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1948년 8월 15일에 독립을 선언함으로 창설된 국가였다. 이렇게 새로 창설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을 표방하여 모든 권리와 정당성을 국민에게 있음을 선포했고 새롭게 제헌국회에서 제정된 헌법에도 신앙양심의 자유, 언론결사의 자유, 거주이전의 자유 등이 성문화하여 모든 국민의 기본 권리로 설정되었다.
중국에서 헌장에 성문화된 것과는 달리 유교와 그 풍습이 사실상 국교와 같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고 일본의 신도가 사실상 국교화한 것과는 달리 대한민국에는 국교란 없다. 4,200년 이상의 역사에도 왕실이 특정 종교를 선호하였던 적은 있었으나 어디까지나 왕조의 선호에 불과했다. 신라왕조에서 한 때 불교를 선호했던 것이 고려왕조에 넘어왔고 고려왕조를 타도하고 조선왕조가 건설되었을 때 자신들의 쿠데타를 정당화하는 일환으로 불교를 제외하고 유교를 선호하였다. 그러나 한민족의 역사에는 국교란 한 번도 없었다. 종교는 어느 때나 개인의 선택에 맡겨 있었고 정부가 특정한 종교를 믿게 하였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서방 유럽에 분포되었던 기독교는 한국의 역사와는 근본적으로 달리 작용하였다. 오순절에 성령의 역사로(사도행전 2:1-참조) 기독교회가 탄생하였다. 이렇게 탄생한 기독교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공생애 마지막 주간에-아마도-유월절 만찬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가에서 이루어졌던 사건의 실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수께서는 두로와 시돈 등 이방인의 영역에 가서 사역하시고 유다 지방으로 돌아오시는 길에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마16:13)고 물으셨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누구였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제자들은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마 16:14)라고 하더라는 답을 하였다. 이 같은 이론에 만족하지 못하셨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는(제자들)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 16:15)고 물으셨다. 어느 때나 모든 일에 적극적이었던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고 답했다.
이 베드로의 답은 예수는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시라는 고백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구약의 선지자들이 오시는 메시아에게 붙여주었던 별명에 해당하는 호칭이다(시 2:7-8, 삼하 7:14-15). 따라서 베드로의 답은 예수는 이스라엘의 통치자로 오실 메시아라는 답에 해당하였다. 예수님께서 3년 5개월간 자신이 메시아이심을 선포했고 표적(마 8:-12:-)을 보임으로서 메시아이심을 증거 하시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특권을 유지하는 방법으로 예수가 메시아가 아님을 유언비어로 살포하였다.
이 같은 지도체제가 조작해 낸 유언비어는 유다 백성의 유기적 역사상의 특성상 많은 백성이 믿었고 예수님께서 악령에 사로 잡혀 벙어리가 되었고 귀머거리가 되었던 사람에게서 악령을 내어 쫓아 치유하였을 때 바리새인들(지주계급으로 귀족 행세를 하고 있었던 자)이 예수는 바알세불(사탄)을 힘입어 악령을 내쫓고 있을 뿐 다윗의 자손-메시아-은 결코 아니라고 선동하였다.
이렇게 유다의 지도체제에 의해 예수가 메시아이심을 부인하는 여론이 지배적인 상황에서도 “예수는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것에 대해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알게 하신 것이라고 칭찬하셨다.
18절(마16:)에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원문에 사용된 접속사를 옳게 이해하는 경우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에는 자신의 전반부 사역을 이해하기는 하였으나 “내가 새롭게 너희들에게 할 말이 따로 있다는 뜻을 드러낸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를 돕기 위해 마태복음의 내용을 정리하면 이스라엘 무리들이 바리새인들의 선동에 넘어가(마 9:33-34)예수님께서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도 이는 다윗의 자손일 수가 없는데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실 수가 있는가? 의아해 했을 때 예수는 이스라엘의 ‘무리’들조차 현혹자들의 유혹에 넘어가 자신을 배신한 것을 느끼셨다(마 12:23의 원문은 부정적인 답을 요구하는 질문법으로 다윗의 자손임을 인정한 것이 아니라 부인한 상태에서 생각에 혼돈이 일어났던 것을 드러내고 있다).
이렇게 이스라엘의 지도체제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무리)들에게까지 배척당하신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사역의 본질을 바꾸셨다. 다윗의 자손으로 이스라엘 왕으로 자신을 제시하였고 표적을 통해 그 증거를 제시하였으나 이 같은 사역은 실패로 끝이 났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천하 만민이 복을 얻게 하실 분”(창 22:18, 갈3:16참조)으로 사역의 양상을 바꾸셨다. 이 같은 사실을 보고 들었던 요한이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라고 이스라엘에게 예수를 소개하였다. 하나님의 어린 양이란 유월절의 희생제물을 상징하는 것으로 만인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희생제물이 되실 것을 예언한 것이었다.
이 같은 사건에 비추어 볼 때 마태복음 12장 22-23절에서 배척 받으셨던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과도기적인 준비 과정을 거쳐(마 13:-15:-) 마태복음 16장 18절에서 자신의 교회를 창설하실 것을 선포하셨다. 다시 말하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이방인들을 포함한 구세주로서 구원의 역사를 실현할 교회를 창설하실 것을 선포하셨다. ‘이 반석’ (Ⅴ.18)이란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킨 말로(고전 3:11, 고전 10:4)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이스라엘의 메시아라는 뜻의 어구일 뿐 그리스도의 교회의 터는 아닌 것이 확실하다.
16세기 초반에 일어났던 종교개혁 운동은 결국 개신교를 형성하였다. 로마교회의 체제와 횡포를 반대하여 새로 형성된 교회라는 뜻에서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교회가 발생하였다. 사탄은 종교개혁이 일어나 새로운 교회들이 생길 때 낮잠을 자거나 지구 밖 어디 휴가를 갔던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부정과 부패, 잘못된 교회 전통이나 제도를 박차고 나오는 개신교 세력에 잠입하여 교단제도를 설립하게 하였다. 교단은 문예혁명의 결과 새롭게 형성되어 가고 있던 민족단위 국가제도에 편승하여 민족 또는 국가단위의 국교제도가 형성되었다. 그래서 루터란이 스칸디나비아 삼국에 수립되어 국교가 되었고 칼빈주의가 네덜란드에 들어가(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벨기에) 신칼빈주의로 변질되어 개혁교회라는 이름으로 국교가 되었다. 칼빈주의가 스코틀랜드에 들어가 장로교라는 교단으로 국교화 하였고 이와 때를 같이 하여 영국에 들어가서는 성공회가 영연방의 국교로 채택되는 반면 에피스코플이나 회중교회들이 개신교 세력의 다양성을 드러냈다.
국교제도가 형성되었을 때 모든 국민은 이론상 국교만을 믿어야 했다. 따라서 옳고 그른 것과는 상관없이 국교의 교리에 상반되는 교리를 주장하거나 실천하면 ‘이단’으로 정죄되었고 처형되는 것이 통례였다. ‘이단’으로 낙인을 받으면 국경 밖으로 축출되던지 처형당하는 것이 유럽제국의 관례였다. 따라서 대한민국은 국교가 없는 상태인데 이단 시비를 하는 것은 16-17세기 유럽의 역사상 발생하여 정착하는 과정에서 있었던 사건을 받아 들여 자신이 믿는 이론과 조금이라도 차이가 있는 이론을 주장하든지 성구 해석상 차이가 있는 해석을 하면 이단으로 정죄하여 신앙양심의 자유나 언론 및 자유로운 학문 활동을 억제하는 중세의 야만행위를 반복하는 행위이다.
‘이단’이라는 술어조차 현대의 민주사회에서는 완전히 제거되어야 한다. 만약 일관성 있게 장로교인이 신앙의 순수성을 주장하여 달리 믿는 사람들에게 신앙 및 양심의 자유를 허용치 않는다면 감리교, 성결교, 오순절-순복음 및 침례교를 이단으로 정죄할 수밖에 없다. 반대로 침례교인들이 자신의 신앙의 절대성을 주장하기 위해서 이단논란을 제기하려면 로마교회, 루터란교회, 장로교회, 감리교회, 성결교회, 오순적-순복음교회 등 전체를 이단으로 정죄하여야 한다. 똑같은 이론이 어떤 교회에나 적응되어 유럽에서처럼 종교 문제를 놓고 백년전쟁, 30년 전쟁 등 마지막 종교 하나만 남을 때까지 전쟁을 계속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이단시비란 자신의 교단의 정책 또는 교회만이 만고의 진리임을 주장하는 어리석음의 소산이요 다른 교회의 존재나 실천은 전혀 용납할 수 없다는 어리석은 편견의 산물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를 국시로 형성된 새로운 국가로 신앙 양심의 자유 및 언론 출판의 자유, 학문 및 사상의 자유가 보장되는 국가이다. 따라서 민주공화라는 국시에 어긋나지 않고 일반 도덕 및 사회의 질서를 파괴하지 않는 경우 다른 것을 믿거나 실천한다고 해서 ‘이단’시하는 것은 자신이 믿고 있고 속해 있는 교단의 무능함과 교리 및 신학의 빈곤을 노출하는 비열하고 통탄스러운 반항에 불과하다.
개신교는 처음부터 루터란, 칼빈주의, 쯔빙글리의 노선, 마르틴 부서의 노선, 알미니안주의 등으로 다양하게 발전하였다. 따라서 한 교단에 다른 교단을 이단시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교단만이 유일한 교단임을 역사적으로 또 신학적으로 증거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자신들의 신앙노선이 발전되는 일에 신경을 기울일지언정 달리 믿고 행하는 사람들에게 이단 시비를 거는 등의 만행은 즉시 중단되어야 한다.
결론
종교개혁의 산물로 각종 개신교회들이 발생하였다. 개신교의 특성은 “성경이 신앙과 행위의 궁극적은 권위”라는 원리였다. 따라서 개신교임을 주장하는 교단이나 이에 소속된 개인 신앙인의 경우 궁극적은 권위인 성경 말씀을 옳게 배워 이해할 뿐 아니라 실천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사항이다. 성경은 1000여 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책이다. 성경 안에는 우주론, 존재론, 인식론, 윤리도덕론 등 인간에 필요한 모든 지식이 들어있다. 따라서 성경의 내용이나 그 사상 및 교훈을 제대로 배우기 위해서는 한 사람이 그 생애 전체를 바쳐도 부족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하나님의 계시로 알려진 성경을 읽고 배워서 성경의 근본사상과 신학을 옳게 실천할지언정 다른 사람들의 신앙노선이나 신학에 대해 시비를 하거나 비평적 태도에 빠져 들어가는 것을 있을 수 없고 반드시 조속한 시일 내에 중지되어야 할 일이다.
∙KAICAM 고문 김호식 목사 ∙Dallas Theological Seminary(TH.D.) ∙워싱톤 침례신학대학 교수 및 학장 ∙콜롬비아 한인 침례교회 담임목사 ∙한국성서대학교 총장 ∙한국성서대학교 대학원 원장 ∙현)한국성서대학교 교수
"성경을 배워 실천하되 타의 신학에 시비걸지 말자." 는 결론이군요. 이단 시비는 특정인을 공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많은 양들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울타리라고 생각됩니다. 좋은 게 좋다-> 로 가다 보면 혼합종교가 되고 거룩과 순수성을 잃게 되지 않을까요? 물론 마녀 사냥식으로 몰아 함부로 정죄해선 절대 안되겠죠.
저는 한때 '다미'나 구원파'의 글을 읽고 혹했던 적도 있는 미련한 자로서.. 우리는 이단 연구에 게으르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쁜 성도들이 잘 모르고 넘어가니 전문가들이 밤낮 연구하여 알려주는 것이기에 분별하여 들으므로써 속지 않게 될 것입니다. 기독교 안에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 영의 사상이 누룩처럼 번져가니 깨어 분별하는 일은 중요하다고 여겨집니다.
예, 맞습니다. 위 교수님의 주장은 믿음을 실천하되 불필요한 이단 논쟁은 삼가하는 것이 좋다는 의견으로 생각됩니다. 양의탈을 쓴 이리는 열매로 알고,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신 것을 부정하면 이단인 것 처럼 절대적인 진리를 부정하지 않고, 다양한 방법상에서, 즉 중보기도, 방언, 예언 및 선교 등에 대해서 나와 다르다고 이단 취급하는 경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경우를 말함이라고 사료됩니다.
오직 성경말씀위에 든든히 서있는 방법 밖에 없는 듯 합니다. 오히려 이단들의 교리는 성경에 비추어 분별하면 되지만 나다니엘님 말씀처럼 겉으로 전혀 이단성 없는듯 오히려 이단 정죄에 적극적으로 참여 하면서 그안에 양들을 교묘히 주님 곁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흐름들을 우리는 정말 경계하고 경계해야 할것 입니다. 최근 신사도 운동 금치아 이적 번영신학 WCC 흐름등 이들에 대해 다수 성도들은 전혀 경계하지 않고 오히려 동조하고 있습니다. 정말 우리 하나님 애통해 하심이 저들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지 안타깝습니다...
첫댓글 조금은 지루하고 긴 글일 수 도 있으나, 많은 이단 논쟁에 대해서 옳은 안목을 가지게 해주는 글입니다. 참고하시면 도움이 될 듯 합니다.
"성경을 배워 실천하되 타의 신학에 시비걸지 말자." 는 결론이군요.
이단 시비는 특정인을 공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많은 양들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울타리라고 생각됩니다.
좋은 게 좋다-> 로 가다 보면 혼합종교가 되고 거룩과 순수성을 잃게 되지 않을까요?
물론 마녀 사냥식으로 몰아 함부로 정죄해선 절대 안되겠죠.
저는 한때 '다미'나 구원파'의 글을 읽고 혹했던 적도 있는 미련한 자로서..
우리는 이단 연구에 게으르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쁜 성도들이 잘 모르고 넘어가니 전문가들이 밤낮 연구하여 알려주는 것이기에 분별하여 들으므로써 속지 않게 될 것입니다.
기독교 안에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 영의 사상이 누룩처럼 번져가니 깨어 분별하는 일은 중요하다고 여겨집니다.
예, 맞습니다. 위 교수님의 주장은 믿음을 실천하되 불필요한 이단 논쟁은 삼가하는 것이 좋다는 의견으로 생각됩니다. 양의탈을 쓴 이리는 열매로 알고,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신 것을 부정하면 이단인 것 처럼 절대적인 진리를 부정하지 않고, 다양한 방법상에서, 즉 중보기도, 방언, 예언 및 선교 등에 대해서 나와 다르다고 이단 취급하는 경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경우를 말함이라고 사료됩니다.
지금은 이단보다 더 무서운것이 배교이며 삵군들이며 이리떼와 거짓선지자라 생각됩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샬롬
오직 성경말씀위에 든든히 서있는 방법 밖에 없는 듯 합니다. 오히려 이단들의 교리는 성경에 비추어 분별하면 되지만 나다니엘님 말씀처럼 겉으로 전혀 이단성 없는듯 오히려 이단 정죄에 적극적으로 참여 하면서 그안에 양들을 교묘히 주님 곁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흐름들을 우리는 정말 경계하고 경계해야 할것 입니다. 최근 신사도 운동 금치아 이적 번영신학 WCC 흐름등 이들에 대해 다수 성도들은 전혀 경계하지 않고 오히려 동조하고 있습니다. 정말 우리 하나님 애통해 하심이 저들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지 안타깝습니다...
혼란한 이때에 회원님들의 이단을 분별하는 안목은 탁월하신 것 같습니다.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