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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3월 12일 아산UBF 주일메시지 (사도행전 제 5 강)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말씀 / 사도행전 4:32-5:16
요절 / 사도행전 5:11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오늘 말씀에서 두 사람이 밭을 팔아 그 돈을 가난한 형제들에게 나누어주도록 하였습니다. 밭 팔고 헌금한 것은 같아 보였지만, 그 이후는 매우 달랐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내적으로 깨끗한 교회를 이루시는 성령님을 배울 수 있습니다. 아산 UBF가 순수한 모임이 되도록 성령께서 지켜주시기를 기도합니다.
32절을 보십시오.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성도들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었습니다. 소유물을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성도들이 어떻게 소유욕과 재물에 대한 탐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습니까?
33-35절을 보십시오. “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자유로울 수 있게 한 것은 부활신앙이었습니다. 부활신앙은 성도들을 큰 소망으로 인도했습니다. 큰 권능으로 증거하는 부활로 인해서 성도들의 내면에는 부활의 소망이 가득 해졌습니다.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의 부활은 성도들의 내면에 집착도 욕심도 내려놓을 수 있게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성도들은 참 자유를 맛보았습니다. 성도들은 자발적으로 자기 소유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이루어지는 큰 역사였습니다. 당시 유대사회는 경제적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유다지역 자영농들은 몰락하여 일할 곳 없는 실업자가 많았습니다. 농사가 망하였으니 장사 해보려고 나선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가혹한 세금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로마는 유대인들에게 병역에 관한 직접적인 짐을 지우지 않았습니다. 로마군 편제와 로마군 전술을 유대인들이 로마군대에 들어와 파악하는 것이 부담이었습니다. 너무 자주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군역에 관한 부담을 덜어주는 대신 유대인들에게 징수하는 세금을 무겁게 매겼습니다. 거기에 더하여 세리들은 로마가 정한 세금보다 더 많이 거두어갔습니다. 유다 사회는 일거리가 없어 어려운 사람들, 생존의 절박함에 내몰리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런 사회에는 인심이 각박합니다. 인색하고 자기중심적입니다. 자기 소유물을 다른 사람에게 나눈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자기 생명을 함께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은혜 받은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 소망이 가득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풍성함과 승리와 영광의 소망이 충만하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인하여 은혜를 받으니 자발적으로 나누어 주고 베풀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누어 주고 베풀어 보니 성도들의 내면에는 은혜와 기쁨이 더 넘쳤습니다. 나눈 것보다 더 많은 실제적 풍성함이 다시 더해지는 것을 체험하였습니다. 성도들은 심령에 기쁨, 즐거움, 행복이 더 넘쳤습니다.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였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다시 삽니다. 손해 보아도 손해 보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믿는 자들에게 은혜와 영광과 이김을 주십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은혜 받았으며, 그 삶의 차원이 달라졌으며, 주고 나눌 때, 오히려 더 풍성하게 하시는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였으며, 이를 통하여 최후의 승리와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36,37절을 보십시오. 구브로는 지금의 키프러스 섬을 말합니다. 키프러스 섬은 기후가 좋고 농사지을 땅이 많아 사람들이 저마다 밭을 일구고 살았습니다. 이곳에 이주해 간 유대인들 중에 레위인도 있었습니다. 키프러스 레위인 중에 요셉이라는 사람이 예수님을 영접한 후 자기 밭을 팔았습니다. 그 밭 판값을 헌금하였습니다. 사도들은 그에게 ‘바나바’ ‘위로의 아들’이라고 불러주었습니다. 밭을 팔아 헌금한 것은 대표적인 일이고 그 외에도 그의 믿음과 선행이 특별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본래의 이름 외에 ‘바나바’라고 이름 한 것을 볼 때, 사도들과 교회는 바나바로부터 큰 위로를 받았으며 바나바는 좋은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나바는 사도들과 모든 성도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았습니다.
초대교회는 유대 종교지도자들로부터 핍박과 위협이 있었지만, 이를 잘 극복해냈습니다. 외적으로는 하루에 5천명이 회개하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이 다 아는 보행 장애인이 일어나 걷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확실하고 분명하게 전파되었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핍박이 있었지만, 더 열심히 기도하였습니다. 사도들과 성도들은 더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교회는 외적으로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성도들은 한 마음 한 뜻이 되었습니다. 자발적으로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바나바와 같이 인품과 신앙과 말씀과 섬김이 특출 난 사람이 성도들에게 은혜를 끼쳤습니다. 초대교회는 밖으로나 안으로나 성장하고 성숙하고 행복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5장 1,2절을 보십시오. 외적으로 성장하고 내적으로 성숙하고 성도들이 은혜와 행복에 젖어 있을 때, 사단의 역사가 시도되었습니다. 첫 위기가 유대교의 핍박과 위협이었다면, 두번째 위기는 내적 위기였습니다. 사단은 교회 안에 죄의 씨를 심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도 자기 소유를 팔아서 사도들의 발 앞에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그 값 중 일부는 집에 보관하고 또 일부를 사도들의 발 앞에 가져왔습니다. 이들이 한 일은 바나바가 한 일과 비슷합니다. 바나바가 한 것처럼 이들도 밭을 팔았습니다. 밭 판돈을 가져와 다른 성도들이 쓰게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이들이 한 일은 바나바와 달랐습니다.
3,4절을 보십시오.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베드로의 말은 땅이 원래 너의 것이고 땅을 판 값도 네 마음대로 하는 것인데, 무엇 때문에 그렇게 헌금을 드립네 하며 드리고, 그러면서도 일부는 감추어 두고, 왜 그런 행동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누구도 그에게 헌금을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도 그들에게 땅을 팔아서 갖다 바치라고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헌금 하려면 100% 다 드려야 한다고 헌금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아나니아는 어떤 동기에 의하여 밭을 판돈을 가져온 것입니까? 그러면서 왜 일부는 따로 감추었던 것입니까? 아나니아는 바나바가 사도들과 교회로부터 큰 인정과 칭찬 받는 것을 주목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바나바와 같이 사람들의 주목 받고, ‘참 큰 일 하였다’고 인정받을 것을 기대하였습니다. ‘어려운 성도들에게 큰 도움이 되겠다, 은혜롭다’ 찬사 받을 것을 기대하였습니다. 그의 헌신의 목적과 동기가 순수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는 욕심, 사람들의 신뢰와 존경을 받아야겠다는 야심을 부인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야심과 욕심으로 선한 일을 하는 모양을 낸 것입니다. 그의 헌신과 나눔은 하나님 앞에 감사함으로 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온전한 희생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돈 다 드리는 것이 아까웠습니다. 일부는 감추었습니다. 그러고도 다 드린 것처럼 행세하였습니다. 헌금과 희생은 하나님 은혜에 감사하여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 받은 성도로써 주께 받은 사랑으로 다른 성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그는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헛된 욕심과 모임에서 높이 평가받으려는 명예욕을 채우고자 헌신의 모양을 이용하였습니다. 그는 이런 야심과 욕망을 교회에다 쏟아냈으며, 거룩한 예수님의 교회를 자기 욕망을 채우는 수단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 그는 기꺼이 거짓말을 하였으며, 의도된 위선을 행하였습니다.
사람들은 헌신의 모양과 희생의 양에 주목합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내면의 중심을 다 알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중심을 보십니다. 사무엘상 16:7b절에는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예수님께서도 마음 중심에 무엇이 있는지가 중요함을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3:23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우리가 행함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는 주와 복음을 위하여 희생과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이 때, 반드시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진실함으로 행하고 사랑으로 헌신하여야 합니다.
자기 영광을 구하는 마음, 거짓과 위선을 행하는 마음은 사탄에 속한 마음입니다. 성도들이 기쁨과 행복으로 가득할 때, 아나니아 삽비라의 자기영광 구하는 죄, 거짓의 죄를 통하여 교회에 마귀가 파고 들었습니다. 교회를 지키시는 성령께서 이 죄를 적발하셨습니다. 성령께서는 베드로로 하여금 그의 거짓과 위선을 지적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아나니아가 드린 헌신의 금액이 많음을 보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아나니아의 죄를 분명히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하였습니다.
오늘날의 교회에도 하나님께 충성하는 사람과 충성이 덜한 사람이 있습니다. 또한,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사람과 약간 부담을 주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 모든 형제들과 사랑하고 화목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때때로 사람에게 잘하기만 하고 하나님께는 인색한 사람에 속는 경우가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착하고 양순할 뿐, 중심이 삐뚤어진 사람을 잘 못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가 각 사람의 중심을 볼 수 있어야 하는데, 우리는 그렇지 못합니다. 우리들 자체가 먼저 사람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 나 중심이 아니라 예수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목자부터가 나의 이름, 나의 명예, 나의 업적을 중시하면, 반드시 사람에게 잘해주는 사람, 사람 눈에 보기 좋은 사람에게 불필요한 선대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일로 인하여 교회에는 하나님께 충성하는 일이 중단되고 불평과 원망이 가득해 집니다. 분열과 반목이 발생합니다. 성령의 쓰시는 그릇이 되기는 어렵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보다 먼저 내가 사람중심은 아닌지, 나부터가 나 중심은 아닌지 돌아보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5,6절을 보십시오. 사도 베드로는 성령에 충만하여 아나니아의 죄를 분명하게 지적하였습니다. 그러자 아나니아가 그대로 쓰러져 사망하였습니다. 7-10절을 보십시오. 그 아내 삽비라도 죄를 지적하는 질문 앞에 거짓을 말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부부 중 하나라도 양심이 살아있지 않았습니다. 아내 삽비라는 회개할 기회가 다시 주어졌는데도 거짓말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의 거짓과 위선은 어느 날 갑자기 잠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상당히 일상적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삽비라도 그대로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생명역사가 활발한 초대교회에서 이 사건은 충격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아나니아, 삽비라의 죄를 다루신 것입니까? 사실 땅을 팔아서 그 땅 판 돈 교회에 가져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신학자들은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가 초대 교회에서 열심 있는 신자들 이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열심 있는 신자가 아니라면 자기 밭을 팔아 판돈을 내놓는 것은 힘든 일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으로 따진다면 직장 다니는 분들이 정년퇴직하며 노후연금 일시불로 받아 헌금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는 퇴직금의 상당액을 헌금한 것과 같습니다. 보통 사람이 할 수 없는 헌신을 한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여서 행한 희생이 아닌 것입니다. 존경받는 바나바에 대한 비교의식을 가지고 바나바처럼 존경 받고 싶어서 헌금하였습니다. 사람들에게 훌륭하다 대단하다 영광 얻고 싶어서 희생의 모양을 보였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역사입니다. 사람이 영광 받는 역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순수하고 깨끗하여야 하는 초대교회 공동체에 인간적인 요소가 가미되는 것을 철저하게 보셨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큰 헌신을 하였지만, 거짓을 행하였습니다. 사람들에게는 풍성하게 나누자고 웃음 짓지만 뒤로는 감추고 안보는 곳에서 숨기는 짓을 하였습니다. 경쟁심과 자기 영광, 거짓과 위선을 감행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성령께서 이를 적발하시고 철저하게 인간의 역사, 거짓의 역사를 제거하셨습니다. 그러자 교회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성령께서 교회 안에 틈타는 죄를 깨끗이 청산하였을 때 교회는 새롭게 성장하였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아나니아 삽비라 사건은 성도들로 하여금 진실한 투쟁을 하게 하였습니다. 아나니아 삽비라 사건을 통하여 모든 성도들은 거룩함에 이르기 위한 내적 투쟁에 힘썼습니다. 자기 영광으로 일하지 않고 순전한 마음으로 복음 전파에 힘썼습니다. 내면에 숨은 위선과 거짓을 철저히 다루고 회개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 진실함으로 나아왔습니다. 형제 사랑과 헌신을 감당할 때 조금도 자기를 드러내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만 드러나도록 하였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초대교회에 성령께서 더 강력으로 역사하셨습니다. 사도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이루어졌습니다. 성도들은 한 마음으로 모이기에 힘썼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믿지 않는 사람들도 예수 믿는 사람들을 칭송하였습니다. 성도들의 변화된 삶은 큰 영향력을 발하였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줄기차게 이루어졌습니다. 14-16절을 보십시오. 믿는 자들이 날로 더하여지고, 많은 병자들과 귀신 들린 자들이 고침 받고 나음 받았습니다. 사단의 권세 아래에서 고통 받던 많은 백성들이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나음 받고 참 자유 얻는 역사가 이어졌습니다.
결론적으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자기 영광 얻고자 헌금한 것과, 일부 감춰놓고도 감춘 것이 없다 하며 행세한 것은, 사람을 속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들은 성령께서 자기들의 위선과 거짓을 알지 못할 것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속이고 성령을 기만하는 죄는 용납할 수 없는 죄입니다.
우리들 개인이 성령께서 쓰실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아산 UBF가 성령께서 귀하게 사용하고 축복하실 수 있는 모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깨끗한 마음과 하나님 앞에 부끄러울 것이 없는 헌신하기를 기도합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날마다 깨끗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아산 UBF
UB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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