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앙리 벩송(Henri Bergson, 1959)
쟝겔레비치(Vladimir Jankélévitch, 1903-1985), PUF, 증보판 1959(초 1931), P. 300.
[차례] 300
서문 Avant-Propre 1
제1장 유기적 총체성 Totalités organiques 5
제2장 자유 Liberté 28
제3장 영혼과 신체 L'âme et le corps 80
제4장 생명 La vie 132
제5장 영웅주의와 성성(聖性) L'héroïsme et la sainteté 182
제6장 개념들의 무와 정신의 충만 Le néant des concepts et le plein de l'esprit 200
제7장 단순성: 환희에 대하여 La simplicité. Et de la joie 229
* 부록: 벩송과 유대주의 Appenice: Bergson et le judaïsme 255
# 영혼 전체와 더불어 Avec l'âme tout entière 286
참고문헌 Bibliographie 297
차례 Table des matières 300
** ** ** ** ** **
* 부록: 벩송과 유대주의 Appenice: Bergson et le judaïsme 255
I 무제 [대립관계] 256
II 무제 [계승 또는 확장] 268
Ⅱ. [계승점 또는 벩송의 생성 실재성 대 유태크리스트교 현상주의]
사실상, 우리가 벩송주의의 가장 깊이 있는 성서적 특징을 인정하려고 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충만과 실증성 속에서이다. 이 충만은 스피노자에게서처럼 존재의 충만이 아니라 생성의 충만이다. 왜냐하면 스피노자가 죽음에 대한 플라톤의 성찰을 삶의 성찰로 전복시켰던 것처럼, 또한 벩송은 스피노자의 영원의 상 하(sub specie aeternitatis)를 의도적으로 지속의 상 하(sub specie durationis)로 전복시켰다. 그것은 반대이기도 하지만 ... 아마도 동일한 것이로다! 생명의 영원은 무한한 생성이며, 비시간적 부정성인 죽음의 영원성을 보충한다. 헬레니즘(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 이전에의 플라톤과 일치하는데)은 생성을 최소한의 완전함으로써 또 항구적이지 못한 존재로써, 즉 비존재로 구멍이 뚫린 존재로써, 생각하는데 익숙해져 있었다. 벩송은 공통적인 명증성을 바꿔치기하면서, 영원성을 그것의 주도적인 우선권을 박탈하고서, 역설적으로 존재 속에서 생성의 결함을 부동성 속에서 운동의 결핍을 인정하였다. 부정적인 것과 긍정적인 것은 자신들의 기호들을 교환한다. 생성의 내재성 속에 우리를 단호하게 자리 잡게 하는 벩송은 그것에 따라서 우리들의 조건의 이편 안에(dans l'en-deça) 우리를 뿌리박게 한다. 저의 없는[딴 생각 없는] 이 뿌리내림은 헤브류 영혼의 깊은 특징이 아닌가? 생성은 더 이상 눈물의 계곡이 아니며, 이 계곡으로부터 영속적인 순례자인 인간은 달아나기만을 생각할 뿐이다. 인간은 이 아래에서 더 이상 추방된 자가 아니다. 「변화의 지각」에 관한 옥스퍼드 대학 첫 강연에서 벩송은 플로티누스가 행동보다 관조를 선호했다고 비난하면서, 도주와 후회의 정념(le pathos)을 비난하였는데, 이 파토스는 파이톤편의 정화주의뿐만 아니라 네오플라톤주의와 근대 낭만주의까지 가득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φεύγειν δεί πρός τό ἄνω, φεύγωμεν δή φίλην ἐς πατρίδα 여기서부터 달아나자, 천상의 예루살렘으로, 성스런 예루살렘의 도시 안으로(in civitatem sactam Jerusalem) 달아나자, 우리의 소중한 조국 안으로 달아나자 ... 달아나기, 항상 달아나기! 당신의 맘에 든다면 왜 우리의 조국이 이 아래에 있지 않을 것인가? 왜 우리의 성스런 예루살렘이 이편(l'en-deça)에 있는 예루살렘이 아니었을까? 즉 이 세상의 예루살렘이 아니었을까? 벩송은, 인간의 임무들에 비추어본 자신의 긍정적 태도에 의해 심지어는 신비가들에게 표시되었던 자신의 선호에 의해서, 예언자들의 윤리에, 즉 율법의 윤리에 집착했다. 관조주의자적 형이상학이 순수 부정성으로써 간주했을 그것은 반대로 긍정성의 극치[절정]이다. 따라서 비관주의는 낙관주의로 바뀐다. 쇼펜하우어가 불행에 대해 현존하고 있다고 말했던 것은 그가 생성을 불완전한 존재 방식으로써 간주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생성 속에 강요되어 머물고 있기에, 그 인간은 시간성의 강요된 노동들의 죄수이다. 따라서 우리의 향수들과 우울함을 설명하는 것은 영원하고 존재론적인 편견들이다. 반대로 만일 존재가 생성의 부정일 경우, 만일 그 인간에게서 생성이외 다른 존재 방식이 없을 경우, 비판은 경쾌함(희열)으로 전환한다. 생성, 다시 말하면 [현재] 있지 않으면서 존재하는 것이고 또는 [현재] 있으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고, 존재이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이 그렇게 생각한 것이 아닌가?). 그러한 것이 인간이 갖는 유일한 방식, 한 존재가 있다는 방식이로다! 비시간적인 것의 신기루를 향해 곁눈질하기를 그만둔 인간은 즐거운 충만 속에 뿌리 내린다. 지상의 지복, 또는 하부 세상의 지복의 관념은 벩송과 톨스토이에게 공통적이지 않는가?
또한 근대 철학자들에 의해 매우 높이 평가되고, 특히 우리들의 비극들을 결코 경험해보지 못했던 철학자들에 의해 높이 평가되었던 비극적이고도 해결할 수 없는 충돌을 위해서 벩송의 지속 안에 여지[자리]가 없는가? 오늘날의 의사[거짓]-비극적인 청춘이 벩송주의에 대해 무관심하게 되는 이유들 중의 하나가 아닌가? 왜냐하면 벩송에게서, 부조리는 또한 진보의 도구이기 때문이다. 또한 왜냐하면 장애물 그 자체는 창조적 진화에서 또한 하나의 기관이기도 하기 때문이도다! 이리하여 물질의 현전[현재 출현되어 있음]은, 그것의 근본적 기원에서는 설명될 수 없다고 할지라도, 생명과 정신의 기원과 동일한 기원으로부터 오는 것일 것 같다. 어떤 의미에서는, 정신을 홀리고 또 정신을 둔하게 하는 것이 생명의 도약을 하강하게 하고 지체하게 한다. 다른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은 정신의 실증적 정복들의 도구이다. 즉 도약판이 도약에 필연적이듯이, 물질은 생명에 필연적이다. 신적 도약이 아주 신적이라 할지라도 그 신적 도약은 어떤 사물에 근거한 지지[후원]를 필요로 한다. 따라서 물질은 축복이지 저주가 아니다. 생명도약의 반대 경향성은 생명의 상승 경향성에 필연적인 균형추를 제공한다.
더욱이 존재의 일반적 경제[절약]에서 이 요소를 위하여, 따로 사유해야만 하는 절대적으로 환원할 수 없는 이 요소를 위하여, 결국 어떤 카테고리[범주]에 들어가지 않고 또 악이라 불리는 비합리적인 것을 위하여, 벩송에게는 더 이상의 여지[자리]가 없다. 따라서 변신론은 원리도 계기도 아닌 것을,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든 위격(기제)도 다이몬도 아닌 것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필연적이지 않다. 만일 벩송이 그런 문제를 제기했었다면, 그것은 아마도 스피노자의 정신에서였을 것이고, 잘못[악] 속에서 마니교적인 환상을, 무에 유사한 신화를, 혼돈에 비교할 수 있는 신기루를, 특히 유사(거짓)문제를 인정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 것도 위격(기저)이 없다는 것(빈 것 또는 백지상태)은 창조와 인식을 설명하기 위하여 제작적 지성에 의해 발명된 신화이다. 오히려 잘못(악)은 인간 형태적인 대칭의 신화이며, 마치 사람들이 말하기 좋아하는 대로 “벽난로 부품”의 강박에 의해 생성된 대칭의 신화이다. 언제 어느 시대나 테아이테토스 편이 말하듯이 악은 선에 짝을 이루어야 하고, 선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드라마 같은 이원론의 대립 쌍들과, 무에 대해 교조론자들의 위격화 된 제로(0)는, 똑같이 언어적인 추상작업들로부터 나온다. 공간과 시간이 전혀 평행적이 아니듯이, 또 미래는 되돌려진 과거가 전혀 아니듯이, 마찬가지로 악은 반대편에 속하는 선이 전혀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환원불가능성의 철학을 위하여 바른 편(à l'‘endroit, 이 세상)에 속하기 때문이다.
물질은 진실한 장애물이 아니고, 악은 진실한 원리가 아니다. 이와 평행하게 벩송에게서 죽음은 어떠한 비극적 의미도 아니다. 이런 점에 벩송은 러시아의 레온 체스톱(Léon Chestov, 1866-1938)과는 거리가 멀다. 체스토프는 톨스토이의 고뇌에 관해 명상했고, 죽음과 죽음의 계시에 대해 특별나게 예리하고 깊은 의미를 가졌다... 게다가 벩송은 톨스토이의 범신론처럼 항상 다시 태어나는 억제하지 않았었다. 창조적 진화 제3장 마지막에서, 벩송은 우리에게 죽음에 관한 승리에 대하여 과장되고도 점진적이며, 묵시록적인 희망을 우리에게 제안하였다. 벩송의 불멸화 작업은 이사야에 의해 이미 예고된 죽음의 죽음이 아닌가?에드몬드 플레그는 벩송에게 “죽음은 죽을 것이다”고 말하게 한다. 모든 비극적 정념(pathos)에 낯선 벩송은 죽음 속에서 비존재의 부조리성을 생각하지 않았으며, 이것임(l’ipséité)이 비존재에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이미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죽음은 초자연적 소명과 만남도 아니고, 우리들의 경력을 갑작스레 끝내게 하는 터무니없는 신체적 우연과 만남도 아니다. 죽음은 비존재이며, 충만의 철학은 죽음과 같은 아무 것도 아닌 것에 숨을 돌리면서 엘레아학파의 난문제들에 숨을 돌리게 하고, 죽음이 ‘우리와의 관계 없는 것’(οὐδὲν πρὸς ἡμᾶς)이라고 자기 방식대로 보여준다. 벩송의 사유는 단언컨대 시체 광기 또 시체사랑(시간 屍姦)에 대한 어떠한 뒤섞임(혼잡)도 없다. 죽음에 대한 사랑, 시체에 대한 취향, 죽음 애호(la thanatophilie), 장례에 대한 병적인 매료, 호이징가(Johan Huizinga, 1872–1945)가 근대시대의 여명에서 형성된 것을 아주 심도 있게 서술했다. 콤플렉스들, 또한 낭만주의시대에 전개되었던 이 모든 콤플렉스들, 이 모든 것은 비관주의적이고 양가감정적인 콤플렉스들인데, 여기에서 죽음을 향한 환심 사기는 묘하게 죽음의 고뇌에 연합되어 있다. 대단히 근대적인 이 콤플렉스들은 무의 취향만큼이나 벩송의 정신에도 낯설다. 「아가」편이 말하는 “정신적 사랑(la dilection)은 죽음만큼이나 강하다”. 그러나 생명(삶) 그 자체는 죽음의 아무 것도 아닌 것보다 더 무한하게 강하도다!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 하찮을 정도이다: 즉 생명은 죽음에 저항하는 힘들의 일체이며, 이로써 존재는 일반적으로 비존재에 관한 연속적 승리이며 다시 말하면 부인된 부정이고, 이는 마치 운동이 매순간마다 거부되어, 움직이게 되며 되살아나게 되는 부동성과 같다. 부활 또는 재탄생은 재생의 시기에 일 년을 한 번 더 맞이하는 봄철의 기적과 같은 것일 뿐만 아니라, 매순간의 연속적인 기적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매순간은 자기 방식에 맞는 봄날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람들은, 지속은 연속적 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이렇게 「시편」, 「이사야서」, 「출애굽기」의 살아있는 신을, 다시 말하면 다시 새로움이면서도 영속적인 봄철인 신의 관념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벩송의 신 그 자체는 연속적인 창조의 도약이며 매순간마다 경탄할만한 일이 아닌가? 각 순간을 앞선 순간에 이어가게 해주는 신에게 축복이 있기를! [심장에서] 수축이 팽창을 이어가고 팽창이 수축을 이어가게 하는 신에게 축복이 있기를! 나의 맥박의 박동이 매순간에 앞선 순간을 이어가는 신에게 축복이 있기를! 새로운 새벽과 새로운 봄철을 보게 해주는 신에게 축복이 있기를! 그러나 새로운 한해 새로운 아침이 더 이상 기적이 아니듯이, 순간에서 순간으로 연속하는 지속의 무한히 작은 새로운 시작은 기적이 아니다. 매순간의 영속화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다윗과 아브라함의 단정적 신에 의해 정당화되어 악령(le Malin génie, 장난꾸러기 도깨비)의 허수아비를 몰아내는데, 이는 마치 우리의 믿음이 제논의 소심함들을 걷어내게 하는 것과 같다. 그러한 의심들, 악몽들, 전율들은 끝났다. 하시드의 기도는 매일 새벽의 무궁무진한 은총(그대로 됨)을 위해 신에게 감사하지 않는가? 생명도약은 이 은총 그 자체이며, 영속적인 축복이다. 신은 생명이며, 최고의 실증성, 생명의 긍정(Oui vital)이며, 에드몬드 플레그가 모이즈 마이모니데스(Moïse Maïmonide 1138-1204)에 관해서 신을 상기했던 것과 같다. 즉 신은 정말로 부정의 부정이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신은 살아있는 신일뿐만 아니라, 또한 마치 예수 자신이 불같은 떨기나무(Buisson ardent)의 출현을 상기하면서 말했듯이 살아있는 자들을 위한 신이다. 이사야가 소리치기를 “살아있는 자, 살아있는 자, 너를 찬양하는 자가 여기 있도다!” 「지혜의 서」에서 사람들은 다음을 읽는다. “생명의 방황들에서 그렇게 열렬하게 죽음을 찾기를 그만 두세요” 좀 더 나아가면 “... 왜냐하면 신은 결코 죽음을 만들지 않기 때문이다. 신은 모든 것이 존속하도록, 모든 것을 창조했다.” 어떤 한 성 베르나르(un saint Bernard)의 금욕적 급진주의, 허무주의적 정신성, 시체 사랑은 여기서는 미리 단죄 받았던 것 같다. 따라서 더 이상 불면증도 고뇌도 없다. 솔로몬 왕이 우리에게 말하기를 “너는 달콤한 잠을 맛볼 것이다”고 한다. 그리고 이사야의 신은 “걱정하지마라. 나는 너와 함께 있다.” 걱정하지 말자. 왜냐하면 가장 매서운 모욕들조차도 마땅찮은 고통들조차도 하나의 시험일뿐이다. 욥이 당한 불의의 시험들은 이번에 부조리의 가장자리에, 즉 부조리함의 이편에 멈추었다. 시련에 빠진 그 인간은 죽을 때까지(usque ad mortem), 즉 배제된 죽음에 펼쳐있었다. 아브라함 또한 극단적인 한계에까지 시험 당했었다. 마지막 순간 바로 앞 순간에, 궁극적 일분의 바로 앞 일초의 순간에, 천사는 아브라함의 팔을 멈추게 했다. 마지막으로 불가능한 가설은 실현되지 않았고, 악마의 과장된 악은 마지막 순간에 가까스로(in extremis) 자기의 무 속으로 후퇴하였다. 불의는 마지막 바로 이전의 단어일 뿐이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마지막 바로 앞에서 상실되었다면 모든 것은 마지막에 구출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신은 노아(Noé)를 제외하고 모든 종의 인간을 전멸시켰지만, 말하자면 존재의 연속성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을 간직해 놓았다. 여기서도 또한 믿음은 정당화되어 있도다! 긴장의 극한에서 그리고 모든 것이 와작 부서지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 모든 것은 질서로 되돌아간다. 모든 것이 상실되었으며, 모든 것이 구출되었다.
헤브류의 유일신앙이 세상 내부의 윤리와 화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벩송의 신비주의(신비학)도 이편(l'en-deça)에서 즉 우리들 인간의 임무들이 있는 지상의 세계에서 인간을 뿌리내리게 한다. 벩송의 신비학은 1888년에 내적 삶의 정신집중과 인격적 생성의, 인격적 문화의, 인격적 심층의 성찰 안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마르셀 프루스트가 그렇게 남아있었던 것처럼, 믿음의 내밀함과 유아론 속에서 성숙되지 않은 채 남아있었다. 그 신비학은 행동에 점점 더 정확한 방향을 부여하고 있고, 그리고 가치들이 우리의 자유를 자석처럼 끌어당기는 것을 받아들인다. 벩송의 성질(la qualité)은 베를렌의 뉘앙스에, 프루스트의 중간 색조에, 드뷔쉬의 아주 약하게(pianissimo) 점점 적게 닮아 간다.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에서 벩송은 사색하는 자들이라기보다 행동하는 인간들, 기획실천가들, 선구자들, 자선가들, 조직가들인 신비가들을 항상 더 많이 선호하였다. 예를 들어 선전가인 성 바울, 세속의 문제들과 맞서는 수도원의 창설자인 성녀 테레사가 있다. 중요한 것은 전쟁과 산업시대가 인간들에게 많은 위급한 문제들을 제기할 때, 심장의 박동소리를 듣는 것, 장미의 냄새를 맡는 것, 차에 적신 마들렌 과자를 맛보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땅 위에 추방된 자가 아니다. 그리고 벩송은 인간의 지속은 낮게 평가하였을 모든 것을 거부했다. “지혜에 의하여 영원한 것은 땅을 토대로 하였으니. . .” 라고 솔로몬의 「잠언」이 말하고 있다. 인간의 지혜, 즉 기초를 다지고 건축물을 세우는 지혜의 반영은, 꽃향기 향수들을 냄새 맡는데, 생성의 생명 맥박을 진찰하는데, 내적 삶의 “멜로디”에 의해 요람의 흔들림에서 잠들게 내버려두는데 전념하는 인상주의가 아니다. 현자에게는 자신의 정념에 사로잡힌 삶의 일시적 단절들과 열정들과는 다른 근심들이 있다. 현자는 인간 조건을 변형시키기 위하여 노력한다. 알베르트 레프코비츠(Albert Lewkowitz, s.d.)가 말하기를 유대 신비학은 사회적 연관들을 위에서 조망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 연관들을 성스럽게 하기를 바란다. 따라서 그 신비학은 전투적[사회 변혁적] 행위와 양립할 수 있다.
이에 대해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은 약간 단순화된 대칭으로, 즉 서로 대립되는 두 언약들, 구약과 신약이라는 양면으로 된 표본으로 남아 있었다. 우리에게 신비적 도약의 역동주의를 이해하도록 하기위하여, 벩송의 중복주의(le duplicisme)는 개방 도덕을 닫힌도덕에, 개방종교를 닫힌 종교에 대립시켰다. 벩송에게서 복음은 개방 의식의 체제를, 율법은 닫힌 의식의 체제를 재현[표상]하는 만큼, (그러나 벩송은 이런 용어로 이것을 말하지 않았지만) 예언자들을 닫힌 의식과 열린 의식의 중간에 반쯤 열린 종교로써 어떤 것을 재현한다고 믿게 해야만 했을 것이다. “눈에는 눈”, “불에는 불” 동태복수법(le talion)의 정의가 말하듯이, 교환들 속에서 물물교환의 정의도 “소에는 소”, “암양에는 암양”이라 말한다. 이러한 것은 안티페폰토스(l'ἀντιπεπονθος)의 피타고라스의 정의, 그리고 라다만투스(Rhadamanthe, 저승의 한 재판관)의 상호성이도다! 따라서 율법의 폐쇄를 이어간 것은 예언자들의 반쯤 개방이며, 그러고 나서 새로운 동맹[새 소식]에서 복음적인 자애의 개방이다. 확실히 예수는, 자신이 완수(accomplir)하러, 다시 말하면 율법을 완전하게 하러, 예언자들의 말씀을 성취하러 온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이 완수 즉 완성(plérome)을 보충하여 보태기처럼 이해해야 하는가? 여기서 보충의 보태기란 진리에 대해 유한하고 불완전한 총체를 전체화하도록 해주는 것을 의미한다. 벩송은, 그 속에 획기적이고 혁명적이 새로운 동맹이 율법에게 부족했던 본질적 조각을 그 율법에게 덧보탠다고 믿었던 것 같다. 그 율법은 테두리[인민의 바닥]까지 채워져 있지는 않았다. 예수는 거기에 부족한 부분을 보태면서, 그 율법을 완성시키려 했을 것이다. 플레로마 노무 헤 아가페(πλήρωμα νόμου ἡ ἀγάπη, 사랑한다는 것은 율법을 완성하는 율법의 완성은 아가페이다. 자애(la charité)는 보충적 조각이며, 그 조각 덕분에 부분적 율법은 충만하게 율법이 되고, 그 충만 속에서 율법이 된다. 그런데 빠진 조각이 그렇게 부족하지 않도다! 크리스트 자신은 자기를 당황하게 하려고 한 바리세인들에게 대답하면서, 자기 자신의 고유한 메시지의 진수를 율법의 두 계율 속에서 요약한다. 하나는 자기의 전 가슴으로 신을 사랑하라고, 둘째는 자기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명한다. ‘완수하다’란 채우라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수많은 가르침들 중에서 모든 다른 계율들을 생성하게 하고 그것의 문자를 활성화하는 중심적 또 영기적(pneumatique)인 계율을 분간해 내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의 일반적 관념 없이, 살아있는 자애의 생생한 관념 없이, 이 가르침들의 세부사항은 죽은 문자(lettre morte) 이외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심장이 거기에 있지 않을 때 일어난 것이며, 그것이 성 바울이 말하고자 원한 것이다. 몇몇 크리스트교인들보다 더 겸손한 크리스트는 여기서, 새로운 동맹이 옛 동맹 안에서 먼저 형성된 것이며, 따라서 전래 없이는 절대적으로 되지 못한다는 것을 넌지시 암시하고 있다. 이 새로운 동맹은 오히려 새로운 조명이며, 위대한 발견물임을 밝힌다. 이 발견물은 계율들이, 계율 준수의 덤불 속에서, 깨닫지 못하고 지나칠 위험에 처해 있다. 이처럼 벩송에게서 산상수훈이 표현[표상]하는 갑작스런 변화는, 르와지(Alfred Loisy, 1857-1940)와 기뉴베르(Charles Guignebert, 1867-1939)가 이미 그렇게 가정했듯이, 예언주의와 율법 속에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사람들이 말하듯이 예수는 반쯤 열린 창문을 무한을 향해 크게 열려고 왔다. 창문은 열려있든지 또 닫혀있든지 이어야 한다! 그러나 벩송의 언어 자체로, 사람들은 열려진 순간만을 고려한다고 정당하게 평가할 수 있다. 열려진 순간 다시 말하면 질적인 의도는 무한운동이며, 열려진 각도에 상관하지 않는다. 동일한 방식으로부터 자애에 대해 아주 다른 질서로 전환이란 주는 동작[몸짓]이다. 이 몸짓은 보시[동냥]의 양의 크기가 얼마일지라도 전환이며, 선한 운동이며, 의도적인 역동주의이다. 왜냐하면 기부하는 의도는 기부액의 총액에 비례하지 않기 때문이도다! 이 산술적 역설에서 가난한 자의 잔돈은 은행가의 수표와 초자연적인 동일한 가치를 갖는다. 따라서 바울의 의도주의 그 자체는, 왜 크리스트교의 “개방”의 본질이 선지자의 반쯤 열림 속에 이미 함축되어 있는지를 이해하게 하는데 우리에게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사람들이 문을 조금이라도 열기만 한다면, 모든 것은 이미 완료되었도다! 왜냐하면 창문이 더 이상 닫혀있지 않는 순간부터, 창문은 이미 열려져 있는 것이기 때문이고, 의식은 우주의 무한한 평원들과 하늘의 무한한 해변들과 연관 맺고 있고, 난바다의 공기와 거기에 먼 수평선에서 실어 나르는 바람과 연관 맺고, 외적세계의 발산물들과도 연관을 맺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창문이 크게 열려있을 필요가 없다. 크게 열림 또는 반쯤 열림, 숫자와 정도의 문제, 달리 말하면 더 많고 또 더 적음의 문제이지만, 모 아니면 도라는 질적인 중대한 문제는 결코 아니다. 유혹에 사로잡힌 가장 덧없는 관심이 이미 큰 죄인 것과 마찬가지로, 사랑에 대한 무한운동은 처음 반쯤 열린 순간에 이미 완전하게 주어져 있는 것과 같다. 생겨나는 자애, 반쯤 열린 의식의 자애는 단번에 무한한 자애이다. 복음의 선량한 새소식은 벩송의 새로움 자체와 마찬가지로 준비되었던 새로움이며, 율법의 아주 긍정적인 충만 속에 이미 먼저 모습을 드러낸 새로움이다. 옛 동맹은 그 자체가 연속된 “충만(plérôse, πλήρως)”이 아닌가? 이리하여 솔로몬의 「잠언」 속에 무한한 용서와 은총의 초자연적인 불균형(비대칭)이 복수심에 가득 찬 속죄의 회로를 깨뜨리게 한다. 정의롭지 못한 자애는 우리에게 역설적으로 명령하기를, 악에 대해 선으로 보답하라고, ‘반대고통의 반대’(l'ἀντί de ἀντιπάσχείν)를 초월하는 다른 뺨을 내밀라고 한다. 고통을 위한 고통(Vulnus pro vulnere): 이렇게 반작용에 의한 작용의 수평화와, 수동성의 썰물에 의한 능동성의 밀물의 중성화는 그 자애를 요청했다. 사랑의 행동이 갑자기 한계를 넘어가면서, 보상받는 반성들을 청산하고, 보복들의 저주받은 순환을 단번에 부셔버린다.
성서의 의식은 우선은 너비(l’étendue) 속에 한편으로는 공간 속에 다른 한편으로는 시간 속에 이미 무한히 개방되어 있다. 이것은 확실히 신앙의 보편성을 만들려는 신앙의 선전이 아니다. 신앙의 보편성이란 항상 제한된 확산이다. 그러나 헤브류 유일신앙의 신이 특권적인 유일한 민족의 신도 아니고 질투심 많은 배타주의[편협성]을 표현하는 것도 아니다. 이사야는 인류 전체의 연맹[연합]을 위해 말했고, 그가 우리에게 알린 평화는 전 세계적인 평화이다. 선택된 인민 그 자체는 영원히 그리고 보편적으로 인간적 진리의 대변자로써, 거대한 인간적 고통의 고통 담당자로써만 선택되었다. 신은 그 인민에게 특별 배려하는 어떠한 취급도 예약해놓지 않았다. 노에 고트리프는 유대주의의 “가톨릭 교리”가 로만 가톨릭주의의 “가톨릭 교리”보다 훨씬 더 개방적이라고 감히 말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구원을 위하여 어떠한 고백적인 조건도, 어떠한 규정된 사도신경도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탈무드와 마이모니데스는 율법 속에 들어있는 도덕적 원리들의 준수가 이방인들에게조차 영원한 삶을 보증한다고 정확하게 말한다. 유대주의가 고백적일 때는, 그것이 가톨릭주의를 모방하고, 다른 고백들과 대립되기 위하여 그 자체 안에 스스로 갇힌 경우이다. 이사야는 인간들의 언어가 어떤 것이든지 모든 인간에게 호소한다. 따라서 그의 메시지는 스토아 학자들의 메시지처럼, 보편주의의 메시지이다. 즉 박애주의의 메시지이며 형제자매애(philadelphique)의 메시지이다. 그러나 스토아의 세계시민주의는 선지자의 상위 민족주의가 아니라 현자의 이성적 인도주의이다. 여기서 현자는 지상의 조국과 천상을 연대할 줄 알고 그 조국의 자치를 근심하고 있는 자이다. 또한 예언자적 상위 민족주의는 정열적이고 황홀경에 취한 천재의 그것이며, 역설적으로 또 초자연적으로 그의 모든 형제들에게 열려 있는 천재의 그것(상위 민족주의)이다. 「신명기」의 신은 민족성도, 인물도 수용하지 않고, 다시 말하면 인간에 대해 인간적인 것을 특별하게 하는 차이나고 우연적인 표시[징표]들에 어떠한 고려도 하지 않는다. 탈무드는 이 동포애의 보편적 특성을 주장하고, 그리고 피조물과 신과의 유사성에 근거하고 또 모든 인간들의 신적 기원에 근거하고 있다. 옛 율법은 여러 번 되풀이하여 그리고 아주 각별한 배려와 더불어 이방인을 형제처럼 대접하라는 책무를 강조한다. 이것이 사용하는 논증은 너 자신처럼(Comme toi-même)에, 즉 「레위기」의 황금률에 닮았다. 다시 말하면 공통의 인간들에게 숙명적으로 있는 황금률에 닮았다. 이 논증은 이기주의를 이타주의로 방향전환을 위하여 자신의 관심의 현(絃)을 진동하게 한다. 즉 당신들 자신들도 이집트에서 이방인들이었고, 당신들은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다. 따라서 상황들의 유사함을 회상하세요. 이방인을 마치 당신들이 대접받고 싶었던 대로 대접하세요. 이런 외국인 애호는, 이것이 아주 간접적이라 할지라도, 이 인민에게 보편주의의 자연적 형식이다. 그런데 적들은 그 인민을 세계 시민주의로 항상 고발했으며, 그 인민 자체는 추방이라는 태고적 경험을 가졌다. 그리고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추방들은, 이집트에서 포로, 바빌론에서 포로, 고향상실(diaspora), 스페인에서 추방, 유형들... 당한 인민, 뿌리 뽑힌 현존에서 아주 잘 특수화된 이 인민은 민족들 가운데 방황하도록[떠돌도록] 단죄 받은 것 같다. 어떻게 이스라엘이 보편성의 소명을 갖지 않을 것인가? 적들을 사랑하는 보편적 인민은 두 번이나 무관심의 도제훈련을 했다. 왜냐하면 그 인민은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자를 거꾸로 사랑하고, 그리고, 그는 사랑받을 만하지 못한 자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공간의 개방 이후에, 시간의 개방이 또 먼 미래의 개방이 있다. 희망의 시인 에드몽 플레그는 찬탄할만한 저술에서 이미 도래했던 메시아의 종교와 앞으로 올 메시아의 종교를 대치시켰다. 전자의 종교에서 본질적인 사건은 다른 질서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사건이며, 후자의 종교는 아직 오지 않은 메시아이자 그 이후에도 여전히 기대되는 메시아의 종교이며, 여기서 본질적 사건이자 강조점은 미래에 있다. 전자의 종교는 글자 그대로 메시아적이다. 확실히 모든 뉘앙스들은 이점에서 고려하면 크리스트교의 내부자체에 현존한다. 예를 들어 프라보스라브 수도원의 크리스트교는 가톨릭보다 더 묵시록적 희망이 스며들어있고 더욱 더 종말론적인데, 이 가톨릭은 크리스트의 귀환[부활]에 그리고 “둘째 도래”에 아주 특별한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고, [곧] 올(ἔρχόμενος, ἔρχομαι=venir) 신에게 존경을 한다. 키티에쥬(Kitiège)의 볼 수 없는 도시의 숭고한 전설은 그것의 증거이다. 그러나 이미 성서의 예언주의 속에 의식은 미래 예루살렘의 희망에 열정적으로 열려 있었다.
벩송 그 자신에게서 의식의 무매개적 자료들에 관한 시론과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 사이에 포함된 간격은 과거에서 미래로의 거리를 표상한다. 의식의 무매개적 자료들에 관한 시론의 지속은 특히 보수적이고 “과거주의적”이다. 그런데 그것의 기능은 추억들을 저축하는 것이고 과거를 현재 속에 축적하는 것이다. 따라서 강조점은 뒤에[현재에] 있다. 암묵적 간과법(la prétérition)은 미래화[작업]을 능가한다. 물질과 기억에서 또한 지속은 눈덩이를 이루고, 과거를 현재 속에 축적하는데 쓰인다. 틀림없이 물질과 기억이란 책은 행동으로 방향을 돌렸다. 그러나 의식의 무매개적 자료들에 관한 시론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과 일치하여, 과거의 제단을 세운다. 이 과거는 회고적이지는 않지만 적어도 모든 추억들에 대해 뒤돌아봄과 복구[재활용]을 함축하고 있다. 창조적 진화 특히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은 미래로 향해 있다. 미래에 일어날 생성은 연속된 도래가 아닌가? 생성이란 항구적 변질에 의해 다른 어떤 것을 생성하지 않는가? 생성의 강한[뛰어난] 시간은 추억이 더 이상 아니고 미래(l’avenir)이다. “뜻밖에 오는 것(le survenir)”은 “암묵적으로 오는 것(subvenir)”을 단호하게 억제한다. 그 생성은 진실한 자기 소명을 재발견하고, 그것의 이름은 미래화 또는 혁신이다. 소명이란, 전통적으로는 부추김으로 체험한 것인데 반하여, 부름을 받았다고 느끼는 것(무엇)이다. 사람들은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이 닫힌도덕에 대해 말한 것을 이 과거에 적용하면서 다음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의식의 무매개적 자료들에 관한 시론에서 강조는 압박[압력]에 관한 것인데, 또한 이 압박은 사회적인 것이 전혀 아니었다.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에서 역동적 도덕의 부름에 응답하는 인간은 마찬가지로 미래의 끌림에도 동시에 응답한다. 그 미래는 ‘배후로 부터의 힘’(vis a tergo)가 아니라 앞으로 위치할 이상적인 것이다. 공중부양이 중력작용보다 우세하다. 따라서 인간은 의무를 갖고, 이 의무는 행해야 할(à faire) 사물들의 지대를 지시한다. 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들 작업(일)에 의존하는 다가올(à venir) 사물들의 영역을, 우리가 원했다면 단지 있을 수[될 수] 있을 존재-앞 부분을 지시한다. 의무는 나에게 부과된 미래이다. 지속은 추억들의 쌓기도, 추억들의 축적도, 더 이상 아니다. 그 지속은 창조와 열망만큼이나 풍부한 것도 아니고 정복만큼이나 진보도 아니다. 창조적 진화의 말의 질주들, 기병대의 기습들, 정복하는 모험들은 고독자의 심정적 양모로 된 긴 양말을 낮게 평가한다. 온도약(l'Elan)의 관념 자체는 영웅적 지혜의 가능성을 확립하도다! 이리하여 성서에서 시간을 가로지르는 틈처럼 무한한 미래화에 의해 잘 재단된 개방[열림]은 바클로 채워진 순환 그 자체를 몰아낸다. 희망(elpidien, [ελπίδα])의 원리는 절망을 몰아낸다. 「전도서」에 대립되고 또 시간을 어둠, 막다른 골목, 출구 없는 길로 만든 「욥기」에 대립되는 「지혜서」에서, 비관주의는 악한들에게 부여되었다. 장미의 향기를 들여 마시고 매일매일 관능적 쾌락을 모으고, 순간순간을 살아가고, 전혀 걱정 없이 매순간을 향유할 수 있기 위하여, 소위 말해 지속은 힘이 없다고 그리고 생성은 미래에 의해 집중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악한 자들이며 향유자들이다. “허영들 중에 허영!”이로다. 「잠언」과 「지혜서」의 합리적 낙천주의를 위하여, 「전도서」의 깊은 울증이 약간은 변명에, 불성실[불신앙]의 마키아벨리적인 궤변에, 나쁜 의지의 구실에, 행실 나쁜 자들의 허무주의적 알리바이[현장부재 증명]에 닮았다. 일하려는 의도도 어떤 것을 행하려는 의도도 없는 자는 생성이 허영들[헛것들] 중에 헛것, 즉 부조리들 중의 부조리라고 믿기를 좋아할 것이다. 또한 열려진 미래는 없고 닫혀진 지속과 순환만이 있다고, 그리고 끝은 우리를 시작에 데려가고 모든 노력은 생산성이 없다고 믿기를 좋아할 것이다. 그 인간은 무턱대고 태어난 존재, 즉 무와 망각에 불가역적으로 바쳐진 존재가 아니며, 비존재로부터 분간할 수 없는 존재가 아니다. 마치 그가 영원히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를 것처럼 어느 날 [미래에] 있게 된 존재가 아니다. 의미로 가득차고 지성성이 넘치는 세계, 창조적 지혜와 건설적 신중함이, 즉 우주론적이고 신중한 이중 긍정성이 성서 속에 재현되어 있도다! 창조적 시간은 이렇게 가치를 회복시켰고, 벩송에서도 마찬가지로 가치를 회복시킬 것이다. 만일 벩송의 자유가 마치 르끼에에게서 처럼 현기증 나고 임의적인 무차별이 아니라면, 그러한 이유로 벩송의 자유는 선례들도 선행자들도 없는 창조력으로써 더 이상 감성적인 총체화도 아니고, 개인적 삶의 이기적인 깊은 연극도 아니다. 그 자유는 허공 속에서 발설된 듣도 못한 결단(fiat)이 아니며, 그것은 방향성 없는 진정함(솔직함)도 아니다. 자유는 하나의 상스(un sens)이며, 말하자면 의미와 방향을 동시에 뜻한다. 자유는 충만의 세계에서 꼼꼼한 자유이며, 이 자유에 초월적이고도 유쾌한 임무들이 과해진다. 부조리하고 무상인 놀이와는 반대 그 자체이다. “Ἔσται γάρ ὁ οὐρανός καινός καὶ ἡ γη καινή”(하늘이 새로울 것이고 또 땅도 새로울 것이다)라고 이사야가 말했다. 따라서 예전의 사물들을 되새김질 하지 마세요! 사랑이 “이에는 이”라는 폐쇄[닫힘]을 부셔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유는 과거화 된 미래와 옛날의 새로움이라는 “허영들 중의 허영”을 낫게 한다.
벩송에게서처럼 성서에서 인간과 시간의 연관은 긍정적 연관이다. 인간은 자연에게 그리고 사회에게 ‘그렇다'(oui)고 말한다. 그리고 물리적 세계에도 피조물인 형제자매들에게도 ‘그렇다’고 말한다. 이처럼 시편들의 성스런 제식을 집행하는 정신[다윗]이 아마도 설명될 것이다. 이 영감 받은 구절들은 은총을 입은 행동의 찬송이며, 시편의 저자[다윗]은 하프를 켜면서 창조주와 그의 작품들의 영광에 맞게 찬송을 지칠 줄 모르고 노래하였다. 창조주의 영광은 모든 창조 속에 기입되어 있다. 그렇다. 모든 것은 신적 영광을 이야기 하고, 땅도 하늘도, 태양의 빛남도, 별들의 궤적도, 혜성들의 궤도와 주의 천사들을 불로 된 문자로 쓰고 있다. “할렐루야! 천상의 반구에서 영원한 자를 찬양하세요. 땅의 모든 너비에서 영원자를 찬양하세요.” 그 인간은 그가 본 모든 것에, 들판에서 수국에게, 벚찌나무의 개화에게 ‘그렇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밤의 경의로움들을 똑같이 축하한다. 시편의 찬송[찬미]는 변신론처럼 일반적인 조화에 대해 힘들인 정당화가 아니다. 왜냐하면 신학자의 변신론은 아주 적게 자발적이며, 아주 설득력 없는 변호사가 아주 적은 설득력으로 변호하는 것과 같다. 라이프니츠는 너무 과도하게 추론하여 우리의 세계가 가능한 세계들 중에 최상의 세계라는 것을 진실로 믿을 수 없게 한다. 그의 낙관주의는 창조된 사물에 열정적인 가맹을 표현하기보다 오히려 우리에게 개평[진 자에게 주는 위로금]을 제공한다. 다윗은 간접적 변호들도, 우주론적 시련들도, 믿음에 부차적인 이유들도 필요하지 않다. 빛을 발하는 광채로서 신은 빛을 받는 광채 속에서 전적으로 현재로 있다. 따라서 신의 영광을 빛으로 볼 수 있는 가능성에다가 연결하는 것은 무매개적 통찰(une vision)에 의해서이다. 창조라는 성스런 의식의 경이로움 앞에서 피조물의 감탄은 무엇보다도 신뢰와 무상[보시]를 표현한다. 시인 알렉시스 톨스토이가 말하듯이 나는 당신들, 즉 숲들, 계곡들, 전답들에게 축복을 내린다. 「시편」 제19장은 “천계들은 신의 영광을 이야기하고, 하늘은 자기의 손의 작품을 공포한다. 낮은 그날에 그것의 이야기를 만들고, 밤은 그 밤에 그것을 인식하게 한다.
그 인간이 우주에게 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것 일반에게도 ‘그렇다’고 말한다. 이웃의 보편적 회복, 이웃에게 원조[품앗이]는 본질적으로 성서적 관념들이다. 심지어 모세오경 속에서, 율법은 가장 공손한 모든 피조물들을 환대한다. 창피당한 자들과 모욕받은 자들의 긴 행렬은 - 과부, 고아, 가난한 날품팔이꾼 - 복음서가 새 소식을 알리기 앞서서 율법의 책들에서 차례차례 지나간다. 좋은 새 소식은 구약 속에 알려졌으며, 이 새 소식은 고민에 빠진 자들에 대해 일반적인 권장이다. “동정심(compassion)", “궁휼(miséricorde)”, “용서(pardon)”, “연민(pitié)“ 같은 단어들은 율법 속의 모든 문단 속에 나타난다. 이런 면에서 토라(Tora)가 ”복음”이라고 우리가 감히 말할 것인가? 「출애굽기」에서 주(主)는 “나는 선하고 동정에 넘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예언자 이사야에 따르면, 모든 창피당한 자들과 모욕 받은 자들은 신의 친구들이다. 욥의 신은 강한 자에 대항하는 약한 자를, 부자에 대항하는 가난한 자를 보호한다. 에드몽 플레그가 이것을 주목하였다: 자애와 정의는 근대정신에서는 따로 떨어져 있지만, 성서에서는 혼합되어 있다. 「레위기」는, 마치 사도들이 그렇게 말하듯이,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말했다. 너 자신을 너의 친구처럼도 아니고, 너의 친구를 너 자신의 부속물처럼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언어이기 때문이며, 다시 말하면 “다른 자아 자체” 즉 다른 자아(Alter ego)의 철학자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이기주의의 단순한 완곡어법이 이 특별한 이타주의에서, 실체적이고 부속적인 에고(égo)가 먼저 주어졌다. 다른 것들(타자들)은 핵심인 에고 주위에 마치 위성들처럼 중력을 받고 있고, 이 타자들은 에고가 자기 소유들을 점점 둥글게 만들 때 마치 부속물 또는 첨가물들처럼 에고에게 덧붙여진다. 냉정한 친구, 게으른 친구, 가구 또는 도자기 등은 또한 일거리를 만들 뿐이다. 「레위기」의 ‘너 자신처럼’은 “physiciste(신체주의자)”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황홀한” 것이고, 소위 말해서 기적적이다. 이것은 전복된 “다른 자기”(Allos Autos)이로다! “당신의 친구를 마치 당신이 당신 자신 자체를 사랑하듯이 사랑하라”는 의미는, 나는 나의 친구와는 다른 나 자신이 아니다 라는 것을 의미한다. 자아는 자기의 사랑을 받는 자와 다른 자기가 아니다. 왜냐하면 나 자신의 자아 자체가 나의 이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아는 자기 형제를, 마치 자아 즉 사랑하는 자가 현존하지 않기나 했던 것처럼, 사랑한다. 그런데 그 자기는 인격적으로 자기의 “다른[자아] 것”이 된다. 따라서 에고는 어느 정도 자기 이기심으로부터 떨어져 나온다. [이중화의 자기 돌쩌귀에서 총체적으로 나와서] 화를 버럭내고서, 자기 친구 속에서 바깥으로 향하게 되면, 자아는(le moi)는 사회적 자기(soi)가 더 이상 아니다. 성서의 이웃은 자기 이름 감히 말하지 못하는 부끄러운 타자애의 “다른 자아 자체”가 더 이상 아니고, 오히려 그 이웃은 진실로 자아 자체와는 다른 이웃이다.
벩송을 따른다는 것, 그것은 정신처럼 열린도덕이 아니다. 왜냐하면 완전히 열린도덕은 이미 다시 닫혀졌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한 번 열린도덕은, 우리가 그것을 계속해서 열고 끊임없이 다시 열지 않는다면, 닫힌도덕이 다시 되기 때문이다. 항상 운동 중인(in motu), 열고자 하는 의도가 중요하다. 선지자들은 전문적인[직업적인] 아름다운 영혼들의 환심 사기와 행복하게 잘 만족하는 선량한 의식들의 환심 사기에 반대하여 쉬지 않고 투쟁한다. 여기서 환심 사기(자기만족 complaisance)란 장미처럼 활짝 피는 것 또는 공작처럼 날개를 펼쳐 뽐내는 것을 의미한다. 으스대며 걷는 것, 그것은 열려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리하게 만족하는 자아의 탁월함 속에서 자기 만족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연에 의해서 모든 "으스대며 걷기“의 거부가 아닌가? 또 이것은 사람들이 벩송의 ”운동주의“라고 부르는 아주 선량한 의식을 고려해보면 깊은 아이러니가 아닌가? 현실태로써 성스런 상태는 없으며, 인간의 노력은 항상 다시 시작하는데 있다. 이런 점에서 짐멜의 상대주의가 이해될 것이며, 또한 아인슈타인의 비순응주의, 벩송의 시간주의도 이해될 것이다. 예레미야가 말하기를, 인간들은 반쯤 열린 웅덩이를 파기 위하여 생생한 물의 샘[원천]을 포기했다고 한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인간들은 우스꽝스런 우상들, 금과 은으로 된 입상들, 돌로 잘 재단된 이미지들을 위하여 살아있는 신의 생생한 물을 포기했다. 열정적으로 선지자들과 부족장들이 항상 다시 생겨나는 우상의 유혹을 몰아내었던 전대미문의 설명할 수 없고 지칠 줄 모르는 그 열정은 우상광(우상믿음) 그 자체의 억누를 수 없고 변덕스런 성격에 비례한다. 그 인간들은, 사람들이 혼자 있게 내버려 두자마자, 쇠를 녹여 만든 송아지들과 금으로 된 당나귀들, 조잡한 물신숭배, 인형들과 동물숭배들(totems)을 어리석게도 숭배하기 시작했다. 우상의 유혹은 어리석은 인간의 영구적 경향인데, 한편으로 피상적 겉모습의 숭배에 빠지는 경향이며, 다른 한편으로 다자(多者)의 조각내기에 의해 시도되게 내버려두는 경향이며, 결국에는 죽음의 타성에서 재발(la rechute)을 수용하는 경향이다. 도약이 모자라는 게으른 자는 생명의 운동을 더 이상 따르지 않고, 본질이 통일성을 더 이상 추구하지 않고, 볼 수 없는 전도의 심층 속에 더 이상 내려가지 않는다. 따라서 그 자는 삼중으로 시시한 인간이 된다. 다른 한 편 만일 도약(ὁρμή, élan)없는 어리석음의 고유함은 길 중간에 멈추는 것이며, 이미 도달된 층계참의 수평 위에 행복하게 자족하는 것이라면 사람들은 미소 짓는 현상의 유혹, 다자의 유혹, 부동성의 유혹이 인간적인 부질없음의 중요한 세 가지 형식일 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어리석음의 중요한 세 가지 형식이다. 이 성장한 어린이는 잡다한 생각의 현상에 미소 짓는다. 이것은 우리들의 “저능한 어리석음”이며, 우리들의 신경쇠약이며, 따라서 우리들의 연약함이다. 이런 어리석음과 부동성, 신적인 것의 가루 만들기[다자로 만들기], 주변의 껍질에 대해 유혹되는 끌림을 설명해 준다. 매 순간에 살아 있는 물들은 괴어 있어서 썩어가는 늪지대 속에서 사라지는 경향이 있다. 또는 만일 사람들이 다른 이미지들을 선호한다면, 신앙의 생생한 물은 우상숭배로 얼음이 되는 경향이 있다. 우상숭배는 영원한 인간적 시시함(하찮음)의 이름이다. 이 우상숭배는 우리에게 미소를 덕목으로 삼게 하고, 장미의 향기를 진리로, 화약을 신으로 간주하게 하며, 또 우상숭배는 미신을 믿는 자를 자기보다 거의 조금 덜 어리석은 짐승들 앞에 무릎을 꿇게 한다. 향연과 폴리테이아 제6권 속에서, 플라톤의 변증법은 또한 순진한 자를 감격하게 했는데, 즉 자기의 상승을 중단시키고, 층계참에서 잠들고, 현상들에서 멈추고, 빛나는 성스런 그림들에 의해 현혹되게 내버려두고, 메논 편이 ”떼거리“라고 부르는 것에 의해, 다시 말하면 다자(le pluriel)에 의해 시도되게 하는데 여전히 알맞은 그 순진한 자를 감격하게 했다. 소크라테스는 게으른 자들 각성한 채 있도록 유지해주는 주의 깊은 원리인데, 그들이 더 높이, 더 멀리, 또 항상 볼 수 있는 것 저 넘어로 가도록하기 위해서이고 그리고 다자의 유혹에도 현상의 유혹에도 양보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플라톤이 우리에게 경계하게 한 ”몇몇(plusieurs)"은 다신론의 ‘다자’가 아니다. 이어서 다자에 환심사기는, 그것의 유혹이 비록 신용할 수 없을지라도, 소위 말하는 죄[타락]이 아니라 성서 속에 단죄된 것인데, 그것은 이미지들에 대해 신성 모독적이고 이교도적인 경배이다. 작은 조각상 앞에 또는 작은 들보 앞에서 무릎을 꿇는 자는 신적인 것을 파기한다. 따라서 그는 진리의 바깥에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종교의 바깥에 있다. 동일하게 창조적 진화 에 따르면, 생명은 매 발자국마다에의 제자리에 맴돌기 하는 것이 시도되었다. 벩송은 우리에게 유기체들에 의해, 즉 생명이 창조하기에 성공한 걸작들에 의해 매료된 그 생명을 제시하였다. 생명은 저 넘어[저 세상]에 가지 않고서 이 걸작들에 만족하기를 요구한다. [이제] 우리 편에서 말해보자: 맴돌기의 유혹은 자기 방식에 따라 일종의 우상숭배이며, 그리고 생명성의 영구적 운동작업에 제동을 거는 이교도의 환심 사기이다. 예레미아가 말하기를, 인간은 돌과 나무를 찬탄하는데, 마치 돌과 나무가 인간에게 생명을 주었던 것처럼 말이다. 중산층화[부르주와화]되기에 굴복한 인간은 정신을 포기하고 문자를, 파악할 수 없는 모델을 포기하고 그것의 정태적 이미지를 택한다. 심지어 솔로몬 왕은 너무나 부자이고 너무나 권세가 있어서 다처제와 다신론에 빠졌다. 솔로몬 왕은 부르주아화 되어, 우상숭배 하는 만큼이나 어리석게 되었다. 솔로몬의 지혜는 생명의 운동과 접촉을 상실하고서 정신의 무한한 근심을 부인하고서, 제자리에 맴돌다가 그 자리 자체에 자기만족에 빠졌다.
예언자들은 정신의 지치게 하는 요청을 냉혹하게 신뢰하고 있었다. 사도 바울에 앞서서 이사야는 입과 심장을 대립시켰고 준수해야할 의례를 영혼[기운]의 연민에 종속시켰다. 단순성에 호소, 정신의 알몸에 그리고 박탁에 호소는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에서 매우 감동적인 메아리(반향)을 발견할 것이고, 이 호소는 「잠언」과 「욥기」의 항구적인 요청이다. 퀴니코스 또는 스토아 학자들에 앞서서 예언자들은 매질했다. 소유의 비대함을 열광적으로 전개하고 사치의 과부하 현상들에 짓눌리는(pléonexiel) 를 자기의 소유물들을 내려놓는 그리고 비본질적이고 기생적인 모든 현상을 가볍게 하는 소유자는 심층에 초대되었다. 그 하찮은 자[인생무상자]는 자신의 강력한 대부로부터 보다 깊고 보다 준엄한 목소리를 듣기 위하여 자신의 보석들, 금 그릇들 화려한 은제품들을 망각한다. 이 단순한 심장의 목소리는 분리되어 본질화 되어서, 볼 수 없는 통일성과 여러 색깔의 현상들 이래 감춰진 신적인 불가사의에 대해 우리에게 말한다. 이 목소리는 우리에게 기만(la déception, 환멸)에 대해 경계하게 한다. 솔로몬은 값비싼 보석과 권력의 희생자로써 어느 정도에서는 이 환멸의 상징이다. (49TLJ) (수정 보충, 49U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