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속의 한국사] 양산 통도사
6·25전쟁 때 부상병 3000명 수용… 사찰 최초 국가현충시설
양산 통도사
유석재 기자 기획·구성=오주비 기자 입력 2024.09.12. 00:30 조선일보
IMF 외환 위기 시절 경남 양산 통도사에 있는 자장암 시주함에서 3만원을 훔쳤던 사람이, 27년이 지나 같은 곳 시주함에 현금 200만원이 든 봉투를 넣었다는 뉴스가 나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줬어요.
1997년 당시 앳된 소년이었던 이 사람이 두 번째로 돈을 훔치려고 시주함으로 다가갔을 때, 훗날 통도사 주지를 지내게 되는 현문 스님이 그의 어깨를 다독이며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저은 뒤 돌려보냈다고 해요.
그 소년은 자라난 뒤 돈봉투와 함께 넣은 편지에서 ‘그날 이후 지금까지 한 번도 남의 것을 탐한 적이 없다’며 ‘곧 태어날 아기에게 당당하고 멋진 아버지가 되고 싶다’고 썼어요.
이렇게 한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 놓은 통도사는 과연 어떤 절일까요?
경남 양산의 통도사와 금강 계단 전경. 통도사는 삼국 시대인 서기 646년 신라 선덕여왕 때 창건된 유서 깊은 절이에요. 통도사는 2018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어요. /산사세계유산등재추진위원회
선덕여왕 때 불교 실권자 자장이 창건
통도사는 삼국 시대인 서기 646년 신라 선덕여왕 때 창건된 유서 깊은 절입니다. 창건자는 원효·의상·도선 등과 함께 신라의 대표적인 승려로 일컬어지는 자장(590~658) 율사(계율에 정통한 승려)였어요. 당나라 유학을 다녀온 뒤 대국통(大國統·전국의 불교를 총괄하는 자리)으로 임명됐고 황룡사 구층 목탑 건립을 주도했던 인물입니다.
하지만 불교를 중시하고 중앙 집권화를 추진한 선덕여왕의 정책에 기득권을 지닌 귀족들이 반발한 ‘비담의 난’이 647년 일어났고, 그 와중에 선덕여왕이 죽었습니다. 반란을 진압한 김춘추·김유신 세력이 실권을 장악했는데, 자장은 이들과 갈등하다가 일선에서 밀려났다는 설도 있습니다. 이후 신라 불교를 대표하는 승려는 원효와 의상으로 바뀝니다.
통도사를 창건한 자장 율사. 신라의 대표적 승려예요. 이 그림은 조선 후기에 그려졌어요. /위키피디아
자장이 선덕여왕 시기 벌였던 중요한 사업이 바로 통도사 창건이었습니다. 전해지는 얘기에 따르면 자장은 중국에서 문수보살(지혜를 상징하는 보살)을 만났는데 그로부터 석가모니의 진신사리(유골)와 가사(승려의 옷), 경전 등을 받았다고 합니다. 또 ‘그대의 나라 남쪽에 독을 뿜는 용이 사는 연못이 있는데 그곳에 금강 계단을 세우고 사리를 안치하면 재앙을 면하게 될 것’이란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금강 계단을 만들고 세운 절이 통도사였습니다.
‘삼보’ 중에서 ‘불보’를 모신 절
이렇게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신 곳이기 때문에 통도사는 ‘삼보(三寶)사찰’ 중 하나로 불리고 있습니다. 삼보란 석가모니와 모든 부처를 높여 부르는 불보(佛寶), 불경을 보배에 비유해 이르는 법보(法寶), 승려를 보배에 비유한 승보(僧寶)의 세 가지입니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통도사는 ‘불보사찰’, 고려대장경을 모신 경남 합천 해인사는 ‘법보사찰’, 고려에서 조선 초까지 16명의 국사(國師·나라의 스승이 될 만한 승려에게 내리던 칭호)를 배출한 전남 순천 송광사는 ‘승보사찰’이 되는 것이죠.
신라 때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승려가 통도사 금강 계단을 찾아 계(戒)를 받아 왔습니다. ‘계를 받는다’는 것은 부처의 가르침을 받드는 사람이 지켜야 할 계율을 받는다는 뜻으로, 승려가 되는 입문 의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보사찰’인 통도사에서 계를 받는 것은 부처님에게 직접 계를 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겨졌겠지요.
고려 시대인 1264년(원종 5년) 원나라 사신들이 이곳을 찾았고, 1326년(충숙왕 13년)엔 인도 출신 지공 선사가 참배했다고 합니다. 조선 시대인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일본군의 침입으로 통도사는 한 차례 불탔어요. 그때 일본군이 이곳의 진신사리를 약탈해 간 뒤 전후 외교를 위해 일본에 갔던 승병장 유정(사명대사)이 1605년 되찾아 왔습니다.
숭유억불에도 살아남은 조선의 산사
불교를 국교로 삼았던 신라·고려와는 달리 유학자들이 주도해 세운 조선 왕조는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을 펼쳤습니다.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억제하는 정책이었죠. 이 때문에 한양 도성에는 큰 절이 거의 없었습니다. 조선 초 지금의 탑골공원 자리에 원각사라는 절이 있었지만 중종 때 사라졌습니다. 서울 종로구 조계사는 20세기에 건립된 사찰입니다. 승려의 한양 도성 출입조차 오래도록 금지됐습니다.
하지만 깊은 산속에 있는 큰 절들은 살아남았고, 이 때문에 ‘산사(山寺)’라는 것이 한국 사찰의 특징이 됐습니다. 양산 영축산에 자리 잡은 통도사 역시 한국의 대표적인 산사가 됐습니다.
그런데 임진왜란 이후 불교는 중흥기를 맞게 됩니다. 전쟁 때 승병의 활약으로 규제가 많이 풀린 데다, 전란 중 허망한 죽음을 많이 목격한 사람들이 내세(죽은 뒤의 세상)의 희망을 말하며 현실을 위로하는 불교에 끌리게 됐던 것이죠. 서민들이 아래로부터 불교를 받드는 ‘대중 불교’의 성격을 지니게 됐던 것입니다. 법주사 팔상전, 금산사 미륵전 같은 대형 불교 건축물이 이때 나왔습니다. 하지만 통도사는 굳이 그렇게까지 큰 건물을 새로 지을 필요가 없었는데, 불보사찰이라는 고유의 특징 때문이었습니다.
‘한국의 산사’로서 유네스코 세계유산 올라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해 국군이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했을 때, 부산의 제31육군병원의 자리가 다 차자 통도사에 이 병원의 분원이 설치됐습니다. 부상병 3000명이 통도사로 보내졌고, 지금도 통도사에는 ‘가노라 통도사야 잘 있거라 전우들아’ 같은 병사들의 낙서가 남아 있습니다. 이 때문에 통도사는 불교 사찰 중 최초로 2021년 ‘국가 현충 시설’로 지정됐죠.
통도사 전각에서 발견된 낙서예요. '가노라 통도사야, 잘 있거라 전우들아'라고 적혀 있지요. 6·25전쟁 때 부산 제31육군병원이 꽉 차자 통도사에 병원 분원을 설치하고 병사들을 치료했는데, 당시 부상병들이 남긴 낙서로 보여요. /통도사
통도사는 경북 영주 부석사, 안동 봉정사, 충북 보은 법주사, 충남 공주 마곡사, 전남 순천 선암사, 해남 대흥사와 함께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Sansa, Buddhist Mountain Monasteries in Korea)’으로서 2018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습니다. 산속에 자리 잡고 오랜 세월 불교 신자들을 위한 신앙처 역할과 승려들의 수행 공간 역할도 하는 독특한 문화를 형성했다는 것입니다.
유석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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