유배지에서 지은 세 수의 시에서 이 점
이 잘 드러난다. 자아는 마음의 안식처인 고향을 통하여 추구하려 하고
있다. 셋째 밝은 이미지를 통하여 긍정적인 세계를 지향하고 있다. 넷째
혼돈을 넘어 질서의 세계를 지향하고 있다. 다섯째 초인의 출현과 호걸
( )한 선비를 지향하고 있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신당 정붕은 자아의식이 확실한 조선 전기의
선비였다. 그의 의식을 통하여 볼 때 다른 선비들의 모범이 된다. 현재
까지 전하는 시가 비록 적을지라도 그의 시에 나타난 그의 의식의 흐름
은 조선 전기 선비들의 모범이 되고 있다. 이점이 신당( ) 정붕( )
이 우리문학사상에 차지하는 위상( )이다.27)
☯ 논문접수일: 2014.5.26 / 심사개시일: 2014.5.28 / 심사확정일: 2014.6.2
30 과 73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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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그의 시에 나타난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