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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주여 어느 때까지 관망하려 하십니까
1. 주여 나와 다투는 자와 다투시고 나와 싸우는 자와 싸우소서
2. 방패와 손 방패를 잡으시고 일어나 나를 도우소서
3. 창을 빼사 나를 쫓는 자의 길을 막으시고 또 내 영혼에게 나는 네 구원이라 이르소서
4. 내 생명을 찾는 자들이 부끄러워 수치를 당하게 하시며 나를 상해하려 하는 자들이 물러가 낭패를 당하게 하소서
5. 그들을 바람 앞에 겨와 같게 하시고 주의 천사가 그들을 몰아내게 하소서
6. 그들의 길을 어둡고 미끄럽게 하시며 주의 천사가 그들을 뒤쫓게 하소서
7. 그들이 까닭 없이 나를 잡으려고 그들의 그물을 웅덩이에 숨기며 까닭 없이 내 생명을 해하려고 함정을 팠사오니
8. 멸망이 순식간에 그에게 닥치게 하시며 그가 숨긴 그물에 자기가 잡히게 하시며 멸망 중에 떨어지게 하소서
9. 내 영혼이 주를 즐거워함이여 그의 구원을 기뻐하리로다
10. 내 모든 뼈가 이르기를 주와 같은 이가 누구냐. 그는 가난한 자를 그보다 강한 자에게서 건지시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노략하는 자에게서 건지시는 이라 하리로다
11. 불의한 증인들이 일어나서 내가 알지 못하는 일로 내게 질문하며
12. 내게 선을 악으로 갚아 나의 영혼을 외롭게 하나
13. 나는 그들이 병들었을 때에 굵은 베 옷을 입으며 금식하여 내 영혼을 괴롭게 하였더니 내 기도가 내 품으로 돌아왔도다
14. 내가 나의 친구와 형제에게 행함 같이 그들에게 행하였으며 내가 몸을 굽히고 슬퍼하기를 어머니를 곡함 같이 하였도다
15. 그러나 내가 넘어지매 그들이 기뻐하여 서로 모임이여. 불량배가 내가 알지 못하는 중에 모여서 나를 치며 찢기를 마지아니하도다
16. 그들은 연회에서 망령되이 조롱하는 자 같이 나를 향하여 그들의 이를 갈도다
17. 주여, 어느 때까지 관망하시려 하나이까. 내 영혼을 저 멸망자에게서 구원하시며 내 유일한 것을 사자들에게서 건지소서
18. 내가 대회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많은 백성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이 시편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찬양하는 시이지만 억울하고 고통스러운 현실을 토로하는 탄원의 시이기도 하다. 이 시의 배경은 사울 왕으로부터의 도피 생활과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인한 망명 생활이다. 다윗의 일생에서 대표적인 고난은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 왕으로부터 도망다녀야 했던 것과 왕이 된 후에 아들의 반란으로 인해 왕궁을 떠나 피신하고 아들과 전쟁을 했던 것이다. 1-10절은 사울왕을 피해 도망 다닐 때의 억울함을 토로한 것이고 11-18절은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인한 고통을 토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나와 다투는 자와 다투시고(1절~)
다윗은 거친 단어를 써서 대적하는 자들을 망하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표면적으로 읽으면 한 구절도 은혜가 안 될지 모른다. “나와 다투는 자와 다투시고 나와 싸우는 자와 싸우소서.”라고 했는데 이어 8절까지 속에 있는 온갖 저주가 나왔다. 낭패를 당하게 하시고 수치를 당하게 하시고, 그들을 몰아내게 하시고 그들을 뒤쫓게 하시며 멸망 중에 떨어지게 하소서……. 이것이 무슨 성경말씀인가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지만 인간의 솔직한 내면을 표현한 것이다. 정말 억울한 자리로 내몰릴 때 사람은 이런 마음이 생길 수 있다.
성경은 관념적인 책이 아니라 현실을 토대로 한 책이다. 발을 땅에 딛고 사는 육체를 가진 인간이 역사 속에서 희노애락의 노정에서 살아가는 이야기가 그대로 담겨져 있다. 명상을 하면서 깨달은 아름답고 고상한 내용이 아니라 처절하게 부딪치면서 표출되어지는 솔직한 감정들이다.
그렇지만 거기서 끝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거기서 하나님의 대답이 있고 이런 인간을 하나님이 어디로 이끌어 가시는가 하는 것이 우리가 볼 내용이다.
시편 23편에서 보듯 실제로 다윗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닌 사람이다. 그렇지만 캄캄한 어둠에서 빛이 발하듯이 우리가 어떤 문제에 부딪힐 때 생명의 힘이 거기서 더 확실하게 드러난다. 야곱이 머리를 굴리고 형을 속이고, 외삼촌을 속이고, 자기 집을 짓기 위해서 살았지만 바로 앞에서 고백한 것처럼 그의 전 인생은 험악한 세월이었다. 그러나 성경 안에 기록된 야곱의 그 험악한 인생이 오늘 우리에게 늘 풍성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석되고 있음을 보게된다,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석되면 복되지 않을 것이 없다. 하나님의 비추심이 있어서 내 인생을 들여다보면 양식이 되지 않을 것이 없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다분히 부정적이다. 끝없이 적국에 시달리다 조금 평안해지면 다시 우상을 섬겼다. 이런 역사를 되풀이 하는 민족을 구원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리스도라는 더 완전한 대답을 준비하시고 우리에게 제시하셨다. 어리석은 역사, 험악한 세월들이 이 대답 안에서 우리에게 교훈이 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리잡게 된다.
그런데 9절에는 “내 영혼이 여호와를 즐거워함이여 그의 구원을 기뻐하리로다.”라고 하였다. 갑자기 반전이 되는 것이다. 시편 35편의 패턴이 그러하다. 1-10절까지 자기 속에 모든 것을 다 토해놓다가 주님의 구원을 즐거워한다고 했고, 11-17절까지도 계속 억울함을 토로하다가 18절에는 “내가 대회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많은 백성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19-28절도 같은 패턴이다.
하나님이 싸우시는 법(10절)
하나님이 다윗을 위해서 어떻게 싸웠다는 말인가? 하나님이 싸우시는 방법이 무엇인가? “내 모든 뼈가 이르기를 여호와와 같은 이가 누구냐. 그는 가난한 자를 그보다 강한 자에게서 건지시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노략하는 자에게서 건지시는 이라.” 하였다.
하나님이 싸우시는 법을 확실히 보여 준 것이 유월절이다. 세계 최강 이집트 군대를 맞서서 노예였던 이스라엘 백성이 무슨 힘으로 이기겠는가? 유일한 길은 죽음을 표방하는 것이다. 약하고 가난한 자를 강한 자에게서 건지신다는 이스라엘의 이 신앙은 출애굽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출애굽의 역사에서 그들이 기념한 유월절은 구원의 가장 명백한 그림이다. 가난한 자를 강한 자에게서 건지시는 그들의 체험과 믿음을 담고 있는 절기다. 기적 같은 일이고 이스라엘 역사에서 잊을 수 없는 일이며 이것이 이스라엘을 시작하게 한 역사다.
자기 백성은 유월절 죽음 안에 보전하시고 이집트에서 난 사람이나 짐승이나 초태생은 다 죽었다. 강한 것은 다 죽고 죽음 안에 있는 것만 살아남은 절기가 유월절이다. 이 이김의 유일한 길은 죽음을 표방하는 것이었다. 양을 잡아서 인방과 문설주에 피를 바르고 집 안에서 양고기를 먹고 뼈는 꺾지 않고 버려두었다.
1절에는 “내 모든 뼈가 이르기를 여호와와 같은 이가 누구냐.”라고 하였다. 피가 발라진 집 안에 있는 것은 죽은 것이다. 죽음의 사자가 다 죽은 것을 보고 지나간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사람을 보호하는 방법이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축복을 지키는 방법이다.
시장바닥이나 백화점에 진열해 놓으면 좋은 것은 누구나 가져가려고 할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시는 기업, 인간에게 상속되는 이 아름다운 기업, 주께서 내게 줄로 재어준 기업은 죽음 안에 보존되었기 때문에 죽음이 아니고는 가져갈 수 없는 축복이다. 사탄이 흉내낼 수도 없고 가져갈 수도 없고,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복이다.
초태생은 다 죽었다. 초태생은 가장 큰 것, 힘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에 속한 초태생은 다 여호와께 돌려야 했다. 이스라엘에서 가장 큰 것은 하나님께 돌려야 하고 애굽에서 난 가장 큰 것은 죽어야 한다.
아담 이래로 인간은 다 힘을 가지려는 길을 갔다. 바벨탑을 쌓은 것은 힘을 가지려는 것이었다. 그 길을 따라 가보니 아벨이 죽었고 네피림이 되어서 포악함이 세상에 가득 찼다. 힘은 누구를 죽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초태생은 다 여호와께 돌려야 한다. 힘은 하나님께 돌려져야 한다.
세상에서는 힘을 무서워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을 종노릇하는 것이다. 이 죽음에서 놓아주려고 예수님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셨다고 하였다.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율법에 대해 말하면서 율법은 사람을 지배하는 권위고 힘인데 이 힘은 사람이 살아있을 동안에만 사람을 지배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고 하였다(롬7:1). 살아있는 동안에만 지배하는데 율법이 주는 보상이 무엇인가? 왜 율법의 지배를 받는가? 그것은 율법이 주는 보상 때문이다. 그 보상은 내 옳음 내 행위를 인정받는 것이다. 율법대로 살고 반듯하게 살면 내 의를 가질 수 있다. 나의 옳음과 행위를 인정받으면 어디서나 당당하다. 마치 백신을 맞으면 마스크를 벗어도 되는 것처럼 율법이 주는 훈장, 의로움을 갖게 된다.
율법은 그런 좋은 행위를 강화시킨다. 그런데 그렇게 살려고 하다 보면 끝이 없다. 한편으로는 날아갈듯한 기쁨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늘 정죄가 따를 수밖에 없다. 완벽주의자와 같이 살면 피곤함이 이루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로마서 7장 4절에는 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다고 하였다. 율법에 대하여 죽임 당한 것은 무엇인가? 나의 의, 나의 옳음, 내가 행한 것에 대해서 인정받으려는 것, 이런 것이 없어지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런 것이 없어진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인정받을 생각을 안하고 인정받을 것이 없게 되니까 그때 비로소 거기서 자유하게 되는 것이다.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데 살든지 죽든지 두렵지 않다면, 살아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된다면 사는 것이 좋고 죽어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된다면 죽는 것이 좋다면 죽음은 나에게서 힘을 발휘할 수 없게 된다.
우리가 이 의에 대해서 죽은 사람이 되면, 내 의를 가질 수 없으면 사람 앞에서 큰소리를 칠 수 없다. 누구를 정죄할 수도 없다. 그런 사람은 누구를 미워할 수도 없게 된다. 그런데 자기 의를 가질 수 없는 이 사람이 사실은 유월절 안에 보존된 사람이다.
구약에서는 양의 죽음 속에 보존했지만 신약에서는 예수의 죽음 안에 우리를 두셔서 우리를 보호하신 것이다. 죽으면 행위가 다 사라진다. 행위에 대한 모든 판단이 끝나고 자랑이 끝나고 무엇을 했다는 것이 다 필요 없게 된다. 그렇게 죽고 나니까 우리는 세상에 대해서 죽고 하나님에 대해 산 사람으로 이 승리를 하게 되는 것이다.
십자가로 가는 길에서 마지막 기도를 앞두고 “너희는 근심하지 말고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셨다.(요16장) 그 이김이 무엇인가? 힘으로써 세상을 꺾는 것이 아니라 힘이 없는 사람, 싸울 것이 없는 사람으로 승리하게 하신다. 이것을 구약으로 말하자면 유월절 문설주와 인방에 피를 칠한 그 집 안에서 양고기를 먹고 있었던 것이다. 구약에서는 죽은체하는 사람들에게 죽음이 지나갔지만 이제 신약에서는 예수와 함께 죽은 사람들에게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신 승리에 참여하게 하신다. 이렇게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이다.
구약의 모든 믿음의 결말은 힘으로 세상을 이기는 것이 아닌 다른 승리를 우리에게 가져다 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 영혼이 주를 즐거워하고 그의 구원을 기뻐하리로다.”라고 하였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즐거워하는 것은 다른 승리를 기뻐하는 것이다.
내 기도가 내 품으로 돌아오다(13절)
11-18절은 또 다른 억울함의 표현이다. 그 사람들이 아파할 때 함께 아파했고 친구와 형제같이 했으며 어머니가 슬퍼함 같이 슬퍼했는데 내 기도가 내 품으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이 말은 그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들을 위해 기도한 것이 그대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의 배경은 압살롭의 반란이다. 왕자의 난을 겪으며 피난길로 들어서는데 왕궁을 떠나는 순간 다윗에게서 권력과 힘이 떠나게 된 것이다. 힘이 있을 때는 다윗 앞에서 누구도 말을 못하다가 힘이 없다는 것이 확인되는 순간 불만이 다 표출되어 나오면서 조롱하는 사람들이 나와서 “피 흘린 자여, 저주를 받는 것이 마땅하다.” 이렇게 비방했다. 11-18절까지가 그때의 심정을 표현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자기가 선대했던 사람들의 배신으로 “내 기도가 내게로 돌아왔다. 사울 왕이 죽었을 때도 슬퍼서 곡을 했고 그 밑에 사람들의 장례도 다 치러주었는데 쓸모없이 되었다.”고 한 것이다.
다윗은 불의한 증인들이 아파할 때 함께 아파했고 친구와 형제에게 함같이, 어머니를 슬퍼함같이 슬퍼했다. 그런데 선이 악으로 돌아왔고, 그들을 위한 기도가 되돌아왔다.
다른 사람을 축복해도 그 축복이 그 사람에게 합당하지 않으면 다시 내게로 되돌아올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다(눅10:5,6참조). 예수님은 제자들을 전도하러 보내면서 어느 집에 가든지 평안을 빌라고 하셨다. 그 평안이 그 집에 합당하면 그 집이 평안할 것이고 합당치 않으면 네가 빈 그 평안이 네게로 돌아올 것이라고 하셨다.
내가 누구를 축복하는데 그 축복이 그 사람에게 합당하면 복이 될 것이고 합당하지 않으면 그 축복이 내게로 다시 돌아온다는 것이다. 그에게 가든지 나에게 돌아오든지 할 것이니까 어쨋든 좋은 것을 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 사람이 받아도 좋은 일이고 안 받아도 나에게로 돌아오니까 좋은 것을 줘야 되지 나쁜 것을 주었다가 나에게로 돌아오면 곤란하지 않겠는가.
사람이 실제로 그러하다. 내 마음속에서 상대에게 미움이 나갈 때 그 사람이 정말 그런 사람이면 그 저주가 내게 돌아오지 않지만 그 사람이 그 저주에 합당치 않는 사람이라서 오히려 복을 받는다면 내가 했던 저주가 다 나에게로 돌아온다. 실제로 마음에 증오나 미움이 있으면 몸에서 아주 나쁜 호르몬이 나온다고 한다. 혈압이 올라가고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아지며 몸 안의 좋은 미네랄이 다량 소모된다는 것이다.
잠언 17장 22절에는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 하였다. 실제로 근심하고 미워할 때 몸에서 다량의 미네랄이 소모되고 그것으로도 모자라면 뼈에 있는 칼슘까지도 나와서 몸의 발란스를 유지하게 된다고 한다. 뼈를 상하는 것이 맞다. 누구를 즐거워하면 그 사람만 좋은 것이 아니라 내게 복이 된다. 그러므로 일단은 좋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 판단은 하나님께 맡기고 나에게서 복이 나가서 손해 날 일이 없다.
내 기도가 내 품으로 돌아왔다는 말은 허사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새로운 경륜 안에서 보면 허사가 아니라 그것이 나를 더 복된 자리로 옮겨가게 되는 것이다. 다윗이 ‘내가 당신들에게 이렇게 했는데…….’라고 한 것이 헛된 것이 아니라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산 것 자체가 다윗에게 축복이었던 것이다. 무엇이 돌아와서 축복인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축복인 것이다.
다른 사람을 위해 축복하는 마음은 그 사람 자신에게 축복이다. 악을 악으로 갚으면 저주만 악순환될 뿐이다. 그런다고 내 인생이 보상되겠는가? 나를 해하려는 사람에게까지 축복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 조성된다면 그것이 진정한 축복이다.
십자가에 매달려 내려올 수 없는 사람은 누구에게도 해를 가할 수 없다.
기다리시는 하나님(17절)
17절에는 “주여 어느 때까지 관망하시려 하나이까.”라고 하였다.
어느 때까지 하나님은 관망하시는가? 기도하면 즉각 들어주시지 않고 왜 관망하시는가? 아담이 선악과를 먹을 때 왜 진즉 말리지 않으시고 먹고 난 다음에 “아담아,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셨는가? 가인이 아벨을 죽일 때 왜 말리지 않고 죽고 나서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라고 하셨는가? 다윗이 밧세바를 범할 때 하나님은 왜 미리 막지 않으셨는가? 나단 선지자는 그때 바로 온 것이 아니라 아들까지 태어나고서 왔던 것이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뒤에 나타나시는가?
앞에 나타나셨다면 인간의 대답은 뻔하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습니까?”라고 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행위가 드러나기 전에는 잘못인 줄 모른다. 우리는 꼭 무엇을 해야 잘못인 줄 안다. 우리 생명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까 “내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사람에게서 뭔가 드러나야 하나님이 말씀하실 수 있다. 도망다니던 다윗이 “주밖에 복이 없습니다.” 하는데 “네 속에 음란한 마음이 있구나.” 하시면 다윗이 어찌 알겠는가. 그런데 평안한 때가 되어 다 드러나고 나니까 나단이 지적할 때 바로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내가 범죄하였나이다.”라고 고백했던 것이다.
하나님이 왜 그러시는지 우리가 다 모르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 일들로 인해서 그 사람들의 어떠함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드러나야 처리할 수 있다. 창조의 셋째 날 마른 땅이 드러나고 생명이 자라기 시작했듯이 사람이 드러나야 하나님이 사람 속에서 일하실 수 있다.
내 안에 무엇이 있는지 우리는 다 모른다. 어떤 환경에서는 어떤 것이 드러나기도 하지만 어떤 것은 드러나지 않고 일생 살다가 죽을 수도 있다. 몸도 그러하다. 통증이 나타나기 전에는 간이 부었는지 모른다. 통증을 느끼니까 돌이 있는지 맹장이 부었는지 조사해서 알게 되는 것이다.
선악과가 왜 문제인지 아담은 다 몰랐을 수도 있다. 맛있어서 먹지 말라 했는지 왜 먹지 말라 했는지 몰랐을 것이다. 그런데 먹고 나니까 하나씩 선악과의 정체가 드러났다. 선악과를 먹고 나니까 아담은 두려웠고 부끄러워졌으며 가인은 화가 났다. 잘한다고 했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으니까 화가 났던 것이다.
화가 났다는 것은 이미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판단이 안서는 일에는 화를 낼 수도 없다. 내가 잘했는지 못했는지, 저 사람이 잘하는지 못하는지 알아야 화가 나지 모르는데 어떻게 화가 나겠는가. 그러니까 선악과를 먹었다는 것, 그것은 내가 판단의 주체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 옳음이 섰으니까 처음 나타나는 것이 ‘저것은 아닌데’ 하고 화가 나는 것이다. 선악과를 먹은 첫 열매가 가인이 몹시 화가 나서 얼굴빛이 달라진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일차적으로 생각하면 폭력을 받아들이신 것이다. 힘 있는 자 앞에서 아무 힘이 없기 때문이다. 고린도후서 13장 4절에는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박히셨다고 하였다. 힘이 있는데 하나님의 뜻을 시나리오처럼 이루려고 죽으신 것이 아니라 연약하여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이다. 폭력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사람으로, 선악과 이래로 화남으로부터 시작된 이 폭력을 끝내시게 된 것이다.
선악과가 처리되는 것은 결국은 힘이 처리되는 것이다. 우리의 힘과 그로 말미암은 옳음과 의, 이것이 처리된 자리가 구약으로 말하자면 초태생이 다 죽는 유월절이고 신약으로 말하면 십자가에 못박혀서 내려올 수 없는 그 자리다. 자기 뜻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는 그 사람, 누구를 판단하거나 가해할 수 없는 이 사람이 하나님이 우리의 정체를 드러나게 하신 자리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람 될 때까지 기다리신다. 일 자체를 처리하시기보다 일을 통해 자기 사람들을 다루신다.
사람을 만드시는 하나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중심은 사람을 만드는 데 있다.
18절에는 “내가 대회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많은 백성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라고 하였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주님을 찬송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을 신약의 말로 하면 거꾸로 “내가 만민 가운데 당신의 찬송이 되고 당신의 자랑이 되겠습니다.”라는 말이다.
바울이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한다고 했듯이(빌1:11) 많은 사람이 모인 곳에서 하나님의 자랑이 되고 백성 중에서 주님의 찬송이 되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랑하고 싶은 사람이 되겠다는 것이다. 이 사람이 하나님이 만드시기 원하는 사람이다.
1999년에 이 목사님이 미주에 오셔서 한 달을 순회하시면서 말씀을 하셨다. 뉴욕에서 요한복음 앞부분을 말씀하셨고 토론토에서 5-10장까지 말씀하셨다. 그 내용을 ‘생명의 목장’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냈는데 우리 교회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이다. 뉴욕에서 요한복음 1장을 말씀하시기 전에 ‘시작하신 하나님(창1장)’과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마1장) 두 번을 말씀하셨고 세번 째부터 요한복음 1장을 말씀하셨다. 그래서 책을 낼 때 요한복음 1장부터 10장을 말씀하신 것만 정리해서 냈는데 이 목사님이 앞에 두 번 말씀하신 것을 넣으라고 하셨다. 초판에는 그 부분이 없이 나왔는데 재판에는 두 챕터가 더 들어가서 책이 나왔다. 두 번 말씀하신 것을 강조하셔서 나도 다시 깊이 보게 되었다.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 이것이 창조의 처음과 끝이다. 전체 목사님 말씀의 맥락이기도 하다.
새마을 기차를 타고 이 목사님과 4시간 동안 가는 동안 계속 말씀하셨는데 요지는 “나는 예수 안에서 사람의 길을 보았다.”는 것이었다. 사람이 누구이며 하나님이 지으시려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예수 안에서 그 사람을 보았다는 것이다. 그때는 4시간을 듣고 있으려니 머리에 쥐가 나려고 했는데 그러면서 머리에 새겨졌다. 내 일생 전할 메시지도 ‘나는 예수 안에서 사람의 길을 보았다.’는 것이 되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신학교 다닐 때 서울대 모임에서 같이 이 목사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는데 하루는 구약을 창세기를 훑다시피 아곱 이야기를 한 시간 동안 하셨다. 이 사람, 마지막에 자기가 원하는 것은 아무것도 가질 수 없었지만 마지막에 하나님이 세상을 축복하는 그 축복이 그대로 흘러내린 사람, 이 사람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새 예루살렘 성의 벽옥 같고 수정 같은 그 사람이라고 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그것이 너무 선명하게 전 성경을 다 알아진 것처럼 그 말씀이 나에게 기쁨이 되고 양식이 되었다. 창세기에 그렇게 험악한 세월을 산 사람이지만 바로를 축복한 사람, 이 사람이 바로 벽옥 같은 사람이다. 정말로 이 사람이 소망되었다.
벽옥의 벽(碧)은 푸르다는 의미라서 푸른색은 무한함을 상징한다. 하늘이 푸르듯이 우리가 무한히 수정같이 투명해서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비출 수 있는 사람, 우리의 색깔과 흠집 같은 것들에 의해서 변색되어 비쳐지지 않았는데 이제는 해와 달의 비침이 쓸데없고 하나님의 영광이 벽옥과 수정 같아서 있는 그대로 비춰지는 그 사람이 일생 소망이 되었다. 이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이 소망이 되었다.
벽옥과 수정 같은 새 예루살렘 성의 소망, 참 사람의 소망,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단지 인격이 빛나는 사람이 아니라 십자가에 매달려서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 하나님이 어째서 이렇게 하시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 “내려와 보라.”고 조롱을 받아도 내려올 수 없는 사람, 아무것도 없는 이 사람이 우리에게는 벽옥과 같고 수정과 같이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비추는 사람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사람을 하나님 아들이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내 인생에 어떤 성취가 없고 어떤 결과를 보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 사람이기만 하면 되지 않겠는가! 이 사람을 알고 이 사람 안에서 발견되면 무엇을 더 갖지 않아도 부족함이 없고 더 고치지 않아도 후회함이 없는 사람이 된다. 이 사람이 하나님의 안식인 사람이고 하나님의 안식이 된 사람이다.
우리 인생에 이 사람이 나타나는 것만으로도 부족함이 없고 더 바랄 것이 없다. “하나님이 내 인생에 성공하셨습니다. 더할 것도 없고 뺄 것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 이렇게 고백하는 사람이 될 줄 믿는다.
[ 기 도 ]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연약하기 때문에 억울함이 생기고 피해도 생기고 궁핍한 자리에서 주께 소망을 둘 수밖에 없는 사람으로 살지만, 하나님의 대답은 늘 다른 자리에 있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사람, 거기서 내려올 수 없는 그 사람 안에 우리를 지키시고 보존하셔서 예수 안에서 내가 발견되게 하시고 그와 연합하게 하셔서 세상 모든 것에서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우리에게는 다른 소망이 없고 주와 연합하는 이 소망밖에 없는 사람으로 살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대회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백성 중에서 주를 찬송하는 다윗 같이 우리도 많은 사람들 앞에서 주님의 자랑이 되고 주님의 찬송이 되기를 원합니다. 주께서 우리를 세상 앞에 내놓고 “이 사람을 보라.”고 자랑하고 싶은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예수 안에서 이 사람을 알게 하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