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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화의 방법(La méthode de dramatisation, 1967)」
들뢰즈, in 프랑스 철학회 회보(Bulletin de la Société française de philosophie) 613호(1967년 7-8월호) pp. 89-118.
in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 (박정태, 이학사, 2007), pp. 486-508.
- L'île déserte et autres textes (2002), 제14장(pp. 131-162) 토론 포함.
- 이 텍스트는 차이와 반복(1968)에 재수록.
* 또 다시 읽으면서, 이 논문이 들뢰즈의 심층의 토대와 생성을 잘 드러낸 논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벩송 전기를 쓰던 중에 세상을 떠난 슐레즈(Philippe Soulez, 1943-1994) 교수는 들뢰즈의 “벩송에서 차이의 개념작업(La conception de la différence chez Bergson, 1956)”을 높이 평가하였고 전기를 쓰는 동안에도 이 논문을 가방에 들고 다녔다고 한다. 그런데 들뢰즈 사상의 핵심을 이해하는 데는 이 논문이 제일이다. 들뢰즈가 벩송의 계승자로서 본다면, 들뢰즈 자연과 심층을 같은 위상으로 보았고, 벩송에서는 자연의 역동론이 자발성이라고 존재론적으로 다루었다면, 들뢰즈에서는 개체 또는 주체의 역동론이 생명체의 생성과정이라고 다루었다는 점이다. 생명체의 내부에서 다양체라는 점을 역동론의 여섯 과정들을 규정하면서 세분화의 길을 간다는 것을 밝힌다. 이런 과정의 전개는 철학사에서 새로운 관점의 영역들에 펼쳐질 것이고, 타학문과 연결도 쉬울 것이다. 아마도 푸꼬는 자기로서는 하지 못한 영역확장에 대해 들뢰즈가 하고 있으므로, 다음 세기는 들뢰즈의 세기가 될 것이라고 하는 의미 깊은 논평을 남겼다.
다양체가 존재적 근거를 제기할 뿐만 아니라, 과정이 역동적이다. 이 과정의 전개에서 두 속성이라는 전통적 설명을, 다양한 갈래로서 현존적 실재성으로 설명할 수 있다. 게다가 현실화에서도 전통에서 개체들의 양태들로서 물체의 성질들과 달리, 힘과 작동도 물체처럼 작용과 반작용을 보태어 속도와 강도 등으로 달리 설명할 수 있다. 그런 같잖은[같지 않은] 설명들이, 심층, 표면, 상층이라는 구도로서 잘 보여준다. 이 구도는 전통적인 종교의 삼위격 과는 전혀 달라, 차히를 생산하고 세분화를 드러낸다. 이러한 차히(세분화)의 생성과 전개는 소위 말하는 사회체와 국가체를 표면 위에서 기계들의 연접, 이접, 조합 등의 방식으로 설명하려 든다. 표면의 생성에서 드러나는 토지와 기계들 사이의 여러 연관들은 지층적이고 위상적이며, 생태계와 환경계(영토계)를 만들어 낸다. 그 속에서 개체로서 인간의 역할은 주체로서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만들어간다.
들뢰즈가 이렇게 주체 또는 개체를 다룸으로서 토지영역과 사회 생태에서 구체적이고 확장적인 사회와 국가 모습을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왜 중심점을 두는 ‘폴리스’의 구성(톨)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 ‘노마드’의 확장(결)이 있을 수 있는지에 대해, 다음 차례의 주제로서 문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가상적 또는 상징적 현존이 존재의 지위를 지니고서, 상층에서 명령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국가와 자본은 무엇일까? 그 상징(기호)의 체계를 움직이는 군주 또는 대통령이 진정으로 주체일까? 또는 유령주식을 실재하는 것으로 움직이게(작동하게) 하는 자본가(또는 인공지능)가 어떻게 표면과 심층을 지배하는 주체로서 작동할까? 왜 노마드가 전쟁기계이며 투쟁과 전투에 의해 자신의 모습을 만들어간다. 이에 비해 전쟁을 치루는 국가와 자본이 무엇을 실행한다고 생각하는가? 정복을 통해 노예화하듯이, 공포와 억압(노예화)를 통해 지배하는 방식을 만들었고 또한 세계적으로 만들고 있는 중이다. 이 자본과 국가에게 투쟁하고 전투하는 자가 노마드이다. 말년에 산수갑산으로 들어가 민중관 더불어 산 스님 경허(鏡虛, 1846-1912년), 개마고원에서 머리 기르고 어린이애들 가르친 스님 용성(龍城 1864-1940)이 노마드이며 전쟁기계인데 비해, 문경 골짜기에서 애들 가르치는 것을 팽개치고, 전쟁에 가담하려고 혈서를 쓴 박정희는 제국의 주구였다. 그 잔재들이 아직도 인민에게 공포를 심고, 폴리스의 성채를 더욱 두껍게 만들고 있는 것이 검찰체이다. (52VKF)
* 왜 들뢰즈는 비극이나 희극과 같은 연극을 넘어서 드라마에 대한 관심을 표현하였을까? 삶은 단편이나 절편의 묶음이나 배치만으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생애에서는 우여곡절을 겪는 기나긴 과정이 있다. 즉 잘 들여다보면 일생은 하나의 방향이나 목적을 향한 길이 있었다기보다 벩송이 말하듯이 길은 매번 여러 갈래였지만 가는 길은 하나처럼 보이듯이 다른 길은 더 이상 갈 수 없었던 길이라, 우여곡절을 겪은 길이 필연적인 길, 운명적 길이었다는 것이다. 그 드라마에 비극과 희극으로 평가할 것이 없으며, 길을 가게하는 권능의 운동은 숙명적이다. 왜냐하면 생명체는 멈추는(정지) 순간은 이미 죽은 것이며, 그 순간은 영원히 남아있기는 하지만 더 이상 새로운 열려진(갈라진) 길을 제시하지 못한다. 삶은 재현으로서 무대에 올려지는 연극이 아니라, 작동하고 있는 권능의 흐름(지속)이다. 이 지속이 기억의 총체적 덩어리를 부풀려간다는 의미에서 회오리(나선형)로 커나간다고 비유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확장과 공명이 사라지는 순간이 열반에 드는 것이다. 죽음이전까지 매끈한 공간을 퍼져나가는 것이 온영혼일 것이다. (52SK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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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라마화의 방법(La méthode de dramatisation, 1967)」
*발표 내용 요약* (아래 전문이 있다.)
무엇인가?(qu’est-ce que?)[뭣꼬]라는 질문이 본질이나 이데아(Idée)를 발견함에 있어서 과연 적합한 질문인지는 확실치 않다. 사실 이데아(l’Idee, 이념)에 관하여 보다 중요한 것을 규정하는 일은 물론이고 본질을 발견하는 일에 있어서도, 누가?(qui?), 얼마나?(combien?), 어떻게?(comment?), 어디서?(où?) 언제?(quand?)라는 유형의 질문들이 더욱 훌륭할(meilleures) 수 있다. (131, 486-488)
시공적 역동론들(les dynamismes spatio-temporels)은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성질들을 지닌다.
1) 이 역동론들은 개별적인(particuliers) 공간들과 시간들을 창조한다. [개체화]
2) 이 역동론들은 개념들을 위한 종별화(de spécification)라는 규칙을 형성한다. 이 개념들은 역동론 없이는 논리적으로 분할될 수 없이 남아있다. [종별화]
3) 이 역동론들은 세분화(différenciation)의 이중 축면을, 즉 질적인 측면과 양적인 측면(성질들과 너비들, 종들과 부분들)을 규정한다. [세분화: 역동론의 중요한 특성(성격)이다]
4) 이 역동론들은 하나의 주체를, 오히려 “애벌레적(larvaire)”이고 “배아적(enbryonné)”인 주체를 허용하거나 지칭한다. [생성 또는 발전 주체화]
5) 이 역동론들은 어떤 특수한 극장(un théâtre special)을 구성한다. [극장화, 영토화(환경화)]
6) 이 역동론들은 이데아들(des Idées)을 표현한다. [표현화, 평면화]
- 이 모든 측면에서 역동론들은 드라마화(la dramatisation)의 운동의 모습을 그린다. (131, 488-489)
드라마화에서 이데아(l’Idée, 이념)는 구체화되고 현실화되며, 세분화된다(différencier, 차히 생산). 또한 이데아는 자기의 고유한 내용[내재성] 안에서 세분화의 두 측면과 상응하는 특성들을 이미 제시한다. 그러면 이데아는 그 자체로서 이미 차이[미분]적 연관들의 체계이며, 이 연관들(이상적 사건들)로부터 유래하는 특정점 또는 특이점들의 분포(répartition)이다. 말하자면 이데아는 현실적인 것 안에서 세분화되기(se différencier) 이전에, 충분히[완전히] 그 자체적으로 미분화되어(différentiée, 차이, 구별되어) 있다. 이데아의 바로 이 같은 지위가 이데아 자신의 논리적 가치를 고려하는 데, 그 가치는 명석-과-판명(le claire et distinct)한 것이 아니라, 라이프니츠가 그것을 예견했던 대로, 판명-모호(le distinc-obscure)인 것이다. 드라마화의 방법은 그 전체에서 우리가 출발점으로 삼았던 질문들[누가?(qui?), 얼마나?(combien?), 어떻게?(comment?), 어디서?(où?) 언제?(quand?)]에 어떤 의미를 제공함에 틀림없는 차이/차히(différent/ciation 미분화/세분화)라는 복합개념 속에서 제시된다.(131-132, 489)
*학회 회기 보고서* (번역되어 있지 않다.)
이 회기는 학회 회장인 장 발(Jean Wahl, 1888-1974)의 주제 하에 [1967년 1월 28일] 16시 30분에 소르본 대학 미술레 대강당에서 열렸다. (132, -) [번역문에 없는 문장이다]
장 발: 내가 질 들뢰즈 씨를 소개하지 않습니다. 당신들은 흄에 관한 책과 마찬가지로, 니체와 프루스트에 관한 책들을 알고 있으며, 또한 그의 훌륭한 재능을 알고 있습니다. 나는 바로 그에게 발표 기회를 주겠습니다. (132, -)
*발표 내용 전문*
[<철학사적 개관>]
질 들뢰즈: 이데아, 즉 이데아의 발견물은 질문의 어떤 유형과 구별할 수 없습니다. 이데아는 우선 질문들을 제기하는 방식에 따라 그런대로 상응하는 “대상성”(une objectité)이다. 이데아는 몇 가지 질문들의 부름에만 대답한다. 이데아의 질문이 ..는 무엇인가?(Qu’est-ce que...?)라는 형식으로 규저된 것은 플라톤주의에서 이다. 이런 고상한 질문은 본질에 관한 것으로 간주되고, 단지 실례나 또는 우발적인 것에 귀착하는 통속적 질문들에 대립된다. (132, 490) [이데아를 자연처럼 이중성으로 쓴 것은 벩송이 「끌로드 베르나르의 철학(La philosophie de Claude Bernard, 1913)」을 발표하면서 제시하였다. 만들어지는 자연과 만들어가는 자연이 있듯이, 이데아가 먼저 있고 모방이 있는 경우와 이데아를 만들어가 가는 과정이 있다. 생명과 영혼은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52VKD)]
따라서 플라톤주의는 주류질문들을 견해의 소수질문들에 대립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전자의 질문은 소크라테스가 본질 또는 이데아에 관한 질문처럼 항상 다시다루고 반복했던 그런 주류질문이고, 후자의 질문은 단지 서투른 노인들과 어린이들에게서든지 너무 능란한 소피스트들과 수사학자들에게서든지 생각하는 혼동된 방식들을 표현하는 질문이다. (132-133, 490)
하지만 ..는 무엇인가?(Qu’est-ce que...?)[뭣꼬]라는 질문의 특권은 그 자체로 심지어는 플라톤주의와 플라톤 전통에서도 혼란스럽고 의심스럽다. .. 사람들은 플라톤의 변증법이 보다 신중하고 적극적인 것이 된 이후에는 그것이 이전과는 다른 질문 형식들을 취하고 있음을 본다. 예를 들어 정치가편에서는 누가?를, 필레보스편에서는 얼마?를, 소피스트펴에서는 어디에?와 언제?를, 파르메니데스편에서는 어떤 경우에?를 보게 된다. (133, 490)
우리가 철학사 전체를 고려할 때에도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가지고 자기의 사유를 전개할 수 있었던 철학자를 찾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를 거론할지 모르지만, 특히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니다. 아마도 헤겔(Hegel), 오직 헤겔만이 이 경우에 해당하는 철학자일 것이다. 왜냐하면 정확하게 말해서 헤겔의 공허하고 추상적인 본질에 관한 변증법은 그 자체가 모순의 운동과 분리되지 않기 때문이다. .. 하지만 이러한 모순과 완전히 구분되어야 하는 전적으로 다른 방식(예를 들어 라이프니츠의 철학에서 그 윤곽을 보게 되는 방식)이 있다. 여기서는 비본질적인 것이, 그것도 오로지 경우 속에서만, 본질적인 것을 포함한다. .. 우리는 모순의 절차와 완전히 다른 이 절차를 제2화법(vice-diction)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이 절차는 이데아를 마치 하나의 다양체처럼 이리저리 다니게(parcourir) 한다. (133, 491)
마치 실사(substantif)처럼 사용된 다양체는 영역을 지칭한다. 이 영역에서 이데아는 그자체에 의해서 추상적인 본질보다 우발적인 것에 훨씬 더 가깝다. 그리고 누가?(qui?), 어떻게?(comment?), 어디서?(où?) 언제?(quand?), 어떤 경우에?(dans quel cas?)의 질문들과 더불어 규정될 수 있을 뿐이다. 즉 진실한 시-공 좌표를 그리는 모든 형식들과 더불어 규정될 수 있을 뿐이다. (133-134, 491-4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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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동론의 방법(드라마화): 장, 강도.>]
우리는 우선, 사물일반에 대한 특성적 또는 구별적 특징(le trait)이 어떤 것인지를 물어보자. 이 특징은 이중적이다. 왜냐하면 사물이 소유하는 질 또는 질들이 있고, 사물이 차지하는 너비(l’étendue)가 있다. (134, 492)
간단히 말해서 모든 사물은 이중 종합의 교차(le croisement)에 있다: 질부여 (qualification, 성별화) 즉 종부여(specification, 종별화) 와 분할(partition)의 교차, 즉 구성체 즉 조직화(유기화)에 있다. 질을 받치고 있는 너비 없는 질이 없으며, 질이 퍼져 있는 너비 안에서 유기적인 부분들 또는 점들 없는 종은 없다. 그러한 것이 세분화(différenciation)의 상호적인 두 측면이다: 종과 부분들이며, 종별화와 조직화이다. 이 두 측면은 사물들 일반의 표상[재현]의 조거들이다. (134, 482) [이 한 문단 속의 3부분은 역동론 여섯 가지 제기 중에서 1), 2), 3)을 설명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만일 세분화가 이처럼 보충적인 두 형식들을 지닌다면, 이런 구별과 이런 보충의 작용자(l’agent, 동인)는 어떤 것인가? 종별화 아래에서처럼 유기화(조직화)아래에서 우리는 시-공 역동론들 이외에는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한다. 문(embranchement), 강(classe), 목(ordre)의 가장 일반적인 특성들에서 속[genre], 종[espèce]의 특성들에 이르기까지 특성들은 이러한 역동론들 또는 이러한 발전 방향들에 의존한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세포분할의 부분화하는 현상들 아래에서도 사람들은 또한 “알의 역동”을 구성하는 역동적 심급들, 세포 이동들[미토콘드리아], 주름들, 함입들(invaginations)[내장, 귓구멍, 질], 늘어남들(etirements)[사지 또는 오지]을 발견한다. 이런 관점에서 전 세계는 알(un oeuf)이다. 만약 이런 분할이 하부[선험적 내부, 배아발생과정]-재현적인 역동론들에 의해 규정되지 않았더라면, 어떠한 개념도 표상 속에서 논리적 분할을 받아들일 수 없었으리라. (134-135) [생명 발생과정의 분화와 조직화가 없었다면 개념 발생은 없었다. 머리 속에서 상상해서 만드는 것이 아니다. (52UKB)]
사람들은 이것을 플라톤의 분할과정[설명]에서 잘 본다. 이 분할은 좌와 우의 두 방향을 따라서만 작용한다. 예를 들어, 줄을 사용한 고기잡이(낚시)의 예에서처럼, 유형의 규정들의 도움으로 “그물지기(싸서)-낚아 올리기(처서)”, “위에서 아래로 낚기-밑에서 위로 낚기” 두 방향을 따라서 작동한다. (135, 493) [플라톤의 소피스트편에서 고기잡이의 분류(분할)법.]
이 역동론들은 항상 장(場)[위상]을 가정하는데, 이 장안에서 역동론들은 생산되고, 이 장 박에서 역동론은 생산되지 않는다. 이 장은 강도적(intensif)이고, 말하자면 강도성의 차이들에 대한 깊이에서(심층적) 분배를 함축하고 있다. .. 우리는 정확하게 마치 경험의 조건처럼, 깊이 속에서 포함된 순수 강도성들을 생각해야만 한다. (135, 493) [배아의 생성과정도 경험이다. 인간의 경험의 총체는 어쩌면 35억년의 인간 종발달 과정 전체가 경험이며, 이것을 조건으로 인식이 성립하며, 개념이 생산된다. (52UKB)]
깊이는 너비없는[지속하는] 순수 공간체(pur spatium)의 권능(puissance)이다. 강도성은 차이의 권능 또는 비동등 그 자체의 권능일 뿐이다. 각각의 강도는 이미 차이이고 E-E’ 유형의 차이이며, 여기에서 E는 이번에 e-e’로 귀착되고, e는 ε-ε’ 등등으로 된다. 그러한 강도적인 장은 개별화[개체화]의 환경(un millieu)를 구성한다. 그런 이유로, 개체화는 길어지는 종별화(spécification prolongée, specie infima)에 의해서도 부분들의 구성 또는 분할(composition ou division de partie, pars ultima)에 의해서도 작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상기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135, 493-494)
개체화는 강도 있고(intensif), 모든 성질들과 종들에 의해서, 체계를 채우고 전개하려는 모든 외연들과 부분들에 의해서 가정되어 있다. (135, 484)
또한 강도성은 차이[차히]이기 때문에, 강도성의 차이들은 소통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차이를 차이와 연관시키는 차이의 “세분(différenciant)” 같은 것이 필요하다. 그 역할은 사람들이 어두운 예고자(le precurseur sombre)라 부르는 것에 의해서 유지된다. 번개가 차이의 강도들 사이에서 솟아나지만, 그러나 그 번개가 보이지 않고, 감각적이지 않는 어두운 예고자(un précurseur sombre)에 의해 진행된다. 이 어두운 예고자는 미리 앞서 번개의 반대로 움푹 패인 길을 규정한다. 왜냐하면 그 어두운 예고자는 우선 차이 계열들의 소통에 대한 동인(l’agent, 작동자)이기 때문이다. (135, 494)
어두운 예고자의 작용(l’action) 아래서 계열들의 소통 방식은 여러 현상들을 부추기는데, 계열들 사이의 짝짓기([le] couplage) 현상, 체계 안에서 내적 공명([la] résonance interne)의 현상, 기초계열들 그 자체를 넘쳐나게 하는 확대의 형식으로 강제된 운동([le] mouvement forcé)의 현상 등을 부추긴다. .. 왜냐하면 질이라는 것은 언제나 깊이로부터 나오는 기호(un signe) 또는 사건(un événement).. 이외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136/494-495) [내부의 덩이가 절편화하면서 깊이에서 솟아나려는 과정에서, 가깝게 짝짓기도 있고, 멀리 있지만 공명도 있고, 또한 절편자체의 확장하는 힘을 키우고 커나간다. - 솟아남이 기호 또는 사건이며, 양태의 일부를 드러내는 것이다. (52VKD) ]
역동론들은 절대로 주체 없이 있지 않다. 또한 역동론들은 주체들로서 초벌들만을 지니고, 아직 성질들이 부여되지 않았고 조합(composés) 되지도 않았으며, 능동자들(agents)이라기보다 수동자들(patients)이며, 내적 공명의 압력 또는 강제된 운동의 확대를 지탱할 수 있을 뿐이다. .. 이미 배태학의 진실에 따르면 배아만이 지탱할 수 있는 운동들이 있다. 여기서 애벌레[유충]와 다른 주체는 없다. 아마도 악몽 자체가 운동들의 하나일 수 있다. 그 운동을 깨어있는 인간도 심지어는 꿈꾸는 자도(ni même le rêveur) 지탱[감당]할 수 없지만, 단지 꿈꾸지 않고 잠든자, 깊은 수면의 잠든자 만이 운동을 감당 할 수 있다. (136, 495) [잠과 꿈의 관계는 여러 학설이 있다. 한 가지 합의된 것은 잠자는 동안 의식은 스스로 정리를 한다는 것이다. 그 정리는 현실의 우선순위와는 다를 지라도 생명자체의 정리방식을 따르는 것이라고들 한다. (52VKD)]
<(3, 4, 역동론); 다양체의 생명 활동>
[위에서 말했던] 규정들의 일체: 개별화의 장, 강도 차이들의 계열들[.. 강, 목, 과, 속, 종], 어두운 예고자, 짝짓기, 공명, 강제된 운동, 애벌레 주체, 시공간적 역동론들 등, 이 일체는 얼마나?, 누가?, 어떻게?, 어디에서?, 언제? 라는 질문들에 해당하는 다양한 좌표들을 그린다. 이 좌표들은 질문들에게 경험적인 예를 저 넘어서 초월적인 범위를 부여한다. 그 결과로 규정들의 일체는 물리학적 체계 또는 생물학적 체계에서 빌려온 이런 저런 예에 전혀 묶여있진 않다. 오히려 체계 일반의 범주들을 진술한다. (136-137, 496) [다양체는 유클리드 공간과 같은 하나의 좌표도 아니고 그 좌표와 닮지도 않았으며, 어쩌면 행렬(유체역학)의 좌표 등처럼 다른 좌표이다. 즉 4차원 좌료는 3차원좌표 보태기 시간(속도)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4차의 의식차원은 벤 다이어그램(Venn diagram)으로 표현하더라도 표시되지 않은 두 가지 경우가 있다. 아마도 하나는 어제 다른 하나는 아제라는 운동성을 부여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이제는 잘려진 존재가 아니라 연산자를 갖는 현존이라고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모든 현존자는 연산자로서 관계맺음(지속)을 지니고 있고 과정으로서 생성하며, 노력을 통해 욕망을 실현하고자 한다. 그 실현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지만 개인은 주체로서 만들려고(완수하려고) 한다. (52VKD)]
물리학적 실험이 그러한 것과 같이, 프루스트(Marcel Proust, 1871-1922) 유형의 심리적인 경험 또한 부자유스런 계열들의 소통, 어두운 예고자의 개입, 이[예고자]로부터 흘러나오는 공명들과 강제된 운동들을 함축하고 있다. .. [예를 들어] 섬의 지리학적 역동론(대륙과 단절된 섬과 물밖에 솟아나는 섬)은 무인도(표류의 단절과 기원적 재시작)에 관하여 인간의 신화적 역동론 속에서 재파악되었다. 페렌치(Sandor Ferenczi 1873-1933)도 성생활 속에서 어떻게 세포요소들의 신체적 역동론이 기관들의 생물학적 역동론에서 그리고 심지어는 인격들의 심리적 역동론 속에서 재파악되었는지를 제시하였다. (137, 496)
... 낯선 극장이 공간과 시간을 흔들면서(작동하면서), 또 영혼에 직접적으로 작동하면서, 애벌레들을 배우들로서 삼고서, 순수한 규정[결정]들을 이루는데, - 이를 위해서 아르토(Antonin Artaud 1896-1948) “잔혹함”이란 단어를 선택했다. 이 추상적인 선들은, 이런저런 개념(tel concept)에 상응하는 드라마를 형성하고, 동시에 개념의 종별화(la spécification)와 분할(la division)을 동시에 이끌어내는 드라마를 형성한다. 이것은 과학적 인식이며, 그러나 또한 꿈이며, 또한 드라마화하는 사물들 자체들이다. (137, 497) [들뢰즈, 개념은 과학적 인식에, 생명의 종차 발생은 꿈에, 그리고 형성체들의 분류는 플라톤 소피스트편의 분할에 대응시킨 것 같다.]
개념이 주어지면, 사람들은 항상 그 개념의 드라마를 탐구할 수 있다. 그리고 드라마적인 역동론들이 없는 재현의 세계 속에서는 그 어떤 개념도 결코 분할되지도 않을 것이고 종별화되지도 않을 것이다. 여기서 드라마적 역동론이란 가능한 모든 재현[표상]아래 물질적 체계 속에서 이렇게 개념을 규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137, 497)
“누가?,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얼마나?, 참된 것을 원하는가?”라고 우리가 묻자마자, 우리는 애벌레 주체들(예를 들어, 질투)과 시공간적 역동론들(어떤 시간, 어떤 장소에.. 시시각각 지표들과 기호들을 축적하는 ..)에게 임무를 할당한다. .. 재현 속에서 진리의 개념은 두 방향으로 분할되고, ... 우리는 직관과 귀납의 전통적 이론들 아래서 최조(l'inquisition)와 고백(l'aveu)의 역동론들과 고발과 조사의 역동론들을 어려움 없이 발견한다. 이 역동론들은 개념의 이론적 분할을 규정하는 방식으로 침묵하며 드라마틱하게 작업한다. (137-138, 497-498) [전통적 직관(플라톤주의)은 최조(l'inquisition, 마녀재판)하거나 자백(l'aveu, 허위진술)하게 한다(종교재판과 같다). 귀납은 비방(l'accusation, 이설)과 탐문(l'enquête, 차이제시)을 한다.]
* (5. 역동론)
[<역동론의 이데아: 질화, 세분화, 잠재적(실재적)>]
우리가 드라마라고 부르는 것은 특히 칸트의 도식(le schéma)과 비슷하다. 왜냐하면 칸트가 말한 도식이란 곧 공간과 시간의 선천적(a priori) 규정인데, 마치 개념에 상응하는 것과 같다. 가장 짧은 것(le plus court)은 직선의 드라마이고, 직선의 꿈 또는 직선의 악몽이다. 그것은 정확히 선(線, la ligne)의 개념을 직선과 곡선으로 나누고(분할하고), 게다가 한계들에 대한 아르키메데스의 개념작업에서 곡선을 직선을 함수로 해서 측정하게 하는 역동론이다. (138, 498)
어떤 방식으로 보면, 후기칸트주의는 감춰진 예술의 불가사의를 밝히고자 시도하였는데, 이에 따르면, 시공간적 역동적 결정[규정]들은, 규정들이 진실로 개념과는 전혀 다른 본성을 지니고 있다고 할지라도, 개념을 드라마화 할 힘을 가지고 있다. (138, 499) [후기칸트주의자들은 개념의 운동과 전개방식을 하나 또는 추상(절대)로 통일시키려 했다. 그런데 헤겔이 죽은 뒤(1831)에는 과학이 내부로도 그리고 세분화로도 이중화되어 가면서, 신칸트학파는 추상의 통일보다 의미의 통일성으로 또는 방법적 통일성(물리학화, 드라마화)의 길로 간다. 어째거나 자연이나 생명이나 사물들이나 표면으로 등장한 것을 다루어야 한다고 믿는 주지주의는 다루는(재고 세는) 방법에서 통일과학이 있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간다. 그러나 무한이라는 문제가 통일 또는 하나의 잣대라는 것을 무너뜨리게 될 것이다. (52VKD)]
아마도 [이 문제에 대한] 답은 몇몇 후기 칸트주의자들이 지적했던 방향 속에 있을 것이다: 순수 시공간적 역동론들은 개념들을 드라마화 할 힘을 가지고 있는데, 왜냐하면 우선 그들은 이데아들(les Idées)을 현실화하고 구현[육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가설을 증명하기 위하여 출발점으로 다룰 것이다. (138, 499) [플라톤주의로서 이들은 이데아에 실재성을 또다시 강요할 것이다. 그 실재성이 국가이고 나중에는 자본이 될 것이다.]
이데아에는 두 가지 중요한 특성이 있다. 한편으로 이데아는 감각적 형식과 기능이 배재된 요소들로, 오로지 자기들끼리 상호적인 결정에 의해서만 존재하는 요소들로 구성된 미분적 연관들의 집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차등적 관계들은 dx/dy[미분]라는 유형으로 표현될 수 있다. ... 이리하여 우리는 충족이유의 첫째 측면으로서 상호적 결정(détermination réciproque)의 원리를 제시하기에 이른다. (138-139, 499)
다른 한편으로 이 미분적[차등적] 연관에 “특이성들(singularités)”의 분배들(des distributions)이, 특정적인 점들과 일상적인 점들의 배치들(des répartitions 할당, 분포)이 상응한다. 이 때에 특정적인 점들은 모든 일상적인 점들 위에서 또 다른 특이성에 인접하게 될 때까지 확장될 수 있는 하나의 계열을 생성한다. 이 특이성들은 이상적 사건들(des événements idéaux)이다. .. 사람들은 이데아의 완전한 결정이 또는 사물이 이데아로 완전한 결정이 이렇게 작용[조작]되어, 충족 이유의 둘째 측면을 구성한다. (139, 500)
따라서 이데아는 다양체처럼 나타난다. 이 다양체는 두 가지 의미(deux sens)를 지나가야(가로질러야)만 하는데, 하나는 차등적인 연관들의 변이라는 관점이고 다른 하나는 연관들의 몇몇 가치들에 상응하는 특이성들의 할당[분포]이라는 관점이다. 우리가 앞에서 제2화법이라고 불렀던 방식은 이러한 이중 가로지름 또는 상호적이고 완전한 이중 결정과 혼동되어 있다. (139, 500)
[이러한 사실로부터] 여러 가지 귀결들이 흘러나온다. 첫째로 이렇게 정의된 이데아는 어떠한 현실성도 취급하지 않는다[절대 공간의 이데아]. 이 이데아는 잠재적이고, 순수 잠재성이다. (139, 500-501)
[둘째로] 이데아는 미분적[세분적] 연관들이 종에서 또는 분리된 성질에서 육화되는 한에서만, 그리고 동반하는 특이성들이 성질에 상응하는 너비 속에서 육화되는 하에서만, 현실화될 뿐이다[개체성은 불연속이다]. 하나의 종은 유전자들 사이에 미분적 연관들로 만들어지는(이루어지는)데, 마치 유기체적 부분들이 육화된 특이성들로 만들어지는 것과 같다(참죄 장소들loci). (140, 501) [수학적 도형으로 이데아는 잠재성이다 – 단지 현실속에 잠재성이 들어있다고 한다. 둘째로 생명체로서 이데아는 신체와 성질을 지닐 때만 현실화된다. (52VKD)]
사실 성질부여(la quaification)와 분열(la partition)이 세분화의 두 측면을 구성한다면, 사람들은 이데아가 세분화에 의해서 스스로를 현실화한다고 말할 것이다. 이데아가[자연이] 스스로 현실화하기 위하여, 스스로를 세분화하는 것이다. 이데아 그 자체로서 그리고 이데아의 잠재성 속에서는, 따라서 이데아는 완전히 미분화되어(indifférenciée)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데아[생명체의 이데아]는 비결정적인 것이 전혀 아니다. 가장 큰 중요성을 두 가지 작업과정에 결합시켜야 한다. [두 가지는] 즉 차이화하다(différentier)와 세분화하다(différencier) 라는 t/c로 구별되는 선(le trait distinctif t/c)에 의해 표시된다. (140, 501) [형태를 갖기 전에는 세분화되어 있지 않지만, 성질과 너비를 갖춘 신체는 세분화의 길을 걸었기에 차이화 된다. 즉 형상들 사이에 차이가 있고 특이성을 지니고 있다. 특이성은 내재적으로 세분화의 과정을, 외부적으로 차이의 성질을 지닌다.]
만일 충만하게 차이화된 이데아의 상태를 판명(distinct)이라 부르고, 현실화된, 즉 세분화된 이데아의 상태를 분명(claire 명석)이라 부른다면, 우리는 분명과 판명의 비례적 규칙과 단절해야 한다. 말하자면 이데아 그 자체로서는 분명하고 판명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판명하고 애매하다(distinct et obscure). 이러한 의미에서 이데아는 디오니소스적이다. (140, 502) [외적으로 판명하지만 내적으로 애매하고, 심지어는 도취적이기에 디오니소스적이라고 할 수 있다. 내재적인 ‘방황하는 원인’은 외적으로 낯설지만 내재적으로는 감화와 공명이 있고, 그 자체가 권능이며, 자발성이며, 능동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을 발현과정과 더불어 하나(단위)로서 창발하는 것은 어렵고 드물다. (52VKD)]
우리는 조건들을 정확히 해야만 한다. 그 조건들 아래서 “잠재적”(virtuel)이라는 단어가 엄격하게 사용될 수 있다(예를 들어 벩송이 잠재적인 다양체와 현실적인 다수성을 구분하면서 잠재적이란 단어를 썼던 방식처럼, 또는 요즈음 뤼에르가 잠재적이라는 단어를 쓰는 방식처럼). 잠재적은 실재적(réel)과 대립하지 않는다. 실재적과 대립하는 것은 가능적(possible)이다. 잠재적은 현실적(actuel)과 대립하며, 바로 이런 이유로 해서 잠재적은 충만한 실재성(une pleine réalité)을 소유한다. (141, 502) .
이 모든 점을 고려할 때, 잠재적인 것은 정식(la formule)에 응답하는데, 그 정식에 의해 프루스트는 경험적 상태들을 정의한다: “현실적이지 않는 실재적인 것들(réels)이 있고, 추상적이지 않은 이상적인들(idéaux)이 있다.” (141, 503) - [들뢰즈의 “바틀비 또는 상투어(la formule)”(1989)을 참조할 수 있다.]
잠재적인 것과 가능적인 것은 다양한 방식으로 대립된다. 한편으로 가능적인 것은 실재적인 것이 그 닮음[유사]에 따라 구성되는 대로 있다. .. 가능적인 것은 단지 사물의 재현의 원리로서 개념일 뿐이다. (141, 503) [소의 종류들이 닮은 것은 실재적이 구성하는 것에 따라서 성립하며, 소와 개가 다른 것은 유사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소’는 류적 개념이다. 퍼어스의 분류처럼 상징(symbole, 기호)의 기능(fonction)을 한다.]
반대로[다른 한편] 잠재적인 것은 이데아(l’Idée)에 속한다. 현실적인 것에 닮지도 않았고, 현실적인 것이 잠재적인 것에도 닮지 않았다. 이데아는 닮음 없는 이미지이다. 그런데 잠재적인 것은 닮음(유사)에 의해서 현실화하지도 않고, 오히려 분화(divergence, 발산)와 세분화(différenciation)에 의해 현실화한다. (141, 503-504) [생명과 영혼은 발산과 세분화이다]
잠재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의 차이는 한번은 표상[재현] 속에서 제기되고 다른 한편은 재현 밖에서 제기되는 동일자(le Même)의 차이가 아니며, 오히려 한번은 이데아 속에서 나타나는 대로 다른 한번은 이데아의 현실화 과정 속에서 전혀 달리 제기되는 타자(l’Autre)의 차이이다. (141, 504) [밖에서 기하학은 데카르트(Descartes, 1596-1650), 라이프니츠, 뉴턴처럼, 접선을 다룬다. 안에서 기하학은 데자르그(Desargues, 1591-1661)처럼 사영기하학을 다룬다.]
라이프니츠(Gottfrid Leibniz, 1646-1716)의 범상찮은(extraordinaire) 세계는 우리를 관념적 연속체(un continuum idéel)의 앞에다가 놓는다. 라이프니트에 따르면 이런 연속성은 동질성에 의해 전혀 정의되지 않고, 오히려 차이있는 연관의 모든 변이들의 공존에 의해서 또 이 변이들에 상응하는 특이성들의 분배에 의해서 정의된다. 이러한 세계의 상태는 웅성거림, 대양, 물레방아, 기절(氣絕 l'évanouissement), 심지어는 겉보기에 아폴론적인 철학 아래에서 으르렁거리는 디오니소스적 깊이를 증거하는 도취(陶醉 l'ivresse)라는 이미지로 표현된다. (141, 504) [미분계수는 수라기보다 에너지체로서, 각 미분점들은 특이성들을 지닌(게다가 지속을 지닌) 연속성의 단위이다. 이 단위 속에는 혼절, 도취 등도 포함된다.]
진실로 불공가능(l’incompossible)과 공가능(le compossible)은 모순과 비모순과는 볼 필요가 전혀 없다. 아주 다른 것이 중요한 데, 발산(la divergence)과 수렴(la convergence)에 관한 것이다. 세계의 공가능성을 정의하는 것, 그것은 계열들의 수렴이며, 이 수렴의 각각은 특싱성에 인접에서 또 다른 특이성의 이웃에 까지 구축된다. 반면 세계들의 불공가능성은 이렇게 얻어진 계열들이 발산하는 순간[계기]에 일어난다. (141, 504-505)
따라서 세계들 중의 최상의 세계는, 연속성의 조건 아래서 말하자면 계열들의 수렴의 최대치의 조건 아래에서, 연관들과 특이성들의 최대치를 포함하는 세계이다. .. 라이프니츠는 세계란 그 세계를 포함하는 모나드들 바깥에서 현존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은 단자들을 창조하였다기보다 세계를 창조했다고 말한다(신이 아담을 창조했던 것이 아니라, 그 세계에서 아담이 죄지었다). (141, 505) - [신은 수렴의 세계를 창조하였는데, 그 세계에는 수렴된 공가능성의 특이성들(모나드)의 집합이기에 최상의 세계이다. 그 바깥은 특이성은 불공가능성으로 수학적(미적분)의 원리와 법칙에서 벗어나 있기에 더 이상 증거로서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여기서 라이프니츠의 세계는 배제의 원리가 들어있다. 아담이 수렴세계 바깥은 나갔다고 보는 것이다. 라이프니츠에서 신은 완전하고 신이 만든 세계도 완전하다. 그런데 아담이 딴짓했다. 딴 짓이란 수렴 속이 아니라 발산이며, 세분화이다. (52VKE)]
개별화의 과정이란 관념적 세계의 연관들과 특이성들을, 개별자들 사이의 간격을 효과적으로 채워나가는 성질들과 너비들 속에서, 육화[체화]하도록 규정한다. 연관들과 특이성들로 심어져 있는 “바닥”[깊이, 속]을 편력(le parcours, 관통), 이것들의 개별적 본질로부터 흘러나오는 구성, 성질들과 너비들로 이어지는 결정[규정], 이것들은 제2화법의 방법(une méthode device-diction)의 일체를 형성한다. 이 방법은 다양체의 이론을 구성하고 또 여전히 “경우에 따라서(sous le cas)” [사건을] 포섭하는데 있다. (143, 506)
* [소결론: (143-144, 506-508]
차이/차히(différent/ciation 미분화/세분화)라는 용어는 단순하게 수학적-생물학 복합체를 표현할 뿐만 아니라, 대상의 두 절반처럼 전 우주론의 조건을 표현한다. 먼저 미분화(différentiation)는 선 개체적 토대의 본성을 표현하며, 이 토대는 보편적 추상으로 전혀 환원되지 않고 오히려 가상적(virtuelle) 다양체들 또는 이데아들을 특징짓는 연관들과 특이성들을 허용한다. 세분화(différenciation)은 성질들과 너비들 속에서, 즉 마치 표상의 대상들과 같은 종들과 부분들 속에서 연관들과 특이성들의 접속을 표현한다. 따라서 세분화의 두 측면은 미분화의 두 측면과 대응하지만, 서로에게 닮은 것은 아니다: 이데아 스스로 현실화하도록 하고 또 이처럼 스스로 구체화하도록 하는 이데아를 규정하는 제3자(tiers)가 필요하다. 우리는, 어떻게 개별화하는 강도의 장(영역)들이 – 이 장들을 활동성의 상태로 시작하게 했던 선구자들(les précurseurs)과 함께, 특이성들의 주위에서 스스로 구성되었던 애벌레 주체들(les sujets larvaires)과 함께, 또 그 체계를 채웠던 역동론들과 함께, - 이런 역할을 실제로 했는지를 제시하고자 시도했다.
이 완전한(가득찬) 용어는 미분화/세분화(différent/ciation)의 용어이다. 이데아들을 대상의 세분화된 측면들 안에서 현실화되기를 규정하는 것은 개별화의 장들 가운데 있는 시-공의 역동론들이다. 한 개념이 표상[재현]속에서 주어질 때, 우리는 우리가 발견한 정도에서, 개념아래 작동하는 이데아들, 개별화라는 장 또는 장들, 이데아를 감싸는 체계 또는 체계들, 이데아를 구체화하도록 규정하는 역동론들 만을 안다[배운다]. 이러한 조건 하에서만 우리는 개념의 분할의 불가사의를 침투할 수 있다. 이 모든 조건들이 드라마화를 정의하며(définir, 定義), 어떤 경우에(en quel cas), 누가(qui), 어떻게(comment), 얼마나(combien)? 등을 정의한다.
가장 짧은 것(le plus court)은 바른 이라는 개념의 도식(le schème du concept de droite) 일 뿐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선의 이데아의 드라마이고, 직선과 곡선의 미분계수이며, 침묵 속에서 작용하는 역동론이기 때문이다.
명석과 판명은 표상의 아폴론적 세계에서 개념의 주장(la prétention, 자만)이다. 그러나 그 표상[재현] 아래에 항상 이데아가 있고, 이데아의 판명-모호한 토대[깊이]가 있고, 모든 로고스 아래에 드라마(un “drama”)가 있다. (143-144, 506-508) [마지막 문단 전체가 한 문단인데 네 단락을 나눈 것은 새로 번역하면서 이다. (52UKA)]
(14:28, 52VKE) (재편집 13:12, 52VFF),
#인명록 ***
469 그리스 아테네 철학자 소크라테스(Socrate, Σωκράτης 기원전 469-399)(70살)
427 플라톤*(Platon, Πλάτων, 본명 아리스토클레스 Aristoclès, 기원전 427-347)(80살),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제자. 우주론을 이데아, 데미우르고스, 플라노메네 아이티아, 세 위상으로 전개한다. [(소크라테스 나이 42살이었고) 그리고 플라톤이 18년 후에 배울 수 있을 있었다면, 소크라테스 나이 60살이었으며 10여년을 따라다니며 배울 수 있었을 것이다.]
384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 Aristoteles, 384-322 av. J.-C.)(62살) 플라톤의 제자, 마케도니아 출신 철학자. 사물의 탐구를 위한 네 가지 방식을 형상인, 목적인, 효과인, 질료인으로 구분한다.
287 아르키메데스(Archimedes 기원전 287-212, 시실리 섬의 과학자) 원리 발견 - 유레가(Eureka!, j'ai trouvé!, 알았다! 찾았다!)
O
1646 라이프니쯔(Gottfrid Leibniz, 1646-1716) 이 다재 다능한 철학자는 프랑스에 거주한 시간이 많아서 많은 작품을 프랑스어로 썼다. 그리고 그는 뉴턴과 서로 따로 미적분을 발명하였다. 새로운 논리계산(명제계산)을 발명하고자 했다.
1724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현재로는 폴란드보다 더 동쪽에 있는 쾨니히스베르그 출신의 프러시아 공화국의 철학자이다. 인간의 표상적 인식의 조건을 규정하고, 도덕적 이성의 신에게 종속을 요청하고, 미적으로 신의 작업의 숭고함에 경건하게 기도하는 듯이 긍정한 프로테스탄트 철학을 구성하였다.
1770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 프랑스 혁명에서 인민의 자유를 너머 멀리서 바라보면서 인간의 정신이 신의 인격에 이를 것으로 만든 또 하나의 토마스 주의자로 철학을 하였다. 그는 프러시아 통일의 영광을 만들기 위하여 루터파 교리에 맞추어 신의 절대성을 강조한 근대판 교부 철학자이다.
1859 베르그송* (Henri Bergson, 1859-1941) 유태인 출신의 프랑스 본성내재주의 철학자. 훗설과 달리 현상보다 강도성의 근원에 대한 탐문을 철학의 주요 관심으로 보았다. 그는 철학의 방식은 (내재적) 체험의 정확성과 문제 제기에 있다고 보았다.
1871 프루스트(Marcel Proust, 1871-1922)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À la recherche du temps perdu)(1913-1928)를 쓴 프랑스의 소설가. 이 소설은 1,000매를 넘는 대작으로 3인칭 수법으로 저술되어 있다. 장 상퇴유(Jean Santeuil, 1952) , 생트 뵈브에 반대하여(Contre Sainte-Beuve, 1954)
1873 페렌치(Sandor Ferenczi 1873-1933) 프로이트는 “성적과정에 대해 정신분석적 관점을 생물학에 적용하였고, 또한 이를 넘어서 유기체적(신체적) 전체의 삶의 과정에 적용하였다”고 평가한다.
1896 아르토(Antonin Artaud 1896-1948), 프랑스 작가, Le Théâtre et son Double 1938에서 잔혹극(théâtre de la cruauté)의 개념을 발명한 자이다.
1902 뤼이에(Raymond Ruyer, 1902-1987) 프랑스 철학자 ENS 출신, 사이버네틱전공자. Éléments de psycho-biologie, 1946). 의식의 역설과 자동주의의 한계(Paradoxes de la conscience et limites de l'automatisme (Albin Michel, 1960 puis 1966)
1925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 구조는 선전제가 아니라, 차이가 만들어낸 여러 양태들이다. 이 차이의 본래적 생산은 '미친 생성'으로 디오니소적 내재적 부피(괴물 덩어리)이다. 이것은 욕망의 덩어리로 시간 지속에서 생성중인 자연이다. 이 단일성이고 특이성인 존재는 다양한 존재자들을 (위하여)대신하여 고함을 지른다. 이것이 대존재(자연)의 함성이다.
[1967년, 들뢰즈의 “La méthode de dramatisation(드라마화의 방법)” 프랑스 철학회(SFP; Société française de philosophie)에서 Séance du 28 janvier 1967. 발표. / 그리고 토론자들의 명단과 주관심의 내용은 아래 있다.
[이 명단을 보면 토론자가 들뢰즈보다 25년에서 35년 앞선 철학자들이다. 이들이 한마디씩 질문하고 들뢰즈가 응답했다는 것은 들뢰즈 철학에서 새로운 장을 여는 극장이다. 선배 철학자들 중에서 사르트르(Sartre, 1905-1980)는 시내(저자)로 나갔으니 참석하지 않았을 것이고, 메를로-퐁티(1908-1961), 바슐라르(Gaston Bachelard, 1884-1962), 꼬이레(Alexandre Koyré 1892-1964)는 자연으로 돌아갔으니 참석 못했을 것이고, 이뽈리트(Jean Hyppolite 1907-1968)는 아마도 나이답지 않게 쇠잔해서 못 참석했을 것이다. 그러면 참석하지 못한 철학자들로서는 게루(Marcial Gueroult 1891-1978)와 깡길렘(Georges Canguilhem, 1904-1995) 정도 일 것이고, 라깡(Jaques Lacan, 1901-1981)과 알뛰세(Louis Althusser, 1918-1990)는 관심 차히로 참석 않을 수 있다. 그리고 나이 상으로 푸꼬(Michel Foucault, 1926-1984)[마흔하나],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서른일곱] 등은 뒷자리에 참석했을 수도 있을 것이고, 아마도 바디우(Alain Badiou 1937-), 마셔레이(Pierre Macherey 1938-), 낭시(Jean-Luc Nancy, 1940-),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 1941-), 발리바르(Etienne Balibar, 1942- ) 등은 구체적 내용에 관심 갖기에는 자신들의 주제에 빠져 있었을 나이이다.]
알끼에(Ferdinand Alquié, 1906-1985) 프랑스 철학자. 데카르트와 칸트 전공자, 소르본 대학 교수. Les sciences mathématiques, les sciences de la matière et de la vie, 1936.
보프레(Jean Beaufret, 1907-1982) 프랑스 철학자. 현상학자. 하이데거와 우정을 가졌다. Introduction aux philosophies de l'existence, 1971.
불리강(Georges Louis Bouligand, 1889-1979) 프랑스 수학자이며 철학자. 해석기하학, 미분 기하학, 위상학, 고체 및 유체역학
브르통(Stanislas Breton, 1912-2005) 프랑스 신부, 철학자 신학자. La Passion du Christ et les philosophies, Teramo, Eco, 1954.
강디약(Maurice de Gandillac, 1906-2006) 프랑스 철학자, 철학사가. 중세철학, 18-19세기의 독일철학 프랑스어로 번역자. 들뢰즈는 존경의 뜻으로 “Les plages d’immanence”(in DRF)를 그에게 헌정했다. Le Siècle traversé. Souvenirs de neuf décennies, Albin Michel, Paris, 1998.
쟈끄 메를로-퐁티(Jacques Merleau-Ponty, 1916-2002), 프랑스 철학자. 인식론자 과학사가. 10대학교수, 모리스 메를로-퐁티의 사촌
노엘 물루(Noël Mouloud, 1914–1984) 릴 대학 철학 교수, 인식론의 구조적 접근. 프랑스 작가. Langage et structures : essais de logique et de séméiologie. 1969
필로넨코(Alexis Philonenko, 1932-2018) 프랑스 철학자, 철학사가. Jean-Jacques Rousseau et la pensée du malheur, 1984. Bergson ou De la philosophie comme science rigoureuse, 1994.
프르낭(Lucy Prenant, 1891-1978)[Rachel Soto] 알사스 유대인 가계 출신, 프랑스 여성 철학자. 라이프니츠 전집 편집자.
쉴(Pierre-Maxime Schuhl, 1902-1984) 알사스 유대계, 프랑스 철학자. 고대철학 전문가이며 플라톤 전문. 유대연구학회 회장을 지냈다. Machinisme et philosophie (1938 ; 1947)
수리오(Michel Souriau, 1891–1986) 프랑스 릴 대학 철학교수, 칸트 연구자. 영어를 불어로 번역, Le mystère de Mallarmé (1955)
윌모(Jean Ullmo, 1906-1980) 프랑스 과학철학자. 인식론자. il est un philosophe des sciences français.
쟝 발(Jean André Wahl, 1888-1974) 유대계 프랑스 철학자. 소르본 대학 교수. 시인. 미국철학, 데카르트, 플라톤, 실존주의(키에르케골, 사르트르) 연구. (52TMJ)]
[이 드라마화의 방법은 연극으로서 희극과 비극의 상연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연극은 극장에서 이다. 극장은 인간사도 마찬가지이고 철학사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의미에서 들뢰즈의 “극장”은 과정의 전개, 본질을 포함한 생성과 창발, 발명과 창안의 과정을 말하고자 한다. ‘무엇’이라는 본질의 질문은 플라톤주의자의 것이라면, 들뢰즈는 “이 무엇”이 무엇을 내포하면서 어떻게 언제 어디에서 표출(표현)하느냐는 문제를 다룬다. 역동론(le dynamisme)은 내재성의 발현과정의 드라마가 이루어지는 극장을 의미한다. (52TMJ)]
[[[ 이 논문을 읽으면서 흥미로운 것은 아마도 들뢰즈의 국가박사학위 논문의 요약 발표문 같다는 느낌이 든다. 쟁쟁한 선배 철학자들 앞에서 당당하게 새로운 개념화(la conception)의 전개 방식을 진술한다는 것은 이미 사유의 과정을 한번 스스로 전개해 본 다음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런 사유의 전개의 발단과 과정의 설명을 하자면, 당시까지 그의 년표를 따라가야 할 것이다.
드라마화 방법을 역동론들에서 끌어낸다는 것은 그의 철학적 사유의 확장의 토대(깊이)를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그해 이미 들뢰즈는 역동론들을 다루었다고 할 만큼 여러 논문들을 썼다.
우선 벩송의 차이 용어의 이중성(이원론이 아니다)에 대한 개념작업을 언급하자.
DI 2장에서 단위(l’unité)의 이중성으로 하나와 다자의 통일성이 있다. 그리고 동일성이라고 하는 개념에서 동일성과 정체성이 있다. 제3장에서는 자연(la nature)의 이중성과 단순성의 이중성이 있다. MM에서는 추억이란 용어 이중성이 있으며, 외연과 너비라는 이중성이 있다. EC 1장에서는 공연적과 동연적의 이중성이 있으며, 3장에서 자연의 통일성에 대한 이중성과 더불어, 질서라는 용어의 이중성이 있고, 제4장에는 상층 형이상학과 심층 형이상학의 존재의 이중성, 그리고 언어에서 실체의 명사와 실사의 동사의 이중성이 있다. PM의 “형이상학의 입문”(1903)에서는 실재성의 이중성이 있다. 게다가 의학자 끌로드 베르나르의 존경의 글(1913)에서는 이데아의 이중성이 있다. MR에서는 열망의 이중성, 영혼(정신)의 이중성이 있다. 이를 종합하여 설명하는 데는, 파장으로서 공감(공명), 열역학의 엔트로피 역행, 비유클리트 기하학의 관점, 유형학에 대립하는 위상학적 사유 등의 개별과학의 실증적 자료를 이용하면서 전체적으로는 의식, 기억, 생명, 도덕과 종교(행함) 속에는 자연이 있다. 그 자연은 자기에 의해 자기 생성의 길을 간다는 것이다. 이를 알고서 실행하는 자가 신비가 인데, 마치 스피노자가 이 길이 어렵고 또한 가는 사람도 드물다고 말한 것처럼, MR 마지막에서 이런 길은 어렵다고 한다. MR 4장에서 인류가 새로운 장(역)의 시대에 들어섰기에, 벩송이 생각하기에, 이제 인류는 이런 행함을 실행할 시대가 되었다는 것을 알리는 선지자의 역할을 한다. (52UKA)
*** 철학의 방법론은 방법서설을 제시하는 상층철학과 방법후설을 만드는 심층철학이 있다. 게다가 철학은 관념과 개념의 설정에서 사실들을 대입시켜보는 것이 아니라, 지식, 꿈, 사물, 사건, 생태 등의 과정을 겪고 난 뒤의 정리, 종합을 하면서, 현실을 교정, 수정, 결합하면서 조율하고 조정하는 것이다.
이번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에서 취임에 이르기까지 두 달 가량의 과정은 드라마이다. 드라마는 과정으로서 누가, 어디에서, 언제, 어떻게 등을 드러낸다. 이를 뭉퉁 그려 ‘이뭣꼬’라고 하는 것은 들뢰즈 표현으로 어린애나 서투른 노인이 하는 사고방식이다. 그런데 능란한 소피스트나 웅변가(수사학자)도 이런 사고에 빠진다. 철학자는 ‘이뭣꼬’를 대상화를 넘어서 위상화와 유형화를 만들어 가는 사유 방법이 있다. 이 후자가 드라마 방법이다. 조국 사건의 긴과정은 ‘이뭣꼬’에 대한 새로운 성찰을 제공한다. 인민이 대상화의 사고에서 위상화의 사유를 자각하는 과정이 인민의 성장이며, 권력에 대한 저항이고, 지배세력에 대한 항거와 항쟁이다. 이런 판을 공통기반위에 매끈한 공간처럼 퍼져나간다는 것은 지배권을 행사하는 집단이 표면위에 올라와 재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이뭣꼬?”는 과정를 추구하는 것이 욕망이며, 그 완수의 길을 가는 것이 사랑이다. 플라톤에는 이중성이 있어서 과정도 다루고 또 결과로서 개념의 정의도 시도한다. 한편으로 주지주의자들은 결과를 현실에 적용시키는 것을 지식이며 인식으로 여길 때, 그것은 데미우르고스의 작업의 일부이다. 다른 한편으로 아페이론을 어떻게 다루고 속삭이고 구슬를 것인가를 지식으로 보면 경험의 과정에서 교정과 수정을 거듭하는 과정으로 보인다. 전자는 “이뭣꼬”를 대상화, 상징화, 추상화의 길로 갔다면, 후자는 ‘이뭣꼬?“에 대상 이전에 강도 성질, 위상 등을 탐색하면서 역동성의 실재성과 현실화 과정(생성, 창안, 창조)를 다룬다. 이런 ’이뭣꼬‘를 플라톤에서 모자라는 점 하나는 강도이전의 상태 또는 아페이론이 자발성과 자생능력이 없는 것으로 설정되었다는 점이다. 철학사에서 이 내재성 또는 권능의 자발성이 자주, 자치, 자유를 실현하는 노력이라는 점을 강조한 철학자는 스피노자, 니체, 벩송, 들뢰즈일 것이다. 이런 실현 과정을 플라톤과 길을 달리하여 설명하려고 했던 이는 플로티노스 였다. 인간 또는 인격이라는 면에서 ’이뭣꼬‘는 아직 완성이나 완전태로 형성해 본적이 없다. 이것을 상징화 또는 추상화로서 형식상 설정해 보려는, 정의를 통하여, 노력을 한 이가 플라톤이었다. 용기, 경건, 아름다움, 정의(正義) 등을 정의(定義)하려 했다. 정의하려는 과정에서는 두 측면이 안과 밖이 드러난다. (52TMD)
‘이뭣꼬’를 조국 사태에 적용해 보면, 검사와 기레기들 사이에 암묵적을 넘어서 공공연한 거래관계가 있다. 검사가 찌그러기를 흘리면 기레기가 받아먹고, 기레기는 검사의 안면을 모르니까 상상과 공상으로 재현한다. [기레기의 수준은 대학 교양 수준이면 검사의 수준의 석사과정 수준이니, 검사가 제대로 흘려도 기레기가 알아들을 수 없을 수도 있다. 기레기가 공상을 보태는 경우는 어떤 사건에 기레기의 부탁을 들어주고 검사는 그것을 미끼로 기레기를 이용하고 있다는 낌새를 기레기가 낌새정도 알아채지 내용은 들어가 보지 않아서 모른다. 그래서 검사는 기레기를 우습게 놀이삼아 이용하는 것이다.] - 검사의 기소문을 기자가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볼 수 있다면 기레기가 검사의 견제세력이지만, 그것은 불가능하기에 기레기는 검사의 끄나플 밖에 될 수 없다. 검사의 견제가 되려면 사건의 과정과 대법원 판결에 검사들이 몇 명이 어떤 방식으로 논고를 하였는지를 검증해야 하는데, 기레기는 먹고 산다고 바빠서 할 수 없기도 하지만, 그 수준이 박사 수준이 되어야 하는데 그러러면 기자직을 손 놓고 과정을 탐구하는데 최소 8년은 더 공부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자는 검사의 견제자가 될 수 없고, 찌꺼기를 주워 먹는 하이에나가 될 수밖에 없다. 이에 비해 검사는 공부를 하다가 말고, 소피스트나 수사학자 처럼 자기 이익에 관해서는 잘 꾸려나간다. 왜냐하면 정보를 소유하기 때문이다. 이 둘이 아닌 별종 또는 철학자는 과정을 따라간다. 안과 밖을 구별하고 위상과 유형을 구별하고 현존과 존재를 구분한다. 그러다 보면 현실에서 논리가 이익이 아닐 경우에 누구를, 언제, 어디서, 어떻게 다루는 지를 구별한다. 철학자는 종교가나 과학도처럼 권력에 기생하지 않는다(철학사 속에 기생한 자들 훨씬 많지만, 그들을 후세 철학사들은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기레기는 이뭣꼬의 여러 단편들 중에 관념 또는 개념의 일부만을 얻어 듣는다. 그것은 일반에도 그리고 모든 과정에도 적용하려고 하니 오류를 범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럼에도 우리나라 기자를 오류를 범하면서 줄대기 하는 자가 승진하고 게다가 정계 진출까지 한다는 것이다(이게 참담하다). 검사는 자기 정보의 정확성보다 상대를 무너뜨리다는 의식으로 실행을 하는데 거의 성공하는 것 같이 보인다. 성공이 안되면 되게 하라고. 본인에게 모욕을 가하고, 주변에게 겁주고 의심하게하고, 나아가 사람들에 거짓정보를 흘리고 게다가 유우성 사건처럼 가짜 문서 조작에 협력까지 하는 양아치가 되었다. 이런 흘리기 작업, 모욕적 작업을 성공시킨 자들이 법무부 권력까지 장악하고 출세한다는 세상이라 한다(이것은 야만이다). 예전에 국정원이 회유하고 고문하고 조작하는 사건을 바깥에 모르다가, 검사들이 피고의 사실을 듣고 법정에서 그대로 이야기하라고 할 때만 해도 검사는 정의의 사도인 것 같이 보였다. 그들은 피고인을 고려한 것이라기보다 자기들 보다 못한 국정원의 문건을 그대로 기소하는 것에 자존심이 상했다고들 한다. 그래서 민주화 운동자들 편에 선 것처럼 보였지, 그들은 운동자들 편이 아니라 자기들 권력의 탐심이었다. 인민의 존엄성에 대한 생각이 없는 것은 고시 이후에 권력자로서 존경을 받는 삼을 살았었지 자유, 정의, 민주, 통일에는 관심이 없었다고들 한다. 그 검사일체의 끄나풀이 기레기였다.
검사체와 조국 사이에서 검사체의 독립과 청와대 입김의 관계인가? 사람들은 현재로서는 검사체가 더 강한 권력이라고 느낀다. 정치권은 검사체가 지니고 있는 내사 자료 속에 무엇이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움츠리고 있단다. 인민들이 전후 사정에 연관없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듣고 배우고, 나아가 법적이나 학문적 용어와 관계없이 의사를 표현한다. 플라톤의 대화체의 방식으로 보면, 여러 견해들이 나왔고, 각각의 견해들의 한계와 범위가 알려지고 그리고 뼈대가 되는 상반된 논의가 나온다. 이제 검사체의 활동은 (회유와 고문의 흔적을 지운) 국정원의 기소자료보다 인민에게 순서대로 알려지고 있다는 점이 국정원시대와 다르다. 그리고 수사학자나 논쟁가의 견해의 유형에 따라, 그 심층의 위상이 무엇인지가 점점 밝혀진다. 즉 학계의 견해들도 위상이 드러난다. 그 위상의 바탕은 역사적 경험들의 조건들이 깔려 있다는 것을 눈치 챈 것도 인민들이다. 인민의 자각은 오랜 일제와 미국 제국주의의 행태들을 깨닫고 있는 중이다.
드라마는 전개되어가고 있다. 새한당과 민주당으로 대별된다. 그런데 새한당이 한 목소리인데 비해 민주당은 한 목소리가 아니다. 물론 국회의원 선거법 개정과 연관되어 있지만 민평당은 이미 갈라져 나온 부류가 있고(박지원 등), 그리고 바른 비래당은 바야흐로 쪼개지려고 하는 신호로서 하태경이 징계를 받았다고 한다. 게다가 정의당은 노회찬의 죽음이후 반짝이다가 유시민, 진중권, 심상정 등이 자기 이득을 다 취한 것 같다.
위상적으로 일제의 부역자와 숭일자들, 미국 제국주의에 따라 교회와 동성애, 뉴라이트와 일본기금 받는 학자들이 반대라는 한편 있고, 다른 한편에서 일본반대(노재팬), 독도수호, 남북교류, 평화통일, 조국지지 교수성명 등으로 등장한다.
인민이 배운 것이 있다. 예전에서 기소가 되면 스스로가 결백하다는 것을 인민들 자신이 밝혀야만 했다. 그래서 자료를 빼앗긴 피고인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 윤석렬의 조국 공격에서 <혐의 입증>을 검사체가 해야 한다. 덮어씌우기가 성공했던 시대가 가고 검사체가 입증해야 한다. 물론 조국이 청와대 권력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전선 싸움이 되고 있다. 그럼에도 인민은 배운다. 검사에게도 책임이 있고, 검사가 해야 할 적법이, 예전에는 무시했다고 하더라도, 있다는 것이다.
조국의 가정집을 11시간 압색 했다. 들뢰즈 표현대로 투쟁(lutte)과 전투(combat)에서 의식은 깨어나고 상승하는 것이 변증법이다. 인민은 소모적이고 파괴적인 전쟁(guerre)하려고 하지 않고, 변증법적 발전을 하는 투쟁과 전투를 한다. 전교조와 공무원 노조의 투쟁과 민중당의 투쟁은 인민의식의 표출, 자각, 새로운 생성, 달리 말하기, 달리 사유하기, 그리고 같잖은 생각이 당연하다는 세상이 될 것이다. (52TMD)
1967 “La méthode de dramatisation(극화의 방법)” 프랑스 철학회(SFP; Société française de philosophie)에서 발표. Séance du 28 janvier 1967. Exposé: Gilles Deleuze / Discussion : F. Alquié, J. Beaufret, S. Breton, M. de Gandillac, J. Merleau-Ponty, N. Mouloud, A. Philonenko, L. Prenant, P.-M. Schuhl, M. Souriau, J. Ullmo, J. Wahl. - Bulletin de la SFP, 61e année, n° 3, juillet-sept, 1967, pp. 89-118 출간. 그리고 L'île déserte et autres textes(2002), pp. 131-162에 재수록.
1967 푸꼬와 함께, 니체 비판전집(Kritische Gesamtausgabe) 불역본 총책임을 맡다.
1967 구조주의에 대한 인식(구조주의를 어떤 기준으로 재인식해야 할까?("A quoi reconnait-on le structualisme?" dans La Philosophie au XXe siecle(v.8), Hachette, 1973.)
1967 자허-마조흐의 소개(Presentation de Sacher-Masoch)를 출판(Minuit)하다. 또 1973년 10/18총서로 다시 출간되었다. 이 책은 마조히즘은 사디즘의 반대라는 견해를 뒤엎는 글이다.
1967 Rverser le platonisme -> Platon et le simulacre 1969 [의미의 논리]
1967 « Une théorie d'autrui ». (Michel Tournier), Critique, 1967 ; -> IV. Michel Tournier et le monde sans autrui.
1967 Deleuze (G.), Introduction à La Bête Humaine. Zola, OC VI, 1967. pp. 13-21. / « Introduction à La Bête humaine, in Zola, Les Oeuvres complets d’Emile Zola, Paris, Dnoel, Vol 6, pp. 13-21 -> V. Zola et la fêlure 1969
그리고 일련의 작업들에서 드라마화에서 나온 차이와 차히의 개념작업은 그의 논문 "벩송에서 차이의 개념작업(La conception de la différence chez Bergson)"(dans Les Etudes bergsoniennes 4, Paris, PUF, 1956, pp. 77-112.)과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게다가 드라마화의 개념작업과 같은 해 나온 구조주의에 대한 인식(「구조주의를 어떤 기준으로 재인식해야 할까?」("A quoi reconnait-on le structualisme?" dans La Philosophie au XXe siecle(v.8), Hachette, 1973.)도 참조해 보자. 그러면 벩송에서 공간/지속, 동일성/정체성, 동연적/공연적, 밖에서/안에서, 들뢰즈에서 차이/차히, 높이/깊이, 미분화/세분화, 동일반복/차히반복, 명령/창안, 사고/사유, 예언자(점쟁이)/선지자(탐색자), 스피노자에서 표현/내용, 작용/작동, 유일신/자연신, 박홍규에서 에이도스/아페이론, 동일자/방황하는 원인, 오르토스/노토스(윤구병), 불교에서 상좌부/대중부, 마실에서 인문주의/인도주의, 상품자유주의/인성자유주의, 등 이런 대비는 양립불가능한 모순관계도, 공통기원을 갖는 대립관계도 아니며, 방향과 강도(속도)가 다르다고 해야 할 것이다. (52UKA)
<20세기 후반 아리스토텔레스 연구의 이정표 구실을 한 연구들 가운데 하나로 발므(Balme)의 논문 “‘Genos and Eidos’ in Aristotle's Biology”(1962)를 들 수 있다.7) 이 논문에서 Balme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적 저술에서 genos와 eidos 두 개념이 유(genus)와 종(species)으로 쓰인다.. / (주7) D. Balme 1962, hienos and eidos in Aristotle's Biology , Classical Quaterly NS XII, 81-98 -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과 생물학에서 게노스와 에이도스의 쓰임」(논리연구 5집 1호, 조대호, 연세대)> [D M Balme, Classical Quarterly, N.S., 12 (1962), 87. / 발므(David Mowbray Balme 1912—1989) 영국 고전학 전공 교수, 대학 행정가.] (52UKA)
(18:19, 52VKE) (첨가, 19:16, 52VKF)